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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203

116. 아우를 위하여 아우를 위하여 -황석영 뭔가 네게 유익하고 힘이 될 말을 써 보내고 싶다. 네가 입대해 떠나간 이제 와서 우울한 고향 실정이나 우리의 지난 잘잘못을 들어 여기에 열거해 놓자는 건 아니야. 아무 얘기도 못해 주고 묵묵히 너를 전송했던 형의 답답한 마음을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우리가 지금쯤은 의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어떤 문제를 확실히 해두고, 또한 장래를 굳게 믿기 위하여 내 연애 이야기를 빌리기로 한다. 너는 십구 년 전에 내가 누구를 사랑한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아마 놀랄 거다. 따져봐. 내 열한 살 때가 아니냐. 에이, 이건 오히려 형의 달착지근한 구라를 읽게 됐군, 하며 던져 버리지 말구 읽어주렴. 너 영등포의 먼지 나는 공장 뒷길들이 생각나니. 생각날 거야, 너두 그 학교를 다녔으니.. 2022. 4. 8.
사이버 오디세이 사이버 오디세이 -신범순 정보의 새로운 환상 세계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정보의 수집과 처리 그리고 그것의 저장과 전달이라는 차원에서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제 수십 권의 책들을 몇 년에 걸쳐서 베끼고, 거기 쓰인 어떤 문구들에 매달려 감동하고 신음하며 질투하고 경쟁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소중하게 자신만이 독점하고 있던 문서와 책들, 비밀스러운 쪽지들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들이 개인의 서재와 한 가문(家門)의 문서 보관소 그리고 절과 학교, 국가의 은밀한 도서관들 주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보의 눈부신 속도는 빛처럼 그 모든 어두운 창고들을 비추고, 마치 태양 아래서 모든 것을 드러내는 풍경처럼 숨겨진 것들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빛처럼 빠른 정보의 속도에만 전.. 2022. 3. 16.
200. 미국의 문화를 생각한다. 미국문화를 생각한다. 성기조 우리의 문화와 전통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와 때때로 전통문화에 대한 논의가 일기도 한다. 묘하게도 전통문화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때를 점검해 보면 외세에 맥을 못 추던 때가 된다. 3 1운동이 있은 후, 만세만 부르면 독립은 저절로 될 줄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혹독한 총독정치에 질려 머리를 땅에 떨구고 기를 못 펴던 때, 일군(一群)의 문학자들은 문학을 통한 항일운동에 불을 당겼다. 한용운, 이상화 등 민족시인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 뒤 많은 사람들은 우리 시가(詩歌)의 전형적 형태인 시조부흥 운동에 정력을 쏟았다. 시조를 통한 민족정서의 표출로 민족정기가 회복되면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전통문화에 대한 논의였다. 1930년대.. 2022. 1. 21.
199. 돼지의 대덕 돼지의 대덕 / 설의식(1900~1954) 금년은 세차 간지로 정해니 풀어서 '돼지해'다. 부르기가 거북한 이름이다. 더럽고, 못나고, 먹기만 하고, 놀기만 하는 일체의 악명을 온통 돼지에게 돌리어 '돼지 같은 놈, 돼지 같은 놈' 하고 거세가 일치하야 나무라는 관계상, 어학만으로는 불쾌한 이름으로 정론이 되어 있다. 그렇게 불쾌하거든 애초에 쓰지 말 일이다. 쓴다고 할진대, 자 갑자, 을축으로부터 임술, 계해에 이르는 육갑의 노선은 수미일관이니 하는 수 없다. 요즈음 세태처럼 방편대로 뜯어 고치는 '뒤범벅'일 수는 없다. 성립이 급하다고 기정된 수의 법문을 즉석에서 고치는 '입법의원'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정인'의 호랑이로 고칠 수는 도저히 없는 노릇이다. 작년은 병술이니 '개'요, 재작년은 을유니 .. 2022. 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