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수필5105

무딘 칼 한 자루 무딘 칼 한 자루 / 박남주 수서역에서 광주송정역으로 가는 SRT 열차를 탔다. 사촌 형님의 부고를 받고 황망히 길을 나선 탓이라 두서없이 자리를 잡고 앉으니, 차장 밖은 오월의 싱그러움이 한창 펼쳐지고 있었다. 산야가 온통 옅은 초록에서 짙은 초록으로 물들었다. 모심기를 하려고 물을 담아 놓은 논과 누르스름하게 익어가는 보리밭이 어우러지는 들판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을 배경으로 SRT 열차는 빠르게 달렸다. 무엇이 그리 급해 사촌 형님은 인생 여행길에서 황급히 하차했을까. 비어 있는 형님의 빈자리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기차가 종착역에 닿으려면 한참을 달려야겠지만, 아직 내게 남은 역이 몇 정거장인지 나는 세지 않기로 했다. 휙휙 스치는 풍경 속에 오도카니 앉아 있으니, 시간이 .. 2023. 4. 29.
굽은 허리 굽은 허리 / 문선경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참전 흔적을 확인하고 싶다며 좀 알아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최근에 외할아버지에 대해 나와 많은 얘기를 한 후였다. 주로 할아버지의 허리에 관해서였다. 6.25전쟁 당시에 엄마는 어려서 할아버지의 참전 내용을 정확히 몰랐다. 이제야 마주할 마음이 생겼는지 할아버지의 참전 기록을 찾아달라고 한다. 병무청에서는 할아버지의 주민 번호가 없어 군번 조회가 어렵다고 했다. 병무청과 육군본부에 문의 전화를 하느라 몇 주를 헤맸다. 군번 조회를 재신청한 지 3주째, 거의 포기하고 있을 때에 병적 증명서를 찾아가라는 문자가 왔다.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굽은 허리였고, 항상 밭은기침을 했다. 외갓집에는 언제나 할아버지가 드실 한약 달이는 냄새가 났.. 2023. 4. 29.
주산역 이야기 주산역 이야기 / 임경희 이제 주산역에는 기차가 멈추어 서지 않는다. 장항선의 기차들은 이 역을 빠르게 스쳐 달려간다. 주산역은 장항선의 복선화, 개량화 흐름 속에서 오래전 폐역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기차역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오늘 나의 여행지는 주산역이다. 주산역을 오기 위해서 웅천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왔다. 벼르고 별러서 작정하고 도착한 곳이다. 오는 내내 만감이 교차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하는 시간이 흘러간 주산역 터에 막상 서보니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오른다. 인생의 가슴 저리는 사연이 있었고, 그래서 애써 외면했던 곳이다. 병풍 같은 산기슭 앞 위치했던 주산역은 모든 게 변해 있었다. 주산역은 비둘기호 기차만 오가는 간이역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영화세트장 같은 아주 작은 .. 2023. 4. 29.
물의 뿌리 물의 뿌리 & 제은숙 잠잠한 호수를 내려다본다.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처럼 물 한 그루가 천천히 흔들린다. 진흙 깊숙이 발을 걸고 굵은 둥치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가지 끝 어린 물 잎사귀들만 바람 소리에 화답한다. 저토록 푸른 물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 있을까. 쉽사리 속내를 보인 적이 없기에 겹겹의 결 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깊은 바닥에 어떤 마음으로 가라앉았는지 짐작할 수 없다. 얼마나 웅숭깊이 뿌리내려야 저렇듯 고요한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대지 속에 물의 씨앗이 잠들어 있었다. 껍질이 열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물길을 내고 굽이쳐 흘러 금세 거대한 물웅덩이가 되었을 터. 어쩔 수 없이 삼킨 무명들과 어쩌지 못해 뛰어든 이름들을 품으며 살아온 시간. 호수의 생이란 그저 마르지 않기 위해 .. 2023.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