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표 문화연필 -정희승
Ⅰ.
연필이 백지를 앞에 두고 살을 벗는다. 신성한 백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목욕재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죄악과 탐욕으로 물든 몸뚱이 그 자체를 벗어야 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움을 쓰기 위하여 비장한 마음으로 결국 몸을 벗는다.
아, 관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시체처럼 꼼짝없이 누워 지냈던가. 외롭구나. 정말 보고 싶구나. 짓누르는 어둠 밑에서 사향각시처럼 얼마나 자주 무겁게 탄식했던가. 세상으로 나서지 못하고 몸 안에서 맴돌다 결국 살이 되어버린 부질없는 독백과 회한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싱싱한 날것으로 살아나는 생살들, 그래 이제는 가거라. 죽어도 썩지 않는 향기로운 살점들아.
살을 저밀 때마다 신경들이 심하게 경련한다. 비릿한 근육들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린다. 떨어져나간 살점들은 방바닥에서 파닥거리기도 하고, 숭어처럼 허공으로 튀어 오르기도 한다. 얇게 뜬 생살일수록 칼의 푸른 서슬을 경쾌하게 차고 오른다. 간혹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빛의 물살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도 있다. 연필은 그렇게 자신의 몸에 갇힌 말(parole)들을 고통스럽게 썰어서 세상으로 내보낸다.
살을 벗은 자리에는 검고 견고한 중심, 광물질 침묵이 드러난다. 그 광맥에는 문법은 물론 모든 수사가 잠들어 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도, 말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파롤의 원천이 되는 무정형 랑그(langue)가 모든 빛깔을 갈무리 한 채 묻혀 있다.
연필은 자신의 피를 준(樽)에 담고, 살점을 조(俎)에 올려놓고, 물소 뿔잔을 높이 쳐들어 외친다.
사방에 엄정하게 도련을 쳐서 성역을 부동의 의지로 고수하고 있는 백지여. 신성한 공허지여! 이제, 칼날 같은 경계를 넘겠나이다. 그곳에 들게 하소서. 유목의 길을 허용하소서.
그러나 그곳을 지키는 사제는 조급하게 성지를 넘보는 순례자를 결코 환영하지 않는다. 불온한 방랑자가 신성한 땅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대는 아직도 요건을 갖추지 않았다. 이곳은 그대의 가쁜 숨결, 거칠고 부르튼 맨발로는 결코 들어올 수 없다. 하얀 잉어나 잡티 하나 없는 흰 소를 희생으로 요구하지 않겠다. 등에 성좌도를 짊어진 천년 묵은 거북을 요구하지도 않겠다. 그대, 진실로 이곳에 들기를 원한다면, 진실로 이곳에서 소멸되기를 꿈꾼다면, 중심의 중심으로 걸어오라. 그곳에 그대 몸을 싣고 오라.
바람이 분다. 사품에 백지 몇 장이 바람에 휩쓸려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 종이들이 팔랑거리다가 방 여기저기에 두서없이 떨어져 드넓은 사막으로 변한다. 갑자기 책상 위에는 아라비아와 고비 사막이, 방바닥에는 사하라 사막이 펼쳐진다. 연필은 오릭스나 림 영양도, 심지어 까마귀도 이미 오래 전부터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아라비아 사막의 어느 한 경계에 선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다. 모래 냄새를 맡은 낙타가 연필 속에서 길게 목을 빼고 코를 벌름거린다. 너무도 친밀하고 익숙한 냄새, 낙타는 발굽 밑에서 소금 덩어리가 잘게 부서지던 먼 기억을 회상하며 푸른 울음을 운다.
연필은 진실로 갈증의 의미를 안다. 책상 위에는 촛불이 소리 없이 타오르는데 광활한 사막을 앞에 두고 겸허한 마음으로 뼈를 깎는다. 언어의 검은 원형질들이 예리한 칼끝에서 갈려나간다. 사각사각……. 한 점으로 수렴되도록 언어의 원석을 조심스럽게 깎아낸다. 중심을 날카롭게 벼린다. 연필은 결국 그렇게 심마저 벗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살로 써서도 안 되고 살로 사랑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뼈로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오로지 중심의 중심, 몸과 언어의 소실점으로 글을 쓰고 사랑해야 한다.
Ⅱ.
사막은 죽은 땅이 아니다. 모래 속에는 척박한 환경에 적응한 다양한 식물들의 씨앗들이 묻혀 있다. 얼마나 오래 묻혀 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촉촉한 비의 음성으로 호명하면 씨앗들은 수천 년의 잠에서 깨어나 푸른 가지를 뻗고 꽃을 피워 벌들을 끌어들인다. 사막은 목마름과 기다림의 땅이다.
바람은 모래를 움직여 가벼운 알갱이와 무거운 알갱이로 분리해 놓는다. 그래서 모래 표면은 늘 잔물결로 뒤덮여 있다. 연필은 낙타를 가슴에 품고서 그 행간을 걸어간다. 알라의 백 번째 이름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낙타는 더 이상 탈것이 아니다. 가슴속에 살면서 신께 인도하는 자이다. 주술을 외우며 행간에 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신성한 땅에서는 오랫동안 숨죽였던 의미들이 초록의 눈을 뜬다.
사막은 수많은 빈 행과 빈 문단을 거느리고 스스로 높아져 무의미의 집적을 이루기도 한다. 그 중심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사구가 고요하게 소용돌이치고 있다. 바람이 직접 와 닿는 북쪽의 급격한 경사면에서는 끝없이 모래가 무너져 내린다. 그때마다 긴 여운을 남기며 모래가 운다. 명사(鳴沙)……. 그러나 완만한 반대쪽 능선은 게으르고 평온하다. 와디가 그런 바르한의 혼돈을 크게 휘감아 태극 문양을 그리며 느리게 흘러간다.
와디의 긴 꼬리가 끝나는 곳에는 넓은 모래 평원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서도 역시 바람은 수시로 지형을 바꿀 것이다.
연필은 모래언덕을 타고 평원 쪽으로 가면서 수많은 씨앗들을 깨운다. 히브리어로, 수메르어로, 히타이트어로, 알타이어로, 한족어로, 인도어로……. 씨앗이 가장 기뻐하는 언어로 이름을 불러준다.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에 씨앗들이 혼몽한 잠에서 깨어나 푸르게 일어선다.
그렇다. 걸어갈 때는 온통 그대만을 생각해야 한다. 아니 그대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벌써 숲이 들어서 있다.
가다가 지친 낙타에게 트리뷸러스 관목을 깨워 잎을 뜯어먹게 한다. 낙타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불볕에 달아오른 쉼표 그늘에 앉아, 지도를 펼치고 나침반으로 현 위치와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가늠해본다. 아직도 까마득하다. 너무 더워 칙칙한 자갈이 깔린, 지대가 낮은 곳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낙타가 원기를 회복하자 행을 바꾸어 플라야로 들어선다. 암염이 저지대를 따라 하얀 띠를 이루고 있다. 소금이 중심을 적실 때마다 살아 있음이 따끔거리고 아리다.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을 아프게 소모하는 일이다.
항상 모든 일이 순조롭고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필은 예찬하고 찬양하는 자이지 분에 넘치게 찬사를 받는 자가 아니다.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오를 피할 수 없다. 너무 촘촘하게 씨앗을 깨우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성기게 깨우기도 한다. 암염지대에서 분별없이 염생식물이 아닌 양꽃마리를 깨운 적도 있다. 그 꽃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엉뚱한 언어로 호명하여 아예 깨어나지 못한 씨앗도 있다. 숲과 숲 사이에 바람의 길을 내지 않고 무심코 지나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지워야 한다. 지울 때는 늘 머리를 사용한다. 연필의 머리는 생각하는 기관이 아니라 오로지 지우는 기관이다. 연필은 몸으로 생각하고 머리로 지운다. 지우는 행위는 결코 부질없고 쓸데없는 짓이 아니다. 잔혹한 파괴 행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생각을 가다듬어 바르게 다시 쓰기를 권장하는, 지극히 따뜻하고 자비로운 미덕이다. 지울 수 없다면 오류투성이의 사고와 문명을 어찌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쓰는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지워야 한다. 위대한 저 모래바람처럼. 생각하는 몸뚱어리 위에 지우개가 군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막은, 그 자체가 광활한 지우개이기 때문에 신성하다.
걷다보면 먼저 걸어간 연필들의 희미한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관목의 바짝 마른 둥치, 영양이나 낙타 뼈, 시대를 알 수 없는 패각, 심지어 백악기의 공룡 뼈도 보인다. 한때는 생기를 뿜으며 대지를 풍요롭게 해주었을 단어들. 얼마나 아프고 진실하게 썼으면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았을까?
응회암 능선을 타고 다소 높은 지대로 나오자 자갈과 거친 바위들이 깔린 거친 평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해가 기울어 조금 눈이 부시다. 이제 곧 성급한 별들이 다투어 뜨리라. 서둘러 쉴 만한 곳을 찾아야 한다. 손으로 빛을 가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밋밋한 구릉 위 너럭바위가 하룻밤 안식처로는 그만일 성부르다. 설핏한 햇살에 등황색으로 물들어 있어 아늑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니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있는 녀석이 눈에 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긴 꼬리에 짧고 뾰쪽한 주둥이를 가진 여우다. 이미 살이 썩어 뼈만 남아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서 엎드려 있었을까?
여우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바라보고 죽는다고 한다. 자세로 보아 북쪽 저 너머가 여우가 태어난 곳인 것 같다. 괜스레 조심스러워진다. 방향이 틀어질 것 같아 감히 만질 수도 없다. 고개를 끄덕이며 여우에게 우선권을 인정해주기로 한다. 가만히 여우의 뼈 옆에 노곤한 몸을 눕힌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방향만은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위의 따뜻한 기운이 등에 전해온다.
사랑아, 죽게 되면 나도 여우처럼 머리를 네 쪽으로 향할 것이다. 너는 내 그리움의 본적이며 내 영혼의 본향이니까. 지상에서 더 이상 너를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날이 온다면, 머리만이라도 너를 향할 것이다. 뼈만 남을지라도 끝까지 그 방향만을 고집하겠다. 만약 뼈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면, 나는 오로지 방향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도 여전히 그리움은 쓸모가 있을 것이다. 나의 방향은 시간을 극복할 것이니까.
여우가 응시하는 저 먼 하늘에 보랏빛 잔영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흔들린다. 시나브로 어두워져가는 빛의 우아한 망설임 속에 별 하나가 점점 자신의 존재를 밝게 드러낸다. 그 반짝임은 그리움보다도 멀고 깊다. 그리고 맑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