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계의 50년은 하천의 덧없는 꿈과도 같도다. 한 번 삶을 얻었거든 진멸치 않을 자가 어디 있으랴.”이마가와 요시모토 군이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오다 노부나가는 춤추며 아츠모리(平敦盛 : 일본 전통무악인코와가마이 중 한 공연)를 읊조린다. 그리고는 단숨에 군사를 이끌고 뛰쳐나간다.유명한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의 시작이다. (오케하자마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오와리의 멍청이’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 한 번의 싸움으로 일약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오다에게는 ‘성공’의 시작을 알리는 첫 싸움이었지만, 이 전투로 세상은 돌변하게 된다. 나비효과라고 해야 할까? 한 남자의 죽음으로 세상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동맹 그리고 배신 카이의 다케다 신겐,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가미 호조 우지야스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원래 다케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은 적대관계였는데, 신겐의 누나인 죠케이인을 아내로 맞이하며 긴장관계를 풀었다. 당시 이들은 서로의 ‘필요’가 있었기에 혈연이란 강력한 끈이 필요했다. 누나인 죠케이인이 죽자 신겐은 장남인 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를 요시모토의 딸과 결혼시킨다. 이 정도로 요시모토와 신겐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여기에 한 명 더 붙은 게 호조 우지야스다. 이 셋은 각자 치고받고 싸웠던 과거가 있었지만, 당장 필요에 의해 손을 잡고 삼국동맹을 체결하게 된다(이 셋은 모두 혈연관계로 맺어지는데, 이마가와 요시노부가 그 중심이다. 이마가와는 신겐의 매부 겸 사돈이 되고, 호조 우지야스의 매제가 된다)문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너무 일찍, 너무 허무하게 죽었다는 거였다. 지금의 시점으로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죽은 바보”정도의 평가를 받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나름 능력자였다. 전쟁도 잘했고, 내정도 잘 했고, 외교도 준수했기에 순식간에 세력이 불어나, 이마가와 가문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나도 이제 상경(上京)해서 전국구로 놀아야 하지 않겠어?”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이 당시 요시모토는 토토우미, 스루가, 미카와 3국을 가진 대영주였고, 다케다와 호조와는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뒤통수 맞을 걱정도 없었다.
“남자라면 상경이지!”라는 생각을 하는 게 당연했다. 요시모토는 실력도, 의지도, 기반도 다 갖춰져 있었다. 그렇게 요시모토는 상경 길에 올랐다. 3만의 병력을 끌어 모아(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2~3만 사이의 병력이다) 서쪽으로 길을 잡은 요시모토에게 2천의 오다 병력이 짓치고 들어온다. 악천후와 기습이라는 ‘변명’이 있지만, 죽음은 죽음이었다. 요시모토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다.
요시모토의 죽음에 신겐의 엉덩이가 들썩 거리기 시작했다. 우선, 다케다 신겐에 대한 변명을 하나 해보겠다.
당시 국제정세(?)는 요동쳤다. 요시모토가 죽자 그의 아들인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가 가문을 이어받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다케다와 이마가와 가문은 동맹의 틀을 지켰다(그 사이 이마가와 가문에서는 마츠다이라가 배신해 도쿠가와와 손을 잡았다). 그런데, 여기에 오다 노부나가가 끼어든다.
오케하자마 전투 전후로 오다 노부나가는 처가인 사이토 가문과 긴장관계였다.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죽은 뒤에는 이 긴장관계가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장인은 주인의 나라를 빼앗고, 사위는 처가랑 전쟁하고... 전국시대가 그랬다). 이렇게 되자 노부나가는 신겐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다. 이렇게 해서 노부나가의 양녀가 신겐의 4남인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에게 시집을 오게 된다.
이마가와를 버리고 오다와 손을 잡은 거다.이걸 국제정세의 변화 앞에 유연하게 대응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결과로 보면 전혀 아니었다. 신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스루가로 침공 이마가와군을 공격한다. 어제의 혈맹이 오늘의 적이 된다. 이 부분부터는 조금 복잡하니, 상황별로 나눠서 설명해 보겠다.
① 호조와의 관계“이 때 아니면 못 먹어! 남들이 먹기 전에 스루가를 먹어야 해!” “우리 동맹 아니었어?” “얘가 아직도 세상물정 모르네. 기회있을 때 먹는 게 장땡이야!” “너랑은 동맹 못하겠다.”
“뭐?”
“동맹이란 게 어려울 때 같이 돕고 살자는 건데, 나 어려울 때 너 나한테도 칼 꽂을 거 아냐?” “......”호조 우지야스는 신겐의 도움을 거절한다. 대신 이마가와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다. 아울러 신겐을 견제하기 위해 신겐의 숙적인 우에스기 겐신과의 동맹을 추진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에츠소 동맹(越相同盟)이다(겉으로 보면 대단한 것 같은데, 효과는 별로 없었다).
②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상황
(상략) ...이에야스와 아버지는 에이로쿠 11년(1568) 2월, 이마가와 일족의 내부에 불화가 일어났을 때 오이가와를 경계로 스루가와 토토우미의 영지를 분할하는 밀약을 맺었다. 토토우미의 이누이 성 성주 아마노 카게츠라가 내응한 것을 기화로 아버지는 이 밀약을 깨고, 신슈의 이다 성 성주대리 아키야마 노부토모를 시켜 미카와와 토토우미를 공격하게 했다. 그때 토토우미의 쿠노 성 성주 쿠노 무네요시, 우마후시츠카 성 성주 오가사와라 나가타다 등은 미카와의 츠쿠데 성 성주 오쿠다이라 타다요시와 더불어 노부토모의 군사를 맞아 악전고투했다.
청년 이에야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곧 출병하여 아키야마 노부토모를 격퇴하고, 신겐에게 밀약의 위반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보내, 이것으로 양가의 밀약은 파기되었다.
에이로쿠 12년 정월의 일이었다.(하략)
- 『대망』 中 발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은 신겐은 이마가와군을 격파한다. 이때 문제가 된 게토토우미의 영유권이다. 간단히 말해서 땅을 놓고 둘이 으르렁 댄 거다. 결국 도쿠가와는 신겐과의 연합을 포기하고, 이마가와 가문과 화친을 맺고 뒤로 빠지게 된다.
③ 이번엔 오다 노부나가
이마가와를 버리고 오다와 손을 잡은 신겐.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배신을 한다.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장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손을 잡고 오다의 등에 칼을 꽂은 거다.
온 사방에 적을 만들어 놓았다고 해야 할까? 국제정세가 급변한 건 알겠지만, 국가로서 최소한의 ‘신뢰’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케다 가문은 건재했다. 신겐이 있었고, 신겐이 육성한 기마군단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호조 우지야스가 죽기 전 유언으로 남긴 말이,
“겐신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신겐과 동맹을 맺어 재정비하라.”
라고 말했을까? 툭 까놓고 말해서 신겐의 전투력은 당대 최강이었다. 신겐이 치른 70여 회의 전투를 보면, 어딘가로 치고 들어가 싸운 전쟁이지 적이 치고 들어와 싸운 전쟁은 한 번도 없었다. 카이의 지형적 특징도 있겠지만, 신겐의 전투력과 적극적 공세전략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신겐의 전투력은 무시무시하다.”
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신겐이 계속 살아 있었다면, 이런 ‘배신’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 전국시대에 ‘배신’은 일상인 상황이었다. 신하가 주군의 나라를 빼앗는 게 흔치 않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간의 동맹이 파기 되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신겐이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급작스럽게 동맹을 바꿔버렸다고 욕을 할 순 있어도, 신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이었다. 신겐은 요시아키와 손을 잡은 뒤 도쿠가와를 박살냈고(미카타가하라 전투), 그대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밀고 들어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법했다. 이 와중에 신겐의 수명이 다 된 거였다.
문제는 남아있는 자들이었다. 신겐의 시절에는 신겐의 카리스마와 리더십, 그리고 전투력으로 버텨왔던 삶이었지만, 신겐이 사라지자 조직의 구심점도 사라졌다. 아울러 신겐 시절에 만들어 놨던 적들이 그대로 다케다 가문을 노려보고 있었던 거다. 누군가와 동맹을 맺으려 해도 신겐 시절 저질러 놓은 일들이 발목을 잡았다.
(훗날 나가시노 전투에 패배한 후 가쓰요리는 아버지의 숙적이었던 에치고와 동맹을 맺지만, 이로 인해 동맹이었던 호조와 멀어지게 된다. 빈곤의 악순환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가쓰요리 대에선, 북쪽을 제외하고는 온 사방에 적으로 넘쳐난다)
"인간 세계의 50년은 하천의 덧없는 꿈과도 같도다. 한 번 삶을 얻었거든 진멸치 않을 자가 어디 있으랴.”이마가와 요시모토 군이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오다 노부나가는 춤추며 아츠모리(平敦盛 : 일본 전통무악인코와가마이 중 한 공연)를 읊조린다. 그리고는 단숨에 군사를 이끌고 뛰쳐나간다.유명한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의 시작이다. (오케하자마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오와리의 멍청이’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 한 번의 싸움으로 일약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오다에게는 ‘성공’의 시작을 알리는 첫 싸움이었지만, 이 전투로 세상은 돌변하게 된다. 나비효과라고 해야 할까? 한 남자의 죽음으로 세상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동맹 그리고 배신 카이의 다케다 신겐,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가미 호조 우지야스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원래 다케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은 적대관계였는데, 신겐의 누나인 죠케이인을 아내로 맞이하며 긴장관계를 풀었다. 당시 이들은 서로의 ‘필요’가 있었기에 혈연이란 강력한 끈이 필요했다. 누나인 죠케이인이 죽자 신겐은 장남인 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를 요시모토의 딸과 결혼시킨다. 이 정도로 요시모토와 신겐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여기에 한 명 더 붙은 게 호조 우지야스다. 이 셋은 각자 치고받고 싸웠던 과거가 있었지만, 당장 필요에 의해 손을 잡고 삼국동맹을 체결하게 된다(이 셋은 모두 혈연관계로 맺어지는데, 이마가와 요시노부가 그 중심이다. 이마가와는 신겐의 매부 겸 사돈이 되고, 호조 우지야스의 매제가 된다)문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너무 일찍, 너무 허무하게 죽었다는 거였다. 지금의 시점으로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죽은 바보”정도의 평가를 받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나름 능력자였다. 전쟁도 잘했고, 내정도 잘 했고, 외교도 준수했기에 순식간에 세력이 불어나, 이마가와 가문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나도 이제 상경(上京)해서 전국구로 놀아야 하지 않겠어?”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이 당시 요시모토는 토토우미, 스루가, 미카와 3국을 가진 대영주였고, 다케다와 호조와는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뒤통수 맞을 걱정도 없었다.
“남자라면 상경이지!”라는 생각을 하는 게 당연했다. 요시모토는 실력도, 의지도, 기반도 다 갖춰져 있었다. 그렇게 요시모토는 상경 길에 올랐다. 3만의 병력을 끌어 모아(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2~3만 사이의 병력이다) 서쪽으로 길을 잡은 요시모토에게 2천의 오다 병력이 짓치고 들어온다. 악천후와 기습이라는 ‘변명’이 있지만, 죽음은 죽음이었다. 요시모토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다.
요시모토의 죽음에 신겐의 엉덩이가 들썩 거리기 시작했다. 우선, 다케다 신겐에 대한 변명을 하나 해보겠다.
당시 국제정세(?)는 요동쳤다. 요시모토가 죽자 그의 아들인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가 가문을 이어받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다케다와 이마가와 가문은 동맹의 틀을 지켰다(그 사이 이마가와 가문에서는 마츠다이라가 배신해 도쿠가와와 손을 잡았다). 그런데, 여기에 오다 노부나가가 끼어든다.
오케하자마 전투 전후로 오다 노부나가는 처가인 사이토 가문과 긴장관계였다.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죽은 뒤에는 이 긴장관계가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장인은 주인의 나라를 빼앗고, 사위는 처가랑 전쟁하고... 전국시대가 그랬다). 이렇게 되자 노부나가는 신겐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다. 이렇게 해서 노부나가의 양녀가 신겐의 4남인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에게 시집을 오게 된다.
이마가와를 버리고 오다와 손을 잡은 거다.이걸 국제정세의 변화 앞에 유연하게 대응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결과로 보면 전혀 아니었다. 신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스루가로 침공 이마가와군을 공격한다. 어제의 혈맹이 오늘의 적이 된다. 이 부분부터는 조금 복잡하니, 상황별로 나눠서 설명해 보겠다.
① 호조와의 관계“이 때 아니면 못 먹어! 남들이 먹기 전에 스루가를 먹어야 해!” “우리 동맹 아니었어?” “얘가 아직도 세상물정 모르네. 기회있을 때 먹는 게 장땡이야!” “너랑은 동맹 못하겠다.”
“뭐?”
“동맹이란 게 어려울 때 같이 돕고 살자는 건데, 나 어려울 때 너 나한테도 칼 꽂을 거 아냐?” “......”호조 우지야스는 신겐의 도움을 거절한다. 대신 이마가와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다. 아울러 신겐을 견제하기 위해 신겐의 숙적인 우에스기 겐신과의 동맹을 추진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에츠소 동맹(越相同盟)이다(겉으로 보면 대단한 것 같은데, 효과는 별로 없었다).
②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상황
(상략) ...이에야스와 아버지는 에이로쿠 11년(1568) 2월, 이마가와 일족의 내부에 불화가 일어났을 때 오이가와를 경계로 스루가와 토토우미의 영지를 분할하는 밀약을 맺었다. 토토우미의 이누이 성 성주 아마노 카게츠라가 내응한 것을 기화로 아버지는 이 밀약을 깨고, 신슈의 이다 성 성주대리 아키야마 노부토모를 시켜 미카와와 토토우미를 공격하게 했다. 그때 토토우미의 쿠노 성 성주 쿠노 무네요시, 우마후시츠카 성 성주 오가사와라 나가타다 등은 미카와의 츠쿠데 성 성주 오쿠다이라 타다요시와 더불어 노부토모의 군사를 맞아 악전고투했다.
청년 이에야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곧 출병하여 아키야마 노부토모를 격퇴하고, 신겐에게 밀약의 위반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보내, 이것으로 양가의 밀약은 파기되었다.
에이로쿠 12년 정월의 일이었다.(하략)
- 『대망』 中 발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은 신겐은 이마가와군을 격파한다. 이때 문제가 된 게토토우미의 영유권이다. 간단히 말해서 땅을 놓고 둘이 으르렁 댄 거다. 결국 도쿠가와는 신겐과의 연합을 포기하고, 이마가와 가문과 화친을 맺고 뒤로 빠지게 된다.
③ 이번엔 오다 노부나가
이마가와를 버리고 오다와 손을 잡은 신겐.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배신을 한다.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장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손을 잡고 오다의 등에 칼을 꽂은 거다.
온 사방에 적을 만들어 놓았다고 해야 할까? 국제정세가 급변한 건 알겠지만, 국가로서 최소한의 ‘신뢰’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케다 가문은 건재했다. 신겐이 있었고, 신겐이 육성한 기마군단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호조 우지야스가 죽기 전 유언으로 남긴 말이,
“겐신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신겐과 동맹을 맺어 재정비하라.”
라고 말했을까? 툭 까놓고 말해서 신겐의 전투력은 당대 최강이었다. 신겐이 치른 70여 회의 전투를 보면, 어딘가로 치고 들어가 싸운 전쟁이지 적이 치고 들어와 싸운 전쟁은 한 번도 없었다. 카이의 지형적 특징도 있겠지만, 신겐의 전투력과 적극적 공세전략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신겐의 전투력은 무시무시하다.”
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신겐이 계속 살아 있었다면, 이런 ‘배신’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 전국시대에 ‘배신’은 일상인 상황이었다. 신하가 주군의 나라를 빼앗는 게 흔치 않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간의 동맹이 파기 되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신겐이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급작스럽게 동맹을 바꿔버렸다고 욕을 할 순 있어도, 신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이었다. 신겐은 요시아키와 손을 잡은 뒤 도쿠가와를 박살냈고(미카타가하라 전투), 그대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밀고 들어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법했다. 이 와중에 신겐의 수명이 다 된 거였다.
문제는 남아있는 자들이었다. 신겐의 시절에는 신겐의 카리스마와 리더십, 그리고 전투력으로 버텨왔던 삶이었지만, 신겐이 사라지자 조직의 구심점도 사라졌다. 아울러 신겐 시절에 만들어 놨던 적들이 그대로 다케다 가문을 노려보고 있었던 거다. 누군가와 동맹을 맺으려 해도 신겐 시절 저질러 놓은 일들이 발목을 잡았다.
(훗날 나가시노 전투에 패배한 후 가쓰요리는 아버지의 숙적이었던 에치고와 동맹을 맺지만, 이로 인해 동맹이었던 호조와 멀어지게 된다. 빈곤의 악순환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가쓰요리 대에선, 북쪽을 제외하고는 온 사방에 적으로 넘쳐난다)
“인간 세계의 50년은 하천의 덧없는 꿈과도 같도다. 한 번 삶을 얻었거든 진멸치 않을 자가 어디 있으랴.”이마가와 요시모토 군이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오다 노부나가는 춤추며 아츠모리(平敦盛 : 일본 전통무악인코와가마이 중 한 공연)를 읊조린다. 그리고는 단숨에 군사를 이끌고 뛰쳐나간다.유명한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의 시작이다. (오케하자마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오와리의 멍청이’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 한 번의 싸움으로 일약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오다에게는 ‘성공’의 시작을 알리는 첫 싸움이었지만, 이 전투로 세상은 돌변하게 된다. 나비효과라고 해야 할까? 한 남자의 죽음으로 세상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동맹 그리고 배신 카이의 다케다 신겐,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가미 호조 우지야스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원래 다케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은 적대관계였는데, 신겐의 누나인 죠케이인을 아내로 맞이하며 긴장관계를 풀었다. 당시 이들은 서로의 ‘필요’가 있었기에 혈연이란 강력한 끈이 필요했다. 누나인 죠케이인이 죽자 신겐은 장남인 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를 요시모토의 딸과 결혼시킨다. 이 정도로 요시모토와 신겐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여기에 한 명 더 붙은 게 호조 우지야스다. 이 셋은 각자 치고받고 싸웠던 과거가 있었지만, 당장 필요에 의해 손을 잡고 삼국동맹을 체결하게 된다(이 셋은 모두 혈연관계로 맺어지는데, 이마가와 요시노부가 그 중심이다. 이마가와는 신겐의 매부 겸 사돈이 되고, 호조 우지야스의 매제가 된다)문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너무 일찍, 너무 허무하게 죽었다는 거였다. 지금의 시점으로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죽은 바보”정도의 평가를 받지만,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나름 능력자였다. 전쟁도 잘했고, 내정도 잘 했고, 외교도 준수했기에 순식간에 세력이 불어나, 이마가와 가문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나도 이제 상경(上京)해서 전국구로 놀아야 하지 않겠어?”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이 당시 요시모토는 토토우미, 스루가, 미카와 3국을 가진 대영주였고, 다케다와 호조와는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뒤통수 맞을 걱정도 없었다.
“남자라면 상경이지!”라는 생각을 하는 게 당연했다. 요시모토는 실력도, 의지도, 기반도 다 갖춰져 있었다. 그렇게 요시모토는 상경 길에 올랐다. 3만의 병력을 끌어 모아(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2~3만 사이의 병력이다) 서쪽으로 길을 잡은 요시모토에게 2천의 오다 병력이 짓치고 들어온다. 악천후와 기습이라는 ‘변명’이 있지만, 죽음은 죽음이었다. 요시모토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다.
요시모토의 죽음에 신겐의 엉덩이가 들썩 거리기 시작했다. 우선, 다케다 신겐에 대한 변명을 하나 해보겠다.
당시 국제정세(?)는 요동쳤다. 요시모토가 죽자 그의 아들인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가 가문을 이어받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다케다와 이마가와 가문은 동맹의 틀을 지켰다(그 사이 이마가와 가문에서는 마츠다이라가 배신해 도쿠가와와 손을 잡았다). 그런데, 여기에 오다 노부나가가 끼어든다.
오케하자마 전투 전후로 오다 노부나가는 처가인 사이토 가문과 긴장관계였다.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죽은 뒤에는 이 긴장관계가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장인은 주인의 나라를 빼앗고, 사위는 처가랑 전쟁하고... 전국시대가 그랬다). 이렇게 되자 노부나가는 신겐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다. 이렇게 해서 노부나가의 양녀가 신겐의 4남인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에게 시집을 오게 된다.
이마가와를 버리고 오다와 손을 잡은 거다.이걸 국제정세의 변화 앞에 유연하게 대응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결과로 보면 전혀 아니었다. 신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스루가로 침공 이마가와군을 공격한다. 어제의 혈맹이 오늘의 적이 된다. 이 부분부터는 조금 복잡하니, 상황별로 나눠서 설명해 보겠다.
① 호조와의 관계“이 때 아니면 못 먹어! 남들이 먹기 전에 스루가를 먹어야 해!” “우리 동맹 아니었어?” “얘가 아직도 세상물정 모르네. 기회있을 때 먹는 게 장땡이야!” “너랑은 동맹 못하겠다.”
“뭐?”
“동맹이란 게 어려울 때 같이 돕고 살자는 건데, 나 어려울 때 너 나한테도 칼 꽂을 거 아냐?” “......”호조 우지야스는 신겐의 도움을 거절한다. 대신 이마가와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다. 아울러 신겐을 견제하기 위해 신겐의 숙적인 우에스기 겐신과의 동맹을 추진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에츠소 동맹(越相同盟)이다(겉으로 보면 대단한 것 같은데, 효과는 별로 없었다).
②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상황
(상략) ...이에야스와 아버지는 에이로쿠 11년(1568) 2월, 이마가와 일족의 내부에 불화가 일어났을 때 오이가와를 경계로 스루가와 토토우미의 영지를 분할하는 밀약을 맺었다. 토토우미의 이누이 성 성주 아마노 카게츠라가 내응한 것을 기화로 아버지는 이 밀약을 깨고, 신슈의 이다 성 성주대리 아키야마 노부토모를 시켜 미카와와 토토우미를 공격하게 했다. 그때 토토우미의 쿠노 성 성주 쿠노 무네요시, 우마후시츠카 성 성주 오가사와라 나가타다 등은 미카와의 츠쿠데 성 성주 오쿠다이라 타다요시와 더불어 노부토모의 군사를 맞아 악전고투했다.
청년 이에야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곧 출병하여 아키야마 노부토모를 격퇴하고, 신겐에게 밀약의 위반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보내, 이것으로 양가의 밀약은 파기되었다.
에이로쿠 12년 정월의 일이었다.(하략)
- 『대망』 中 발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은 신겐은 이마가와군을 격파한다. 이때 문제가 된 게토토우미의 영유권이다. 간단히 말해서 땅을 놓고 둘이 으르렁 댄 거다. 결국 도쿠가와는 신겐과의 연합을 포기하고, 이마가와 가문과 화친을 맺고 뒤로 빠지게 된다.
③ 이번엔 오다 노부나가
이마가와를 버리고 오다와 손을 잡은 신겐.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배신을 한다.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장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손을 잡고 오다의 등에 칼을 꽂은 거다.
온 사방에 적을 만들어 놓았다고 해야 할까? 국제정세가 급변한 건 알겠지만, 국가로서 최소한의 ‘신뢰’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케다 가문은 건재했다. 신겐이 있었고, 신겐이 육성한 기마군단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호조 우지야스가 죽기 전 유언으로 남긴 말이,
“겐신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신겐과 동맹을 맺어 재정비하라.”
라고 말했을까? 툭 까놓고 말해서 신겐의 전투력은 당대 최강이었다. 신겐이 치른 70여 회의 전투를 보면, 어딘가로 치고 들어가 싸운 전쟁이지 적이 치고 들어와 싸운 전쟁은 한 번도 없었다. 카이의 지형적 특징도 있겠지만, 신겐의 전투력과 적극적 공세전략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신겐의 전투력은 무시무시하다.”
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신겐이 계속 살아 있었다면, 이런 ‘배신’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 전국시대에 ‘배신’은 일상인 상황이었다. 신하가 주군의 나라를 빼앗는 게 흔치 않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간의 동맹이 파기 되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신겐이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급작스럽게 동맹을 바꿔버렸다고 욕을 할 순 있어도, 신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이었다. 신겐은 요시아키와 손을 잡은 뒤 도쿠가와를 박살냈고(미카타가하라 전투), 그대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밀고 들어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법했다. 이 와중에 신겐의 수명이 다 된 거였다.
문제는 남아있는 자들이었다. 신겐의 시절에는 신겐의 카리스마와 리더십, 그리고 전투력으로 버텨왔던 삶이었지만, 신겐이 사라지자 조직의 구심점도 사라졌다. 아울러 신겐 시절에 만들어 놨던 적들이 그대로 다케다 가문을 노려보고 있었던 거다. 누군가와 동맹을 맺으려 해도 신겐 시절 저질러 놓은 일들이 발목을 잡았다.
(훗날 나가시노 전투에 패배한 후 가쓰요리는 아버지의 숙적이었던 에치고와 동맹을 맺지만, 이로 인해 동맹이었던 호조와 멀어지게 된다. 빈곤의 악순환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가쓰요리 대에선, 북쪽을 제외하고는 온 사방에 적으로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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