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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일본인 (최치현 교수) 등

미우라 안진 3

by 자한형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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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 최초 사무라이미우라 안진의 모험

도쿠가와 막부 외교정책 수립에 큰 역할

최치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에서는 미천한 신분, 에서는 귀족 대우자기 것만 고집하지 않는 유연한풍토 덕분

17세기 대항해 시대였다. 안개가 자욱한 템스 강변에서 바다를 동경하던 영국 소년이 있었다. 항해사의 꿈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 대양을 가로지르는 모험으로 일본에 도착했다. 이어 일본 막부의 외교고문까지 된다. 후지산이 보이는 저택에서 영지를 경영하는 사무라이. 그가 나중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이른바 사무라이 윌리엄이다.

 

조선이 성리학의 틀에 눌러 앉아 고리타분한 공리(空理)와 공담(空談)에 빠져 있던 무렵, 일본은 태평양을 건너온 영국인을 사무라이라는 상층 계급의 일원으로 포용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일본이 지닌 문명의 포용성과 개방성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17세기 당시 일본 지도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 영국 모험가와의 대화를 즐겼다. 자신이 딛고 선 땅 너머 세상에 시선을 던지며 질문을 해댔다. 그는 당시의 모든 주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폭풍우의 태평양을 건너 표착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1564~1620)를 만난 그는 대화를 통해 세계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예수회와는 다른 개신교인 애덤스 일행의 방일(訪日) 목적은 무엇인가,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 요인은 어디 있는가, 희망봉 경유의 항로를 두고 왜 드넓은 대양을 건너서 왔는가 등을 물었다.

 

역사는 과거 사건을 다룬다. 하지만 역사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와의 부단한 상호 관계를 성찰한다. 이와 같이 과거 사건을 통해 현재와 미래와의 연관성을 추론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시간 의식에 기인한다. 달리 말해 역사의식이란 곧 시간 의식이며 시간의식이란 곧 치열한 현 존재에 대한 의식이다. 과거 한 사건을 두고 단지 독립적인 별개의 사건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죽은 역사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과거를 성찰하는 이유도 현재는 곧 과거와의 시간적 대화이기 때문이며 곧바로 미래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은 곧 개인의 생존뿐만 아니라 사회와 나아가 국가의 생존문제와도 직결된다. 그러므로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간의 관점에서 50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조선과 일본에 표류한 하멜(Hendrik Hamel)과 미우라 안진(William Adams)을 성찰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이다.

1600, 일본의 규슈 오히타 현에 표류한 외국 상선에 영국인이 있었다. 이름은 월리암 애담스. 일본에게 시간을 앞당겨준 인물로 기록된다. 당시 낙후된 일본의 선박기술을 전수할 뿐만 아니라 대외 무역의 조언자로 당시 도꾸가와 막부는 이 애담스를 적극 활용했다. 그 공로로 영지와 사무라이 직분을 부여할 만큼 일본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미래를 위해 변화를 적극 모색했다. 결코 고정된 시간에 머물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이런 노력은 1636년에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라는 작은 무역상관을 조성해 그 작은 공간을 통해 미래 시간을 조망할 수 있었던 것과 연결된다.

비슷한 사례로 1653(효종 4) 조선의 제주도에도 네덜란드의 동인도 소속 하멜 일행이 표류했다.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에 태풍을 만났던 것이다. 곧장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당시 북벌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무기를 제작하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었지만 효종 사후 북벌정책은 흐지부지 되고 때마침 기근으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한 하멜 일행은 전라도 각지로 흩어져 수감되다가 1666년에 가까스로 일본으로 탈출한다. 일본이 유럽에서 온 애덤스라는 미래 시간을 적극 활용했다면 조선은 하멜이라는 미래 시간을 방치하고 놓쳐 버렸던 것이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조선이 미래 시간을 사유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이 시간을 사유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전통에 대한 집착이다. 무슨 전통이던가? 바로 국가 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이다. 조선이 518년 동안 존속했던 이유도 변화를 거부한 성리학적 전통 때문이었다. 적어도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변화는 역모이며 불순이었다. 따라서 어제의 일이 오늘도 반복되었고 내일도 어제의 모든 가치관과 행위들이 틀림없이 반복되었으리라. 그런 세월이 518년이었다. 18세기 실학이라는 참신한 바람도, 1884년 갑신정변이라는 그 몸부림치던 변화에의 외침도 전통이라는 거대 담론에 의해 산산조각 나 버렸다. 후일 19세기엔 이 전통마저 곧 세도정치라는 수수 세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미래를 사유할 의식도 마비되었다. 앞에 놓은 것은 열강, 제국주의. 모든 생명체는 굳건한 정신으로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형이상학적 가치, 조선의 성리학은 바로 그러한 이념만을 가르쳤다. 무시간, 정지점. 그것은 신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은 어떤가? 일본이 미래를 구상하기 시작한 사건은 윌리암 애덤스가 처음이 아니다. 1543, 포르투갈 상선에 의해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에서의 조총을 전래받았다. 일본의 공간과 시간 정복의 첫 출발점이다. 일본 戰國時代를 마감하고 통일의 기초를 낳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승리도 이 조총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살보다 총알이 더 빠르다는 사실이야말로 시간 정복의 아주 초보적 사례이지만 사실 조총(화승총)의 발명도 유럽의 과학 기술의 결과인 것이다. 일본이 이후로 메이지 유신과 제국주의로 발전한 것은 바로 조총을 통한 시간과 공간 정복의 기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으로 말해 청나라가 1840년 영국과의 아편 전쟁으로 패한 것도, 1854년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미일 화친조약을 맺은 것도, 1876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은 것도 사실 상대국가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싸움에서 이미 패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미래를 선점한 과학 기술적 사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지향한 시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정지점(Still Point)’이었다.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이었으며 절대 중심을 향한 욕망이었다. 그런 욕망이 중심이외의 모든 것은 역모여 모반이요 불순으로 취급했던 역사가 바로 조선의 역사였다. 당연하게도 전제 군주국가 체제에서 가능한 이념이었다. 조선은 그러한 시간의식을 고집했던 것이다. 그런 욕망이 이념이 되었고 나아가 나르시시즘의 질병이 되었다. 심지어 1644년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난 이후에도 조선 스스로 소중화 국가로 자처했다는 것은 심각한 질병이었다. 스스로 깨어나지 못한 중병, 그 결말은 죽음이지 않았던가?

세계사적 흐름과 변화를 자각하지 못하게끔 한 이 성리학적 전통이야말로 모르핀 주사와 같았다. 하지만 조선이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일본은 깨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청나라)이 영국이라는 나라에 사정없이 참패하는 일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일본이야말로 이 시간의 변화에 민감했고 아주 민첩하게 시간의 논리를 파악했던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베이컨이 시간은 돈이다라는 이 경제적 논리를 시간은 곧 힘이다의 논리로 대체한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차이, 그것은 곧 시간 사유의 유무였다. 전통이냐 변화냐 하는 것은 곧 현존에 머무느냐 혹은 현존을 해체하느냐하는 시간 의식의 문제였다. 세상은 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일본은 그러한 물리적 세계관을 먼저 깨달은 것이다.

시간 의식은 곧 과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과학 기술은 세상의 회전을 더욱 촉진시키며 일상의 속도를 가속화시켰다. 과학 기술이 생산에 기반하는 자본주의 시장을 낳았고 자본의 회전을 더욱 빠르게 했다. 느림은 더 이상 미학이 될 수 없다. 적어도 자본주의 시장에서만큼은 그러하다. 비행기나 자동차의 관건도 속이다. 컴퓨터, 그리고 최근의 스마트 폰도 마찬가지이다. 성능을 결정짓는 한 요소가 바로 속도인 것이다. 즉 시간인 샘이다. 그래서 시간이 곧 돈이 아닌가? 오늘날 노동자의 급료도 시급이니 월급이니 하는 것도 결국 시간 의식의 결과이다. 이런 까닭에 느림의 미학이란 용납되지 않는다. 더 빨라야 한다. 빠른 만큼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한다. 시간은 곧 힘이다. 17세기 초 영국의 베이컨(Francis Bacon)시간은 돈이라라고 했지만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는 요즘은 시간이 곧 국력이다. 그러므로 느림은 결코 미학이 될 수 없다. 조선은 이 느림의 미학, 아니 '무시간의 미학'에 갇혔던 국가였다. 시간 의식이 없었던 이유이다. 미래에서 온 하멜을 걷어 찬 조선, ‘이이도 고도리(いいとこ)’ 정신으로 윌리암 애덤스를 적극 활용한 일본, 이 차이가 후일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낳았다.

 

[작성자 chanelruby]

29, 유학자 강항이 오랜 포로의 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즈음에 지금의 오이타 현에 리프데호라는 이름을 가진 선박이 표류해 왔다

 

리프데호

1598년 영국 이름 윌리엄 애담스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전신인 로텔담 해운 회사에서 극동으로 가기 위해 항해사를 구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동생과 함께 지원했다

5척으로 출발한 선단은 마젤란해협을 통과하고 태평양을 황단하면서 나포, 침몰 등으로 인해 1척만 살아남아 일본에 도착하게 된것이었다 오이타 번에서는 나가사키부교에게 표착 사실을 통보했고 부교는 윌리엄 애담스를 구속하고 총, 탄약, 대포를 압수했다

이 압수는 포루투갈 소속 선교사가 히데요리에게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이 일본에 오면 즉시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기에 이를 따랐던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소식을 듣고 윌리엄 애담스를 불러 여러가지를 질문했다 윌리엄의 항해 목적, 노정, 유럽 각국의 종교분쟁 등을 들은 이에야스는 포르투갈 예수회가 주장하는 리프데호가 해적선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고 윌리엄을 에도에 머물게 하였다

압수한 무기중 19문의 청동대포는 6개월 후인

1021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이 승리하게 된 많은 요인 중 하나가 영국제 무기였다

이에야스는 외국 사절과의 면담 때 윌리엄의 도움을 받는다 또한 항해술, 수학 등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윌리엄이 귀국하게 해달라고 요청해도 쓸모가 많았기에 청을 들어주는 대신 하사금을 내려주면서 귀국을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윌리엄 애담스는 이에야스 명을 받고 이즈반도에 조선도크를 만든 후 80톤 선박을 시작으로 120톤의 배까지 완성하자 이에야스는 윌리엄에게 하타모토의 직위 사무라이로 승격시키고 두 자루의 칼을 하사했다

 

히라도와 요코스카시의 미우라 안진 묘

일본인으로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결국 애덤스

250석의 녹봉을 받고 100명 가까운 가신도 둘 수 있게 되었다 미우라 안진이라는 일본식 이름도 하사받는다

그가 만든 120톤의 배는 스폐인의 영토인 누에바 에스파냐(필리핀) 을 다녀오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기도 한다

미우라 안진은 주인선을 담당하는 외국인 선장이 되었는데 당시 주인선으로 해외를 나간 사람은 7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쇄국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쇄국이라는 단어는 지방영주에 해당하는 말이었고 막부는 무역독점으로 인해 상당한 부를 축척하고 있었다

이 막부의 무역 독점으로 인한 부의 독식은 후에 웅변들에 의한 막부타도의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미우라 안진을 시기한 포루투갈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여러 수를 쓰지만 이러한 행동에 실만한 이에야스는 결국 1614년 가톨릭 금지령을 내리며 예수회를 추방한다 안진은 스폐인과의 우호조약과 교역을 성사시켰고 주요 무역항구를 우라가항으로 지정하게끔 노력하였다

 

이토시 안진 메모리얼 파크

우라가항은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떠오르게 되고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의 함대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요인이 된다

이에야스를 대신해 네덜란드의 교역도 미우라 안진이 주도했다 종교와 무관한 네덜란드에게는 포루투갈과 다르게 일본 어느 곳에서도 무역을 할 수 있게 특혜를 주었다 네덜란드는 일본에 난학이라는 서양학을 발전시켰고 일본은 조선과 다르게 비약적으로 지식이 축척되어 갔다 미우라 안진은 일본을 사랑했다 그는 일본 옷을 입고 일본어를 사용했으며 일본의 대외무역 정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16164월 이에야스가 사망하자 아들 히데타다는 대외무역을 히라도에 국한하는 쇄국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미우라 안진의 역활이 다한것이다

에도 니혼바시에는 안진이 살던 곳에 미우라 안진 저택 유적지 비석이 있고 처음 상륙했던 오이타 해안에는 미우라 안진 상륙 기념비가,

히라도에는 미우라 안진 동상이 있으며 배를 처음 건조했던 시즈오카 이토시에는 매년 여름 안진축제를 열고 있다 이처럼 일본 곳곳에 그를 기리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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