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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선비정신 인물 등 80)

김상헌의 자취4

by 자한형 202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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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척화론 주장한 청음 김상헌의 자취4 /송의호

바름을 지켜 천명을 기다린 선비

청나라 끌려가 6년 감금 생활하면서도 오랑캐 꾸짖어 명분과 의리가 지극히 중하니 이를 범하면 재앙

안동 소산마을에 위치한 청원루. 병자호란 후 김상헌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은거한 공간이다.

올해 2월 대구에서 안동으로 옮긴 경상북도청의 지붕은 한옥 기와로 단장됐다. 그래서 유서 깊은 도청 인근 전통마을 두 곳과 잘 어울린다. 도청에서 3안팎의 거리에 하회(河回)마을과 소산(素山)마을이 있다. 남쪽 하회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다녀간 곳이다. 임진왜란을 수습한 서애 류성룡의 고향이다. 하회마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소산마을은 안동 김씨의 600년 세거지(世居地). 이곳은 임진왜란 이후 44년 만에 닥친 병자호란을 온몸으로 맞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체취가 오롯이 남은 마을이다.

소산마을 입구에 세워진 김상헌의 시비. 청음이 청나라로 압송될 당시 지었다는 시를 담고 있다.

경북도와 안동시는 도청 이전에 맞춰 소산마을을 새로 정비했다. 4억원을 들여 이 마을 출신 문과 급제자 9명을 맞이했던 솟대거리 등을 복원했다.

529일 소산마을 양소당(養素堂)을 지키는 김해일(69) 안동 김씨 대종손의 안내로 마을을 답사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안동으로 내려온 지 8년 정도 됐다. 마을 어귀에는 청룡 솟대가 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꼭대기에 등용을 뜻하는 하늘색 청룡을 조각했다. 건너편 마을 입구에 세워진 바윗돌이 눈길을 끈다. 누구나 한 번은 들었을 시조 한 수가 새겨져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 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청음 김상헌이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해 은거하던 중 청나라로 잡혀가면서 남긴 우국충절의 고별시다. 표석은 소산마을의 상징이다. 시조의 공간적 배경은 한양인데 이곳에 시비가 세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병자호란(1636)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청음의 문인(門人)인 우암 송시열이 남긴 묘지명(墓誌銘)에 근거한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도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항복문서 찢고 죽음을 청하다

 

 

 

1637(인조 15) 1(피신한 남한산성에서 호조판서 최명길이 온갖 수모를 겪으며) ()과 화친하는 글을 짓자 (예조판서) 청음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항복문서를 찢는다. 당시 명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조정은 북방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청과 화친하자는 주화론(主和論)이 대세를 이뤘다. 청음은 목숨을 걸고 화친을 배척하는 척화론(斥和論)을 고수한다. 여진족과 군신의 의를 맺는 것은 굴욕이므로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조가 묻는다. “어찌 이런 일을 합니까.” 청음이 눈물을 흘리며 아뢴다. “오늘날 의론은 양립할 수 없으니 청컨대 먼저 소신을 죽여 주소서.” 인조가 다시 말한다. “경은 어찌 이러는가. 내 한 몸을 위한 꾀가 아니라 위로는 종묘사직을 위함이며, 차마 온 겨레를 멸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청과 화친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인조의 논리였다)

 

청음이 다시 말한다. “신의 말도 생존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임금과 신하가 죽기를 각오하고 지키기로 맹세한다면 전하 위해 죽을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만약 하늘이 끝내 재앙을 거두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돌아가 선왕(先王)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분위기는 이미 화친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청음은 물러나와 자정(自靖, 자결)을 결심하고 6일 동안 굶는다. 또 목을 맸으나 아들이 발견해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인조는 마침내 12만 대군을 거느린 청태종에 맞서 45일 동안 버틴 남한산성에서 나와 한강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항복한다. 청음은 엎드려 통곡했다. 중국 대륙에서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던 시기에 청음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자 온몸으로 맞섰다. 청음의 후손들은 대의와 명분만 가슴에 품으면 이스라엘처럼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유랑하다가도 다시 건국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청음은 관직에서 물러나 안동으로 낙향한다. 그때가 2월이다. 청음은 소산마을 청원루(淸遠樓)로 들어갔다.

 

청원루는 청음의 증조부인 김번(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김번은 문과에 합격한 뒤 한양 장의동(壯義洞, 경복궁 인근으로 줄여 장동으로 부른다)에 정착했다. 이른바 장동 안동 김씨시대를 연 인물이다. 청원루는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소산마을의 가운데 위치해 있다.

 

안동김씨 소산종회의 간판이 걸린 대문을 들어서자 누각은 비어 있었다. ㄷ자 구조로 기단을 높게 만든 단층의 다락집 형태다. 대청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방이 있다. 본래는 앞쪽에 사랑채가 더 있는 41칸 규모였으나 1934년 홍수 때 무너지고 안채만 남았다고 한다. 건물 아래 보관돼온 <청음집> 등 문집 목판은 2003년 한국국학진흥원에 맡겨졌다. ‘청원루편액은 주자(朱子)가 쓴 글씨에서 집자했다. 당호는 본래 주돈이(周敦颐)의 명문장 애련설(愛蓮說)에 나오는 향원익청(香遠益淸, 향기는 멀어질수록 맑아진다)’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망국의 신하가 은거하면서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뜻으로 굳어졌다.

 

김해일 종손은 선비에게 의리와 명분은 목숨만큼 소중하다청음은 위기에서도 미래를 내다보며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혜안이 있었다고 말했다. 손자 둘도 데려다 공부시켰다. 둘째 김수흥(金壽興)과 셋째 김수항(金壽恒)이다. 두 손자는 이후 영의정에 오른다. 또 선대의 묘제를 주관하고 제수 마련은 검소할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청음은 이후 소산마을을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 지낸다. 스스로 절의(節義)를 다진 것이다.

 

나라 못 지킨 신하 학가산서 숨어 지내

 

 

 

김상헌은 청원루에 머물다 나중에는 학가산으로 은둔지를 옮긴다. 안동 서미마을에 남은 강린당은 후대에 다시 지어진 서당 건물이다.

61일 다시 청음이 은거했던 학가산을 김해일 종손과 함께 찾아갔다. 소산마을에서 풍산읍 소재지를 지나 서북쪽으로 들어간 학가산 자락의 서미리(西美里)란 곳이다. 소산마을에서 8쯤 떨어져 있다. 서미마을이 가까워지면서 산비탈을 따라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의 바윗돌에 은자암(隱者巖)’이라 새긴 글씨가 보였다. 서체가 독특하다. ‘은 초서(草書)로 쓰고 가운데 는 정자체인 해서로 썼다. 풀을 뜻하는 초서 사이에 묻혀 사는 사람이란 의미다. 은자암 글자 아래 해동수양(海東首陽) 산남율리(山南栗里)’란 글씨가 더 있다. 안동부사로 부임한 청음의 7세손 김학순이 새겼다. 청음이 머무른 서미리는 중국 은나라가 망할 때 백이·숙제가 주나라를 따를 수 없다며 숨어 지낸 수양산과 도연명이 자연으로 돌아간 율리와 같다는 뜻이다.

 

은자암을 지나 100m쯤 더 올라가니 서미마을이 나온다. 마을 진입로에서 뒷산을 쳐다보니 봉우리 아래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중대바위다. 바위 아래에 중대사란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중대바위에서 마을 아래까지 일대는 너럭바위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눈길이 멈춘 곳은 바위 위의 비각이다. 장정 10명은 넉넉히 앉을 마을 안쪽 빗집바위라는 너럭바위 위에 사모지붕 비각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땅에서 사람 키 하나를 훌쩍 넘기는 높이로 오를 수 없는 구조다. 비각 안에는 목석거(木石居) 유허비가 있다. 1710(숙종 36) 안동부사 이정신이 세웠다. 비문에는 내력과 함께 앞으로 누구라도 나무 하나 돌 하나 허물지 말라고 새겨져 있다.

 

빗집바위 앞에는 목석거세 글자가 가로로 새겨져 있다. ‘은자암을 새긴 김학순의 글씨다.

 

청음은 서미리에 초가삼간을 지어 목석거(木石居)’라는 당호를 걸었다. 나라를 못 지킨 신하가 죄인이 돼 돌산에 숨어 지낸다는 뜻이다. 또 서미골의 석간수를 따서 서간노인(西磵老人)’으로 자처했다. 그는 목석거 시절을 이렇게 읊는다.

 

석실 선생 머리 위에 각건을 쓰고서/ 노년에 원숭이 학과 함께 살아가네/ 가을바람 지는 잎에 인적이 없어/ 중대사에 홀로 올라 백운루에 누웠네.’

 

현재 서미마을에 목석거 초가는 남아 있지 않다. 유허비만 남은 것이다. 1639년 청음은 청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자 목석거에서 반대 상소를 올린다.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은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도 없었습니다.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들의 세력이 한창 강하니 어기면 재앙이 있다고들 합니다. 신은 명분과 의리가 지극히 중하니 범하면 또한 재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저버리고도 끝내 화를 면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바름을 지키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대저 일이 순하면 민심이 기뻐하고 민심이 기뻐하면 근본이 튼튼해집니다. 이것으로 나라를 지키면 도움을 얻지 못한 자가 없습니다. 이제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는다면 천하 후세의 논의는 생각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선왕을 지하에서 뵙겠습니까.’

 

비장한 상소문이다.

 

1640년 청나라는 상소를 빌미로 청음을 잡아 보내라고 명한다. 청음은 안동을 떠나 한양을 거쳐 의주에 도착한다. 소산 마을에 새겨진 청음 시비는 당시 한양을 지나는 소회를 담은 것이다.

 

의주에서 청나라 관리가 묻는다. “국왕이 항복할 때 유독 청은 섬길 수 없다고 했는데 무슨 뜻이었소?”

 

청음이 답한다. “내 늙고 병들어 따를 수 없었소.”

 

다시 청나라 관리가 묻는다. “우리에게 군사를 원조할 때는 어찌 저지하였소.”

 

청음이 대답한다. “우리 임금에게 아뢴 것이니 다른 나라에서 알 바 아니오.”

 

청나라 관리가 재차 묻는다. “두 나라가 이미 한 집안이 되었는데 어째서 다른 나라라고 하오?”

 

청음이 다시 답한다. “두 나라가 제각각 나누어진 땅이 있는데 어찌 다른 나라라 아니할 수 있소?”

 

심문은 끝이 났다. 청음은 북으로 압송된다. 16411월 청음은 청나라 선양(瀋陽)에 이른다. 청나라 칸()이 청음에게 다시 따져 물었지만 답은 변함이 없었다. 청음은 갇힌 몸이 된다. 감금 생활은 6년이나 이어졌다. 그곳에서도 청음은 회유를 거절하고 큰 소리로 오랑캐의 결례를 꾸짖었다.

 

1645년 청음은 풀려나 소현세자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좌의정에 제수된다. 1650년 효종이 즉위하자 청음은 북벌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오른다. 그러나 청음은 더 이상 세상사에 연연하지 않고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石室)로 들어간다. 165283세로 생을 마감했다. 덕소엔 청음의 13세 종손인 김성동(88) 씨가 묘소와 종택을 지키고 있다.

 

안동 서미마을에는 목석거 유허비와 함께 강린당(講麟堂)’이란 건물이 남아 있다. 1689년 유림과 주민이 청음을 추모해 지은 서간사(西磵祠)’란 서원 형식의 사당 중 남은 강학(講學) 공간이다. 청음은 서미리에서도 후진을 가르쳤다.

 

서간사가 인연이 돼 영조 연간에는 노론이 안동에 청음을 추모하는 서원을 건립한다. 그러자 세도정치 등으로 300년 가까이 벼슬길이 막혔던 남인은 반발했다. 대립은 심각했다. 서원은 결국 발을 붙이지 못했다. 안동은 영남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의 본향 같은 곳이었다. 청음은 안동이 고향이었지만 기호학파인 노론이 추앙하는 인물이었다. 물론 안동 김씨 가운데도 김기보 등 퇴계급문록’(퇴계의 제자 명단에 상당)에 오른 인물이 있었지만 앙금은 오랜 기간 지속됐다. 서간사는 이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어 걷어낸다.

 

강린당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주변엔 온통 풀이 무성하고 문은 굳게 잠겨 있다. 무슨 까닭인지 편액도 사라졌다. 도둑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은 찾는 이도 거의 없다. 청음의 11세손인 김홍진(88) 안동 김씨 서윤공파 회장은 청음 선조(先祖)는 불의를 용납하지 않은 분이라며 목석거 유적이 하루 빨리 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미마을에는 지금 예천 임씨와 청주 한씨 등을 중심으로 40여 호가 살고 있다. 작은 마을이지만 공무원이 많이 배출됐다고 한다. 임호섭 이장은 청음 이야기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유적이 잘 관리되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남인과 노론 후손 시비 세우며 손을 잡다

 

 

 

안동 서미마을에 남은 목석거 유허비’. 목석거는 김상헌이 지은 초가의 당호다.

소산마을의 상징인 청음 시비는 2002년에 세워졌다. 글씨는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중풍으로 쓰러져 운필이 자유롭지 못한 몸으로 힘들게 써내렸다. 시비 제막식은 화해의 장이었다. 시비건립추진위원장은 조순 전 부총리가 맡았다. 안동 유림이 행사를 주관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동은(퇴계 이황의 종손) 옹이 집례에 나섰다. 초헌관은 안동 김씨 대종회장이 되고 아헌관은 안동향교의 전교, 종헌관은 봉화의 충재 권벌 종손이 맡았다. 조선 후기 당론으로 치열하게 대립했던 남인과 노론이 후손들에 의해 다시 손을 잡은 것이다. 그래서 시비 앞에는 제막식 행사도 낱낱이 돌에 새겨 두었다.

 

 

서미마을 입구 바위에 새겨진 은자암’.

안동시는 소산마을 정비에 이어 서미마을의 중대바위와 청음의 은둔지를 탐방과 휴양 공간으로 만드는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 구상만 수 년째로 지지부진하다.

 

소산마을 청원루와 서미마을 목석거·강린당은 대쪽 같은 선비가 난세에 걸어간 길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외세에 굴하지 않는다는 기개였다. 주권을 볼모로 한 실리와 명분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처신일까.

 

-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안동 김씨 집성촌 소산마을 -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인 집안의 소박한 상징

 

 

 

서울에서 소산마을로 옮겨 지은 태고정의 모습. ‘청풍계글씨는 선조가 썼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 15, 판서 45명이 났고 문과 급제자는 172

 

소산마을은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자리잡은 안동 김씨 집성촌(集姓村)이다. 마을 앞으로 풍산 들판이 펼쳐져 있고 낙동강이 흐른다. 마을 이름은 처음에 금산촌(金山村)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낙향한 청음 김상헌이 마을 이름이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모름지기 검소하다는 소산(素山)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서 고쳐졌다. 이 마을에 맨 처음 터를 잡은 입향조(入鄕祖)1419(세종 1) 비안 현감을 지낸 9세손 김삼근(金三近)이다. 마을의 역사는 약 600년이 된다. 1960년대 초반까지 300호였던 마을은 지금 130호 정도로 줄어들었다.

 

시조는 안동의 성주로 고려 왕건을 도와 후백제의 견훤을 물리친 김선평이다. 안동 김씨를 흔히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인 집안이라고 말한다. 금관자는 종 2품 이상의 관리가 달고 다닌 망건의 고리다. 그만큼 고위 관직을 많이 배출했다는 뜻이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 15, 판서 45명이 났고 문과 급제자는 172명에 이른다.

 

물론 늘 따라다니는 비판도 있다. 안동 김씨는 조선 후기 60년 세도(勢道) 정치로 나라를 어지럽힌 집안이라는 공격이다. 문중은 말을 아낀다. 그러나 충신·효자 등도 많이 배출됐다. 소산마을에는 충과 효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모두 있다. 청음이 은거한 청원루가 충을 상징한다면, 효를 상징하는 삼구정(三龜亭)이라는 정자도 따로 있다.

 

손길이 못 미쳐 주변에 잡초 무성해진 태고정

 

삼구정은 절경이다. 정자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쳐간다. 풍산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령이 300년 안팎인 느티나무 등 보호수 세 그루가 정자를 둘러싸고 있다. 삼구정은 1496년 김계권의 아들 김영수(金永銖)가 형들과 함께 지었다. 일찍 지아비를 여의고 40여 년을 홀로 지낸 88세 노모 예천 권씨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다. 효의 표상이다. 정자엔 <용재총화>를 쓴 성현 등 당대의 명사가 쓴 시판 수십 점이 걸려 있다. 마을엔 김정근의 효자문도 남아 있다.

 

마을 안쪽 산자락엔 양소당(養素堂)이 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신으로 삼구정을 지은 김영수의 옛 집이자 안동 김씨의 대종택이다. 당호에 들어간 ()’자는 근본’, ‘희다’, ‘검소등의 뜻을 담았다. 사치를 경계하고 검소·순박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문간채·사당채의 ㅁ자 형태 양소당은 이름 그대로 작고 소박한 편이다. 이곳이 과연 한 시대를 풍미한 세도 가문의 본가인가 의심이 들 정도다.

 

마을 언덕 편에 2006년 중건된 태고정(太古亭)이 있다. 이 정자는 본래 조선 중종 때 서울 인왕산 아래 청풍계(淸風溪)에 초가로 지어졌다. 1910년쯤 조선총독부가 태고정을 허물면서 문중이 서울에서 현판만 가져와 소산마을로 옮겨 지었다. 김해일 종손이 정자 안으로 들어가 붉은 천을 걷어 올리자 선조가 쓴 청풍계편액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고정은 여러 임금이 들렀고 명필 한석봉이 편액을 썼다. 관리의 손길이 못 미쳐 주변은 잡초가 무성하다.

 

삼구정으로 가는 동오봉 오솔길엔 또 하나의 시비가 있다. 조선 성종 때 좌승지를 지낸 문장가 김영의 한글 시조다.

 

빈 배에 섰는 백로 벽파에 씻어 흰가/ 네 몸이 저리 흰들 마음조차 흴 소냐/ 만일 마음이 몸과 같으면 너를 좇아 놀리라.’

 

안동 김씨의 청백과 절의 정신이 은유적으로 표현돼 있다.

 

마을을 끼고 역골로 들어서면 개화기 때 국어·영어·지리 등 신학문을 가르친 역동재가 나온다. 뒷산은 안동 김씨의 선대 묘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