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1~4 (최재봉. 시,소설, 수필 등한겨레 신문)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1

by 자한형 2023. 4. 10.
728x90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소설,수필 / 울림으로 남는 글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1. 고은의 `'만인보'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고은, <만인보> 서시).

고은(63)씨는 연작시 <만인보(萬人譜)>1980년 여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제7호 특별감방에서 구상했다. 그해 517일 자정을 기해 발효된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처와 동시에 체포된 시인은 김재규가 사형 직전까지 머물렀던 방에 갇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운명의 발자국 소리를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손바닥만한 창하나 없이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그 무덤과 같은 방에서 그의 의식은 옛일의 회고와 추억을 탈출구로 삼았다.

만일 살아서 나간다면 지나간 삶의 구비에서 마주친 이들을 시로써 되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은 그로부터 6년 뒤에야 실현된다. 그 사이 시인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 석방되며 결혼하고 자식을 본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화살' 1)고 선동했던 그 가 805월 광주를 통과하면서 <만인보>의 세계로 나아간 것은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라는, <만인보>에 대한 설명에서 그의 70년대를 특징짓는 전투성과 이념성을 찾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인보>를 권력에의 투항이나 현실 순응으로 보는 시각역시 맹목과 단견으로서 타기되어 마땅하다. 그보다는 싸움의 역사로부터 견딤의 역사로, 화살의 세계관에서 장강(長江)의 세계관으로 변모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이해가 될 터이다.

실제로서시'에 이어지는 ’`할아버지와 `머슴 대길이'는 인간과 세계와 역사를 대하는 시인의 관점에 조금치의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취해서 소리 지르고 깨부수는 것 말고는 권세도 명예도 누리지 못한 할아버지 고한길을 기리는 노래의 끝 연은 이렇다.

이 세상 와서 생긴 이름 있으나마나/

죽어서도 이름 석 자 새길 돌 하나 없이/

오로지 제사때 지방에는 학생부군이면 된다/

실컷 배웠으므로/

실컷 배웠으므로.

그런가 하면 시인에게 가갸거겨를 배워준 친구네 집 머슴 대길이는 그가 속한 계급과 무관하게 혹은 바로 그 계급으로 말미암아 곧고 바른 인격의 담지자로 그려진다.

봄 산에 올라서도 마을 처녀에게 허튼 시선 한번 주지 않으며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라고 말하는 그를 향해서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 새우는 불빛이었지요

라는 진술은 민중적 범에 대한 시인의 귀의를 말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머슴 대길이로부터 시작한 <만인보>의 여정은 시인의 가족과 친척, 고향 사람들을 두루 훑은 다음 시인 자신의 편력을 따라서 이 땅 곳곳으로 벋어나가도록 돼 있다.

지난 86년과 88, 89년 세 차례에 걸쳐 한번에 3권씩 모두 9권이 나온 <만인보>의 초반부는 시인의 유년시절 고향 사람들의 모습과 삶의 이모저모를 소묘한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배고파서/

하루이틀 꼬박 굶고/

물배만 채워/

다섯 식구/

서로 얼굴 보고 앉았(‘굶는 집')는 궁상과 허기의 삶이지만, 민중의 생명력에 대한 시인의 굳은 믿음으로 밝은 빛깔로 채색된다. 가령 대를 이은 소도둑으로 군산형무소 감방에서 마주치게 된 어느 부자간의 대화를 들어 보라.

선득아 너 들어왔냐/

2년 먹고 나가려고 들어왔어라오/

밥 먹을 때 오래오래 씹어먹어라/(`소도둑').

그러나 이처럼 밝고 낙천적인 어조도 한국전쟁기의 끔찍한 나날을 서술할 때에는 별무소용이 되고 만다.

인민군 들어와/

반강제로 여맹 간부 노릇 하며/

찢어진 치마 입고 다니고/

여맹 간부 노릇한 죄목으로/

이 사내/

저 사내/

치안대한테 욕보고 나서/

혓바닥 깨물고 죽어버린 `임영자'나 동네 이사장 구장 이장 다 거치며 존경받다가 이복형제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치안대에 잡혀와서는 그 치욕을 못 견뎌 우물에 빠져 죽고 만 `김병천', 그리고 싸락 눈 쌀쌀맞은 초겨울 아리따움에 공부도 잘해서

인공 때/

여맹 간부였다가/

수복 후 /

어찌어찌 몸 상해버리고//

그 아리따움 일거에 망해버리고/

죽음보다도 못하게시리/

죽음보다도 못하게시리의 `조부희'의 경우는 그 악몽과도 같은 기억의 몇몇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보도연맹 가입자의 학살과 우익 및 지주의 처형, 다시 인공시절 부역자의 처단으로 이어지는 살육의 악순환은 십대 후반의 소년의 정신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다. 마을 주변의 참호와 방공호 속에서 공산군들에게 학살당하거나 생매장당한 시체를 파내는 일에 동원됐던 고은태(시인의 본명) 소년은 기어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산과 들을 정처없이 쏘다니게 된다.

`아아 50년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논리를 등지고 불치의 감탄사로써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시인은 그의 산문집 <1950년대>에서 썼거니와, 자살 시도와 출가, 환속, 투쟁으로 이어지는 파란과 갱신의 출발점이 바로 그의 50년대였다.

시인의 고향은 현재의 전북 군산시 미룡동. <만인보>에 미제방죽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 은파유원지와 할미산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은태 소년이 학살당한 이들의 주검을 나흘 걸려 파내었던 할미산의 참호는 우거진 관목에 가리기는 했지만 예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둥이만 혼자 살 뿐 인적 하나 없던 저수지 가에는 고층 아파트군이 숲을 이루게끔 되었고, 그 너머로 희미하게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건너다 보인다.

시인이 다녔던 미룡초등학교 자리에는 군산대학교가 들어서 있고, 군산 중학교를 오가는 길에 <한하운 시초>를 주움으로써 문둥이 시인이 될 꿈을 키웠던 한길은 지금은 왕복 4차선 도로로 바뀌었다. 시인의 생가는 없어졌지만, 팔순의 어머니는 생가 근처에 홀로 살면서 노년을 즐기고 있다.

어느새 환갑을 훌쩍 넘겨버린 큰아들을 위해 손수 담근 인삼주를 내오신 어머니는 치다 보기도 아깐 내 아들이라며 황홀해 하고, 시인 아들은 그 어머니를 보며 늙은 주제에도 싸가지가 있어 한마디 한다. 이어서는 권커니 잣커니 오가는 술과 노래. 미성년의 나이로 출분을 행했던 시인은 한결 귀가 순해져서야 돌아와 어머니이신 고향을 끌어안는가.

2.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문둥이들만을 위한 천국여기에 또한 원장님의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모습의 철조망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원장님께서는 저들을 그냥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특수한 조건과 양보 위에 그것을 수락할 수 있는 문둥병 환자로서만 이해하려 하심으로써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원장님 자신의 문둥이 천국을 짓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청준(57)씨의 장편 <당신들의 천국>은 유토피아의 본질과 한계를 문제 삼는다. 아니, 이 소설에서 유토피아는 본질적으로 한계를 수반하는 얼치기 유토피아, 그러니까 디스토피아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상정된다. 그렇다는 것은 `천국'의 주체가 `우리들'이 아닌 `당신들'이라는 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째서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라 `당신들의 천국'인가? 이 물음에는 이 소설의 야심만만한 문제의식과 작가 이청준씨의 세계관의 무게가 함께 걸려 있다.

<당신들의 천국>은 나환자들의 집단 거주지인 소록도를 무대로 삼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5·16 쿠데타가 있은 지 얼마 뒤 군복 차림으로 소록도병원의 원장으로 부임해온 조백헌 대령. 그가 나름의 열의와 진정을 지니고 소록도를 나환자들의 천국으로 꾸미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우여와 곡절이 소설의 대략적인 얼개다.

앞머리에 인용한 글은 조 원장 아래서 보건과장으로 봉직했다가 섬을 떠난 이상욱이 조 원장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상욱은 나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조 원장의 포부와 실천을 처음부터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물이다. 조 원장이 행동의 인간이라면 상욱은 관념의 인간이다. 조 원장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현실적 능력과 기반을 지니고 있다면 상욱이 자신을 구현하는 방법은 부단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서다.

소록도에 나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려는 조 원장의 포부는 다양한 양상으로 표출된다. 원생들의 불만과 요구사항을 듣는 건의함 설치, 섬 운영의 결정권을 행사할 환자들의 장로회 조직, 병에 감염되지 않은 환자의 자식들과 병원 직원 아이들의 공학 단행, 환자들만의 축구팀 구성과 각종 대회 출전, 농토를 확보하기 위한 간척공사. 하지만 처음 개봉한 건의함들이 한결같이 텅 비어 있던 데에서도 보듯이 조 원장의 의욕은 일쑤 환자들의 무관심과 냉대에 부닥친다.

조 원장의 선의가 환자들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은 이상욱과, 환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황희백 장로에 의해 각각 자유와 사랑의 문제로 치환돼 제시된다. 상욱에 따르면 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려는 조 원장의 계획이 치명적으로 빠뜨리고 있는 것은 비판의 자유다.

원장의 의도가 아무리 미쁘고 그 결과물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천국의 거주민인 환자들이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짜 천국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황 장로는 상욱의 자유조차도 사랑이라는 좀더 근본적인 덕목이 없이는 불완전한 것임을 역설한다. 자유가 천국 실현을 위한 제도적 장치라면 사랑은 그 종교적 근거를 이룬다. 자유와 사랑이라는 두가지 요건, 그리고 실제로 천국 건설을 추진할 실천적 힘이 결합돼야 한다는 것이 <당신들의 천국>에 나타난 유토피아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일차적으로는 물론 소록도라는 구체적 섬을 무대로 그 섬의 주민들인 나환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인 조백헌 원장은 실제로 두차례에 걸쳐 8년 가까이 소록도병원 원장을 지낸 조창원씨를 모델로 삼고 있다. 나환자 선수들과 일반 선수들과의 축구 경기, 오마도 간척사업 등은 조창원 원장 시절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동시에 이 작품은 정치적 알레고리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소설 첫머리에 군복 차림으로 부임하는 조 원장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빗댄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조 원장과 박정희의 유비는 더 이어진다. 오마도 간척사업을 독려하기 위한 지시문에서 사업을 반대하거나 비방하는 일, 미신과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의 일을 금지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는 대목은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의견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긴급조치의 `자기완결성'을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지배와 피지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와 같은 철학적·인류학적 질문에 관계된다. 김윤식 교수(서울대·국문학)가 이 소설의 작가를 두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제에 도전한 최초의 한국작가라 이른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다.

소록도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동항으로부터 5m 거리에 있는 150만평 넓이의 자그마한 섬이다. 녹동항에서 소록도만을 오고 가는 페리형 도선은 오르는가 싶으면 어느새 건너편 잔교에 가 닿는다. 작은 사슴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이름이 붙은 소록도를 처음 찾는 이들을 맞는 것은 선착장에 세워진 시멘트 구조물이다. 흰 바탕에 검은색 세로 글씨로 쓰여 있으되, `한센병은 낫는다.' 일곱 글자로 이루어진 이 짧은 문장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갈구와 체념이 담겨 있을 것인가.

소록도는 크게 보아 관사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뉘지만 양쪽을 가르던 철조망과 감시소는 없어진 지 오래다. 많을 때는 5~6천명에 이르렀다는 환자는 지금은 158명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환자들의 평균 연령은 69살로 최근엔 해마다 50명 가량이 세상을 뜨고 있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섬 소록도는 순전히 환자들의 치료와 생활 공간으로만 쓰이고 있어 자연이 잘 보존돼 있는 편이다. 섬 한가운데의 중앙공원은 그 아름다운 자연에 적절한 인공미가 더해진 소록도 최고의 명물이다. 멋진 소나무와 향나무들이 잘 깎인 잔디와 조화를 이룬 6천평 넓이의 공원에서 그러나 환자들의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섬 안에 시설이 한 가지씩 늘어갈 때마다 그만큼 섬 전체가 천국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지옥으로만 변해가고 있었듯이, 이번에도 이 섬은 공원이 하나 더 늘고 그곳에 바쳐진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노력이나 희생의 크기만큼 섬은 점점 더 낙원과는 인연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중앙공원이 조성되던 무렵을 회고하고 있는 부분은 환자들이 이 공원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를 알려준다. 공원이 만들어진 것은 일제 말기 10년 동안 재임했던 수호 원장 시절이었다. 환자들을 강제동원해 등대와 종루, 납골탑, 선착장, 그리고 공원을 만든 수호는 그 자신의 동상을 세워 환자들로 하여금 참배케 하다가 끝내는 자신의 동상 앞에서 환자의 칼에 맞아 살해되기에 이른다.

인근 장흥군 출신으로 초등학교 소풍 때 처음 소록도에 와 보았다는 작가는 소설을 쓰던 70년대에 비해서 소록도의 현실은 많이 개선된 것 같다면서도 소록도로 상징되는 바깥의 현실이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3. 김수영과 419 묘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김수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첫 연).

김수영(1921~68)의 이 시는 그의 가장 좋은 시도 아니며 419를 노래한 가장 빼어난 시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1960426일 이른 아침에 쓴 이 시는 419의 순수 절정의 순간을 직접 호흡하고 있다는 미덕을 안고 있다. 이날 나온 이승만 대통령의 사의 표명은 2백명 가까운 젊은 목숨을 바쳐가면서 학생과 시민들이 갈구하던 바의 최대치는 아니더라도 그 최소치에는 가까웠던 것이다.

1960315일의 제5대 정부통령선거는 `국부' 이승만의 본질과 한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기회와도 같았다. 노욕과 망상으로 똘똘 뭉친 우남이 입 안의 혀 같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고자 저지른 미증유의 선거부정은 당장 그날로부터 민중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다.

마산에서 터져 나온 항의시위는 8명의 사망자와 72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그보다는 그날 실종된 한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큰 파장을 몰고 오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11일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몰골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그였다.

김주열의 주검에 다시 십여명의 사상자로 대답한 마산의 2차 시위는 남한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418일 고려대학생 3천여명이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정치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한 사건은 그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19일 성난 학생과 시민들은 종로와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 앞까지 치달아 독재타도를 외쳤으며 경찰은 발포로써 응답했다.

비상계엄령이라는 채찍과 자유당 총재직 사임이라는 당근으로써도 우남은 돌아선 민심을 되잡을 수 없었다. 425일 대학교수단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로 나섰을 때 그의 운명의 나침반은 이미 하와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남에게는 정치적 인간적 실패, 나아가 역사적 죽음으로까지 다가왔을 419는 한국문학으로서는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것은 419가 열어놓은 해방의 공간이 자유로운 문학적 표현을 가능케 했다는 의미와, 419 자체가 두고두고 한국문학의 가물지 않는 수원(水源)이 됐다는 두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시에 있어서 419의 적자는 김수영과 신동엽이었다.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에서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며 4월혁명을 동학혁명에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면서도 그 성과와 한계, 장점과 단점을 냉정하게 가리고자 했다.

김수영에게 있어 4월혁명은 시세계의 전면적인 변모를 가져올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50년대를 철저한 모더니스트로 통과한 김수영은 1960419일을 기점으로 해서 참여적인 사실주의 시인으로 변모한다.

앞서 인용한 시를 비롯해 기도, 육법전서와 혁명, 푸른 하늘을, 만시지탄은 있지만, 방을 생각하며 등 419를 직접 다룬 일련의 시편들은 물론, 가다오 나가다오, 거대한 뿌리,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사랑의 변주곡 등 현실의 치부를 구체적이면서도 신랄하게 까발린 시들이 직 간접적으로 419의 영향 아래 쓰여졌다.

그리고 그같은 변모의 궁극은 뜻밖의 교통사고로 숨지기 불과 보름 전 에 토해놓은 절창 풀이었다. 산문투의 장광설과 거칠것 없는 발성으로 특징지어지던 김수영 시세계의 또한번의 변모를 예감케 하는 이 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는 사실은 한국문학사의 안타까움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전문).

419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그 대신 들어선 것은 자유당과 별다를 것도 없는 민주당 정부였다. 그나마도 1년 뒤에는 박정희 소장의 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419의 이념은 철저히 능욕당했다. 그런 점에서 419는 미완의 혁명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계속 진행중인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작가 김승옥씨가 70년대 초 월간 샘터에 발표한 짧은 이야기에 정직한 이들의 달이 있다. 바로 419일 경무대 앞에서 총상을 입고 그날 밤 수도육군병원에서 숨을 거둔 서울 문리대 수학과 학생 김치호의 마지막을 그린 것이다. 김치호가 말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어요. 부정한 짓을 하면 안 된다구. 그래서 선거를 부정으로 한 사람들에게 선거를 공정하게 다시 하라구 말했어요.()학교 교과서가 주동자예요. 부정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도 부정이라고 가르치는 교과서가!

그 김치호는 지금 서울 수유리 북한산 동쪽 자락에 자리잡은 419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다른 많은 교과서주의자들과 함께.

419 묘지는 혁명 이태 뒤인 1963년 현재의 위치에 조성됐으며 문민정 부가 들어선 뒤 국립묘지로 새단장했다. 평일 오후의 419 묘지는 참배 객이 드문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나온 젊은 엄마들, 근처 국립재활원의 환자들, 노인들, 연인들, 그리고 과자 부스러기를 쪼는 비둘기들로 채워져 여느 시민공원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을 연출한다.

그 풍경을 보면서 생각한다. 419가 추구했던 정신과 이념은 이 묘역의 어디에서 볼 수 있는 것일까. 제가 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일까, 청장년의 나이로 419를 겪었을, 그러나 이제는 다만 무력한 삶의 구경꾼으로 가라앉아 있는 노인들일까. 아니면 유영봉안소니 만장이니 수호자상이니 수호예찬의비니 하는 각종 시설물일까. 419는 성소에서 기림을 받고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이 한정된 넓이의 묘역에 갇혀서 숨막혀 있는 것은 아닐까.

4. 박태원의 천변풍경

청계천은 경복궁 서북쪽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서울의 중 심부를 뚫고 동진한 다음 답십리 부근에서 남쪽으로 물길을 틀어 내려가 다가는 성동구 사근동과 송정동, 성수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중랑천과 합 수해 한강으로 흘러든다.

성수대교와 동호대교의 어름이다. 태백시 인근 에서 샘솟아 강화 북쪽의 서해로 몸을 풀기까지 5가까운 한강의 흐름이 대체로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강의 제2지류인 청계천의 물길은 본류와는 정반대되는 행로를 밟고 있는 셈이다.

본디 이름이 청풍계천(淸風溪川)인 청계천은 그러나 일제 때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교까지가 1차로 복개된 데 이어 1958년부터 시작된 여러차례의 복개로 지금은 용두동과 마장동 어름 이하를 제하고는 정작 물길을 볼 수는 없게 돼 있다.

50m의 아스팔트가 덮이고 그것도 모자라 삼일고가도로가 공중을 가로지르는 지금의 청계천에서 `맑은 개울'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짐작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복개되 기 전의 청계천에는 제법 맑은 물이 흘렀고, 시골의 여느 개울가와 마찬 가지로 아낙들은 빨래더미 속에 일신의 번뇌와 세상 근심을 함께 넣어 두 들기고 비벼 빨았다. 박태원(1909~86)의 장편 <천변풍경>은 바로 이 청계 천 빨래터의 광경으로부터 시작한다.  

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히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 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립지는 않은 모양이다.”

 1936~7년에 걸쳐 월간 <조광>에 두차례로 나뉘어 연재된 <천변풍경>은 일제 통치의 극성기라 할 30년대 중반 서울 서민층의 삶을 꼼꼼히 재현하 고 있다. 모두 50개의 짧은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제목이 가리키는 대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장삼이사들의 삶의 이모저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수십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중심되는 사건도 주인공이라 할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이 소설에서 어찌 보면 청계천이야말로 진짜 주 인공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청계천 주변이라는 것말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과 사건들을 하나의 소설 속에 모아 놓는다.

요컨 대 청계천은 이 소설의 조직원리가 된다. 젊은 첩 안성댁이 학생놈과 보쟁이는 모양을 보고 속을 태우는 민주사, 바람둥이 남편에게 시집을 갔다가 남편의 무관심과 시부모의 학대를 못 이겨 이혼하고 돌아오는 이쁜이,

처녀과부 신세로 호색한인 시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무작정 상경한 금순이,

술집 여급에서 부잣집 맏며느리로 신분이 격상됐으나 남편의 변심과 시댁 식구들의 냉대로 괴로워하는 하나꼬 , 금순이와 하나꼬를 친언니처럼 보살피는 또다른 여급 기미꼬,

시골 가 평에서 상경해 어리보기 취급을 당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서울 깍쟁이로 변모하는 소년 창수,

청계천 다리 밑 움막에 거주하는 거지들.

소설은 이들 천변 인물군상의 1년 남짓한 삶을 카메라의 눈처럼 충실히 좇을 뿐 그것들을 모아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일구어내거나 섣불리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소설은 문득 시작하고 불쑥 끝난다. 기승전결이 따로 없다.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도 천변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고, 소설이 끝난 다음에도 그들의 삶은 아랑곳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럴진대, 소설의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소설 속에서 청계천은 근대와 전근대, 도시와 시골이 만나는 접경이다. 창수와 금순이, 만돌 어멈 등은 각자의 사정이야 어떠하든 시골집을 떠나 서울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시험해보고자 할 때 청계천변을 그 첫 무대로 삼는다.

그곳에는 기생과 카페 여급이 나란히 활보하며, 냉혹한 이익의 추구와 끈끈한 인간애가 공존한다. 시골에서와는 달리 청계천의 빨래터에 는 엄연히 주인이 있어 빨래꾼들에게서 돈을 받아서는 다시 나라에 세금을 낸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모르고 빈손으로 나온 시골뜨기 아낙이 다른 빨래꾼들의 역성 덕분에 첫번의 요금 지불을 면제받을 만큼은 인정이 살 아 있다.  

<천변풍경>은 이처럼 두개의 시대의 공존과 자리바꿈을 세필화의 필치 로 그려내지만, 그것은 그뿐,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임화가 그 자연주의적 편향을 지목해 `세태소설'이라 이름붙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는 소박한 휴머니즘의 관점은 있을지언정 뚜렷한 이념이나 사 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소설 속

어느 인물에게서도 당시의 민족적·계급적 모순에 대한 자각을 엿볼 수 없음은 물론 그에 대한 밖으 로부터의 비판도 부재하다는 사실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바람 없고 따뜻한 날, 남향한 대청에는 햇빛도 잘 들고, 그곳에가 시 어머니와 며느리, 귀돌 어멈과 할멈이, 각기 자기들의 일거리를 가지고 앉아 육십팔원짜리 `콘서트'`···'의 주간방송, 고담이라든 그러한 것을 흥미 깊게 듣고 있는 풍경은, 말하자면, 평화그 물건이었다는 대목은 그 직후에 나온 채만식의 <태평천하><탁류>의 풍자적 어투나 비극적 분위기와 얼마나 다른가.  

박태원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이효석 등 30년대 모더니스트들과 함께 문학친목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해 활동한다. 그들이 내세운 바는 문학적 전문성과 프로의식이었거니와, 그것은 실은 카프 계열의 계급문학에 대한 반발에 다름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1'<천변풍경>은 당시로 보아 최고의 문학적 기교를 갖춘 작품으로서 춘원 이광수와 월탄 박종화 등의 상찬이 잇따랐다.

그 박태원이 해방기에는 좌익계인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을 맡고 한국전쟁 중 월북해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는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한 사실은 지금도 숱한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 다 괜은 소리덮긴, 말이 그렇지, 이 넓은 개천을 그래 무슨 수루 덮는단 말이유? , .”

소설 속 한 인물은 청계천 복개에 관한 소문을 듣고 턱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마나 그 넓은 청계천은 어김없이 아스팔트로 뒤덮이고 이 제 그 위로는 자동차들이 질주한다. 빨래하는 아낙들이 깃들었던 천변의 가옥 자리에는 높직높직한 건물들이 솟아 있다.

한때 맑았던 물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소음과 진동에 짓눌리며 질식 상태로 흘러간다. 광교를 중심 으로 한 소설의 무대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청계천 평화시장은 1970 년 봉제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 을 불사른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감싸안고 오늘도 청 계천의 복개된 도로 아래로는 한때 맑았으나 더이상은 맑지 않은 물이 동 쪽을 향해 흘러간다.

5. 채만식의 탁류

내가 느이허구 무슨 원수가 졌다구 요렇게두 내게다 핍박을 하느냐? 이 악착스런 놈들아!아무 죄두 없구, 아무두 건디리잖구 바스락 소리두 없이 살아가는 나를, 어쩌면 느이가 요렇게두 야숙스럽게아이구우 이 몹쓸 놈들아!”

채만식(1902~50)의 장편 <탁류>의 뒷부분에서 주인공 초봉이는 자신의 눈앞에서 가증스러운 작태를 연출하는 두 사내를 향해 이렇게 울부짖는다.

허랑방탕한 첫 남편 고태수가 결혼한 지 열흘 만에 비명에 가던 날 그의 친구인 꼽추 장형보에게 겁간을 당하고서 무작정 상경길에 오른 초봉이는 기찻간에서 만난 아버지의 친구 박제호에게 자신의 몸과 운명을 의탁한다.

1년 가까운 동거 끝에 초봉이가 아비 모를 딸을 낳을 즈음 초봉이에 대한 정도 식은 제호가 때마침 나타나 아이에 대한 친권을 주장하는 형보에게 자기들 모녀를 떼버리듯 넘겨주려 하자 순량하기만 한 초봉이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채만식이 1937~8<조선일보>에 연재한 <탁류>는 이처럼 선의를 짓밟으며 비비 꼬여만 가는 한 여인의 운명을 통해 식민지시대 한국사회의 그늘을 조망하려 한 소설이다. 초봉이의 기구한 삶의 역정과 초봉이 아버지 정주사의 몰락과정,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는 그 구체적인 실상을 직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음이다.

`인간기념물'이라는 제목이 붙은 소설의 첫 장은 정주사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소개하는 데 할애된다. 선비의 집 자손으로 한일합방 직후부터 13년 동안 군청 서기로 일한 끝에 퇴직한 정주사는 선산과 논 몇천평, 집한 채를 팔아 빚을 갚고 남은 돈 얼마를 가지고 고향 서천을 떠나 군산으로 솔권하여 온다.

하지만, 이곳이라고 뾰족수가 있을 리 없어 미두(米豆) 중매점의 사무원을 거쳐 미두꾼으로 나선 그는 이태 만에 밑천을 날려버리고 거렁뱅이나 다름없는 하바꾼으로 전락한다.

채만식이 그 특유의 풍자적 어투로 일컬은 대로입만 가졌지 수족은 없는 사람정주사는 미두로 대표되는 식민지 수탈사를 증거하는 `인간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정주사의 4남매 가운데 첫째인 초봉이는 아버지와 가족들을 곤궁에서 해방시키는 데 자신의 젊음과 미모를 바치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의 장사밑천을 떼어준다는 거짓 약속을 믿고 고태수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는 초봉이의 모습은 심봉사의 눈을 뜨이겠다는 일념으로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가는 심청이의 효성을 연상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생 계봉이가아주 켸켸묵은 생각으로 폄하하는 초봉이의 봉건적 자기희생의 이데올로기는 훗날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는 형보의 사슬에 스스로를 얽어매는 데서 또한번 위력을 발휘한다. 형보의 등장으로 제호라는 끈이 떨어진데다 말을 듣지 않으면 딸 송희에게 해코지를 하겠다는 협박에 닥뜨린 초봉이는 사태를 이렇게 정리한다.

형보? 좋다, 형보는 말고서 형보보다 더한 놈도 좋다. 원수는 말고 원수보다 더한 것도 상관없다. 송희만 탈없이 편안하게 기르면 고만이다.”

갖은 학대와 악행을 견디다 못한 그가 결국 형보를 타살하고 살인자의 처지로 영락하는 과정은 그의 시대착오적 봉건 이데올로기와 운명에 대한 소극적 순응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그 한켠에서는 식민체제에 대한 작가의 분노가 읽히는 듯도 하다.

악의로 똘똘 뭉친 형보를 독초(毒草)에 비유하고 그것을 가꾸는 `육법전서에의 울분을 삼키는 등장인물 승재의 모습이라든가 천하에 몹쓸 악당. 그놈을 죽였다구 그게, 그게 죄란 말이냐라는 초봉이의 절규에서 안중근과 이봉창 윤봉길 등의 거사를 연상했다면 지나친 것일까.

그렇다면 소박한 휴머니스트라 할 승재의 경우를 살펴 보자. 고아 출신 의사로 갑돌이 갑순이식 연애의 상대였던 초봉이가 갑작스레 결혼한 뒤 그의 동생 계봉이에게로 마음을 돌린 승재는 가난하고 무지한 동포들을 위해 무료로 의술을 베풀고 야학에 참여하는 등 깜냥껏 애써 보지만, 체제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는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계봉이와 나눈 대화에서는 가난의 원인이 분배의 불평등에 있다는 말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더 깊이있는 인식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한다. 사태의 핵심에 가 닿기 직전에 멈칫거리는 태도에서 검열의 그림자를 본 것 역시 지나친 것일까.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의 당대에 식민 조선의 암담한 현실을 상징했던 금강 하류는 여전히 흙빛을 머금은 채 서해로 흘러든다. 정주사 일가가 새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군산을 향해 똑딱선에 올랐던 장항읍 용당에서 서쪽으로 2떨어진 도선장에서는 지금도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당 두차례씩 군산행도선이 강을 건넌다.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지금의 군산여고 앞 월명동 일대에는 그때 지어진 일본식 가옥들이 잘 가꾼 정원수와 함께 남아 있어 마치 일본의 한 마을을 재현한 영화 세트와도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런가 하면,

급하게 경사진 언덕비탈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낡은 생철집 오막살이들이, 손바닥만한 빈틈도 남기지 않고 콩나물 길듯 다닥다닥 주어박혀, 언덕이거니 짐작이나 할 뿐인 것이다.”

6.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중국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천원이 없어졌고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버렸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고, 나는 `악센트 찍는 문제를 모두 틀려버렸단 말야, 악센트 말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거리는 영화광고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고 한산했고, 그러나 여전히 소주 광고는 부지런히, 약 광고는 게으름을 피우며 반짝이고 있었고, 전봇대의 아가씨는 `그저 그래요'라고 웃고 있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1964년 겨울 서울의 한 포장마차에서 세 남자가 만난다. 김이라는 성을 가진‘`'는 사관학교를 지원했다가 실패하고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고, 대학원생 `’'은 부잣집 장남으로 두 사람은 모두 스물다섯살이다.

서른대여섯 돼 보이는 또 다른 사내는 서적 외판원. 처음에 말문을 튼 안과 `'는 학력과 처지의 천양지차에도 불구하고 바깥 세상과는 겉돌고 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나중에 합류한 제3의 사나이는 사랑하는 아내가 병으로 숨지자 그 시신을 병원에 판 뒤 낙담과 죄책감으로 시체 판 돈을 다 써버리자고 스물다섯살짜리들을 유혹한다.

억지로 돈을 쓰러 돌아다니던 세 사람은 불자동차 뒤를 쫓아가 불구경을 하는데, 상처한 사나이는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남은 돈을 던져버린다. 세사람은 그날 밤 같은 여관의 서로 다른 방에 투숙하며, 다음날 이른 아침 상처한 사나이가 밤사이 자살한 것을 알게된 두 젊은이는 몰래 여관을 빠져나와 기약없이 헤어진다.

그러니 어쨌단 말인가.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쓴 것일까. 젊어서 이미 늙은 것들의 말장난 같은 대화와 상처한 중년의 자살로 채워진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이, 그것도 한국 소설사에 우뚝한 작품이 되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그리고, 이런 이야기의 제목을 `서울 1964년 겨울'이라 단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선, 1964년 겨울로 돌아가 보자.

그해 겨울은 추웠다. 한일기본조약 반대와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은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면전에 나선 군사정부에 의해 패퇴했다.

419가 열어젖힌 해방과 자유의 공간을 군홧발로 짓밟은 박정희 소장. 그를 상대로 한 싸움을 별러왔던 학생들의 반격이 63사태로 불리는 64년 여름의 용틀임이었다.

그 용틀임이 무위로 돌아가자 이제 학생들에게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