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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필사의 기쁨

by 자한형 2023.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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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의 기쁨/김선오 시인

필사하는 습관은 십 년쯤 전부터 생긴 것이다. 좋은 책이 있으면 읽고 도그지어를 접어두거나 밑줄을 긋기도 하지만 직접 따라 적어보는 것이 글을 음미하기에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책에 연필로 쓰기보다는 키보드로 타이핑하는 경우가 많기에 필사보다는 필타란 단어가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무엇이 됐든 타인의 글을 내 손으로 옮겨보는 행위는 한결같은 안정감과 기쁨을 준다.

마음이 복잡할 때, 중요한 글을 쓰기 전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을 때, 그저 좋은 글을 나의 글씨로 보관하고 싶을 때 필사를 한다. 필사 대상이 되는 텍스트는 다양하다. 시나 소설 같은 문학이기도, 기사나 평론 등의 비문학이기도, 누군가의 인터뷰 내용과 같은 구술 기록이기도 하다. 글을 쓰다 나의 문체가 지저분하게 느껴질 때에는 단문의 깔끔한 문체를 가진 작가의 글을 필사하고, 단조롭게 느껴질 때에는 격정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문장들을 따라 적는다. 그럴 때면 내가 쓰는 글이 오로지 나의 것이 아니며 기나긴 역사에 걸쳐 글을 읽고 써온 수많은 이들의 유산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단순한 독서 행위와 달리 필사는 대상 작가의 이런저런 면모들을 나의 몸에 새기는 일이다. 필사하는 동안 쓴 사람의 생각의 결을 따라가게 되고, 그것은 내 기질과 습관의 일부를 이룬다. 더 나아가 사유 방식이 그 작가를 닮아가게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필사노트는 일종의 일기장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가 어떤 취향과 생각을 지나왔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록물이 된다. 또한 보통 시는 전문을, 산문의 경우 일부분을 발췌해 필사하는데,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거나 글에 인용문이 필요할 때에 찾아볼 수 있는 나만의 아카이브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제 문득 확인해 보니 그간 필사했던 텍스트들이 천 편가량이다. 이 글 역시 내가 필사한 천 편의 글들에 빚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겸허해지고, 또다시 마음을 비우고 타인의 글을 필사해야겠다는 동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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