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1
세계 바둑계를 배경으로 삼국지를 쓴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한.중.일 동양 삼국이 바둑의 중심국이기에 구성요소는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삼국의 비중도 결코 어느 한 나라에 기울지않고 팽팽한 황금분할을 이루고있어 균형적이다.
중국은 바둑의 발상지이자 엄청난 바둑인구를 지니고있는 종주국(宗主國)이고, 일본은 바둑을 예(藝)와 도(道)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중흥국(中興國)이며, 한국은 앞서 거론한 두 나라들과의 진검승부에서 승승장구를 거둔 강대국(强大國)이다.
삼국의 바둑영웅들이 펼친 극적 드라마를 소재로 삼국지를 구성한다면 세계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한 한국의 기사(棋士)들이 단연 주인공에 캐스팅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 주연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조훈현을 택하겠다.
현대바둑 초창기에 바람을 일으킨 천재 오청원은 바둑 삼국지를 태동시킨 공로자로 족하고, 면돗날 사카다 역시 삼국을 아우르기에는 놀았던 무대가 좁았으므로 큰 역할을 주기엔 좀 아쉬운 감이 있다.
불굴의 투혼으로 일본기단을 주름잡았던 조치훈 역시 세계기전에서 실력발휘를 하지 못했으므로 일국의 맹주로 매김할 수밖에 없다.
그 이외에 기라성같은 영웅호걸들이 즐비하지만 그 어떤 인물도 조훈현의 기록과 업적을 능가할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한 사람, 세계 랭킹 1위 이창호가 기록상으로 조훈현을 앞서지만 그의 존재는 조훈현을 더욱 빛나게 하는 현재진행형, 혹은 미래형으로써 자리를 비워두고 싶다.
조훈현의 위대성은 침체되어 있던 한국바둑계를 세계정상으로 끌어올렸다는 점, 그리고 이창호를 제자로 키워 바둑천재의 계보를 이었다는 점, 이 두 가지만으로로도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할 것이다.
삼국지의 오프닝은 아무래도 중.일 수퍼대항전이 적합하리라.
그 이전까지의 주무대는 역시 일본-
16세기부터 시작된 명인기소(名人碁所) 쟁취의 역사는 고스란히 일본바둑의 역사로 이어진다.
최후의 혼인보(本因坊) 슈사이를 끝으로 일본바둑은 권위의 시대에서 실력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대륙출신의 풍운아 오청원은 번뜩이는 창의력과 질풍같은 전투력으로 난세를 평정하며 일본기사들을 자극한다.
칫수 고치기 10번기를 통해 날고 기는 강자들을 꺾으며 제국시대와 전후까지 명성을 날렸다.
그의 배턴을 이어받은 인물은 사카다.
치열한 접근전으로 승부사(勝負師)라 불리운 사카다는 60년대를 전횡(專橫)하다시피 하면서 63개의 타이틀을 획득한다.
사카다의 시대를 마감시킨 인물은 대만출신기사 임해봉.
대륙적 기풍의 임해봉은 동포 오청원이 발굴한 천재이기에 더욱 드라마틱하다.
중국바둑은 일본보다 발전이 늦었지만 이미 그 시절에 오청원과 임해봉이란 양대산맥을 통해 현대바둑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국기사들의 계보는 이후, 섭위평-상호. 임해봉-왕립성으로 이어진다.)
임해봉 이후는 춘추전국시대이자 기타니 도장 일문의 시대로 접어든다.
컴퓨터 이시다. 미학자 오오다케. 대마 킬러 가토. 실전파 고바야시. 우주류 다케미야 등의 군웅할거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기성, 본인방, 명인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쥐어 대삼관(大三冠)을 달성한 조치훈은 그들 중 막내에 해당하지만 질량면에서 군계일학으로 돋보인다.
이 시대야말로 바둑계의 르네상스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 때의 인물들이 아직까지도 세계바둑계의 맹주로 행세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바둑계도 이 무렵 인재들을 일본에 보내 큰물을 경험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개척자인 조남철 선생을 비롯해 김인, 윤기현, 하찬석 등이 기타니 도장에서 체계적인 바둑수업을 받고 귀국해 국내바둑계를 풍요롭게 했고, 조훈현과 조치훈, 두 천재가 조기유학을 와 천부의 재능을 닦고 있었으니까.
조훈현은 조치훈을 비롯한 다른 유학파 기사들과 달리 기타니 도장이 아닌 세고에 도장에 입문함으로써 독특한 배경을 갖게된다.
세고에 도장은 천재사관학교.
중국인 천재 오청원과 일본 관서기원의 총수 하시모토가 거쳐간 곳이다.
당시 고령(高齡)이었던 세고에 9단은 조훈현의 기재를 알아보고 마지막 제자로 받아 들인다.
그리하여 동양 삼국의 천재 세 명을 휘하에 거느리는 복을 누린 것이다.
그 무렵 기타니 도장은 걸출한 인재들이 득실거리는 양산박이라고 해도 좋았다.
조훈현이 조치훈과 함께 기타니 도장에 입문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또래의 강자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며 성장했을 테지만 한적한 세고에 도장으로 들어가면서 고독한 황태자로서의 면모를 얻게된다.
오청원과 하시모토를 사형으로 두고 괴물기사 후지사와로부터 실전의 가르침을 받은 조훈현은 그래서 하늘이 내린 재주와 행운을 완벽하게 거머쥔 천재인 것이다.
다시 물줄기를 삼국지로 돌리자면, 조훈현이 귀국해 한반도를 평정하고 있을 때 대륙에서 섭위평이라는 거물이 등장해 중일 수퍼대항전의 스타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중국팀의 주장이자 최후의 수문장으로 버티면서 일본의 고수들을 연파, 바둑 종주국 중국의 위상을 드높인다.
그 동안 한국과의 정기교류전은 실력차이를 이유로 회피했던 일본이 중국의 도전을 받아들인 것은 다분히 한 수 가르침을 준다는 시혜의식이 발로됐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1985년 제1회 중.일 수퍼대항전의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중국측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섭위평은 막판벼랑에 몰린 상태에서 일본의 3장 고바야시, 2장 가토, 주장 후지사와를 차례로 물리쳐 승발전(勝拔戰)의 묘미를 한껏 과시하며 스타가 된 것이다.
중.일 수퍼대항전은 바둑선진국을 자처하는 일본의 오만을 여지없이 뭉개버린 일대사건이었으며 중국바둑이 세계로 진출하는 전환점이었다.
대만출신 응창기씨가 바둑올림픽이나 다름없는 응창기배 국제대회를 창설한 것도 딴에는 섭위평을 염두에 두었다는 설이있다.
세계최초의 국제대회를 중국인에게 빼앗길 수 없어 일본이 부랴부랴 후지쯔배를 창설했다는 것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아무튼 우승상금 40만불을 놓고 당대의 검객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응창기배 바둑대회에서 한국은 달랑 조훈현 한 명밖에 초청을 받지 못한다.
그만큼 우리 바둑이 푸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처음엔 대회참가를 보이코트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조훈현은 단기필마로 출전, 고바야시와 임해봉을 연파하고 결승에 오른다.
결승대항마는 역시 섭위평-
철의 수문장 섭위평과 조훈현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제1회 응창기배 결승에서 만난 두 사람의 혈전은 적벽대전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이 세기의 라이벌은 중국 항주와 싱가폴을 오가며 5번기를 펼친다.
최종 스코어는 3:2.
실로 극적인 역전승이었고 한국바둑의 저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쾌거였다.
이름하여 싱가폴 대첩.
지극히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치열한 투혼과 지략을 동원해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조훈현 개인은 40만불의 거금과 바둑황제라는 칭호를 획득했고, 한국바둑은 이 때부터 중국, 일본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삼각의 한 모서리를 차지하게 된다.
중.일 수퍼대항전을 통해 기세등등했던 섭위평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실족, 진정한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지 못한다.
그는 충분히 강했지만 동시대에 조훈현이라는 천재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사상최초, 사상최대의 큰 승부에서 조훈현의 벽에 부딪힌 섭위평은 바로 그 순간부터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무려 4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무렵 섭위평은 공공연히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우리는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다. 훗날 나의 제자들이 성장하게 되면 당신들은 중국바둑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 호랑이 새끼는 다름아닌 상호로 밝혀졌는데-
섭위평이 말한 훗날의 판도는 어떠한가?
상호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여 중국대륙의 1인자로 떠올랐지만 이창호의 벽을 넘지 못해 힘겨워 하고 있지 않은가?
대를 이은 사제대결에서도 조훈현, 이창호 콤비는 완벽하게 바둑황실의 옥새를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요소들인가!
조훈현의 이름 석 자 앞에 무수한 찬사와 수식어가 붙어 왔지만 ‘바둑황제’라는 말 이상 적합한 어휘는 없다.
세계최연소 9세 입단에서부터 최고령 타이틀 보유기록에 근접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생명력.
국내 전관왕 및 국제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비롯해 무려 150여 회의 타이틀 획득기록과 세계 최다승 기사로 자리매김된 찬란한 업적.
청출어람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준 이창호의 배출.
조훈현의 삶은 경이의 연속이었고, 아직도 승부의 최전선에서 맹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경이로운 시선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조훈현의 고향은 어디인가?
전남 목포와 영암 두 지역을 두고 설왕설래 논란이 많은데 두 군데 모두 고향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창녕 조씨 일파가 뿌리내린 곳은 영암군 회문리.
남도의 소금강으로 유명한 월출산(月出山)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 곳에서 조씨 문중은 크게 부유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지적(知的)인 가풍을 유지하며 대를 이어왔다.
문중에 교사출신들이 많았으며, 조훈현의 부친인 조규상 씨도 일제시대 때 동경의 메이지(明治)대학을 나온 인텔리였다.
조훈현의 가족은 2남 4녀.
위로 형이 한 명, 누나가 세 명, 아래로 여동생이 한 명이다.
형제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가문의 분위기는 역시 어디로 가지 않는다.
장남 조종현 - 영화 필름 도매업.
장녀 조복심 -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
차녀 조경자 - 국립도서관장.(여성 최초)
3 녀 조연희 - 교육용 교재제조.
4 녀 조현숙 - L.A에서 사업으로 성공.
아무튼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영암 땅의 인텔리 조규상은 무안출신 부농집 딸 박순례와 결혼하여 월출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았었는데 자식들이 한결같이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다는 것이 영암 사람들의 증언이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사각모를 썼던 조규상의 지적 혈통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가족들의 분석에 의하면 모친 박순례 여사의 유전적 영향력이 훨씬 크다고들 입을 모은다.
잠깐 조훈현의 모친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이 분은 지금도 평창동 저택에서 곱디고운 백발의 모습으로 건재하는데 기억력이 보통 비상한 게 아니어서 한때 프로야구 선수들의 타율과 연봉을 훤히 외울 정도였다.
아들의 대국일자와 전적은 물론이고 상대기사의 프로필과 기풍까지도 줄줄 꿰는 걸 보고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으니까.
일본어에도 능통해 팔순이 훨씬 넘은 최근까지도 일본기원에서 발행되는 <碁道>지를 읽곤 했었다니 가족들의 분석이 꽤나 신빙성이 있는 셈이다.
조씨 일가가 영암에서 목포로 이사한 것은 해방 직후이다.
그러니까 조훈현은 그 이후 목포에서 출생하게 되는데 어쨌거나 조씨 문중의 요람은 아직까지도 많은 친척들이 살고 선산이 있는 영암이므로 바둑황제의 본향이 영암이라 해도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