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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물

강희제

by 자한형 2021.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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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는 청나라 4대 황제이다. 순치제의 아들로 태어나 8세에 왕위에 올랐다. 14세에 직접 통치하게 되었고 60년간 제위에 있었다. 청나라의 기초를 닦았고 청나라의 실질적인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청나라는 만주족에서 탄생이 되었다. 누르하치라는 인물이 개국 하였었다.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도르곤이라는 인물도 있었고 멸망해가는 왕조 명나라와의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라는 인물이 청나라로 돌아서면서 명의 운명은 종국을 고하게 된다. 이후 섭정왕 도르곤의 시대를 거쳐 순치제가 등극하게 되고 얼마후 강희제가 보위를 이어받게 된다.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힌다. 처음에는 4명의 보정 대신이라는 이들이 통치하고 있었으나 병부상서인 오배라는 인물을 제거하고 직접통치를 하게 된다. 오배는 사형을 선고받게 되나 청을 위해 온몸에 상처를 입으며 청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으로 해서 종신형으로 감형되기도 한다. 오삼계 등이 일으킨 삼 번의 난을 평정한다. 운남 귀주지역의 평서왕 오삼계, 광동지역의 평남왕 상가희, 복건의 정남왕 경중명이 삼 번이었다. 오삼계는 반란을 꾀하던 중 병사하게 되고 강희제는 삼 번을 평정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그 후에 나오는 부분이 대만의 정성공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또다시 대만 정벌에 나서게 된다. 국력을 강화해서 대만을 정복함으로써 확고한 중국 통일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다음으로 문제가 된 곳은 몽골 지역의 준가르였다. 4회에 걸친 정복과 원정을 통해 이들을 격파한다. 일황자가 불모로 잡히기도 하고 우여곡절 끝에 몽고족을 격파하게 된다. 한창 원정을 하고 있던 때에 자신의 할머니였던 효장태후가 영면하고 만다. 효장태후는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죽을 때에 홀로 가자고 작심을 해서 모든 주위 사람을 물린 후 홀로 죽음을 맞는다. 준가르는 강희제의 공주를 시집보냄으로써 사위의 위치에 있었으나 정복해버리고 만다. 외손자는 강희제에 패배한 후에 복수를 다짐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중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남경 등으로의 순행을 하기도 했었고 한 족의 잔당들에 의해 암살의 위험에 처해지기도 하나 잘 극복해 낸다. 처음에는 효장태후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독자적으로 중국 천하를 통치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3명의 황후와 여러 후궁 사이에 35명의 황자를 두게 된다. 그는 그중 둘째 윤잉을 황태자로 선정하였으나 후년에 이르러 황태자로의 처신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폐위시키고 만다. 다음 해에 다시 황태자로 복위시키기도 하나 결국 두 번째 폐위를 시키고서는 황태자를 정하지 않게 된다. 자금성의 한 양심전 편액 뒤에 다음 황제가 될 자를 적은 것을 봉인해 두고 자신의 사후에 열어 보라고 한다. 4황자와 팔황자가 보위를 노리게 되나 최종적으로는 4황자가 보위를 잇게 되고 그는 후에 옹정제로 칭하게 된다. 처음 8살 무렵의 어린 시절에 천연두를 앓게 되어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나 한 처자의 간호로 살아나게 된다. 그 때문에 순치제의 총애하던 후궁은 목숨을 잃게된다. 순치제는 이를 기화로 왕위를 버리고 불가에 입문하게 된다. 제후들도 항상 긴장하게 하였고 잘못이 있을 때면 가차 없이 처벌을 내렸다. 문화적으로 강희자전을 편찬케 하기도 하고 청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총애하던 후궁을 내치기도 하는 등 공평무사한 일면을 보이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 이월하라는 작가에 의해 3황제의 대하소설이 편찬되기도 했다. 강희제 12권 옹정제 10권 건륭제 18권 합계 40권이 나와 있다. 드라마로도 편성되어 제작되기도 했다. 진도명이란 배우가 강희제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총애하는 대신들과 황후들 그리고 황자들 간의 갈등과 알력 속에서 제대로의 황제위를 물려주기도 했다. 아들도 아들이었지만 손자의 인물됨을 보고 후계를 정했다는 설도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표상으로 삼았던 이는 명의 건국에 혁혁한 업적을 이룩한 명 태조 주원장이었다고도 한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황제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몸소 보여 주었고 중국 번영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엄청나게 열심히 국사를 돌보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던 현명하고 위대한 황제로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서거 소식을 듣자 전 국민이 오열하고 통곡하였다는 것에 그가 얼마나 훌륭한 성군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들 옹정제는 14년 제위 하였고 손자 건륭제는 60년 제위 후에 물러나 3년을 상황제로서 더 통치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3황제가 청나라의 융성을 가져왔고 130여 년 동안에 번영한 시대를 열었던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태조와 태종 그리고 세종이 조선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듯이 말이다. 항상 책을 가까이 하였고 인재를 소중히 하였으며 강희제 본인도 학문을 사랑하면서도 무예를 익히는데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화살의 명수로서 강궁을 몹시 잘 다루었다고 하고, 사냥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또한 만주족 전통의 기마술이나 무예도 부지런히 익혀 문무를 겸비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에 탐닉하는 폭식을 하지 않았고 음식을 분별 있게 먹으며 나이가 들고 나서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항상 범람하는 황하 강에 운하도 건설해서 치수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다. “국궁진력(鞠躬盡力) 후 안거낙업(安居樂業)”이라는 것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그리고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해주고 즐겁게 일에 종사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우리 조선왕조의 최대재위 왕은 영조라고 하고 그 재위기간은 52년이라고 했다. 그런데 강희제는 그보다 8년을 더한 60년의 재위기간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며 한족 자체도 만주족에 복종하게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었던 듯하다. 한 시대 두세대를 재위한 전무후무한 업적과 위업을 이루어낸 황제였다. 인간적으로 어떤 면에서는 혹평이 가해질 수도 있으나 왕조를 위해서 헌신했었고 백성의 안위를 지키고 보전하기 위해 노력했던 황제였었다.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 인물로 항상 존경과 귀감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