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물어

노르웨이 숲

by 자한형 2023. 10. 25.
728x90

노르웨이 숲/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고개를 들고 북해 상공을 덮은 검은 구름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거나 떠나간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

열여덟 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다. 며칠 계속된 부드러운 빗줄기로 여름 내내 덮어썼던 먼지를 깔끔이 씻어 내린 산 능선은 깊고 선명한 파랑을 띠고, 억새 꽃을 흔들며 불어 가는 10월의 바람 속에서 길고 가느다란 구름이 파란 하늘에 차갑게 달라붙어 있었다. 가만히 쳐다보노라면 눈이 아릴 만큼 높은 하늘이었다.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실제로 그 속에 있을 때 나는 풍경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열여덟 해나 지난 뒤에 풍경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내게는 풍경 따위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때 내 곁에서 걷던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나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그 초원의 풍경이다 풀 냄새, 살짝 차가운 기운을 띤 바람, 산 능선, 개 짖는 소리, 그런 것들이 맨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 사람 모습은 없다. 아무도 없다. 나오코도 없고 나도 없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나는 생각해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나 소중해 보인 것들이, 그녀와 그때의 나, 나의 세계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그래, 나는 지금 나오코의 얼굴조차 곧바로 떠올릴 수 없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아무도 없는 풍경뿐이다.

"저기, 와타나베, 나 좋아해?" "물론이지." "그럼 내 부탁 두 가지만 들어줄래?" "세 가지 들어줄게." 나오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돼. 하나는, 이렇게 나를 만나러 와 준 것에 대해 내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하는 거." "또 보러 올게. 다른 하나는?"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물론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그런데도 기억은 어김없이 멀어져 가고, 벌써 나는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며 문장을 쓰다 보면 때때로 격한 불안에 빠지고 만다. 불현듯 혹시 내가 가장 중요한 기억의 한 부분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이 지금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이미 희미해져 버린, 그리고 지금도 희미해져 가는 불완전한 기억들을 꼬옥 가슴에 품은 채 뼈라도 씹는 기분으로 나는 이 글을 쓴다. 나오코와 나눈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기즈키가 죽은 후 졸업할 때까지 열 달 남짓, 나는 주변 세계 속에서 내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도쿄의 사립 대학을 선택해서 시험을 쳤고, 딱히 별다른 감흥도 없이 입학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데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도쿄에 도착해서 기숙사로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모든 것과 나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내 속에 희뿌연 공기와도 같은 덩어리가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덩어리는 점점 더 또렷하고 단순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나는 그 덩어리를 말로 바꾸어 낼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말이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그때까지 나는 죽음이란 것을 완전히 삶에서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했다.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편에 있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날 밤을 경계로 이미 나는 죽음을(그리고 삶을)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적인 존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이미 갖추어졌고, 그런 사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잊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 열일곱 살 5월의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잡아챈 죽음은 바로 그때 나를 잡아채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나 그렇게 걸었다. 그녀가 앞서고 내가 조금 떨어져서 뒤를 따랐다. 나오코는 여러 종류 머리핀으로 늘 오른쪽 귀를 내보이게 꽂고 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에 나는 점점 나오코에 대해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무사시노 외곽에 있는 여대에 다녔다. 영어 교육으로 유명한 아담한 대학이었다. 그녀는 정말 간소하고 간결하게 살았고 친구도 거의 없는 듯했다. "내가 이 대학으로 정한 건 우리 고등학교에서 여기 오는 애가 하나도 없어서야." 나오코는 웃으며 말했다. 조금씩 나오코는 나에게 익숙해지고 나도 나오코에게 익숙해졌다. 그즈음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그리 대단한 건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결코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기즈키라는 이름도 우리 대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가을이 끝나고 차가운 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갈 무렵이 되자 그녀는 때로 내 팔에 몸을 기대기 시작했다. 두꺼운 더블코트 천 너머 나오는 나오코의 숨결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나오코도 고무 밑창이 달린 신발을 신은 탓에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도로에 떨어진 메마른 플라타너스 이파리를 밟을 때만 바스락바스락 마른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오코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갈구하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팔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나의 온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온기이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뭔지 모를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그녀의 눈은 이전보다 더 투명해진 듯했다. 갈 곳 없는 투명함이었다. 때로 나오코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마치 뭔가를 애타게 찾는 사람처럼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쓸쓸함인지 애절함인지 모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즐겨 책을 읽었지만 많이 읽는 타입은 아니고 마음에 드는 책을 잡으면 몇 번씩 반복해서 읽는 편이었다. 그즈음 내가 좋아했던 작가는 트루먼 커포티, 존 업다이크,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챈들러 등이었는데, 학교에서나 기숙사에서나 그런 종류 소설을 좋아해서 읽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애들은 주로 다카하시 가즈미, 오에 겐자부로, 미시마 유키오, 또는 현대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당연히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고 나는 혼자서 묵묵히 책만 읽었다.

나오코의 생일에는 비가 내렸다. 나는 학교가 끝난 다음 가까운 곳에서 케이크를 사 들고 전철을 타고 그녀의 방으로 갔다. 나오코가 와인을 땄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고 케이크 한 조각을 먹고 간단히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난 다음 우리는 설거지를 하고 바닥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남은 와인을 비웠다. 내가 한 잔을 마실 동안 그녀는 두 잔을 마셨다. 나오코는 그날 드물게도 말을 많이 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그녀의 말투 속에 내포된 뭔가가 점점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했다. 뭔가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이야기 하나하나는 나름대로 줄거리를 갖추었지만 이야기를 연결하는 방식이 아무래도 좀 묘했다. 처음에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지만 어느덧 그것도 그만두고 말았다. 창밖에는 비가 내렸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나오코는 혼자서 말을 이어 갔다. 그녀는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뭔가를 끌어안은 채 아무래도 좋은 일들을 세부에 걸쳐 언제까지고 말을 이어갔다. 불현듯 나오코가 말을 멈추었다. 이야기가 끝난 것이다. 말꼬리가 잘려 나간 듯이 허공에 떠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툭 끊어져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볼을 타고 흘러 툭 하고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레코드 재킷에 떨어졌다. 그녀는 두 손을 바닥에 짚고 몸을 앞으로 웅크린 채 토해 내듯 울었다. 그녀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나오코를 안았다. 올바른 행동이었는지 아닌지 난 모른다.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도 영원히 모를 것 같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것 말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흥분한 상태였고, 혼란에 빠졌고, 나를 통해 그것을 가라앉히고 싶어 했다. 모든 것이 끝난 다음 나는 왜 가즈키와 자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런 건 묻지 말았어야 했다. 나오코는 내 몸에서 손을 떼고 다시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창밖에서 내리는 4월의 비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는 그쳐 있었다. 나오코는 내게 등을 보이고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줄곧 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잠들었건 깨었건 그녀의 입술은 모든 말을 잃었고 몸은 얼어붙은 듯 딱딱했다. 나는 몇 번이나 말을 걸어 보았지만 결국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고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녀의 벌거벗은 어깨를 바라보다가 체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전화는 없었다. 나오코가 사는 연립주택은 전화 연결을 해 주지 않는 곳이라 나는 일요일 아침에 고쿠분지까지 찾아갔다. 그녀는 없었고 문에 붙었던 명패가 벗겨졌다. 창에 달린 덧문도 닫힌 채였다.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사흘 전에 이사를 갔다고 했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고베 주소로 그녀에게 긴 편지를 썼다. 나오코가 어디로 이사를 갔든 그녀 앞으로 가게 될 것이다. 나는 내 느낌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나는 많은 것을 아직 잘 모르겠고 알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은 하지만 거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거야.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내가 어떤 자리에 서 있을지, 지금의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어.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아무 약속도 할 수 없고, 뭔가를 요구하거나 그럴 듯한 말을 늘어놓을 수도 없어.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도 몰라. 그렇지만 만일 네가 나에게 시간만 줄 수 있다면 나는 있는 힘을 다할 거고 결국 우리는 서로를 잘 알게 될 거야.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 그 때문에 우리는 아주 먼 길을 돌아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비뚤어지고 말았어. 아마도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어. 그렇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런 내용의 편지였다.

6월 들어 나는 나오코에게 다시 한 번 긴 편지를 써서 고베의 주소로 부쳤다. 내용은 이전과 거의 같았다. 7월 초에 나오코에게서 편지가 왔다. 짧은 편지였다. "답장이 늦어져서 미안. 결론부터 말할게. 일단 대학을 한 해 휴학하기로 했어. 일단이라고는 했지만 다시 대학에 돌아가지는 못할 거라 생각해. 휴학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절차상의 편의 때문이다. 이런저런 일들,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 정말로 나 스스로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하는 일이야. 고쿠분지에 있는 집을 떠난 다음 나는 고베 본가로 돌아와서 잠시 병원에 다녔어. 의사 선생님이 교토 산속에 내게 잘 맞는 요양소가 있다고 소개해 주어서 잠시 거기 가는 게 어떨까 싶었어.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것은 외부와 차단된 조용한 장소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인 것 같아. 네가 지난 일 년 동안 내 곁에 있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감사하는 마음이야. 넌 내게 상처를 주지 않았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거든. 난 아직 널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어.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너에게 바로 편지를 쓸게. 네가 말했듯이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알아야 할 거야." 이 편지를 몇백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나오코가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슬픔이었다. 나는 그 애달픈 마음을 어떤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릴 수도, 마음속 어떤 장소에 간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내 몸을 스쳐 가는 바람처럼 아무런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편지 고마워." 나오코의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몇 줄을 읽은 것만으로 내 주위의 현실 세계가 스윽 그 색이 바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고 계속 읽어 내려갔다. "여기 온 지도 벌써 넉 달이나 지났네." 나오코는 그렇게 이어 갔다. "그 넉 달 동안 너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어. 그리고 생각할수록 내가 너에게 공정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 나는 너에게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공정하게 행동해야 했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이런 생각도 그리 올바른 것이 아닐지 몰라. 왜냐하면 나 정도 나이의 여자애라면 결코 '공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 '공정'이라는 말이 아주 꼭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튼 난 내가 너에게 공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런 태도로 널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상처를 주었던 것 같아. 그렇지만 그러는 가운데 나 스스로도 방황했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어. 만일 내가 너의 내면에 어떤 상처를 남겼다면 그것은 너만의 상처가 아니라 나의 상처이기도 해. 그러니까 그 때문에 날 미워하진 마.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야.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불완전한 인간이야. 그래서 더욱 네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 네게 미움을 받는다면 난 정말 산산이 부서져 버릴 거야. 난 과거에 비해 많이 회복한 듯한 느낌이 들고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해 줘. 이렇게 안정된 마음으로 편지를 써 보는 것도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7월에 네게 보낸 편지는 피가 말라 버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 썼지만(솔직히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아. 아주 말도 안 되는 편지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써.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아. 때로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곤 해. 만일 나와 네가 아주 정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에서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내가 정상적이고 너도 정상적이고(애당초 정상적이지만) 그리고 기즈키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지만 이 만약이 너무도 크네. 사정이 허락할 때 한번 와 줘.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릴게."

나오코가 죽은 다음에도 레이코 씨는 나에게 편지를 몇 차례 하면서 그 일은 내 탓도 아니고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며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8월 말 적막이 흐르는 나오코의 장례식을 끝내고 나는 도쿄로 돌아와서 집주인에게 한동안 방을 비울 거라고 인사를 하고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 가서도 미안하지만 한동안 일을 할 수 없겠다고 했다. 그다음 사흘간 매일 영화관을 섭렵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영화를 보았다. 그런 다음에 배낭에 짐을 싸고 신주쿠 역으로 가서 처음 눈에 들어오는 급행열차를 탔다.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돌았는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즈음 내가 걷던 길은 산인 지방 해안가였다. 위스키를 마시고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오코를 생각했다. 그녀가 죽어서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너무도 선명히 그녀를 기억했다. 그녀의 육체는 이미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나오코의 이런저런 모습을 떠올렸다. 내 속에는 나오코의 추억이 너무도 많이 쌓여 조금만 틈이라도 보이면 그것을 비집고 하나하나 바깥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나는 그녀가 비 오는 날 아침에 노란 비옷을 입고 새장을 청소하고 모이 봉지를 나르는 정경을 떠올렸다. 그런 식으로 그녀의 이미지가 파도처럼 끝도 없이 밀려와 내 몸을 기묘한 장소로 밀어 갔다. 그 기묘한 장소에서 나는 죽은 자와 함께 살았다. 거기에서는 나오코가 살아서 나와 말을 나누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했다. 그 장소에서는 죽음이 삶을 정리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거기에서는 죽음이 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는 죽음을 머금은 채 거기에서 살아갔다. 그곳에서 나는 슬픔이라는 걸 느끼지 못했다. 죽음은 죽음이고 나오코는 나오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맞아, 죽는다는 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야, 하고 나오코는 말했다. 그러나 이윽고 물이 빠져나가고 나는 혼자 백사장에 남았다. 나는 무력하고 어디 갈 곳도 없었다. 슬픔이 깊은 어둠이 되어 나를 감쌌다. 그런 때 나는 혼자 울었다. 기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체념하듯 몸에 익혔다. 그건 바로 이런 것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는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문득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잤던 여자 친구가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심한 짓을 했는지 생각하며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상처 입을지에 대해 거의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에 대해 제대로 떠올리지도 않았다. 정말 상냥한 여자애였다. 그렇지만 그즈음 나는 그런 상냥함을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의 되새겨 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금 뭘 하며 지낼까, 그리고 나를 용서했을까.

 

'일본물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물어 18  (0) 2021.11.13
일본 물어 7 신상목  (0) 202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