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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 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월간중앙 연재물),

앙드레 김

by 자한형 202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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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왔던 놀라운 미래인, 앙드레 김/더뷰스

오로지 앙드레 김만이 지닌 것, 영원히 남는 아름다움을 바로 동양의 에스프리로 갈파한 것 또한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그의 삶은 소박했고 정직했으며, 세상을 향한 시선은 따뜻했고, 그의 꿈은 시간을 넘어서서 영원 속을 거닐고 있었으며, 그의 패션은 한국의 미학에 수놓인 정갈한 문양으로 남았다.

앙드레 김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가 지닌 이 빼어난 감수성의 현자(賢者)를 제대로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더뷰스 탐구 : 자기를 세계화한 선구적인 예술고집

앙드레 김, 김봉남(1935~2010)은 자신의 이름을 국제적인 고급 브랜드로 만든 사람이다. 꾸준히 우아한 이미지를 구축해온 그의 삶은, 우연한 기회에 드러난 뜻밖의 촌스러움 때문에 오히려 대중적 친밀감을 키우기도 했다.

촌스러움을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소박함과 열정을 잘 조화시켜 독창적인 자기 세계를 이룬 밑천으로 여겼다. 화제가 되었던 그의 말들을 돌아보면서 우리시대의 현자(賢者)로 살았던 그를 추억한다.

국내 첫 남자 디자이너였던 앙드레 김은 '살롱 앙드레'를 연지 4년만인 19669월 파리의상조합 초청으로 파리패션쇼를 연다. 한국인이 파리에서 패션쇼를 연 것은 처음이었고, 현지 언론들은 '동양의 고요한 나라로부터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고 찬사를 보냈다. 파리 패션쇼가 끝난 후 그는 다시 미국 워싱턴 한국대사관에서 패션쇼를 열었는데, 이때 '석굴암'이라는 이름을 붙인 검은 공단 이브닝 코트를 존슨 대통령 부인에게 기증했다. 그해 11월 내한한 존슨 부인은 공식 만찬에 '석굴암'을 입고 등장했다.

1.

"구파발 출신 김봉남입니다, , 사내 ."

1999824일 오전 10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고급옷 로비 의혹사건 진상조사 청문회.

신동아그룹 최순영 전회장의 부인 이형자를 비롯, 김태정 전 법무장관의 부인 연정희, 강인덕 전 통일부장관의 부인 배정숙, 의류업체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 등이 증인으로 채택되어 출두했다. 이들 외에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도 전국으로 생중계되고 있는 이 자리에 나타났다.

19981216일 서울 신사동에 있는 앙드레 김 의상실에서 옷 두 벌을 전 법무장관 부인에게 판매한 뒤에 다른 사람에게 대납을 요구했는지 신문받기 위해 증인으로 출두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사건과는 상관없이, 그의 본명과 출신지가 공개되어 국민적인 폭소를 자아냈다. 장관 부인도 즐겨입는 고급옷을 만드는 사람이 고집해온 이미지가 '구파발 김봉남'이란 태생적 진실과 부조화를 이루면서 본능적인 웃음을 이끌어낸 것이다.

청문회가 끝났을 때 제대로 밝혀진 사실은 앙드레 김의 고향과 본명 뿐이라는 희화적인 지적도 나왔다. 또 그의 말투를 흉내내어 '()녕하세요 ()자이너예요 ()이름은요 ()봉남이예요'라는 4행시까지 등장해 웃음을 증폭시켰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싶었을까. 청문회 이후 한 신문기자는 "본명이 그의 급소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앙드레 김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이 지어주시고, 주민등록증과 여권, 신용카드마다 적혀있는 김봉남을 한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앙드레 김이란 이름은 프랑스 대사관의 어느 외교관이 '국제적으로 잘 통하는 이름'이라면서 지어주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수는 없다.

김봉남은 서울 은평구 구파발에서 농부 김진산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고양중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고양중학교 1회 졸업생이었던 그는 2007년 모교를 방문해 학교커튼을 앙드레 김 패션으로 바꿔줬다. 이후 장학재단을 만들어 매년 1천만원씩을 지원했다.

그는 구파발의 집에서 삼송리 학교까지 매일 4킬로미터 이상을 걸어다녔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어 읽기 시간엔 가장 먼저 손을 드는 학생이었다면서 세계지리, 세계사, 미술, 음악시간을 좋아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2.

"부산 피난시절, 미 통신부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학생들이 3교대로 일했는데 제가 일한 시간은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였어요. 그때 영어공부를 했는데 실력이 많이 붙었던 것 같아요. 외국인과 대화해도 불편없을 만큼."

그는 영어를 상당히 능통하게 하는 사람이다. 밤잠을 아껴 배우고 익힌 영어가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는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를 두번 잃은 경험을 지녔다. 앙드레 김이 두 살 때 친어머니가 돌아가셨기에 줄곧 새어머니 손에 자랐다. 스물네 살 되던 해에 새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다시 재혼을 했다.

고양군에서 신도초등학교를 나와 고양중학교를 다니던 중 전쟁이 일어났고, 부산으로 피난 가서 그곳에서 한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혼자 서울로 돌아와 공부를 시작했다.

196126세의 나이로 국제복장학원 1기생으로 입학했고 다음해에 졸업했다. 패션공부를 하고 싶은데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어머니가 이름이 나빠 그런 것이라며 김성진으로 개명해준다. 학원을 등록할 때는 김성진이라고 썼다(호적이름은 여전히 김봉남). 학원시절 알게된 지인들은 그를 김성진으로 기억한다. 그 이름은 오래 쓰이지 않았고, 의상실을 연 1962년부터는 앙드레 김으로 통했다.

그가 패션에 입문한 것은 당시 국제 양장사를 했던 최경자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최경자는 국제복장학원 설립자이면서 한국 패션계의 대모다.

그녀의 자서전 '날개를 만드는 사람들의 어머니'에는 앙드레 김에 대한 추억담도 담겨 있다. 학원을 졸업한 1962, 서울 소공동 양복점 사무실을 빌려 의상실을 냈다.

국내 첫 남자 디자이너였던 앙드레 김은 '살롱 앙드레'를 연지 4년만인 19669월 파리의상조합 초청으로 파리패션쇼를 연다.

한국인이 파리에서 패션쇼를 연 것은 처음이었고, 현지 언론들은 '동양의 고요한 나라로부터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고 찬사를 보냈다.

파리 패션쇼가 끝난 후 그는 다시 미국 워싱턴 한국대사관에서 패션쇼를 열었는데, 이때 '석굴암'이라는 이름을 붙인 검은 공단 이브닝 코트를 존슨 대통령 부인에게 기증했다. 그해 11월 내한한 존슨 부인은 공식 만찬에 '석굴암'을 입고 등장했다.

국제올림픽위원장이던 사마란치는 앙드레 김의 팬이었다. 서울, 바르셀로나, 애틀랜타 올림픽 때 항상 앙드레 김 패션쇼가 있었다. 이집트에서도 패션쇼를 선보였다. 나일 힐튼호텔 패션쇼에 있던 수잔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부인은 그 뒤 내한했을 때 앙드레 김을 찾았다. 해외에서 30여 차례, 국내에선 100여 차례 단독 패션쇼를 가져 '국민디자이너'라는 명성을 얻었다.

3.

"엘레강스하면서 우아하고 판타스틱하면서 환상적인"

유행어가 된 이 말은 앙드레 김이 외국어를 많이 쓰지만, 왠지 엉터리일 거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엘레강스와 우아함, 판타스틱과 환상적임은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말을 곱씹어 보면 국제적인 소통과 한국인으로서의 소통을 함께 하고자 했던, 그의 평생의 지향점이 숨어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름대로 패션을 통해 한국의 문화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게 사명이라 여겼고, 패션이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예술적이고 낭만적인 것으로 보여지길 꿈꿔왔습니다. 그래서 국산 소재를 자랑스럽게 썼죠. 사람들이 (나를 국민디자이너라고 부르는 건) 이를 인정해준 것이라고 봐요."

옷로비 청문회 때 밝혀진 사실 중에 앙드레 김의 의상가격도 있었다. 의원들이 그에게 800만원, 1000만원 하는 옷을 판매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정색하며 "그것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앙드레 김은 옷값을 공개했다. 평상복 정장은 135만원에서 200만원, 웨딩드레스나 파티복은 290만원까지 받는다고 했다. 그 이상은 없었다. 김태정 전 장관 부인 옷값 2400만원 의혹은 250만원이 10배 정도 부풀려진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

그는 옷을 고급화하기 위해 모피를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급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남다르게 신경을 썼다. 어느 화장품 회사는 앙드레 김 화장품을 만들자고 제의해왔고 그 뒤 향수, 여성정장, 홈패션, 스포츠웨어, 캐주얼웨어, 베이비웨어, 액세서리, 안경 등에서 제휴 제의가 쏟아졌다. 하지만 로열티가 적어 품위를 지키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앙드레 김은 모두 거절했다.

"저는 처음부터 주한 외교사절을 대상으로 패션쇼를 했기에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옷감을 국산만 썼고 모피는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혹여 밀수품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실루엣 디자인 뿐 아니라 디테일하게 수를 놓아 옷감을 디자인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합니다. "

그의 전략은 소재가 뚜렷이 한국적 정체성을 갖는 것에도 있었다. 외국인에겐 엘레강스하고 우리에겐 우아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앙드레 김이 흰색을 고집한 까닭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자식들에게 늘 하얀 옷을 입혔다.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간 뒤 앙드레 김은, 흰색 옷에 대해 애착을 지녔다. 어머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흰색을 대했다. 흰색은 그에게 늘 눈부신 어머니가 되었다. 처음에는 잡지 인터뷰 기사에 실릴 사진을 찍기 위하여 화장을 했지만 그뒤로는 항상 파운데이션을 곱게 발랐다. 청문회 때도 하얀 옷, 하얀 얼굴로 나왔다.

4.

"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좋아합니다. 아아, 저는 늘 이런 하얀 세계를 꿈꿉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발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소설 '설국'의 첫 구절을 앙드레 김은 무척 좋아했다. 평소 앙드레 김이 즐기는 스타일은 비슷하지만 보통사람들과는 늘 달랐다. 그는 똑같은 옷을 서너 벌 씩 만드는데, 옷에 이물질이 묻으면 바로 갈아입기 위함이었다. 하루 세번 정도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 옷은 항상 흰색이었다. 넥타이 없이, 어깨를 한껏 부풀린 흰 재킷에 통 넓은 흰색 면바지. 앙드레김은 고운 수를 놓은 흰색 옷을 계절별로 두께만 달리 하여 입었다. 흰색 의상과 화장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처음에는 잡지 인터뷰 기사에 실릴 사진을 찍기 위하여 화장을 했지만 그뒤로는 항상 파운데이션을 곱게 발랐다. 청문회 때도 하얀 옷, 하얀 얼굴로 나왔다.

하얀 것에 대해 열광하는 앙드레 김은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일도 즐겼다. 19641114일 당시 톱스타였던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에서 앙드레 김 웨딩드레스를 선보였다. 이후 원미경, 이미숙, 최민수, 최수종과 하희라 커플에게도 예복을 만들어줘 명성을 높였다.

그의 쇼에는 모델 말고도 인기스타들이 등장했다. 브룩 실즈, 강수연, 채시라, 김희선, 장동건과 같은 연기자들이 모델이 되는가 하면, 19996월에는 농구스타 우지원이 패션쇼에 서기도 했다. 소프라노 조수미는 줄곧 그가 만든 무대의상을 입고 공연을 했다.

이런 앙드레 김을 가리켜 패션과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패션테이너'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상업적인 측면에서만 보지말고 독창적인 '패션오페라'로 읽어주길 원했다.

5.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고 남보다 더 많이 낸 것도 아닌데..."

그는 1982년 이탈리아에서 먼저 대통령 문화공로훈장을 받았다. 1997년엔 한국 정부 화관문화훈장을 받았고, 2000년엔 프랑스 정부가 주는 예술문화훈장을 받았다. 작고한 2010년에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런 훈장들 외에 2005년 제39회 납세의 날, 앙드레 김은 아주 특별한 국무총리 표창을 받는다. 모범 성실 납세자로 선정된 것이다. 앙드레 김 의상실은 3년간의 조사에서 매출 누락이나 거짓 경비 계상이 전혀 없었으며, 세금계산서를 꾸민 흔적도 없고 장부를 성실히 기장해 상을 받았다.

수상식에서 앙드레 김은 "남보다 더 많이 낸 것도 아닌데..."라며 겸손해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지갑 하나가 공개되었다. 20년 동안 쓴 낡은 지갑 하나. 그는 이것 외에 다른 지갑은 없었다. 패션 촬영을 할 때 그는 의상과 액세서리는 물론이고 모델과 스태프들이 먹을 도시락까지 직접 준비해 나타났다.

"혹시나 중요한 분들이 배탈 나면 안되죠."

그는 집에서 만들어온 김밥을 풀며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의 재산은 40여년째 세 들어있는 건물의 전세금과 거주하던 아파트, 연구소를 짓기 위해 사둔 교외의 땅이 전부였다.

그는 자신이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방송사가 제의한 '성공시대' 출연을 거절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직 자기 빌딩조차 없는 사람이 성공했다며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6.

"나는 룸살롱도 노래방도 가본 적이 없다. 포커나 고스톱도 할 줄 모른다. 독창적인 것은 외롭다. 나는 패션을 위해 외로움을 이겨냈다. 남들은 여성에게서 반쪽을 찾았지만 나는 패션에서 반쪽을 찾았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에 그를 동성애자로 보는 시선이 있었다. "젊은 시절 앙드레 김을 보면 178센티미터의 큰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인데, 결혼을 왜 안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질문을 하는 분들에게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은요, 여자 의상을 만드는 남자 디자이너로서 이성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가요, 항상 여성들을 대해야 하는데, 손님 중에는 매력적인 손님도 있고, 패션쇼와 화보 촬영을 하면서 아름다운 모델, 아름다운 연예인을 가까이서 자주 보게 되는데 이성을 너무 좋아하게 되면 일도 못하게 되고, 디자이너로서 이미지도 나빠지는 것을 많이 보았어요. 저는 결혼을 하지 못했어요. 저의 독창적인 세계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이겨내야 해요."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1982년 입양한 외아들 김중도(1981년생)를 사랑으로 키웠다. 김중도는 2004년에 결혼해 쌍둥이 아빠가 되었다. 부친의 뒤를 이어 앙드레 김 아뜰리에를 운영하고 있다.

한때 중고교 교복이 특이한 디자인으로 나오면, 앙드레 김이 디자인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로 앙드레 김 디자인으로 나온 교복은 전국에서 한 곳 뿐이었다. 용인한국외국어대학교 부설고등학교 교복이다.

아들 김중도가 외국어대를 졸업한 뒤인 2005, 대학재단에서 앙드레 김에게 교복 디자인을 부탁했다. 앙드레 김은 아들을 키워준 대학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비용도 받지 않고 학교 교복 디자인을 해줬다고 한다. 아들을 얼마나 아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7.

"20세기라는 과거에서 태어나 21세기라는 미래까지 활동했으며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동양의 에스프리가 담긴 독창적인 세계, 순수한 영원의 세계를 추구한 패션 디자이너"

2002년 앙드레 김에게 한 신문기자가 묘비명에 어떻게 적혔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저렇게 대답했다.

그의 비전이 새로운 세기에 빛을 발할 것을 믿었던 것일까. 패션에 평생 몸담은 사람이 자신의 철학을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라고 함축하는 것을 보면, 그가 추구한 본질적 독창성과 순수한 영원에 대한 열망이 느껴진다.

오로지 앙드레 김만이 지닌 것, 영원히 남는 아름다움을 바로 동양의 에스프리로 갈파한 것 또한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그의 삶은 소박했고 정직했으며, 세상을 향한 시선은 따뜻했다. 그의 꿈은 시간을 넘어서서 영원 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의 패션은 한국의 미학에 수놓은 정갈한 문양으로 남았다.

앙드레 김 생전에 발행된 자서전은 2002'마이 팬터지'가 유일하다. 2010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2010년 잡지 '엘르' 12월호의 부록으로 '나는 앙드레 김입니다'가 나온 적이 있다.

우리에게 왔던 놀라운 미래인(未來人), 앙드레 김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가 지닌 이 빼어난 감수성의 현자(賢者)를 제대로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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