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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17. 집

by 자한형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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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

 

아버지의 진면목이 가장 여실히 드러나기는 아무래도, 도시 계획에 저촉된다 하여 우리 집이 강제로 철거당하던 그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물론 전에도 가족들이 차마 낯을 못 들 정도의 해괴한 짓을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 적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그러나 힘센 시청 인부들이 무지막스럽게 휘두르는 갈고리와 해머질에 의하여 그래도 내 집이라고 정을 붙여 살던 그 판잣집이 장작더미처럼 폭삭 주저앉아버리는 비극의 날을 맞아 아버지가 남긴 유명한 공무 집행 방해의 일화에 비하면 그 따위 것들은 한낱 애교에 불과했던 셈이다. 우리는 창피해서 정말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사람들이 우리 형제만 보면 손가락질을 해대며 아버지에 관해서 이러쿵저러쿵 출처 불명의 소문까지 덤으로 붙여 쑤군거리는 것이었고, 이와 같은 상태는 후로도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형이 아버지를 터놓고 비난하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말해서 그날부터였다. 우리는, 특히 형은, 나이는 어리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무능한 사람인가를 익히 알고 있었다. 집이 무너앉던 그날, 아버지는 과연 이제까지의 당신답게 무척이나 근엄하고 신중한 자세로 사태에 임했다. 그래가지고 이야기도 안 될 거대한 적과 장시간 대치하여 보기 좋게 패배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홀랑 벗고 네거리 한복판에 선 듯한 꼴로 자기 인생의 절정을 장식함으로써 우리들을 두고두고 슬프게 만들었다.

아버지 입에서 그 집을 사자고 처음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어머니는 달갑잖은 표정이었다. 직접 가서 집을 둘러볼 때도 마찬가지 표정이었고, 형 역시 못마땅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지쳐 있었다. 여러 해를 여기저기 잠깐씩 남의 집만 전전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전에 우리가 살던 크고 좋은 집은 아버지 친구 되는 사람한테 어처구니없이 빼앗겨버렸다.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라고 소문난, 아버지의 고향 친구 심씨였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한참 빚쟁이들한테 몰리고 있을 때 그 심씨가 나타나서 묘책을 일러주었다. 친구의 권고에 따라 아버지는 집문서와 인감 도장을 내주었다. 집을 심씨의 소유로 위장하여 그거라도 건져보자는 속셈이었다. 곤경에 빠졌을 때 찾아와서 위로하고 충고해주는 고향 친구가 아버지한테는 친형제만큼이나 살가왔을 것이다. 도장을 넘겨주면서 아버지는 심씨의 손을 붙잡고 고맙다는 인사를 수없이 했다. 심씨는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왔다. 찾아와서 대뜸 하는 말이, 집을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괜히 한번 그래보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농담이 너무 지나치다면서 그냥 실실 웃어넘기려 했다. 그런데 심씨의 얼굴에서는 끝내 웃음을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엔 화를 버럭 내면서 집달리를 데려온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머니는 방바닥을 치면서 대번에 울음을 터뜨렸고, 형은 몸집이 큰 심씨의 아랫도리에 찰거머리처럼 늘어붙어 되나케나 주먹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삿짐을 꾸리느라고 온통 수라장이 된 집안을 둘러보며 넋 나간 표정을 짓던 아버지의 옆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고향 친구한테 사기를 당한 후로 셋방을 찾아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 아버지의 그런 표정은 줄곧 눈에 띄었다. 우리가 주인집 아이들이라도 때려 말썽이 생겼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그리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셋방살이에 아주 넌덜머리가 나 있었으므로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집이 좀 차해도 아무려면 내 집인데 셋방보다야 못할까---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우리는 쉽게 아버지의 의사에 굽혀 그 집을 사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마음대로 빨래를 널 수 있고, 물을 얼마든지 많이 길어다 먹어도 괜찮게 되었다. 술이 잔뜩 취해서 좀 늦게 돌아와도 누가 시비할 사람이 없으니까 아버지는 안심하고 대문을 꽝꽝 두들길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방안에만 틀어박혀 소란을 피운다고 날궂은 날 밖으로 쫓겨날 이유가 없어졌으며,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동네 아이들 아무하고나 대등한 위치에서 맞붙어 실력으로 승부를 가릴 수 있게 된 그 점이었다. 허약하게 생긴 녀석이 공연한 트집을 잡아 텃세를 하고 코앞에서 쥐새끼처럼 용용거리는데도 상대가 주인집 아들이기 때문에 꾹 참지 않으면 안 되는 셋방 신세의 아이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정말 오랜만에 온채를 차지하고 살게 되어 판잣집의 허술한 외양과는 조금도 상관없이 우리는 꽤나 들뜬 상태에 있었고, 더부살이 신세를 동정하는 여유마저도 생겼다.

그러나 몇 발짝 뒤로 물러나 약간만 공정한 눈으로 볼라치면 그것은 분명히 집이 아니었다. 집 축에 끼려면 적어도 사면 벽을 굳건히 세운 바탕 위에 지붕을 씌워야 할 텐데, 우선 그것조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판자쪽을 얼기설기 이어붙인 삼면은 그런대로 눈감아준다 해도 뒷면은 전화 건설국 자재 창고의 옆구리에 의지하여 가까스로 내부를 가릴 형편이었다. 건설국 창고로 쓰이는 세 채의 기다란 건물이 신작로 가에 줄지어 있는데, 우리 집은 창고와 창고 사이 빈터에 납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를테면 현관에 해당되는 유일한 출입문 위에 '리발소'라 쓴 붉은 글씨의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사를 끝내자마자 형이 맨 먼저 착수한 일은 커다란 쇠지레를 사용하여 끙끙 기를 써가며 그것을 떼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유리 위에 역시 붉은 페인트로 쓴 '첩방공반'만은 미처 손을 대지 못한 채 꽤 오래 원형 그대로 남아 시선을 끌었다. 관공서 아니면 접객업소 어디에나 다 붙어 있는 구호였다. 그걸 보고 우리 집을 관공서의 하나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직도 손님을 부르는 역할을 했음인지 이따금 빈민가 사람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머리를 깎아달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아버지의 입장이 난처했다. 그럴 때마다 형이 요령 있게 핀잔까지 주어가며 재빨리 쫓아내는 일을 떠맡고 나서긴 했지만. 어느 날 형은 한나절 틈을 내어 '첩반공반'을 비롯한 이발소 흔적 전부를 말끔히 제거해버렸다. 오만한 성격의 형은 우리집이 막벌이 노동자나 땟국이 잘잘 흐르는 코흘리개들을 상대로 한 싸구려 입라소로 오인 받는 걸 굉장한 모욕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형은 마루를 깔아 대청 모양으로 개조한 옛날의 이발소 자리를 자기 전용의 공부방으로 독차지하려고 어머니와 꼬박 하루를 다투었다. 어머니 생각은 집이 워낙 비좁으니까 식구들이 모여 자는 단 하나뿐인 온돌방을 다소나마 넓혀볼 요량으로 그리 요긴하지 않은 세간은 모조리 대청 안에 쟁여 넣고 쇠를 채우자는 것이었다. 아버지 역시 어머니와 동감으로, 제 몸뚱이 하나만을 위하는가 해서 형을 섭섭하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종내는 형의 고집이 이겨 어머니는,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혼자 대청에서 기거한다는, 거의 보복에 가까운 다짐을 받고는 형한테 양보를 했다. 반에서 항상 수석을 다투는 형이니까 그렇지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형은 학교 성적을 집안에까지 끌고 들어와 일찍부터 가족들 앞에서 세도를 부리고 무리한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 적당히 이용할 줄 알았다. 대청을 차지하고 나서 형은 완전히 자기만의 세계를 갖게 되었다. 판자벽에 뚫린 알량한 창문을 통하여 창고와 창고 사이 공지를 오가는 가난한 이웃들을 내다보며 까닭 없이 불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차가운 마룻바닥에 모로 누워서 벽에다 깨알같은 낙서를 적고 있거나, 아니면 집 모퉁이에 와서 소변을 보는 주정뱅이를 붙잡고 꼬치꼬치 시비를 가리는 잠깐잠깐을 제외한 방과 후 시간의 대부분을 독서와 공상으로 보냈다. 책상다리를 한 형이 소반 위에 위인전 같은 걸 펴놓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형이 너무도 대견해서 아버지는 밤이 이슥해지면 형의 방에 꼭 간식을 넣도록 어머니에게 일렀다. 살림이 자꾸 기우는 형편인데도 형의 청이라면 웬만한 것은 아버지가 다 들어주었다. 내세울 만한 벌이가 없는 아버지보다는 화장품 행상을 하는 어머니의 발언권이 더 센 편이지만, 아들의 장래 문제에 있어서는 촌보도 양보가 없는 아버지였다. 형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는 사뭇 거창한 것이어서 누가 들을까봐 겁이 날 정도였다. 아버지는 장차 큰아들 이름이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태양과 같은 존재로 만인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질 날이 오리란 걸 굳게 믿고 있었다. 아버지가 우려하는 건 다만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첫째, 아들이 훌륭해지기 전에 당신이 너무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 둘째, 절대로 그럴 리가 없긴 하지만, 태양이 된 다음에 아들녀석이 만일 옛날의 아비의 은공을 까맣게 잊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러면서 아들이 정치 방면에 뜻을 두기를 희망했다. 이와 같은 발상은 어쩌면 당신의 제일 모자라는 점이, 그리고 여태까지의 모든 실패의 원인이 바로 그놈의 정치 쪽에 있다고 믿는 데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가진 몽환적인 욕심과는 퍽 거리가 있는 얘기지만, 어쨌거나 형한테는 기대를 걸게 만드는 싹수 같은 게 보여서 그를 아는 거개의 사람들이, 저놈은 틀림없이 보통 인물은 벗을 테니 어디 두고 보라며 칭찬을 했다.

동네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형은 언제나 유별난 존재였다. 아이스케키 장수나 구두닦이로 나가야 되기 때문에 적령이 훨씬 지나고 나서도 학교에 가지 않는 애들이 많았다. 그네들은 형이 도저히 따를 수 없을 만큼 계산 속이 빠르고 세상 물정에 밝았다. 그네들은 매우 사납고 교활했다. 어떤 면에서 그네들은 이미 어른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형은 그런 애들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학교에 다니는 애들은 한 손아귀에 넣고 흔드는 형이면서도 그 애들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을 두려워하는 건 그네들도 매일반이어서 형만은 섣불리 건들지 못했다. 그네들은 학교에 다니는 애들과 담을 쌓아 공연히 적대시하고 저주하면서 일부러 자기네 세계의 은어와 욕지거리만을 일상 언어로 사용했다. 그네들은 여럿이 돌려가며 담배를 뻑뻑 빨아대고 입에서 나오는 연기로 예쁜 동그라미를 만들어 공중에 날릴 줄 알았고, 여자가 지나가면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 극장에서 필름이 끊어졌을 때처럼 휙휙 휘파람을 불었다. 더욱이 그들은 아무 데서나 아랫도리를 까고 앉아 대변을 누는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낄 줄 몰랐다. 동네 안에서 마당과 변소와 우물을 완전히 갖추고 사는 집은 흑설탕을 녹여 가짜 꿀을 만드는 이북 사람 강씨네뿐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변소와 우물을 공동으로 이용하는데 두 번째 창고 앞 빈터에 외양간 비슷하게 네 군데로 칸막이를 해서 지은 우스꽝스런 건물이 마을의 유일한 공동 변소였다. 가짜 꿀을 전혀 만들 줄 모르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뿐인 변소를 이용하자니 자연 혼란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먼동이 트기 무섭게 사람들은 휴지를 말아 쥐고 두 번째 창고 앞으로 달린다. 한 발짝이라도 앞에 서려고 밀치닥거리고 새치기를 막으려고 서로 아우성치며 싸우고 한쪽에서는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야단법석들이다. 줄 속에 섞여 있는 동안은 그런 걸 모르지만 용무를 끝내고 나오면서 보는, 사람들의 그 초조한 표정이라니,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차례를 기다리는 일, 누가 알아줄 만한 무엇도 아니고 단지 잠깐 앉아서 괴로운 짐을 더는 순번을 타기 위하여 다급함을 참아가며 잘 아는 사람끼리 얼굴을 붉히고 싸워가며 그토록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심란스런 일은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겪는 수난에 비하면 어른들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겨우 차례를 당해서 들어가 아직 허리끈도 풀지 않았는데 밖에서는 빨리 나오라고, 하마 변소 귀신이 됐겠다고 생야단을 치면서 문을 열어 젖힌다. 하긴 형편이 이 모양이니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겠다. 여드름이 난 계집애가 사람들 앞에서 엉거주춤 쭈그려 앉는 꼴도 여러 번 보았다. 그런데 병적일 만큼 자존심이 강한 우리 형은 사람들 새에 끼어 줄을 서는 걸 아주 질색으로 알았다. 그리고 아무 데서나 아랫도리를 내리는 애들을 사람 이하로 취급해버렸다. 용무가 생기면 형은 운동 선수 비슷한 차림을 하고 멀리 교회가 보이는 언덕을 향하여 냅다 뜀질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요모조모로 봐도, 변소에 가는구나 하고 눈치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시리 태도에 여유가 있고 동작이 신중했다. 만일 어떤 아이가 교회 변소를 이용하고 싶다면 그 애는 반드시 형한테서 허락을 얻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교회와 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믿어 형의 허락 없이는 교회 울타리의 탱자 하나라도 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태반이기 때문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형은 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어왔다. 다른 동네에 살 적에도 일요일마다 그 교회에 나가 주일학교 찬양대원으로 활동했고, 성경 암송대회에서 해마다 일등을 차지하여 반사님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었다. 교회라는 데를 무척 어렵고 복잡한 곳으로 아는 동네 아이들 앞에서는 그 정도면 충분히 주인 행세도 할 만했고, 또 신앙 외의 목적으로 교회를 잠시 이용했다 해서 누구한테 크게 죄 될 것도 없었다고 본다.

이사를 와서 첫번째 여름을 보내기까지 우리에겐 이렇다 할 곤란이 없었다. 가지각색의 깡통조각으로 이은 지붕이 여름장마를 견디지 못해 줄줄 새는 소동을 한차례 겪었다. 가소롭게 보고 그냥 넘기려들었다가는 된코 다칠 것 같아서 아버지가 함석을 사다가 지붕을 아예 새것으로 단장해놓았다. 덕분에 돈은 좀 들었지만 집 모양에 한결 볼품이 생겨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렇게 근방에서는 보기 드물 만큼 주제 꼴이 일신됐음에도 불구하고 형은 집이 빈민가 한복판에 있다는 이유로 여름방학을 이용한 담임 선생의 의례적인 가정 방문을 한사코 거부해버렸다. 결국 형은 판잣집을 구경시키고 당하는 창피 대신 개학하자마자 학부형과 함께 학교로 호출을 당하여 호되게 꾸중을 듣는 쪽을 택함으로써 아버지를 또 한번 섭섭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일들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보다 더 괴로운 일들이 우리에겐 얼마든지 있었다.

이웃과의 빈번한 충돌이 우리가 당하는 가장 참기 어려운 곤란이었다. 마을엔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똑같은 표정을 지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았다. 어느 놈 하나 잘못 걸리기만 해봐라---이런 식의 위협이 눈초리 속에 항상 번뜩이고, 그들의 호전성과 신경질은 아주 사소한 이해관계에서 거의 습관적으로 폭발되곤 했다. 그리고 크건 작건 동네에서 한바탕 싸움이라도 있고 난 저녁이면 비로소 사람들 얼굴에 화색이 도는 듯이 보였다. 술에 취해서 기분 좋게 떠드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눈에 띄고, 공동 우물 근처나 누구네 집 처마 밑에 모인 아낙네들의 웃고 쑥덕거리는 시간이 부쩍 길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다부지고 성깔이 사나운 이웃과의 충돌에서 손해보는 쪽은 어김없이 우리였다. 워낙 뒤가 무른 양반이라서 아버지는 누가 눈만 부릅떠 보이면 잘잘못을 따질 겨를도 없이 지레 사과해버리는 성미였다. 더구나 남의 싸움에 객쩍게 뛰어들어 아무도 안 알아주는 중재 역할을 떠맡고 나서는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가 싸운 당사자들을 주막집으로 불러 자기 돈으로 화햇술을 내고 돌아온 날은 으레 밤늦게까지 어머니의 신세 타령이 쏟아져 나왔다. 오래지 않아 형의 얼굴에도 예의 그, 어느 놈 하나 잘못 걸리기를 바라는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역시 마을 분위기에 차츰 익숙해져 우물 근처에서 아낙네들의 쑥덕공론이 벌어지는 날이면 거기에 한몫 끼여들어 맞장구도 칠 수 있게끔 되었다. 물론 우리 집안에 대한 험담이 아닐 경우에 한해서였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볼 때 가족들의 이와 같은 변모는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셋방을 전전하던 시절에 비해 상태가 두드러지게 악화된 것도 아니었다. 엄살을 떨 생각이 아닌 바에야 우리가 겪은 곤란이 어느 정도였고 어떠했다고 함부로 입밖에 내지 않는 게 이롭겠다. 주위 환경이 마음에 안 들고 비좁긴 해도 그것은 우리 집이었다. 담임 선생을 모시고 와서 보여주고 싶도록 훌륭한 집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우리 집인 것만은 분명했다. 우리 집이니까 누가 감히 나가라는 말 한마디하는 사람이 없다. 얼마 전에 지붕을 새로 이어 고쳐놓았고, 아직은 벽이 무너지거나 구들장이 내려앉을 기미가 조금도 안 보인다. 정말이지 우리는 판잣집에 이사오기를 백 번 잘했다고 생각은 했어도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다. 벌써 여름이더니 벌써 가을이었다. 실로 몇 년만에 가져보는 생활의 안정 속에서 세월조차도 굉장히 방정맞게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그러자 우리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치명적인 위협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가지 검은 소문이 어느 입을 통해서인지 온 마을에 마치 악성 돌림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말마디나 한다는 몇몇 마을 어른들이 우리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들은 밤이 깊도록 아버지와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하고 또 상의를 했다. 그들의 입에서는 말끝마다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아마 잘될 거라고, 그 사람들이 약속을 그렇게 헌 고무신처럼 벗어 던지지는 않을 테니 너무 상심 말라고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유행성 이하선염에 걸린 듯이 턱을 잔뜩 감싸쥔 채 비통한 표정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직은 그렇게 될 것이 거의 틀림없는 정도의 확실한 소문이 아니었다.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 맨 처음 발설한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이런 판국인데 일이 앞으로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를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렇다고 한가하게 앉아서 사람들이나 위로해주는 아버지의 여유작작한 모습은 옆에서 봐도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될 수 있는 한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쉬쉬하면서 다른 어른들에게도 낮은 소리로 얘기할 것을 충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신경통을 앓는 수족으로 하루나 이틀 후의 일기쯤 앞당겨 예감하는 늙은이들처럼 몸의 어느 부분이 예를 들어, 심장이 울렁거리고 자꾸 오줌이 마려워지는 긴장을 견디며 비극을 치를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신변에 접근해오는 위협을 반사적으로 알아차려 재빨리 촉각을 곤두세우는 어떤 하등동물의 생리처럼 우리는 몸을 사리면서 조심스럽게 대기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으늑한 구석자리에 엎드려 숨을 할딱이며 우리는 그날이 오기를 끈덕지게 기다렸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어른들 앞에 탄로 날까봐 형은 간간이 딴전을 부려 보임으로써 눈가림하는 연기를 아주 멋지게 해냈다. 기왕에 오래 살 바엔 온돌방을 옆으로 하나 더 달아내고 벽도 아주 공구리(콘크리트)로 튼튼하게 발라 모양을 내자고 어머니를 자꾸만 졸라대는 식으로 말이다. 그 말에 아무런 대꾸가 없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한푼 벌이도 못 하는 아버지가 제꺽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안으로 꼭 그렇게 만들어 주마고 약속은 흔연히 하면서도 매우 자신 없어하는 그 표정이 어쩐지 우스웠다. 아버지가 아직도 형을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는 건 크나큰 실책이었다. 만일 형의 속셈이 어떤 것인지를 아버지가 일찍 알아차렸다면 아마 당장에 기절이라도 했을 것이다. 기가 막히게 이쁜 꽃 구슬 한 개를 대청 마룻바닥의 솔옹이 구멍 속에 떨어뜨려 잃은 뒤로 형은 늘 그걸 아쉬워 해왔다. 집이 헐리게 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서 대청 밑바닥을 뒤져 기어코 꽃 구슬을 찾아낼 판이라고 형은 미리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집이 헐린다. 빈집이 아니라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남의 손에 의하여 헐어진다. 그것도 멀쩡한 대낮에, 사람이, 벼락이나 사태가 아닌 사람의 힘으로 와그르르 허물어져 내린다. 그것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전혀 실감이 오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본능이 요구하는 만큼의 흥분에 도달하지 못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불길에 휩싸여 훨훨 타는 광경은 여러 번 목격했어도 두 눈을 뜬 채 지켜보는 앞에서 집채가 폭삭 주저앉는 꼴은 여태껏 구경을 못 했다. 삽시간에 기둥이 나자빠지고 벽이 사방으로 떨어져나가고 그 위에 지붕이 털썩 올라타는 장면은 상상만으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손아귀에 쥐듯 그걸 더 좀 생생히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오밤중에 살그머니 이부자리를 빠져 나와 집 둘레를 샅샅이 돌아보기도 했다. 형은 주먹으로 기둥을 탁탁 쳤다 어루만졌다 하면서 어떤 쪽에서 타격을 가해야만 그것이 가장 쉽게 넘어질 것인가를 궁리하고, 어느 방향으로 쓰러질 것이 틀림없다고 예언하면서 내기를 걸어도 좋다고 장담을 했다. 함석 지붕이 아래로 내려앉아 왕창 쭈그러들면서 내는 소리는 얼마만큼 클 것인지, 집 한 채를 고스란히 부수는 데 과연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지, 우리에겐 모든 것이 궁금거리 투성이었다. 얼핏 땔감 때문에 고충이 많았던 우리의 처지를 상기했음인지 형은 집을 헐어 나오는 가연성 물질 전체로 몇 날이나 밥을 지을 수 있나를 알아보기 위해 열심히 수학적인 머리를 동원하는 엉뚱함도 보였다. 이렇듯 우리는 사람들이 떼뭉쳐 와 우리 집을 꽝꽝 두들겨 부숴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이제나저제나 하는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우리가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갑자기 이성을 되찾고 아버지와 어머니 편에 서서 사태를 비로소 현실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소문이 동네를 휩쓸고 나서도 얼마가 지난 후였다. 동사무소와 시청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걸 우리들 눈으로 직접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후일담이다. 판잣집을 헌다는 소문이 처음 나돈 것은 우리가 이사오기 전인 겨울철이었다고 한다. 소문이 도는 동안에 봄이 오고 때마침 선거 기간이 다가왔으므로 마을 대표들이 요로에 진정하여 절대로 마을을 다치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때 자유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사람이 우범지대인 판자촌 마을에 보안등을 가설하고 길에 자갈을 깔아주는 등으로 선심을 쓰는 걸 우리도 보았다. 선거에서 그가 아슬아슬한 표차로 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다음 마을 골목길은 도로 깜깜해졌다. 사람들이 보안등을 달았던 전봇대가 트럭에 실려 다시 나가는 걸 지켜보며 예상보다 표가 훨씬 적게 나온 데 대한 보복이라고 얘기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소문이 있었던 줄을 전연 모르고 싸구려 이발사한테서 그 집을 산 셈이며, 아버지가 지붕을 고치기로 결심한 것은 자유당 후보의 언질을 곧이곧대로 믿고 나서의 일이었다.

최고장(催告狀)이 우리에게 판잣집의 자진 철거를 종용하고 있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나눠주고 간 그 종이쪽지에 그런 내용의 글발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다 철거 이유를 '무허가''도시 계획 저촉' 두 가지로 구분해놓고 해당 사항을 동그라미로 친절하게 표시해주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양쪽에 다 걸린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걸 보고 아버지가 해식은 농담을 했다. 잘못하다간 집이 두 번씩이나 철거당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최고장은, 자진 철거를 거부할 경우 부득이 행정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철거를 단행할 작정임을 명백히 하고 철거 기간도 시한부로 못박아놓았다. 가짜 꿀을 만드는 강씨네와 몇몇 집을 제외하고는, 도시 계획에 저촉되든 무허가 건물이든간에 동네에서 안 걸린 집이 별로 없었다. 최고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어머니는 많이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농담을 하는 대목에 와서 분이 폭발해버렸다. 어머니는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헐렁이로 구는 아버지를 무섭게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저 만사태평의 무골호인으로 책임감도 수치심도 없는 등신한테 자기를 시집보낸 친정이나 원망할 뿐이라면서 어머니는 오래 전에 작고한 우리 외조부모까지 들먹이고 나섰다. 그리고 아버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공박하기 위하여 우리 집을 몽땅 사기해먹은 심씨가 얼마나 변변한 인물인가를 침이 마르도록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허허 웃기만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머리칼을 한 움큼씩 쥐어뜯어 가며 흙벽에 이마를 퍽퍽 부딪기 시작했다.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철거를 알리는 정식 통고가 어머니에게 준 충격이 어느 정도인가를 우리는 알았다. 난생 처음의 무시무시한 히스테리를 보고서야 사태의 심각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느닷없이 형이, 어떤 놈이 집을 헐으려 덤비면 불을 지르겠다고 선언하고는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어머니의 슬픔이 고스란히 형에게로 옮은 탓이리라. 어머니의 발작을 보고 나서 형은 숫제 말을 잃었다. 바깥으로만 빙빙 돌면서 끼니때가 되어도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형은 아무 데나 그으면 켜지는 딱 성냥을 구해 가지고 실제로 호주머니 속에 지니고 다녔다. 생각해보니 채 일 년도 못 되는 짧디 짧은 평화였다. 온채를 차지한 뒤로 우리가 누리던 어설픈 행복은 이렇게 해서 간단히 결딴나버리고, 언젠가는 터지게 마련인 이보다 훨씬 고약한 사건들이 어둠 저편으로부터 줄지어 포복해오고 있는 것만 같아서 서서히 땅거미가 지는 문밖을 더 없는 두려움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이럴 경우에 아버지를 돕고 어머니를 위로할 좋은 방법은 없을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비록 어리긴 할망정 부모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 대단히 죄송스럽다는 표시로 한술 더 떠 어른보다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노라면 집이 무너지기 바라며 철따구니 없이 덤벙거린 어제의 죄과가 다소 탕감되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그 나이에 어른들을 돕는 방법이란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일요일이 왔다. 답답한 집안을 빠져 나와 교회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구실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일요일이 오기를 명절 기다리듯 하던 참이었다. 뜨는 둥 마는 둥 조반을 마치더니 형은 지체하지 않고 교회로 달려갔다. 주일학교 성가대 연습에서 빠지기 위해 멀쩡한 목을 매만지며 아프다고 핑계를 대는 점으로 미루어 형은 교회에 나오긴 했어도 여느 때처럼 가쁜한 기분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되자 다섯째로 태어난 딸애 이름을 '딸고만이'로 지었대서 항상 우리의 놀림을 받는 교회 사찰이 초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하나 둘씩 종루 근처로 모여들었다. 형도 그들 중에 끼여 딸고만이 아빠가 종을 치는 모습을 열심히 지켜보았다.

솜구름이 하얗게 떠가는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까마득한 높이에 달린 커다란 놋종이 지축자축 양쪽으로 기울다가 드디어 첫번째 소리가 탕 울리자 아이들이 환성을 지르며 고무신을 벗어들었다. 길게 여운을 끌며 달아나려는 종소리를 아이들은 재빨리 고무신 속에 가둬가지고 양쪽 귀에 붙였다 떼는 동작을 거듭하면서 시시덕거렸다. 딸고만이 아빠의 깡똥한 몸집이 줄에 매달려 위아래로 오르내릴 때마다 댕그랑댕그랑 종이 울렸다. 그리고 잉잉거리는 소리가 귓바퀴를 돌면서 우리에게 간지럼을 먹였다. 그때까지 애들 뒷전에 서서 시무룩한 표정이던 형의 얼굴에도 슬그머니 웃음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주일학교 동화 시간에 종에 얽힌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 사찰 아저씨는 아이들한테 인기가 아주 대단했다. 종치기가 끝날 무렵이 되면 그는 꼭 자기를 둘러싼 아이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정하여 딱 한 차례만 줄을 잡아당기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종을 치는 영광스런 일에 선발되는 건 대개 그를 가리켜 딸고만네 아버지라고 놀린 적이 거의 없거나 아니면 종 치는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애들인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형제는 그가 베푸는 특혜를 아직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형이 존경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말대가리란 별명이 붙은 주일학교 반사가 있었다. 그가 주일마다 들려주는 동화 가운데 종을 치는 늙은 말에 관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었다. 그는 배우처럼 표정이 풍부하고 혀 하나로 오만가지 소리를 흉내내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입을 여는 그 순간부터 시간은 갑자기 거슬러 흐르고 우리들 시야엔 미지의 끝없는 세계가 전개되어 웃음이 터지고 소름이 돋고 눈물이 찔끔 나고 그러다 보면, 다음 주일에 또, 하고 웃는 마상(馬相)의 추남이 강돗상 앞에 우뚝 서 있어 아이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지곤 했다. 우리는 그가 하는 손짓 발짓을 보면서 갈기를 흩날리며 피비린내 물씬거리는 들판을 치닫는 백마의 위용과 그 위에 버티고 앉아 창검을 번뜩이는 철갑의 기사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기사를 도와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한 그 백마가 전쟁 당시의 상처 때문에 병이 악화되어 금방 죽어 가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는 백마와 한편이 되어 망아지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픔을 나누었다. 적군을 무찌른 공으로 성주한테서 후한 상을 받아 부자가 됐으면서도 자기 말을 돌보지 않고 굶주리게 내버려두는 기사녀석을 우리는 잠시 말대가리 선생과 혼동하여 앞에 대고 삿대질하며 죽일놈이라고 욕까지 퍼부었다. 그러나 백성을 인자하게 다스리는 성주님이 누구든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종을 쳐 호소할 수 있도록 성문 앞에 높은 종탑을 세워놓았음을 알게 되자 시종(侍從) 제복을 입고 그 종탑을 지키는 딸고만이 아빠의 깡똥한 모습이 얼핏 보였다. 결국 마굿간을 빠져 나온 우리의 백마가 이리저리 헤매던 끝에 성문 앞에까지 이르게 되고 배고픔에 못 이겨 종탑을 감고 올라간 칡넝쿨을 뜯어먹다가 줄을 건드려 종이 울리게 되고 그러자 성주님이 친히 나와 사정을 자세히 알아본 다음 말을 학대한 기사에게 큰 벌을 내린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 손으로 작성된 탄원서 초안은 첫머리부터 말미에 이르기까지 한문 투성이었다. 집에 모인 동네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가 그걸 큰 소리로 낭독해 보였다. 방안은 온통 숙연한 분위기에 잠겨 기침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마이크 앞에 처음 선 시골 학생처럼 덜덜 떨리는 아버지의 음성에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짐작조차 전혀 안 가게 어려운 한자 용어들을 한없이 쏟아놓다가 아버지는 마침내 맨 마지막 구절을 길게 뽑았다.

---절대 절명의 위기에 선 오등의 참경을 재삼 통촉하시와 부데 자애의 조처 하회하여주시기 쌍수 합장 절원하나이다.

양면괘지를 내려놓으며 아버지는 자못 비장한 낯빛이었고, 아버지의 떨리는 음성에 틀림없이 간장이 녹았을 다른 어른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충은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글이 매우 훌륭하다는 중론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원체 어려워놔서 시장어른이 과연 그 뜻을 곱게 삭일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나더니 그들도 아주 흡족해하였다. 판자촌에도 이렇게 유식한 사람이 있는 줄 알게 될 테니 앞으로는 그렇게 괄시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모두들 아버지한테 치하를 했다. 탄원서는 별다른 수정 작업을 거치지 않은 채 국회의원과 시장 앞으로 각각 한 통씩 보내어졌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모양이다. 단도리를 튼튼히 해야 된다면서 전에 사업할 때 알고 지낸 시내 유지급 인사나 동창 친구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굶어죽어도 남의 신세는 안 진다는 주의로, 잘사는 친구들을 일체 멀리하던 아버지가 그처럼 동분서주하는 걸 보니 어딘지 미더운 구석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탄원 사항을 재고할 여지가 없다는 회답이 며칠 후에 왔다. 애쓴 보람도 없이 사태는 거의 절망적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시청에서 정해준 자진 철거 기간이 뿌적뿌적 다가왔다.

형이 아버지를 그래도 아버지로 대접한 것은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남아 있는 동안이었다. 최고장의 시한이 임박하자 아버지는 최후 수단으로 마을 대표들을 이끌고 가서 시 당국과 양자 협상을 벌여 웬만큼 성과를 얻긴 했다. 계절이 적합치 않으니까 철거를 당분간 연기하여 현재 상태로 겨울을 넘긴다. 그 안에 자발적으로 철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철거를 완료한 그 날짜에 일시불로 보상금을 지급한다. 무허가 건물일 경우에는 절대로 피해를 보상할 수 없다. 그 대신 다른 데로 이사갈 때까지 철거민들을 빈 자재창고에 수용할 수 있도록 전화건설국 측과 타협해보겠다. 그리고 이제껏 이북 피난민한테만 혜택을 주던 구호양곡을 철거민 전체에 배급해준다. 이런 것들이 협상에서 얻어진 소득의 전부였다. 그만하면 아버지 힘으로는 최선을 다한 셈이며 시청 쪽에서도 어지간히 양보를 했다고 본다. 우선 내년 봄까지는 한시름 놓을 수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앞으로 몇 달간 말미를 얻은 것만도 고맙고 대견해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수완을 새삼스럽게 평가해주는 눈치였다. 하지만 형은 달랐다. 형은 그런 것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형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당장 맞을 매를 가까스로 피했다 뿐이지 언제라도 집이 헐리기는 매일반이었다. 집이 헐리는 걸 보는 고통, 그것은 형에게 있어 목숨을 끊는 아픔에 비길 만했다. 겉으로야 동네가 어떻고 집이 어쩝네, 하고 가정방문 온 담임 선생을 피해 다니며 얼마든지 고집을 부렸으나 실상은 마음속으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에이브라함 링컨도 어린 시절엔 이층이나 벽돌집 같은 데서 살지 않았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자기 전용의 공부방으로 몫 지어진 알량한 대청을 그토록 사랑했던 것이다. 형은 철거 문제를 다루면서 아버지가 보인 행동을 대여섯 조목으로 나누어 철저히 비판했다. 특히나 형은 유식한 문자로 점철된 아버지의 탄원서에 비난의 초점을 모았다. 그런 식으로 싹싹 빌고 애원해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한테 아무런 잘못이 없고, 잘못이 있다면 그건 되려 시청 쪽인데 뭣 때문에 아버지가 먼저 굽히고 들어가야 된단 말인가. 형은 애당초 시청에서 철거 문제를 꺼낸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시청 사람들이 하마터면 큰일을 저지를 뻔했다고 뉘우치게 만들려면 자기네들의 잘못을 조리 있게 지적해주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형은 자기 나름의 주장을 자기 나름대로 조리 있게 적은, 말하자면 시청의 잘못을 짭짤히 훈계하는 내용의 글을 시장한테 우송했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형은 비슷한 글을 이승만 박사에게까지 보내려고 단단히 벼르는 것 같았다. 나중에 절충안이 나와 시 당국과 어느 정도 타협이 이루어졌을 때도 형은 그것을 전부 자신의 승리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자기가 보낸 글이 너무도 옳음을 늦게야 깨달아 그만큼이라도 시장이 양보를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탄원서가 무시당한 이래 형은 집안에서 실권을 거지반 장악하다시피 되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집에 대한 형의 애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이 헐리게 되어 얼마나 상심해 있는가도 잘 알기 때문에 거의 패륜에 가까운 극성을 부려도 형을 그냥 너그럽게 보아 넘기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까 집안 꼴은 자연히 말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아버지는 형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어머니와 무릎을 맞대고 얘기하면서 아버지는 터무니없이 큰소리로 묻는다. 밀수 화장품 단속이 심해졌다는데 그대로 행상을 계속해도 괜찮겠느냐. 여기에 지지 않게 어머니도 큰 소리로 말을 받는다. 단속이 풀릴 때까지 다른 걸 해보려고 생각중인데 자본 없이 장사하려니 마땅한 게 없어 걱정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두 분이서 대청 쪽의 반응을 숨죽여 기다린다. 그러면 형은 책을 탁 덮어놓으며 벽을 사이에 두고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시작한다. 매사가 다 이런 모양이었다.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하나 둘 자기 손으로 집을 허물고 마을을 뜨기 시작했다. 가을이 다 가고 겨울철로 접어들자 마을에서는 이북 사투리를 좀처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아직도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만이 마을에 남아 먼저 떠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구정을 맞고 우수 경칩을 넘겼다. 다가서는 봄이 겨울보다 더 춥고 두렵게 느껴지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철거일을 하루 앞두고 우리는 세간을 전부 꺼내어 전화건설국 빈 창고 한쪽 구석에다 옮겨놓았다. 말할 나위도 없이 형의 반대를 무릅써가면서였다. 형은 그것이 틀림없는 우리 집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손을 댈 수도 없고, 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자기 생각을 끝끝내 고집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집이 헐린다는 사실을 형은 아직도 믿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절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 고집을 꺾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날 밤을 형 혼자 텅 빈 대청에서 꼬박 세우는 걸 막지 못했다.

철거일의 아침이 천천히 밝았다. 집이 헐리는 날인데도 여느 때와 같이 둥근 해가 뜨고 우물에서는 여전히 맑은 물이 솟는 게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모든 사람이 슬픔에 짓눌려 넋을 잃고 있는데도 여느 아침이나 다름없이 배가 고프고 변소에 가고 싶어지는 게 도대체 창피스럽고 미안해서 죄인처럼 잠자코 견디어야 하는 답답한 하루였다.

정오 무렵이 되자 판자촌으로 들어오는 골목길 어귀에 두 대의 화물 트럭이 서더니 바로 우리집 앞 공지에다 인부들을 까맣게 풀어놓았다. 머리에 수건을 동인 시청 인부들이 집을 부수는 도구들을 끄집어내리는 동안 사람들이 모여들어 트럭 둘레를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이윽고 작업을 지휘하는 사람과 동네 어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우리처럼 무허가 건물을 가진 사람들이 보상금을 탈 욕심으로 끝까지 저항을 벌이는 것이었다. 자기네를 거들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고대하며 그들은 아버지 얼굴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형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아까부터 자기 눈앞에서 어떤 기적 같은 게 일어나기를 갈망하는 표정으로 오직 아버지 행동 하나만을 주목하고 있었다. 난처한 입장에 빠진 아버지는 그 판국에 시장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핑계를 대면서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버렸다. 그러나 뒤돌아서면서도 아버지는 배신자한테나 던지는 저 살벌한 눈초리를 뒤통수로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더욱이 기대가 실망으로, 그리고 분노로 순식간에 변하는 형의 표정을 못 읽었을 리 없다. 마침내 형이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다. 형은 대뜸 작업 지휘자를 붙잡고 자기가 허락하기 전엔 그 누구도 집을 부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어린애를 상대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형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길을 막는 데야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듯했다. 큰 권한을 쥔 어른과 거기에 맞선 어린애 사이에 곧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당신이 무엇이기에 남의 집을 함부로 헐으려 하느냐고 형이 물었다. 나라의 명령이라서 자기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고 책임자가 대답했다. 곁에서 보면 반쯤은 농담으로 들리는 대화가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서로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당사자들은 그럴 수 없게 진지했다. 나라에서는 왜 당신네들 집은 가만 놔두고 우리 동네에 있는 집만 부수라고 명령했는지 어디 한번 설명해봐라. 그건 이 동네에 있는 집들이 대개 나라의 허가를 받지 않고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집을 부수는 건 잘못이다. 허가를 받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집을 못 짓게 하든가 서로 사고 팔지 못하게 미리 막을 일이지,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나라에서는 진작부터 그런 일을 못 하게 해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도 마라. 그렇게 해 나왔으면 어째서 여기에 집이 서 있고 어떻게 우리가 이 집을 샀겠느냐. 시간이 없다. 그런 문제라면 나보다 높은 사람한테 가서 따져라. 나는 다만 위에서 하라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자기들이 높으면 얼마나 높으냐. 이담에 커서 위대한 정치가가 되는 날이면 나는 제일 먼저 그 사람의 집부터 부수라고 명령을 내리겠다. 그러니 당신도 조심해라. 네가 커서 제발 그렇게 되기를 빌어주겠다.

논쟁은 끝났다. 손을 번쩍 들어 작업 책임자는 마을 초입에 있는 우리 집을 첫번째로 가리켰다. 저마다 기다란 쇠사슬과 갈고리, 해머 같은 걸 하나씩 움켜쥔 인부들이 우리 집으로 우우 몰려갔다. 그들을 앞질러 형이 먼저 달려가서는 기둥에다 딱 성냥을 드윽 그어들며 불을 지르겠다고 날뛰었다. 그 꼴을 보다못한 어머니가 차라리 우리 손으로 태워버리는 게 낫겠다고, 어서 집에 불을 댕기라고 고래고래 소래기를 질렀다. 그러자 형이 별안간 얌전해졌다. 형은 뜨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성냥불이 손끝까지 타들어 가는데도 형은 그걸 그냥 손에 쥔 채 어머니 얼굴만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형의 입에서 느닷없는 울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인부들도 집을 부수기 시작했다. 작업을 지켜보며 어머니는 자꾸만 이상한 몸짓을 보였다. 인부들이 해머로 벽을 꽝꽝 때리면 어머니는 손으로 옆구리를 만지면서 애구구, 하고 비명을 올렸다. 어떤 인부가 갈고리를 들어 지붕을 찍는 걸 보고 어머니는 머리를 감싸안은 채 눈을 꼭 감아버렸다. 집채를 자기 몸의 일부로, 아니 자기 몸을 집채의 일부분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인부들은 벽마다 구멍을 뚫어 집채를 좌우로 관통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때 비어 있는 줄만 알았던 우리 집 속에서 사람의 고함 소리가 들려 작업이 중단되었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진 가운데 우리는 고함 소리를 다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잔뜩 취했을 때의 우리 아버지 음성이었다. 작업 책임자와 어머니가 동시에 달려들어가 안방 문을 열어보려 했으나 안에서 문고리가 잠겨 있었다. 아버지는 집과 함께 깔려 죽을 테니 염려 말고 어서 기둥을 넘어뜨리라고 소리쳤다. 빨리 나오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어머니가 울먹이는 소리로 사정을 했다. 작업 책임자도 이젠 다 소용없는 일이니 어서 문이나 열라고 거듭 타일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문고리를 걸어 잠근 채로 오후 한나절을 꼬박 버티는 놀라운 인내력을 보였다. 누군든지 안에만 들어오기만 하면 자살해버리겠다고 틈틈이 위협하는 것으로 아버지는 방문이나 벽을 부수려는 인부들을 멀찌막이 물리칠 수 있었다. 작업 책임자는 마지막 수단으로 좀 유치한 속임수를 썼다. 그는 열을 셀 때까지 나오지 않으면 당신이야 죽든 말든 작업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아홉까지 센 다음 그는 옆에 있는 인부한테서 커다란 쇠망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열을 셈과 동시에 기둥을 한번 꽝 때렸다. 그러자 방문이 화닥닥 열리면서 아버지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아버지는 뒷주머니에 소주병을 꿰어차고 있었다.

쉬고 있던 인부들이 떼로 덤벼들어 밀린 작업을 서둘렀다. 그들은 사람이 드나들 만한 구멍을 양쪽 벽에 뚫었다. 그 구멍 속으로 기다란 쇠사슬을 넣어 집채를 완전히 꿰어 가지고는 트럭 뒤에 붙잡아 매었다. 트럭이 천천히 전진을 시작하자 쇠사슬이 팽팽히 당겨졌다. 삐그덕거리는 소리, 우지끈 부러지고 쪼개지는 소리가 요란하기 들리더니 집채는 이내 부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 파묻혀 버렸다. 아주 간단했다. 우리한테는 이제 허물어진 집터를 정리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트럭에 실려 인부들이 되돌아가고 구경하던 많은 사람들도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버지는 밤중까지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기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냉혈동물은 생전 처음 봤다면서 작업 책임자와 인부들을 실컷 욕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설마 제 놈들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고, 기회를 잘 잡아 뛰어나왔기에 망정이지 만일 한 발만 늦었더라면 자기는 집채 밑에 깔려 영낙 없는 오징어포 신세가 됐을 거라고 허풍을 떨었다.

건설국 창고 안에서는 호롱불을 가운데 하고 마을 아낙네들이 끼리끼리 둘러앉아 앞으로 살아갈 일을 땅이 꺼지게 걱정하고 있었다. 무슨 설움 무슨 설움 해도 집 없는 설움이 으뜸이라며, 창고마저 비워야 될 날이 언제일지 누가 아느냐며 아낙네들은 밤이 깊는 줄도 모르고 푸념을 깔았다. 호롱불이 위로 비쳐 광대뼈와 콧잔등만이 우뚝 솟아 보이는 음산한 얼굴들이었다. 강당만큼이나 넓고 높은 창고 안 벽과 천장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너울너울 춤추는 유령들의 회합을 호롱불이 꺼지는 그 시간까지 주욱 지켜볼 수 있었다.

형이 한밤중에 교회로 달려가서 미친 듯이 종을 치며 소동을 벌인 것은 집을 잃은 바로 그날 밤의 일이었다. 딸고만이 아버지가 비치는 플래시라이트 속에서 형은 눈자위를 하얗게 뒤집어깐 채 대롱대롱 매달려 종을 치고 있었다. 딸고만이 아버지한테 아무리 얻어맞고 걷어 채이고 떼밀려도 형의 몸뚱이는 줄의 일부인 양 늘어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미친 듯이 울리는 종소리가 어두운 밤하늘 가장자리를 찾아 언제까지고 퍼져나갔다.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月刊文學, 19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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