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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상에서 소멸의 가치

by 자한형 2022.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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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상에서 소멸의 가치 & 구본권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겨레 신문사에서 30여 년 일해오고 있는 기자입니다.

미디어 환경이 종이와 전파에서 디지털과 소셜 네트워크로 바뀐 그 기간 동안 제가 경험한 변화와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정보 사회에서 우리는 과거에 상상할 수 없는 편리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친구 전화번호를 외우거나 수첩에 적어놓거나 할 필요가 없죠.

스마트폰에 저장을 하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가도 희미해지거나 사라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과거 아날로그 세상은 원자로 된 물리적 세계였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피할 수가 없었고 세월이 지나면 마모되어서 결국은 사라지는 게 자연스러운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은 01이라고 하는 전자적 신호로 구성된 비트라고 하죠.

이 특성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반대를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이런 편리함과 강력함은 전에 없던 새로운 문제도 불러왔습니다.

제가 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겪은 경험을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2천년대 초반에 신문사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오래전 신문 기사인데 인터넷에서 이걸 삭제해 줄 수 있느냐라는 전화였습니다.

당시 저는 신문사에서 인터넷 뉴스의 생산과 편집을 맡은 실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면에 실린 기사를 인터넷에서 수정하는 일도 당연히 했죠.

전화를 건 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매우 절실했습니다.

포털에서 자기 이름으로 검색을 해봤는데 오래전에 소시적에 자기가 저지른 사소한 절도 사건이 실린 신문 기사가 고착됐다는 겁니다.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고 법에 따라서 다 처벌을 받고 이미 오래전에 사면과 복권까지 끝난 정부의 공식 기록에서도 지워진 일이다.

그런데 나도 잊고 있었던 오래전 기사가 포털에서 내 이름으로 검색되는 걸 보고 너무 놀랐다.

내 자식이 지금 어린데 얘가 커서 아빠 이름을 검색해 볼 걸 생각을 하니까 지금 며칠째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처벌받고 다 끝난 일인데 제발 인터넷에서 삭제해 줄 수 있겠습니까라는 요청이었어요.

90년대 초반에 실린 정말 사소한 절도 기사였습니다.

찾아봤더니 지금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절대 다루지 않는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만 해도 사건의 중요성에 비해서 기사가 매우 상세하게 실려 있었습니다.

확정 판결이 나기는커녕 기소와 1심 재판도 시작하지 않은 범죄 용의자일 뿐이죠. 그런데 이름과 나이는 물론 마지막 주거지 지금 살고 있는 현 주소까지 그대로 보도가 된 거예요.

만약 지금 이런 식으로 보도를 했다면 용의자나 피해자한테 상당액을 배상해야 되는 책임을 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런 과거 기사가 너무나 손쉽게 포털 검색을 통해서 나타나고 그 기사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저는 충격이었습니다.

기사 삭제 요청은 타당한 논리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오래 전 잘못이 다시 드러나 현재 생활에 혼란을 줄 가능성에 대한 당사자의 불안 우려는 타당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보도된 기사를 누군가의 요청에 따라서 담당자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서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것은 언론에서 활용될 수 없는 일이죠.

인터넷 세상에서는 정보가 한 번 만들어지면 낡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이용과 검색이 매우 편리합니다. 하지만 이런 편리함과 강력함은 자연스럽게 잊혀지고 소멸되어야 할

사라져야 할 정보도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거죠.

특히 누군가 지우고 싶은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아노미라는 건 뭡니까 고통스러운 기억을 뇌가 지우지 못해서 생겨나는 병리적 현상입니다.

컴퓨터는 인지와 판단 기능을 가진 아주 지적인 데이터이지만 그 구조가 사람과 다르죠 사람이 학습하고 기억을 해도 그것을 완벽하게 저장해서 내버리는 동일한 형태로 불러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과 이탈 이후에 우리 기업은 기계에 의존하고 사람은 이걸 활용해서 사고하고 추리하고 상상력과 창의력 같은 고도의 두뇌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늘 휴대하고 다니면서 두뇌의 일부처럼 외부 기업 장치와 연산 도구로 사용하는 현상은 기업과 관련해서 인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빅토르 마이어 쇤베르거라는 사람은 2011년도에 저서 잊혀질 권리라고 하는 책에서 디지털 문명으로 인해서 인류의 기억과 망각에 관한 사고의 기본값이 완전히 바뀌었다.

역전됐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동안 인류한테는 망각이 기본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보 기술로 인해서 이제는 기억이 기본 상태가 되는 겁니다.

디폴트 세팅이 되고 망각이 예외적인 상태가 되는 거예요.

지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정부가 기록되어서 거의 영구히 보존되고 있습니다.

만물의 디지털화 컴퓨터 저장 비용의 인하 검색 기술의 발달 인터넷 연결 등의 덕분이죠.

우리는 스마트폰과 인트 덕분에 필요한 정보를 선택해서 외부 기업 장치에 기억시키고 필요할 때마다 호출해서 아주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도구의 기억에 의존하고 망각 대신 기억이 사고의 기본값이 된다는 말은 내가 기록과 저장을 원하지 않는 것까지도 기억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 안에는 내가 원하지 않는 사실과 영역이 당연히 포함돼 있습니다.

문제는 뭐가 지금 나에 관해서 기록되고 보관되어 있는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라고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 그런 사실이 없다라고 자신의 행적과 발언을 강하게 부인하던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누군가 인터넷에서 어딘가에 찾아낸 기록 앞에서 초라하게 무너져 버리는 사례는 우리 수없이 많이 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신체 일부처럼 사용하면서 내가 남긴 글은 물론 남의 이동 경로나 타인의 소통 내역이 있습니다.

인터넷 검색 기록 앱 실행 기록 결제 내역 뭐 이런 모든 게 다 기록되는 구조가 만들어졌죠.

또한 블랙박스나 cctv 등 정교하고 치밀한 감시 기술의 발달은 감시 당사자 모르게 모든 것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환경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주로 사용자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정보가 생성되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 이후의 사물인터넷 기술은 이전과 다른 차원에서 정보 생성과 기록이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기계의 완벽한 기억은 장점인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가져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고요

중요한 것과 필요한 것 위주로 기억하도록 뇌가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는 기억할 때마다 맥락과 상황을 함께 기억하는 중요성과 필요성은 맥락을 의미합니다.

나중에 회상이라는 방식으로 우리가 기억을 불러올 때는 항상 맥락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디지털 환경에서 정보를 호출하는 방법은 회상과 다릅니다.

검색이 인터넷 검색으로 우리는 방대한 정보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지만 정보는 생성된 맥락과 유리된 채 검색되고 이용되는 게 일반적입니다.

정보가 맥락을 떠나서 손쉽게 이용되면서 다양한 부작용이 생겨나는 걸 우리가 수시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은 정부에 대해서 망각과 소멸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바로 잊혀질 권리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많은 기계 기업의 현실에 맞서서 개인과 사회의 통제력을 회복하려고 하는 신호죠 세상이 디지털화 됐으니 별수 없이 기계 기억에 우리의 삶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는 기술 중심주의에 맞서서 기술을 재설계하자

그래서 기술의 구조를 사람에 맞춰야 한다라고 하는 인간 중심주의의 하나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전히 아날로그적 환경에서 익숙한 삶과 사고 방식을 유지하는 인간이 기계에 디지털 조건에 무조건 적응해야만 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잊혀질 권리는 그러한 기계 기억에 대해서 사람의 기억처럼 맥락과 상황을 적용하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정확한 인간의 기억은 데이터의 저장과 호출 측면에서 보면 결함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 능력과 관련해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져 사람에게 기억은 데이터의 단순한 저장과 호출이 아닌 스스로 판단하고 그 기억을 재구성하는 적극적인 사고 능력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망각과 선택적 기억을 통해서 자신만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경험을 일반화하고 조직화합니다.

즉 범주화하고 추상화하는 인간 사고 능력의 핵심이 바로 망각을 통해서 일어나 망각은 우리가 또한 과거의 경험과 기억에 과도하게 얽매이지 않고 지금 현재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과거의 경험을 추상화해서 요점만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필요성이 낮은 정보는 뇌에서 자연히 사라지게 망각은 인간 기업 기능의 결함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추상화와 일반화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창의력과 통찰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인간 눈의 매우 전략적인 선들이 컴퓨터가 모방하기 어려운 양 결함 투성이의 기억과 사고가 사실은 인간의 특성이자 고유한 장점이라는 거죠. 디지털과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은 예술가 창작에도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훼손되지 않고 무한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기술이 생겨났습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이 뛰어난 수준으로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는 실력까지 갖췄다는 걸 우리는 여러 차례 확인했습니다.

인공지능 창작은 또한 우리에게 예술품의 진정한 가치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20세기 사진과 영화가 대중화하면서 손쉽게 복제본이 제작되고 누구나 원본이 아닌 사본을 통해서 작품을 감상하는 대중문화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독일의 문예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현대에서 예술적 경험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라는 것에 대해서 아우라라고 하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기술 발달로 인해서 영상 예술에서 원본과 복제본의 품질 차이 그 구별은 이제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진품만 나 흔히 말한 일회적이고 고유한 원본성 즉 아우라라고 하는 걸 갖고 있는 거죠.

아우라는 진품에만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짜인 특별한 무늬입니다.

복제가 불가능하다라고 하는 게 왜냐면의 정찰입니다.

감쪽같이 복지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 전시를 아무리 우리가 가까이 눈앞에서 감상한다라고 하더라도 바틱한 성 베드로 성당 안에 놓여 있는 진품 필터 조각을 보는 경험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거 진품의 아우라가 없기 때문이죠.

인공지능이 만들어낼 아름답고 정교한 창작물에서 감상자는 인공지능 예술품의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술의 본질은 창작자의 의도와 아이디어 왜냐하면 이 말하는 예술 경험의 특징은 원본 작품을 특정 장소와 시간에서 맛보는 이례적이고 고유한 분위기인 아우라를 경험하는 겁니다.

이 아우라는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진품에만 존재하는 역사성과 맥락이죠. 달리 말하면 이는 복제가 불가능한 고유성이고 유일성에서 생겨나는 희소성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의미가 중요한 작품도 희소성이 없으면 예술품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술은 인간의 의미 부여 행위인데 인간은 무한한 것이 아닌 희소한 것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보존하고 소장하려고 합니다.

희소성은 달리 말하면 무엇일까요. 사라지고 소멸하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유한성과 소멸성은 예술품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소멸성과 일관성은 창작품과 아름다움 그 자체로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의미를 부여하고 평가하는 데서 비롯된 예술은 아름답고 완벽한 결과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미 부여 행위라는 것이 예술의 유한성과 소멸성에서 다시 확인 그런데 예술품이 지니게 되는 유한성과 소멸성은 미술품이나 음악 연주가 시공간적으로 갖는 일회성과 고유성을 넘어서는 특징이 있습니다.

유한하고 소멸하는 존재인 사람의 창작품이라고 하는 점에서 예술품 또한 창작자의 속성인 유한성과 소멸성을 갖는 인간의 삶이 시공간적으로 유한하고 일회적이라고 하는 불완전함 그것이 바로 예술의 출발점이다.

오스트리아 작가 에른스트 피셔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계가 점점 더 효율적이 되고 더 완전하게 될수록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하는 사실이 명백해지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불완전한 존재 예술품이 갖는 아우라는 그 예술적 경험이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인데 가장 중요한 맥락을 그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인생과 의도라는 얘기입니다.

살아서는 한 점의 작품도 판매하지 못한 화가 반 고흐의 열정적인 작품들은 불안 여건 속에서도 예수를 향한 축구를 멈추지 않았던 그의 삶과 때여서 절대 이해되고 평가될 수 없습니다.

예술 작품이 갖는 최대의 아우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살았던 그 예술가의 삶과 의도입니다.

죽는 날까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라고 읊었던 윤동주의 시가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시인이 다른 아름다운 시어와 이미지 때문이 아니 식민지 청년으로 고뇌하다가 홋가이도의 감옥에서 비극적으로 숨진 시인의 삶이라고 하는 배경이 있기 때문에 윤동주 씨가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 인공지능이 렘브란트나 공구의 화풍을 그대로 모방해서 완성도 높은 그림을 그렸다라고 하더라도 거장의 작품처럼 가치를 인정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인공지능의 그림이 몇 차례 비싸게 팔렸다지만 일회성 이벤트에 불과합니다.

예술의 가치는 기술적 완성도라기보다는 창작자의 정신과 생애 그리고 유한성에 기반하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아무리 모나리자와 똑같은 완벽한 초상화를 그려낸다고 해도 그 그림에서는 예술가의 정신과 세계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무한 복제가 가능한 것은 예술품이 아니라 공산품 예술품의 고유성은 미적 완벽함이 아니라 창작자의 유한한 삶에서 나온 사람의 인지와 자각은 지각과 논리를 통해서 얻어진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사람이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다

라고 하는 생존 과정을 생존을 위한 축구에서 얻게 된 유한성으로서의 의식과 다음 인공지능이 전에 없이 새로운 것을 창작하고 그에 대해서 설명 능력까지 갖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소멸성과 유한성을 기계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확산될수록 우리는 소멸하는 것 잠시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가치를 더욱 추구하게 됩니다.

살아있는 것은 결국 생겨나서 소멸하는 게 운명입니다.

그래서 소멸은 살아있는 것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빛나는 가치 사실 인간의 생명 활동도 자신의 몸과 에너지를 연소하면서 소멸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한순간도 호흡을 멈춰서는 안 되는데

이 호흡은 일종의 산화 작용합니다. 몸이 산소와 결합해서 변화하는 과정 더 이상 산화 작용을 할 수 없을 때 즉 우리를 태울 수 없을 때 우리는 죽는 이러한 인생의 유한성과 일회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한 번뿐인 삶의 의미를 묻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포드대 졸업식에서 말한 대로 죽음이 인생 최고의 발명품인가 시간과 공간에 한계가 없는 무한성의 영역인 디지털과 달리 우리는 소멸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다 라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는 소멸을 피하려는 대신 인생이란 스스로를 연소시키는 에너지를 사르는 과정이라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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