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지는 살들 -이호철
오월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맏딸이 또 밤 열두 시에 돌아온대서 벌써부터 기다리고들 있었다. 서성대는 사람은 없으나 언제나처럼 누구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분위기는 감돌고 있었다.
은행 두취(고위 관직 혹은 우두머리)로 있다가 현역에서 은퇴하고 명예역으로 이름만 걸어 놓고 있는(지금도 거기에서 매달 들어오는 수입으로 한 달 살림은 넉넉했다.) 칠십이 넘은 주인은 연한 남색 명주옷을 단정하게 입고 응접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단정하게 입긴 입었으나 어쩐지 헐렁헐렁해 보이고 축 늘어진 앉음새는 속이 허하여 혼자 힘으로 일어설 힘조차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귀가 멀고 반백치였다. 그러나 허연 살결의 넓적한 얼굴은 훨씬 젊어 보이고 서양 사람의 풍격(風格, 풍치와 품격)을 느끼게 하였다. 며느리 정애(貞愛)와 막내딸 영희(英姬)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며느리의 한복 차림을 싫어하는 왕년의 시아버지의 뜻대로, 정애는 봄 스웨터에 통이 좁은 까만 바지 차림이고 영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며느리와 시누이는 사이 좋은 자매를 연상케 하였다. 세 사람은 모두 넓은 창문 너머 어두운 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정애는 시아버지의 한 팔을 부축하고 앉았고 영희는 옆에 턱을 받치고 앉았다.
바깥은 어둡고 뜰 변두리의 늙은 나무들은 바람에 불려 서늘한 소리를 내었다. 처마 끝 저편에 퍼진 하늘엔 별이 총총하게 박혀 있으나, 아스므레한 기운에 잠겨 있다. 집은 전체로 조용하고 썰렁하다.
꽝 당 꽝 당.
먼 어느 곳에선 이따금 여운이 긴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밑 거리의 철공장이나 대장간에서 벌겋게 단 쇠를 쇠망치로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근처로 그런 곳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굉장히 먼 곳일 것이었다.
꽝 당 꽝 당.
단조로운 소리이면서 송곳처럼 쑤시는 구석이 있는, 밤중에 간헐적(間歇的,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으로 들려 오는 그 소리는 이상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참, 저거 무슨 소리유?���
영희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글쎄, 무슨 소릴까….���
정애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 근처에 철공장은 없을 텐데.���
���….���
정애는 표정으로만 수긍을 했다.
꽝 당 꽝 당.
그 쇠붙이의 쇠망치에 부딪히는 소리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밤 내 이어질 셈이다. 자세히 그 소리만 듣고 있으려니까 바깥의 서늘대는 늙은 나무들도 초여름 밤의 바람에 불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소리의 여운에 울려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이 방 안의 벽 틈서리를 쪼개고도 있는 것이었다. 형광등 바로 위의 천장에 비수가 잠겨 있을 것이었다. 초록빛 벽 틈서리에서 어머니는 편안하시다. 돌아가서 편안하시다. 형편없이 되어 가는 집안 꼴을 감당하지 않아서 편안하시다. 꽝 당 꽝 당, 저 소리는 기어이 이 집을 주저앉게 하고야 말 것이다. 집지기 구렁이(한 집안을 보호한다고 여겨진 구렁이. 이 구렁이가 나가면 그 집안의 운수도 다한다)도 눈을 뜨고 슬금슬금 나타날 때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향연이다. 마지막 향연이다. 유감이 없이 이별을 고해야 할 것이다. 모두 유감이 없이 이별을 고해야 할 것이다.
영희가 갑자기 조작적인 구석이 느껴지게 필요 이상으로 깔깔대며 웃었다. 정애가 화들짝 놀랐다.
���참, 언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우?���
하곤,
���아버지 팔을 그렇게 부축하고 있으니까 며느리 같지가 않구 딸 같아요.���
하고 말했다.
정애는 약간 수줍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물론 못 듣고 있었다. 제 코 앞 사마귀만 주무르고 있었다.
영희가 계속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조급해 있었다. 그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안 들으려고 억지로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꽝 당 꽝 당.
그러나 그 쇠붙이 소리는 같은 삼십 초 가량의 간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뾰족뾰족한 삼십 초다. 영희 목소리의 밑층 넓은 터전으로 잠겨 그 소리는 더욱 윤기를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두 적당히 민주적인 집안인 셈이겠죠?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가 이쯤 되어 있으니.���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더 목소리를 높여,
���그렇지만 진력이 안 나우? 올켄? 도대체 무엇인지 굉장히 빠진 게 있어. 큰 나사못이래도 좋고, 받들어 주는 기둥이래도 좋고, 그런 것 말이야요. 아이, 안 그렇수?���
정애는 시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시아버지와는 다른 성격으로 백치가 되어 있었다. 대화란 피차 신경을 긁어 놓기 위해서, 밤낮 할 것 없이 이렇게 앉아 있는 사람들끼리 잊어버렸던 일을 불러일으켜 피차 골치를 앓게 하기 위해서, 쓸모 없는 사변을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믿고 있는 듯 보였다.
���오늘 저녁두 또 열두 시유?���
영희가 또 말했다. 계속해서,
���오빤 또 이 층이겠수?���
하곤,
���참, 그인 아직 안 돌아왔죠?���
그이란 선재(善載)일 것이었다. 아직 약혼까지는 안 됐으나 결국은 그렇게 낙착되리라고 피차 각오하고 있고, 주위에서도 다 그렇게 알고 있는 터였다. 이북으로 시집을 가서 이젠 이십 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언니의 시동생이라니 그렇게 알밖에 없었다. 1․4 후퇴 때 월남을 하여 험한 세상을 떠난 늙은 어머니가 그를 몹시 아껴 주고 측은해 하였다. 제 맏딸의 시동생이라는 연줄을 생각해서였을 것이었다. 역시 칠십이 되어 노망도 들만 했지만, 맏딸의 이모저모를 선재에게 되풀이 물어 보는 눈치였다. 임종 때도 온 가족이 다 모여 있었지만 선재를 기어이 확인하고서야 안심을 하였다. 아마도 맏딸 대신으로 삼았을 것이었다. 결국 이러는 사이에 이 층의 구석방을 차지해 버렸다. 때로는 일이만 환 들여놓는 수도 있었지만 이즈음에 와서는 그것도 뚝 끊어졌다. 처음 한동안은 불결한 사람으로 느껴지고 천티가 흐른다고 생각했으나 자기가 팔자 드센 여자, 시집을 안 가야 할 여자로 막연하게 자처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 새 그와도 익숙해졌다. 어느 수산물 회사에 있다고 하나, 그 자상한 내력을 알만큼 익숙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열두 시유?���
영희가 말했다.
���글쎄.���
정애가 대답했다.
���정말 돌아오기나 하면 오죽 좋겠수.���
영희가 말했다.
���글쎄 그러기나 하면.���
정애가 대답했다.
���생각하면 참 우스워 죽겠어.���
영희가 웃지도 않고 웃는 시늉만을 했다. 그러기를 멈추고 장난치듯이 말했다.
���숫제 우리 모두 헤져 버립시다. 어떻게든 살게는 되겠지, 뭐. 뿔뿔이 헤져 버려. 그까짓 뭐 어때요? 쉬울 것 같애. 차라리.���
차라리 한번 그렇게 해 보자는 셈으로 익살맞게 눈을 치켜올려 떴다.
마침 성식(成植)이 층층다리를 내려와 안 복도로 통하는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정애와 영희의 시선과 부딪치자 영희 쪽을 향해,
���왜들 그러구 앉았어?���
영희는 히죽이 웃으면서 좀 가시가 돋친 소리로 말했다.
���오빤 여전히 파자마 차림이로구려, 또 언니를 기다리지 않우?���
성식은 대답이 없이 아버지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영희가 말했다.
���오빠, 오늘두 열두 시유, 글쎄.���
곧 이어서,
���같이 안 기다릴라우?���
성식은 대답이 없이 신문을 펼쳐 들었다.
���이 집 젊은 주인이니까 같이 기다려야지 뭐, 안 그렇수, 언니?���
하곤 아버지 쪽을 향해 손짓을 섞어 큰소리로
���아버지, 오빠두 기다려 준대요, 오빠두.���
아버지는 후들짝 놀란 얼굴을 하며 딱히 알아듣지 못한 눈치이나 머리를 끄덕였다.
뚜렷하게 내색은 안 내지만 오빠가 선재와 자기와의 일에 철저히 방관적인 것을 영희는 알고 있다. 선재를 경멸하고 있는 눈치다. 딱히 선재를 사랑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오빠의 그런 투가 영희의 자존심을 긁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차라리 선재를 자기의 어느 구석과 굳게 연결시켜 놓는 것이다.
���오빠, 그이 몇 시에 돌아온단 말 못 들었수?���
성식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오빠, 내가 말끝마다 오빠를 긁어 놓고 있는 것을 알우?���
성식은 안경알이 한 번 차게 번쩍했다.
���왜 그러는지 알우? 알 테지 뭐, 난 요새 오빠와 선재 씨를 요모조모로 비교해 봐요, 오빠가 아니꼬운 점이 많아.���
���….���
���서른네 살, 낯색이 해말갛구, 긴 다리가 바싹 여위구 낮이나 밤이나 파자마 차림, 음악을 공부한다고 하다가 대학은 미술 대학을 나오구, 미국을 두어 번 다녀온 후론 취직할 염(念, 무엇을 하려는 생각)도 않구, 그렇다구 딱히 할 일도 없구 막연하게 작곡가를 꿈꾸고 있구. 그 다음 오빠를 설명할 얘기가 또 뭐 있을까?���
안경알만 또 번쩍했다. 가슴이 또 답답해 왔다. 복도로 나와 버렸다.
꽝 당 꽝 당.
잠시 잊어버렸던 그 소리는 다시 광물성의 딴딴한 것으로 번쩍번쩍 달려들었다. 방안에서보다 더 크게 육중하게 지축을 흔들 듯이 달려들었다. 가슴에서 카바이드 냄새가 났다. 목욕탕 문이 열려 있고 휑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불을 끌까 하다가 역시 켜 두는 것이 좋을 듯하여 그냥 두었다.
이북에 있는 언니가 열두 시에 돌아오다니, 그러한 것은 물론 찬찬하게 따져 볼 성질의 것은 못 되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지는 딱히 알 수 없지만, 이렇게 기다리는 일에는 이젠 익숙해져 있었다. 아버지는 이 년 전부터 귀가 멀어 있었다. 귀가 멀면서 말수가 적어졌다. 말로 할 수 있는 것을 대개는 눈짓이나 표정으로 뜻을 전하곤 했다. 그러면서 차츰 머리가 텅 비어지고 반백치가 되어 간 것이었다. 집안 전체를 통어(統御, 거느려서 제어함)해 나가는 줄이 끊어지면서, 식모는 훨씬 자유스러워지고 활달해지고 뻔뻔해졌다. 이 집에서 가장 문문해(쉽게 다룰 만하다) 보인다는 셈인지 선재에게 곧잘 농을 걸기도 하였다. 그런 것도 영희의 자존심을 긁어 놓았다. 부성부성하게 부은 듯한 약간의 얽은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얼룩덜룩한 원피스 차림으로 외출이 잦았다. 4․19 데모나 5․16 때는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었다. 설마 데모에는 가담 안 했을 터이지만, 시장을 보아 가지고 들어설 때는 넓은 터전의 냄새를 거칠게 풍기면서 있었다.
살그머니 부엌문을 열었다.
���하필이면 밤 열두 시야. 낮 열두 시면 어때서, 미쳐두 좀 곱게나 미치지.���
식모가 혼자 푸념을 하고 있었다.
영희는 흠칠했다.
���뭐? 뭐야? 너, 이제, 뭐라 그랬어?���
식모는 돌아보곤 키들대며 웃기부터 했다.
���너, 이제 뭐라 그랬느냐 말야?���
���아무 것도 아니예유.���
식모가 말했다.
���너두 이 집에 살면 이 집 식구 아니냐? 좀 어울려 들면 못 쓰니, 못 써? 못 써? 누군 너만큼 몰라서 이러는 줄 아니?���
영희의 눈에서는 드디어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누가 어쨌시유? 그저 혼자 해 본 얘긴 걸유.���
오빠는 가는 흰 테 안경을 쓰고 여전히 신문을 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코카콜라 통을 들고 있었다. 하얀 살결의 여윈 다리에 털이 무성했다.
아버지는 그냥 전의 자세 그대로였다. 오빠와 한자리에 앉으면 으레 그렇듯 정애의 아름다운 얼굴엔 우수가 서려 있었다. 머리를 갸웃이 바깥쪽으로 돌리고, 되도록 오빠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집살이의 가장 요긴한 사람인 제 남편을 외면하고 피하면서도 어떻게 시아버지나 시누이에게는 그토록 충실할 수 있는지 영희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마침 큰 벽시계가 열 시를 치고 있었다. 그 여운이 긴 시계 치는 소리는 방안을 이상하게 술렁술렁하게 만들었다. 사방의 벽이 부풀었다 수축했다 서서한 운동을 하였다. 늙은 주인의 허한 눈길이 시계 쪽으로 향해 있었다. 시계 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텐데 기묘한 일이었다. 영희는 풀썩 올케 앞에 앉아 머리를 올케 무릎에 파묻고 그 신묘한 아버지의 시선이 우습다는 셈인지 키들키들 웃다가 시계 치는 소리가 멎자 잠시 조용했다. 머리를 들고 잠긴 목소리의 조용한 어조로 차츰 격해지면서,
���언니, 언닌 정말 늘 이러구 있을 참이유? 답답허잖우? 오빠란 사람은 저렇게 밍물이구, 대낮에두 파자마나 입구 뒹굴구, 코카콜라나 빨구 앉았구.���
순간 정애와 성식이 머리를 동시에 들었다. 성식의 손에서 스르르 신문이 빠져나가며 또 안경알이 불빛에 번쩍했다. 정애는 제 남편과 눈이 마주치자 차디차게 외면을 했다. 미간을 찡그리며,
���아니, 왜 또 이러우?���
영희는 맨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올케의 손을 더욱 힘 주어 잡았다.
���아버진 이렇게 병신이 되구, 대체 우리가 이토록 지키고 있는 게 뭐유? 난 스물 아홉이 아니유? 올켄 내가 스물 아홉 먹은 노처녀라는 것을 언제 한 번이나 새겨 둔 일이 있수? 올케가 이젠 이 집안의 주인 아니유? 이 집안의 가문과 가풍과… 언니, 언니, 언닌 대관절 무슨 명분으루 이 집을 이토록 지키고 있는 거유?���
성식이 코카콜라 통을 놓았다. 담배를 꺼냈다. 이런 일엔 익숙해진 듯하였다. 그러나 가느다랗게 긴 손가락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정애의 남편이나 영희의 오빠는 없고 찬 안경알만이 있었다.
���아니, 정말 왜 또 이러우?���
시계를 쳐다보던 노인도 말귀는 못 알아들어도 눈을 크게 벌려 뜨고 영희를 건너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허한 눈길이었다.
���언니, 정말 빨리 이 집 내놓구 이사합시다. 교외에다가 조그만 집이나 사서… 전셋집들은 다 내놓아 정리하구, 아버진 하루 빨리 세상 떠나시도록 하구 올켄 이혼을 하구….���
���….���
���그리구 저 기집앤 내보내구, 우리 둘이….���
���….���
영희는 다시 안으로 잠겨 드는 소리로 말했다.
���언니, 난 요새, 모르겠어요. 직면해 있는 건 올케두 알고 있잖수? 어찌 그렇게 모른 체만 할 수 있수, 그저 그렇게 돼 가나 부다, 내버려두면 그렇게 돼 가나 부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내버려 둘 성질은 아니잖수?���
���….���
꽝 당 꽝 당.
쇠붙이의 쇠망치에 부딪는 소리가 조용해진 틈서리로 파고들어 왔다.
식모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영희는 정애의 한 손을 잡고 있었다. 성식은 다시 신문을 펼쳐 들고 있었다. 딱히 신문을 보고 있는 눈치는 아니고 불빛에 안경알만 번쩍였다. 늙은 주인은 그냥 어두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그들은 누구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늙은 주인은 맏딸을, 정애는 아직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맏시누이를, 영희는 언니를, 성식은 누님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누구도 분명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의식은 없었다. 도대체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저 모두가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것이라도 없으면 한집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살 명분이 없게 되는 셈이었다. 이젠 이런 일에 적당히 익숙해진 터였다. 그리고 이젠 이런 일에 모두 넌덜머리를 낼만도 하였다. 결국 이 기다림의 향연은 늙은 주인이 역시 아직은 이 집안의 주인이라는 것을 암시해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맏딸이 돌아온다는 고집을 부리면 맞이할 준비들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돌아올 것 같은 실감이 나기도 하였다.
식모는 잠시 그냥 서 있었다. 어쩐지 한 번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어 보고 싶었으나,
���영희 언니, 밖에서 찾아요.���
하고 말했다.
영희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뒷머리를 두어 번 내리 쓰다듬으며 밖으로 나갔다.
불빛에 있다가 나와서 밖은 새까마했다. 고무신을 끌고 조심조심 큰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었다. 골목길이 휑하게 뚫리고, 그 끝 큰길과 맞닿은 어귀에 잡화상 불이 안온하게 환했다. 차츰 주변의 음영이 잔잔하게 부풀어올랐다. 형광등 불빛에 비해 그 불그스름한 잡화상의 전등 불빛은 따뜻한 가라앉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영희는, 무엇인가 그리워진다고 생각하였다.
옆 담벼락에 누군가 기대어 서 있었다. 또 술이 엉망으로 취한 선재였다. 직감으로 술이 만취한 것을 알자, 영희는 또렷한 저항감이 달콤한 것이 되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술 안 먹은 선재보다는 이렇게 술에 취한 선재가 훨씬 좋은 것이었다.
선재 등뒤로 다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꽤 따뜻한 솜씨라고 스스로 느꼈다.
���술이 많이 취했군요?���
하곤 말을 이었다.
���왜 들어오지 못하구 밤낮 나부터 찾아요. 뭣 꺼릴 게 있다구, 그런 건 선재 씨답지 않아요.���
선재는 엉거주춤하게 돌아서며 별 뜻이 없이 허붓하게 한번 웃기부터 했다. 술 취한 사람치고는 또렷한 소리로 내던지듯이 말했다.
���나, 마셨어, 우습지? 우습지 않아? 참 영희에게 뭐 좀 따져 봐야겠어.���
���따져 보나 마나지, 뭘.���
영희도 비죽이 웃으면서 이렇게 받곤 팔깍지를 끼었다. 어두운 속에서 선재는 한 번 꿋뚤하고 넘어질 듯하다가 말했다.
���우리 나가자, 당장 나가자, 이 집을 나가자, 어때?���
���그래, 나가요. 어차피 나가게 될 걸, 뭐.���
영희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 밤 당장 나가, 지금 당장.���
���….���
영희는 가볍게 웃었다.
���정말이란 말야, 정말 정말이란 말야.���
선재가 말했다.
무엇이 정말이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정말은 정말이라고 영희도 생각했다.
꽝 당 꽝 당.
쇠붙이에 쇠망치 부딪치는 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바깥에 나와서 이렇게 술이 취한 선재와 마주 서 있어서 그 쇠붙이 소리는 훨씬 자극성이 덜해져 있었다. 차라리 따뜻한 초여름 밤의 기운 자락을 띄우고 있었다.
���정말이야, 정말.���
선재가 또 말했다.
���알아요, 글쎄.���
영희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오빠나 정애와 마주 앉으면 으레 자기가 하고 있는 소리를, 지금은 선재가 그다운 가락으로 하고 있고 영희는 듣고 있는 편이 되어 있었다. 술 취한 선재와 이렇게 마주 서니까 그 수다한 언어라는 것이 값이 싸게 생각되었다.
선재는 갑자기 모가지를 앞으로 길게 내 빼어 들며 토할 몸짓을 했다. 두어 번 꽥꽥거리더니 토하기 시작했다. 영희가 재빨리 두 손을 오므려 선재의 입에 가져다 댔다. 끈적끈적한 것이 두 손에 담겨졌다. 영희는 웬일인지 웃음이 복받쳐 올라와 킬킬대고 웃으면서, 그것을 길 한옆에 버리고 벽돌담에 손바닥을 두어 번 문질렀다. 어둠 속에서도 선재의 눈에 눈물이 배어져 있었다. 그것을 문질러 주었다. 선재는 또 한 번 허붓하게 웃었다. 한 팔로는 선재의 전신을 부축하고 한 손으로는 등을 두들겨 주었다. 감미가 곁들인 기묘한 서글픔이 전신으로 퍼졌다. 건장한 사내를 이렇게 부축해 주고 있다는 알이 찬 실감이 와 안겼다. 동시에, 결국은 이렇게 낙착되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서서히 영희는 흥분되고 있었다. 선재의 등을 두들겨 주면서 한쪽 볼을 그 등에 차악 대었다. 육중한 온기가 느껴지고 심장 뛰는 소리가 요란하고 나무들 사이로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꽝 당 꽝 당.
쇠붙이 소리는 평범하게 멀었다. 근육이 좋은 사나이가 앉아서 혹은 서서 두드리고 있을 것이었다. 불꽃이 튀기기도 하고 튀지 않기도 할 것이었다. 그 근처 뜰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이 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오 월 밤이 익으면서 저녁밥도 적당히 삭아지(속에서 소화되고) 모여 앉아서 얘기하기가 좋을 것이었다. 담뱃불이 두서넛 발갛게 타고 있을 것이었다.
���저 소리 들려요?���
영희가 말했다.
���무슨 소리?���
선재는 어눌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의 등에 한쪽 귀가 파묻혀 있어서, 그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기 전에 전신 안으로 와랑와랑하게 퍼져 들기부터 했다.
���저 쇠붙이 뚜드리는 소리.���
선재는 잠시 어리둥절하게 귀를 기울이는 눈치다가,
���응, 들려. 왜?���
���….���
영희는 가볍게 웃었다.
선재를 부축하고 들어오다가 층층다리 밑에 잠시 버려두고 응접실에 들렀다. 아버지가 한 번 쳐다보았다. 정애는 쓸쓸하게 한 번 웃었다. 성식은 여전히 신문을 들고 있었다.
���또 취했어요.���
영희가 말했다. 남자가 취해 들어오면 여자란 짜증을 내게 마련이라는 셈으로,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게 그런 투가 서려 있었다. 정애는 말없이 다시 한 번 웃었다. 영희는 정애의 그 무엇이나 다 알고 있는 듯한 웃음을 대하자 약간 낯을 붉혔다.
마침 식모가 황급하게 문을 열었다.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언니 언니, 아이 저걸 어쩌우? 현관 복도에다가 글쎄.���
또 토한 모양이었다. 순간 집안은 큰일이나 난 듯이 술렁술렁해졌다. 영희가 달려나가고 식모가 목욕탕 쪽으로 뛰어가고 문 여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스위치를 눌러 복도 불을 켜고 수도에서는 물이 솟구쳤다. 식모는 꽤 좋은 모양이었다.
응접실은 다시 휑했다.
비로소 정애가 남편을 바라보았다. 역시 찬 안경알만이 눈에 들어왔다. 웬 을씨년스러움이 뒷등을 짜르르하게 타고 내려갔다. 시아버지는 잠시 요란 법석을 피우는 복도 쪽을 내다보며 며느리에게 눈짓만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정애가 위층을 가리키며 서재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양치질 소리가 나더니 끙끙거리면서 층층다리를 올라가고 있었다. 정애는 그 소리를 차곡차곡 접어 두듯이 듣고 있었다. 선재라는 사람이 꽤 좋게 생각되었다. 식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식모도 같이 작업에 참여한 모양이었다. 몇 번 뒹구는 듯한 소리도 나고 영희의 숨을 죽인 웃음소리도 들렸다.
일순간 집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위층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식모의 말소리가 짤막하게 나고 층층다리를 쿵쾅거리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성식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말없이 나가려고 하였다.
���여보.���
하고 정애가 불렀다.
���이 층으로 가요?���
안경알에 가려 표정을 알 수 없는 성식은 대답이 없이 그냥 이 편을 내려다보고 기어이 나갔다. 정애는 와들와들 떨릴 만큼 갑자기 조급해졌다. 층층다리를 또 올라가고 있었다. 정애는 까닭도 없이 화들짝 놀라졌다. 그것은 아득한 곳을 올라가고 있는 듯싶었다.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몇 시간이 걸려 올라가는 듯싶었다. 친아버지 같기만 한 시아버지의 팔을 더욱 힘 주어 잡으며 정애의 눈은 피곤한 듯이 감겼다.
식모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불빛이 싸늘하게 하얗다. 정애가 혼자 이상하게 울고 있다가 머리를 들었다. 늙은 주인은 뜰을 내다보고 있었다. 식모는 한참 동안 그냥 서 있었다. 문을 닫으려는데 정애가 물었다.
���언니, 안 내려오니?���
���좀 있다가 내려온대요.���
���왜?���
���….���
���알았다.���
���알았을까? 정말 알긴 알았을까? 알았을 거야.���
식모는 이렇게 생각했다. 눈이 마주치자 피차 화가 난 듯이 마주 쳐다보았다. 늙은 주인도 식모와 정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느 때답지 않게 뚜릿뚜릿한 눈길이었다.
드나들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는데 정작 들어와 보니 초라하게 좁은 방이었다. 씁쓰름하게 독신자의 냄새가 났다. 불을 켤까 하다가 그대로가 좋은 듯하여 선재를 침대에 눕히고 뜰로 향한 창문을 열었다. 아래 응접실 불빛이 여기까지 약간 반사되고 있었다. 영희는 아직 흥분 속에 있었다. 일정한 흥분의 바로미터를 그냥 유지하고 싶었다. 그 흥분이 가시기 전에 일을 치르고 싶었다. 원피스를 벗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선재를 흔들었다.
���이것 봐요, 눈 떠요, 자면 싫어요.���
선재는 끙끙거리며 저리 비키라는 셈으로 한 손을 내젓다가 눈을 뜨고 영희의 얼굴을 보자 일순간 조용하게 올려다보았다. 자연스럽게 영희를 끌어안았다. 영희는 순하게 응하면서 속삭였다. 땀에 젖은 남자의 머리카락 냄새가 났다.
���취하면 싫어요, 지금 이런 경우엔 취하지 말아요.���
선재는 아직 정신이 몽롱했다. 그러나 술은 차츰 깨고 있었다.
���정말 정말이야요, 정신 차려요, 정신 안 차리문 나 억울해요.���
���음, 술 깼어, 정신 차리구 있어.���
비로소 선재가 말했다.
꽝 당 꽝 당, 그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퍽 가까이에서 들리고 있었다. 뚫린 창문은 흡사 그렇게 뚫려진 구멍 같았다. 뚫린 구멍 저편으로 초여름 밤이 쾌적하게 기분이 좋았다.
���취하지 말아요.���
영희가 또 말했다.
���안 취했어.���
선재가 대답했다.
���거짓말.���
영희는 마음속으로 꺄득꺄득 웃었다.
���정말 취하지 말아요, 정신 차리고 샅샅이 씹어요. 하나라도 놓치면 싫어요….���
���….���
선재는 영희를 끌어안으며 몸을 한 번 뒤챘다. 그 김에 영희의 몸도 빙그르르 돌며 한옆에 모로 뉘어졌다. 온 몸에 꼭 알맞은 공간이다.
���오늘이 며칠이죠?���
영희가 속삭였다.
���몰라.���
선재가 받았다.
���그런 걸 모르면 어떻게 해요?���
영희가 속삭였다.
이런 경우의 사내가 대개 그렇듯, 선재는 조급해져 있었다. 영희는 요런 상태를 조금이라도 더 유지하고 싶었다.
���왜 이리 급해요, 급하게 서둘지 말아요, 우리 얘기부터 해요.���
자세를 취할 듯한 선재를 밑에서 끌어안으며 영희가 달래듯이 말했다. 선재는 다시 거북이 등이 올려 솟구듯 어두므레한 속에서 움찔움찔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 봐요, 얘기부터 해요.���
���무슨 얘기.���
���오늘이 며칠이죠?���
���몰라.���
���모르면 어떻게 해요?���
���….���
���열두 시에 언니가 돌아온대요.���
���….���
���정말 정말이야요, 늘 답답하지요? 선재 씨도 그렇죠?���
영희의 목소리는 차츰 애처로워지고 갸날퍼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다.
���모두 무엇을 놓치고 있어요. 큰 배경을 놓치고 있어요. 뿔뿔이 떨어져 있어요. 그렇죠? 그렇죠? 그래서 답답하죠?���
잠시 눈을 떴다. 뚫린 창 저편으로 오 월 밤이 보였다. 부끄러웠다. 다시 눈을 감았다.
���어마아, 이러지 말아요. 나, 내려가야 해요. 언닐 같이 가디려야 해요. 내일 아침 피차 쑥스러워지면 어떻게 해요? 쑥스럽지 않겠죠, 어마아 정말이군요? 여자가 남자보다 아름답다는 건 이런 때 보면 알아요.���
입만 쉴 사이 없이 움직일 뿐이다.
���자꾸 쫓아오구 있었어요. 나, 오늘 저녁 내내 도망을 하구 있었어요. 혼자 감당하기가 어떻게나 무섭던지 그런 걸 누가 감당해 주나요? 그 놈의 쇠망치 소리 말이야요, 딴딴한 쇠망치 소리 말이야요.���
맏딸이 세라복(선원 복장을 본따서 흰 칼라를 단 학생복)을 입고 있다, 세라복을 입고 애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새하얀 깃에서 바닷물 냄새가 난다, 손에는 정구 라켓을 들고 있다, ���이겼어요, 이겼어요, 아버지.��� 하며 매달린다. ���어떻게 이겼니?��� ���이렇게 이겼지요, 뭐.��� 맏딸은 라켓을 휘두른다, 집안은 맏딸이 있어서 웅성웅성하다, 이 방 저 방마다 문이 요란하게 여닫힌다, 성식이가 숫돌에다 칼을 갈고 있다, 꽝꽝한 햇볕에 숫돌과 칼이 번쩍번쩍한다, 모든 것이 번쩍번쩍한다, 정문은 휑하게 열려 있다, 바람이 제멋대로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뜰의 나무들도 기름이 올라 미끈미끈하다, 흙 냄새 나뭇잎 냄새가 뒤범벅이 되어 물씬물씬하다, 바둑이는 뜰 한가운데 자빠져 있다, 불만이 없어서 짖을 거리가 없다, 영희가 아장아장한 작은 발로 개를 한 번 걷어찬다, 개는 영희를 올려다보며 약간 얕본다, 그러나 몇 발자욱 피해 주기는 한다, 영희가 까덱까덱 웃는다, 따라가서 또 한 번 걷어찬다, 개는 완연하게 노여운 기색으로 끙끙거리며 곁눈질로 영희를 살피다가 두어 번 애걸하듯, 원망하듯 부당하게 이유 없이 차인 것을 넋두리하듯 짖는다, 다시 영희가 까덱까덱 웃는다, 개도 웃으면서 하품을 하면서 꽁지를 흔든다, 오줌이 마렵다, 며늘아 오줌이 마렵다, 식모애가 문을 열고 호젓하게 서 있다, 신 살구알 내음새가 난다, 버르장머리가 없다, 머리칼이 까만 아내는 뜰에서 장미꽃을 따고 있다, 허리에 살이 올라 있다, 등의자에서 영희가 울고 있다, 금시 숨이 넘어가도록 울고 있다, 마음대로 울도록 집안이 들썩들썩하도록 내버려 둘 모양이다, 세라복을 입은 맏딸이 아내에게 말한다. ���어머니, 우리두 라일락꽃을 심어요, 어머니.��� ���그래라.��� 하고 아내가 자신 있게 대답한다, ���심자꾸나, 못 심을 까닭이야 없지 않니?���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은 일은 못 할 일이야 있겠니? 나이 든 식모가 가생이(가장자리)로 지나간다, 아내가 말한다, ���어멈, 어딜 가우?��� 어멈은 대뜸 우그러들며 무엇이라고 대답한다, (오줌이 마렵구나.) 머리가 까만 어머니가 뽕나무에 올라가 있다, 풋풋한 뽕밭 냄새가 코에 시리다, 서쪽 산에 걸린 붉은 해가 굉장히 크다, ���어머니, 저 해 좀 봐.��� 어머니는 들은 체도 안 한다, ���어머니, 저 해 좀 봐, 저 해.��� 해는 중천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해의 키가 커져서 손발이 생겨서 성큼성큼 이편으로 올 것 같다, 서산 그늘이 우- 소리가 나듯 달려오고 있다, 엎뎌 있던 보리밭이, 그늘에 쏠려 일어선다, 은행나무 위의 까치집이 반짝반짝한다, 죽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다가 아버지는 뜰에 나와서 또 울고 있다, 죽은 어머니의 풀어진 머리카락이 길다, 머리카락이 길어서 어머니 같지가 않다, 지붕 위에 수염이 시커먼 사람이 올라가서 이상한 고함을 지른다, 사방이 찌렁찌렁 울린다, 밑에서 아버지가 울다가 그 사람을 쳐다본다,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온다,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차례차례로 와서 절을 한다, 집안은 물씬물씬 국수 국물 냄새로 찬다, 웅성웅성해서 좋기도 하고 어머니가 죽었대서 서러워지기도 한다, 아버지가 자꾸 운다, 아버지 울지 마 울지 마, 이십 년만에 양복을 입고 돌아온다, 아버지는 또 운다, 아버지 울지 마 울지 마, 며늘아 오줌이 마렵구나, 오줌이 마려워…. 글쎄, 그러면 그렇지.
영희가 문을 열었다.
���오빠 자우?���
하고 물었다.
���자지 않죠? 자지 않겠지, 뭐.���
성식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채 들어서는 영희를 건너다보았다. 안경을 벗고 있어서 더 바싹 여위어 보였다. 푸르스름한 불빛이 바닷속처럼 썰렁했다. 방이 넓어서 천장도 더 훵하게 높아 보였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 영희가 조용히 불렀다.
���오빠.���
성식은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오빠.���
성식은 눈을 조금 벌려 떴다.
���…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이우?���
하곤 곧 이어서
���오빠… 나, 결혼했어, 오늘 밤 지금 막… 뭐 어떠우?���
성식은 또 안경을 찾았다. 눈길을 피하며 영희가 그것을 집어 주었다. 성식은 안경을 쓰고도 몸을 가누기가 어려운 듯했다.
���오빠, 이왕 그렇게 될 걸 뭐, 어차피 이젠 이런 형식으루 될밖에 없잖수, 누구나 다 자기 혼자의 문제밖에 안 남아 있는 걸. 안 그렇수? 어쩌다가 우리가 모두 이렇게 됐을까, 오빠.���
성식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빠, 아무 할 말이 없수? 무슨 일을 저질러야 오빤 열을 올릴 수가 없수? 말을 할 수가 있수? 대관절.���
성식은 그냥 말도 없이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영희는 보일 듯 말 듯 쓰디쓰게 한 번 웃었다.
꽝 당 꽝 당.
그 쇠붙이 소리가 또 뾰족하게 돋아 올랐다. 영희는 몸을 한 번 흠칫 추우며(추스리며),
���아이 저 놈의 소린 그냥 들리네.���
성식은 어느 새 담배를 피우고 있다.
밤은 깊어질수록 더욱 새하얗게 투명해졌다. 방안의 불빛도 더우기 하얘지고 늙은 주인은 여전히 코앞의 사마귀를 주무르고 있었다. 선재와 식모는 저저끔(제각기) 제 방에서 잠이 들었다. 영희는 연분홍 색 파자마 차림으로 까만 선글라스를 썼다 벗었다 하고 있었다. 정애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꽝 당 꽝 당.
그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도 띠글띠글하게(여러 개의 가늘거나 작은 물건 가운데서 몇 개가 두드러지게 굵거나 크게) 계속 투명했다. 이미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급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후방에다가 든든한 것을 두고 탐색전을 벌이는 소리 같았다. 영희는 선글라스를 썼다 벗었다 하면서 말했다.
���언니, 정말 저거 무슨 소리유?���
���글쎄, 무슨 소릴까?���
정애가 대답했다.
���근처에 철공장은 없을 텐데,���
���….���
정애가 대답이 없자 영희는 선글라스를 접으며 말했다.
���언닌 저런 소리 들으면 이상한 생각이 안 드우?���
���무슨 생각?���
���글쎄, 무슨 생각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할 수는 없지만, 우리와는 다른 무엇인가 싱싱한 것이 서서히 부풀어서 우릴 잡아먹을 것 같은… 얘기가 우습지만….���
���….���
영희는 가느다랗게 콧노래를 시작했다. 발까지 달싹달싹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정애가 보일 듯 말 듯하게 상을 찡그렸다.
영희가 또 화들짝 놀라듯이 말했다.
���우리가 왜 자지 않구 이렇게 앉아 있수? 붙어 앉아 있어 보아도 진력만 나구, 저저끔 제 방에 혼자 떨어져 있으면 무섭구, 바스락대는 나무 잎새 소리에조차 후들짝후들짝 놀라구, 한밤중에 응접실에 내려와 보면 한두 사람은 으레 이렇게 붙어 앉아 있구, 불이 환하구, 푸욱 잠이나 들 수 있으면 오죽 좋겠수?���
영희는 이것저것 자꾸 지껄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참, 언니도 그런 일 겪었수? 어릴 때 제삿날 저녁 말이요. 부엌엔 웅성웅성 아주머니들이 들끓구, 불을 많이 때서 온돌방은 덥구, 애들끼리 장난을 하다가 설핏 잠이 들지 않겠수? 얼마쯤 자다가 깨 보면 여전히 방은 덥구, 뜨락과 부엌과 마루에서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구 방안엔 불이 훤하구, 그런데 아무도 없이 혼자 잠이 들어 있었거든요. 물론 입은 채로 지요. 깨 보니까 마루에 부엌과 다른 방에서 웅성웅성 사람들이 들끓는데 제 방만은 아무도 없지 않겠수? 아득해서 혼자만 이렇게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할 텐데 알려지지는 않구 답답해서 답답해서.���
���….���
���누구인가는 이렇게 투명한 밤일수록 엽기(獵奇, 기괴한 일이나 물건에 호기심을 가지고 즐겨 찾아다님)적인 생각 있지 않수? 안나 카레리나를 자처해 본다든가 장 발장이 되어 본다든가 하면 괜찮다고 합디다만 어떨까, 그렇게라두 해 볼까 봐, 어마아 벌써 열한 시 사십오 분이유, 언니.���
늙은 주인의 코 앞 사마귀를 만지는 모양은 푸념을 하는 어린애처럼 보였다. 손에 땀이 나 있고 초저녁보다 조급해 있었다. 이따금 눈이 휘둥그래져서 두리번거리며 영희와 정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기묘하게 예리한 것을 담고 있었다. 영희도 말을 멈추고 아버지의 그 시선을 좇고 정애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늙은 주인은 아직은 이 집안의 가장인 모양이었다.
���참 언니, 우리 집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때로 잠자리에 누워서 잠은 안 오구 점점 더 샛맑아 올 때 있지 않수? 우리 집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번 본격적으로 따져 보자, 이렇게 따져 보기로 하거든요. 마음속 한구석으로는 아주 단조로운, 힘이 들지 않는 생각,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이렇게 무한정 세어 나가구, 눈은 바깥의 밤하늘을 내다보구, 다른 한구석으로는 찬찬하게 떠올려 가면서 일 년 전은 우리 집이 어떠했었나, 아버지는, 오빠는, 올케는? 이 년 전은 우리 집이 어떠했었나, 이렇게 따져 올라가 보거든요. 그러면 아무것도 이상해진 것은 없는 것 같아요. 하나도 이상한 구석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십 년 전은 어떠했나? 이십 년 전은? 이렇게 생각하다가 다시 일 년 전이나 오늘로 돌아오면 훨씬 차이가 생겨지는 걸. 아주 뚜렷하게 말이야요.���
영희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여느 때 없이 아름다웠다. 정애는 조용히 머리를 수그리고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영희는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지껄이다가 정애를 쳐다보곤 눈을 벌려 뜨며 말했다.
���어걔, 언니 우우?���
일순 조용했다.
꽝 당 꽝 당.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가 뾰조록히 돋아 올랐다.
층층다리를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소리이나 쿵쿵 온 집채가 흔들리듯이 울리고 있었다. 아득한 곳을 내려오는 소리 같았다. ���복도에 불을 켜 둘 걸, 괜히 죽였지.��� 영희는 몸서리를 치면서 이렇게 힘을 주어 속으로 중얼댔다. 어쩐지 어두운 속을 내려오는 모습보다는 환한 속을 내려오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좋을 성싶었다.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물론 오빠일 것이다.
문이 열리고 안경을 쓴 오빠가 들어서고 있었다. 안경알이 차게 번쩍였다. 역시 혼자는 못 견디겠는 모양이었다. 영희를 대하기가 난처할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혼자 있느니보다는 나을 성싶으니까 내려왔을 것이었다.
���오빠, 아직 안 잤수?���
차악 감겨드는 정겨운 목소리로 영희가 물었다. 성식은 한 쪽 볼이 약간 추켜올려지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겁겁하게(성질이 급하여 참을성이 없게) 비실비실 피하는 듯한 몸짓을 하며 정애와 영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영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오빠, 언니두 알아요. 다 얘기했는 걸 뭐, 그런 게 뭐 그리 대단하우?���
이상한 일이었다. 정애와 마주 앉으면 명주실을 뽑아 내듯 단단한 소리가 나와지고, 오빠만 끼우면 차게 맵게 신랄해지고 싶은 것이었다. 성식은 안경알 속에서 한 번 웃는 듯하였다.
영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오빠 웃구 있수?���
���….���
���오빠 웃구 있수? 이제 웃었수?���
���….���
성식은 무엇을 털어 내기나 하려는 듯이 상을 찡그리면서 뒤로 물러가려고 하였다. 정애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영희와 남편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순간 벽시계가 열두 시를 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일제히 시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안이 술렁술렁해졌다. 시계를 쳐다보던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늙은 주인 쪽으로 향했다. 코앞의 사마귀를 만지던 늙은 주인이 어리둥절하게 아들과 며느리와 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복도로 통한 문이 열리며 방안의 불빛이 복도 건너편 흰 벽에 말갛게 삐어져 나갔다. 열두 시가 다 쳤다. 네 사람의 시선이 그 쪽으로 옮겨졌다. 조용했다. 왼편 벽으로부터 서서히 식모가 나타났다. 히히히히 하고 이상한 웃음을 띄우고 서 있었다. 제딴에 미안하다는 뜻인 셈이었다.
���벤소에 갔었시유.���
하고 말했다.
순간 영희가 발작이나 일으킨 듯이 아버지 쪽으로 달려갔다. 한 손으로 식모를 가리키며, 한 손으로는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쪼개지는 듯한 큰소리로 말했다.
���아부지, 자 봐요. 언니가 왔어요, 언니가… 정말 열두 시가 되었으니까 언니가 왔어요. 이제 정말 우리 집 주인이 나타났군요. 됐지요? 아부지 자, 어때요? 됐지요? 아부지.���
식모가 이번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말이에요, 아부지, 저렇게 언니가 왔어요. 그렇게도 기다리시던 언니가 왔어요.���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식모를 내다보는 영희의 눈길은 적의(敵意, 적대감)로 타오르고 있고, 아버지는 영희의 부축을 받으며, 저리 비키라는 것인지, 혹은 어서 들어오라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게 한 손을 들어 허공에다 대고 허우적거리고, 성식과 정애도 엉거주춤하게 의자에서 일어서 있었다.
꽝 당 꽝 당.
그 쇠붙이 소리는 밤 내 이어질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