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단편소설3

10. 동행

by 자한형 2022. 4. 14.
728x90

동 행 -전상국

 

발목까지 빠져드는 눈길을 두 사내가 터벌터벌 걷고 있었다. 우중충 흐린 하늘은 곧 눈발이라도 세울 듯, 이제 한창 밝을 정월 보름달이 시세를 잃고 있는 밤이었다.

앞서서 걷고 있는 사내는 작은 키에 다부져 보이는 체구였지만 그 걸음걸이가 어딘지 모르게 허전허전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 사내로부터 두서너 걸음 뒤져 걷고 있는 사내는 멀쑥한 키에 언뜻 보아 맺힌 데 없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앞선 쪽에 비해 그 걸음걸이 는 한결 정확했다.

큰 키의 사내가 중절모를 눌러 쓰고 밤색 오버에 푹 싸이다시피 방한(防寒)에 빈틈이 없어 보이는가 하면 키 작은 사내는 희끔한 와이셔츠 위에 다만 양복 하나를 걸쳤을 뿐, 그 차림새가 퍽도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그 양복이라는 것도 윗도리의 품이 좁디좁고 길이도 깡똥한 반면 아랫바지는 헐렁하게 크기만 해 걷어올린 바짓가랑이에 눈이 녹아 붙어 걸음을 옮길 적마다 서걱거렸다. 그 작은 키에 어깨를 잔뜩 좁혀, 을씨년스럽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정말 이렇게 "동행을 얻어 다행입니다."

큰 키의 사내가 깡깡하면서도 어딘가 여유를 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밤길을 혼자 걷기란 맹했죠. 더욱이 이런 산골 눈길은...”

하고, 앞서 걷던 작은 키의 사내가 어떤 생각으로부터 후다닥 벗어나기라도 한 듯 생경한 목소리로 받았다.

그리고 곧 자기 쪽에서 말을 건네 왔다.

", 선생은 춘천에서 오신다기에 말씀입니다만, 혹시 어제 근화동에서 살인 사건이 생긴 걸 아시우?

그러자 큰 키의 사내는 흠칫 몸을 추슬렀다가 좀 사이를 두어,

"살인이라면---,,, , ! 알구말구요. 사실 전 우연한 기회로 현장까지 봤습니다만, ,,,,,."

하고 조심스레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키 작은 사내가 주춤 멈춰 서서 다그치듯,

", 현장엘? 그래요? 그 술집엘 선생이 가 보셨다구., ,...?”

다시 몇 걸음 떼어놓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 말입니다. 그 살인범을 경찰에선 쉬 잡아 낼 수 있겠습디까? , 단서 같은 거라두,,,,,,"

그러자, 큰 키의 사내는 잠깐 머뭇거리다.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군요 - 중얼거리듯 잘라 놓곤 이어,

"그런데 노형은 아까 원주에서 보신다고 하신 듯한데 어떻게 벌써 그 사건을 그렇게 ,,,,,, 역시 소문이란 ......."

그냥 흘려 넘기는 투였다.

그러나 이 때 키 작은 사내가 주춤 멈춰 서며,

"아아니 선생, 이거 왜 이러슈. 그래, 내가 언제 원주에서 온다고 했단 말이유?"

무턱 시비조였다.

", 그러십니까? 제가 그만......."

그제야 멈춰 섰던 사내가 다시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큰 키의 사내도 어깨를 한 번 으쓱 추키곤 앞선 쪽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붙었다.

그렇게 상당한 거리를 서로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눈길을 터벌터벌 걷던 그들이 문득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들 시야에 좨 넓은 평지를 사이에 두고 좀 멀찍이 놓인 산마루가 희미한 채 그 윤곽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작은 키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질금질금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이 때 큰 키의 사내는 바짓가랑이와 오버 자락에 엉겨붙은 눈을 털어 내다가 불쑥,

"저 재 너머가 바루 와야리겠습니다 그려?”

하고 무슨 변명이라도 하듯, 초행이라 놔서,,,,,, 했다.

그러나 키 작은 쪽은 대꾸도 없이 바지 단추를 더듬거려 채우다간,

"가만있자,, ,,,, 이 길루 내처 가면 엔간히 돌 게구,,,,,,."

곧 뒷 사내를 향해,

"선생. 우리 일루 질러갑시다."

그런 다음 이쪽 대답은 아랑곳없다는 듯 지금 그들이 걸어온 한길을 벗어나 도무지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냥 눈 덮인 밭으로 터벌터벌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질러가는 겁니까? 허지만 이 눈에 저 고갤,,,,,, 좀 돌더라두,.,,,,"

언제나 말미를 흐리곤 하는 큰 키의 사내가 아직 한길에서 내려서지 도 않은 채 머뭇댔다.

"맘대루 허슈, 난 일루 가겠수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작은 키의 사내는 터벌터벌 발목까지 빠져드는 흰 눈발을 걸어 나갔다.

그러자 큰 키의 사내는 퍽 난처하다는 듯 한동안 망설이다가,

"여보시오, 노형, 나 잠깐?”

그러나 키 작은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큰 키의 사내는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어깨를 한번 으쓱 추켜 올리곤 한길에서 내려서 앞서 간 쪽의 발자국을 조심스레 되밟아 나갔다.

앞서 가던 쪽이 밭 두렁에서 발을 헛디뎌 앞으로 넘어졌다. 그러나 곧바로 몸을 세워 옷에 묻은 눈을 털 생각도 않고 그냥 걷고만 있었다. 그렇게 키 작은 쪽이 허청거릴 적마다 큰 키의 사내는 오버 주머니에서 가죽 장갑 낀 손을 빼어 줄타기하듯 조심스레 발을 옮기곤 했다_

바짓가랑이에 붙은 눈을 열심히 털면서,

그들이 지금 가로지른 평지가 끝난 바로 앞에 하천이 하나 가로놓여 있었다.

"여길 건너야 할 텐데,,,,,,."

작은 키의 사내가 벌써 아래로 내려서면서 중얼거렸다. 언뜻 보기에 거기 개울이 있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다만 잘잘거리는 물소릴 듣고야 바로 앞에 막아 선 산기슭을 타고 개울이 흐르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음이 잘 얼었을까요? 물이 많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큰 키의 사내가 조심스레 개울로 내려서며 말했지만 역시 앞선 쪽은 대답이 없었다.

온통 눈으로 덮인 개울은 처음엔 자갈이 밟혔다. 좀더 들어서자 덧물이 흘렀다가 언 층이 발 닿는 곳마다 부적부적 소릴 냈다. 큰 키의 사내는 언제나 앞선 쪽의 발자국을 되디디며 그것도 못 미더운지 몇 번씩 발을 굴러 보곤 했다.

이 때 앞서 걷던 사내가 뒤로 돌아서며, 여긴 안 되겠수다 - 중얼거리는 거와 동시에 그의 한쪽 발이 뿌지직 얼음을 깨뜨렸다. 그러자 사내는 다시 몸을 돌려 꺼져 드는 얼음 위를 철벅철벅 걸어가며,

"어어, 물 차다!”

꺼져 버린 얼음 조각들이 흐르는 물에 처르르 씻겨 내리고 있었다. 눈 덮여 희던 개울 바닥이 그가 걸어 나간 뒤를 좇아 차츰차츰 검은빛으로 번져 나갔다.

그렇게 찬물 속을 철벅거리며 개울을 다 건넌 사내는 이 쪽에서 아직 어쩌지 못해 서성거리고 있는 큰 키의 사내를 향해 소리치는 것이었다.

"제엔장, 일룬 안 되겠수다. 여긴 여울이라 놔서,,,,,,."

키 작은 사내는 산기슭을 타고 개울 상류로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이쪽 사내는 안절부절못하는 몸짓으로 역시 같은 방향으로 거슬러 오르며 눈을 항시 건너편 사내에게서 뗄 줄 몰랐다.

그렇게 얼마쯤 허둥대고 걷다가 큰 키의 사내는 무턱대고 개울로 들어섰다. 다행히 여울이 아닌 모양이어서 쉽게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키 작은 사내는 이 쪽에 눈 한 번 주는 법 없이 서벅서벅 제 발길만 옮기고 있었다. 큰 키의 사내는 꽤 허덕댄 다음에야 앞선 쪽을 따라갈 수 있었다.

역시 앞 사내의 발자국을 되밟으며 따라 걷던 큰 키의 사내는 힉 한 번 혼자 웃었다. 앞 사내의 바지가 정강이까지 온통 물에 젖어 있어 차츰 얼어들고 있는 것이었다.

노형, 그거 그렇게 젖어서 어떻게 합니까? 진작 이 위로 건너실 걸,,,-"

"제에기랄, 누가 아니래우. 근데 옷은 이렇게 벌써 뻐쩍 얼어드는데 이놈의 발이 통 안 시렵다니..., ,._"

잠시 사이를 두었다간,

"그래, 꼭 그 날 밤도 이랬지! 제기랄......."

신음하듯 중얼댔다. 그러자 큰 키의 사내가, 그 날 밤이라뇨.....? 하고 불쑥 물었다. 그러나 앞선 사내는 대꾸 없이 개울 상류를 향해 자꾸 치오르며 옆 산비탈을 올려다보곤 했다.

금세 눈이 내릴 듯 우중충 흐린 밤이었지만 날은 퍽 차가웠다.

드디어 키 작은 사내의 바짓가랑이가 데거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꾸 산비탈을 훔쳐보며 개울 기슭을 따라 걷던 작은 키의 사내가 다시 주춤 멈춰 섰다.

", 이거 아무래도 잘못 잡았지

그러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눈에 홀린다더니, 정말 눈길을 걷기란 힘이 듭니다 그려.”

오버 자락의 눈을 털면서 큰 키의 사내가 말했다.

"선생한텐 정말 미안하우, 제에기랄, 이놈의 델 와 본 지도 좨 오래 돼 놔서 ,,,,,,."

"그럼 여기가 고향,.....?”

그러나 키 작은 사내는 이쪽 말은 염두에도 없다는 듯 제 궁리에 잠겼다가,

"에라, 내친김에 좀더 올라가 볼 수밖에

하고 다시 데걱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그러나 앞선 쪽의 사내는 다시 걸음을 멈추며 속으로 가만한 한숨을 몰아 쉬는 것이었다, 이 때 함께 멈춰 발을 탁탁 구르며 주위를 두리번대던 큰 키의 사내가 한쪽을 가리켜 보였다.

산을 끼고 흐르던 개울이 점차 산비탈과 그 거리를 벌리면서 그 중간쯤에 집 한 채가 오똑 눈에 띄었다. 누가 먼저 말을 낸 것도 아닌데 그들은 그 쪽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집 앞의 길은 좨 넓게 눈이 쓸려 있었다. 눈이 쓸리고 거뭇거뭇 드러난 맨땅에 이르러 그들은 옷에 묻은 눈을 털었다. 키 작은 쪽의 바짓가랑이는 달라붙은 눈덩이와 함께 데걱데걱 얼어 있었다.

키 작은 사내가 사립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 때 허리를 굽히고 열심히 눈을 털던 큰 키의 사내가 큿큿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꽤 밭은, 그리고 사뭇 어깨를 움츠린 채였다. 기침이 멎자 그는 눈 위에 무엇인가 뱉었다. 짙은 자국이 눈 위에 드러났다. 발로 즉시 그 자국을 뭉개 버렸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어 거기에 무엇인가 또 뱉었다. 그 손수건을 유심히 들여다본 다음 다시 입언저리를 말끔히 닦았다.

"많이 변했군. 이런 데 집이 다 있구. 헌데 이눔의 집은 초저녁부터 자빠져 자는 건가?”

키 작은 사내가 사립문 위로 고개를 세워 들고 안을 기웃거리다가 언성을 높여,

여보시우, 쥔장! 거 말 좀 물어 봅시다."

그러나 안에선 기척이 없었다.

"제엔장, 눈까지 친 걸 보면 빈집이 아닌 건 분명한데 하고, 키 작은 사내가 사립문을 마구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사립문에 달린 깡통이 쩔렁쩔렁 울렸다. 그러기를 한참, 드디어 안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 누구유? 첫잠에 그만 푹 빠져서,,,,, "

하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키 작은 사내는 자꾸 사립문만 흔들어 댔다.

그제야 방문이 삐끔 열리며,

"뉘세유?”

이번엔 여자였다.

"거 말 줌 물어 봅시다. 구듬치 고개가 어디쯤 되우?”

그러자 삐끔히 열린 문 사이로 남자의 목소리가 캐어 나왔다.

"거 누군지 구듬치 고갤 찾는 걸 보니 와야릴 가는가 본데, 에이 여보슈, 길을 영 잘못 잡았수다. 좀 돌더라두 큰길로 갈 것이지, 거 미욱하게시리 이 눈길에 구듬칠 넘다니?”

쯧쯧, 혀까지 차고 있었다.

작은 키의 사내가 그 말에 응수라도 하듯 세차게 사립문을 흔들어 대며,

"아니 여보, 누가 얼루 가든 이거 왜 이래? 거 주인 좀 이리 나오슈!”

사뭇 깡깡한 시비조였다.

"에이그 손님, 참으세유 우리 으른은 몸이 불편해서 못 나오세유. 구듬치 고갤 넘으실려구 허세유? 그럼 저 앞에 개울을 따라서 한참 내려가셔 야 해유."

"알았수다. 실은 나두 와야리 사람이유 댁에선 여기 산 지가 얼마 됐는지 모르겠소만 혹시 최억구라구 아시겠수? 바루 내가 최억구란 말이유,,,,,,."

언 바짓가랑이를 데걱거리며 몸을 돌리던 키 작은 사내가 말했다.

방문을 열고 섰던 아낙네가, 최억구유? 최억구,,,,--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놀란 남자의 목소리가 방안으로부터 튕겨 나왔다.

"? 최억구라구? 분명 억구랬다! 아아니, 그런데 그 사람이 정신이 있나? 와야릴 제 발루,,,,,,"

그러나 최억구라고 씹어뱉듯 이름을 밝힌 키 작은 사내는 방안에서 굴러 나오는 소리엔 아랑곳없다는 듯, , 콧바람을 날리며,

"선생, 가십시다. 제기랄, 좀 서 있으려니 발이 비쩍 얼어드는군,,,,,,."

심한 기침을 끝내고 아직 말 한 마디 없이 서 있던 큰 키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노형, 발이 그렇게 얼어선 안 됩니다. 예서 좀 녹여 가지구 가십시다."

그러나 최억구는 이미 저만큼 앞서 걸으며 혼자 말하듯 얼어서 안 될 것도 별루 없수다 -했다.

그 기세에 머쓱해진 큰 키의 사내 역시 그냥 덤덤히 키 작은 사내를 따라 나섰다.

두 사내는 조금 전 자기들이 밟고 올라온 눈길을 되밟으며 개울의 흐름을 따라 산비탈을 끼고 내려갔다.

"이거 정말 안 됐수! 거 아까 선생 말대루 큰 길루 가야 하는 건데, 선생 고생이 말이 아니외다,"

아까와는 달리 푹 누그러진 음성으로 얘길 시작한 억구는 이어,

"우습지만, 선생이 와야릴 우째 가시는지 여쭤 보지두 못했네유. 그래, 하필 이 설한에 춘천에서 와야린 뭣 하러 가시는 거유?”

그냥 예사롭게 묻는 투였다.

큰 키의 사내는 좀 당황한 듯 공연히 발을 힘주어 쿵쿵 울려 디디다

", 뭐 좀 일이,,,,,, , 이거 죄송합니다. 사삿일이 돼 놔서, 말씀드리기가,,,,,,."

더듬거렸다.

"사삿일이시라면,,,,,,."

하고 좀 사이를 두었다가 이어,

", 그럼 휴양이라두?”

큰 키의 사내는 "흠칫 놀란 듯,

"? 휴양,,,,,,? , , 몸이 좀,, ,,,,."

이렇게 어물어물 말미를 흐렸다.

"역시 몸이? 아까 기침을 하실 때 "객혈이 있으시기에-,----."

"보셨군요. , 약두 무척 썼지요. 허지만 그게 좀체루. 역시,--, 제 병은 자기가 잘 알지 않습니까?

다시 큰 키의 사내는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느라고 큿큿 했다.

"그럼 결국,-‘”

말이 무심결에 튀어나온 걸 엄폐라도 하듯,

", 선생은 뭘 하시우? 내 보기엔 어디 관공서에라두 나가시는 것 같은데,,,,,, "

", , 그저,,,,,, 길이 참 맹했다"

주춤 몸을 가누며 중절모를 벗어 들었다가 다시 눌러 쓰는 큰 키의 사내였다.

"노형 고향이 와야리시라면 거기 친척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려

억구에네로 질문을 돌리고 있었다.

"친척? 하아, 친척이라,,,,,, 제에기랄,,,,,,."

억구는 걸음을 잠깐 멈추며 허리춤을 고쳐 올린 다음 씹어뱉듯

가친이 계시죠. 우리 아버지 말입네다,,,,,,."

하고는 ㅎㅎㅎ,,,,, 허탈하게 웃어댔다.

", 그러십니까. 춘부장께서 아직,,,,,, 부럽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느냐구요? 부럽다구요?”

그렇게 다긏던 억구가 다시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눈 덮인 산골 밤은 냉랭하고 적연(寂然)하기만 했다. 다만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잘잘 두 사내의 눈 밟아 나가는 소리에 어울려지곤 할뿐이었다.

하늘은 곧 눈을 쏟을 듯 점점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억구의 언 바짓가랑이가 제법 데걱거리고 있었다.

앞서 걷던 억구가 멈춰 섰다.

거뭇거뭇 송림이 우거진 고갯마루를 치어다봤다. 구듬치 고개라는 것이었다.

큰 키의 사내가 두어 번 발을 구르며 오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피봉을 뗐다. 그리고 한 개비를 뽑아 억구에게 내밀었다. 담배를 받아 드는 억구의 맨손이 뻣뻣하게 얼어 있음을 그의 엉거주춤한 손가락을 보아 곧 알 수 있었다. 키 큰 쪽도 한 개를 빼어 물고 성냥을 찾아 가죽장갑을 낀 채 불을 댕겼다.

성냥불에 담배를 대고 빠는 억구의 턱이 심하게 떨고 있었다. 첫 성냥개비는 허탕이 됐다. 다시 성냥을 그어 대는 큰 키의 사내 시선이 모가 난 억구의 얼굴을 날카롭게 뜯어보고 있었다.

"그래, 와야릴 갈래면 꼭 저놈의 고갤 넘어야 한단 말이우? 내애 참?”

생뚱 같이 중얼거리는 억구의 말을 큰 키의 사내가 사뭇 송구스럽다는 투로 받았다.

"전 여기가 초행이라 놔서,,,,,,."

그러나 억구는 흥, 콧바람을 날리며,

"왜 이러슈, 이거! 내가 여길 지릴 몰라 그걸 선생한테 물은 거유?”

하고 튕기듯 퉁명을 부렸다. 그리고 담배를 몇 모금 거듭 빨아 연기를 내뿜으며,

"제에기랄, 저놈의 고갤 내가 꼭 넘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혼자소릴 했다.

큰 키의 사내는 조용히 억구의 옆모습만 뜯어보고 서 있었다.

문득 옆 사내의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억구는 담배를 손끝까지 타들도록 거듭거듭 빨아 대곤 휙 집어던지며 고개를 향해 터덜터덜 오르기 시작했다. 언 바짓가랑이를 데걱거리며.

데걱거리며 고개를 향해 걷기 시작한 억구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서 있던 큰 키의 사내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다음 억구의 뒤를 따랐다. 터져 나오는 기침을 큿큿 참아 가며.

고개로 접어드는 산기슭, 보득솔밭을 지나며 먼저 입을 뗀 것은 억구였다.

"제에기랄, 우리 어렸을 적만 해두 이 보득솔밭엔 토끼두 숱했는데,,,,,, , 눈이라두 좀 빠졌을 땐 그저 두어 마리 때려잡긴 예사였소만...... 그런데 거 토끼란 짐승은 눈엔 영 맥을 못 씁데다,,,,,,."

그러자 큰 키의 사내가 "회고조로 천천히 말을 받았다.

"이거 토끼 얘기가 나왔으니 생각이 납니다만,,,,,,."

중학 이 학년 때인가 전교생이 학교 뒷산으로 식수를 나갔다. 이제 싸릿순이 파랗게 터져 오르는 싸리밭에서 토끼 똥을 주워 든 아이들이 장난 삼아, 토끼 여깄다아 - 하자 여기저기서 웅성대다 보니 그게 그냥 토끼 사냥이 돼 버렸다. 상급반에서 정말 한 마리 풍겨 놓은 것이다.

그러나 스크럼이 허술한 몰이여서 그 놈은 이내 포위망을 빠져나가고 말았지만 어쩌다 이제 겨우 발발 기어다니는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았다. 토끼 새끼를 번쩍 쳐들어 둘러선 아이들에게 구경을 시킨 생물 선생은 싱글거리며 봄볕에 노곤히 지쳐 있는 이쪽에게 그것을 건네주며, 잘 차지고 있어라 - 했다. 얼결에 새끼 토끼를 받아 든 이쪽은 생물 선생의 말을 들으면서 그만 헛구역질을 했다. 이놈을 생물 시간에 해부를 해 보이겠다는 것이었다. 해부를 한 다음에는요? 하고 어떤 녀석이 장난조로 묻자, 하 그건 너희들이 아직 잘 모를 테지만, 거 토끼 고기가 뭐뭐에는 최고지 - 하는 생물 선생의 말을 받아 아이들은 합창하듯,

"토끼다리 술안주?” 했다.

"고오놈들 "

과히 무서울 것 없는 호령이었다.

그러나 조막만한 토끼 새끼의 귀를 잡고 앉아 있는 이쪽은 요렇게 작은 걸 - 내심으로 툴툴대며 자꾸 헛구역질을 했다. 토끼 새끼의 가슴팍에 손을 대어 봤다. 파득파득 뛰고 있는 가슴팍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 때 누군가,

"저기 에미 토끼 온다아!”

소릴 쳤다. 정말 칡빛 토끼 한 마리가 이리로 곧장 구르다시피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에미다, 에미! . 임마, 그 새낄 에미가 보두룩 번쩍 들어라. 번쩍,,,,,,"

국어 선생이었다. 어미 토끼를 포위하기란 수월했다. 아이들이 와와 소리쳤다. 어미 토끼는 이리저리 핑핑 돌기만 했다. 그렇게 어쩔 줄 모르고 핑핑 돌기만 하던 어미 토끼가 갑자기 딱 멈춰 서며 이쪽의 번쩍 쳐들고 있는 새끼 토끼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이 당돌한 기세에 아이들도 주춤했다. 칡빛 어미 토끼의 쭈뼛 곤두선 두 귀와 까만 눈빛, 빛나는 눈알을 보자, 이쪽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이 때 살기 차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던 그 어미 토끼가 씽하니 이쪽에게로 내달아오기 시작했다. 둘러섰던 아이들이 그제야 와와,,,,,, 소릴 쳤다. 새끼 토끼 역시 무어나 알기라도 한 듯 부들컹대며 끽끽거렸다. 이쪽은 어미 토끼의 눈에서 무엇인가 뻔쩍 하는 걸 본 듯했다. 마치 불꽃같은 - 순간, 새끼 토끼를 쳐들고 있던 이쪽은 그만 얼결에 비켜서고 말았다. 그틈이 난 사이로 토끼가 빠져나가 산으로 치뛰고 있었다. 치뛰는 토끼를 쫓는다는 건 무모한 것이었다. 모두들 악을 쓰다시피 이쪽에게 욕을 해 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쪽은 멍하니 선 채로 치뛰는 어미 토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토끼 새끼의 두 귀를 움켜쥔 손바닥에 땀이 배었음을 늦게야 깨달았다. ,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성애란 무섭거든 - 하고 입을 연 국어 선생님은 금세 입을 해 - 벌리며

", 그놈 꽤 크던 걸, 그으거 참,,,,,,."

이쪽에게 힐끔 눈살을 주면서였다.

"하아, 그럼 누군 입맛을 안 다시겠소? 그 때 선생님께선 욕깨나 먹게 됐수다 뭐."

흠흠 웃으며 억구가 말했다. 그러나 자못 정색을 한 큰 키의 사내는,

"욕이 문젭니까? 그보다두 다음 생물 시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

하다간 그냥 겸연쩍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 다음 날 고 조막반한 토끼 새낄 해불 합디까? 그 고긴 술안줄 하구,,,,,,?

억구가 다시 흠흠 웃었다. 하자 큰 키의 사내는 보득솔을 붙잡고 끙끙 힘을 써 오르며,

"글쎄 그게 ,,,,,,."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 날 밤 꽤 피곤했지만 잠이 통 오질 않더군요. 그 어미 토끼의 도사리고 노려보던 눈, 그리고 배를 째이는 새끼 토끼의 환상이 자꾸------그예 난 생물 선생네 토끼장의 위치를 짐작하며 잠자리에서 빠져 나오고야 말았습죠."

하자, 억구는 그 예의 조소 섞인 웃음을 흠흠 하며,

", 선생이 왜 일어났는가 내 알겠수다. 물론 그 새끼 토낄 구해 주셨겠구만. 그러구 보니 선생두 어렸을 적엔 어지간하게시리 거 뭐랄까,,,,,,."

그러나 큰 키의 사내는 그 말을 가로채,

"글쎄 그게 그렇게 되지가 못하구,,,,,,."

하고 또 긴 말을 이을 기세를 보이자, 억구는 얼른 말미를 낚아,

"여하튼 선생 얘길 듣고 보니 난 사실 부끄럽수다. 그럼 선생, 이번엔 내 얘길 한 번 들어 보실라우? 이렇게 눈이라두 푹 빠진 날이면 늘 생각이 납니다만 이놈은 원래 종자가 악종이었습니다."

아홉 살인가 그릴 때였다. 자기 집 앞 보리밭에서 눈을 뭉치고 있었다. 처음엔 주먹만하게 뭉쳐서 그것을 눈 위로 굴렸다, 주먹만하던 게 차츰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아기 머리통만하게, 더 커지면서 물동이만하게, 억구는 자꾸자꾸 굴렸다. 숨이 찼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에듯 시렸지만 참았다. 꾹 참았다. 참아야만 했다. 뒤에 종종머리 계집애가 있었던 것이다. 눈덩이가 굴러 바닥이 드러난 곳에 푸릇푸릇 보리싹이 보였다. 그 드러난 자국을 쫓아 종종머리 예쁜 계집애가 따라오며 좋아라 손뼉을 치고 있었다. 마을 밤나무숲에선 까치가 듣그럽게 울었다. 계집애 옆엔 강아지도 길길이 뛰며 따르고 있었다. 신이 난 억구는 자꾸자꾸

눈덩이를 굴렸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이미 한아름이 넘게 커진 눈덩이는 이제 바닥에서 뿌득뿌득 소리만 날 뿐 더 이상 움직이질 않았다. 눈덩이가 아홉 살짜리 힘에 부치게 컸던 것이다. 그러나 예쁜 종종머리 계집앤 자꾸 더 굴리란 것이다. 항아리만하게 낟가리만하게, 산만큼 크게, 아주 아주 하늘땅만큼 크게 만들라는 것이다. 억구는 그만 울상이 됐다 안달했다. 이젠 손이 시린 걸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때 종종머리 계집애가 저쪽을 손가락질했다. 득수란 놈이 이쪽으로 눈덩이를 굴려 오고 있지 않은가. 득수의 눈덩이가 점점 커지더니 잠시 후에 억구 것은 댈 것도 못 되었다. 종종머리 계집앤 문제없이 득수 편이 됐다. 강아지까지였다.

억구는 그만 눈물이 징 솟았다. 더 참을 수 없이 손이 시렸다. 드디어 억구 앞까지 눈덩이를 굴려 온 득수가 씩 웃으며 파란 바탕에 노란 무늬 수놓은 장갑을 낀 손으로 억구 눈덩이를 손가락질하며,

"애개, 쪼끄매,,,,,,"

했다. 덩달아 종종머리 예쁜 계집애도,

"득수야, 재 거(나를 가리키는 그 계집애도 빨간 벙어리장갑을 끼고 있었지요.)하구 막 싸워 봐, 누구 게 이기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득의양양해서 자기 눈덩이를 억구 것에다 굴려 오는 득수, 억구는 자기가 만든 눈덩이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걸 보았다. 그리고 계집애가 좋아라 손뼉치는 소리도 들었다.

"문득 깨닫고 나니 난 득수놈의 장갑을 입에 물고 있더란 말이오. 헌데, 입안엔 분명 장갑뿐인 게 아니었쥬. 난 그걸 뱉는 것까지 잊어버린 채 그저 멍하니 서 있었지 뭡니까."

이 때 눈 위에 벌렁 나자빠졌던 득수가 제 손등을 보더니 그제야 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기겁을 한 득수가 갑자기 시뻘건 눈으로(놈이 커서 죽을 때도 역시 꼭 그런 눈으로 날 노려봅데다) 뿌르르 일어서더니 억구가 아직 물고 있는 장갑을 낚아챘다. 그제야 억구는 입안 가득히 괸 것을 눈 위에 뱉었다, 눈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억구는 입안에 괴어 든 피를 거푸 뱉어 냈다. 손등의 살이 떨어져 나간 득수가 펄펄 뛰면서 울어대는 걸 힐끔거리며 억구는 자꾸자꾸 침만 뱉었다.

"허나 이빨 사이에 끼인 그놈의 장갑 실오래긴 영 나오질 않습디다그려?”

하고, 억구는 걷기를 잠깐 멈추고 몇 번 퉤, 침을 뱉고 나서 다시 이야길 이었다. 볼이 얼어서 발음이 제대로 안 되는지 더듬거려,

"마침 그 때 아버님은 안 계셨지만, 난 계모한테 붙들려 꼬박 이틀을, 꼭 이틀하구두 한나절을 광 속에 갇혀 지냈수다. 컴컴한 광 속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자꾸 침만 뱉었죠.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득수놈의 장갑 실오래긴 어떻게 빼낼 수가 없습데다. 속에선 불이 펄펄 일구, 그 망할 광속은 왜 그리 캄캄하고 추운지! 제기랄, 내 그때 벌써 감옥소란 데가 이렇겠거니 생각했댐 알조 아니우?”

억구는 말을 맺으며, 다시 춘 쌓인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의 양복은 온통 눈투성이였다. 바짓가랑이에선 여전히 데걱데걱 언 소리가 났다.

보득솔밭을 지나 왜 큼직한 송림 사잇길이었다, 소나무 위에 얹혔던 눈이 쏴르르 떨어져 내렸다. 억구가 다시 이야길 이어 갔다.

"난 기어코 득술 죽이고야 만 겁니다. 거 왜, 사변 때 말입니다. 파리 새끼 쥑이듯 사람 막 쥑일 때 말이죠. 놈을 죽일 때 보니 그놈은 왼손에 장갑을 끼고 있더군요. 차마 그걸 벗겨 버릴 순 없었는데, 울화통은 더 치밀더군요. 여하튼 난 득술 죽이고야 말았다 - 이겁니다. 허나 그뿐인 줄 아슈? 육친을, 즉 제 애비까지 잡아먹은 게 바로 나요. 이 최억구라는 인간입네다."

결국 이용당했더란 것이다. 어릴 적부터 동네의 천더기로 따돌림당하던 자기를 빨갱이들이 용하게 이용했더란 것이다. 무슨 위원회 부위원장이니 하는 감투를 떠억 씌워서 그래 결국 자기 부친까지 참사를 당하게 하고 만 것이었다.

늙은 부친과 함께 한방에서 자고 있었다. 계모는 이미 억구가 철들기 시작할 무렵 달아나 버렸고, 그래 부친은 늘 억구에게 장가가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와야리에선 힘든 일일 수밖에.

억구는 눈을 멀뚱히 뜬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금 전 소변보러 밖에 나갔던 부친이 돌아오며 하던 말이 떠올랐다. 밖에 눈이 퍽 내렸다고, 올해의 눈 온 짐작으로 봐선 내년은 분명 풍년일 게라고 - 하던 부친이 이불을 뒤집어쓰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그 깊은 한숨 소리에 억구는 그만 잠을 뺏기고 만 것이다. 자기 때문에 마을도 한번 변변히 못 나가고 (그렇게 이 억구란 놈이 악종으로 날뛰었던 겁니다.) 방안에서만 늘 풀이 죽어 있어야만 했던 부친의 한숨 소리에 자꾸 헛기침만 해 대던 억구였다.

그 밤, 부친은 죽창에 찔려 죽고, 어쩌다 자긴 이렇게 여기 살아 있다고 억구는 또 고개 오르기를 멈추며 조용히 한숨을 몰아쉬는 것이었다.

"우리 부자만 몰랐지 동네에서들은 모두 국군이 머지않아 돌아온다는 걸 알고들 있었던 거죠. 결국 자기들 손으로 우리 부잘 처치해 버리자는 생각들이었겠죠, 억구란 놈이 그렇게 죽어 마땅한 놈이었습네다."

그들이 고개 오르기를 잠시 쉬는 동안도 산 속의 소나무 위에 얹혔던 눈은 제 무게가 겨운지 쏴르르 쏟아져 내리곤 했다.

"그 날 밤, 난 집을 빠져 나와 뒷산으로 치뛰며 아버님의 비명을 들었수다. 득수 동생놈이, 잡았다! 하고 소릴 치더군요. 잡았다, 하고 말입네다 그래두 이놈은 살겠다고 정갱이까지 빠져드는 눈길을 맨발로 달아나구 있었죠."

그는 카악 가래침을 돋워 입안에 꿀럭거리며,

"그러니까 그 때 와야릴 떠나군 이번이 처음 가는 겁네다. 십 년이 넘는 오늘에야 아버님을 찾아가는 겁니다. 비록 무덤이지만,,,,,,."

-가래침을 뱉어 버리고 다시 고개를 허우적허우적 오르기 시작했다,

큰 키의 사내는 이제 눈길을 걷기에 지칠 대로 지친 듯 헉헉 숨을 몰아쉬곤 했다. 그러나 억구의 얘기에 흠뻑 끌리고 있는 투였다.

드디어 우중충 흐렸던 하늘이 눈을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덮어 버리며, 그리고 순화시키는 그런 위력을 가진, 그리고 못 견딜 추억 같은 걸 뿌리면서 눈이 내렸다. 바람결에 눈발이 비끼고 있었다. 송림이 웅웅 적막한 음향을 냈다.

"그럼. 노형은 이제 와야리 사람들을 만날 생각이십니까?”

큰 키의 사내가 좀 가파른 눈길을 엉금엉금 기어오르며 숨가쁘게 말했다. 하자, 옆에서 기어오르던 억구가 주춤 멈추며 뒤를 향해,

"와야리 사람들을 만나겠느냐구요? 분명 선생이 그렇게 말씀하셨것다? 만나겠느냐구-, ---느냐구!”

억구는 거푸 되뇌며,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웅얼거렸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발끈 내질렀다.

"선생, 그래 내가 그 사람들을 만나지 못할 건 뭐유? 난 와야리서 낳구, 거기서 배가 굵었, 가친이 게서 돌아가시구, 게다가 나두 사람인데 내가 왜 그 사람들을 못 만난단 말이우?”

이처럼 격하게 내쏟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푹 사그라진 어조로,

"난 어제두 와야리놈을 하나 만났수다. 춘천에서 말이오. 바루 내가 죽인 거나 진배없는 그 득수놈의 동생을 만났다 이겁니다. 놈이 날 보자마자, 형님, 이거 반가워유,,,,,, 하지 않겠소. 사실 나도 처음엔 왈칵 반갑습데다. 놈을 술집으로 끌구 갔죠. 우린 과거 얘긴 될 수 있는 한 피했죠. 허나 술이 얼근해지자, 난 떠억 물어 본 겁니다. 그래 자넨 우리 아버질 분명 잡았것다? 그런데 그 잡은 걸 어데다 묻었나? 하고 말이죠. 허니까 그 녀석 술이 확 깨는지, 그래두 놈은 내 맘을 풀어 볼 양으로 고분고분한 말투로, 우리 선대조 산소에 모셨노라구, 그리고 벌초까지 제가 매년 해 왔다는 겁니다. 우선 놈의 얘기가 고맙더군요."

신음하듯 말미를 흐렸다.

"네에! 득수라는 사람 동생을 어제 만나셨다구요? 그 김득칠일.”

그러자 억구는 후딱 놀란 듯,

", 어제 분명 그놈을 만났지요. 그런데 선생이 어떻게 그놈 이름을 아슈? 알길,,,-”

조급스레 다긏는 것이었다.

"김득칠이가 맞죠? 서른셋, 직업은 면서기죠. 김득칠인 어제 근화동서 살해됐습니다."

큰 키의 사내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억구가 획 몸을 돌리며,

"나두 알고 있소. 득칠이가 소주병에 대가릴 맞아 죽은 걸 나도 알고 있단 말이오. 그런데 지금 선생은 꼭 내가 득칠일 죽인 범인이라두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본데, , 선생, 내가 득칠일 죽였단 말이오?”

한 마리 곰처럼 도사려 앉아 밑의 사내를 노려봤다.

큰 키의 사내는 오른손을 오버 주머니에 찌른 채 두어 걸음 밑으로 물러서며 억구를 쳐다봤다.

이미 그들은 거의 고개 마루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한동안 그들은 서로 마주 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큰 키의 사내의 오른손은 아직 오버 주머니에 꾹 찔려 있었고 억구는 머리부터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눈은 자꾸 비껴 내렸다.

이윽고 큰 키의 사내가 오른쪽 손을 오버 주머니에서 빼며 모자를 벗었다.

모자에 하얗게 내려앉은 눈을 털면서 입을 열었다.

"공연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려. 제가 왜, 어제 근화동에서 그 현장을 우연히 봤다지 않습디까? 형사들이 죽은 사람의 증명서를 뒤지며 김득칠이니 뭐니 하길래,,,,,, 또 노형이 어제 만났다는 분이 그 죽은 사람 같아서 한번 그래 본 것뿐입니다,,,,,, , 그런데 이거 눈이 너무 오십니다그려,,,,,,"

그러자 억구는 아무런 대꾸 없이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바람을 안고 내리막 눈길을 걷고 있었다. 걷는다기보다는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앞선 것은 여전히 억구였다.

눈 덮인 송림이 웅웅 울고 있었다.

가끔 소나무 위에 얹혔던 눈 무더기가 쏴르르 쏟아져 내렸다 부쩍 언 억구의 바짓가랑이는 연해 데걱거렸고.

"그래, 노형은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 날 밤 와야릴 떠난 후에 말입니다."

큰 키의 사내가 물었다.

"진작 물으실 줄 알았는데,,,,,,, 결국 선생이 궁금한 건 사람을 죽인 놈이, 제 애비까지 죽인 빨갱이가 그 동안 그 대가를 치렀느냐 이거죠? , 이 최억구란 놈이 형무소에서라두 도망쳐 오는 게 아니냔 그 말씀이죠?”

하며 억구는 또 그 예의 흠흠 조소 섞인 웃음을 웃었다.

그렇게 웃던 억구가 풀썩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주저앉는가 하자 어느 새 굴러 내리기 시작했다. 순간 큰 키의 사내는 확 긴장하면서 오른손을 오버 주머니에 넣었다. 역시 그도 몇 걸음 미끄러져 내리며,

"여보!"

외쳤다.

그러나 서너 바퀴 굴러 내린 억구는 온통 눈에 묻혀 버린 채 꼼짝도 안 했다. 큰 키의 사내는 오른쪽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어쩔까 망설이는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눈발은 더욱 세게 비껴 내리고.

이윽고 눈 속에 엎어져 있던 억구가 엉기엉기 길을 찾아 오르며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하긴 나두 처음엔 몇 번이고 자수할 생각이었죠. 그러나 결국 난 자술 못하고 만거죠. 난 그 광속을 잊을 수가 없었던거요. 그 광속에서 이틀 동안이나 이빨 사이에 박힌 장갑 실오래길 빼려구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슈? 침이 묻은 손은 자꾸 얼어들구, 실이 긴 잇몸의 살이 떨어져 피까지 나왔지만 난 그 장갑 실도래긴 아무래도 뺄 수가 없었던 거요. , 늘 생각을 한 거죠. 난 그 육실하게 춥구 캄캄한 광속에선 실오래길 죽어두 빼낼 수가 없었다,,,,,, 이겁네다."

그는 흡사 술 취한 사람처럼 떠벌리며 기어올랐다.

큰 키의 사내는 얼마간 경계하는 몸짓을 하면서 그를 부축해 끌어올리고 있었다.

다 기어올라온 억구는 눈 같은 건 털려고도 않은 채 우선 양복 윗주머니의 불룩한 곳을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앞을 서서 고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넋두리하듯 지껄여 대며.

"보시우, 선생. 징역이니 사형이니 어쩌구 하는 것에다 제 죄를 전부 뒤집어씌워 놓곤 자긴 떠억 시치밀 뗄 수가 있다고 생각하시우? 어쩜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죠. 허나 이놈에겐 그 춥구 캄캄한 광 속의 기억 이 있는 한..,,,, 여하튼 산다는 게 무서웠습니다. 선생, 좀 어쭙잖은 말 같습니다만 늘 생각해 왔습네다. 내 운명이라는 게 가혹하지 않으냐 하는 생각 말입네다. 미련하구 무식한 나지만 난 분명 알구 있었지요. 이건 분명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처럼 살아 보질 못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선 난 잠을 잃어버렸던 겁니다. 사람이 잠을 못 잔다는 건 마지막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다구 하더라두 이 최억구 놈 세상만사에 재밀 몰랐던 거요. 모든 게 나와는 거리가 멀구 하루하루 사는 게 그저 고역이었습네다. 이렇게 서른여섯 해를 살아온 납네다. 그래 놓으니 이 철저한 악종두, 이건 너무 억울하지 않으냐,,,,,, 하는 생각이 미치는 게 아니겠소,,,,,,"

눈발은 여전히 푸슴푸슴 비껴 내리고 있었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채 내리막 눈길을 걷는 억구의 바짓가랑이가 데걱거리고 있었다. 송림이 웅웅 울며 나뭇가지 위에 쌓였던 눈이 다시금 쏴르르 쏟아져 내렸다.

이 때, 앞서서 내려가던 억구가 아까처럼 쭈르르 미끄러져 두어 바퀴 굴러 내렸다. 하자, 큰 키의 사내는 재빨리 오버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 짐짓 긴장을 풀며 오버 깃을 추켜올렸다. 굴러 내린 억구가 이번엔 곧 일어나 걸으며 여전히 넋두릴 해 대고 있었다.

"내 어느 날 창녈 하나 찾아가질 않았겠소. 선생 같은 분네한텐 부끄럽수만 난 돈푼이라두 생기면 그런 데라두 가지 않군 못 견뎠습네다, 어쨌든 끌어안고 보면 제아무리 부처님이라도 열중해 버리고 말거든요. 그렇게 무엇에고 열중할 수 있다는 게 이놈에겐 여간 대견한 일이 아니었수다. , 대견했죠. 그런데 어쩌다 그 날 내게 걸려든 계집이라는 게 이건 정말 주물러 잡아 뺀 상판입데다. 눈칫밥 만 사흘에 얻은 손님이라구 그 계집 입이 함박만하게 벌어지더군요. 아무리 못났대두 끼구 누웠으려니 사람의 정이란 묘해서 이런저런 얘길 주고받았죠. 얘기래야 그 잘나빠진 계집의 신파 같은 신세 타령이었소만,----헌데, 내애 차암, 어이없어서. 글쎄 그 계집이 갑자기 쿨쩔쿨쩍 울더란 말이오. 그렇게 쿨쩍거리며 울던 계집이 이번엔 또 천연덕스럽게 한다는 소리가 제 운명을 탓해서 우는 건 아니라구요. 기뻐서, 가슴이 벅차서 운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린고 하니 자기가 지금 이렇게 천댈 받고 살지만, 그게 도무지 억울하지가 않다나요. 억울할 게 뭐냔 겁니다. 그래, 그게 어째 그러냐 했더니. 그 계집 대답이 걸작입데다. 뭐라는고 하니, 자긴 죽었다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나요. 그건 틀림이 없다구요. 그 땐 지금 괄셀 받고 산 그만큼 잘 살아 보겠다는 겁니다. 그건 틀림이 없다나요. 그 생각을 하기만 하면 그만 가슴이 벅차서 울음이 자꾸 터진다나요. 자기 머릿속에 꽉 차 있는 건, 다시 태어나면 그 때 어떻게 살아 보겠다는 계획뿐이랍니다. '국회 의원의 딸루 태어날 지도 몰라요. 아버진 귀가 큰데다가 얼굴이 잘생기구 또 기맥히게 인자하시지 뭐예요. 이렇게 눈에 선한걸요. 학교에 갈 땐 꼭 아버지 차로 가겠어요. 사내 동생 하나가 또 있음 좋겠어요. 갠 말 아니게 개구쟁이라니까요. 그래두 날 얼마나 따른다구요. 그 앤 영화 배울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꿈 같은 소릴 하길래 내 말이, 오뉴월 쇠불알 떨어지길 기다리지 왜,,,,,, 했더니 그 계집 정색을 하는 덴 내 그만 손들었수다.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 자기가 왜 이 고생을 하며 살겠느냔 겁니다. 안 그래요, 손님? 하지 뭐요. 제에기랄. 계집이 미쳐두,, ,,,,"

구는 이제 흡사 한 마리 흰곰이 돼 있었다. 언 바짓가랑이가 걸음을 옳길 적마다 요란스레 데걱거렸다.

큰 키의 사내는 억구의 떠벌리는 말을 들으며 좀체로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모자와 오버에도 온통 하얗게 눈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는 가끔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큿큿 참는 것이었다.

"그 창년 다음 세상에서 잘 살아 보길 원하고 있었지만 난 그게 아니었수다. 보다는 이왕 이 세상에 나온 이상 한 번 그 태어난 값이나 해보자, 한 번쯤은 인간답게 살아 보구 싶었던 겁니다. 아마 나처럼 살려구, 그놈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구 끈덕지게 버둥거린 놈두 드물겝니다. 허지만, 선생, 그 보답이 뭔지 아시우?”

마치 시비라도 걸 듯한 기세였다가 곧 수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 이제 됐수다. 여기가 바루 큰길입니다."

걸음을 멈춘 억구는 엉거주춤 소변을 봤다. 그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그 험한 구듬치 고개 눈길을 다 넘어 큰길에 다다라 있었던 것이다.

큰길에 이르고서부터 그들은 서로 나란히 서서 걸었다. 두 사내의 발이 터벌터벌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 위에 점을 찍어 나가고 있었다.

먼저보다 바람기가 스러지면서 눈발은 이제 조용한 흩날림으로 변하고 있었다.

옆 산 소나무 위에 얹혔던 눈무더기가 쏴르르 쏟아져 내렸다. 마치 자기 무게를 그렇게 나약한 소나무가지 위에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듯이,,,,,, 그 때 좀 먼 곳에서 뚝 우지끈 소나무가지 부러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이 때 억구가 느닷없이 키 큰 사내의 앞을 막아서며,

"선생. 난 득수 동생놈을, 그 김득칠일 어제 죽였단 말이오. 이렇게 온통 눈이 내리는데 그까짓 걸 숨겨 뭘 하겠소. 선생은 아주 추악한, 사람을 몇씩이나 죽인 무서운 놈과 함께 서 있는 거유. , 날 어떻게 하겠수?”

그러면서 한 걸음 큰 키의 사내 앞으로 다가섰다.

큰 키의 사내는 후딱 몇 걸음 물러서며 오버 주머니에 오른손을 잽싸게 넣었다.

그의 시선은 억구가 양복 윗주머니의 불룩한 것을 움켜쥐고 있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아까두 말했지만, 그 술집에서 난 놈에게 이주걱댔죠. 그래 자넨 분명 우리 아버질 잡았것다? 그래 벌초를 매년 해 왔다구? 아 고마워, 고마워,,,,,, 하고 말입네다. 헌데 그 득칠일 난 그 날 밤 죽이고야 만 것입니다. 글쎄, 나두 그걸 모르겠수다. 왜 내가 그 득칠일 죽였는지,

여직 들어보지 못한 맥빠진, 그렇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큰 키의 사내는 묵묵히 억구의 얼굴을 뜯어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억구가 큰 키의 사내 앞에서 몸을 돌리며 저쪽 산등성이를 가리켜 보였다.

바루 저 산에 가친 산소가 있답니다. 우리 조부님 산소 옆이라는군요. 난 지금 거길 가는 겁니다. 가서 우선 무덤의 눈을 쳐드려야죠. 그리구 술을 한 잔 올릴랍니다. 술을 올리면서 가친의 음성을 들을 겁니다. 올해두 눈이 퍽 내렸구나. 눈 온 짐작으로 봐선 내년두 분명 풍년이겠다만, 하실 겁니다. 그리고 푹 한숨을 몰아쉬시겠죠. 그 한숨 소릴 들으면서 가친 옆에 누워야죠. 이젠 가친을 혼자 버려 두고 달아나진 않을 겁니다.”

그는 산으로 향한 생눈길을 몇 걸음 걷다가 다시 이쪽을 향해,

, 바루 저기 보이는 저 모퉁일 돌아감 거기가 바루 와야립니다. 가셔서 우선 구장네 집을 찾아 몸을 녹이시우.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푹 몸을 녹이셔. , 그럼 난.”

산을 향해 생눈길을 걸어가는 그의 언 바짓가랭이가 서걱서걱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깨를 잔뜩 구부리고 흡사 한 마리 흰 곰처럼 산을 향해 걷는 억구의 을씨년스럽고 초라한 뒷모습에 눈을 주고 선 큰 키의 사내는 한참이나 그렇게 묵묵히 섰다가 문득 큰길 아래로 내려서서 억구 쪽을 따라가며,

노형, 잠깐!”

말소리 속에 강인한 무엇인가 깔려 있는 듯싶었다.

언 바짓가랑이를 데걱거리며 걸어가던 억구가 주춤 멈춰서 이쪽으로 등을 돌렸다. 큰 키의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버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 움켜쥔 그런 자세였다.

억구가 짐짓 몸을 추스르며 자기에게로 다가서는 큰 키의 사내 거동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억구 앞에 멈춰 선 큰 키의 사내가 할 말을 잊은 듯 멍청하니 고개를 위로 향했다. 고개를 약간 젖히고 입을 헤 - 벌린 채. 그의 이러한 생각하는 표정 위에 눈이 내려앉고 있었다.

- 그 날 밤 난 생물 선생네 담을 빙빙 돌고만 있었지. 내 키보다두 낮은 담이었어. 난 거푸 담을 돌고만 있었지. 만약 내가 담을 넘어 들어간다면, 그러나 난 담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담이란 남이 들어오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거니까. 들어오지 말라는 걸 들어가면 그건 나쁜 짓이니까, 그건 도둑놈이지. 난 나쁜 놈이 되는 건 싫었으니까. 무서웠던 거야. 나는 담만 돌며 생각했지. 오늘 갑자기 생물 선생넨 무서운 개를 얻어다 놓았을지도 모른다고. , 어쩌면 선생이 설사 나서 변소에 웅크려 앉았을지도 모른다는 지레 경계를,,,,, 그리고 남의 담을 넘는다는 건 분명 나쁜 짓이라고,,,,,, 무서웠던 거야. 결국, 난 새끼 토낄 구할 생각을 거두고 담만 돌다 돌아오고 말았지.

"아니 선생, 남을 불러 놓군 왜 그렇게 하늘만 쳐다보슈?”

억구가 말했다.

-나쁜 놈이 되기가 싫었던 거야. 담을 넘는다는 건,,,,,,

큰 키의 사내가 한 걸음 물러섰다. 생각하는 표정을 거두지 못한 채.

산 속 소나무 위에서 다시 눈무더기가 쏴르르 쏟아져 내렸다. 마치 그 연약한 나뭇가지 위에선, 그리고 거푸 내려 쌓이고 있는 눈의 무게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듯.

억구가 다시 다그쳤다.

"선생, 발이 시립니다. 내가 여기 얼어붙어야 좋겠소? 원 별 양반도,,,,,, , 그럼,,,,,,."

억구가 다시 몸을 돌려 산클 향했다.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깡똥한 양복 윗주머니에 삐죽하니 2흡들이 소주병 노란 덮개가 드러나 보였다.

순간 망설이던 큰 키의 사내 얼굴에 어떤 결의의 빛이 스쳤다.

", 노형, 잠깐?”

억구가 바짓가랑이를 데걱거리며 다시 몸을 돌렸다.

순간 큰 키의 사내는 오른쪽 오버 주머니에서 서서히 손을 뺐다. 그리고 무엇인가 불쑥 억구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담만 돌았지. 무서웠던 거야.

"이걸 나한테 주시는 겁니까?”

억구가 물었다.

", 드리는 겁니다. 아까 두 개비를 피웠으니까 꼭 열여덟 개비가 남아 있을 겁니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왔으니 올핸 담배도 풍년이겠죠.

그러나 제가 지금 드린 담배는 하루에 꼭 한 개씩만 피우셔야 합니다,"

큰 키의 사내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담배 한 갑을 받아 든 채 멍청히 서 있는 억구에게서 몸을 돌려 마치 눈에 홀린 사람처럼 비척비척 큰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잔기침을 몇 번 콧콧 하면서

걸어가는 그의 등뒤로 마치 울음 같은 억구의 외침이 따랐다.

"하루에 꼭 한 개씩 피우라구요? , 한 개씩, , , , 구요?”

그러면서 그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ㅎㅎㅎㅎㅎㅎㅎ.

눈 덮인 산 속, 아직 눈이 조용히 비껴 내리고 있는 밤이었다.

 

-(조선 일보)(1963)

 

 

'한국단편소설3'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 들  (0) 2022.04.14
11. 동행 -임철우  (0) 2022.04.14
9. 돈  (0) 2022.04.14
8. 닳아지는 살들  (0) 2022.04.14
7. 눈 길  (0) 2022.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