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 도 는 말 들 -이청준
-언어사회학 서설 1-
똑, 똑, 똑 …….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 이상이나 꼼짝도 않고 천장만 쳐다보고 드러누워 있던 지욱은 그러나 얼핏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새 사지가 모두 마비되어 버린 듯 생각을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힘껏 짓눌러놓은 용수철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또 한 번 소리가 있기만 기다렸다. 골목길로 통해 있는 작은 들창문은 언제나 갈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창문 쪽에서는 다시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냥 돌아가버린 것일까.
지욱은 그제서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커튼을 젖히고 들창문 유리로 골목길을 내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언제부턴가 저녁 눈이 내리고 있었다. 초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는 좁은 골목길의 길바닥이 제법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 젖은 길바닥 위로 눈송이들이 가지런히 내려앉았다가는 이내 소리없이 녹아버리곤 했다. 누군가가 방금 머리 위로 그 눈말을 맞으며 지나갔거나 아직도 그 발자국 소리가 착각처럼 귀청을 울려오고 있는 것 같은 교교한 골목길――그러나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없었다.
그새 내가 또 누굴 기다리고 있었군.
지욱은 금방 자기가 빈 소리를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 한동안 더 그대로 유리창 가에 붙어 서서 무연스레 골목길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정말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누구인지는 확실치가 않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또는 그것이 사람이 아닌 어떤 사건이나 소식 같은 것인지도 분명히 가려 생각할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이 며칠 동안 그렇게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계속해서 기다리며 초조해 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이 분명하게 의식될 뿐이었다.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을 테지.
그는 혼자 슬그머니 실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따르릉―.
아랫목 탁상 아래 기가 죽어 틀어박혀 있던 전화통이 요란하게 신호를 울려댔다. 이번에는 소리가 너무 길고 분명했으므로 착각의 여지가 없었다.
지욱의 얼굴엔 일시에 생기가 감돌았다. 그는 신호의 단속을 계속하고 있는 전화통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마치 그 전화통으로 하여 간신히 실마리를 얻어낸 자신의 어떤 기대감을 가능한 한 오래 간직하고 싶은 듯, 그리고 그 기대감을 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면서 될 수록 천천히 즐기리라 작정이라도 한 듯, 한껏 느릿거린 동작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전화기 속의 목소리는 이제 갓 스무 살을 넘었을까 말까 한 젊은 아가씨의 그것이었다.
“거기 33국의 × 748번 아닙니까?”
아니라면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려 버릴 것 같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지욱의 얼굴은 그 소리에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
“전화 잘못 걸었소.”
금세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그러나 아가씨의 다급한 음성은 지욱이 아직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게 했다.
“아, 그럼 거긴 몇 번이세요?”
“전화 잘못 걸었다는데, 그건 알아 뭘 할 테요.”
“사실은요, 제가 찾고 있는 분의 전화번호가 자신이 없거든요. 제가 알고 있는 걸로는 33국의 ×748번 같지만요.”
“그럼 실수를 한 모양이니까, 그 번호로 다시 걸어봐요. 여긴 ×758번이오.”
이젠 사뭇 짜증이 섞인 대꾸였다. 귀찮았다. 그는 아무렇게나 대답을 하고 나서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아가씨는 뜻밖에 끈기가 있었다. 조그한 목소리로 또다시 지욱이 동작을 정지시켰다.
“실수라도 마찬가지예요. 그 번호도 전 어차피 자신이 없거든요. 하지만 선생님 댁이 ×758번이라면 혹시 거기가 윤 선생님 댁 아니세요?”
“어디……여기 말이오? 그렇소. 내가 바른 윤…… 윤지욱이요마는……?”
뜻하지 않은 물음에 지욱이 어리둥절했다. 무심결에 불쑥 아가씨의 말을 시인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이 바로 그 ‘윤 선생 ’이라는 소리가 입을 뛰어나오려는 바람에 선생이라는 말 대신 윤자 밑에 얼른 그의 이름 두지를 덧붙이고 만 것이었다. 한데 더욱 뜻하지 않은 일은 그러자 갑자기 아가씨가 반색을 하고 나선 것이었다.
“어머 그러세요. 맞았어요. 윤지욱 선생님. 윤 선생님 댁 전화가 ×754번이었군요. 그러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처음엔 제가 선생님 댁 번호를 착각하고 있었고 그 착각에다 한 번 더 실수를 겹치는 바람에 결국은 다시 제 번호를 찾아내게 됐군요. 행운이지 뭐예요?”
이만저만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그런데 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전화번호도 확실치 않은데다, 그 확실하지 않은 전화번호가 또 한 번의 실수를 거듭하는 바람에 결국은 옳은 주인을 만나게 되는 우연도 있을 수 있을까. 누군가.
지욱은 역시 일이 좀 이상스런 것 같았다. 한데 아가씨의 태도가 점점 더 수상쩍었다.
“제가 누구냐구요? 제가 누구라면 좋으시겠어요?”
장난기가 어리고 있는 아가씨의 말은 마치 누구라도 지욱이 바라는 여자가 되어주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누구요?”
“아이, 그렇게 서두르지 마세요. 전 뭐든지 쫓기는 건 싫어요. 제가 말씀 드리고 싶어질 때까지 좀…….”
“날 알고 있소?”
“그야 물론이예요.”
“내가 누구요?”
“호호호, 참 이상한 걸 다 물으시네요. 윤 선생님 자신의 일을 누구에게 묻고 계신 거예요?”
이젠 장난기가 제법 노골적이었다.
“전화 끊겠소.”
퉁영스럽게 내뱉고는 다시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아가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좀더 그를 물고 늘어졌다
“잠깐만요. 저는 이젠 전활 끊으려는 참이니까. 하지만 이건 다짐을 드려둬야겠어요. 30분 뒤에…… 30분 뒤에 다시 전활 드리겠어요.”
“무슨 일로 또?”
“전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전 어쩌면 윤 선생님을 조금쯤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여자거든요. 정말이예요.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그것은 선생님께서 윤이라는 성을 가지고 계시고 때문에도 더 그래요. 전 원래부터 윤이라는 성씨를 좋아하는 괴상한 버릇이 있거든요. 윤 선생님-얼마나 부르기가 좋아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전 조금씩만 즐거워지고 싶거든요. 지금 죄다 이야기를 했다간 너무 한꺼번에 많이 즐거워져서 전 아마 기절을 하고 말 거예요.”
“그럼 제발 기절을 하지 않도록…….”
“하지만 이것만은 정말 꼭 기억해 두셔야 해요, 선생님. 30분 후에―30분 후에 다시 전화 드리겠다는 거 말씀이에요 그리고 전 윤 선생님의 모든 것, 성함이나 전화번호 같은 건 물론이구 하구 계시는 일이나 생기신 모습, 취미, 옷차림, 하다 못해 걸음걸이 하나까지도 모두 다 속속들이…….”
수화기를 내려버렸기 때문에 아가씨의 다음 말을 더 이상 이어지지를 못했다. 아가씨는 아마 그토록 속속들이 지욱을 잘 알고 있노라고 할 참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상한 협박이었다. 그러나 지욱은 더 이상 괘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알고 보니 모두가 자신의 어쭙잖은 실수 때문에 생긴 일인 듯만 싶었다. 그는 아랫목으로 내려와 아깟번처럼 다시 천장을 향해 반듯이 몸을 뉘어버렸다.
제가. 알긴 뭘 알아. 요즘 전화들이란 왼통…….
그는 혼자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금세 또 전화통이 그를 가만있지 못하게 했다.
따르릉 ― .
또 다시 요란스런 신호 소리가 울려왔다. 지욱은 반사적으로 몸을 반쯤 일으키고 말고 원망스러운 듯 잠시 전화통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마엔 엷은 피곤기가 어리고 있었다
젠장맞을.
그는 다시 한 번 투덜댔다. 그러나 그는 이윽고 미적미적 무릎 밀림으로 전화통까지 다가가서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아깟번과 같은 기대감이 전혀 깃들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 여보세요. 거기 사모님 좀 바꿔주세요.”
이번에는 걸찍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사모님요? 사모님, 누구 말씀입니까?”
“오 과장님 부인 말씀입니다. 거기 오 과장님 댁 아닙니까?”
영락없이 또 혼선이었다. 혼선 아니면 오접이었다.
“전화 잘못 걸었소. 이 집엔 오씨 성 가진 사람도 없고 과장하는 사람도 없소.”
“그럼 실례지만 거긴 몇 번이죠?”
“여기가 몇 번이든 그건 댁에서 상관할 것 없소.”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는 수화기를 내려버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 와선 이상하게 잘못 걸려온 전화가 많았다. 혼선도 많았고, 듣다 보면 아무렇게나 번호를 돌린 것이 우연히 선이 닿아 오는 수도 많았다. 방금 걸려온 두 차례의 전화도 이를테면 그 비슷한 것들이었다. 실상 이 몇 주일 동안 지욱이 받은 전화는 거의 모두가 그런 것뿐이었다. 제대로 걸려온 전화는 기억에도 없을 정도였다. 이상하게도 요즈음은 또 그렇게 지욱을 찾는 사람도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론 그의 탓은 아니였다.
지욱은 다시 아랫목으로 발을 뻗었다.
하여튼 어떻게 이젠 일이라도 좀 되어나가야 할 텐데.
아랫목으로 발을 뻗고 기대앉은 채 이윽고 그는 책상 위에 펼쳐진 원고지 위로 잠시 망연한 시선을 내려뜨렸다. 책상 위에 쓰다 만 피문어 씨의 자서전 원고가 까마득하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것은 이 며칠 동안 한 줄도 더 말을 보태지 못한 채 고스란히 그렇게 빈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코미디언――자기의 말과 웃음이 끝끝내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는, 자기의 것이 되어서도 안 되는, 그래서 그 말이나 웃음이 항상 자기하고는 따로따로여야 하는 그 슬픔 코미디언의 숙명을 무의식 중에나마 나 스스로 짊어지고 나섰던 것이다. 될 수만 있으면 나 개인의 슬픔을 멀리하고 나의 아픈 내력이 나 삶의 고뇌하고는 나의 말과 웃음이 멀리 떨어져 있어야 그것들이 보다 쉽게 청중의 것이 될 수 있는, 애초부터 나의 말과 웃음은 사랑하기를 단념해 버린 채 청주의 말이며 청중의 웃음을 자기 안에서 더욱더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그 코미디언의 슬픈 숙명을 말이다. 나의 말은 과연 나의 말이 아니며 나의 웃음은 과연 나의 웃음이 아니다. 나의 말은 청중의 말이며 나의 웃음 또한 청중의 웃음이며, 그것들은 이미 나의 말, 나의 웃음이 아닌 것이다.
코미디언 피문오(皮文五――우리 시대의 코미디언 피문어 씨의 본명이 그렇다는 것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씨의 자서전은 거기까지 씌어지고 있었다. 자서전 대필은 그래 지욱의 본업이 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는 방금도 그 피문어 씨의 자서전 대필 작업을 떠맡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은 피문어 씨 자신의 생활 경험이나 생의 퀘적하고는 깊이 상관되지 않는 작업이었다. 그런 필요도 없었다. 윤 선생께서 적당히 알아서 아…… 거 윤선생님께선 다 알 아시고 않아요―― 피문어 씨가 솔직하게 웃으면서 주문했듯이 모든 것이 일방적으로 지욱의 머리 속에서 창작되고 그의 손끝에서 다시 꾸며져 나가고 있었다. 코미디언 피문어 씨의 반생은 오로지 지욱에 의해 그 운명이 다시 엮어져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요즘은 통 진척이 없었다.
나의 말이 나의 말이 아나며 나의 웃음은 나의 웃음이 아니다. 나의…… 말은 청중의 말이며 나의 웃음 또한 청중의 웃음이매…… 늘 거기서 생각이 끊어져버렸다. 그래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러니까 앞으로 피문어 씨는 어떻게 되어야 한단 말인가. 피문어 씨의 운명도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야 한단 말인가.
전화통 때문이었다. 전화통이 한 발짝도 생각을 더 이어나가지 못하게 해 버리곤 했다. 생각을 좀 풀어나가 보려고 하면 그때마다 전화벨이 꼭 방해를 하고 나섰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어보면 그것은 번번이 잘못 걸린 전화이기가 일쑤였다. 불쑥 신경질이 치솟아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젠 언제까지나 그 전화통 핑계만 대고 있을 수가 없었다. 피문어 씨의 일이 끝나면 또 한 사람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상윤 씨. 충청북도 어느 벽지에서 야산을 개간하여 3만여 평의 황무지를 젖과 꿀물이 줄줄 흐르는 일급 옥토로 일궈낸 의지의 사나이. 지욱은 다음 번 일거리로 그의 자서전 대필을 맡아놓고 있었다. 피문어 씨의 일이 빨리 끝나야 했다. 게다가 최상윤 씨로부터는 일이 언제쯤부터 시작되겠느냐고 벌써 두 차례나 독촉 편지를 받고 있는 터였다.
억지를 좀 써보자.
지욱은 생각을 다부지게 지어먹고 원고지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원고지를 내동댕이쳐버리고는 방바닥으로 덜렁 드러누워 버렸다. 원고지 앞에 참고 앉아 있자니 금세 또 전화벨이 울려올 것 같이 조바심만 더해갔다. 그는 이제 아무리 애를 써봐야 결국은 허사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별일이었다. 어떤 때는 그게 좀 뜸해진 듯 싶어졌다가도 원고지만 대하고 앉으면 영락없이 꼭 신호를 울려왔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틈이 열리면 그것은 숨돌릴 사이도 없이 연거푸 찌르릉 거리며 극성을 떨어대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한동안 잠잠해 있던 전화통이 그 싱거운 아가씨를 신호 삼아 벌써 두 번째나 낭패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지욱이 벌써 제풀에 지쳐 떨어지고 만 꼴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 아가씨의 전화가 이상하게 뒷입맛까지 개운치를 않았다. 여느 때처럼 그냥 웃어넘겨 버리긴 했으나 그의 마음 한구석엔 묘하게 아직 그 아가씨의 마지막 목소리가 지워지질 않고 있었다.
30분 뒤에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전화통 쪽으로 신경이 쏠려 있곤 했다. 그렇다고 지욱이 그 아가씨의 다짐 때문에 아직 어떤 기대 같은 것을 남기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아가씨를 신용하고 있지 않았다. 이름까지 대지 못했지만 전에도 그 비슷한 전화가 몇 번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묻지 않고도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선 가령 이런 추리가 가능했다. 그녀는 스스로 강조했듯이 윤씨 성을 기진 사람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다. 심심하면 그녀는 전화번호부 같은 데서 윤씨 성 가진 사람을 찾아내어 그 윤씨 성 가진 집 젊은이와 전화통 속에서 말장난을 즐긴다. 그러다 하루는 어떻게 번호를 잘못 돌려 우연히 지욱의 집으로 선이 이어지지만 아가씨는 거기서도 또 운좋게 윤씨 성 가진 젊은이를 찾아낸다…….좀더 점잖은 추리를 하자면, 아가씨는 처음부터 전하번호부에서 지욱의 이름을 찾아내고는 지욱의 번호를 돌렸달 수도 있었다. 한데 그래놓고는 지욱이 전화를 받고 나서자 그녀가 방금 자기가 돌린 전화번호를 한자쯤 착각한다……. 한데 이두 가지 경우 중에 하나라면 아가씨는 아마 전자쪽에 더 가까울 것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몇 차례나 ×748번을 외웠다. 착각이었다면 금세 자신의 착각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지금이라도 그 ×748번을 돌려서 윤씨 성을 가진 청년이 있나 없나를 확인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지욱은 이런 모든 사정을 곰곰히 따져가면서 생각해 보지 않고도 환히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근래의 전화들이 그에게 그런 반사적인 추리력을 길러준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여자의 말엔 주의를 주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748번을 돌려서 윤씨 성 가진 청년의 거주 여부를 확인해 보는 따위의 행동 같은 건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전화가 끊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했었다. 한데 아가씨가 이쪽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노라고 맹세하듯 몇 번씩 다짐을 해온 것이나 또는 30분 후엔 반드시 다시 전화를 걸겠노라고 협박조로 지껄여댄 말들이 정말 어떤 효험을 발휘한 것일까. 이번 경우에는 아가씨의 일이 터무니없을 만큼 끈질기게 지욱의 주위를 간섭하고 있었다.
어느새 탁상 시계가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 아가씨의 전화를 받아 볼 때가 5시 반경이었으니까 얼핏 30분이 다 지났을 시간이었다. 지욱은 이제 제법 긴장기까지 느끼고 있었다.
정말 전화를 걸어올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따르르릉 ―.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듯 6시가 정확해지자 정말로 전화벨이 울려왔다.
젠장, 정말이었던 게로군. 도대체 어떤 아가씬가.
지욱은 버릇처럼 투덜대기 시작했으나 몸은 벌써 스적스적 전화통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
“아, 여보세요.”
그러나 지욱의 터무니없이 퉁명스런 목소리가 맘에 들지 않은지 신호를 보내놓고도 저쪽에선 얼핏 대꾸를 해오지 않았다.
“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뭐 또 이런 전화가 있어.
낭패였다. 그는 좀 성급한 듯싶게 수화기를 내려버렸다. 그러나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에 저쪽에서 먼저 전화가 끊기는 기척을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빌어먹을 ――.
그는 사뭇 얼굴 근육까지 굳어지고 이었다. 그러나 바로 또 그때였다. 따르릉 ―.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성급하게 다시 전화통에서 신호 소리가 튀어나왔다. 지욱이 이제 투덜댈 겨를도 없었다. 반사적으로 다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선생님이시군요, 저예요.”
이번에는 그 아가씨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이제 지욱이 제법 구면이라도 되는 양 허물이 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지욱의 어조는 퉁명스럽고 고집스럽기만 했다.
“왜 또 전화요?”
“왜 또 전화질이냐구요. 아이 참 선생님두, 아까 제가 약속 드리지 않아어요. 30분 후에 다시 전화 드리겠다구요.”
아가씨는 지욱의 어조 같은 덴 전혀 아랑곳을 하지 않는 투였다.
“하지만 전 어쨌든 반가워요. 선생님께서 절 알아보셨는걸요.”
“전화 끊겠소.”
지욱은 공연히 조급해져서 화를 냈다. 그러나 그는 차마 아직 수화기를 내려놓지는 못했다.
“아이 참 선생님도…… 그러시면 저 실망이에요. 선생님을 미워할 테예요. 아까부터 공연히 화만 내시구…….”
“…….”
“선생님은 제가 정말 누군지, 어떤 말괄량이 아가씬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그건 벌써 몇 번씩 물은 걸로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이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소.”
“제편에선 선생님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데두요? 그래도 선생님께선 절 알고 싶지 않으시단 말씀이세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선생님은 정말 무정한 분이시군요.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어요. 선생님께 제가 누군지를 알으켜 드리고 말겠어요.”
“알고 싶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예요. 선생님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계신 거예요. 그야 거짓말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어요. 전 기어코 선생님께 제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 드리고 말 테니까요.”
“자신만만하시군.”
“선생님께서 제 방법을 용납해 주실 테니까요.”
“방법?”
“네. 전 선생님께 저를 알으켜 드릴 방법을 생각해 놓았거든요. 지금도 그걸 말씀드리려고 전화 드린 걸요.”
“거 한번 들어봅시다.”
“어머, 좋아라. 그럼 선생님 이렇게 해요. 지금 곧 옷을 갈아입으시고 댁을 나오세요. 아직도 눈이 오고 있으니까 외투를 입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댁을 나오시면 택시를 타고 광화문 쪽으로 오세요. 그러면 댁이 신촌 쪽이시니까 서대문 육교를 지나 문화방송 앞을 지나시게 되실 거예요. 그럼 문화방송 앞으로 차를 내리세요. 거기서 건너편 쪽으로 관상대 올라가는 골목이 마주 바라보여요. 그쪽으로 길을 건너오세요. 길을 건너오면 관상대 올라가는 골목 입구에 가로등이 하나 서 있어요. 그리고 그 가로등 아랜 아가씨 하나가 눈을 맞으면 떨고 서 있을 거예요…….”
“가엾겠군요.”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그 아가씬 북구의 여인들이 즐겨 쓰는 하얀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털장화 벙어리장갑을 끼고 그리고 손가방 속으로 아빠의 서랍에서 훔쳐낸 향기 좋은 담배가 한 갑 숨겨져 있을 테거든요. 선생님께 드리려고 말씀이예요. 선생님께 그 담밸 드리고 나서, 그 담배를 피우고 계실 선생님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앉아 있을 자신을 상상하면서 그 아가씬 아마 추위도 잊어버릴 수있을 거예요. 그뿐인가요. 선생님을 만나면 거리엔 어디든지 따뜻한 다방이 있어요.”
“…….”
“제 방법 어때요? 근사하죠, 선생님. 그리고 용납해 주시는 거죠?”
“…….”
“나와주시는 거죠? 지금 곧 말이예요.”
“…….”
“그럼 저 그렇게 알고 전화 끊겠어요?”
전화가 끊겼다.
의심이나 망설임, 그리고 궁색한 사변과 오만스러운 무관심은 이런 경우 아무 도움도 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사태를 오히려 더 혼잡스럽고 난처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끝내는 자기 자신의 은밀스런 충동과 호기심을 이겨내지도 못한다.
10여 분 후, 지욱이 결국 광화문으로 나가는 택시 안에 몸을 담고 있었다. 전화가 끊기는 순간 그는 결국 그렇게 되고 말 자신을 알고 있었다. 아가씨의 말투로 보면 그녀 쪽에서는 정말로 어느 만큼 지욱을 알고 있는 듯싶기도 했다. 그야 당장이라도 그 ×748번으로 전화를 걸어보면, 사정이 좀더 분명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욱은 끝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치사스럽게만 느껴졌다. 조금은 두렵게 여겨지는 데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아가씨의 말을 모른 척해 버릴 수가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 같은 것이 되어 남아서 그때는 이러기도 저러기도 난처해져서 때늦게 혼자서 허튼 정력만 빼앗기고 있을 자신이 분명했다. 아쉬움을 남길 필요가 없었다. 반신반의―― 그런 정도의 심사로 지욱은 집을 나서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지욱은 어쨌든 자신의 우스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달리는 차창으로 아우성처럼 몰려드는 눈발을 내려다보면서 혼자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었다. 사람들이 말을 아끼기 시작한 것은 퍽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극도도 아끼고 시작했다.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말없이 술만 마셨고 찻집에 들여다보며 말없이 차만 마셨다. 사무실 같은 데로 친구를 찾아가면 웃는 듯 만 듯 악수를 끝내고 나서는 서로가 담배나 뻐끔뻐끔 피우고 앉았다 헤어지게 마련이었고, 어쩌다가 고향 사람을 만나고 나서도 고작 어른들 잘 계시냐는 문안인사 정도로 이내 발길들을 돌려버리곤 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원래부터 그렇게 말들을 아끼는 편이었냐 하면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들은 한때 지극히도 말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그 말을 혹사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그들은 말을 사랑했고 그것을 즐겼다. 그 시절, 지상의 모든 가난은 사회 사업가들의 입술 위에 있었고, 조국의 백년대계 교육자와 청년 운동가들의 입술 위에 있었으며, 모든 시대 정의는 문학도와 역사학도와 종교인들의 입술 위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의 현주소를 그들의 입술 위로 옮겨놓을 만큼 말을 사랑하고 그 말들을 즐겼다.
그들의 입술 위에서 그것은 차라리 말의 혹사였고 말의 학대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한데 그러던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느닷없이 그 말을 아끼기 시작해 버린 것이었다. 지욱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로워졌다. 그는 말을 만나기 위해 거리를 나다니곤 했다. 친구들을 찾아다니고, 술집을 기어 들어가고, 다방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낭패였다. 사람들은 끝끝내 말을 아껴버렸고 그는 혼자 지쳐서 그때마다 할 일 없이 집으로 쫓겨 들어와 버리곤 했다. 말은 이미 사람들을 떠나버리고 만 것 같았다. 지욱은 결국 스스로 말을 찾아다니는 일을 단념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단념해 버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만나자는 말이 있겠지, 어디선가 뜻밖에 만나게 될 말이 있겠지.
전화통에 관심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그는 날마다 전화통 앞에 앉아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부턴가 전화통도 마찬가지였다. 신호가 울린 일이 없었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찾는 사람이 없었다. 지욱은 거기서도 낭패였다. 그래서 지욱은 전화를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전화를 걸어보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작정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또 자기 쪽에서 마땅한 이야깃거리가 생각나주질 않았다. 전화를 걸어볼 만한 친구도 쉽지 않았다. 어떤 땐 아무 친구나 생각키는 대로 번호부터 돌려놓고 보기도 했지만 저쪽에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나면 영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까닭 없이 겁을 먹고 이쪽에서 그냥 수화기를 내려버리거나, 아닙니다, 전활 잘못 걸렀군요, 또는, 거기 ××포목점 아닙니까 하는 식으로 되는대로 엉뚱한 소리를 지껄여서 전화를 끊어버리곤 했다. 지욱은 문득 그 자신에게서마저 차츰 말이 떠나버리고 있음을 느꼈다.
한데 바로 그 무렵부터였다. 또 한 가지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토록 침묵만 지켜오던 전화통이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신호를 울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침묵을 깨고 난 전화통은 그것을 신호로 하여 귀찮도록 쉬임 없이 지욱을 그 전화통 앞으로 불러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괴이한 일은 그 모든 전화들이 어찌 된 심판인지 거개가 다 혼선 아니면 오접, 착각 아나면 고의에 의한 장난 전화들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수화기만 들면 번번이, 거시 연탄가게 아닙니까, 하는 식으로 엉뚱한 소리를 물어오기가 일쑤였다. 김 선생님 계십니까, 김 선생님 좀 바꿔주세요――또는 다짜고짜로, 조 선생님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저예요 저…… 어쩌고 하는 투도 있었다. 어떤 때는 가만히 이쪽 기척만 살피다가 그냥 슬그머니 수화기를 내려놓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정도는 그래도 참을 만한 편이었다. 한두 마디 건네보다가, 전화잘못 거셨소 하면, 저쪽에선 되려 미안합니까, 능청을 떨고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버르장머리 없이 장난질이냐고 야단을 치면 느닷없이, 감사합니까다. 여보세요 하면 제 편에서 먼저 안녕하십니다. 누구냐고 물으면 나 말이오? 나? 내가 나지 누구겠소, 하하 나란 말요…… 이런 식이었다.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신호가 울릴 때마다 그는 신경질이 뾰족뾰족 돋아났다. 숫제 수화기를 내려놓아 버릴까 생각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낭패였다. 그는 정말로 수화기를 내려놓으려고 한 일 있었다. 그런데 수화기에 손을 대자마자 웬놈의 말이 신호도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느새 말이 수화기까지 스며들어와서 그 곳에서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것은 지욱이 수화기를 드는 순간 더 이상 숨을 곳을 잃고 바퀴벌레처럼 허공으로 불쑥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는 치가 떨렸다. 도대체 이 말들은 어디서 쏟아 들어오고 있는가. 사람들은 그토록 말을 아끼고 있는데 이 말들은 모두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이내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거기 ××번이지요?���
바퀴벌레처럼 징그럽게 튀어나온 말이 묻고 있었다.
���아닙니다. 전화 잘못 거셨소.���
전화를 끊고 나니 이내 또 신호가 울려왔다. 지욱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번 아닙니까?���
방금 전의 목소리였다.
���아니라니까요.���
잠시 후에 세 번째로 똑같은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쪽 기척을 알아차린 저쪽이 먼저 사과를 해왔다.
���……미안합니다. 선생님, 정말 미안합니다.���
그는 애원을 하다시피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하나 지욱은 이제 그 목소리에게 더 이상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사태를 이해하고 있었다. 세 번째 연거푼 전화로 인하여 그는 이제 모든 것이 제법 분명해진 느낌이었던 것이다.
수화기를 아주 내려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기다림은 더욱더 커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차가 서대문 육교를 내려서고 있었다. 지욱은 정동 문하방송국 앞에서 차를 내렸다. 차를 내려서고 우선 맞은편 관상대 올라가는 골목길을 건너다 보았다. 과연 골목 입구에 가로등이 하나 푸르스름한 형광 불빛을 그리고 서 있었다. 그 불빛 속으로 여름날 부나비 떼처럼 눈송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 불빛 속에는 아무도 사람이 없었다.
내가 너무 빨랐나? 어쩌면 또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지욱이 예감을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예감은 사실 집을 나설 때부터도 이미 마음 한구석에 깊이 도사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이 그 텅 빈 불빛 빛으로 인해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길을 건너가 보자. 혹은 어디서 눈을 피하고 서 있을지도 모르지.
오버깃을 펄럭이며 그는 길을 건넜다. 그러나 길을 건너고 나서도 그는 여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흰 털모자, 벙어리장갑…… 그런 여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날 따라 길을 지나가는 사람도 드물었다. 텅빈 골목어귀에 부지런히 눈이 쌓이고 있을 뿐이었다. 눈은 이제 길을 덮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까부터의 그 기분 나쁜 예감이 가슴속으로 자꾸 더 기승을 부리고 나섰다. 그는 터무니없이 조급해졌다. 오래 서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직막으로 발돋움까지 해가며 길목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미친 짓을 했군.
그는 조급하게 발길을 돌이켰다. 그때였다. 발길이 휘뜩 한번 미끌리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지욱은 허공을 한바퀴 빙 돌고 나서는 무참하도록 세차게 시멘트 바닥 위로 몸을 구겨 던졌다. 오버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있었으므로 그는 어떻게 중심을 잡아볼 겨를도 없었다. 어디선가 웃음보가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오버자락, 팔꿈치, 바짓가랑이 할 것 없이 온통 엉망이었다.
���아유, 부끄러워.���
���아유, 창피해.���
조무래기 두 놈이 낄낄거리며 한마디씩 안기고 지나갔다. 지욱은 화를 낼수도 없었다.
���선생, 화를 내세요. 그런 땐 혼자서라도 마구 화를 내셔야 합니다. 화를 내세요, 선생.���
근처 국숫집 사내 녀석이 커다란 배를 들먹이며 웃고 있었다. 말없이 발길만 재촉하고 있던 행인들까지 일부러 그를 기웃거리며 이때라 싶은 듯 제각기 한마디씩 던지고 지나갔다.
���저 양반 발바닥에 땅덩이가 미끄졌군.���
“스케이팅은 그렇게 아무 데서나 하는 게 아니오.”
그는 정말 웃을 수도 없었다.
잠시 후 지욱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 다시 몸을 싣고 있었다. 외투자락과 바짓가랑이가 아직 엉망인 채로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럴테지.
그는 뭔가 미지근하던 것을 확인해 버린 듯 후련한 느낌이었다. 그럴 테지. 그 여잔 만나질 리가 없었어. 미련스럽게도 난 어떤 정처 없는 말의 유령을 만나러 나섰던 거야.
그는 모든 것이 한결 분명해지고 있었다.
모든 말들이 길을 헤메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하여 말들의 주소를 바꿔놓음으로써 말들을 혹사했고 말들을 배반했고 결국에는 그 말들이 기진맥진 지쳐 죽게 했다. 말들은 그들의 고향을 잃어버렸고 그들의 고향에 대한 감사와 의리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배반당한 말들은 자유였다. 그러나 말들은 이제 정처 없었다. 말들은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며 그들이 깃들일 곳을 찾았다. 어떤 말들은 전화기 속으로 숨어 들어와서 은밀히 둥지를 틀려고 했고 또 어떤 말들은 뻔뻔스럽게 통화를 가로채고 나서며 다른 말의 소굴을 약탈하려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말들은 아직은 대개 애원을 하고 있었다. 깃들인 곳을 찾아 하염없이 떠돌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세 번째나 실수를 거듭하던 그 딱한 말의 사정을 글세 그냥 우연한 실수라고만 보아 넘길 수 있을까. 그것은 차라리 애원이었다. 그것은 이미 세 번째나 다른 곳에서 거절을 당하고 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들은 대개가 거짓말을 당했다. 거절만 당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염치가 없어지고 약탈꾼이 되어갔다. 그것은 마치 무리져 떠돌아다니는 말들의 복수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지욱은 그 말로보터 자신이 복수를 당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전화기에서는 길을 잃고 떠도는 말들이 틈만 나면 그를 끌어내어 괴롭혔다. 그것은 신호를 울리지 않고도 이미 전화기 속으로 스며들어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말은 그 전화기 속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신문지 위에도 있었다. 스위치만 넣으면 라디오에서는 정처 없는 말들이 금세 득실글득실 쏟아져 나왔다. 신문들 위에서도 수많은 말들이 구데기처럼 바글거리고 있었다. 한결같이 고향과 주소가 없는 말들이었다. 이제 방 안에는 어디까지나 유령처럼 말이 숨어 있었다. 고향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도는 말들은 기실 지쳐 죽은 말들의 유령이었다. 지욱은 하루 종일 그 소리 없는 말의 유령들에 둘러싸여 조심조심 숨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는 꼴이었다. 그는 피곤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애원하지 않는 말들의 진짜 복수가 시작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전화통에서 수화기를 내려버리지는 않고 있었다. 말들은 아직도 복수보다는 애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고, 말들이 그렇게 길을 잃고 헤메고 다니는 것을 보면 볼수록 그의 기다림은 더욱더 깊어져가고만 있었던 것이다. 고향을 잃어버리지 않은 말, 가엾게 떠돌지 않는 말, 그가 태어난 고향에 대한 감사와 의리를 잃어버리지 않는 말, 그가 태어날 때 지은 약속을 벗어버리지 않는 말, 유령 아닌 말, 그는 아직도 그런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 아가씨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가씨의 말이 정말 지욱이 기다리고 있었던 말이었을까. 그렇게 믿을 수가 있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지욱은 처음부터 신용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숫제 관심조차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거푸 전화에 그는 행여나 하고 일단은 확인을 하고 싶어졌다. 결국은 그래야 속이 시원해지리라는 걸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그는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가씨는 나와 있지 않았다. 아가씨의 말은 정처 없이 떠도는 유령이었다. 그 역시 길을 잃고 깃들일 곳을 찾아 헤메 다니는 가엾은 말의 유령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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