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가족 전상국
1
영내(營內)를 벗어나면서 나는 키가 팔 척이 넘는 것 같은 우월감을 맛보았다. 정문의 지피들은 사복으로 바꿔 입은 나를 용케도 알아봐 외출증을 확인하는 일까지 건성으로 했던 것이다.
일을 마치고 나가는 한국인 종업원과 노무자들이 줄로 늘어서서 옷 뒤짐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펴고 그들 곁을 지나쳐 나갔다. 이 우쭐한 기분은 한 달 전 오산 비행장 트랩을 내릴 때의 그 흥분 상태 그대로였다. 낮은 코 짧은 키로 해서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했던 신병 훈련소에서의 그 좌절감이 한꺼번에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4년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아 보는 감회가 어금니에 지그시 씹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부대 배속을 받고 도착해 보니 바로 시피엑스에 걸려 외출이 허가되지 않은 그 이십여 일을 나는 뒤숭숭 뜬 마음으로 보냈다. 그런 속에서도 나는 새삼 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둘 필요를 느꼈고 감상에 젖거나 비굴한 짓거리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헤이, 킴, 언제 미국에 갔어?"
카추샤들이 아는 체 악수를 청했다. 나는 대답 대신 웃으며 손만 흔들어 주고 그 자리를 피했다.
"헤이, 킴, 웰컴! 내가 뭘 도와줄까?"
퍼엑스의 한국 사람이 내게 접근해 왔다. 나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배당된 쿠폰을 찢어 버렸다. 미국에서 고모가 내게 일러주던 그 돈 버는 방법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것이다. 나와 함께 신병 훈련을 받고 한국에 건너온 깜둥이들마저 이미 돈버는 방법을 냄새 맡고 코를 벌름거리고 있는 게 구역질이 나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영내를 벗어나 철조망을 끼고 시가지 쪽으로 런은 신작로를 걸었다. 가슴이 탁 트였다. 여름 오후의 햇볕은 아스팔트 바닥을 눅진눅진 녹이고 철조망 밑으로 무성한 잡초들이 짙은 풀 냄새를 훅 풍겼다. 들뜬 마음과는 달리 나는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어금니로 비집고 올라오는 희열을 되도록 서서히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정확히 3년 10개월 전 우리 가족들이 이 땅을 떠나면서 품었던 소박한 꿈 중의 그 하나가 이제 실현된 것이다. 그것은 한국에서 양공주였다가 국제 결혼을 해 미국에 가 영주권을 얻은 고모의 계획 중의 하나였다. 돈 안 들이고 한국에 나갈 수 있는 길은 미군에 들어가 한국 파견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한국 월급장이들보다 더 많은 돈을 주머니에 넣고 거드럭거리며 1년쯤 지내다가 미국이라면 껌벅 죽는 계집애 하나 얻어 가지고 돌아오면 좀 좋겠느냔 고모의 생각이었다.
"그래, 난 사람을 찾으러 한국에 가는 거다."
미국을 떠나기 전 나는 동생들한테 말했다. 다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정회와 진구는 하이스쿨 과정을 밟고 있었고 막내는 중학교였다. 돈 한푼 안 들이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대학 진학의 꿈으로 동생들은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많았다. 자식들을 위해서 미국에 왔다는 아버지의 한국적 자위는 빛을 잃었다. 동생들은 굉장히 빠른 시간에 미국화 됐다. 정회가 특히 그랬다.
"오빠, 미국까지 와서 가시 한국 여자와 결혼해 살겠다는 거야?"
정회는 그런 생각을 가진 계집애였다. 우리 식구 중에서 적응력이 제일 빨랐다. 정회는 보이프렌드를 여럿 우리 아파트까지 끌어들였다. 모두 백인 아이들이었다. 우리 아파트 근처에는 흑인들이 많이 살았다. 흑인 애들이 정회의 뒤를 따라다녔다.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골목에 지키고 텄다가 정회를 둘러싸고 희롱을 했다. 스페니시계 녀석들까지 그랬다. 정회는 놈들의 희롱을 잘 발아 주었다. 그게 정회의 생리였다. 그러다가 일을 당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야채가게의 주인 이씨의 귀띔으로 우리 아파트까지 달려갔을 때 그 깜둥이들은 정회를 윤간하고 있었다. 나는 피가 거꾸로 흘렀다. 출입문을 막아섰다. 세 놈이 능글능글 웃으며 다가왔다. 나는 품에서 야채 다듬는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 칼로 왼쪽 팔목에 상처를 냈다. 한국에서 재두, 형표, 석필이와 함께 남긴 담뱃불 자국이 있는 근처를 썬 것이다. 팔뚝에서 피가 흘러 현관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능글능글 웃던 갈등이 애들 눈이 금세 겁에 질렸다. 깜둥이들은 미개하고 천한 만큼 겁이 많고 비열했다.
"컴온, 컴온!"
나는 칼 든 손으로 그들을 손짓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끝으로 불 같은 증오가 뻗쳐 온 몸이 떨렸다. 나는 며칠 전 정회와 함께 어머니의 수기를 훔쳐보았다,
"나는 밤낮 없이 그들을 칼로 찔러 죽이는 환상으로 치를 열었다. 그들의 검고 끈적끈적한 살갗 그 깊숙한 데서 콸콸 쏟아지는 피를 두 손으로 받아 이웃 사람들 눈앞에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그때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가슴으로 치미는 증오와 복수심 그것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한국에서 식구들 몰래 노우트 장에 틈틈이 쓴 그 글에 그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칼 든 손을 벌벌 떨면서 검둥이들 앞으로 다가섰다. 검둥이들이 너무 쉽게 무릎을 꿇었다. 많이 보던 봄들이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이씨네 식품가게와 같은 블럭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식품점에 들어와 물건을 훔쳐내다가 이거한테 들키자 골목까지 쫓아오는 이씨의 이빨을 두 개씩이나 부러뜨린 놈들이었다. 이씨가 잡아넣겠다고 하니까 그 놈들 떼거지가 몰려와 가게에 불을 놓겠다고 엄포를 놓던 일도 있었다.
"병신 같은 새끼들!"
정회가 흐트러진 아랫도리를 추스르며 일어났다. 계집애는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깜둥이들 머리 위에 침을 뱉은 다음 나를 향해 내뱉았다.
"오빤 뭐가 잘났다구! 한국에서 오빠가 한 일 생각 안나? 그 꼴에 왜 자꾸 내 일에 참견이야?"
정회는 분명 -내 일-이라고 했다. 악 쓰는 계집애를 바라보면서 나는 어깨에 힘이 빠졌다. 정회는 이렇게 뻔뻔스럽게 변해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재두, 형표, 석필이와 함께 벗겼던 계집애는 그냥 울었을 뿐이다. 그리고 부모한테 제 몸이 더럽혀진 것을 일러바쳤던 것이다. 나는 정회 계집애를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입에서는 애원이 담긴 신음이 흘러 나왔을 뿐이다.
"정희야, 우리가 여기 와서 이렇게 살려고 왔냐?"
"한국에 살았으면 이것보다 더 더럽게 살았을 거야. 엄마두 아버지두 나처럼 더럽게 살았던 거야."
정회는 앙칼지게 내뱉었다. 어머니가 쓴 글을 함께 읽고 난 뒤에 부쩍 변해 버린 정회였다. 어린 계집애 가슴에 파인 상처는 치유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공범자로서 몹시 괴로웠다. 그 글을 함께 읽은 것이 후회가 됐다, 그러나 이제 쏘아 놓은 화살이었다. 정희와 나는 어머니의 글을 읽고 나서 다 같이 우리가 벗어날 길 없는 깊은 늪 속에 빠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때부터 우리가 읽은 그 글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의견을 나눈 일이 없었다. 입을 떼어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 글 속의 내용들은 이미 우리들 각자의 몸 속에 전염되어 그 뿌리를 그악스럭게 박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그 글 속의 내용들은 전연 우리들의 문제였다.
물론 우리는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을 훔쳐 읽었던 것이다. 미국에 오면서부터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사람이 바뀌어 버린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 식구들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환경이 바꿔 데서 오는 일시적인 조울증이겠거니 하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3년 세월이 흘러가기까지 처음과 똑같이 멍청한 얼굴로 무기력한 사람이었다. 꼭 넋 나간 사람이 그럴 것이다. 어머니는 한국에서 우리와 함께 익힌 그 몇 마디의 영어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네는 집안 식구들하고도 필요한 말만 했다. 자기의 의견을 내놓거나 남이 하는 일에 대개서 이렇다 저렇다 간섭을 하는 일도 없었다. 한국에서 그처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안간힘 하던 그네의 생활력은 거품처럼 꺼지고 그네는 빈 쌀자루처럼 휘주근하게 늘어져 버렸다. 우리 식구들은 그렇게 변해 버린 어머니를 향해 애원도 해 보았고 때로는 윽박질러 보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한결같이 멍청했다.
"아베 귀신이 붙은 거야."
중학교 다니는 막내가 엄마 문제에 대해서 한마디했다. 우리 식구들은 막내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아베에 대한 얘기는 누구의 입에서도 꺼내기 겁내는 하나의 터부처럼 돼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처음 이민 올 때 공항까지 마중 나온 고모마저도 아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이민 초청장을 보낼 때부터 아베의 얘기는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우리들은 어머니의 그 우울증이 아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입밖에 내기를 꺼렸다. 그러나 막내가 어머니한테 아베 귀신이 붙었다고 했을 때 우리들은 마음속이 찔끔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순간적인 것이었다. 추리들은 곧 머리를 저어 그 생각을 단연 부인했다. 아베 때문에 어머니가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기엔 우리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단 한번도 아베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아베가 숙명적으로 우리 집에 태어났을 뿐 우리와 한 형제라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아베는 우리에게 있어서 한 마리 쓸모 없는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 쓸모 없는 강아지 한 마리보다 더 귀찮고 역겨운 그런 존재였을 뿐이다. 나를 비롯해서 우리 남매들은 태어나 철 들면서부터 아베를 보고 살아왔다.
우리 어린 눈에도 그것은 더러운 짐승에 불과했다. 물론 아버지나 엄마는 우리들을 위해서 그 짐승이 살 수 있는 떼를 여러 군데 찾아다녔고 실제로 아베를 거기 집어넣기도 했었다. 정신박약아 수용소에서는 아예 아베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어쩌다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며칠 못 가 찾아가라는 통고가 왔다. 최소한 지능이 20은 넘어야 그곳 수용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개 그런 수용소는 만 6세부터 18세까지의 정신 박약아를 받아 수용 겸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어떤 데는 테스트를 해서 지능이 40이상은 돼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베는 지능이란 단어를 쓸 정도의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백치 중에도 가장 심한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을 떠날 때 이미 그는 26세의 나이를 주워먹고 있었던 것이다. 26세의 갖은 병신이 사지를 뒤틀어 가며 입을 벌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베"란 두 음절의 음성뿐이었다. 입을 어렵게 벌려 얼굴을 온통 우그러뜨리며 "아,,,아,,,아베"라고 소리내는 것이 그의 의사 표시의 전부였다, 그는 물론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몸의 균형이 불안전해 먼 곳까지 걸어가지도 못했다. 그는 죽으나 사나 방구석에만 박혀 지독한 냄새를 피우고 있었을 뿐이다.
아베로 인해서 우리 집은 저주받은 집처럼 항상 침침하고 휘휘했다. 내가 문제아로 낙인찍힌 것도 우리 집의 가난에서 온 것만은 아니었다. 아베가 있는 그 질식할 것 같은 집안 분위기 때문에 나는 매일매일 미쳐 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 형표들과 산에서 계집애를 벗긴 것도 아베에 대한 분노였다고 나는 구실을 찾아 가지고 있었다. 아베에게 정상적으로 발달돼 있는 것은 그의 성기였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여자만 보면 그것이 어머니고 누이동생이고를 막론하고 달라붙어 사타구니를 비벼댔다. 낮잠을 자는 정희의 몸에 달라붙은 아베를 직접 내 눈으로 보았을 때(정회는 그때 다섯 살이었다) 나는 이미 그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인간 이하의 아베를 한국에 버리고 왔다 해서 루리 식구들이 죄의식으로 괴로워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못 박아 생각해 왔다, 아무리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이라고 해도 아베 같은 동물로 해서 어머니가 그처럼 괴로워하고 정말 백치처럼 사람이 변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럴 즈음 정회가 어머니의 트렁크 밑바닥에서 그 노우트를 찾아낸 것이다. 우리는 숨을 죽이며 그 노우트를 읽어 나갔다.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황황히 그 노우트를 덮어 버렸다.
우리가 알아낸 비밀은 아베가 적어도 우리 아버지의 피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머니의 먼저 남편의 씨가 아베였던 것이다. 가봉자, 이 놀라운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면 아베를 한국에 버리고 온 우리들의 죄의식이 다소 가벼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반대였다. 정회와 나는 그. 사실을 안 순간부터 진정 아베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혜이, 지노 킴!"
내가 무척 느리게 걸었던 모양이다. 시가지에 이르기도 전에 토미가 따라붙었던 것이다. 나는 그와 약속을 했었다. 첫 외출 시 서울 나들이를 함께 할 것을 신병 훈련소에서부터 약속했다. 지난 밤에도 사병 클럽에서 그는 그것을 일깨웠다. 오우케이, 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토미 몰래 영내를 빠져 나왔던 것이다. 공연히 그런 심사가 나를 충동질했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그들에게서 받은 수모에 대한 앙갚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토미는 내 친구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스물 하나에 몸집이나 키는 나의 거의 두 배에 가까웠다. 그는 미국 사람치곤 정확한 영어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애틀랜타 출신으로 하바드 대학 재학 중에 한국 지원 입대를 했다. 미국 밑바닥 인생이 기어드는 데가 한국 지원병인 전례와는 달리 그는 내가 아는 한 뭔가 얻으러 한국에 온 게 분명했다.
내가 미국에서 4년간 겪은 미국인은 대개 두 가지 유형이었다. 하나는 상류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전형적인 미국인으로서 가히 초강대국의 국민다운 풍모를 갖춘 청교도 풍의 도덕적으로 거의 완전 무결해 뵈는 사람들이었고, 그 반대는 우리에게 대체로 짚이는 그런 자유분망하면서 반도덕적인 면을 다분히 갖춘 사람들이었다. 후자의 인간들은 그 어떤 한국인보다 철저하게 파렴치하고 난폭했다. 토미는 전자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유색인종에 대해서 아무런 편견을 가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바로 그네들의 우월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걸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는 처음부터 내게 호의를 보여 줬다. 자기가 가는 한국에 관해서 많은 걸 알고 싶어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미국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알고 있더라도 그 내용이 터무니없는 것이기 일쑤였다. 토미만 해도 나를 만났을 때, 헤이 차이니즈라고 불렀다. 얼굴이 넓적한 동양인은 다 차이니즈였다. 그들은 고집스럽게도 미국 속의 한국인을 잘 인정해 주려 들지 않았다. 한국 문화와 중국 문화를 같은 것으로 보려 했다. 토미는 내가 써 보이는 한글에 흥미가 없었고 유독 그 어려운 상형 문자인 한문 글자에 호기심을 보였다.
더 분통이 터지는 것은 일본에 대한 그들의 동경이었다. 대부분의 지아이들은 일본에 휴가를 나가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는 게 꿈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중국과 일본의 일부로서 전제를 삼았다. 미국 사람을 만나 한국을 얘기하면 국력이 어떤 것인가를 실감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코리아, 아름다운 미인의 나라."
토미는 내게 우정의 표시로 한국을 아름답게 얘기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 자기 집 정원사였던 흑인 영감을 통해서 얻은 생각이었다. 아마 그 흑인은 한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 참전했던 용사였던 모양이다. 그 늙은이의 입을 통해서 묘사된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 늙은이가 만년에 외로움을 느끼면서 왕년의 그 한국전 참전 시절이 마치 영웅의 그것처럼 회상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니라. 그러나 추억이 결코 아름답지 못한 사람도 많다. 바로 어머니의 과거가 그런 것이다. 어머니를 범한 그들에게 있어서 한국은 아름다운 여인의 나라일 수도 있겠지, 나는 길바닥에 침을 뱉었다.
"혜이, 킴, 우리 서울에 가는 거지?"
그들 꺽다리들 속에서 그렇게도 똑똑하고 의연해 보이던 토미가 막상 한국 땅 한국 사람들 틈에 끼이자 그렇게 얼뜨기처럼 보일 수가 없었다.
"토미, 나 오늘 서울 가는 게 아니다. 나 다른 약속이 있다."
토미는 어린애처럼 시무룩해졌다. 무척 실망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했다
"토미, 내가 서울 가는 버스에 널 태워 주겠다."
토미는 즐거운 얼굴을 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얼굴 가득 넘쳐 보였다.
우리들은 시외버스 정류장에 와 있었다. 서울과는 정반대의 시골이 종점인 구형 버스가 텅텅텅 발동을 건 채 출발을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매표소로 뛰어가 그 시골 행 표를 끊었다.
"토미, 저거 서울 가는 차다. 여기 표가 있다. 내가 너를 위해 끊었다."
토미가 댕뀨를 연발하며 그 커다란 덩치를 그 시골 행 버스 속에 집어넣자 나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혜이, 토미,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재미 많이 보거라!"
버스는 만원이었다. 땀 냄새 나는 시골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박힌 그 낮고 헌 시골 만원 버스 속에서 키가 큰 토미가 상체를 숙인 채 끼여 서 있는 게 보였다. 토미에게 준 내 우정이었던 것이다. 지열이 훅훅 끼쳐드는 더위였다.
서울행 버스 매표소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그 줄 맨 끝에 붙어 섰다. 바로 내 앞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비취 백을 들고 서 있다가 뒤에 바싹 붙어서는 나를 힐끗 쳐다봤다. 한눈에 잘 생긴 얼굴이었다. 얼굴에서부터 몸매까지 동양적인 그런 미를 갖추고 있었다. 선이 부드럽고 피부 또한 깨끗했다.
"여기가 서울 가는 버스 표 끊는 뎁니까?"
나는 짐짓 영어식 억양으로 말했다. 여자가 다시 한번 나를 돌아다보았다. 약간 경계의 빛을 보이는 그 눈이 맑았다. 나는 그네의 가슴 위에 꽂힌 여자 대학 배지를 보았다. 그네는 내가 입은 체크 무의 요란한 남방과 피엑스에서 사 신은 코가 뭉퉁한 구두를 내려다보며 얼마간 신기해하는 눈빛을 했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피엑스에서 바꾼 고액권 화폐 뭉치 중에서 두 장을 빼어 그네 앞에 내밀었다. 그네가 옆으로 한 발짝 비켜서며 얼굴을 붉혔다.
"나 어렸을 때 한국 떠나 모르는 거 많습니다, 아가씨, 도와주십시오. 이 돈으로 아가씨 표까지 끊을 수 있는지 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만 원 짜리 두 장 중에서 한 장만 뽑아들면서 말했다.
"저기 저쪽에 있는 빈 차 옆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외양과는 달리 목소리는 퍽 투박스러웠다. 나는 굽실거리며 그네가 가리킨 버스 옆으로 다가갔다. 나는 침을 삼켰다. 나는 이씨 가게의 점원이 아니라 이제는 한국을 도우러 온 지아이다.
"표 여기 있어요. 제 껀 제 돈으로 끊었어요."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잔돈과 함에 표를 내밀었다. 표를 받아들면서 나는 문득 이씨의 딸을 생각했다. 그 여자도 이렇게 새침데기였다. 열 살 때 미국에 왔다는 그네는 늙어 죽을 때까지 미국 생활에 동화되지 못할 그런 타입이었다. 그네는 바깥 출입을 일체 하지 않았다. 원인은 그네의 소아마비에 걸린 다리 때문이었다. 이씨 말로는 그 딸의 소아마비를 고치기 위해 미국에 왔다고 했다. 실상 돈도 많이 없앤 모양이었지만 여전히 잴금잴금 걸었다. 우습게도 이씨는 나를 자기 딸에게 접근시키려고 했다. 툭하면 자기네 아파트에 심부름을 시켰다. 내가 찾아갈 때마다 그네는 돈벌이로 하는 구슬 꿰기를 하고 있었다. 지루하지도 않아요? 내가 동정하는 투로 물을 때마다 그네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지루해요. 나는 그네의 빈약한 젖가슴을 훔쳐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쓸쓸한 바람이 가슴으로 불었다. 미국에서 내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네의 빈약한 젖가슴이었다. 나는 그네에게서 고국을 떠나 사는 사람들의 좌절과 그 깊은 절망의 하소연을 듣는 듯했다.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아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 나오곤 했다.
"제가 창문 곁에 좀 앉았으면 좋겠어요."
버스에 먼저 올라 좌석 번호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아까 그네가 제 표를 내보이며 옆에 서 있었다.
"아, 좋습니다. "
나는 황급히 일어나 그네가 창문 곁으로 앉도록 도와준 다음 그네에게 몸이 닿지 않도록 떨어져 앉았다. 나는 여행 가방에서 껌 한 통을 꺼내 그네에게 내밀었다. 그네가 살짝 웃입술을 움직여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대학에 다니십니까? "
나는 짐짓 그네의 불룩한 젖가슴께를 더듬어보며 말했다. 그네가 대답 대신 껌을 뜯어 내게 한 개를 내밀었다.
"영어 잘 하십니까?"
나는 우정 내 한국 발음을 서툴게 하며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네의 얼굴이 금세 발갛게 물들며 겨우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전연,,,,,,"
"방학중이십니까?"
"아직,,,,,, 여기 이모네 산장에 잠깐 들렀다 갈 일이 있어서 다녀가는 길이에요."
"아, 집이 서울에 있습니까?"
"네, 서울 가회동."
"가회동 - 나도 잘 압니다. 우리 고모님 거기 오래 사셨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입에 침 한번 바르는 일 얼이 잘 해냈다. 고모는 가회동에 살지 않았다. 우리에게 고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얼굴 화장이 야하고 몸치장 또한 요란한 여자 하나가 우리가 살고 있는 빈민촌에 나타났다. 아버지가 그 여자를 보자, 순자야! 외마디 소리를 쳤다. 오빠! 17년만에 처음 만나는 나이든 오뉘의 극적인 장면은 그야말로 울음 바다였다. 울고 웃고 서로 더듬어 그 실체를 확인하면서 이 세상에 단둘만 남겨졌던 6, 25때의 비극 한 토막이 연극처럼 펼쳐졌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 남매들은 그 여자의 천해 뵈는 얼굴과 아버지의 어른답지 못한 그 울음소리 때문에 몹시 낭패스러웠다.
그때 아베 나이 스물 둘이었다. 그 성년의 숫놈이 고모의 허리에 매달려 껍적껍적 이상한 짓거리를 했던 것이다. 고모가 기겁을 하면서 아베를 밀어 던졌다. 우리들은 깔깔거려 웃었다. 진구가 아베의 목에 줄을 걸어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 아--- 아베--- 아베가 진구한테 매를 맞고 있었다. 어머니가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저것이 내 맏이일세. 아버지가 아베가 들어간 방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고모한테 말했다.
어떻든 고모는 우리 집에 자주 나타났다. 그 귀한 미제 물건과 과자가 우리 집 구석구석 나돌았다. 그네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남편 셋을 바꿨다. 흰둥이 하나와 검둥이 둘, 그러나 국제 결혼을 해서 함께 미국으로 들어간 것은 나이가 많은 흑인 싸진이었다. 그 흑인은 한국을 떠나기 전 우리 집에도 서너 번 왔었다. 고모를 끔찍이 위했다. 얘가 글쎄, 미국 가서 죽을 때까지 함께 살겠다잖아, 고모는 그 흑인을 얘라고 했다. 그 흑인이 올 때마다 엄마는 방안에 들어박히거나 이웃으로 도망을 치는 등 허둥거렸다. 아베 역시 깜둥이를 무서워해 아예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신 지 오래 되셨나요? "
옆에 앉은 여자가 물어왔다. 버스가 미군 부대 옆 아스팔트 위를 달리고 있었다.
"누구 말입니까? 우리 고모님?"
그네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 나, 진호 킴, 킴진호입니다. 한국에서 아홉 살 때 미국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말이 퍽 유창하시네요."
그네는 대담하게 나를 맞바로 훑어보며 말했다.
"나 미국에서 한국어 공부 계속했습니다. 한인학교에서 1등 했습니다."
그네는 눈을 동그랗게 해 가지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 하바드 대학 재학 중에 한국에 나오기 위해 휴학했습니다.
"어머, 그러세요? 거기서 뭐 전공하셨는데요?"
"한국 여성학."
"어머, 농담."
"장난 말 아닙니다. 나 전공하는 내륙 아시아 문제 중에는 한국 여성에 관한 부분도 있습니다. 아가씨처럼 비유티플한 동양 미인,,,,,,"
"놀리시는군요."
그네는 얼굴 전체를 붉게 물들여 수줍게 웃은 다음 다시 시선을 주며 말했다.
"한국에 오래 계실 건가요 ?1년 2년,,,,,,?"
"1년 기한입니다. 그러나 내가 찾는 사람 만나지 못하면 더 연장합니다. 나 그 사람 꼭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꼭 찾아 만나야 할 분이 누구신데요?"
그네가 다시 얼굴을 살짝 붉히며 물어왔다.
"글쎄요, 알아맞혀 보십시오. 미스,,,,,, ?"
"미스 박이에요. "
"미스 박, 내가 찾고 있는 사람 알고 싶습니까?"
"네, 알고 싶어요."
"알아맞혀 보십시오."
그네는 손가락을 입에 대고 고개를 갸웃한 채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혹시 유치원 때 짝궁이 아닐까요? 여자 짝궁 말이에요."
그네는 거침없이 웃으면서 내게 접근했다. 가짜 하바드 대학생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가슴은 허망했다.
"아닙니다. 나 유치원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때 우리 집 매우 가난했습니다."
가난했다. 아버지가 무능했던 것이다. 속셔츠 하나 제대로 입지 못하고 그 추운 겨울을 지냈다. 아베, 아베가 우리 집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우리 남매들은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 우리들은 아베의 밥을 빼앗아 버렸다, 물도 먹이지 않았다. 아베의 목에 줄을 매어 문고리에 잡아매었다. 아베는 그 목걸이를 풀어낼 능력도 갖추지 못한 저능아였다
"그럼, 국민학교 1학년 때 짝궁?"
“국민학교 1학년 개 내 짝궁은 죽었습니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었습니다. 구슬을 예쁘게 잘 꿰었습니다. 늘 고향에 가고 싶다고 울던 아이였습니다,"
이씨의 딸은 내가 고국으로 나가게 됐다고 했을 때 그 핏기 없는 얼굴이 온통 붉게 상기됐다, 그네가 꿰던 구슬은 바닥에 흩어져 굴렀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네가 마주 잡았다. 손이 뜨거웠다. 나는 그네의 볼에 처음으로 입을 댔다. 그네가 떨고 있었다. 나는 쫓기듯 그네 곁을 떠났다.
"참 시원하네요."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나기였다. 빗속에 시골 풍경이 서서히 지나갔다. 빗발이 세지면서 운전대 앞 윈도우 브러시가 급하게 빗발을 씻어 내리고 있었다. 통풍을 위한 버스 천장의 뚜껑에서 빗물이 흘러내렸다. 그 여름 물난리 때 나는 아베를 처치할 계획이었다. 하루 내내 계속된 폭우에 제방 둑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둑 밑의 사람들이 높은 지대로 대피를 하느라 수라장을 이루었다. 우리 집도 짐을 싸 가지고 근처 국민학교로 옮겼다.
아베만 남겨 놓고 갔다. 어머니를 속였던 것이다. 마지막 짐을 가지고 간 내가 어머니한테 말했다. 아베가 없어졌어요.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가 허둥허둥 그리로 달려갔고 얼마 후에 그네들은 당황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베가 없구나, 모두 나가서 다시 찾아보자. 아버지가 말했다. 비는 더욱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제방이 뚫렸대요.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나는 혼자 웃었다. 미리 떠나버린 남의 집 빈 구석방에 아베를 가둬 놓고 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밤새도록 밖에서 비를 맞으며 아베를 기다렸다. 나는 교실 마룻바닥에 누워 눈을 지레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어머니한테 내가 한 짓을 말해 버렸다. 그리로 달려가는 어머니를 아버지가 붙들고 늘어졌다.
다음날 날이 개었다. 우리 식구들은 새벽같이 우리들이 살던 동네로 달려갔다. 우리 동네의 토담집들은 흔적도 없이 물에 쓸려가 버렸다. 어머니가 그 개울 바닥이 된 집터 위를 허둥허둥 뛰어다녔다. 아베의 흔적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 우리들은 언덕 위에 있는 파출소에서 아베를 찾았다. 아--- 아--- 베,,, 그는 어머니 품에 안겨 킁킁거렸다. 아베의 나이 스물 한 살 때였다. 천덕꾸러기가 명은 길대요. 이웃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미스타 김이 찾고 계시는 분이 남자예요, 여자예요?"
소나기가 지나가면서 다시 햇볕이 유리창으로 비껴 들었다. 미스 박이 창에 커튼을 펴면서 물었다. 남자예요, 여자예요?
"글쎄요, 그것부터 맞혀 보십시오."
그네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웃었다.
"숙젭니다. 다음 주 토요일 서울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어머 어머 ,,,,,,"
그네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면서 마치 내 등이라도 때릴 것처럼 손을 들어올렸다 놓았다. 나는 머리 속에서 그네와의 정사를 그려보았다. 그네의 벌거벗은 몸뚱이가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벌거벗은 계집애 그것은 정회였던 것이다.
"정말 다음 주에 또 서울 나오시는 거예요?"
그네가 스스럼없이 웃어 보이며 물었다. 버스가 서울 변두리 고개를 넘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미스 박을 만나기 위해 또 나옵니다."
"계가 오늘 커피 사 드리겠어요. 고국에 오신 기념으로요."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고개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 도심의 매연 자욱한 하늘이 내게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을 안겨 주었다. 영내를 빠져 나올 때의 그 어깨 우쭐함이 버스 속 미스 박과의 허황된 대화를 통해 여지없이 박살난 사실을 나는 깨닫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 몸뚱이가 꺽다리들 겨드랑이에 겨우 미치는 그런 단신이란 열패감이 가슴으로 밀러왔다.
재두, 형표, 석필이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문득 내 옆에 앉은 여자 앞에 내 팔뚝을 내보였다. 길다란 칼자국 그 꼭대기로 움푹 들어간 두 개의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이담에 만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놀란 그네를 향해 내가 말했다. 버스가 종점에 닿고 있었다. 그네는 서둘러 수첩을 쪘어낸 다음 거기다가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내게 건넸다. 나는 그 메모쪽지를 받아 넣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버스에서 내리자 인파 속으로 섞여들었다.
4년 전과 다름없이 우리가 살던 산동네로 가는 노선의 시내 버스는 초만원이었다, 나는 그 만원 버스 속에 땀내 나는 사람들과 살을 비비고 서서 비로소 내가 한국 땅에 다시 돌아왔다는 감회에 젖을 수 있었다.
큰 건물이 몇 개 더 들어섰을 뿐 산동네의 길은 여전히 좁았고 산비탈의 집들은 다닥다닥 처마를 맞댄 채 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4년 전보다도 TV안테나가 훨씬 더 많이 눈에 띄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시장 통을 급히 걸었다. 아는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극장 옆에 못 보던 여관 하나가 제법 반듯한 규모로 서 있고 그 앞에 관광 표지판이 하나 서 있었다. 산동네 뒷산 사찰 이름들이 크게 씌어 있었다. 천수 약수터란 데도 나타나 있었다. 몇 년 전 형표들과 어울려 놀던 그 뒷산 우리들의 터가 이제는 관광지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여관은 창문마다 모기장이 쳐 있었으며 선풍기까지 내다 주는 등 손님을 반기는 품이 손님이 꽤나 없는 모양이었다. 열 일곱 그때 내 나이쯤 돼 보이는 남자애가 숙박계를 가져왔다. 나는 거기다가 내 부대 이름을 영어로 갈겨 댔다. 이름만은 한글로 썼다. 김진호.
"이게 뭐예요?"
여관 보이는 내가 갈겨 쓴 영어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숨은 간첩 신고하여 광명 주고 상금 타자- 그런 표어가 여관 숙박 요금표 옆에 붙어 있었다.
"임마, 나 간첩이 아니니까 안심해!"
나는 그에게 천 원 짜리 다섯 장을 주었다.
"너. 내 심부름 좀 해 줄래?"
놈은 몹시 수줍어하며 내가 시키는 대로 농이 쪽을 가져왔다. 나는 그 종이 위에다가 재두, 헝표, 석필이네 집의 약도를 차례로 그리며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집에 업으면 들어온 다음에 이리로 오라고 전해 놓고 오는 거야. 여기 이 두 집은 셋방살이하는 집이니까 아마 이사갔을는지도 모른다. 가능하면 그 이사간 데까지 알아 오는 거야. 너 돈 더 필요해?"
"아, 아니에요!"
놈은 두 손을 휘저어 대며 물러갔다. 그가 물러가고 십 분쯤 후에 나는 여러 사내에게 둘러싸였다, 그 여관 간이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내 방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 그들이 나를 에워쌌다. 사복 차림의 사내들 뒤에 경찰 정복을 입은 사람도 셋이나 보였다. 내 방까지 끌려가 그들에게 신분증을. 껴내 보였다. 어쩐 일인지 나는 하나도 불쾌하리 않았다.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요즘 서울에 강력범이 여럿 생겨서 비상이 내려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 중에는 내가 아는 얼굴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표들과 함께 드나들던 그 낯익은 경찰서 유치장이 떠올랐다. 나는 그들에게 가방에서 꺼낸 윈스턴 한 케이스를 내밀었다. 그들은 물러갔다. 여관 주인과 먼저의 그 사내애가 내 앞에 오천 원을 그대로 내놓았다.
"임마, 넣어 둬, 네가 잘못한 게 아냐!"
나는 점잖게 한 마디 했다.
"아저씨, 제가 그 사람들 꼭 찾아서 이리 데리고 오겠어요."
사내애가 아직 얼굴을 잘 들지 못한 채 말했다. 오우케이.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켠 다음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천장의 무늬를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래,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벌써부터 생각해 왔다. 폐인이 돼 버린 어머니를 위해서, 그 빈약한 젖가슴을 바라보면 가슴이 쓸쓸해지는 이씨 딸을 위해서, 나는 그네들이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뭔가 그들을 싱싱하게 소생시켜 놓을 그런 김이 내 몸 속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르길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그러나 번번이 내 자신이 그네들 이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국이란 커다란 괴물체 속에서 나는 결코 창조적 삶을 꾸려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좌절감이 내 몸 속에 암처럼 번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열 여덟 나이로 이민을 가 처음 부딪친 언어의 장벽을 뚫지 못한 나의 심한 컴플렉스에 기인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그쪽 생활에 젖어들려 노력했다. 직업의 귀천 없이 자기가 일한 만큼의 급료를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미국 사회 구조에 매혹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은 가히 유토피아였다.
한국에 나오기 위해 군대에 들어가기 전 나는 주유소 펌프맨, 그리고 세차장의 호스맨, 흑은 교포들이 경영하는 생선가게나 청과점에서 일했다. 한국에서 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나와 함께 일했다. 이씨만 해도 한국에서 대학 강단에 섰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현재 자기의 삶의 방식을 다 을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질의 가치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기의 삶이 그 어떤 커다란 것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것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비창조적인 미국식 서민 생활에 혐오감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를 끌고 한인 교회에 나가 봤다. 물론 그들은 거기서 마룻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그렇게 그들은 구원받고 있었다. 아니다. 구원받는 게 아니라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목사가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어머니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내용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 교회 식구가 돼 준 데 대한 환영 일색의 내용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끌려 다섯 주일쯤 교회에 나갔을 뿐이다. 아무 것도 어머니를 구원할 수 없었다.
"얘들아, 오늘은 모두 교회에 나가자."
아버지가 말했다. 한국에서 아버지는 교인이 아니었다. 우리 식구 중에서 미국 생활에 제일 빨리 적응된 것은 정회와 아버지였다. 미국에 오면서 아버지는 백 팔십 도로 사람이 달라졌다, 미국의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잘 맞았다.
어머니가 한국에서의 그 강인한 생활력을 잃고 폐인이 돼 버린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아버지는 싱싱하게 부풀어을랐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전형적인 실업자였다. 아버지에게 맞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체질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한국적 체질이 아니었다. 물론 아버지는 인텔리였다. 6.25가 났을 때 대학 재학 중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무기력하고 얼띤 것 같은 생활 태도가 바로 배운 사람의 그 사변(思辨)적 집념에 기인한다고 생각해 왔다, 아버지는 많은 직장을 가졌지만 단 몇 달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당신 스스로는 자식들을 위해서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뎌 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번번이 헛일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집에 들어박혔다. 그때부터 가난하고 좁은 우리 집의 공간은 숨통이 막힌다. 아버지의 커다란 체구가 좁은 방안을 가득 채우고 누워 있으면 그 옆에 아베가 입을 벌려 더러 운 냄새를 뿜어내며 잠들어 있었다. 아베는 어머니만큼 아버지를 좋아했다. 아버지가 아베를 위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가끔 서른이 가까워 오는 아베와 함께 어린아이처럼 놀았다.
우리 집엔 병신이 둘이다. 나는 내 친구들한테 서슴없이 말하곤 했다. 아버지는 가끔 남들처럼 막벌이를 하기 위해서 노동판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커다란 체구와 도수 높은 안경을 쓴 그 허여멀건 얼굴은 아버지가 하는 일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일을 시키던 사람들이 아예 아버지를 도외시하거나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보험 회사 수금원으로 뛰면서 집안 살림까지 해 나가는 어머니가 그러한 아버지를 아예 노동판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 고모한테서 이민 초청장과 그것을 확인하는 재정 보증서가 왔을 때부터였다.
"갑시다!"
밖에서 돌아온 어머니한테 이민 초청장을 내보이며 아버지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민이 거의 확실히 결정될 무렵 아버지는 영어 회화를 배우는 틈틈이 청계천에 있는 용접 학원에서 속성으로 용접 기술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남이 좋다고 하는 것은 다 배우려고 했다. 태권도 도장까지 찾아가 호신에 필요한 훈련을 받기도 했다. 오십이 가까운 아버지가 태권도 도장에서 돌아와 몸을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고 끙끙거리는 것을 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한국에서 운전 기술까지 익히려고 했다.
이처럼 아버지는 아이들보다 더 들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흥분에 걸맞게 미국은 아버지를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어떤 종합병원의 청소부로 일했다. 하나도 어색해 뵈거나 천하지 않았다. 아버지 본인도 만족하고 있었다. 주당 백 삼십 불을 받아다가 어머니 손에 쥐어 주면서 자기 손으로 돈을 벌었다는 데 대해서 무척 기꺼워하는 얼굴이었다. 얼마 후에는 그 병원의 야간 경비까지 맡아 하는 등 하루 16시간을 근무했다. 얼굴이 다소 야위긴 했어도 아버지는 우리들 눈에 싱싱해 보였다.
문제는 어머니였다.
"오빠, 올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킵시다."
고모가 가끔 찾아와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때는 아예 들은 척도 안 했다. 처음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의 그 멍청한 증세에 대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선 부부가 함께 벌어야 살아요."
고모가 어머니의 귀를 겨냥하고 면박조로 말했다. 고모는 그 늙은 흑인과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어떤 교포와 함께 가발 가게를 열고 있었다
"내가 벌고 진호가 벌고,,,,,,이 정도면 우리 식구 잘 살 수 있어."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둔하고 나섰다.
"올케가 한국에서는 안 그랬는데 왜 저렇게 됐대요?"
"세월이 가야 낫는 병이다."
아버지가 가볍게 대답하고 자리를 퍼했다. 어머니는 창가에 붙어 서서 끝 닿는 데 없는 하늘 저쪽에 시선을 목 학은 채 멍청히 서 있었다.
"얘들아, 엄마 잘 살려라."
아버지는 일 나갈 때마다 우리에게 어머니를 잘 살피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문득 생각날 때마다 자살 방조자가 되지 않기 위해 허둥허둥 어머니의 소재를 확인하곤 했다. 어머니는 대체로 아파트 속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게 보통이었다. 가끔 아파트 아래 벤치에 앉아 그 흔해 빠진 늙은이들의 추접스런 몰골을 멀거니 바라보기도 했다. 늙은이들이 아직은 중년으로 얼굴과 몸매가 고운 어머니한테 추근추근 접근해 오기도 했다. 그런 때마다 어머니는 뿌르르 몸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머니에게 또 한 가지 유별나게 드러나는 점은 눈물이었다. 우리들은 자라면서 어머니가 우는 것을 단 한번도 뭇 보았다. 내가 아베를 빈 집 속에 가둬 놓고 말하지 않았을 때도 밤새도록 밖에서 비를 맞으며 기다리면서도 결코 울지 않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미국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울기 시작했다. 고모에게 달라붙어 울음을 떠뜨렸다
"챙피해요. 미국 사람들은 소리내어 울지 않아요."
조모가 어머니를 핀잔주었다.
"울게 내버려두렴 ."
아버지가 말했다.
"울면 버릇이 돼요."
끝내 고모는 어머니의 울음을 용납하지 않을 기세로 나왔다.
"엄마, 울지 마. 청승맞아 못 보겠다 "
정회마저 고모와 함께 어머니를 핀잔주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소리내어 울지 않았다. 그러나 소리내어 울지 않는 대신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당신 너무하는군."
어느 날 아버지마저도 어머니한테 그렇게 말했다.
"엄마, 그 눈물 좀 작작 흘려요. 정말 미치겠네."
"엄마, 우린 자식이 아냐?"
평소 말이 없는 진구마저도 어머니의 눈물을 용서하려 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들 중 하나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그랬다. 모처럼 밖에서 좋은 일이 챙겨 희희낙락 돌아왔어도 어머니 때문에 우리들은 금세 우울해졌다. 아베, 아베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를 갈았다. 이를 갈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두고 온 고국을 생각했다. 폭우에 쓸려간 토담집 그 빈터도 보였고 만원 버스에서 내려 허덕허덕 숨가쁘게 오르던 산동네도 보였다. 가슴이 삭막하게 조여든다.
"누나, 한국에 가고 싶지."
막내가 정회한테 물었다.
"얘, 웃기지 마,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난."
"그래도."
"넌 참 센치하구나, 얘, 우린 미국 시민이야. 너 엄마처럼 안되려면 정신 차려!"
정회가 막내를 쏘아붙이며 중고 천연색 TV의 채널을 후드득 돌렸다. 엄마가 어린 딸에게 경구 피임제 사용법을 일러주는 선정적 광고 뒤에 농도 짙은 러브시인이 펼쳐지고 있었나.
"아저씨, 잠 드셨어요?"
밖이 어두워 있었다. 여관 심부름하는 사내애가 방에 전등을 넣으며 말했다.
"이 사람 있잖아요, 재두란 이 사람은 벌써 오래 전에 이사갔구요. 형표란 분은 거기 그대로 살긴 하는데 작년에 군대에 갔대요."
"용 석필 이 사람은?"
"아참, 이 사람은 바로 그 아랫동네로 이사갔대요. 그래서 내가 찾아갔거든요. 그랬더니 경찰서 나가서 아직 안 들어왔대요."
"경찰서?"
"그게 아니구요. 보충역이에요. 군대 때우는 방위병으로 거기 나가서 근무한대요. 들어오는 대로 이리로 오라고 해 놨어요,"
나는 비로소 4년 세월이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는 걸 실감했다. 심부름 갔다가 온 녀석은 제 소임을 다 마친 즐거움으로 문 앞에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4년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야, 수고했다. 나 뭐 적당한 걸로 저녁 좀 시켜 줘라, 네 거까지 함께 시켜."
"뭐 잡수시겠어요? 한식, 일식 ,,,,,, 중국집도 있어요."
"라면도 파는 데 있냐?"
"네에? 라면을 잡숴요?"
녀석이 하도 놀란 목소리를 내서 나는 그만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가 보험 수금을 다니느라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우리들은 영락없이 라면을 끓였다. 아베가 좋아하는 것도 라면이었다. 우리들은 아베의 몫은 아예 끓이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당신의 그릇에서 반쯤 덜어 아베에게 가져다 주었다.
"아저씨, 중국 집에서 잡채밥 시켜요. 아주 양두 많구요, 맛도 기차요."
"그래, 잡채밥 하나하고 짜장면 하나 시켜라, 난 짜장면이 좋다."
녀석이 열적게 뒤통수를 긁으며 문 앞에서 사라져갔다.
나는 부대에서 가지고 나온 여행용 작은 가방을 열었다. 그 밑바닥에서 반으로 접힌 대학 노우트를 꺼냈다. 미국을 떠날 때 정회도 모르게 가져온 어머니의 글이 적힌 노우트였다. 정회와 함께 펴본 뒤 처음으로 열어보는 노우트였다. 틈틈이 몰래 쓴 글이라 글체가 정연하지는 못했지만 글씨는 어머니의 숨은 학식을 드러내 보이게 달필이었다.
2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4뭘 최 창배씨와 결혼했다. 내 나이 21살, 여학교를 졸업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관계가 있었던 사립 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이모의 중매로 창배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창배씨는 가회동 이모네 집에 하숙을 하고 있는 대학생이었다. 이모네 집에 놀러간 나를 시골서 올라온 창배씨 부모들이 보고 이모한테 청을 넣어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그의 부모님께서 결혼을 서둔 것은 마음에 드는 며느리감을 놓치기 싫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어서 빨리 손자를 안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다. 창배씨는 4대 독자였던 것이다.
우리 집 오빠 역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동생을 시집 보내야 한다는 오빠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저쪽에서 하자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창배씨는 일방적으로 두 가지 조건을 내놓았다. 결혼과 함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시골 자기네 집에서 자기가 학교를 마치기까지 1년간 시집살이를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런 조건이 마땅한 것이긴 했지만 나는 뭔가 억울한 생각이 들어 늙으신 어머니한테 어쩌면 좋으냐고 앙탈을 부렸다. 얘야, 출가 외인이란다. 신랑 측 의견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백 번 마땅한 양가 규수의 도리라는 어머니 말씀에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정이 든 학교에 사표를 냈다. 함을 지고 온 창배씨의 서울 대학 친구들이 수십 명 우리 집 오빠며 친척들을 짓궂게 애를 먹였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번듯한 교복을 차려 입은 사위 친구들이 대견해서 연해 벙글벙글 밤이 늦도록까지 붙잡고 술대접을 하셨다. 결혼식은 서울서 올렸다. 천생 배필로 잘 만났구먼. 많은 하객들의 축하와 부러움의 눈길 속에 서울서 첫날을 보냈다.
"1년만,,,,,, "
창배씨는 다음날 고향 가는 차 속에서도 전날 담 한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1년만 참고 견뎌 달라는 얘기였다. 그때 내 심정은 1년이 아니라 몇 년이라도 지아비의 뜻이라면 따라야 마땅하다는 마음의 중심이 서 있었던 것이다. 대신 나는 남편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창배씨의 집은 춘천에서 강 하나를 건넌 삼사십 리 길의 샘골이라는 마을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들이 넓고 둘러친 산수 풍경이 아름다운 부촌이었다, 부면장을 지내시다 이제는 내놓고 농사일에만 전념하신다는 시아버님은 창배씨의 형이라고 해도 속을 만큼 젊어 보이고 풍신이 좋으셨다. 샘골 논밭의 삼분의 일은 시댁의 것이라고 할만큼 많은 농사를 짓고 계셨다. 독자 집안이라 가까운 친척이 거의 없는 시아버님께서는 그 많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남한테 인심을 잃은 일이 없어, 서울서 내려온 신랑 신부를 놓고 다시 잔치를 벌였을 때는 연 사나흘씩이나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축하해 주었다.
나는 백년 가약을 한 내 남편인 창배씨와 함께 꿈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남편은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되는 법학도였고 늙지 않으신 시부모님 또한 나를 끔찍이 위해 주셨다. 내가 살아야 할 샘골의 공기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인심 또한 비단결처럼 고왔기 때문에 나는 별 괴로움 없이 남편을 떠나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창배씨는 서울로 돌아갔다. 졸업 전에 고등 고시에 합격하겠다는 결심으로 떠났고, 시부모님 역시 여름 방학 전에는 일체 집에 내려와서는 안 된다는 엄한 말씀을 해서 보냈다. 마는 그 동안 시부모님 모시고 시댁의 가풍과 법도를 익혀 좋은 아내 착한 며느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서울 어머니와, 오빠네 식구들. 그리고 내가 가르치던 어린 눈들에 대한 그리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려 노력을 했다.
이십 칸 커다란 집에 시부모님과 나, 이렇게 셋이 오롯이 모여 앉아 살았다. 행랑채에는 집 안팎살림을 거들어 주는 심 서방 내외가 애기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그들 내외는 모두 심성이 착한 사람으로 보여 한집에 살기 거북한 일이 없이 무척 임의로웠다.
시어머님께서는 내가 부엌일을 하는 것을 극구 말리셨다.
"너를 여기 둔 것은 네가 한 밥을 얻어먹자고 그런 것이 아니다."
시어머님은 시아버님보다 두 살 위인 마흔 아홉이셨는데 꼭 새댁처럼 젊으셨다. 동백 기름으로 그 검은 머리를 곱게 빗고 옷을 단정히 차려 입고 나서시는 것을 보면 누가 보아도 삽십 안팎이었다. 외아들을 키운 이답지 않게 마음이 넓고 활달하였다.
시아버님은 일본까지 가 공부한 이답지 않게 농사일이 몸에 배어 일꾼들과 함께 직접 논밭에 드셨다. 어-누구보다 부지런하고 힘 또한 좋으셨다.
"어르신네, 이것 좀 거들어 주셔야겠어유."
봉당 아래 댓돌을 다른 것으로 바꿔 놓느라 끙끙거리던 심 서방이 시아버지를 불렀다.
"예끼, 이 사람, 그렇게 말해두 자꾸 어르신네가 뭔가. 나 자네 아저씰 세 아저씨야."
그러시면서 그 무거운 댓돌을 번쩍 들어 올리시곤 했다. 모 심는 데 점심을 내가도 일꾼들과 함께 어울려 잡수셨다.
나는 새벽마다 늦잠을 자 그 송구스러움이 말못할 지경이었다. 철이 봄인지라 그러지 않아도 되었는데 시아버님은 새벽같이 일어나 내가 자는 방에 군불을 꼭 지피셨다. 방에 누기가 차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새벽녘 방바닥의 따스한 온기에 취해 그만 늦잠을 자곤 했던 것이다. 일어나 보면 어느덧 창에 햇빛이 비쳐들어 나는 겸연쩍고 부끄러워 방 문고리를 잡고 머뭇거려야 했다, 그러나 시아버님은 이미 밖에 나가시고 내가 일어난 낌새를 차린 시어머님께서 내 방에 대고 말씀하셨다.
"얘, 악아, 나 저 웃말 좀 다녀오마."
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시어머님은 대문을 나서고 계셨다. 부엌에 나가 보면 내 몫의 밥상이 차러져 보자기에 덮여 있었다. 행랑채 강릉 집이 친구가 돼 주어 아침을 함께 먹으면서도 나는 하루 내내 겸연쩍었다.
"아씨, 오늘 우리 나물 뜯으러 갈려우?"
철이 좀 늦긴 했어도 뒷산 범 바위 골에는 수리취, 어아리, 더덕, 고사리, 고비가 지천이었다. 산 이슬에 장딴지까지 적셔 가며 그 깨끗한 산나물을 뜯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낮이 다 돼서 그런가 나는 속이 이상하게 허하면서 메슥거렸다. 잔대 싹을 뜯어 씹어 보았다. 향긋하고 고소한 맛이 그 날 따라 역했다. 나는 심한 헛구역질을 했다.
"아이구, 아씨, 언제부터 그렇대유?"
강릉 댁이 눈을 크게 뜨고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이런 헛구역질을 해왔다.
강릉 집은 내 얘기를 듣자 나물 뜯었던 다래끼를 집어던지고 산 아래로 내리뛰었다. 나는 산 속에 혼자 남겨진 채 얼굴을 붉힌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시어머님은 행랑채 세 살 먹은 화순이를 당신의 손자처럼 안방에 데려다 길렀다. 그러면서 늘 내 눈치를 살피시는 품이 애기가 섰는가를 알아보려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손이 귀한 집에 시집와 자손을 낳지 못하는 죄만큼 더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시어머님께서는 서낭당 있는 데까지 마중을 나와 나물다래끼를 받아 안으시며 내 손을 잡아 주셨다.
"손이 차구나, 악아, 넌 이제 홀몸이 아니다. 몸을 조심해야 하느니라."
앞서 걷는 시어머님의 걸음이 무척 허둥거렸다. 당신이 애기를 배었을 때는 나들이는 물론이고 물동이 한번 여 본 일이 없었다고 하시면서 이제 너는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당부를 수없이 하시면서 허둥지둥 걷고 계셨다. 대문을 들어서니 마당에 서 계시던 시아버님은 어흠어흠 헛기침을 하시며 뒤꼍으로 돌아가셨다. 다음날로 춘천에서 용하다는 한의가 다녀가고 시어머님이 광에 매달아 두었던 참숯으로 보약을 달이셨다. 나는 좋지 않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대문 밖 출입을 삼갔다. 창말에서 장사가 났는데 그 상여가 우리 집 앞길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시아버님께서는 미리 방책을 세워 그쪽에 연락을 하기도 했다. 시어머님은 내 입에 맞을 만한 과일이며 반찬에 무척 신경을 써 주셨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게 절절맨 것이 한두 턴이 아니었다.
나는 밤이면 몸을 반듯하게 누이고 그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운 마음이 울컥 물밀듯 밀려왔다. 당신의 아이를 갖게 줬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여름 방학 때까지 참고 견디겠어요. 나는 비로소 한 집안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내 몸 속에 키우고 친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두 손을 배 위에 가만히 얹고 새 생명에 대한 경건함으로 잠을 이를 수 없었다. 문득 내가 하나의 생명의 모체가 되었다는 이 신비한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가슴을 두근거리기도 했다. 모내기를 끝내고 애벌논 매기도 끝낸 논에서는 개구리가 극성스럽게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난리였다. 38선이 가까워 마을 아래 강변 큰길 따라 국방군 트럭이 태극기를 꽂고 지나다니는 것을 몇 번 보았지만 총소리 한번 들어보지 못한 채 난리를 맞았다. 자고 일어나 보니 세상이 바뀌었다. 생전 처음 보는 군대들이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머리를 박박 깎고 이제 솜털을 겨우 벗은 그런 열 여덟쯤 되어 보이게 애띤 젊은이들이 보기와는 달리 억센 억양으로 떠들어대면서 마을에 들이닥쳤다. 마을에서 들 얼굴을 맞대던 사람들 몇이 붉은 완장을 차고 역시 어제와는 딴판인 눈으로 사람들 얼굴을 훑으며 돌아다녔다.
창말에서는 면장 등과 지서 순경들 가족이 여릿 총살을 당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어르신네, 얼른 피하세유."
행랑채 화순이 아버지 심 서방이 시아버님한테 말했다. 심 서방도 붉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이 사람아, 내가 뭔 죄를 졌다구 피하나? 그래 자네가 날 잡아가겠나?"
"글쎄 어르신네, 그게 아니고 잠깐만 피하시면 ,,,,,, "
심 서방은 무척 난처한 기색으로 절절매었다. 시아버님은 꿈쩍도 안하셨다. 그러다가 결국 끌려가셨다. 창말 면소재지에 생긴 내무서 사람들이 찾아와 시아버님을 끌고간 것이다. 시아버님은 끌려가면서 나한테 말씀하셨다.
"악아, 나 곧 돌아올 것이니 네 시어머니 모시고 몸조심해야 한다."
시어머님도 나도 시아버님이 부면장을 지내셨다는 일과 논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설마 죄가 되겠느냔 생각으로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얘가 왜 안 오누?"
시어머님은 서울에서 난리를 맞은 아들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계셨다. 이미 서울도 인민군이 정복하고, 그들 말로는 남조선을 곧 부산까지 해방시킨다고 했다. 나는 남편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기를 바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서울에 두고 온 어머니나 오빠네 식구들 생각보다 남편의 신변이 더 걱정스러워지는 심사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매일매일 남편을 꿈속에 보았다. 남편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창말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땀을 흘리면서 잠을 깨곤 했다. 전신이 덜덜 떨리는 무서움이었다. 난리가 나 시아버님이 붙잡혀 갈 때도 못 느낀 무서움이 온 옴을 휩쓸었다. 나는 이래 가지고는 태아한테 좋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아먹으며 그 무서움을 참아냈다.
"마님 동무, 즈루서두 으쩔 수 웁구먼유."
이 댁의 광속에 쌓아 둔 곡식 가마를 들어내면서 심 서방이 말했다. 우리 식구를 행랑채로 내쫓고 자기들이 안채에 살라는 상부 지시를 어기고 있는 것만 해도 옛 정을 못 잊어 그런다면서 심 서방은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과 곡식 가마를 달구지에 싣고 있었다.
"되련님 오시면 즉시 신고를 하시래유. 그래야 죄를 즉게 받는대유.
강릉 집이 자기 남편의 말을 시어머님한테 전했다.
"걔가 원 죄가 있다고 그런다던가?"
"지가 뭘 아나유. 화순 아부지가 그냥 그러데유. 으르신네는 화순 아부지 덕을 많이 본다면서유. 화순 아버지 말대루만 잘 따르면 큰 화는 면할 거라구 하데유."
그렇게 심성이 고와 보이던 심서방 내외가 세상이 바뀌면서 정말 야속할 정도로 사람이 변해 있었다. 그러나 시어머님은 언제나 꿋꿋하게 중심을 잃지 않으셨다.
시어머님은 나를 다락방에 가두고 일체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는 틈틈이 시어머님은 창말 면사무소까지 내려가 시아버님 안부를 가지고 올라오셨다. 그 사람들 얘기로는 서울서 공부하던 아들을 춘천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아들이 자수해 오면 함께 인민 재판을 열겠다는 얘기였다. 행랑채 심 서방 말과 통하는 바가 있었다.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시어머니와 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참고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행랑채 심 서방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에 밭을 끊고 있었다. 그런대로 시어머님은 아들이 춘천에 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일 대문을 열어 놓은 채 대청에서 주무셨다.
그러나 며칠 뒤 남편은 대문이 아닌 뒤꼍 울타리를 뚫고 들어왔다. 실로 석 달만에 만나는 남편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참고 있던 눈물 한 방을 훌릴 경황이 아니었다. 난리가 나 피난을 떠날 수도 있었지만 시골 식구들 생각이 나 결국 숨어숨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
내가 울먹이자 남편은 어둠 속에서 내 손을 잡았다.
"알고 있어. 그러나 저놈들이 우리 재산을 몽땅 졌기 위해 그러는 거니까 별일은 없을 거야."
그러면서 남편은 춘천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팔봉산으로 피신하기로 했다면서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얘야, 그게 무슨 소리냐?"
시어머님이 어둠 속에서 남편의 손을 잡아 앉혔다. 남편이 말했다. 라디오를 들으니 유엔군이 곧 참전하게 돼 있어 빨갱이 세상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 이때가 젊은 사람한테 고비라며 당분간 몸을 퍼해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럴 법했다.
"얘가 홀몸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시어머님이 남편에게 말했다.
"네? 이 사람이 ,,,,,,"
남편이 목소릴 높였다. 내가 남편의 입을 막았다. 남편이 내 온을 더듬어 쥐었다. 나는 남편의 손아귀에 힘이 쥐어지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무슨 장한 일을 하고 난 아이처럼 흐느낌이 쏟아졌다.
남편은 그 밤으로 떠났다. 호롱불을 밝혀 남편의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 한 채 남편을 떠나보내고 나는 시집 올 때 해 가지고 온 이불에 얼굴을 묻고 실컷 울었다.
그러나 다음날 저녁때 심 서방이 창말에서 기가 막힌 소식을 가지고 올라왔다.
"마님 동무, 좋으시게 됐어유."
"뭔가. 어른께서 나오시게 됐나?"
"웬걸유, 이제야 부자 분이 함께 만나시게 된 걸유."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창배 동무가 붙잡혔다는구먼유."
심 서방 얘기로는 새벽녘 춘천으로 나가는 쪽배를 타기 위해 수렁골로 나가다가 잡혔다는 것이다. 시어머님이 대청마루에 주저앉으셨다. 그리고 다음날 날이 새기가 무섭게 창말로 내려가셨다. 시어머님이 가지고 올라오신 소식은 그런대로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멀 내무서 제일 높은 사람이 시아버님과 일본애 가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의 바로 친아우더란 것이었다. 그쪽에서 먼저 그런 얘길 꺼내면서 자기가 여직 봐 주었기 때문에 시아버님이 무사하다는 공치사까지 하더란 것이다.
"그 사람 형님 되는 분이 느이 시아버지 신셀 많이 졌다는구나. 늘 그러시드라. 머리가 좋아 공불 잘하는데 집이 원체 가난해서 공불 계속할 수가 없어 그 학빌 전부 대준 친구가 있다구. 그게 바로 그 사람 형님이라잖냐."
이처럼 시어머님은 시아버님이나 태 남편이 금방 풀려날 것처럼 좋아하셨다.
그러나 헹랑채 심 서방의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인민재판이 곧 열릴 거라더구먼유. 얘기들 하는 거 들으니까 부면장까지 지낸 데다가 악질 지주 반동분자루 몰리게 돼 있어 살아나시긴 힘들다대유. 창배 동문 서울서 불순한 사상을 가지구 시골루 태러와 가지구설랑---"
요는 내 남편이 지방 청년들을 모아 불순한 일을 꾸몄다는 그런 죄목으로 잡혔다는 것이었다.
"이보게. 심 서방, 자낸 이 일을 어어떻게 했음 좋겠나?"
이제까지 그렇게 꿋꿋하게 중심을 잃지 않던 시어머님께서 심 서방한테 애원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지가 진작부터 말씀드릴려구 혔습죠만 뭐 되지두 알을 소리 같아서 못 했습니다만, 네, 방법이야 있습지우."
"뭔가, 그 방법이란 게?"
"창말 멘인민위원회에서들 모두 나보구 이 집 메느님이 서울서 핵교 선상두 하고 했으니까누 창말 내려와서 일을 협조하게 해야 한다 - 고런 말들이데유."
"우리 며느리가 뭘 협조해야 한다는 게야?"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분에 떨고 있었다.
“우리 샘말이나 창말에선 여성 동무가 벨루 웁다구 야단이데유. 이 집 메느님처럼 배운 분이 나서서 애들한테 김일성 수령님 노래도 가르치구---"
"알았네, 그 얘긴 더 꺼내지도 말게."
시어머님이 결연하게 잘라 말씀하셨다.
“아니에유, 마님 동무, 글쎄 지 말씀을 들으시라니께유. 메느님이 창말 내려가 일을 거들어 주시면서 창배 동무한테 의용군을 지원하라구 허세유. 내가 여러 날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이 집 부자 분이 무사하게 살아날 길은 그것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으니께유, 글쎄 지 말대루 해 보세유."
"우리 창배가 인민군엘 가란 말인가?"
“왜 아니래유. 글쎄 그 길밖에 없으니까 알아서들 허세유."
나는 내 방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를 듣고 힘이 생겼다. 왜 내가 여직 집안에 박혀 시아버님이나 남편을 구할 생각을 못했나 하는 후회였다. 내 힘으로 그 두 사람을 구해 낼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나는 그 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너무나 아는 게 없었다. 난리가 왜 일어났는지,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인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난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 난리를 맞았던 것이다. 나는 내가 그들에게 잠시 협조한다는 것이 시아버님이나 남편을 구하는 의미 외에 어떠한 죄도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펄쩍 뛰는 시어머님을 그예 설득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역시 붉은 완장을 차고 설치는 심 서방의 말은 창말 그 패들의 뜻과 통하는 바가 많았다. 나는 창말에 내려가 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안내로 내무서 책임자도 만나 보았다. 그는 눈이 작고 교활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나와 잠깐 이야기하는 동안 혁명 과업이란 말을 열 번도 더 써먹었다. 나는 하루에 한 번씩 창말과 샘말을 돌아다니며 그들이 시키는 일을 했다. 저녁에 국민학교 교실에 부녀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이 주는 선전 책자도 읽어 주었고, 아이들에게 노래도 가르쳤다.
그들은 며칠 가지 않아 남편을 내놓아 주었다. 남편은 시아버님의 친구 동생이라는 내무서 사람을 통해서 의용군에 지원한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난 것이다. 남편이 의용군에 들어가는 날로 시아버님을 풀어놓겠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며칠 사이에 몹시 수척해 있었고 또한 풀이 죽어 있었다.
"창배 동무, 참 잘 생각허신 일이유."
심 서방이 남편한테 말했다.
"글쎄 절보구 창배 동무를 감시하라는구먼유. 그러니까 딴 생각은 마시는 게 좋겠구먼유."
남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 날 밤 내게 말했다. 시키는 대로 의용군으로 들어가 도망을 치겠다는 의견이었다. 내가 뒷일을 책임질 것이니 몸을 퍼하라고 하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도망을 쳐 봤자 잡히게 될 확률이 더 많을뿐더러 시아버님이 풀려나지 못하게 될 게 아니냔 것이었다.
"이제 전쟁은 멀지 않았다구. 내 곧 도망쳐 어디 숨어 있다가 전쟁이 끝나면 집에 돌아오겠소."
남편은 그동안 내가 창말 인민위원회 패들 놀음에 놀아난 일을 두고 한마디했다.
"당신 거기 안 껴드는 건데 잘못한 거 같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편은 그동안의 내 입장을 이해해 준다는 뜻으로 나를 가슴에 안았다, 그러나 나는 남편의 그 한마디 말에 하늘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내가 하도 실심해 하니까 남편은 내 배를 쓰다듬으며,
"신경 쓸 거 없어요. 내 얘긴 우리 애길 생각해서 그런 거라구. 당신 몸조심하라는 얘기지. 무릴 하면 못써요."
남편은 그 다음날로 마을 사람 다섯과 함께 춘천으로 떠났다. 심 서방은 우리 집 대문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의용군의 집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창말에서 남편을 전송했다.
"내 꼭 살아 올 거라구. 몸조심해야 돼요."
남편은 내게 아이들처럼 눈을 찔끔해 보이면서 떠났다.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국민학교 운동장에 둘러선 미류나무 잎이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며칠 일하던 인민위원회 사무실 앞을 지나다가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남조선을 해방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떠들던 그들이 얼굴에 그늘을 깔고 수군거리는 걸로 미루어 전세가 그들에게 매우 불리한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하면서 그 앞을 급히 지나쳤다, 이제 그들과 얼굴을 맞댈 아무런 이유도 내게는 없었다. 시아버님은 아침나절 풀려나 시어머님과 함께 집으로 넘어가셨던 것이다. 내게는 이제 전쟁이 어서 끝나 내 남편 창배씨가 돌아와 우리의 애기 출생을 축하해 주는 일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람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편을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허전허전 맥이 없었다. 우수수 서낭당 고개 초입에서 가을바람이 불어 마른 풀을 흔들고 있었다.
대문에 꽂혔던 붉은 깃발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시아버님 방으로 가 큰 절을 했다. 시아버님 얼굴이 말 아니게 수척해진 게 정말 가슴이 아파 눈물부터 쏟아졌다. 그러나 시아버님은 겨우 인사를 받고 난 뒤 돌아앉아 담배를 입에 무신 다음 한마디 말도 없으셨다.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시어머님이 밖에 나와 나한테 말씀하셨다.
"느 시아버님이 심기가 매우 좋지 않으시다."
당신의 아들이 의용군에 끌려간 것이며 며느리가 빨갱이들과 어울려 놀아났다는 사실을 아시고 일체 입을 여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행랑채 심 서방이 앞에 나타나면 아예 눈을 감고 말씀을 안 하셨다, 집안 구석구석 침묵이 깔린 속에서 나는 시집을 온 이래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시어머님께서도 내게 뜨악한 기분으로 대해 주시는 것 같아 나는 정말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주 경회 동무, 창말 여맹에서 왜 안 내려오시느냐고 야단이데유."
심 서방이 이제는 내 이름까지 불러 대며 성화를 부렸다.
"이놈아, 저 하늘을 봐라!"
느닷없이 안방 미닫이가 열어제쳐지면서 시아버님이 고함을 쳤다.
"이 배은망덕한 것, 내 며느린 빨갱이가 아녀 ! "
"어르신네 동무, 섭섭하신 말씀 허시네유? 배은망덕이라니유? 어르신네 동무께서 이렇게 집에 돌아오신 게 누구 덕인데 그러세유. 이 집 안 뺏기구 사시는 것만 해두 다 지 덕인 줄 아세야 해유. 아까 아침나절 으르신네 동무가 대문에 꽃은 깃발 찢어 버린 거 창말에서 알면 큰일난다는 거 아세야 할 거예유."
이미 시아버님은 상종을 않겠다는 듯 방문을 닫은 뒤였다. 나는 강릉 집한테 배가 불러 이제 더 이상 창말에 내려갈 수 없으니 얘기해 달라는 말을 했다. 일이 더 시끄러워지는 것을 겁낸 까닭이었다.
마을 공기가 이상해졌다. 마을 앞 강변 길을 통해 인민군이 무더기 무더기 북쪽으로 밀려간다는 얘기였다. 하긴 초래 전부터 춘천 일대는 비행기가 새까맣게 몰려와 폭격을 하면서 그 폭음이 샘말까지 들려 왔다. 세상이 또 바뀔 징조가 분명해지자 붉은 완장을 찬 지방 빨갱이들은 눈에 더욱 살기를 띠고 창말과 춘천을 들락거렸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끌려나갔고 들판에는 아직 거두지 못한 벼가 누렇게 출렁이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보니 강릉 집이 안채 마당에 꿇어 엎드려 울고 있었다. 세 살 박이 화순이도 그 옆에 붙어 서서 울었다.
"자네가 뭘 잘못했는가. 세상이 그른 거지. 다 잊어버리구 함께 사세."
시어머님이 화순이를 안아 올리며 말했다. 심 서방이 밤 사이 북쪽으로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난 지금두 믿어지지 않네. 심 서방 같이 착한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가---"
"그러게 말이에유. 저두 뭐한테 흘린 것 같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유."
그러나 세상이 아직 바꿔 건 아니었다. 낮이면 인민군 패잔병들이 떼를 지어 마을에 나타나 밥을 해먹고 북쪽으로 사라졌다. 오히려 여느 때보다 마을은 뎌욱 휘휘하게 무서웠다. 산에 숨었던 동네 청년들이 나타나 인민군과 총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민가에 든 인민군을 생포해 뒷산 금광굴로 끌고 가기도 했다. 강릉 집도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포박을 한 다음 산 밑 움집에 가둬 버렸다.
무서운 일은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에 얼씬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시아버님이 한숨을 쉬며 마당을 어정거렸다. 의용군 나간 남편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남편과 함께 나갔던 마을 청년들도 매한가지로 소식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쥐구멍으로 들고 싶도록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시아버님의 한숨소리가 가슴에 째지듯 울려 어떻게 처신해야 할는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런 중에도 시어머님은 하루에 한 번씩 내 불룩한 배를 어루만져 주시며,
"악아, 너무 상심하지 마라, 넌 홀몸이 아니여."
그럴 때마다 나는 눈물이 쏟아졌다. 어서 남편이 돌아와 내 가슴을 탁 털어 보이고 그 무릎에 엎드려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악아, 너 이리 좀 오너라."
어느 날 대낮 내가 텃밭에 나갔다가 대문 앞에 이르니 시어머님깨서 내 손목을 끌고 집에서 꽤 떨어진 이웃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시어머님의 얼굴이 새까맣게 죽고 손은 부들부들 털고 계셨다.
"어머님, 왜 그러세요?"
내가 몇 번씩 다그쳐 물어도 시어머님은 아무것도 아니다 -란 말만 되풀이하며 이까지 덜덜 떨고 계셨다. 임신한 나한테 무슨 놀라운 소식을 안 알리려고 그러신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불안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때 총소리가 여러 방 우리 집 쪽에서 들려 왔다.
시어머님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어느새 뿌르르 일어나 집 쪽으로 허둥허둥 달려가시는 게 아닌가.
대청 마루에 시아버님이 쓰러져 계셨다. 피가 마루로 흘러 봉당까지 적셔 내렸다. 그 총소리 이후 흔적도 볼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이 꽤 오랜 뒤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루엔 밥상이 넘어진 채 뒹굴었다. 일의 경위가 밝혀진 것은 시어머님이 제 정신을 찾은 밤중이었다.
인민군 둘이 총을 들이대고 들어와 밥을 해내라고 얼러댔다. 시아버님이 눈짓으로 밥상을 봐 오라고 해 시어머님이 부엌에 계신 동안 시아버님은 인민군들과 이런저런 얘길 나누고 계셨다.
아들 소식을 알까 하고 그러는가 싶었는데 시아버님아 부엌에 슬쩍 들러 귓속말을 했다.
"얼른 밥상 봐 놓고 임잔 며느리 못 들어오게 막고 있어야 하네. 내 저 놈들 한번 붙잡아 볼라네."
그렇게 말해 놓고 다시 대청으로 들어간 시아버님이었다. 그리고 내가 시어머님과 이웃집에 있는 사이에 일을 당하셨던 것이다. 나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급작스레 그리고 처참하게 돌아가신 시아버님 앞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뿐이었다.
이상한 것은 인심이었다. 그렇게 싹 발을 끊었던 마을 사람들이 시아버님이 인민군 총에 맞아 돌아가실 뒤 자기 부모 죽은 것 이상 애석해 하며 밤샘을 했다. 비로소 이웃 아낙네들이 나를 쏘아보던 그 냉랭한 눈빛을 풀고 다정하게 말을 붙여 왔다.
난리통이라 제대로 장사를 지낼 수 없어 뒷산에 가매장으로 모셨다. 시어머님은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동네 아낙네들이 부추겨 안고 내려왔다.
"악아, 너 몸 괜찮으냐?"
그런 경황 속에서도 시어머님은 틈틈이 내 몸 걱정을 하셨다.
시어머님이나 나나 소복으로 차려 입고 이십 칸 휑덩그렁하게 드넓은 집 속에 던져져 하루 해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을 기다리고 지아비가 돌아오길 고대하는 두 여자와 영혼은 그렇게 무척 외롭지만은 않았다. 시어머님은 내 배를 자주 어루만지며 안타까운 듯 혀를 차시곤 했다.
"괜찮아요, 어머님!"
나는 뱃속의 우리 애기가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뎌나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이 세상에 태어나 축복받은 아이로 자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이상의 고통과 어려움을 하느님이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 가슴 속에 자랑처럼 피어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내 몸에 내리는 신의 저주는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정작 신의 저주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임을 어쩌랴.
"창말에 아군 선발대가 지나갔대더라. "
마을을 다녀오신 시어머님께서 바깥 소식을 가지고 오셨다.
"춘천엔 그 미국 사람인가 뭔가 하는 코가 큰 병정들도 왔다고 하더구나."
이제 남편도 돌아오겠지. 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집안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엔 남편이 북쪽으로 갔거나 더 뭣한 생각까지 껴들어 뒤숭숭한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뒤꼍 장독대를 보살피고 있는데 안쪽에서 뭔가 심상찮은 기척이 났다. 난생 처음 보는 외국 병정들이 대여섯 마당 한가온데 서 있었다. 시어머님이 그들에게 잡혀 시커먼 손아귀에 입을 막힌 채 대청으로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어느 한 순간 시어머님의 눈길이 내 눈길과 부딪쳤다. 애원과 절망과 공포와,,,,,, 그런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내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온 몸의 힘이 싸악 빠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시커먼 짐승 셋이 다가오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방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힘을 뻗쳐 발버둥쳤다. 나는 무심결에 내 배를 그러쥐며 애원하는 손짓도 해 보았다.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넓적한 손아귀가 내 입을 막았다. 나는 그 짐승들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노린내였다. 짐승들의 흰 이빨이 보였다, 그들은 낄낄낄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의식이 있는 동안 하느님을 찾았다.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그 짐승들을 저주했다. 나는 드디어 무서운 고통 속에서 하느님 그 분을 저주하며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의식이 살아 올랐을 때 나는 밖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었다. 문득 내 머리 속에 서울에 두고 온 늙으신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 흐트러진 아랫도리가 천 근만큼 무겁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나를 낳아 준 어머니를 저주했다.
짐승들은 대청 마루에 레이견 상자 두 개를 놓고 갔다. 건넌방에서 마을 할머니들의 혀차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난리여, 난리 땐 무슨 짓을 당해도 헐 수 없는 벱이여.
"아무리 난리기로서니 이럴 수가,,,,,,"
"아니여, 죽지 않고 산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게여."
시어머님은 두 번이나 목을 매었다. 한번은 내가 광속에서 발견했고 또 한번은 집 뒤꼍 대추나무에 목을 맨 걸 강릉 집이 풀어냈다. 두 번이나 저승길을 가던 시어머님께서는 그것도 기진맥진 방에 몸져누운 채 눈을 감고 아무하고도 얘기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꼬박 나흘씩이나 입에 물 한 모금 대지 않았던 것이다. 코에서 수수 뜨물 같은 피를 술술 쏟으면서도 사람만 접근하면 손을 내저어 쫓았다.
"새댁을 생각해서두 이러시면 안 돼유 글쎄.
움막에서 풀려 나온 강릉 집이 애원을 했다.
"걔 어떻게 됐나?"
처음으로 들어 보는 시어머님의 목소리였다,
"어머님,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날부터 시어머님은 거짓말같이 일어나 앉아 음식도 입에 대고 다시 내 배를 만져 보시며 생기를 되찾으셨다.
나는 그 일 이후 가끔 배에 통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시어머님을 실망시킬 것이 두려워 나 혼자 배를 안고 뒹굴었다. 그런대로 통증은 멎어 가고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시 하느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님이 목을 매는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시어머님이 나를 살려 주신 셈이다. 비록 더럽혀져 죄를 지은 몸이지만 내 뱃속에는 우리들의 씨가, 끝내는 축복 받아야 할 최 창배씨 가문의 핏줄이 꿋꿋하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어서 돌아오고 그리하여 그이 앞에 우리들의 애기를 안겨 준 다음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까지, 축복 받아야 할 우리들의 애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오기처럼 뻗쳤다.
그 해 겨울 동짓달 나는 해산을 했다. 예정일보다 두 달 앞서 여덟 달만에 사흘 간의 무서운 진통을 거쳐 낳은 애였다.
"이보게, 강릉 집, 거기 뒤주 위에 낫 좀 가져오게."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달떠 있었다. 아들을 낳아야 낫으로 태를 가른다던 시어머님이었다.
"악아야, 내가 손줄 봤구나!"
태를 가르고 난 뒤에야 시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아득하게 가라앉는 그 몽롱한 의식 속에서 시어머님의 말소릴 듣고 눈물을 흘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내 간사한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끝내 얼굴을 돌리셨다. 나는 술가재처럼 형태가 계대로 잡히지 않은 핏덩이를 내려다보며 몸서릴 쪘다. 그러나 그 핏덩이는 숨쉬고 있었다, 나는 하나의 생명을 이 세상에 내던졌던 것이다.
산골에는 눈이 더 많이 내렸다. 정강이에 차는 눈을 아예 치울 생각도 못한 채 새해를 맞았다.
그 겨울 막바지에 또 한번의 난리가 쳐들어왔다. 1.4후퇴였다. 이번 난리는 여름에 댈 것이 못된다고 모두 벌벌 떨면서 피난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집을 떠났다. 마을은 텅텅 비었다. 북쪽에서 밀려 내려오는 피난민들이 빈 집에 하룻밤씩 머물러 가면서 휘휘한 소문만 남겼다. 빨갱이들이 독이 올라 이제는 사람을 보는 대로 죽인다고 했다, 누비옷을 입은 되놈들은 빨갱이들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
그러나 시어머님과 나, 그리고 화순이를 등에 매달고 다니는 강릉 집 - 이렇게 세 여자는 남들이 다 떠버린 마을에 남아 한 가닥 기대 속에 살고 있었다.
"애 아버이가 오면 계발 맘 고쳐먹고 발뻗구 자다가 죽자구 할 꺼예유. "
강릉 집은 남편이 당장 마을로 들어서기라도 하는지 매일 화순이를 업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렸다.
시어머님도 당신의 아들이 이번에야말로 꼭 돌아올 것으로 알고 솜 둔 바지저고리를 짓는 등 들떠 있었다. 나는 갓난것을 품에 안고 남편의 귀가를 기다렸다.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애를 시어머님의 정성으로 살려냈다. 이처럼 발육이 불완전한 애가 어떻게 젖을 빨 것인가 싶었지만 갓난것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억센 힘으로 젖을 빨았다. 나는 가끔 그 아이가 무서운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이를 방바닥에 밀어놓고 치를 털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뱃속의 애기를 위해 이를 악물고 억눌러 왔던 그 증오가 분수처럼 거세게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그 시커먼 짐승들을 칼로 퍽퍽 절러 검고 끈적끈적한 살갗 그 깊숙한 데서 콸콸 쏟아지는 피를 받아 이웃사람들 눈앞에 내보이고 싶은 충동이었다. 가끔 우리 집에 들러 내 애기를 마치 징그러운 짐을 보듯 몸서리치며 바라보는 이웃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함께 치민 것이다. 나는 발작처럼 손끝으로 뻗치는 증오 때문에 더 견디지 못하고 마루로 뛰어나가곤 했다,
강릉 집이 발을 얼리면서 밖에서 기다리는 그네의 남편은 그 해 겨울이 다 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강릉 집은 징징 울면서 마을 앞 강변 길까지 내려가 남편을 기다렸다.
"얘가 어떻게 뒨 거냐?"
평소 일체 부성거리는 것을 모르던 시어머님께서 아들의 바지저고리를 마지막 손질하면서 말씀하셨다.
"에미야, 더 기다려 보자꾸나, 걔가 이 에미하고 제 자식을 보기 전엔 절대 안 죽을 게다. 두고 보렴. 갠 절대 안 죽었어. 언제고 꼭 돌아올 게여."
난리 전보다 열 살은 더 늙어 버린 시어머님의 얼굴에 경련이 일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 속게 어떤 화신을 심는 그 고통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인민군과 다시 나타난 지방 빨갱이로 해서 또다시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창말에서 나를 다시 찾고 있었지만 나는 결코 대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중공군들이 뭐라고 솰라대며 우리 마당을 파헤쪘다. 집안에는 한 톨의 감자도 남아 있지 못했다. 중공군들이 시어머님 가슴에 총을 들이대며 어디다가 곡식을 감췄는지 당장 내놓으라고 발을 굴렀다. 시어머님은 태연한 자세로 버티고 서서 고개만 저었다.
강릉 집이 마을의 빈 집을 돌며 먹을 것을 구해 와 겨우 끼니를 이었다. 먹는 것이 부실하자 갓난것은 빈 젖을 더욱 악착같이 빨아 댔다.
중공군이 다시 밀려 올라가면서 샘골 일대는 치열한 싸움터가 되었다. 낮이면 비정기 폭격으로 산이 불붙었고 밤이면 고막이 터져 나가는 총소리 속에 싸움이 붙었다. 산골짜기에는 중공군 시체가 나뭇등걸처럼 쌓여 바람이라도 있는 날이면 그 썩는 악취가 마을까지 풍겨 왔다.
"에미야, 이제야 애비가 오는가 부다. "
다시 아군이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갔을 때 시어머님은 대청을 서성거리며 마을 입구 샛길을 기웃거리셨다. 강릉 집은 싸움이 뜸한 어느 날 화순이를 업고 나간 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피난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얼었던 땅이 녹아 묵은 밭에 풀이 무성해졌지만 내 남편 최 창배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북쪽에서 포 소리가 계속 울려오는 속에 또 1년이 흘렀다. 그러나 어린것은 아직 뒤치지도 못했다. 커 갈수록 배냇병신 티가 분명히 드러났다.
"얘, 인민군들이 숱하게 잡혔다는 구나. 그 사람들을 이승만 대통령이 죄다 풀어줬대드라."
마을 사람들이 얘기하는 1953년 6월의 반공 애국 포로 석방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나 역시 거기에 기대를 걸고 살았던 것이다. 남편이 자진해서 포로가 되었다가 이번 기회에 풀려났을 것 같은 확신이 마음 속에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그 여름이 다 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 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돼 전쟁이 끝났는데도 우리들이 그처럼 기다리는 사람은 영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서울 친정 집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늙으신 어머니는 물론 오빠까지 난리 통에 폭격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혼자 된 올케가 애들 둘을 데리고 샘골까지 왔다가 내 형편이 또한 기구한 것을 알고 그 날로 떠나 버렸던 것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시어머님의 마음이 변한 일이었다.
"얘, 어미야, 애빈 꼭 온다."
말씀은 늘 그렇게 하시면서도 당신의 답답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툭하면 마을 사람들과 싸우고 돌아오셨다. 싸움의 발단은 언제나 시어머님께서 상대편에 대해 듣지 못할 소리로 악담을 해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싸우고 들어오신 시어머님께서는 방바닥에 널브러진 채 헐떡거리고 있는 어린 것을 향해,
"에이, 더러운 놈의 씨!"
이같이 욕을 퍼댄 다음 하루 종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어린것이 깜둥이들의 씨라는 실로 말 같지도 않은 욕을 퍼댈 때마다 나는 시어머님의 그 독이 오른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시어머님의 그 악담은 더욱 잦아졌고 나는 모두 다 팽개치고 도망쳐 버리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치밀곤 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어머님이나 내 어린것이나 둘 다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일꾼들을 사서 아버님이 짓던 농사를 짓느라 이런저런 시름을 잊고 있었다.
아베가 다섯 살이 되는 해 봄이었다. 아베는 네 살부터 겨우 기기 시작하여 이제 갓난애처럼 겨우 걸어다녔다. 그것도 사지를 뒤틀면서 아주 어렵게 일어서서 걸었다. 입을 벌려 소리낼 수 있는 것은 고작 -아-아-아 베-였다.
내가 부엌에서 낮 설겆이를 하고 있는데 아베를 안고 마당에 들어선 사람이 있었다. 아베는 대문 밖에서 아랫도리를 아예 입지 않은 채 놀고 있었던 것이다. 아베를 안고 들어온 사람은 키가 크고 휜 얼굴이 무척 수척해 삼십이 훨씬 넘어 뵈는 사람이었다 (나중애 알게 됐지만 그때 그는 겨우 27세였다)
나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부엌에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도무지 처음 보는 사람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5년 전 의용군에 끌려간 남편이 연상돼서였는지 아니면 남들이 한번도 안아 보는 일이 없는 내 아들을 가슴에 덥석 안고 있는 그에 대한 고마움이었는지 그런 걸 따질 것 없이 나는 그냥 반가운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뉘기시요?"
방에 앉아 계시던 시어머님도 어지간히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실망과 의혹이 섞인 그런 눈으로 그 사람을 훑어보고 재셨다.
"애기가 밖에서 혼자 놀고 있기에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아직도 아베를 가슴에서 떼 놓지 않은 채 그는 시어머님한테 허리를 굽혀 절했다.
"게 좀 올라앉구랴."
시어머님이 마루를 가리켰다, 낮선 사람만 보면 아들 소식을 얻을까 해서 붙들고 늘어지는 시어머님이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우리 집 식객이 되었다. 강릉 집이 살던 다 쓰러져 가는 행랑채가 그의 거처가 되었다. 시어머님은 혈색이 그야말로 초라한 그가 밥을 허겁지겁 퍼먹는 것을 바라보다가 돌아앉아 눈물을 닦으시곤 했다. 시어머님이 여러 가지를 물어 보셨다.
"고향은 어디우?"
"황해도 장연입니다."
"이북이구먼, 집엔 부모님들이 생존해 계시겠구먼?"
"모르겠습니다. 떠난 지가 오래 돼서요."
38선이 그어지기 전에 여동생 하나와 서울 외삼촌네 집에 와 학교를 다니다가 난리가 터져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난리 때 외삼촌네 집은 풍지박산이 돼 남쪽에 있는 단 하나 여동생마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시어머님 앞에 신원이 확실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도민증과 군대 제대증까지 내보였다.
"그럼 아주 외토리구먼. 헌데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떠도누?"
그 말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밥그릇이 싹싹 비워졌다,
"아,,,아,,,아,,,베"
아베가 마루에 걸터앉은 그 사람 앞으로 뒤우뚱뒤우뚱 다가가자 그는 서슴없이 애를 안아 올렸다.
참으로 거북스러운 일이었다. 여자만 사는 집에 외간 남자가 함께 기거하면서 얼굴을 쳐다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남편 없는 젊은 여자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었다. 그는 새벽같이 논에 일을 나가고 집에 들어오면 아베하고만 어울렸다. 나한테 할 말도 꼭 아베한테 말했다.
"야, 아베야, 나 냉수 좀 줄까?"
그런 식이었을. 그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베를 좋아했다. 그냥 이쪽 눈에 들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 남이 보지 않는 데서도 아베를 안아 주는 등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았다. 호랑이도 계 새끼를 귀여워하면 침을 흘린다더니 그렇게 천대받던 아베가 사랑 받는다는 것을 본다는 것은 하늘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어머님도 그 젊은이를 좋아했다.
이웃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기웃거리며 수군거렸다. 그러나 이미 남의 눈총을 받는 데는 익숙해진 터라 별로 두려울 것이 없었다, 문제는 내 자신의 마음이었다. 한집안에 외간 남자를 두고 산다는 것이 괴로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사람이 아베의 아버지 같은 착각에 놀라곤 했다. 남편에 대한 죄의식이 가슴 밑바닥을 송곳처럼 쑤시고 울라왔다. 나는 밤이면 내 방에 누워 문득 행랑채의 그 남자를 생각하고 소스라쳐 놀라곤 했다, 그런 다음날 아침이면 나는 시어머님이나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민망스러웠다.
"살아 있을까?"
"그럼요. 틀림없이 아베 아버지는 살아 있습니다. 저도 군대 생활을 했지만 군대에선 마음먹은 대로 할 수가 없어요. 더구나 인민군에선 더욱 그렇지요. 도망이 어디 그렇게 쉽습니까? 어쩔 수 없이 이북 어딘가에 살아있을 겝니다. "
그 사람은 늘 시어머님과 아베의 아버지 얘기를 나누었고 그럴 때마다 내 남편이 반드시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곤 했다.
"그놈에 통일이 언제 되지?"
"됩니다. 틀림없이 통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 계시다가 보면 아드님 만나뵙는 좋은 날을 반드시 보실 겝니다."
그는 시어머님한테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무척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우리 집에 머문 지 다섯 달이 넘고 있었다. 가을걷이를 하면서 나는 그와 자주 마주쳤다. 마차에 볏단을 싣다가 서로 같은 볏단을 잡은 적도 있었다. 문득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이 깊고 그리고 그 깊은 데서 활활 타오르는 빛을 보았다. 그 순간 내 온 몸의 피가 왐왐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다만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는 상대편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것이 보통이다. 나는 며칠 사이에 시어머님의 눈치가 달라진 것을 알았다. 그 눈초리가 냉랭하고 무서웠다. 자연 내 쪽에서도 시어머님을 맞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서로 마주치는 널 피하게 줬다. 시어머넘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달래느라 무척 괴로워하시는 것 같았다. 휭하니 밤 마을을 나가기가 예사였다. 그렇게 되면 팅 빈 집에 그 사람과 나만 남겨지게 됐다.
"이제 그만 우리 집에서 떠나 주셔야 하겠어요."
나는 마음을 도사려 먹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잖아도 떠난다 떠난다 하는 것이 그만 아베한테 정이 들어서요."
그가 쉽게 대답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나는 그렇게 부르짖고 싶었다. 당신이 그 흰 손으로 농사일을 하는 걸 나는 더 볼 수가 없어요. 당신은 농사꾼이 아녜요. 더구나 당신은 내 남편이 살아 있다고 몇 번씩 말했어요. 그래요. 내 남편은 살아 있어요. 우리 아베의 아버지는 언제고 돌아올 거예요. 나는 그이의 아내예요.
그러나 나는 이미 방에 들어와 잠든 아베를 끌어안고 숨 죽여 울었을 뿐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 사람과 내가 아베를 데리고 떠나야 할 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것은 시어머님이 그렇게 만드신 일이었다. 아닌 밤중 홍두깨요 맑은 하늘에 벼락이었다.
"에미야, 넌 이제 내 식구가 아니다."
어느 날 시어머님께서 나를 불러 앉히고 말씀하셨나. 너무나 뜻밖에 당하는 일이라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향해 시어머님이 계속하셨다.
"나를 더 속여야 소용없다. 내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님?"
"다 안대두 그러는구나. 내 이웃 챙피해서두 큰 소리 안 내겠다. 어여 느덜 짐 싸 가지고 나가거라."
시어머님의 말소리는 너무 착 가라앉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뭘 꾸물거리고 있는 게냐? 어서 짐을 싸라니까. 애까지 데리고 가는 거다. 그건 느덜 씨니까 말이여."
"어머님,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너 그렇게 계속 시치밀 떼야 하겠냐?"
시어머님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렇다면 내 물어 보겠다. 너 우리 집에 시집 온 게 언제지?"
나는 무슨 말씀인지 몰라 대답을 못하고 말았다.
"너 시집 와서 몇 달만에 앨 낳는지 그건 알겠구나?"
나는 뭐가 뭔지 더욱 아리송해 시어머님 얼굴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입이 열 개 있어두 말 못 할 게다."
"어머님, 무슨 말씀이신지 전 도무지,,,,,,"
"잔소리 더 할 것 없다. 이것들아, 내가 그렇게 어수룩한 줄 알았더냐? 그래 어떤 부처님이 제가 맨들지두 않은 병신 애새낄 끌어 안구 다닌다더냐?"
시어머님이 하시는 말음의 뜻이 한꺼번에 짚여 들자 나는 그만 온 몸의 힘이 빠져 나간 것처럼 허탈해졌다, 요는 행랑채의 그 사람이 아베의 친부가 틀림없다는 시어머님의 주장이었다. 결혼한 지 여덟 달만에 애를 낳고 다시 5년 뒤에 떠돌이 서울 사람이 찾아와 남들이 사람 새끼로 취급도 안 해주는 병신 아베를 안고 다니는 그의 수상쩍은 행동거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나는 어느 결에 대문밖에 몰려온 마을 아낙네들을 바라보면서 치를 떨었다. 내가 몇 년 사이에 겪어낸 그 어떤 고통보다 큰 아픔이 쇠뭉치가 되어 내 머리통을 쳐 갈기는 것이었다.
"어머님 ,,,,,,"
"닥쳐라, 내 입에서 더 못된 소리나기 전에 어서 떠나진 못할까?"
시어머님은 입도 벙긋 못하게 호통을 치셨다. 행랑채 남자가 달려 나왔지만 시어머님은 이미 내 옷가지와 패물들을 마루에 내던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시어머님께 내 억울한 사정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버터 보았지만 시어머님은 바늘 하나 찌를 틈도 주지 않으셨다.
"사정이야 다 있겠지만 저렇게 가라구 할 때 어서 떠나게."
마을 사람들이 몰러와 혀를 차면서 별의별 소리를 다 떠들었다.
"염치가 없구먼. 해두 너무했어."
칼로 배를 찢어 내 속을 보여야 마땅한 일이로되 그 더러운 삶의 한 가닥 애착 때문에 저주받은 씨 하나를 안고 마을을 떠났다. 저만큼 앞서 행랑채 사내가 보따리 하나를 들고 휘청휘청 걷고 있었다.
"내 자식은 반드시 돌아온다. 이 더러운 것아, 다시는 발걸음 비치지두 말거라."
울음 섞어 질러 대던 시어머님의 말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마을 사람들은 쫓겨나는 우리들을 향해 쯧쯧 혀를 차는가 하면 모질게 침을 뱉기도 했다. 이를 악물었지만 눈에 눈물은 쉬임 없이 흘러내렸다.
김 상만씨. 그는 하느님 당신이 저주 내리신 불쌍한 아베를 위해 특별히 보내 주신 사람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베를 위해서, 그리고 내 자신의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 그 더러운 생명의 마지막 연소를 위해서 나는 그 사람과 결혼했다. 그는 가능한 한 6,25때 실종된 내 전남편 최 창배씨 앞으로 출생 신고된 아베를 완전히 자기 자식으로 바꿔 놓고 싶다고 그 법적 절차까지 알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만은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아비 업는 자식으로 키우기보다는 차라리 떳떳이 김씨 성을 주어 자식을 삼겠다는 그의 진심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나는 마음속에서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저주받은 병신으로 이 세상에 계 구실을 못하고 죽을 그런 인간이지만 아베는 어디까지나 최씨 가문의 핏줄이었던 것이다. 더우기 아베는 4대 독자 집안의 유일한 뿌리로 남았던 것이다. 아베가 더 뿌리를 내리든 아베 대에서 그 뿌리가 끊겨지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베는 어디까지나 최 창배의 자식이지 김 상만 그의 자식은 될 수 없는 게 아닌가.
나는 내 둘째 남편 김 상만씨가 어떤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쉽게 알아냈다. 물론 그 병은 눈으로 가늠할 수 있는 없는 육신의 병이 아니었다. 뭔가 삶의 의욕을 잃은 것 같은 그의 그 멍청함을 통해 나는 한 인간이 지닌 고뇌의 깊이를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첫 애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내 가슴에 새겨진 상처 하나를 그에게 털어 보였다. 남들이 말하는 부부의 쾌락을 우리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나는 그 원인이 모두 내 상처에서 비롯된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몸에 불을 붙여 활활 타오른 다음 그 육체적 결합을 통해 구원받고자 안간힘을 샜다. 그이는 나보다 더 집요하게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기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이 생식 본능에 의해 갖는 그런 요식 행위 이상의 결합을 가질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 몸을 기댄 채 허방한 마음으로 안타까움을 달래곤 했다, 그런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여자가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가야 할 그런 과거를 털어놓았던 것이 다.
"다 알고 있었소. 동네 사람들이 그 얘기부터 해줍디다."
나는 내 몸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현기증을 느꼈다.
"당신 그러면 그 일 때문에,,,,,,"
내가 신음처럼 중얼거리자 그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아베 엄마, 당신 지금도 그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소?"
얼마만에 그이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제가 그 사람들을 사랑해야 되겠어요? 난 이제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요. 미운 건 오직 내가 왜 이렇게 끈질기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그 의문이에요. 나는 이 의문이 머리 속에 떠오를 때마다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당신은 아베를 키워야 할 엄마고 또한 우리들이 갖게 될 아이들의 엄마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살아야 하는 거요."
"아베는 키울 만한 가치가 없는 병신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입때껏 아베를 사랑해 왔어요. 아니에요. 사랑하는 척해 왔어요. 나는 그 사실이 무서워요. 줄타기에 나간 애인을 바라보는 여자처럼 나은 겁나고 조마스러워요. 어떻게 자신의 핏줄이 아닌 병신 자식을 사랑할 수 있단 말예요."
"사랑할 수 있소. 난 아베를 내가 낳은 자식처럼 사랑하면서 살 수 있소. 두고 보면 알 것이오."
"그렇지 않아요. 우리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면 당신 마음이 달라져요. 동정과 사랑은 같을 수가 없어요."
나는 여자의 본능으로 내 자식에 대한 사랑을 확인 받고 싶었던 것이다,
"동정이든 사랑이든 아베를 버릴 수가 없소. 아베는 내 자식이오."
그이가 결연하게 외쳤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 내가 아베와 거의 비슷한 아이를 만난 것은 1,4후퇴 당시 황해도 내 고향 근처의 어느 산 속에서였소. 서울서 대학을 다니다가 난리를 만났고 유엔군과 함께 북진하는 국군에 뛰어든 거요. 고향에 두고 온 내 부모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오. 북쪽으로 가기만 하면 내 부모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요. 물밀듯 밀고 올라갈 때는 이제 아무 때고 부모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무턱 고향을 지나쳤지만 막상 중공군에게 밀려 내려오게 됐을 때 나는 고향 땅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소. 불현듯 고향 마을이 눈에 삼삼 잡히고 38선이 막히기 전 마지막 본 부모님과 형들이 미치게 보고 싶었소. 더구나 고향 마을에는 양가 부모님들끼리 내약해 놓은 내 약혼자가 있었던 것이오. 나는 그때 고향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외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소. 사상도 나라도 내게는 상관이 없는 거였소.
나는 후퇴하는 부대 후미로 뒤처지기 시작했소. 싼 하나를 넘으면 내 고향 마을이 보일 수 있는 그런 낯익은 길을 걷고 있었소. 나는 정말 잠깐 동안이면 내 고향 집에 다다라 보고 싶은 얼굴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소.
그리고 내 부모들을 이끌고 남하할 그런 계산도 있었던 것이오. 나는 내 계획대로 부대에서 이탈하는 데 성공했소. 그러나 나는 내가 숨어 있던 바위 뒤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 좀 떨어진 곳에 세 사람의 아군이 내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을 보았소. 한 사람은 부상을 당해 두 사람이 그를 부축해서 걸어오고 있었소. 나는 몸을 숨길 겨를도 없이 그들에게 발각되었소. 그들은 이제 내 적이었소.
"어이, 이것 좀 받아 줘."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내게 자신들의 총을 내주었소. 가운데 부축을 당한 병사는 외상이 아닌 듯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고 있었소. 부대는 이미 산 모퉁이를 다 돌아가 보이지 않고 있었소. 나는 그들 뒤에서 총을 쏘아댔던 것이오. 세 사람이 땅에 쓰러져 뒹굴었소. 나는 카아빈 총 하나를 들고 길을 벗어나 산 속으로 치뛰기 시작했소. 얼마쯤 치뛰다가 문득 길 쪽을 돌아보니 그 순백의 눈 속에 넘어졌던 세 병사 중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한 쪽 무릎을 땅에 끌며 움직이고 있었소. 그는 얼마 못 가 다시 눈 속에 넘어졌다간 다시 일어나 그렇게 어려운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소. 나는 다시 정신 없이 산을 치뛰기 시작했소. 바람에 눈이 몰려 어떤 지점은 허벅지까지 눈에 덮였지만 나는 몇 시간이고 그렇게 산 속을 헤맸던 것이오. 아무리 겨냥해 봐도 내가 목표로 했던 고향 마을의 낯익은 산을 찾을 수가 없었소.
나는 다음날 새벽까지 그 눈 덮인 산 속을 헤맸던 것이오. 나는 몸에 지닌 건빵 한 조각도 없이 산 속을 헤매느라 기진맥진하였고 무서운 허기를 느꼈소. 발과 손이 얼어 감각을 잃었고 나는 아무 데나 쓰러져 잠들고 싶도록 지쳐 있었던 것이오. 그때 내 눈앞에 문득 초가 한 채가 보었고. 산 밑 외딴 집이었소. 그 외딴 초가로부터 왜 털어질 곳에 서너 채의 인가가 또 보였소. 나는 모자와 계급장을 다 메어 버리고 그 외딴 집으로 숨어들었소. 봉당에 한 아이가 앉아 똥을 누고 있었는데 아랫도리는 아베처럼 아예 벌거벗고 있었소.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였소. 그 아이가 사립문을 들어선 나를 향해 히쭉 웃었소. 나는 총을 겨누면서 봉당에 올라서자 방문을 열어제쳤소. 식구들이 껍질한 방에 모여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중이었소. 나는 그들을 방 한구석으로 몰아붙인 다음 상위의 밥을 허겁지겁 퍼 넣기 시작했던 거요. 우툴두툴한 옥수수 밥이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 옥수수밥 맛을 잊을 수가 없소. 방구석에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소. 정신 없이 밥을 퍼먹던 나는 무의식중 그리로 총구를 들이댔소. 벌벌 떨면서 웅크리고 앉은 사람들 속에 얼굴이 쪼글쪼글 늙은 안 노인네가 내 얼굴을 딱하다는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소. 그러나 다른 식구들, 중년 부부와 열 예닐곱쯤 돼 보이는 처녀, 그리고 사내아이가 둘-그들은 살기 면 내 눈을 퍼해 얼굴을 돌리며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소. 나는 다시 정신 없이 옥수수밥을 퍼먹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소. 누가 내 등에 업힌 것이었소. 나는 그것을 방바닥에 밀어 던졌소. 봉당에서 똥을 누던 그 어린애였소. 놈은 방바닥에 나가떨어져서도 나를 향해 히죽이 웃었소. 밥을 다 퍼먹고 나자 얼었던 몸이 방안 온기에 풀리면서 나는 심한 식곤증을 느끼었소. 나는 총을 거머쥔 채 벽에 기대 눈을 감았던 거요. 형언할 수 없는 그런 안식이 내 몸 전체를 녹여 내리고 있었소. 깜박 졸았던 모양이오. 어떤 기척에 퍼뜩 정신을 차려 보니 방안 공기가 이상했소. 사십대 그 주인 남자가 보이지 않았소. 나는 문을 열어제쳤고 거기 붕당을 내려서는 그를 보았소. 나는 정말 무의식중에 그 사내를 향해 총을 보았던 것이오. 그리고 귀청을 찢는 비명을 들었소. 나는 몸을 돌려 어둑한 그 방구석을 향해 총을 난사했소. 턱이 덜덜 떨리는 공포를 느끼면서 실탄 케이스를 갈아 끼운 다음 다시 총을 쏘아 대기 시작했소. 그리고 밖으로 뛰쳐나왔고. 내가 쏜 그 주인 남자가 봉당에서 마당으로 떨어진 채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소. 사립을 나서며 자는 문득 방 쪽을 돌아다보았소. 그때 방문턱에 벌거벗은 아랫도리를 그냥 내놓은 채 걸터앉아 나를 향해 히죽 웃고 있는 그 반편이 사내아이를 보았던 것이오. 나는 비로소 정신을 되찾아 도망치기 시작한 거요. 나는 후퇴하는 다른 잔류 부대를 만나 곧 원대 복귀할 수 있었고, 정신에 이상이 있다고 낙인이 찍혀 병원으로 넘겨져 거기서 제대를 했던 것이오.
나는 길거리에서 다리를 저는 상이용사만 만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며칠씩 손에 맥살이 풀렸소. 한쪽 무릎을 끌고 눈길을 걷다가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걷곤 하던 그 병사의 환영이 나률 괴롭혔던 것이오. 나는 내가 죽인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한 게 아니라 내가 죽이지 못한 사람, 절름거리는 병사와 문턱에 걸터앉아 나를 향해 웃던 반편이 사내아이가 내 삶의 알맹이를 모조리 빼앗아가 버렸던 것이오. 나는 어렸을 때 강둑에서 살모사 한 마리를 죽인 적이 있는데 뱀에 대한 극도의 공포로 해서 나무막대기를 정신없이 내리쳐 흐치흐치 문드러질 정도로 만든 다음 풀숲에 던지고 돌아왔던 것이오. 그러나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 순간 문득 살모사는 꼬리만 성하면 땅 기운을 맡아 다시 살아나서 원수를 갚는다는 아이들 말이 생각났소. 나는 부랴부랴 잠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워진 강둑으로 달려가 그 죽은 뱀을 찾아냈던 것이오. 그리고 이제는 더 살아날 수 없을 정도까지 돌로 짓이겨 놓은 다음 뽕나무 가지에 걸어 놓고 돌아왔던 것이오. 그제샤 잠을 잘 수가 있었소. 아마 나는 그곳이 휴전선 이쪽이었다면 당장 달려가 그 아이를 찾아내었을 게 틀림없소. 그리고 그 반편이 아이를 죽였을 지도 모르오.
그리고 여기저기 떠돌며 살다가 당신이 살고 있는 그곳에서 아베를 본 것이었소. 나는 결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았소. 나는 아베가 바로 몇 년 전 내가 죽이지 못한 그 아이라고 생각했소. 물론 나이도 모습도 많이 틀렸지만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업었던 거요. 나는 아랫도리를 벌거벗고 땅바닥에 앉아 노는 아이를 안아 올렸소. 아무 생각도 없이 그렇게 했던 것이오. 그 순간 나는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충동으로 몸을 떨었소. 그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될는지,,,,,, 그렇소. 나는 가슴으로 끓어오르는 뜨겁고 커다란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오. 그것은 사랑이었소.
남편은 그 사랑을 충분히 입증해 보였다. 우리들 사이에서 네 아이가 태어나 큰애 진호가 열 여덟 살이 되도록 아베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어떠한 경우, 어떠한 사람 앞에서도 아베를 자기 자식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어째서 아베는 호적에 안 올라 있는 거예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민등록을 떼어온 진호가 그렇게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난처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대답했다. 병신 자식이라 남들이 다 제대로 살지 못할 거라고 해서 한두 해 미루다가 이렇게 됐구나. 그처럼 남편은 철두철미하게 아베를 자기의 자식들과 구별 없이 키웠다. 아베로 인해서 집안이 시끄럽고 아이들이 비뚤어져 나가도 그이는 이렇다 말 한마디 업이 지내왔다. 오히려 그는 아베로 인해서 내 마음이 상하는 게 괴로운 듯 늘 안타까운 얼굴을 보이곤 했던 것이다. 나는 단시 한번 당신이 저주 내리신 불쌍한 아베를 어여삐 여기사 그 사람을 보내 주신 하느님한테 감사했다. 하느님 감사하옵나이다.
아아, 그러나 하느님은 아직 내 편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하늘을 잃었다. 어둠과 절망과 내 가슴을 찢기는 아픔만이 내게 남아 있었다.
동두천에서 온 남편의 여동생, 아이들의 고모가 찾아왔을 때부터 나는 가슴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는 남편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고모의 몸에서는 노린내가 났다. 나는 그 노린내를 맡으면서 이상한 예감으로 가슴을 떨었다. 그 여자가 아베를 짐승처럼 바라보던 그 눈을 통해서 나는 육감적으로 어떤 불길한 생각을 떠올렸던 것이다.
남편은 이제 아베를 버리고 자기의 혈육인 그 여동생을 통해서 구원받으려 하고 있었다. 남편은 타고나기를 심약한 기질이라 아베를 통해 한 가닥 빛을 찾았을 뿐 그 뒤로도 계속 죄의식에 시달리는 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그의 가슴 속에는 아직도 확인하지 못한 그 절름거리는 병사와 그가 죽인 사람들이 하나 둘 살아나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항상 멍청해 있지 않으면 어렵게 얻은 직장을 쫓기듯 허둥허둥 물러 나와 겁먹은 얼굴로 방에 숨어살았다. 그이는 자기와 같은 피부, 같은 생각, 자기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겁내고 있었다. 그이는 한국을 터나 어디 먼 곳에 가 살고 싶다고 늘 말해 왔다. 숨이 막혀. 그는 늘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북한에 살아 계실는지도 모르는 그의 부모 형제 얘기만 나오면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이구 답답해, 아이구 답답해, 그렇게 신음하곤 했다.
그러한 남편으로 해서 우리 가족은 오늘의 안일은 물론 내일의 희망까지 빼앗긴 채 늘 우울하고 암담한 시간을 가져야 했다. 나는 그 숨막히는 어둠 속에서 우리 가족을 건져 올리고 싶었다, 암담한 뿌리를 송두리째 끊어 버리고 보다 희망 있는 굳건한 뿌리를 뻗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을, 그 비참한 가난을 헤어나지 못하고 허덕거려야 했으며 이제 스물 다섯으로 접어드는 아베로 해서 집안은 항상 음습했다. 아베는 커 갈수록 동물의 본능인 그 성적 욕구를 발산하지 못해 에미인 나한테까지 몸을 비벼대곤 했다. 아베와 피가 다른 우리 아이들은 정말 본능적으로 아베를 싫어했다. 남편의 그 무기력과 아베로 인해서 우리 아이들은 떡잎부터 누렇게 시들고 있었다. 진호가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그리고 계속해서 사고를 냈다. 계 친구 여럿과 함께 벌인 그 사고를 알았을 때 나는 죽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이때껏 그 굴욕과 고통에 찬 삶을 용케 견뎌온 나로서도 진호의 그 일을 보고서는 정말 이 세상이 싫었던 것이다.
이때 미국에 사는 아이들 고모한테서 초청장이 날아왔던 것이다. 아이들은 물론 남편까지 좋아라 날뛰었다. 사실 남편은 오래 절부터 동생으로부터 초청장이 오기를 기다려 오던 터였다. 나 역시 한때 기뻤다. 내 남편이 그처럼 좋아하는 일이며 내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딘들 못 갈 것인가. 그래, 남편에게 숨이 트이는 넓은 하늘을 주자. 그리고 빛을 받지 못해 휘어진 내 아이들이 싱싱한 빛깔을 되찾아 꼿꼿이 뿌리를 내리는 그 역사의 현장으로 가자. 나는 남편과 아이들의 뜻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이민에 따르는 그 어려운 국내 여권 수속은 주로 내 힘으로 다 했다. 남편은 지래 겁을 집어먹고 그 일에 나서지 않으러 했다. 오십 나이에 태권도다 용접기술이다 그런 데만 쫓아다니느라고 정신이 업었다. 그이는 어린애가 됐다. 나는 남편이 보이는 그런 배신적 변화에 대해 이를 악물고 아무런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내 하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다로운 수속에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느라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아무도 몰래 울음을 삼켰다. 나는 그 미어지는 가슴을 누구에게 털어 보일 수가 없었다. 물론 죽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내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마음 속에 다짐했다. 그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 그들 곁에서 그들에게 힘을 보태야 하는 것이 아내와 에미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제 비자 발급을 위한 면접을 했다. 우리 식구들은 대사관 영사과에 나갔다. 영사과 정문 수위의 출입 확인을 받는 순간 남편의 손은 떨고 있었다. 아침 여덟 신에 들어가 12시에 호출을 받기까지 남편은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나는 은근히 겁이 났다. 우리들이 비자 신청 서식에 답한 그 42가지의 질문 중
"당신은 체포되거나 유죄 판결 흑은 감옥에 구금된 일이 있습니까."
란 것이 있는데. 만약 영사관 쪽에서 그런 걸 물으면 남편이
"예, 나는 사람을 죽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린 시간과는 달리 면접시간은 빨랐다.
"여기 적은 모든 사항이 거짓이 없다는 것을 맹세할 수 있습니까?"
미국인의 말을 한국 여자가 통역했다.
남편은 우물우물 입속말로 대답했다. 물론 우리들이 기재한 그 내용에는 아무런 하자가 있을 수 없었다.
남편과 나, 진호 정회 진구 그리고 막내, 한 호적에 올라 있는 우리 여섯 식구는 분명한 가족이며 이민 허가가 제한되는 정신병자, 심신 허약자,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 귀머거리, 벙어리가 아니라는 증거가 신체 검사 결과서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면접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아베가 방구석에 갇힌 채 잠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집을 나갈 때 문고리를 밖에서 잠갔던 것이다. 아베 나이 스물 여덟 열흘만 지나면 그의 생일이었다.
오늘도 식구들은 아베에 대해서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하느님이 당신의 버리신 자식을 위해서 보냈다고 내게 믿음을 주셨던 남편마저 아베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만 막내가 한마디했을 뿐이다.
"엄마, 아베도 정말 같이 가는 거지?"
"그러엄, 큰형도 가고 말고!"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느님 아버지, 원하옵건대 계발 이 죄인에게 힘을 주옵-----
3
저녁 8시쯤 돼서 석필이가 나타났다. 예비군들이 입는 얼룩 무의 옷에 머리는 빡빡이었다. 4년 세월이 그 애송이 얼굴을 어느 정도 어른 티가 나게 바꿔 놓고 있었다.
"재두 갠 너 미국 가구 얼마 안 돼 뱃놈 된다구 부산 내려가선 아직 소식 깜깜이다. 그때 걔 얘기론 원양어선 타구 외국에 나가 배에서 도망친다구 했다."
"재두 개, 간질병이 심하잖니?"
"누가 아니래, 그러니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외국에 나가 혼자 살다가 죽겠다는 거지."
"부산 간 뒤론 정말 소식이 없단 말이지 ?"
"그렇다니까. 나쁜 새끼 같으니라구. 걔네 꼰댄 천호동 사는데 한번 찾아가 봤더니 아직두 사는 게 말 아니더라. 재두 여동생이 벌어서 먹구 산대,"
"형표 걘 군대 갔다면서?"
"그래, 작년 봄에 갔다. 휴가 한번 나왔었는데 최전방이라구 하더라. 저쪽 놈들하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웃기도 한다더라."
"군대 생활 할 만하대?"
"집에서 지내는 것보다 백 번 낫다구하더라. 삼 년 푹 썩으면서 사람되는 거지 뭐."
"걔 군대 가기 전에두 또 사고 냈냐?"
"별루. 참, 형표 군대 가기 전에 페인트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었다. 한 달에 육만 원씩 받아 적금두 들구 즈 살림에도 보태고---"
"야, 정말 놀랬다. 그런데 형표 아버지 병은 고쳤냐?"
"고치긴, 너 미국 가구 금방 돌아가셨다. 돈이 있었으면 수술을 했을 건데 그냥 질질 시간만 끌다가 간 거지 뭐."
"결국 고향에두 못 가 보고 돌아가셨구나!"
"돌아가시면서 그러더랜다, 이북에 있는 큰아들이 불러서 간다구."
"큰아들?"
"너 몰랐구나? 형표 아버진 6, 25때 월남해서 이북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주욱 결혼 안하구 있다가 나중에 결혼해서 형표를 낳은 거야."
"그랬었구나, 어쩐지,,,,,,"
그러다가 나는 문득 석필이 형 생각이 났다. 우리 4인조 중에서 석필이네 가정형편이 계일 나은 편이었다. 석필이 형은 대학에 다녔다. 수재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던 중 대학의 무슨 학생 써클 관계로 제적을 당했던 것이다. 제적을 당하고도 학교에 드나들며 무슨 일을 일으켜 끝내 감옥에 간 것을 보고 우리는 미국으로 떠났던 것이다.
"야. 느 형 어떻게 됐냐?"
"응 1년하고도 3개월 치르구 나왔다."
"학교는?"
"고만이지 뭐. 집에서 빈둥빈둥 놀다가 요즘 맘 잡구 산업 전사 됐다."
"산업 전사?"
"공돌이 된 거지 뭐. 적성에 딱 맞는대. 야 참, 더 웃기는 건 말이야, 너 놀래지 마!"
"말해 봐, 난 미국 시민이다."
"너, 내 얘기 믿어지지 않을 거다. 우리 형 결혼했다."
"미국 시민은 그런 유우머에 안 웃는다. 미국 사람두 결혼하거든."
"임마. 그게 아냐. 우리 형이 누구하고 결혼했는지 그걸 알면 미국 놈도 놀랄 거다."
"누군데? 여자냐? "
"그래, 여자다. 너 유 성애란 여자 기억나겠지?"
"유성애? 글쎄,,,,,, 듣던 이름 같다."
"역시 미국은 좋은 나란가보다. 넌 행복하구나."
"말해 봐. 그 유성애란 여자가 니 형수님이란 말이지 ?"
"너 도깨비시장서 열쇠 장수하던 유씨라면 생각날 게다. 우릴 경찰서에서 꺼내 준 바로 그 사람 말이다."
“그 유씨 딸이 느 형하고?"
"기쁘다. 미국 놈도 놀래 줘서. 어떻든 느덜이 나눠 가져야 할 괴로움 나 혼자 때우느라 말씀 아니다."
"느 형 미쳤구나 ! "
"우리 형이 미친 게 아니라 우리 형수님이 뻔뻔이스트지."
나는 벌떡 일어나 여관방 벽에 걸린 남방셔츠를 벗겨 입었다.
"나가자!"
"너 일기 쓰냐?"
석필이가 가방 옆에 놓인 대학 노우트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나는 석필이 손에서 그 노우트를 나꿔채어 가방 밑바닥에 넣은 다음 지퍼를 채웠다.
"일기가 아냐, 역사책이다."
"너 미국 사람되더니 늦게 사람 됐구나. 공불 다 하구!"
"그래, 나 공부 좀 더하러 왔다. 4인조 해단식도 해야 하겠고."
"해단식 ? "
"결단식이 있었으면 해단식도 있는 법이다. 생각이 깊어지면 어릴 때 한 짓이 우스꽝스러워진다."
"미국식이냐?"
"우리 아버지 식이다 왜."
석필이가 뭔가 얘기를 더 하고 싶어했지만 나는 앞장 서서 여관을 나왔다.
"아저씨, 늦게 들어오실 거예요?"
잡채밥 하나를 얻어 먹은 사내애가 문턱 나무의자에 앉았다가 아는 체를 했다.
"그래, 내 방에 가방 좀 잘 봐줘라."
여관 현관 위의 전등에 날파리가 어지럽게 날고 있었다. 비라도 을 듯 후덥덥한 여름 밤이었다.
"너 아는 데 맥주 집 하나 안내해라. 미국 시민은 돈이 많다."
시장 통을 걸으면서 내가 말했다. 밖에 나오자 석필이는 어느새 빡빡 머리에 얼룩 무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맥주 마심 나 배탈난다. 우리 쐬주 먹자!"
"쐬주? 우리 둘이서?"
"난 혼자서두 잘 마신다. 우리 형수님 얼굴 본 날은 꼭 혼자서 쐬줄 마셔야 잠이 온다. 넷이 먹어야 할 걸 나 혼자 마신다."
그래, 그때 우리는 넷이서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댔지. 지금 저 어둠 속 천수산 중턱에 모여 앉아 아랫동네에서 사 가지고 올라온 4흠들이 소주 두 병을 돌려 가며 거꾸로 물고 나팔을 불었지. 그렇지만 우리들은 꿀꺽꿀꺽 먹는 시늉만 떨었을 뿐 술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어. 반은 그냥 흘려 버렸지. 그러나 몇 모금씩 목구멍을 넘어간 소주는 우리들을 풍선처럼 부풀려 올렸던 써야. 죽어 버리고 싶다, 내가 말했지.
나두. 석필이가.
나는 살고 싶지 않다. 형표 말을 받아 재두가 말했다.
이하 동문이다. 우리들은 더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내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 수 없다. 죽을 필요가 없다구. 이 병신 천치 머저리 같은 새끼들아, 우리가 왜 죽니 ?
맞아. 우긴 죽지 않는다. 석필이가 말했다. 성공해야 한다. 우린 성공해야 한다.
그래, 돈을 버는 거다. 돈, 여자, 그리고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사는 거다.
재두가 그렇게 말하면서 이제까지 허풍과는 달리. 벌떡벌떡 병 나팔을 불었다.
자, 우리 4인조 사자 클럽 결단을 위해서! 형표가 재두의 술병을 빼앗아 벌떡벌떡 들이켜기 시작했다.
우리 위대하신 담임 선생님을 위해서. 내가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나는 그 날 무려 4시간 동안이나 교무실 앞 복도에 꿇어앉아 있었다. 선생들이 지나다니며 내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이놈 정말 문제아군. 저 새끼 작년에 내가 담임했는데 정말 골치 아팠다구. 부모가 뭐 하는 사람인데? 몰라, 낯짝두 한번 못 봤으니까. 학교 한번 오라구 그렇게 연락을 해두 끄떡두 안 하는 거야. 교무실 사환 계집애가 드나들며 핼글핼금 웃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의 그 습기가 뱃속까지 번져 올랐다. 또 한번 끝 종이 울었다. 교실에 들어갔던 선생들이 몰려나오며 또다시 머리통을 쥐어박기 시작한다. 이 새끼, 똑바로 앉지 못해! 교련 선생이 내 꿇어앉은 무릎을 구둣발로 짓이겼다.
나는 4시간 30분만에 교무실로 불려 들어갔다. 얼어붙은 다리가 저려 일어나다가 그냥 주저앉았다. 담임은 난로 가에 앉아 적금 통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반성했나? 담임이 물었다. 선생님. 제가 뭘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담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 새끼야, 너 정말 몰라서 묻냐? 네, 저는 제가 잘못한 걸 모르고 있습니다. 이 새끼 봐라, 이거! 너 정말 기어오르기냐? 선생님, 전 등록금을 연기해 달라고 말씀드린 일밖에 없습니다. 이 새끼야, 느 애비 에미가 와서 연기하라구 내가 몇 번씩 말했냐?
우리 부모님들은 학교에 오실 수 없습니다. 교무실의 다른 선생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야, 이 새끼야, 차렷! 너 임마, 복장 상태가 그게 뭐냐? 이 새끼 이거 지난번 교외에서 만났는데 사복을 입고 다니잖아! 교련 선생님이 구둣발로 쪼인트를 깠다. 시멘트 바닥에서 얼어붙은 정강이에 무서운 아픔이 왔다. 야, 이 새끼야, 너 학교 다니기 싫지 ? 담임이 내 멱살을 잡아 풀무질하듯 앞뒤로 흔들어 댔다. 학교 다니기 싫지? 네, 학교 다니기 싫습니다. 자퇴할래? 네, 자퇴하겠습니다.
석필이, 재두, 형표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나하고 비슷한 처지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유독 재두만은 고질인 간질병 때문에 비관하고 있었다.
자, 시작하는 거다. 4인조 사자 클럽 !
형표가 말했다. 우리들은 담배 한 개비씩을 나누어 물었다. 똑같은 시간에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힘껏 다섯 모금씩 빨아들인 다음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처음 먹은 술에 얼굴이 놜게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다시 두 번 힘껏 담배를 빨아들이면서 둘씩 짝을 지어 앉았다. 나는 재두의 왼 손을 잡았다. 재두 역시 내 왼손을 잡았다. 우리는 동시에 담뱃불을 시계 줄을 걸치는 그 팔목 위에 댔다. 우리는 신음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입을 모아 하나,,,두울,,세엣,,,네엣,,,다섯,,,여섯,,,스물까지 세었다. 살 타는 냄새가 났다. 담뱃불에 지져진 그 시커먼 데서 노란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다. 우리는 그 상처 위에다가 먹다 남은 소주를 부었다. 네 사람 입에서 각기 무서운 비명이 나왔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 위에 솟은 땀방울을 쳐다보며 웃었다.
이 세상에 이처럼 무서운 고통은 또 없다! 누군가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이러한 무서운 고통을 참고 견뎠다, 내가 외쳤다.
"아주머니, 여기 날 두부 한 접시하고 쐬주 한 병!"
4년 전에도 있었던 낡은 건물 한구석에 자리잡은 술집에 들어서면서 석필이가 주모를 향해 말했다.
"왠 날 두부냐?"
"우리 형두 교도소서 나을 때 친구들이 연탄잴 뒤집어 씌우고 날 두불 멕이더라, 그렇게 하는 거래."
"야, 내가 교도소서 나온 사람이냐? "
"마찬가지야. 우리 느네가 미국 떠나는 거 보고 부러웠다. 토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느네가 대역죄인이라서 유배를 간 거라구. 넌 지금 집행 유예로 풀려난 거야. 우리 형처럼 사람이 달라져 나왔겠지!"
유배 - 그렇다. 우리 식구들은 귀양을 간 거야, 도피가 아니라구.
"참, 느네 형 생각했던 거보다 빨리 나왔구나, 그때 칠 년이니 팔 년이니 하더니."
"사람이 됐다니까 자꾸 그러는 구나. 친구들을 배신한 것만 빼고."
"배신?"
"그래, 배신한 거야. 자기만 깨끗했다구 주장한 거지."
"느 형 깨끗했을 거다."
"천만에, 깨끗한 사람이 아냐. 그게 괴로워서 유 성애하고 결혼한 거다."
"우리 아버지 식이구나, "
"느네 아버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머니를 배신한 것만은 틀림없다. 유배지에서 풀려나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침묵하고 있다. 귀양 온 걸 억울해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야, 석필아, 느 형 얘기 마저 듣자. 유 성애하고 결혼한 그 얘기."
"얘긴 간단하다. 헝이 잡혀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그 일을 저질렀잖니! 그때 우리 집 내 보호자로 형이 왔다갔다했잖아. 그러다가 잡혀 들어간 거구, 그 속에서 내내 유성애만 생각했겠지. 그리고 풀려나자 결혼한 거야."
"한국엔 아직도 그런 정신병자가 많구나."
"그런 정신병자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
"피해?"
"그래. 물론 우리 형은 따로 나가 산다.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 앞에서 고개를 못 든다. 나 괴로운 건 더 말할 수도 없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네가 그 일을 가지고 괴로워하다니! 정말 괴로운 거냐?"
"그래 괴롭다. 너두 내 입장이 돼 봐라. 혁표 걔두 괴로워하더라."
"그렇게 말하는 네 얼굴을 보니까 한국은 정말 살기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이계 4인조 사자 클럽은 해체하겠다. 자, 건배!"
우리들은 세상에 무서운 게 얼었다. 담뱃불로 팔목을 지글지글 지지던 그 고통을 함께 나눈 우정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처럼 움직였다. 산동네와 시장 통 어깨들이 우리를 피할 정도였다. 체육관 패들도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친 어린 개한테 물리긴 싫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가끔 천수산 중턱 그 바위 밑에 앉아 술을 마셨다. 미성년인지라 술이 깨기 전엔 마을로 내려갈 수 없었다.
청량리에서 우리 같은 애한테만 몰래 파는 그 노골적인 성인 만화를 구해다가 그런 시간에 읽었다. 여체와 성기의 그 교성이 환장할 정도로 리얼하게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견딜 수 없었다, 수음을 했다. 어느 날 그 불량 만화를 보던 중 재두가 간질을 시작했다. 사지를 뒤틀면서 게거품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부시시 일어나 씨익 웃었다. 그때부터 재두는 말을 잃었다, 우리는 우울했다. 그러나 성기는 팽창한 채 몹시 툴툴거렸다. 그때 우리들 눈앞에 그 계집애가 나타난 것이다. 유성애. 그 현란한 여름옷이 우리의 눈을 현흑했다. 맵시있게 차려 입은 옷이었다. 우리들은 동시에 일어섰다. 재두 흔자만 멍청허 앉아 있었다. 1계집엔 가까이 보니 생각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행동을 개시했다. 막상 벗기고 보니 몸이 너무 빈약했다. 그 만화 속의 그림과 같든 것은 오직 그네의 그곳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해치웠다. 만화의 내용과는 너무 달랐다, 우리는 다만 실망과 열적은 그 찜찜한 기분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재두네 집에 모여 앉아 기타아를 치다가 잡혔다. 우리가 해치운 그 여자 애는 시장 통 양장점에서 일하는 계집애였다. 어쩐지 옷이 맵시 있더라니. 우리는 속은 게 분했다. 몸이 그렇게 빈약한 계집애도 있다니. 우리는 경찰서 대기실에 앉아 툴툴거렸다. 우리들의 보호자가 불려왔다.
형표네는 칠십이 가까운 병든 걔 아버지가 왔다. 석필이 형은 제적을 당했으면서도 대학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둘러보며 으르렁거렸다. 우리 어머니가 그들을 데리고 그 양장점 계집애가 있는 병원으로 달려왔다. 도깨비 시장에서 열쇠 장사를 하는 유씨가 자기 딸을 범한 우리들을 위해 경찰관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유. 제 에미가 위장병에 결려 내가 개더러 산에 들어가 사초싹 뿌리를 캐 오라고 한 것이 잘못이었지유. 그리고 제 딸년이 옷을 너무 야하게 입고 있었던 것두 잘못이지유. 우리 어머니와 석필이 형이 하루에 한번씩 경찰서에 왔다. 합의서를 썼다고 했다. 우리는 미성년자였다. 잡혀 들어간 지 두어 주일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다시는 재수 없는 그 계집애 얼굴을 못 봤다. 다만 그 계집애 어머니가 시립병원에 입원했다는 말만 들었다.
"야, 진호, 이 개새끼야. 너하고 술 마시니까 드럽게 취한다,"
우리는 이홉들이 소주 세 병을 다 바닥내고 있었다. 석필이는 저녁을 먹지 않은 속이라 무척 취하는 모양이었다.
"야, 임마, 이젠 니 얘기 좀 해라, 미국 가서 잘먹고 잘살다 뒈질라고 이민간 그 얘기 말이다."
"우리 얘기하러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느덜 얘기가 듣고 싶어 한국에 온 거다."
"임마, 네 속 내가 모를 줄 아냐? 비참한 우리들 얘기 듣고 싶어 그러지?"
"그건 오해다. 그렇다면 내가 단 한 라지만 얘기해 주지. 우린 아파트에 산다. 저 아래 도깨비 시장 옆 열 두 평 짜리 서민 아파트 보다 통로가 더 좁고 불결한 그런 아파트에 산다. 바퀴벌레가 버글버글한다. 위층에서는 돼지같이 생긴 흑인 연놈들이 생음악을 연주하며 카아핏도 깔리지 않은 데서 댄스 파틴지 지랄인지 밤낮 없이 발광을 한다. 우린 그런 데서 여기서와 똑같은 밥, 같은 반찬을 먹고 산다. 오히려 여기서보다 더 못먹고 더 맛없는 반찬을 먹고산다. 믿지 못하겠지만 믿어 줘라."
"느네가 그렇게 사는 건 그래두 미래를 위해서 그러는 거 아니냐?"
"미래? 누구, 누구의 미래냐?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꽃이 피겠냐? 우리 식구들은 지금 화병에 꽂힌 꽃망울과 같다. 어쩌면 한때 꽃이 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결국은 머지않아 쓰레기통 속에 집어 던져질 것이다."
"임마, 진호야. 나 너한테 그런 식으로 위로 안 받아도 좋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이 모두 미국을 동경하고 있는 줄 아냐? "
석필이가 빈정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빈정거림에 맞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가슴이 허전하게 비어들었다. 문득 빈약한 가슴을 가진 채 시들시들 메말라 가고 있는 이씨의 딸이 생각났다. 그네는 꽃망울인 채 시들어 가고 있었다. 누가 화병에 물을 갈아넣어 줄 것인가. 누가 그 꽃나무를 깨끗한 물 모래에 꽂아 매일매일 물을 주어 뿌리를 내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우리 아버지의 자책으로 인한 그 거짓의 삶에 일깨움을 주어 병든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은 길을 열어 줄 것인가. 나는 아버지가 그처럼 열심히 탐닉하는 천한 노동과 휴일이면 찾는 한인 교회 기도를 통해서도 결코 구원받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내 동생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눈 먼 그네들에게 참되게 사는 빛을 줄 것인가. 어머니, 그래 어머니만이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호된 채찍을 휘둘러 그 드넓은 땅 메마른 흙 속에 뿌리를 내리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야, 진호야, 한 가지만 물어 보자."
석필이가 내 어깨를 쳤다. 앉은 채 잠깐 졸더니 술이 좀 깬 것 같았다.
"아주머니, 여기 술 한 병 더!"
이번에는 내가 주모한테 주문했다.
"진호야, 느네 형, 아베 잘 있는지 그게 늘 궁금했다."
석필이가 말했다. 우리 형, 아베가 잘 있는지 궁금하다고. 놀라운 일이다. 이 세상에 아베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은 우선 놀라고 볼 일이다. 누가 남의 집 키우던 짐승에 대해서 안부를 묻겠는가. 저걸 왜 집에 둬 두니? 언젠가 우리 집에 왔던 석필이 제 놈이 그렇게 물었었다.
"내가 오늘 여기 와서 너하고 술을 먹는 것은 네가 궁금해하는 그 아베의 행방에 대해서 알고 싶기 때문이야."
내가 역습을 했다. 석필이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석필아, 너 우리 집 아베 못 봤냐? 보진 못 했더래도 뭔 소식이라도 못 들었니?"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베률 못 봤느냐구? 도대체 너---?"
"그래, 우리 형 아베를 못 봤느냐고 그렇게 물었다, "
"그런 아베가 한국에 나왔단 말이냐? "
"아베는 미국에 가지 않았다."
"아니, 그럼 어떻게 된 거냐?"
"그걸 나도 모른다."
어머니는 아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 또한 아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자가 나오고 그리고 우리가 떠나야 할 날이 다가왔을 때까지 아베는 평시와 다름없이 집에 있었다. 아무도 아베 같은 것에 대해 관심을 둘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어머니마저도 우리들을 데리고 동대문 시장을 다니면서 우리 식구들이 입어야 할 내복을 사 짐을 꾸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산동네 우리들이 살던 무허가 건물이 왜 비싼 값으로 팔렸기 때문에 아버지는 태권도 도장 사범과 저녁을 먹는 등 전에 업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우리들은 미국에 가 돈을 벌어 비행기표 값을 월부로 갚기로 계약했기 때문에 집이랑 몇 가지 쓸만한 가재 도구를 판 돈으로 미국에서 사기 어려운 생활 필수품을 사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식구들은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기분으로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나 오늘 외사촌형한테 다녀와야겠소."
출국일을 이틀 앞두고 아버지가 경기도 광주에 이사 가 사는 단 하나의 친척인 당신의 외사촌형 집에 인사를 간다고 아침 일찍 떠났다. 우리 남매들도 친구들을 마지막 만나 보기 위해 가슴에 실로 묘한 감상을 매달고 밖으로 뿔뿔이 흩어져 나갔다. 집에 남겨진 것은 아베와 어머니뿐이었다.
그 날 우리들은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다. 물론 아베도 집에 없었다.
"어머니가 느덜한테 아무 잘도 안 했단 말이지?"
아버지가 초조한 기색으로 우리한테 거듭거듭 묻고 있었다. 우리 남매들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서로 눈길을 피했다.
"형, 아벤 미국 안 가는 거지?"
아베에 대해서 말한 것은 막내뿐이었다. 그것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던 것이다.
"야, 임마, 낼 일찍 일어나려면 빨리 자기나 해!"
내가 막내를 향해 핀잔주었다. 막내는 방 한구석에 쓰러져 한국에서의 마지막 잠을 잤다. 진구도 정희도 잠들었다.
"너두 그만 자거라."
아버지가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여 물며 말했다. 12시가 넘어 산동네 그 아래의 소음도 잠들어 버린 시간이었다. 나는 몰래 훔치듯 아베를 생각했다. 아베의 그 헤벌린 입과 거기서 끊이지 않고 흘러내리는 침과 그 냄새와--- 나는 되도록 아베외 더러운 것만 골라 생각했다. 아베는 사람두 아니야. 그래, 차라리 아베보다 살모사가 더 기르기 좋을 거야. 아베 때문에 우리 식구들은 입때 고통을 당했어. 아베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제적을 맞은 거야. 아베 때문에--- 아베 때문에 우릴 내일 떠날 수 없을는지도 몰라. 나는 속이 아베에 대한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잠들었다.
우리는 김포공항에 늦어도 오후 4시까지 나가야 했다. 5시 반에 비행기가 뜨기로 돼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전날은 물론 그 날 오후 1시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는 계속 담배를 피워 댔다. 아버지의 그 커다란 체구가 형편없이 짜브라져 차마 맞바로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아주 크게 한숨을 몰아 쉬었다. 우리 판자 집을 산 사람들이 그때 들이닥쳤다. 그들의 지저분한 이사짐이 쪽마루에 가득가득 쌓여졌다. 장독이 들어오고 연탄도 날라 들여왔다. 우리들은 몇 개의 작은 가방들을 저마다 하나씩 들고 그 이사짐 사이를 이리저리 비켜서야 했다. 막내가 징징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입술이 꺼칠하게 타들고 있었다. 아버지, 엄마 놔두고 우리끼리 가! 정회가 악쓰듯 말했다.
그때 어머니가 나타난 것이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2시 45분이었다. 아무도 어머니한테 말을 붙이지 못했다. 나는 아직까지 그렇게 초췌해진 어머니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어머니의 그 넋 나간 것같이 멍청해진 얼굴은 그때부터였다. 아침부터 우리 집을 기웃거리던 이웃 사람들도 어머니의 그런 표정을 보면서 아무 것도 물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애써 그 굳은 표정을 풀면서 선후를 가려 떠날 채비를 했다. 남은 연탄 다섯 장은 바로 앞집 여자에게 넘기고 다 돌려주고 아직도 남았던 작은 항아리 하나는 옆집 혼자 사는 할머니한테 넘겼다.
"이쪽 쪽마루를 조심해서 디디세요, 아주 오늘 손봐서 드시는 게 좋으실 거예요."
우리 집을 사고 이사온 아낙네한테 어머니가 쪼개진 쪽마루를 가리켜 보이면서 말했던 것이다.
"이제 고만들 들어가세요. 정말 잊지 못하겠어요."
골목 그 아래까지 따라온 이웃 사람들을 향해 어머니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버지가 약국 앞에서 택시 두 대를 잡았다. 앞차에는 아버지와 정희 그리오 진구가 탔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뒷차를 탔다. 막내가 뒷자리 어머니 곁에 붙어 앉았다. 시장통을 다 빠져 나가 차가 6차선 큰길을 내달릴 때도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내 이마 위 백밀러를 통해 어머니 얼굴을 찾았다. 백밀러 속 어머니 얼굴은 눈을 감은 채 굳어 있었다, 강변 도로를 달릴 때 막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엄마, 아벤 어딨어?"
나는 창 밖 빠르게 흘러가는 경치를 바라보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나는 공항에 다 이를 때까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어린아이들에겐 용기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용기 있는 막내라 할지라도 그 이후 어머니 앞에서 아베 이름을 두 번 다시 입에 올리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야, 석필아, 집에 가서 자라!"
우리들은 맥주집에 옮겨와 있었고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 다섯 병을 겨우 세 개가 비어 있었을 뿐이다. 석필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흥얼거리며 의자에 목을 꺾어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내가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놀랐다. 임마, 네 뱃속에 기름이 져서 그런 거다. 나쁜 새끼 같으니라구. 내가 술이 허하지 않는 이유를 석필이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제 고만들 가세요. 술집에 와서 술두 안 먹구 자는 사람이 어딨어요?"
옆에서 술을 따르던 계집애가 가슴이 많이 파인 옷을 흔들어 몸에 땀을 식히며 툴툴거렸다. 아무리 희미한 조명 아래 술 취한 눈으로 보아도 결코 예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몹시 목이 말랐다. 계집애 몸 하나는 좋았던 것이다. 불량만화책 속에 그려진 그런 풍만한 여체, 그런 한아름 되는 허벅지를 가진 계집이었다.
나는 문득 시외 버스 속에서 한자리에 앉았던 미스 박이란 여대생이 적어 주던 전화번호를 생각해 냈다. 수첩 갈피에 그 쪽지가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11시 5분이었다. 쪽지 속의 전화번호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시간은 내일도 있다. 그리고 다음 주도 또 그 다음 주도,,,,,,그러나 나는 가로 고개를 저으면서 그 종이 쪽지를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한 번 두 번 세 번--- 나는 손끝에서 발기발기 찢긴 그 종이 부스러기를 내 눈앞, 풍만한 젖가슴을 가진 그 계집 얼굴에다 뿌렸다.
"여자야, 너 아베가 어디 있는지 아니?"
"이 손님 참 이상하셔,"
계집이 자기 얼굴에 붙은 종이 부스러기를 떨어내며 다시 말했다
"아베가 누군데 저한테 그런 걸 물으시는 거예요?"
"대답만 해! 아베가 어디 있냐?"
"글쎄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너한테 묻고 있는 거다. 우리 어머니가 그걸 나한테 알러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수기를 다 끝맺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더 쓸 수 있었으랴.
---하느님 아버지, 원하고 원하옵건대 계발 이 죄인에게 힘을 주옵---
"말해 봐, 우리 어머니가 아베를 어떻게 했지?"
"손님, 도대체 아베가 뭔데 그러세요?"
"아베, 아벤 사람이다. 우리 형이다."
"그런데 뭘 그러세요. 사람이면 집에 있겠지요, 뭐."
"집?"
"그래요.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가 있는 집 말예요. 나두 우리 할머니가 있는 시골집에 가구 싶어 죽겠어요."
"할머니가 있는 집?"
"그렇다니까요. 돈만 벌면 나두,,,,,,"
"알았어! 네가 그랬지? 할머니가 있는 집이라구?"
나는 뛸 듯이 기뻤다. 테이블 위의 술병 하나를 병째 들어 올려 벌떡벌떡 마시기 시작했다.
"여자야, 너 오늘밤 나하고 자자!"
"손님, 여기는 술집이에요!"
나는 뒷주머니에서 돈지갑을 꺼내 펴 들었다.
"난 급해! 너 분명히 말해라. 몸은 안 팔겠다는 거냐?"
계집이 내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불경기예요. 더구나 여긴 가난한 동네기 때문에 팁도 못 받아요"
“그래서?"
"나 여기에 11시 반까지 있을 거예요. 자기, 어디 있을 거예요?"
계집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눈만 살짝 치떠 쳐다보았다.
"너, 저 윗동네 극장 바로 옆에 있는 여관 알아?"
"한강 여관 말이지요? "
나는 그 계집에게 계산서를 가져오게 한 다음 술값과 몸을 사는 데 들 만한 돈을 고액환으로 두 장 내놓았다. 계집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술간을 제하고 제 몸값을 젖가슴 속에 집어넣는 그네의 그 얼굴에 가느다란 경련이 스쳐 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윤정아, 핏기 없는 네 얼굴에 빛깔을 주기 위해 나는 어른이 되고 싶은 거야, 윤정아. 나는 입 속으로 난생 처음 이씨 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오우, 원더풀!"
토미가 연해 감탄을 쏟아 놓았다. 지난 주 내 장난으로 해서 내렸던 그 시골의 풍경도 좋았지만 오늘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이 물가 풍경은 자기가 이때까지 본 경치 중에서 단연 으뜸이란 것이다. 춘천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삼십 분을 달려와 내린 다음 엄청난 규모의 댐 둑을 건너 호수를 끼고 펼쳐진 산비탈 칠을 걷고 있었다. 토미의 감탄이 아니라도 나 또한 한 폭 그림 속에 든 느낌이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산비탈 그 뒷산이 호수 속에 푸른 그림자를 선연하게 던지고 있었다. 길 아래 물가 드문드문 목 좋은 곳을 골라 앉은 낚시꾼들의 그 침묵이 또한 그대로 그림이었다.
우리는 자동차 하나가 겨우 다닐 수 있는 그런 산 비탈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새벽까지 내린 비에 우거진 녹음이 한결 싱싱해 보였고 흙길은 먼지 하나 일지 않았다.
우리들 앞에서 경운기 한 대가 탈탈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경운기 소리에 한여름 대낮의 침묵이 괜찮게 깨져 낚시꾼들이 새삼 낚싯대 미끼를 갈아 끼느라 조금씩 움직임을 보였다. 우리들 앞에 달려온 그 경운기 위에는 웃통을 벗어버린 젊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샘골이 아직도 멀었습니까?"
그 젊은이가 경운기를 가볍게 세우면서 토미와 나를 얼마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훑어 보았다.
"우리 샘골까지 갑니다. 아직 말었습니까?"
그러자 그 젊은이가 문득 자기가 돌아온 호수 그 위쪽 한군데에 눈길을 주었다간 되돌리며,
"샘골은 지금 없어졌어유. 이 댐이 생기기 전까지 저 꼭대기 밤나무 많은 그 안쪽 골짜기가 샘골이었지우. 여기서 보기보다 아주 엄청 큰 마을이 거기 있었지만 지금은 물이 들어차서 산비탈에 몇 집만 남아 있을 뿐예유."
"몇 집 남아 있긴 하군요?"
"그렇지만 아무도 거길 샘골이라곤 하지 않아유."
"혹시 거기 살던 최창배씨라고 기억나세요?"
그는 생각해 보는 눈치더니,
"그런 사람 모르겠는데유."
그러면서 다시 한번 토미와 나를 번갈아 훑어본 다음 경운기에 발동을 넣고 있었다.
"저쪽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그 샘골로 들어가는 초입에 가겟집이 하나 있어유. 거기 가서 물어 보시게유."
나보다 네댓 살 위로 보이는 그 청년은 경운기를 몰고 떠났다.
"지노 킴. 네가 찾고 있는 사람이 거기 살고 있다는 건가?"
토미가 묻고 있었다. 나는 토미를 쳐다 보았다. 껑충하게 큰 키에 팔뚝에는 누런 털이 징그럽게 덮여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노린내 같은 걸 맡았다. 그들 속에 묻혀 살면서도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였다. 나는 걸으면서 물었다.
"토미, 너 6.25사변을 아니?"
"안다. 잘 안다."
물론 우린 신병 훈련소에서 정훈 교육 시간에 한국 역사에 대해서, 우리 들 심무와 관련된 6.25에 대해서 배웠다.
"토미 말해 봐라. 뭘 아는가?"
"형제가 싸웠다."
토미가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유우머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양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미국이 너희 한국 사람을 도와서 이기게 한 전쟁이다."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임마, 미국이 아니라 국제 연합군이다."
내가 한국어로 씹어 뱉었다,
“홧?"
"네 말이 옳다는 뜻이다. 토미. 그때 이겼다면 너는 왜 지금 여기 와 있는가?"
"한국은 아직 전쟁중이다. 한국의 형제들이 원하지 않아도 치러야 하는 그런 싸움이다. 그래서 우리가 도우러 왔다."
"왜, 무엇 때문에 돕는 거냐?"
"친구니까."
"임마, 그렇다면 붕우유신이라는 말씀부터 명심해라!"
내가 다시 한국어로 씨부렁거렸다.
"환 휫스 민?"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아도 좋았다. 우리들은 이미 아까 그 청년이 일러준 골짜기 입구 길옆에 위치한 구멍가게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가게 진열대 한구석 마루에서 젊은 아낙네 하나가 애기 한테 젖을 물리고 있다가 황황히 몸을 돌려 앉으며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있었다. 젖을 빨던 어린애가 입 언저리를 젖으로 흥건히 적신 채 가게 앞에 선 우리 둘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그때 우리는 뒤에 어떤 인기척을 느꼈다. 가게 앞에 평상이 두 개 놓여 있고 그 한쪽에 안 노인네 하나가 모로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토미와 나는 그 평상 한쪽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땀을 닦았다. 이제까지 우리가 끼고 올라온 호수의 원줄기와는 달리 가게 앞쪽으로 또 다른 호수가 널게 펼쳐 들고 있었다. 청년이 말한 옛날 샘골이 바로 여긴 모양이었다.
내가 주문한 대로 아낙네는 사이다 두 병과 맥주 두 병, 그리고 과자 한 봉지를 평상 있는 데까지 날라 왔다. 사이다와 맥주는 집 안마당으로 들어가더니 물에 젖은 걸 들고 나왔다. 그런대로 병이 차가웠다. 우물물에 담갔던 모양이 다.
가게 마루에 혼자 남은 애기를 향해 걸어가는 그 안 노인네를 내가 붙들었다. 칠십쯤 되는 아주 작은 체구의 그 노인은 토미를 자꾸 흘금거리며 평상에 엉거주춤 앉았다, 나는 노파에게 사이다를 따라 건넸다. 그리고 가게 안 마루에서 이쪽을 겁먹은 눈으로 보고 있는 아이에게 과자를 쥐어 주고 왔다. 나는 노파가 우리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 하기 위해 이것저것 시골 일에 대해 묻고. 마루에 있는 애기에 대해서도 물었다. 애기는 그 노파의 네째 아들이 낳은 어린애였다, 아들 넷, 딸 둘의 몸에서 열 여덟 명의 손자 손녀를 둔 체구가 작은 그 노파는 올해 여든 둘의 나이답지 않게 정정해 보였다. 귀도 전혀 어둡지 않았다.
"할머니, 여기 샘골에 오래 사셨어요?"
"오래 살다마다! 열 여섯에 조 너머 창말서 일루 시집을 와 가지고 설랑 칠 년 전에 여기 물이 들어차서 다들 대처루 떠났지만 아즉두 끄덕없이 살구 있으니께 육십 여섯 핼 예서만 산 게여."
노파는 점방에 앉아 사람을 많이 겪은 탓인지 비교적 쉽게 얘기가 줬다.
"할머니, 그럼 최 창배란 사람 아시겠네요?"
노파는 잠시 옛날 마을이 있었던 호수 한가운데로 눈을 돌리고 생각하는 눈치더니,
"그런 사람은 모르겠구먼. 샘골에 최씨라면 최 멘장 최두세이 밖에 얼었는데---"
"맞아요, 할머니. 그 최 뭐라는 부 면장 하시던 분의 아들이 바로 최창배씨 아녜요?"
"그런지도 모르지. 그 최멘장한테 아들이 하나 있긴 했지만,,,,,"
"그 최면장 아들이 어떻게 됐어요?"
"내가 아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6.25난리 때 인민군에 끌려가선 입때 소식이 없으니께."
"그러면 그 집 할머니가 여기 샘골에 사셨을 텐데요?'
노파는 새삼 내 얼굴을 휘휘 뜯어보고 나서 말했다.
"치멘장 마누라 말인가?"
"네, 그래요, 할머니!"
"거 왜 새삼스레 죽은 사람을 찾수?"
"죽었어요, 그 할머니가?"
나는 퉁기듯 평상에서 일어났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토미는 가게 마루에 걸터앉아 그 어린애를 무릎에 앉혀 데리고 놀고 있었다. 그의 요란스런 남방셔츠 깃을 다잡아 쥔 채 그 어린애가 키들키들 웃고 있었다.
"죽었어. 그놈에 친구 맨날 나보다 십 년은 더 산다구 자랑해 쌓더니 4년 전에 저 세상에 갔수!"
"4년 전이오?"
"거 왜, 남북이 왔다갔다 한다구 한참 떠들썩하던 해 말이유. 그때 그 늙은이, 아들 만나게 됐다구 덩실덩실 춤을 추더니만---"
해가 쩡쩡한 여름 대낮인데 노파는 눈물을 질금거렸다.
"젊은인 신문도 못 봤는가? 우리 애들이 그러는데 그 늙은이 죽은 거 강원도 신문에 크게 났다던데,,,,,,"
"어떻게 돌아가셨는테요?"
"그놈에 돈이 웬수지."
"돈이요?"
"아들 돌아오구 손자 찾으면 준다구 꽁꽁 뭉쳐 됐던 돈 말이지. 최멘장 네 땅이 샘콜서 제일 많았지. 댐이 생겨 물에 잠기는 값으로 타낸 돈이지, 돈이 적기나 한가, 남들이 위험하다고 춘천 은행에 맽기라구 그렇게들 얘기했건만,,,,,,난리가 나면 은행두 못 믿는다구 집안에 감춰 가지고 있더니만 결국 당한 거지 뭐."
"범인은 잡혔나요?"
"웬걸, 창말 살던 건달패 녀석인데 돈을 싹 쓸어 가지고 도망을 쳤지. 얘기들이 없는 걸 보니까 안즉 못 잡은가 봐."
"그 할머니 어디에 사셨는데요?"
"먼저 그 큰 집이야 저 물 속에 잠겼구,저기 보이는 저쪽 저 낡은 집이우. 게다가 집을 짓고 혼자 살았지. 대처루 나가면 아들과 손자가 돌아와두 못 찾을 게라구 하면서,,,,,,"
나는 노파가 가리켜 보이는 골짜기 안쪽 노송이 두어 그루 물 쪽으로 가지를 펼치고 있는 언덕 위의 그 오똑한 집 한 채를 바라보았다.
"저기 지금 누가 사나요?"
"누가 그 흉한 델 들어가 살겠수. 빈 집으루 저렇게 썩어가는 거지. 가끔 낚시꾼들이 비를 피해 들더구만."
나는 어깨에 힘이 쭈욱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할머니 산소가 어딥니까?"
"그 친구 저 죽으면 즈 영감태기 옆에 묻어 달라구 해서 그 옆에다가 아무렇게나 파묻었지. 합장을 해 줄래야 온이 있어야지. 땡전 한푼 안 남기고 다 털렸으니 어쪄. 마을 사람들이 추렴을 해서 장살 지냈지."
"거기가 어딘데요?"
"왜, 찾아가 볼래우?"
노파가 다시 내 아래위를 훑다가 말했다.
"그 늙은이와 뭔 관곈지 몰라두 여튼 반갑수."
노파는 그 두 그루 노송 있는 언덕 뒤편 골짜기를 가리키며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리고 혼잣소릴 했다,
"그래두 그 친구 무덤을 찾는 사람이 또 있군!"
"할머니, 누가 또 찾아왔었어요?"
"왔었지. 시어머이 죽은지 반년 만인가 그때 최씨집 메누리가 그때 데리구 나간 병신 자식과 같이 왔더구만. 그 늙은이가 그렇게 찾아나서던 손잔데 그땐 이미 죽은 걸 으쪄누. 올려면 진작 올 게지. 매정한 것들!"
"그 할머니가 손자를 찾았다구요?"
"찾다마다! 한 해에 한 번씩은 대처를 휘휘 나댕기다가 실심한 얼굴루 돌아와선 늘어진 걸 내 눈으루 직접 보구 살았구먼."
"왜 찾았어요?"
"이런 사람! 아, 제 핏줄을 찾는 게 인지상정 아닌-그 늙은이 생각 한번 잘못해 가지고 죽을 때까지 가슴 치며 살았어. 그래두 제깐엔 젊은 것 잡아 둘 수 없다구 맘 크게 먹고 일부러 구실 붙여 내쫒긴 했지만 손자까지 왜 줬는지 모르겠다고 땅을 치며 애통하데."
"할머니, 그때 찾아왔던 그 여자하고 병신 아들은 어떻게 됐지요?"
"어떻게 되긴, 지 얘기룬 시어머니가 내쫓은 뒤 재가해서 자식 여럿 두고 잘 산다고 하면서, 시어머니 죽은 걸 꽤나 애통해 하더구먼. 제엔장할 것, 그렇게 애통하면 죽기 전에 찾아 뵐 거지. 못 써어! 젊은 사람들 우리 같은 늙은이 속 너무 모른다구!"
"저리 저 집에 갔었나요? 그 며느리하고 손자,,,,,,"
"갑디다. 그 몸을 잘 가누지두 못하는 병신 자식을 껴안구 산솔 찾아갑디다. 핏줄이 뭔지,,,,,,"
"그리고 돌아갔나요?"
"아 그렇잖구, 아무도 없는 게서 뭘 하겠나."
"할머니가 직접 보셨어요? 그 사람들이 저기서 돌아오는 거 말입니다.
노파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다시 한번 내 얼굴을 쳐다보고 나서,
"봤수다. 올라간 뒤 몇 시간이 돼두 안 내려오길래 참 이상타 했더니 날이 꽤 어두워서야 내려옵디다."
"그 병신 남자두요?"
"그랬을 거유. 우리 가게서 빵이랑 사이다랑 잔뜩 사 멕여 가지고 저쪽 길루 내려갔으니께."
노파는 좀 전 토미와 내가 걸어온 산비탈 길을 턱으로 가리켜 보였다.
"잘 걷지도 못하는 병신 자식하고 그 컴컴한 길을 우트게 갔는지,,,,,,서울 산다구 하더구만."
나는 평상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젊은 여자한테 물건 값을 치렀다.
아울러 4홉들이 소주 한 병과 곰팡이 긴 마른 북어 두 마리를 사서 누런 봉투에 넣었다.
"헤이, 토미!"
토미는 그 가겟집 어린애를 안고 물가 고추밭에서 잠자리를 잡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몸을 웅크린 채 누런 털이 숭숭한 그 팔을 내뻗고 있었다.
나는 토미를 그네들의 무덤까지 데리고 갈 참이었다. 그리고 내 친구 토미에게 소주를 먹일 생각이었다. 한국을 알고 싶어하는 미국 사람에게는 소주로부터 시작할 일이다. 또한 황량한 들판에 던져진 그 시든 나무들의 꿋꿋한 뿌리가 돼 줄는지도 모를 우리의 형 아베의 행방을 찾는 일도 우선 그 무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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