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단편소설3

37. 침몰선

by 자한형 2022. 5. 18.
728x90

침몰선 -이청준

 

어느 가을날 오후, 진 소년은 처음으로 마을 앞 바다의 침몰선을 보았다. 아니 침몰선은 훨씬 전부터 거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것을 마음에 두어 본 일이 없었다. 소년은 그가 태어난 일을 전혀 기억할 수 없듯이 그 침몰선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것은 그냥 바다의 한 부분으로 거기 있었다. 그러니까 침몰선에 대한 소년의 가장 오랜 기억은 그 날 오후의 일이었다, 뜰 앞 감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잎들 사이로 한나절 바다를 내다보던 소년의 생각 속으로 문득 그 침몰선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 때 침몰선은 차 오르는 밀물을 타고 금방이라도 닻을 올리고 떠나갈 듯이 출렁거리며 떠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다. 그 날부터 진 소년에게 침몰선은 바다의 한 부분이 아니었다. 이제 소년은 그 배에 관한 나이 먹은 마을 사람이나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실상 그 때까지도 소년은 그 배가 영영 다시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된 침몰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마을 가운데의 우물처럼 또는 동구 밖의 정자나무처럼 그 배는 으레 거기 있는 것이려니 여긴 진 소년이 배가 거기에 언제나 머물러 있는 것을 이상히 여길 까닭은 없었다. 언제고 배는 바다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소년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로부터 듣고 난 다음이었다. 이 남쪽 바닷가까지 난리를 밀고 온 못된 사람들이 흐지부지 자취를 감추어 갈 무렵의 어느 날 밤바다를 뒤흔드는 요란한 진동 소리가 들리더니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앞 바다 멀찌감치에 집더미 같은 배가 한 척 버티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 배는 곧 다시 쿵쿵거리며 넓은 바다로 나갈 것처럼 머리를 반쯤 밖으로 돌리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그 날 해가 저물어도 배는 떠나갈 기척이 없더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배는 여전히 떠나가지를 않았다. 드디어 사리가 되어 썰물이 멀리까지 나간 다음에야 마을에서는 그 배가 펄에 얹혀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배에는 사람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았지만 사람들은 두려워서 그 침몰선 부근을 가 보려고 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국군이 다시 돌아왔어도 사람들은 역시 그 배 근처로 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는 대신 사람들은 그 배에 관해서 이러쿵저러쿵 아는 체들을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결국 그 침몰선이 물을 타고 바다로 나가게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 배에 관해서 아는 체하는 말들은 하도 가지 각가지여서 진 소년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그 배가 언제고 다시 떠나가리라는 말은 정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침몰선이 완전히 펄 위로 드러나서 거멓게 보일 때는 그렇지도 않았지만, 저녁 노을에 붉게 물들거나 햇빛을 받고 은빛으로 선체가 빛나면서 밀물에 잠겨들 때에는 그 날 감나무 잎 사이로 처음 배를 보았을 때처럼 금방 고동을 울리며 떠다가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마을 앞 포구로 이어진 허연 물줄기의 띠를 타고 올라오려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지금 막 망망 대해로 나가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 그 반쯤 돌린 뱃머리가 더욱 그런 느낌을 갖게 했다.

겨울이 되었다. 푸르게 빛나던 바다는 강철처럼 검고 차갑게 변했다. 침몰선이 아직도 그 강철처럼 검고 차가운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햇빛이 좋은 날은 그 선체가 검은 바닷물 위에서 더욱 눈부셨다. 그러나 진 소년은 이제 마을 사람들이 그 배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들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 배가 다시 떠나가리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소년은 안타까웠다.

저 배는 언제 떠나가게 될까요?

소년이 안타까워 물으면 사람들은 으레,

흥 배? 쯧쯧. 아직 배를 생각하고 있구나, .

하고 터무니없이 그를 딱해하거나,

버려 둬 갈 테면 가겠지.

하는 식으로 관심도 없이 화가 난 사람처럼 말했다. 그럴수록 소년은 그 배에서 생각을 돌릴 수가 없었다. 실끈에 발목을 묶인 작은 새처럼 안타까워지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 배가 막상 떠나가 버린 뒤의 휑한 바다를 생각하며 은근히 맘속이 허전해지기도 했다. 그런 때 소년은 으레 자기가 조그맣게 되어 그 바다를 건너가곤 했다.

그렇게 소년은 하루도 배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루도 그 배를 바라보며 그 이상한 슬픔 같은 것을 맛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한데 땡겨울이 되자 마을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도 조금씩 배에 관해서 얘기를 하던 나이 먹은 청년들이 한 사람씩 마을을 떠나갔고, 대신 소년이 상상할 수도 없는 먼 곳으로부터 낯선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그것은 진짜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새로 마을로 온 사람들은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다. 늙은 노인네나 귀여운 계집아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그만 보퉁이 하나를 들고 마을로 들어왔으며 말소리가 이상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그 이상한 말소리로 옹진!이라고만 말하고 성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는데, 진 소년은 그 이상한 말소리로 보아 옹진이 무척 먼 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진 소년은 처음 그 낯설고 공연히 성이 나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좀 무서웠으나 금방 그들을 좋아하게 되고 말았다.

이제 마을에는 앞 바다의 배에 관해서 말하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졌는데 뜻밖에도 그 새로 온 사람들이 배에 관해서 소년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배에 관해서 귀신처럼 샅샅이 알고 있었다. 소년이 묻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무서운 전쟁 이야기며 배가 고파 죽은 사람들과 눈보라를 뚫고 달리는 기차 등 소년이 생각할 수도 없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년이 재미있어 하는 것은 배의 이야기였다. 그 배는 오백 명의 사람을 한꺼번에 실을 수 있으며 날아가는 비행기도 떨어뜨릴 만큼 굉장한 대포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그 배가 마을 앞 바다로 왔을 때 아직도 그 나쁜 군대가 도망치지 않고 있었더라면 이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라고 짐짓 놀라 보이는 것이었다. 진 소년은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언제나 그들이 잘 모여 앉아 있는 집 뒤의 정자나무 아래 양지바른 곳으로 갔다. 그 곳에서는 바다가 잘 내려다보였고, 새로 온 사람들은 늘 거기에 모여 앉아 침몰선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소년이 알 수 없는 멀고 먼 그들의 고향 옹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 모여 있다고 언제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성난 사람처럼 뚱하니 바다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소년은 이제 그들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우리 마을 앞에도 저렇게 바다가 있었지,'

가끔 혼잣말처럼 그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말을 했고 그럴 때 그들은 가만히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들은 뭔가 무척도 슬픈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이 되었다.

아직도 침몰선은 떠나가지 않았으나 마을에는 이제 아무도 그 배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처음부터 그 배에 관해서 아는 체하던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가 버렸거나 벌써 지쳐 버린 듯했고, 새로 온 사람들도 겨울 동안 모두 이야기를 해 버린 탓인지 이제는 더 배의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진 소년은 아직도 그 배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가 영영 거기 가라앉아 삭아 없어지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언제고 그 배는 떠나가고 말 것이다. 아직도 밀물에 잠겨드는 배를 보면 방금 닻을 걷어올리며 출렁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소년의 생각을 아무도 믿어 주지 않고 숫제 배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듯한 사람들이 원망스럽고 미울 뿐이었다. 그래서 조금씩 얼굴이 부슥부슥 부어 오르기 시작한 그 옹진 사람들을 보고도 진 소년은 그들이 배 이야기를 잊어 버렸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쏘아 주었다. 소년의 말에 그 사람들은 정말 그렇기나 한 듯이 누렇게 뜬 얼굴에 힘없는 웃음을 띄우며 머리를 끄덕였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배의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정자나무 아래 모여 앉아 있는 일이 없었다. 나무 작대기 끝에다 쇠못을 송곳처럼 쭈빗하게 깎아 박아 가지고는 들논이나 개울가 같은 곳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다. 그리고 잡아 온 개구리를 그 사람들은 진이네가 바다에서 잡아 온 전어 따위를 그렇게 하듯이 구워 먹거나 솥에 넣어 끓여먹는 것이었다. 개구리를 잡아다 구워 먹는 것은 전에도 마을에서 가끔 본 일이 있었다. 아이들이 가끔 개구리를 잡아서 창자를 꺼내 버리고 껍질도 벗기고 해서 불에 구워 먹었다. 그 익은 고기가 닭고기처럼 하얗고 깨끗했다. 그것을 진이더러 먹어 보라고 내미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

나 진 소년은 그걸 먹지 않았었다. 언젠가 형준이가 그것을 조금 먹어보고 자랑을 했다가 아버지에게 되게 야단을 맞았던 것이다. 닭에게 잡아다 주어도 아버지는 못 하게 했다. 개구리를 먹는 놈은 사람이나 닭이나 죽어서 뱀이 된다는 것이었다.

한데 그 옹진 사람들은 그것을 예사로 먹었고 더욱이 국을 끓이듯이 솥에다 끓여서 먹는 것이다. 개구리를 잡는 것도 그냥 덮쳐 잡는 것이 아니라 그 쇠꼬챙이로 등을 콕 찔러서 잡았다. 그 짓을 선수로 잘했다. 거기다 때로 그 사람들은 뱀까지 찍어 올렸다. 보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들은 뱀도 먹는다는 것이었다. 진 소년은 치를 떨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사람들에게 배의 이야기를 조르지 않았다. 그가 정자나무 밑으로 가서 배를 내려다볼 때 소년은 오히려 그 사람들이 그 곳으로 올까 봐 두려워하게까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마을에는 또 한가지 새로운 일이 생겼다. 어느 날 마을에는 먼저 왔던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굉장히 밀려들어 왔는데, 이번에 온 사람들은 모두가 남자들이었고 그것도 나이를 먹은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옹진서 온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그보다 더 멀고 더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배를 보고도 별로 신기해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성을 낸 것 같은 얼굴을 하지도 않았다. 우락부락 술을 먹고 첫날부터 온 마을 골목을 개처럼 마구 짖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며칠이 되지 않아서 그들은 모두 바닷가로 내려가서 투덕투덕 움막 같은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그 곳 일을 새로 시작하러 온 것이라고 했다. 마을 앞에는 일본 사람들이 쌓다 말고 쫓겨갔다는 바다로 뻗은 긴 제방이 있었다. 그것은 마을 양쪽으로 바다를 껴안듯 뻗어 내린 멧부리에서 각각 바다 가운데를 향해 마주 보고 쌓아 가다가 물길이 제일 먼저 드나드는 깊은 포구 근방에서 멈추고 말았는데, 태풍이 불 때마다 성난 파도가 밀려와

서 그 허술한 데를 군데군데 끊어 놓고 있었다. 돈 많은 근처 사람이 그 바다를 막는 일을 끝내서 넓은 논을 한꺼번에 만들고 싶어했으나 그 때마다 바다가 화를 내고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뚝이 끊어진 곳에는 그 때마다 커다란 웅덩이가 새로 생겨서 동네 아이들의 낚시터가 되어 주곤 했던 것이다.

진 소년은 물론 일본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래서 그에게는 제방 또한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바다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제방을 이어 바닷물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뚝을 다시 끊어지지 않게 튼튼히 쌓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마을에서는 그 일을 옳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그 뚝은 다시 끊어지게 마련이며 이 사람들도 나중에는 지쳐 떨어져서 이 곳을 떠나게 되고 말 것이라고 했다. 나이 먹은 어른들이 더 그랬다.

그러나 며칠이 더 지나자 정말 흙구루마가 짜여지고 도깨비집처럼 음침한 판잣집 속에 녹슬어 있던 선로들이 조금씩 그 뚝으로 깔려 나갔다. 그리고는 드디어 흙을 파내고 구루마들이 구르릉 구르릉 소리를 내며 흙을 실어다 부었다. 돌산을 화약으로 깎아 내어 실어 내기도 했다,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던 옹진 사람들도 그 일터로 가서 구루마를 밀고 흙을 파내곤 했다, 마을 사람들마저 한 사람씩 그 공사판으로 내려가서 일을 해 주고 밀가루를 얻어 왔다.

일판은 마을에서 조금 더 내려간 바닷가였지만 그 일이 시작된 뒤로 마을은 굉장히 어수선해진 것 같았다.

침몰선은 여전히 물 속으로 잠겼다 솟았다 하고만 있었다, 어찌 보면 멀찌감치서 그 일판을 구경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진 소년에겐 그 배가 그렇게 무슨 살아 있는 것처럼만 여겨졌다. 그래서 그 배가 어느 땐가는 마음을 돌려 그 곳을 떠나리라고 믿고 있었다.

아직도 진 소년에게 그 배는 마을의 어떤 일보다도, 온통 마을을 어수선하게 한 그 공사판의 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되어 있었다.

진달래가 붉은빛을 바래기 시작할 무렵 마을에는 또 한가지 소동이 일어났다. 제일 먼저 마을을 떠나갔던 청년이 씩씩한 옷차림으로 총을 메고 마을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림에서 본 국군이 되어 왔는 데, 철모를 쓴 모습이 아주 사람까지 달라진 것같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를 붙들고 반겼다. 청년의 어깨를 흔들며 우는 여자도 있었다. 진은 그가 맨 처음 마을로 들어올 때부터 그의 뒤를 따라가서 그가 집 식구와 처음 만나는 것까지 보았는데, 그 때 그 집 식구들은 신도 신지 못하고 뛰어나와서는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은 그게 너무 반가워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년은

그렇게 당당한 모습과는 반대로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했다.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는 노인네들의 말에도 그는 뭘요, 저야 어떻습니까? 고향에 계신 분들이 외려 지내기가 어려우셨겠지요, 하며 웃었고, 가끔 생각난 듯이 진이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캐러멜과 퍼석퍼석한 밀가루 과자를 봉지에서 꺼내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한데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청년을 누구보다도 반가워한 것은 진 소년이었다. 그는 이제 비로소 배에 관해서 이야기할 사람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배를 싫어하기 전에 마을을 떠나갔으니까 틀림없이 그 배 이야기를 다시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불안하기도 했다. 그가 배 같은 것은 벌써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은 가슴을 조이며 청년의 거동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배 이야기는 이따 둘이서만 하자고 눈짓을 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음 날에야 진 소년은 비로소 청년의 마음속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년을 절반쯤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옷을 바꿔 입고 정자나무 아래로 나온 청년을 아이들이 둘러싸고 앉아서 이야기를 들었다, 어른들 앞에서는 뭘요, 뭘요, 하기만 하고 말도 잘 하지 않고 겸손하던 청년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서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전쟁 이야기였다. 캄캄한 밤중에 맞붙어 쌈을 할 때는 먼저 머리를 만져 보고 민둥머리는 칼로 모조리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며, 어떤 날 밤에 는 '우리편' 서른 명이 싸움을 시작했다가 청년과 다른 한 사람 단 둘이만 살아 남았었다는 이야기들을 쉴새없이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가 가장 신이 난 것은 그가 적의 탱크로 다가가서 슬쩍 뛰어 올라가 그 뚜껑을 열고 안에다 수류탄을 집어넣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였다. 대개 진보다 조금씩 더 나이를 먹은 아이들은 숨을 죽이며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진 소년은 아직도 뭔가 초조하게 기다려지는 게 있었다. 청년의 이야기가 끔찍스러워서 이제 그만 그 이야기는 끝을 내 주었으면 생각했다, 그러나 청년은 아직도 이야기가 끝이 없는 모양이었다.

"느들이."

그러면서 아이들을 한번 휘둘러보고는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비행기며 커다란 군함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전쟁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비행기도 타 보고 배도 타 본 사람처럼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특히 배에서 대포를 쏘아대는 이야기는 아이들을 온통 흥분하게 했다.

"하지만 저 배도 이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대요. 한꺼번에 오백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릴을 수 있으니까요."

한쪽에서 조마조마 듣고만 있던 진 소년이 앞 바다에 우두커니 머물러 있는 침몰선을 가리키며 처음으로 말참견을 했다. 소년의 말은 조금 엉뚱했으나 모처럼 마음을 먹고 내놓은 말 같았다. 청년이 조금 비위가 상한 듯 소년을 힐끗 돌아보았다. 소년은 그 눈길에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목을 움추렸다. 그러자 청년은 별로 기분이 나빠진 것 같지는 않았다.

", 참 저 배가 아직도 저기 있군. 한데 누가 그런 바보 같은 소릴 해. 저건 그냥 수송선이야. 대포 같은 건 없어. 게다가 사람도 많이 실을 수 없는 조무래기 배지."

그는 진에게 그 배를 잘못 말해 준 사람을 비웃으면서 자신 있게 설명했다. 진은 청년이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자 슬그머니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의 얼굴은 수심에 가득 싸여 있었다. 청년은 아까 이야기하는 투로 봐서 지금까지 배를 잊어버리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보다도 그 배는 정말로 대포도 없고 사람도 조금밖에 실을 수 없는 새끼 배일까.

소년은 집으로 오자마자 아직 앙상하게 가지만 하늘로 쳐들고 있는 감나무로 올라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이번엔 정말로 실망을 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크고 당당하던 배의 모습이 어느 새 조그맣게 변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 배는 물 속에서 겨우 머리만 내놓은 작은 나무토막처림 보잘 것 없이 작았다. 정말로 그 곳에는 대포가 있을 수 없고 사람이 많이 탈 수도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아직도 그 배가 언제나처럼 금방 떠나갈 듯이 출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소년을 깊은 실망에서 건져 주었다. 며칠 뒤에 청년은 그가 마을로 들어올 때와 똑같이 옷을 입고 다시 마을을 떠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동구까지 따라나가서 그가 가는 것을 바래주었고 그 중 몇 사람은 버스가 닿는 장거리까지 따라갔다 왔다. 그러자 며칠이 지나 또 마을을 떠나갔던 청년 하나가 먼젓번 청년과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청년도 먼젓번 청년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마을 사람들이 반겨 주었고 그는 또 먼젓번 청년이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했던 대로 뭘요, 뭘요,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더 고생이지요, 하며 부끄러운 듯이 말했고, 아이들에게는 캐러멜과 밀가루 과자를 나누어주었다, 다만 다른 것은 그보다 먼저 누구가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는 '자식이!‘ 하면서 씩 웃는 것이 그가 제일 먼저 마을로 돌아온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퍽 섭섭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옷을 갈아입고 아침 일찍 정자나무 아래로 나와서 신나게 전쟁 이야기를 했으며 그 이야기도 또한 먼젓번 청년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시 들었다. 진은 모든 것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번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더 듣기가 싫었다. 그러나 배에 대해서 그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 작은 새끼 배에는 대포도 없고 사람도 많이 실을 수 없지요?

그러자 그 청년은 또 먼젓번 청년처럼 조금 속이 창한 듯 진 소년을 쳐다보았고, 그런 역시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

", 참 저 배가 아직도 저기 있군,"

하더니 이번에는 처음으로 청년과 아주 다른 말을 했다.

"하지만 저 배에도 비행기가 내릴 수 있을 거야. 여기선 조그맣게 보여도 배는 굉장한 거다, 물론 대포도 있지. 그 대포는 비행기도 떨어뜨린단 말야."

그 청년도 며칠이 더 지나가자 다시 마을을 떠나갔다. 먼젓번 청년과 똑같이 온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두 번째 청년이 다녀간 뒤로 배는 다시 옛날의 그 당당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정말 오백 명의 사람이라도 한꺼번에 실을 수 있을 것처럼 배는 물위로 우뚝 솟아올라 있었으며 삐죽삐죽 수많은 대포들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날마다 감나무 가지에 올라가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는 소년은 이제 깊은 생각에 잠겨드는 일이 자주 생겼다.

누구도 그 배가 다시 떠나갈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제 그 배를 상당히 가까이까지 가서 보고 온 마을 사람이 있었지만, 그 사람들도 배가 다시 떠나갈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배에 관해서 자신 있게 단언하고 간 그 두 청년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일은 없었다. 그의 생각대로 그 배가 아직도 떠나가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소년은 오히려 이상스러웠다. 그리고 그를 가끔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한 것은 그 배에 관해서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또 배의 모양이 늘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세 번째 청년이 마을로 돌아왔다. 그 역시 전쟁 이야기를 신나게 했고 마지막으로는 배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그 배가 형편없이 작은 것이라고 말했으며 배가 또 정말로 그의 말처럼 형편없이 작아져 버렸던 것이다.

소년은 이제 정말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날마다 감나무 가지 위로 올라가서 생각에 잠겼지만 시원한 해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청년들은 계속해서 마을로 돌아왔다가 며칠이 지나면 또 떠나가곤 했다. 소년은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정자나무 아래로 가서 그 사람의 배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누군도 그 배에 관해서 확실히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수송함이다, 전함이다, 아니 잠수함이 펄에 얹힌 거다, 구축함의 한 종류다, 천만에 저건 경비정이다, 조그만 상륙용 주정일 뿐이다---. 그 사이에 소년이 알 수도 없는 이름들이 수없이 나왔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다음 사람이 오면 또 바뀌게 마련이었다. 아니, 어떤 때는 두 사람이 한꺼번에 맞부닥쳐 와서는 서로 우겨대는 때도 있었다.

싸움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는 중에도 마을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새로 마을을 떠나갔고, 그 새로 간 사람들 중에는 전에 갔던 사람들보다 휠씬 나이를 더 먹었거나 덜 먹은 사람까지도 끼기 시작했다.

한데 그 무렵 마을에는 지금까지의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소식이 한 가지 전해져 왔다. 두 번째로 마을을 다녀간 청년이 영영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을에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 청년의 집은 소식이 전해지자 순식간에 사람들로 꽉 찼고 한쪽부터 울음바다가 되기 시작했다. 청년이 다 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조그만 상자를 흰 베로 목에다 걸어 안고 온 군인과 그를 따라온 총 멘 다른 군인 한 사람이 전한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흰 상자로는 조그만 무덤을 만들었다.

한데 그 슬픈 소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첫번째 일이 있은 얼마 뒤에 똑같은 소식이 두 번째로 전해졌다. 이번에는 맨 첫번째로 마을을 다녀간 청년이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역시 조그만 상자를 흰 베로 목에 걸고 온 군인과 총 멘 군인이 전하고 갔다.

그리고부터는 그런 소식이 꼬리를 물고 마을로 들어왔다. 그것은 꼭 마을을 한번 다녀간 사람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을을 떠난 후 한번 다녀가기도 전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부터 오는 수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그런 소식 대신에 다리나 팔이 하나 없어진 모습으로 마을로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은 나무 발을 짚거나 안경을 쓰고는 마을을 떠나지도 않고 그 목발로 피난민과 싸움을 잘 했다.

그리고 성미가 아주 사납고 신경질이었다. 그런 사람이 돌아올 때는 슬픈 소식보다 더 많이 울었다.

그 무렵부터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전번 사람들처럼 전쟁 얘기뿐만 타니라 앞 바다의 배에 관해서도, 아니 다른 무슨 이야기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정자나무 밑에 나와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기듯 바다를 내려다보며 턱만 쓸고 앉아 있다가 다시 마을을 떠나가는 것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개 나이가 좀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쟁의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간 사람일수록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빨리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하지 않고 마을을 떠나간 사람 중에도 그런 소식만 전해 오는 사람이 많았으며 아직도 전쟁이나 배에 관해서 열심히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그 슬픈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이제 그 소식은 처음처럼 횐 상자를 목에 걸고 오는 사람이 가져오는 일이 없었다. 하여튼 누가 가져오는지, 어떻게 들어오는지도 모르게 그 소식은 마을에 퍼지곤 했다. 어떤 때는 우체부가 가져오기도 했다.

한번 마을로 돌아와서는 다시 그 싸움터로 돌아가지 않고 내내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이 가끔 있었는데, 그 군인들이 마을로 오는 것은 그 사람을 데리러 올 때뿐이었다. 그 때 그 사람들은 횐 상자를 메고 오는 사람처럼 순하지 않고 훨씬 무서웠다.

그러나 그 군인들은 데리러 온 사람을 한 번도 데리고 가지 못했다. 그 사람이 아주 마을에서 숨어 버리거나 아랫일터로 가서 거짓말로 먼 곳에서 온 것처럼 꾸미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자꾸자꾸 더 깊은 생각 속에 잠겨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그 배에 관해서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결국은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이번에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 마을로 돌아왔다 왜냐 하면, 그는 지금까지 그 배에 관해서 말한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게다가 그런 그의 설명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바로 배를 타고 싸우다 돌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을로 들어올 때 다른 사람들처럼 풀색 옷을 입고 온 것이 아니라 반쯤 까뒤집은 이상한 모양의 흰 모자를 쓰고 또 옷은 가끔 소학교에 다니는 마을 계집애들이 입은 것과 같은 등받이가 있고 팔목이 좁은 까만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다에서 배를 타고 싸우는 사람들이 입는 옷이라고 했는데, 영락없이 그 계집아이들의 옷을 흉내낸 것이었다. 그 청년은 실상 전쟁이 시작되어 처음 청년들이 돌아왔을 때까지도 아직 마을에 있었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 소년과 같이 정자나무 아래서 들었던 일도 있었다. 그는 저의 어머니가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기어이 마을을 떠나갔던 '망나니'였다. 한데 그가 어느 누구보다 도 더 보기 좋은 모습으로 그리고 바다에서 싸우다 마을로 돌아온 것이 다.

그리고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은 벌써 시들해진 전쟁 이야기를 다시 신나게 했고, 배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더 자신 있게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치들 땅굴 속에서 하늘만 쳐다보고 총이나 쏘다 와선., ,.., 비행긴 하늘에 날아간 것이나 구경했겠지. 바다를 구경이나 해? 괜히 아는 체들을 한단 말야."

그는 어느 새 말씨까지 달라져 가지고 우선 이렇게 먼젓번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탔던 배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 배에는 정말로 비행기가 앉는다고 했다. 그리고 대포도 수없이 많으며 물론 사람은 한꺼번에 천 명을 싣는 것도 문제없다고 했다. 옛날 일본 사람들과 쌈을 했을 때에는 일본 비행기들이 자꾸 그 배의 굴뚝 속으로 날아 들어와서 쾅 배를 불태우려고 했지만 그래도 배는 끄떡없을 정도였다고.

그러나 그 일본 비행기들이 퍽 귀찮은 것은 틀림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저런 자랑 끝에 청년은 마지막으로 앞 바다의 침몰선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물론 그 청년도 처음에 배 이야기를 했을 때는 지금까지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음 저 배가 아직도 있었군.' 하고 잠깐 놀라 보였지만, 그러나 그는 방금 다시 명랑해져서, 외려 자랑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어느 것보다 가장 공평한 듯했다. 그 침몰선은 청년이 타고 있는 배에 비해서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애기 배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고.

그 배는 보통 바다를 지키는 일을 하기 때문에 비행기가 앉거나 사람을 엄청나게 많이 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대포나 총은 많이 있으며 어쩌면 그 배의 한쪽에 조그만 운동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운동장이란 말은 여하튼 거기에 있던 아이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년은 그 배가 저 혼자는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없으며, 아마 다른 큰 배가 와서 언젠가는 끌고 나갈 것이지만 지금은 모든 배들이 한창 전쟁에 바쁘기 때문에 그릴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청년도 며칠 뒤엔 다시 마을을 떠나갔다. 그 후로 청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처럼 나쁜 소식이 전해 온 것도 아닌데 영영 다시 마을로는 돌아오질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진 소년은 한동안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침몰선도 지금까지 어느 때보다 조용하고 선명한 모습으로 물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금방 다시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제 배가 요술을 부리는 일 때문이 아니라 어느 때고 그 배가 슬그머니 다른 배에게 끌려 마을 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배가 떠나가는 것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배는 그가 잠이 들고 있는 사이에, 또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딴 곳에 뺏기고 있는 사이에 슬그머니 그 곳으로부터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자주, 전보다 더 자주 감나무 가지로 올라가 그 배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그 감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 수도 있었다.

 

그 해 여름 진 소년은, 조금 늦은 나이로 재 너머에 있는 초등 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사이에도 마을 앞 뚝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은 가끔 마을까지 올라와서 밤새도록 개처럼 짖으며 골목을 쏘다니다가 내려가곤 했고, 어떤 때는 밤을 새워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 사람들은 대개 자기들끼리 쌈을 하는 것이었지만 가끔은 싸움의 상대가 마을 사람이 되는 때도 있었다. 쌈을 할 때 그 사람들은 너무나 무시무시했다. 돌멩이로 머리를 까부수거나 곡괭이 자루로 갈빗대를 부러뜨리거나 해 놓고 싸움은 겨우 끝났고, 한 사람이 항복을 하지 않으면 싸움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이었다. 간조를 받은 날 밤은 투전판이 벌어지는 게 보통이었고 그 투전판에서 시작한 싸움은 가장 무시무시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될수록 그 싸움에 끼어 들지 않으려고 했으나 언제나 그러시는 못했다. 마을 사람 중에서도 거기서 함께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가끔은 그 투전판에 끼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뼈가 부서지게 일을 하고도 돈을 조금도 모으지 못한다고 마을에선 욕을 먹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늦봄이 되었을 때에는 양쪽에서 뻗어 오던 뚝이 바다 가운데에서 만나게 되었다. 아주 물길을 끊는 데는 많은 날이 걸렸지만 그러나 결국 그 일도 끝이 났다. 우선 바닷물을 막아 놓고 때가 늦기 전에 심을 수 있는 곳은 모를 심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바닷물을 막자마자 사람들은 물이 짜지 않은 곳, 가장 마을에서 가깝고 지금까지 갈대가 우거져 있던 곳을 파 엎고 모를 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를 심은 사람들은 모두가 지금까지 뚝일을 핀잔만 하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 낯 설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뚝일을 했다. 뚝을 더 튼튼하게 흙을 실어다 붓고 떼를 입혔다. 그리고 뚝 안에다가는 물이 잘 빠지고, 수문을 통해서 들어온 바닷물이 잘 드나들 수 있도록 깊은 골을 팠다. 옹진 사람들도 이젠 모두 뚝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제방 일은 잘 되어 간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금방 그 바닷벌을 논 모양으로 만들어 모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고 사실은 한 번 사고가 있었다. 그 사고 때문에 일판 사람이 둘이나 목숨을 잃었는데, 한 사람은 그 나중에 온 낯선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마을 사람이었다. 그 두 사람은 함께 흙구루마를 밀다가 구루마가 비탈진 길을 맹렬한 속도로 내닫기 시작하자 그것을 타고 구르다가 잘못되어 두 사람이 구루마와 함께 내동댕이쳐졌다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은 그 자리에서 머리가 깨져 죽고 그 본래의 일판 사람은 옆구리로 피를 많이 흘리고 당장은 숨을 쉬고 있었으나 그도 보름쯤 뒤에는 역시 숨을 거둬 버렸던 것이다. 마을에는 군인에 나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잦은 소식과 함께 유독히 흉흉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막아 놓은 뚝 안에서 벼농사가 잘 지어질 수만 있었다면 사람들은 그 사고에 대해서 더 생각을 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처음엔 사람들도 그 정도의 사고쯤 일본 사람들이 뚝일을 시작했을 때의 빈번하고 끔찍한 사고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한데 사리가 가까워오는 어느 날 밤 뚝은 기어이 다시 갈라지고 말았다. 모든 바닷물이 하나의 파도가 되어 산기슭을 때리는 듯한 무서운 소리가 있은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방뚝은 크게 두 동강이 나 있었고 지금까지는 그 방뚝 너머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넘실거리던 바닷물이 뚝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절강터를 따라 길게 누운 횐 물띠가 갈라진 뚝을 지나 훨씬 안으로까지 뻗어 있었다. 물띠의 아랫쪽에서는 침몰선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그 침몰선의 모습이 너무나 전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날 밤의 사고가 마치 물띠를 가르고 서 있는 그 침몰선의 장난이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어쨌든 그런 사건이 있고부터 마을은 갑자기 액운이 끼여드는 것 같았다. 많은 논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처럼 생각했고 또 그 뚝 때문에 생겼던 전날의 사고를 상기했다. 바닷물에 잠겼던 모들이 햇볕에 갈색으로 타서 마을 앞에 펼쳐 있는 모양은 더욱 황폐한 느낌이 들게 했다.

한데도 사람들은 다시 그 뚝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그 갈라진 뚝을 이어 놓자마자 바닷물은 또 다른 곳을 갈라놓고 말았다. 이번에는 한참 동안 그 뚝일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가을 무렵 그 일은 다시 시작되었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핀잔이 마을을 돌았다. 그 무렵 도 마을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된 청년들의 소식이 잇달아서 들어오고 있었기 때운에 사람들은 그것도 함께 생각하면서 필시 액운이 마을을 들씌운 거라고 했다. 그럴 때는 무엇을 해도 되는 일이 없고 횡액만 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그 말은 옳은 듯하기도 했다. 왜냐 하면, 그 뚝을 다시 시작한 얼마 만 일판에는 또 한 번, 이번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산비탈을 헐어 흙을 길어 내고 있던 곳에는 어느 새 커다란 흙 언덕이 생겨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획 소리를 내며 그 흙 언덕이 크게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구루마들을 줄줄이 세워 놓은 그 언덕 밑에서 삽질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 구루마 때문에 몸을 피할 새도 없이 모두 함께 그 흙더미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처음에는 흙에 묻힌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다. 진 소년이 그 곳으로 달려갔을 때는 네 사람을 흙 속에서 끌어 내 놓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벌써 숨이 끊어져 있었고 어떤 사람은 코와 입에서 벌건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그 흙 속에서 사람들은 네 사람을 더 찾아내었다. 모두 숨이 끊어져서 흙 속에서 끌려 나왔다. 그 중에는 옹진서 온 개구리잡이 선수도 한 가람 끼여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을 더욱 슬프게 한 것은 군대도 가지 않은, 마을의 나이 많은 오랜 친구를 또 세 사람이나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부터 마을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들은 마을을 그렇게 불행하게 만든 것이 있다고. 그리고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를.

그 동안도 진 소년은 배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아침이면 재 너머로 학교를 가야 했기 때문에 그가 배를 바라보는 시간은 적어졌다. 아침에 재를 넘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배를 한번 내려다보고 그리고 학교가 파해 돌아올 때, 재를 올라서면서 다시 배를 보게 될 때까지 진 소년은 아이들과, 아무리 싹싹하게 굴어줘도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여선생 속에서 지내야 했다. 특히 그 여선생은 언젠가 한번 집으로 따라갔다가 너무나 방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것에 기가 질려서, 거기다 마늘을 물에 얹어서 길게 수염뿌리를 길러 놓은 것을 보고서 영 친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 선생의 방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그 마늘의 수염뿌리만큼이나 이상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한나절 배를 보지 못하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공부도 배우고 놀기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그는 훨씬 더 배를 많이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재 너머 학교로 가 있는 동안은 커다란 다른 배가 와서 그 배를 끌고 가 버릴 것 같은 조마조마한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을 뒤 재 꼭대기까지는 매미도 메뚜기도 잡지 않고 필통을 절거덕거리며 단숨에 뛰어올라 오곤 했다. 그리고 고개에서 머리를 내밀자마자 제일 먼저 배를 확인하고 별다른 기색이 없었던 것을 알면 그 때부터 재 꼭대기에 주저앉아 바다를 더 내려다보거나 팔을 펴고 누워 하늘의 구름을 세거나 했다. 학교의 공부는 아무 것도 어려운 게 없는 것을 선생이 날마다 되풀이했고 그것마저 몰라서 매를 맞는 아이도 있었지만, 진 소년에겐 그게 그리 걱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집으로 내려와서는 전처럼 배를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진 소년은 정자나무 아래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서 괴상한 말을 들었다. 그 사람들은 처음에 뚝을 내려다보며 그 여덟 사람이 죽은 사고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뚝이 갈라져 한꺼번에 가을 추수의 꿈이 깨진 이야기며, 끝없이 계속되어 오는 마을 청년들의 슬픈 소식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그 즈음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언제나 그랬듯이 이 마을을 찾아온 액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마을에 액살이 뻗기 시작한 것은 저 배가 저기 가라앉고 부터지."

그 사람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나더니 더욱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보라구. 물길을 딱 끊고 있지 않아. 순조롭게 드나드는 물길을 끓어 놓으니 그 물끝에 앉은 마을이 무사할 것 같아? 액운을 몰고 온 것은 저 검은 괴물이야."

사람들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새삼스럽게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하얗게 띠를 그리며 뻗어 내켜가던 물길이 정말로 그 침몰선에 막히고 있는 것 같았다.

침몰선이 물띠를 끊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멀리서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진 소년은 숨을 죽이고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배가 저기에 가라앉은 다음부터 모든 일이 일어났지. 아이들이 쌈터로 나가기 시작했고 그 아이들이 다시 돌아오니 못하게 되고, 혹 돌아온다 해도 병신이 되어서야 오고,,,,,,."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던 다른 어른이 말했다. 그러자 처음 어른이 더 기운을 내어 말했다.

"그뿐인가. 저 배가 저러고부터 피난민이 몰려들고, 되지도 않은 일을 시작해서 심심하면 사람이나 죽이고, 게다가 뚝은 모를 심어 놓자마자 갈라지지,,,,,,. 그런 일들이 다 저 괴물이 저기 버디고 있으면서부터였거든,,,, ,,."

진 소년은 정말 기가 죽어서 한쪽에 숨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말이 바로 자기를 두고 하는 핀잔같이 생각되었다. 거기다 어른들의 말은 소년의 생각에도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보다도 소년은 그 배와 싸움에 관해서 신이 나서 이야기했던 사람들일수록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꼭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만약 그런 말을 했다간 어른들이 더 자신만만해져서 배를 욕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 배는 액운을 싣고 왔을까. 그리고 배가 거기 있다고왜 마을 사람들은 자꾸 죽어야 하나?

집으로 돌아와 감나무 가지로 올라가 앉아서 바다를 내려다보던 소년의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다.

감들이 익고 있었다.

 

그로부터 다시 이 년이 지난 뒤였다. 아직도 남자들은 어른처럼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자마자 마을을 떠나 군대로 갔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마을을 떠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은 이제 아주 군인 옷을 입지도 않고 돌아왔다. 나무 발을 짚지도 않고 검은 색 안경을 쓰지도 않은 그 사람들은 아주 마을로 돌아온 것이라고 했다.

침몰선은 아직도 옛날 모습대로 그 자리에 있었고, 뚝은 그 사이에 세 번이나 무너졌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아주 단단하게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한번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하자 그 다음부터는 계속이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그 슬픈 소식이나 팔이 떨어져 나간 사람이 돌아오는 일도 없었다. 혹 어떤 사람은 아직도 다시 마을을 떠나가곤 했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느 날 그 마을로 돌아온 사람 가운데에 뜻밖에도 전에 횐 상자와 슬픈 소식을 전해 왔던 사람이 낀 것이었다. 그는 흰 상자를 파묻어 놓은 자기의 무덤을 보고도 웃질 않더라고 했다. 자기의 무덤을 파헤치다 그는 미쳐 버리고 말았는데, 그 다음부터 그는 삭아 버리지 않은 관속의 작은 상자를 꺼내다가 언제나 가지고 다녔다. 마을 나들이를 할 때나 집에서 두 발을 뻗고 앉아 있을 때나 그 자기의 몸을 태운 재가 들어 있었다는 (이젠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게 드러나고 말았지만) 상자를 들고 다녀서 사람들을 질리게 했다. 사람들은 그가 못된 놈들에게 끌려가서 누구보다도 많은 매를 맞으며 고생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이제 마을에는 그렇게 한 사람씩 청년들이 아주 돌아오고 있었다. 슬픈 소식은 다시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데 나중 마을을 떠나간 사람들이 다시 마을로 다니러 올 무렵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 온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절대로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히득히득 기분 나쁘게 웃으며 역시 기분 나쁜 이야기만을 하면서 혼자만 기분이 좋아했다. 언제나 욕을 섞어 가며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을 몹시 때리거나 골려 준 이야기가 아니면 자기들이 그렇게 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 가운데 나오는 어떤 사람은 여자보다 더 순하고 불쌍하게 혼이 나는 이

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다 말고 그 사람들은 한참씩 히득히득 웃거나 하품을 하거나 했다. 그런 일도 전에 사람들은 절대로 없던 일이었다. 진 소년은 그 모든 것이 마치 오랫동안 고여 있기만 한 웅덩이의 물처럼 따분하고 지겹게 느껴졌다. 하긴 그 사람들도 배에 관해서 조금씩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거기에 배가 있는 게 신경질이 난다는 투였다.

이제 마을 사람들이 그 배를 핀잔하는 일은 적어졌지만 그것은 그만큼 배를 잊어버려 간다는 이야기도 되었다.

어쩌다가 마을에는 한 사람이 귀머거리가 되어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귓속 고막이 터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밥을 두 그릇 먹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의 상관으로부터 주먹으로 몹시 뺨을 얻어맞았다고 했다. 그래 그런지 그 무렵에 마을로 온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밥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다른 일은 거의 없었다. 배가 떠나갈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배에 관해서 가장 자신 있게 설명댔던 한 사람. 그 나이 어린 청년은 마을로 돌아오지 않고 영영 배 위에서만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멀고 먼 북쪽 땅에서 전쟁이 시작되던 해 겨울에 마을로 찾아들어 왔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마을을 떠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구리를 찍고 다니던 사람들이 먼저 마을을 떠나갔고, 한참 뒤에 방뚝 일이 끝나자 그 사람들도 마을로 올라와 서성거리면서 떠나갈 준비들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곧 떠나간다고만 했을 뿐 낮부터 술을 먹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돈이 다 떨어져야 떠나갈 거다-."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정말로 돈이 없어 쩔쩔매고 외상밥을 며칠 사 먹다가 그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갔다.

그리고 나서 몇 년 동안 마을에는 아무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마을로 돌아온 청년들은 언제나 히득히득 웃으며 그 기분 나쁜 이야기들을 되풀이하기만 했고 이제 뚝이 튼튼해진 마을 앞 농장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벼가 익었다. 이제 침몰선 때문에 마을에 횡액이 들었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없었다. 배는 아직 그 곳에 있으면서도 잊어버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오히려 그 침몰선을 바다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진 소년의 마음속에서는 그 배가 아직도 늘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 소년이 초등학교 육 학년을 졸업하던 어느 봄날 그는 배보다 먼저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K시로 가서 중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을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배를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혼자 말했다. 어쩌면 내가 돌아오기 전에 배는 떠나가 버릴지도 모르지.

그 때부터 진 소년은 아무도 그의 이름을 '' 이라고만 불러 주는 사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 '' 위에 ''자뜰 붙여 '수진'으로 불려진 것은 소년이 초등 학교를 들어가서부터였지만, 직성스럽게도 '' 자 성까지 붙여 '이수진, 이수진' 하고 선생이나 동무들이나 그렇게 부를 때를 빼면 집에서는 그래도 언제나 '' 이었던 것이다. 한데 이제는 그렇게 부를 사람이 아무도 없어졌다. 꼭 성까지 붙이는 일은 드물었지만 이젠 모두 다 수진이었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 속에서 그래도 진 소년은 잘 참았다. 마늘을 물컵에 얹어 길다란 수염뿌리를 기르는 일 같은 것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많이 보았지만 그런 것은 삼 년만 견디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삼 년만 지나면 집에 돌아가게 될 거라 여겼던 것이다. 일 년에 두 번씩 방학이 되어 차를 타고 시골 마을로 가는 것이 그를 훨씬 더 잘 견디게 해 주었다. 그 때마다 배는 아직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머나먼 저 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하는 노래며, 시시 때때로 올라가던 그리운 뒷동산아, 하는 등의 노래를 열심히 부르며 그는 삼 년을 참아 냈다. 그 때까지 그는 언제나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삼 년이 끝나자 그는 아주 마을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된 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 고등 학교를 가야 했다.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니었으나 수진은 그 무렵 어느 날 문득 자기는 마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을 깨닫고 지금까지의 착각을 비웃었다.

고등 학교로 진학하고부터 수진은 이제 일 년에 두 번씩 있는 방학에도 집에도 잘 가지 않고 열심히 공무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소녀와 친하고 있었다. 그 소녀는 키가 조금 작았지만 항상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크고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수진은 공부를 하다 지치면 그 소녀와 만났다. 그리고 그 소녀는 맑은 웃음으로 수진의 더운 머리를 식혀 주었다.

소녀는 수진에게 많은 얘기를 했다. 그 대부분의 이야기는 수진이 익숙하기 못하거나 전혀 구경도 하지 못한 일들에 관한 것이어서 싱겁기 짝이 없었지만, 그러나 소녀는 이야기를 하면서 늘 그 맑은 미소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꼼짝을 못하고 듣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소녀의 그 화사한 미소에 더욱 절망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소녀가 그것을 눈치챈 적은 없었다.

그리고 수진이 차례가 되어 이야기를 시작하면 소녀는 미소를 띄우지도 않고 그 신비스런 눈을 하는 것이었다. 실상 수진이 소녀를 만나는 것은 그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진의 이야기를 들을 때의 그 눈 때문이었다. 수진이 하는 이야기는 늘 한 가지 이야기뿐이었다. 그것은 바다의 이야기였다. 이상하게도 소녀는 아직 바다를 구경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하긴 수진이 K시로 왔을 때 세상에는 바다가 없는 곳도 있다는 것을 처

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처럼, 바다가 없는 곳의 사람들은 그 바다를 가보지 못해서 답답해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게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소녀는 바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결코 수진의 바다 이야기에 싫증을 내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수진 또한 그 소녀가 가지지 못한 것, 알지 못한 것,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으로 자기가 가진 것은 그 바다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바다의 이야기만 했다.

바다-그것의 이야기는 수진으로서는 결코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가 바다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소녀는 눈동자를 크게 혹은 작게 고정시키고 열심히 바다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 눈은 이윽고 먼 꿈에 젖어드는 듯 달콤하고 신비스럽게 변해 갔다. 수진은 바다의 그림과 진짜 바다를 비교해 가며 열심히 설명을 한다. 햇볕 따가운 날의 돛단배와 태풍에 미친 파도를, 물띠를. 그리고 마을 앞 바다의 침몰선과 그 바다를 내려다보는 마을의 정자나무며, 그 정자나무 아래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또 전쟁과 뚝일과 피난민들의 이야기를. 투전판과 개구리잡이와 싸움질에 관해서까지도. 그러한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마을에서 바다를 내려보던 시절의 자신의 이야기를 그는 소녀에게 열심히 들려 뒀다. 그리고 그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더욱이 침몰선이 곧 떠나갈 듯이 선수를 반쯤 내밀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 중에서도 침몰선이 가장 많이 이야기가 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면 소녀는 더욱 안타까운 눈이 되었다. 그리고 수진은 열심히 그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바다-수진은 그 소녀의 눈에서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바다를 그리고 있는 꿈을 주는 듯한 소녀의 눈은 언제나 안타까웠고 거기서 바다는 한없이 아름답게 승화되고 있었다. 바다를 더 확실히 소녀의 눈에 심어주면서 수진은 거기서 다시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수평선에 얹힌 듯 그래서 바다로 나가려는 것인지 마을 쪽으로 포구를 타고 올라오려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그 침몰선이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그 침몰선은 하루에 두 번씩 드나드는 바닷물(소녀는 그것을 특히 신기해했다.)에 더욱 자태를 선명히 드러내기도 했고 어떤 때는 따가운 햇볕 속에서 희게 빛나기도 했다.

그러나 소녀의 눈에서는 어느 때 갑자기 그 바다의 그림자가 사라져 버렸다. 수진의 바다 이야기도 듣기 싫어했다. 수진은 바다의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느냐고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진이 소녀에게 바다를 구경시켜 주고 난 다음이었다. 더욱이 그가 언제나 소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그 고향 마을 앞 바다를.

소녀는 가끔 정말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다. 수진에게 그 바다를 직접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해 달라고 조바심을 치며 졸라댔다. 수진도 의당 소녀에게 그걸 보여 줘야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랑스럽게 그 바다를 설명해 주는 자기의 모습을 그리며 행복한 환상에 젖은 일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해, 그러니까 그가 고등 학교 삼 학년이 되던 해 여름 방학이 되자 수진은 자기의 그 즐거운 꿈을 실현할 결심을 했다. 그리고 소녀를 데리고 왕자처럼 마을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망설여지기도 했으나 마을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에는 그의 환상이 너무 즐겁고 오래 기다려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마을로 돌아온 순간 수진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아직 그 침몰선은 떠나가지 않고 바다에 있었고, 마을에는 정자나무가 무성하게 여름을 받아 주고 있었다. 아직도 한두 사람꼴로 마을에는 휴가병이 돌아와 그 정자나무 아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수진은 뭔가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바닷물은 자기 스스로의 이야기로 소녀의 머릿속에 심어 두었던 것처럼 푸르지 않았고, 침몰선은 그렇게 먼 수평선 위의 꿈은 아니었다, 정자나무 아래 모인 사람들은 반드시 정답지도 않았으며, 한낮의 골목길은 나무 그늘도 없이 따갑고 조용하기만 했다.

이상한 느낌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소녀에게 그는 무슨 큰 빛이라도 진 사람처럼 이것저것 감탄을 하며 이야기했으나 실상 그 자신은 그럴수록 싱겁기만 하고 신기롭고 아름다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소녀가 수진의 말에 동의해 주었을 때도 그는 그녀가 마지못해 건성으로 말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레 미안해졌다. 아닌게아니라 소녀의 표정은 K시에서 수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보다 훨씬 굳어 있었다. 수평선을 바라보는 눈이 그 때처림 안타까운, 또는 꿈같이 아득한 그런 것을 담지도 않았고 밀물과 썰물을 보고도 별로 신기해하지 않았으며 정자나무 아래 사람들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지도 않았다. 마치 못 올 데를 온 사람처럼 골목까지도 나가지 않고 그의 누이와 하룻밤을 지낸 소녀는 날이 밝자마자 도망치듯 K시로 떠나가 버렸던 것이다

소녀를 떠나보내고 나서 수진은 걱정이 되어 속으로만 안절부절못했다.

방학을 절반도 지내지 못하고 수진은 다시 K시로 갔다, 대학 입시 공부 때문에 방학을 당겨 올라간다고 집 식구들과 자신에게 다 같이 변명을 하고서였다.

소녀를 떠나보낸 어느 날 그는 비로소 수없이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까지 그 거짓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에 관해서, 바다에 관해서, 그리고 그 침물선에 관해서 그는 옛날에 벌써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의 그 불가사의한 로든 일들의 비밀의 해답을 모두 알아 낸 지가 오래였다. 그런데도 그는 그 해답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다는 그렇게 푸르거나 맑지 않았고, 침몰선은 영원히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썩어 없어지거나 파괴되리라는 것도, 그리고 그 배가 물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마을에 횡액이 많다는 것도 모두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는 그 해답을 감추고 소녀에게 아득한 꿈 같은 이야기만을 해 왔던 것이다, 수진을 본 소녀는 그전처럼 여전히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기다리던 바다의 이야기는 내지 않았다. 수진은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수진은 용기를 내어 소녀에게 지난번 그녀의 여행에 대해서 물썼다. 바다의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수진은 바다의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나 봐"

소녀는 수진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수진은 그 소리에 거의 까무라칠듯 깜깜한 절망을 느꼈다. 그는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바다의 이야기를 사정없이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때 다시 소녀를 들여다보았다. 소녀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에는 이제 바다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지 않았다. 바다가 없는 소녀의 눈은 오히려 그 웃음까지도 깐깐히 말라 있었다. 소녀의 미소는 수진을 즐겁게 하지 못했다. 그것은 오히려 옛날 초등 학교 여선생네 집에서 본 마늘뿌리처럼 수진을 더욱 심한 절망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끝끝내 그 미소는 아릿아릿 아픈 어떤 경멸을 담기 시작했다.

수진은 바다의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나 봐.

그녀의 눈엔 정말 바다가 없었다. 바다가 없는 그녀의 눈에서 수진이 찾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해 가을 수진은 결국 다시 마을로 돌아오고 말았다. 대학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이번에는 그렇게 식구들과 자신에게 변명했다.

수진이 마을로 돌아온 뒤로도 사람들은 그를 자주 볼 수가 없었다. 수진은 대개 방에 들어박히거나 근처의 나무숲으로 들어가 책을 읽었다. 어쩌다 그는 정자나무 아래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이제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소녀를 미워했다. 바다를 원망했다. 그러나 그는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지내기가 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소녀를 미워하지 않게 되기 위하여, 바다를 원망하지 않게 되기 위하여 방에서는 책을 읽고 숲에 앉아서는 바다를 생각했다. 바다뿐만이 아니라, 침몰선과 전쟁과 그 길고 긴 마을 청년들의 정자나무 아래의 이야기들에 관해서 생각했다. 어렸을 퍽의 그 자신을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소녀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 바다에 관해서, 침몰선에 관해서 거짓말을 해 온 이유를 어슴푸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자나무 아래로 온 마을 청년들이 수없이 많은 거짓말을 하며 자꾸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생각한 것과 비슷한 이유 같았다. 수진이 바다를 자주 너무 아름답게 생각하려는 허물은 소녀가 이 세상 어디에 엄청나게 경이로운 세계가 있으리라고 상상한 것과 비슷한 것일 뿐이었다. 허물은 양쪽 다 있었다. 누구도 허물로 생각지 않은 그것을 소녀는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자기 가문의 내력에 대해서 경이를 가지고 이야

미하고 싶어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소녀에 대한 미움이 결코 사라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다시 그 바다를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그는 소녀를 미워하면서 침몰선의 먼 항해의 시작을 다시 꿈꾸려고 애썼다.

그는 이제 자주 정자나무 밑으로 나와 앉아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혼자 앉아 있는 때도 많았고, 청년들을 둘러싸고 아이들이 모여 앉을 때도 그는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에 관해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청년들의 이야기(이제 그것은 전쟁 이야기가 아니지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신이 알고 있는 많은 선종을 상기하면서 그 침몰선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는 이제 학교를 다시 가지 않게 되었으므로 더벅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 더벅머리가 이마와 귀를 덮어 내려왔을 때 그는 그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제까지 그를 부르던 '수진' 이란 이름을 버리고 '자네'라든가 '총각' 이라든가 하는 말로 다시 바꿔 불렀다. 그 말들은 이를테면 이제까지의 고유 명사보다 훨씬 지칭력이 약했고, 그만큼 그는 보통 명사들의 무리로 용해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수진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스스로 명확히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서글펐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시 머리를 깎을 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들 속에서 바다

전처럼 좋아할 수는 없었다. 침몰선을 자기 식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 될수록 더욱 바다는 좋아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 몹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세차게 일고 있던 밤, 그 소동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어떤 무서운 소리를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는 물론 아직 호롱불을 지키고 앉아 있던 수진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수진은 또 뚝이 갈라진 것을 보았다. 몇 년 동안 바닷물을 잘 지켜 주던 튼튼한 뚝이 어느 때보다 더 크게 갈라져 있었다. 침몰선이 가로막고 앉아 있던 포구의 흰 물띠가 제방 안으로 뻗어 올라와 있었다. 지금 막 이삭들을 내밀던 벼들이 바닷물에 흠뻑 잠겨 있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에선지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젠 그 침몰선에 대해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간척지의 벼 포기들은 바닷물을 먹고 꺼멓게 타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밀려나가 버리면 그 벼 포기들은 갑자기 가을을 맞은 듯 갈색으로 변해 갔다. 그것은 정말 가을처럼 고운 색깔이 아니었다.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그 곳으로 잠겨드는 바닷물도 지저분했다. 그 곳을 씻어 내려간 앞 바다가 온통 추해진 느낌이었다.

정말로 그 바다는 언제부터인가 그 추한 모습으로 점점 바뀌어져 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뚝일을 시작하려고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더러운 바닷물은 그 더러운 방뚝 안을 자유롭게 드나들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마을의 정자나무 아래에는 언제나 몇몇 휴가를 얻어 마을로 돌아온 청년들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었고, 그들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들은 그 추한 바다를 아직도 못 잊어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는데, 하긴 그 이야기는 어쩌면 그 자신이 이 때 그 곳에서 들었을 법한 그런 이야기였다. 그것은 고인 늪의 물같이 언제나 지루하고 한심한, 그래서 그 지루하고 한심한 나태감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가끔 히득히득 웃기까지 하는 것이어서 그들이 내려다보는 바다보다 더 퀴퀴하고 불결한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들도 알고있는 듯했다. 그들은 가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전쟁이라도 났으면?

그리고 옛날에 정말 싸움터에까지 갔다가 벌써 마을로 돌아와 이제는 많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사람이라도 혹 그 자리에 끼게 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때는 오히려 좋았겠어요! 이건 뭡니까."

그들은 투덜거렸다. 싸움 이야기도 그들은 알지 못했고, 그 장난스런 군대 놀이의 이야기도 너무 해 버려서 이젠 지쳐 더 말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말 신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때부턴가 그 정자나무 아래 모인 사람들 이야기에는 다시 배의 이야기가 끼여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마을로 돌아온 휴가 병정들이 아니라 아이들과 몇몇 어른들이 그 이야기를 조금씩 했다. 그것은 물론 그 침몰선을 설명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 수없이 되풀이 된 상상 속의 배, 수평선에 얹힌 그 환상적 추리들보다 훨씬 믿을 만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침몰선은 마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머물러 있게 해 놓은 환상으로부터 발을 내어미는 금기를 저지르고 있었다. 또는 그 배가 멀고 먼 수평선에서 훨씬 눈에 잘 띄는 가까운 곳으로 다가섰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 배의 크기와 용도에 대해서도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벌써 문제가 되지 않은 옛날 얘기로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 배의 조타실과 침실, 그리고 심지어는 부엌의 구조와 화장실 같은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은 그 배에 남아 있는 옛주인들이 버리고 간 비품들의 종목에 관해서 열심히 이야기했다. 갑판에 아직 뒹굴고 있는 모포며 녹슬은 단도, 또는 임자를 알 수 없는 군모------

또 어떤 사람은 그 배가 침몰치 않을 수 없었던 이유에 관련해서 배의 밑바닥의 균열을 설명했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은 그 배는 애초에 침몰한 것이 아니며 단지 수심을 잘못 측정하여 실수로 펄판에 좌초됐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쨌든 이제는 배의 밑바닥에 물이 고여 있어서 배의 균열은 알아볼 수 없는 형편이라고 했다. 좀더 심한 말은 그 배는 그 동안 밑바닥이 삭아 달아나고 아직 남아 있는 벽에는 바닷뻘 물이 습기를 타고 올라와 조개들이 붙어사는 지경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어느 이야기도 출처가 확실치는 않았다. 정말 몰라서 출처를 대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알고도 일부러 이야기를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배는 조금씩 그 비밀을 벗어갔다.

수진은 그런 현상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영영 마을을 떠나간 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마을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옛날 억척스럽게도 개구리를 잡다 말고 공사판 일을 했던 옹진 사람이었는데 그는 그 곳에서도 썩 일을 잘하는 편이었다고 했던 것이다.

한데 그는 오래지 않아 그 공사판 일을 버리고 제일 먼저 마을을 떠나가 버렸었다. 옹진이나 다른 어느 곳에서 왔던 피난민들은 한번 마을을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한데 그 사람만이 유독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더욱이 그는 이 마을의 누구보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살결을 하고 있었다. 돈도 마구 헤프게 썼다. 다만 그는 마을 사람들의 물음에는 그저 대개 '그럭저럭' 이라고만 말하거나 볼 일이 조금 있어서 근처까지 왔다가 들렸읍죠. 하는 식으로 애매한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 수진은 그 사내가 마을을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수진이 배에 관해서 듣고 생각하고 안 마지막의 것이었다.

왜냐 하면, 바로 그 며칠 뒤에 수진은 지금까지 마을의 모든 아이들이 그랬듯 그 역시 스무 살이 되어 이번에는 스스로가 마을을 떠나가야 할 차례가 되었던 것이다,

"하하 잘못 왔지, 내가."

하루 아침은 사내가 일찌감치 정자나무 아래로 나와 유쾌한 듯 지껄이고 있었다. 그는 고철 수집을 하며 톡톡히 재미를 보아 한밑천 잡은 지가 오랜데, 그래서 그는 계속 고철 수집을 위해 전국 곳곳을 답사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물론 노동력만 들여 수집이 가능한 공짜 폐품이나 방치된 고철들을. 그래서 그는 옛날 이 마을 앞 바다의 침몰선을 생각하고 혹시나 하고 찾아와 봤더라는 것이었다.

"한데 쇠붙이라곤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아요. 게다가 지독한 것은 쓸 만한 나무조각까지도 깡그리 떼어 가 버렸더군. 왼통 십 년 묵은 도깨비집 광이야. 내가 잘못 알고 왔어. 이 마을을 말야요."

아까운 듯, 그러나 통쾌한 듯 지껄이고 나서 그는 그 날로 마을을 다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수진도 마을을 떠나갔던 것이다.

 

일 년쯤 지나서 수진은 다른 사람들처럼 군인 제복을 입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옷차림은 어딘지 허술하고 시원치가 않았다. 그는 마치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피곤해 보였다. 정자나무 아래서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그를 둘러쌌는데 그는 거기 앉아서도 몹시 피곤하고 뭔가 난감해진 듯 짜증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어떤 사람은 그 곳에 앉아 바다와 침몰선을 내려다보며 무슨 불평 같은 것을 늘어놓는 수가 있었는데 수진은 그 불평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조금씩 돋아 오른 턱수염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말이 없이 집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그리고 수진은 다시 마을을 떠나간 날까지 그 정자나무 아래엔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한국단편소설3' 카테고리의 다른 글

40. 패강랭  (0) 2022.05.19
39. 판문점  (0) 2022.05.18
36.줄  (0) 2022.05.18
35. 제 3 자  (0) 2022.05.18
34. 장미 병들다  (0) 2022.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