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구는 아내가 넘겨주는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그 눈언저리를 번득 스쳐 가는 찰나의 인상에서, 어떤 의미를 암시 받는 것만 같은 직감을 느꼈다.
「김선생님이세요?」
「네……」
분명 난희의 목소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시침을 떼고 예사로운 어조로 첫 대답을 했다.
「저 난희예요.」
그 어감이 심상치 않다. 또 무슨 일이 벌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뒤를 금방 물고 들었다.
「김선생님, 오늘 시간 내실 수 없으세요?」
「왜, 또 일이 생겼어?」
「아니요. 그저 좀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낮엔 여가가 없겠는데……」
「그럼 저녁에라두요.」
평소에도 발음이 도드라지고 쨍 울리는 듯한 투명한 말소리의 난희이지만, 그것이 더 날카롭게 들려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 시부턴 또 모임이 있으니까, 일곱 시 이후면 괜찮겠는데……」
석구는 하루의 스케줄을 생각하며 한참만에야 대답을 했다.
「그럼, 일곱 시에 좀 만나주세요.」
말 자체는 부탁이지만, 그 어조에는 적잖게 명령적인 강요가 서려 있음을 놓칠 수 없었다.
「그럼 어디서 만날까……」
이쯤 되면 석구 쪽에서 되려 끌려가는 꼴이 되고 마는 것만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다.
「글쎄요, 어디가 좋으세요 ? 선생님 편리한 대로 하세요.」
갑자기 누그러지는 듯한 난희의 말결에서 석구의 생각은 급회전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란 대체 뭔데……」
「만나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어요.」
「아니, 전화로 간단히 얘기할 순 없어?」
「꼭 만나야만 하겠어요.」
역시 난희의 어조는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다.
석구는 슬쩍 아내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꼭 무엇인가 탐색하려는 듯한 호기에 찬 모습 위에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한 가벼운 힐난의 눈길이 번득이고 있다.
「가만있자……모임이 있는 곳이 H그릴이니까, 그 부근 어디 가까운 곳이면 좋겠는데 ……」
「그럼, 그 아래층 다방으로 하죠.」
석구의 말끝이 떨어지기 바쁘게 난희의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그렇게 하지……」
자신의 맥빠진 어감이 스스로에게 느껴져 왔다.
「일곱 시예요.」
「응.」
「꼭 시간을 지키세요.」
「응.」
다짐을 받다시피 하는 마지막 말에 더욱 신경을 거슬리며 수화기를 놓았다.
「난희지요?」
아내는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다급하게 물어댔다.
「응.」
석구는 스스로도 멋적어 아내 쪽은 건너다보지 않고 건성 대답을 했다.
「뭐라 해요?」
「좀 만나자는군……」
「당신두……」
「아마 부부간에 또 싸웠나보지……」
「당신은 남의 집 일에 왜 그렇게 관심이 큰 거예요, 집안 일에나 좀더 마음을 써요.」
석구는 말없이 바깥쪽에 시선을 돌리고 담배만 연속 빨고 있었다.
「계집들한테 만만해 보이니까, 제 남편 부리듯이 오라가라 하는 것 아니에요.」
「별소릴 다……」
「밤낮 바쁘시다면서, 그런 복덕방 노릇이나 해요.」
「못하는 소리가 없군…… 」
석구는 갑자기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되는 대로 휘갈겨대는 아내의 말씨에서 오는 찰나적인 불쾌감에서였지만, 어쩌면 난희에 대한 반발에서 오는 부작용인지도 몰랐다.
「원우, 그 녀석도 돌았지, 새파란 제 아내를 밀쳐놓고 남의 계집에 환장을 했으니 ……」
「그만해요……」
「인젠 좀 위신을 차려요, 계집들이 호락호락 불러내지 않게……」
「……」
「정아란 년도 미쳤지……그래, 네 죽는 날 내 죽겠다던 남편의 송장이 식기도 전에 남의 남자와 흥얼거리며 붙어 다니구 있으니……」
「그만두래두.」
석구는 내뱉듯이 한마디 외치고는 자리를 떴다. 무엇인가 메스꺼운 기분을 막을 길이 없었다.
원우와 난희의 신접살림에 석구가 처음 초청 받은 것은, 그들 사이에서 난 첫 아이의 돌날이었다.
그때는 이미 원우와 다른 여대생과의 애정문제가 남의 말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에 올라, 그것이 난희의 귀에까지 파급된 뒤의 일이었다. 그때도 석구는 난희의 전화 연락을 받고 그와 만난 일이 있었다.
원우와 난희가 약혼하기 이전부터 석구는 그들을 제가끔 잘 알고 있는 처지였다. 그들의 자유로운 사랑이 무르익어 갈 무렵, 석구는 이 두 사람의 결혼 상대자로서의 비중이 잘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되어 재빨리 정식 결합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었다.
원우의 온건하면서도 소극적인 호남형은, 난희의 명석하고도 적극적인 성격의 뒷받침으로 서로가 피차의 단점을 보충하고 장점을 살려 좋은 반려자가 될 것이라는 자기깐의 전망도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그대로 그들의 신혼생활은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다정스럽고도 행복에 차 있었다. 어쩌다가 부부 동행의 그들을 길거리에서라도 만나면 그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그들을 반겼고, 그들도 그에게 스스로의 복된 분위기를 나누기라도 하려는 듯이 즐겁게 대해주었다.
그러던 시기에 뜻하지 않게 난희의 호출에 접하여 원우의 새로운 애정관계를 들었을 때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원우의 심정이 그렇게 갑자기 변할라구……허벅다리만 봐두, 그것이 과장되어지는 세상이니까 험담꾼들의 풍문이겠지……」
「아니에요, 둘이 같이 다니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그래, 젊은 남자가 직장에 있구보면 간혹 여성과 같이 행동해야 할 경우가 없을라구 ……」
석구는 일방적인 이야기만 들어서는 사태를 곡해하기 쉬울까 염려되어 말머리를 완곡하게 외곽으로만 돌렸다.
「김선생님, 제가 그래 그만한 정도의 것을 가지고 이해 못할 속 좁은 사람이라고 생각하 세요?」
「글쎄, 그렇기는 하지만……」
석구는 모호한 대답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배신당한 게 분해 죽겠어요. 글쎄 엊그제까지 죽자살자하던 것이, 그런 법이 어딧어 요……」
「원우는 원래 얌전하구 마음씨가 고우니까, 무슨 일을 결단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별일 아닌 것으로 오해받기도 쉬운 성격이라니까……」
「얌전해요? 얌전한 개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선다지 않아요.」
「피차에 무슨 오해가 있는가보군……」
「아니, 오해가 아니에요, 이건 증거가 있는 엄연한 사실이에요.」
난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있다.
석구로서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방안이 서지 않는 난처한 장면이었다.
「마음씨가 그렇게 고운 사람이 그럴 리가 있을까……」
석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음씨가 고운 게 다 뭐예요, 그저 명주 보자기에 개똥 싼 거나 진배없는 위선자예요.」
「위선자라니, 그렇게까지 극단으로 나을 거는 없구……」
「인제 보니, 김선생님두 제 편이 아니세요, 역시 남성 쪽이군요.」
「하……이것 참……」
말끝을 웃음으로 흐려버렸지만, 석구로선 꼭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직접 면박을 받는 것만 같은 심정이어서 그 이상 더 할말이 없었다.
그 며칠 후 석구는 어떤 회합에서 원우를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난희에게서 들은 일에 대한 진부를 알고 싶어 한번 만났으면 하던 참이었다. 예사로운 주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처럼 석구는 말끝에 덧붙였다.
「그런데 참, 이러쿵저러쿵하는 풍문이 나돌아 그것이 내 귀에까지 들려오는데 그것이 사 실이오?」
「뭐 말씀인데요?」
「거, 흔히 중상을 받기 쉬운 그 애정문제 말이야……」
「원 천만에요. 전연 무근지설이에요.」
원우는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이 없이 첫마디로 똑 잘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석구 쪽이 오히려 무색해질 정도였다. 공연한 말을 끄집어냈구나 하는 한 가닥의 후회까지 곁들어옴을 느꼈다.
「글쎄, 하두 허황한 이야기가 마구 떠돌아다니는 세상이니까……」
석구는 자기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뒤를 아물려갔다.
「젊은 놈이 어쩌다 여자와 거리를 같이 다니는 일이 없겠어요. 그걸 가지구 집안사람은 또 큰 꼬리라도 잡은 듯이 아웅다웅하지 않아요……」
흥, 도둑이 발이 저리다구, 전연 터무니없는 풍설은 아니었구나 하고, 석구는 조금 전의 미안하던 감정이 다소 가셔지는 것만 같은, 부담감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아내의 말을 끄집어내는 것을 듣고 벌써 난희가 이야기했다는 것을 지레짐작하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의구심도 겹쳐옴을 느꼈다.
「하기야, 그렇겠지……남의 좋은 일엔 외면하구, 궂은 일이라면 점심 그릇을 싸들고라도 떠들썩하는 세상 인심이니까……」
「요샌 그것 때문에 근거 없는 구설을 많이 사구 있어요.」
그러면서도 원우의 얼굴에선 겸연쩍어하는 표정을 놓칠 수는 없었다.
「자기만 청백하다면 그깐 구설쯤에 신경들 쓸 필요야 없지 않아……」
억지로 이야기의 결말을 지으면서도 석구는 원우의 변명 속에서 얼마만큼의 진상은 암시 받은 기분이었다.
<설마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라구.>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원우와 갈라졌다.
이젠 일체 남의 집안 일에는 턱없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결의가 거듭 자신을 촉구함을 막을 길 없었다.
그러던 것이 아기의 첫돌 축하에 참석하여 부부의 단란하고 훈훈한 가정 분위기에 함께 휩싸이 고보니, 자기의 부질없는 노파심이 오히려 미안쩍게만 여겨지기까지 했었다.
그후 이렇다할 뜬소문 없이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런데 갑자기 난희가 찾아왔다. 핼쓱하게 여윈 품이, 신병이 아니면 무척 시달려 지친 양 초췌한 모습이었다.
「김선생님, 또 저질렀어요.」
마주앉자 터져 나온 난희의 첫마디였다. 그 말이 지닌 뜻을 해득하지 못할 석구는 아니었지만, 그는 사태의 상세한 내용을 일부러 반문했다.
「또 저지르다니?」
「원우가 말이에요.」
어린애 이름을 다루듯 남편의 이름을 알맹이째로 불러제끼는 데는 석구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연애가 절정에 다다랐을 시절에, 그렇게 씨자도 붙이지 않은 알맹이 이름으로 주워섬기는 것을 들은 일이 있지만, 그때는 열띠게 사랑하는 젊은이들끼리의 적나라한 표현으로 차라리 자연스럽게 보아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어린애의 아버지구실을 하는 남편 이름을 남 앞에서 함부로 불러제끼는 데는 백보 양보하고 이해할래고 도무지 납득이 가지질 않았다.
석구는 극도로 험악해진 듯한 그들의 가정환경을 연상하면서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상대가 다른 사람 아닌 정아란 말이에요.」
정아라는 말에 석구는 불쑥 치미는 충격을 느꼈다.
「아니, 정아라니?」
「정아, 모르세요? 김정아 말이에요.」
「응,. 정 아--」
「그 정아하고 동서생활을 하나봐요.」
석구는 그 이상 듣고 있기가 거북스러웠다.
정아는 석구에게 일가가 될뿐더러 학교 다닐 때부터 늘 찾아와서 한집 식구처럼 일신상의 문제를 상의하던 사이다. 그 결혼도, 약혼 성립의 최종 단계에서는 자기의 힘이 주효하여 반대하는 정아의 양친을 납득시켰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애 하나를 낳자마자 남편을 여읜 정아를 볼 때마다 그는 혼인문제에 개재했던 자신을 후회하면서 당사자에게 미안한 생각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원우는 집을 나갔어요.」
「그래……」
「그래, 제가 정알 찾아갔어요.」
정아와 난회가 동창 친구라는 것까지도 잘 알고 있는 석구로선 그 미묘하게 얽혀진 인생관계에 대하여, 더욱 착잡한 심경으로 휘몰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너, 우리 남편과의 관계를 당장 끊겠느냐 그렇잖으면 더 지속하겠느냐구, 단도직입으로 따졌지요.」
석구는 다 탄 꽁초의 담뱃불을 쓰지 않고 다른 한대에 계속 붙였다.
「그랬더니 말이에요. 이 뻔뻔스런 계집애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난 너의 남편 손끝 하나 까딱한 일이 없다구……내 참 기가 막혀서……그것뿐이라면 약과예요. 얘. 너의 남편 같은 줏대가 없는 사내는 숫제 가까이도 하지 않아, 내가 과부래서 어디 사내에 걸신이라도 든 줄 아니…… 이러지 않아요.」
석구는 길게 빨아들였던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내뿜으며 큰 숨을 내쉬었다. 정아건 난희건 원우건, 그 모두의 말투나 행동이 자기로선 이해할 수 없는 딴 사회의 이야기들만 같게 느껴졌다.
「그래 저두 최후 각오를 했어요.」
난희는 꿀꺽 치미는 울분을 참지 못하는 듯이 목이 막혀 몇번이고 침을 다져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젠 살림을 갈라야만 하겠어요. 저두 창창한 앞길에 돈환 같은 놈팽이를 믿고 이대로 속 썩이며, 살 수도 없구요.」
그 거칠은 말씨가 귀에 거슬렸지만 석구는 한쪽으로 흘려 넘겼다.
「글쎄. 어디까지 그 진부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김선생님두 정아와 원우 편이시군요.」
석구가 말의 허두를 떼자마자 난희는 가로채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석구는 자신을 억제해가며 말을 이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도, 자식도 있구 한데……그 바람이 자는 때가 있겠지……」
「김선생님 같으면 늙지 않으시겠어요.」
석구는 기가 차서 할말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자기를 상의의 대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기에 하는 것이 아니냐고 스스로를 누그려갔다.
「부부간의 싸움이란 칼로 물베기라구두 하지 않아. 꾹 참고 견디어가는 쪽이 결국 이기는 거야……」
난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려고 할 때 석구는 다시 한번 다져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난희도 아무 대꾸 없이 그대로 인사를 하곤 어두워오는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대문을 잠그고 돌아선 석구는 난희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정아와 원우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처녀 시절부터 원우에 대하여 얼마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던 정아의 심경을 아는 자신으로선, 외롭게 지내고 있는 정아는 그것대로 동정이 전혀 가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폭넓게 해석해도 원우의 소행이 가증하기 짝없게 느껴졌다.
<--계집애같이 얌전하게 생긴 녀석이 속은 딴판이란 말야.->
그는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꼭 굳게 믿었던 대상에게서 배신을 당한 것만 같은 허전한 감정이 물밀려왔다.
「이제, 당신두 그만 남의 일에 참견하시구료. 당신이 어디 친정오빠요, 시형이요. 동전 한 푼어치 상관도 없는 일에 맨발 벗구 나서서 면박(面駁)을 받고도 주눅이 좋아 저 모양이 니……」
아내의 핀잔에 석구는 허허 하고 속심 없는 너털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 당사자 중의 어느 누구를 만나도 그 추잡한 화제 거리에 절대로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자신에게 굳게 다짐한 석구였다.
그런데 우연히 정아를 만나고 보니, 난희의 분노에 찬 모습이 한꺼번에 겹쳐져 와 도저히 그대로 넘겨버릴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너. 근거 없는 오해를 받지 않게 몸가짐을 조심해라……」
집안 형편 이야기를 나눈 후에 헤어질 때쯤 해서 예사롭게 덧붙였다.
정아의 얼굴빛은 즉각 반응을 일으켜 긴장되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릴까 하구 망설였어요. 난희가 아저씰 찾아갔다면서요?」
「응……」
대답하면서도 석구는 한쪽에 의아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난희가 직접 정아에게 이 야기한 것일까……그렇잖으면 원우가 아내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시 정아에게 옮긴 것일까 하고. 자기 쪽에서 오히려 오싹하는 한기를 느낄 지경이었다.
「제 일은 걱정 마세요. 저도 자기 일은 스스로 판단하여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자랐으니까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저에겐 거추장스럽기만 해요. 제편이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아요. 아저씨도 내용을 잘 모르시면서 저를 나무라셨다면서요……」
「저런……」
그 이상 말이 나가지 않았다. 지금 정아가 한 말은 사실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아무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이 한발 들여놓은 자신이 쑥스러울 뿐이었다.
꼭 자기 아닌 세 사람이 꾸민 각본 속에서 자신은 허수아비처럼 움직여져 가고 있는 것만 같은 허망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또 아침 전화에서 꼭 잘라 말하지 못하고, 난희의 요구에 이끌려 저녁에 만나 주마고 대답하지 않았던가……
석구는 우유부단한 것만 같은 자신을 나무라면서도 기어코 만나겠다는 것을 끝내 거절할 수야 있느냐고 자신을 변호하여보기도 했다. 어쩌면 아내의 꼼꼼한 소견이 자기보다 오히려 현명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아내에게 한 점 더 놓아보기도 했다.
H그릴에서의 모임에는 원우도 참석했다. 석구는 원우를 보자 난희와 정아의 영상이 한데 어울려왔지만, 원우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천연스럽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난희와 아래 다방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있는 약속……그것으로 인하여 석구는 오히려 자신이 비굴하여지는 것만 같은 강박관념에 묶여 있는 것만 같았다.
다른 때에는 길에서 만나도 왜 집안 일을 가지고 밖에까지 소문내게 하느냐고 넌지시 한마디 던지기도 하고, 건실하게 잘해나가라고 충고 비슷한 이야기도 예사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원우는, 내심은 어떻든지 외면으로는 아무 일도 없이 잘 해간다면서 호의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원우는 아내가 너무 억세어 양보나 이해가 없다는 말을 번번이 덧붙이곤 했었다.
그러나 이 밤만은 난희와 만난다는 것이 무슨 밀약을 하거나, 음모를 꾸미는 것만 같아 도무지 마음속이 개운치 않았다.
결국 석구는 원우 부처 사이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건드리지 못하고 칵테일 파티 도중에 다방으로 내려갔다.
난희는 벌써 와 있었다. 웃으며 인사를 하지만 얼굴빛은 부드럽지 않았다.
「김선생님, 바쁘신 시간에 이렇게 불러내서 죄송해요.」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송구함인지, 속없는 인사치레인지 분간할 수 없는 서먹한 어감으로 느껴졌다.
「아니, 괜찮어……」
「위에 원우도 와 있지요?」
꼭 범인의 뒤를 쫓아다니는 형사마냥 거미줄을 늘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와 있어……」
「아무 얘기도 없었지요?」
「없었어……」
반대로 심문 받는 꼴이 되었다.
「저는 인제 최후 결정을 내렸어요. 그래 늘 저희들을 걱정해주시는 김선생님에게 정식으 로 여쭈려구 뵙자구 그랬어요. 전화루 아뢰기엔 너무 경솔한 것 같구 해서요.」
난희는 거의 상대에 틈을 주지 않고 계속 자기 이야기를 내 쏟고 있다.
「인젠 어디 취직이라도 해야겠어요. 김선생님, 취직자리 하나 구해주세요. 아무 데라두 좋아요.」
석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무엇부터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꼭 도깨비에게 홀린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꼭둑각시 몰골이 된 성도 싶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석구는 끝내 참으려고 버티다가 결국 입을 열고야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성들이 너무 센 것 같구먼……남자든 여자든 간에 피차 양보를 해야겠는데, 서로 버티구만 있으니까 타협이 돼야지……」
「제 처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김선생님까지 그러시면 어떡해요. 남자들이란 다 마찬 가지예요. 한국 남자들이 언제 자기 아내를 생각한 적이 있어요. 다 그게 그거죠……」
다 그게 그거라니, 석구는 입 속으로 되뇌이면서 자리를 일어날 차비를 했다.
「글쎄, 누가 뭐라 해두, 밉든 곱든 부부간의 거리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가까운 거야……또 그들의 관계를 가장 진실하고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 당사자 자신들밖에 없다는 것도 나도 잘 알아……이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살겠으면 살구, 갈라지겠으면 갈라지구 마 음대로 해요……다른 아무도 탓하지 말구……」
석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김선생님, 미안하지만 위층의 원우를 좀 불러주시겠어요.」
등뒤에서 들려오는 난희의 목메인 소리를 들으면서 석구는 어떻게 살까 하고 궁리하며 문 쪽으로 걸어나왔다.
순간, 그는 복도에서 몸을 돌려 이층으로 통하는 층층대로 올라갔다.
「원우, 자네 아내가 아래층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네……」
끝끝내 자신은 제삼자의 부질없는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피동적으로 순종하고 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도어를 열고 밖으로 나선 그는 땀 배인 이마에 선뜻한 찬 기분을 느꼈다.
<부질없는 관심…… 복덕방……>
실없는 자신을 나무라던 아내의 모습이 망막을 스쳐갔다.
며칠 후 석구는 뜻밖에도 원우와 난희가 나란히 포도를 걸어오는 것을 먼 발치로 바라보았다. 순간,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만 같이 멍해졌다. 그 걸어가는 방향을 굳이 바꾸며 혼자 뇌까렸다.
<년놈들 변덕도 참……>
전광용(全光鏞: 1919-1988)
함남 북청 출생. 호는 백사(백사).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서울대 교수 역임. 1939년 <동아일보>에 <별나라 공주와 토끼>(동화)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흑산도>가 당선되어 등단. <시탑>, <주막> 동인. 그의 작품은 냉철한 사실적 시각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인간성을 탐구하는 일관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지층>, <사수>, <충매화>, <꺼삐딴 리>, <젊은 소용돌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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