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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3

87. 착하거나 욕먹거나

by 자한형 202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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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거나 욕먹거나 김 봉 순

명절이 돌아올 때 마다, 각종 매스컴에서는 너스레를 떨며 주부들의 피로감을 역설했다. 아니 위로하기는커녕 부추기는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들 말야, 명절이 다가오면 시댁도 가기 싫고 몸도 아프고 그렇죠, 아프지 않아요? ? 아파야 하는데. 그쵸? 거봐요, 맞잖아요, 아픈 거엄청 심란할걸요!’

우리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성공 조건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니 이걸 성공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내가 싫으면 타인도 싫을 것이고 내가 좋으면 상대방도 좋은 것, 즉 역지사지가 정답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흔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를 쉽게 간과한다는 데서 온다. 성격이나 입맛 · 가치관 등 같은 게 하나도 없는 -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과의 동거가 처음부터 쉬울 리 당연히 없었다.

나이가 든다는 게 나는 여러모로 좋았다. 우선 부실한 다리로 빨리 걸을 수 없음에 감사했다. 빨리 걷느라 잊고 놓쳤던 이름 모를 들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고 자세히 보게 되는 여유도 생겼다. 노년은 철학하기 딱 좋은 시기라고 칸트가 말했던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러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주어지는 것도 노년만이 누리는 재미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 나는 다시 감사했다.

은퇴를 몇 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우리부부의 최대 화두는, 서로에게 민폐가 되지 않으며 평화롭게 잘 지내자는 의미로 앞으로 한 침대를 사용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래서 은퇴 몇 주 전, 우린 각자 자기 방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꾸미기 시작했다. 즉 그러니까 나이 들수록 자기 혼자만의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먼저 제안했던 내게 맞장구를 쳤던 남편이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어느 시인이 읊었듯, 들꽃 역시 자세히 보고 또 오래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럽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의 삶의 궤적이 길면 길수록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니, 세상에 돈으로 못살 것이 몇 가지 있다면, 그 중 제일이 젊어 만난 늙은 배우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상적인 노년생활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나, 우리는 그걸 어떻게든 구현하며 무얼 의미하는지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다.

중국 속담에 한 가족이 아니면 한 대문을 쓰지 말라고 했다지만. 사람들은 우리더러 성공적인 동거를 어떻게 시작했으며 어떻게 유지하느냐고 가끔 물어왔다.

그러니까 명절 또한 내게 있어 휴일과 같은 개념이다. 세상에 명절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나는 그게 때론 원망스러웠다. 명절만 되면 다 먹지도 않는 음식들을 상다리가 휘도록 장만하고 며칠 동안 같은 음식을 먹은 탓으로 니글거리는 현상을 나는 참기 힘들었다. 거기에 몇 차례에 걸쳐 대형마트에 다녀오고 또 그때마다 물가는 치솟아 정작 명절 전부터 나는 그로기 상태로 접어들기 일쑤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때론 야근도 불사하며 늦게까지 일한다. 그러다 토요일이 되면 암막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한 낮의 햇빛이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울 때까지 늘어지게 자는 게 일상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주말을 그렇게 보내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는 한주를 견뎌낼 재간이 내겐 없다.

명절이라고 예외는 아니라는 말을, 결혼 전부터 나는 수시로 강조했다. 추석날 아침, 시댁에서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어머닌 툭하면 내게 말했다. 넌 며느리가 아니라 우리 딸이나 진배없다. 딸 같다는 말이 아니라 진짜 친딸이라고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나를 대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했다.

내 지인들은 그 말이 뻥, 이라며 액면 그대로 믿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나는 듣던 중 제일 반가운 소리라서 진짜 그대로 믿기로 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 잘못 아니다. 어머님이 미리 그렇게 선포하셨고 결혼하기 전, 친정에서 명절날임에도 늦게 일어났으니 사실 내겐,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았다.

집안 식구끼리는 잘못이나 실수를 덮어주고 보듬어줘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도 바로 어머님이다. 결혼하기 전 나의 일상역시 여느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사 일 마치고 퇴근해서 마지막 타임의 수영강습반에 들어갔고, 물속에서 온몸에 땀이 흐르도록 편도 삼십 미터를 왕복 여러 차례 오가다 보면 에너지가 완전 고갈되어 수영복 벗을 기운도 없다. 그래서 늘 대충 옷 갈아입고 겨우 귀가하곤 했던 게 당시 나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나와 바라본 부엌은 그야말로 난장판 그대로였다. 식탁위엔 크나큰 전 채반을 비롯, 각종 과일이며 제기들이 아무렇게나 펼쳐져있었고 어머니는 곱게 한복까지 입고, 접시에 뭔가를 차곡차곡 담고 있었다. 그 옆 가스레인지 위의 큰 냄비에서는 하얀 김이 끊임없이 모락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순간 나는 약간 민망했으나 어머니는 끝내 나를 외면한 채 평소와는 다르게 말 한마디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크게 무안하지 않았다. 남편은 시아버지와 병풍을 꺼내 마른 행주로 닦으며 아무 말 없이 나를 힐긋 쳐다보았다. 그리곤 손짓으로만 - 빨리 부엌으로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서두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친정에서도 나는 이렇게 삼십 년 넘게 지냈고 또 이런 일에 한 번도 뭐라 잔소리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긴 장소만 바뀐 시댁일 뿐, 어머니 말씀처럼 그야말로 나는 이 집 딸이지 않은가.

결혼하고 시댁에서 첫 명절을 맞던 날, 손아래 시누이도 지금의 나처럼 그랬다. 어머니와 새댁인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샤워 한 다음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은 뒤 각종 전들이 즐비한 채반을 식탁위에 놓고 제기접시에 소복이 담고 있었다. 그때 막 잠에서 늦게 깨어난 시누이는 배꼽이 빤히 보이도록 기지개를 활짝 켜며 화장실을 들른 후 부엌으로 들어와 한다는 말이, 고작 그랬다.

- 어머, 이 많은 전 누가 다 먹는다고?

엄마와 새 언니가 수고했네요, 라든가 너무 늦게 일어나 죄송해요, 라는 말은 없었다. ‘어머 이 많은 빈대떡 누가 다 먹는다고 이렇게 많이?’ 이런 소리 역시 결혼하기 전, 친정에서 내가 했던 말과 비슷하다. 그래선가 나는 그런 시누이가 그다지 밉지 않았다. 다만 수고했다는 그 한마디만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줬다면 명절날 아침, 내 한복 옷고름까지 뜯으며 서로 머리채잡고 싸울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데 다행히도 어머님이 넌 내 딸이나 진배없다, 라고 말씀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그날부터 난 어머니의 친딸이 되었다. 어쩌다 시댁에 갔을 때, 피곤하다는 이유로 어머니 침대에서 낮잠 자기 일쑤였으며 명절날 아침, 이렇듯 늦게 일어나 천천히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알겠다.

어떤 말도 젊은이의 귓속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만 세월과 함께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야 오로지 자기 것이 된다는 것도! 젊을 때는 모른다. 우리역시도 그랬다. 일가친척은 말할 것 없고 부모님을 찾아가 뵙는 일도 번거롭고 귀찮았다.

늘 시간에 쪼들렸고 그나마 있는 시간엔 살림에 보탬이 될까싶어 부업도 했으나 지금, 우리는 늙었다. 아니 늙어간다. 그래서 외롭다, 아니 외로워진다. 전화벨이 울리거나 초인종 소리가 나면 연락도 없이, 우리에게 서프라이즈 한답시고 혹시 아이들이 몰려들 오나, 그런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고 기린 목을 한 채 기다리곤 했었다.

, 자식이든 연인이든 짝사랑은 고달프고 피가 마르는 연민함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노인이 되어 알게 되었다. 우리부부가 은퇴세대를 집안으로 불러 모아 공동체생활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행히 2층짜리 전원주택을 가지고 있어 그것으로 집 문제는 해결된 셈이니 특별히 걱정되는 건 없었다. 우리는 우선 지역 신문과 부동산에 공고를 냈다. 뒤탈을 방지하고자 우리가 내건 조건은 의외로 간단했다.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둔 예순 전후의 세대, 부부로 한정했다. 각 방에 화장실을 구비함으로 사생활은 최대 보장된 독립적인 생활은 유지하되 식사는 같이 하기로 했다.

이런 여러 과정을 통해 우리처럼 공직을 은퇴한, 칠십 대 초반의 강노인 내외, 세탁소를 운영하는 육십 대 중반의 손노인 부부, 목수 일을 하다 그만 둔 칠십 대 중반 공노인 내외 등으로 구성원이 채워졌다. 그 중에 육십 대 초반의 우리 부부가 가장 젊었다.

우리는 가끔 고독을 즐기기도 했으나 외로웠고 사람들의 숨결이 그립기도 했다. 어느 녀석이 얼마나 전화를 자주하나 세고 앉아있을, 그런 늙은이가 집에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식들에겐 큰 짐이 될테니자식들을 기다리지 말고 그 녀석들이 궁금해서 나를 기다리게 만드는 별난 어미가 되자, 라고 나는 작심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시어머니를 넘어 진짜 멋있는 흰머리 소녀가 되어 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도 용돈이나 생활비는 여전히 필요하다.

아니 젊은이들보다 더 절실할지도 모른다. 아니 절실하다. 허우대 멀쩡한 젊은이들도 취업전쟁을 겪고 있는 마당에 감히, 누가 우리 같은 나약한 늙은이를 고용하겠나. 늙으면 돈 쓸 일이 별로 없을 거라고, 개념 없는 젊은이들은 그렇게 말한다.

서양속담에 노인이 죽으면 그 지역도서관 하나가 없어진다고 했지만 요새는 그런 속담도 빛을 발하지 못한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그 어떤 정보도 줄줄이 다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 며늘애한테 약식 만들 줄 아느냐, 고 물었다. 그랬더니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 그럼요, 인터넷에 레시피가 얼마나 자세히 나와 있는데요.

갈수록 나 같은 늙은이가 잉여인간이 되어가는 듯 해 씁쓸하다. 젊은 날 아무런 준비 없이 엄마가 되었듯, 나도 처음 늙어보는 거라서 시행착오 할 때가 종종 있다. 늙을수록 더 깔끔하고 단정하게, 향수는 뿌리지 못할지언정 적어도 냄새는 나지 말아야 하고, 입은 닫되 지갑은 열고.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십계명 역시 인터넷에 잘 나와 있었다. 그것을 출력해서 냉장고 문과 화장실 벽에 붙여놓고 나는 수시로 읽어본다.

임대료는 근방 시세의 평균보다 낮게 책정했다.

그 대신 입주자는 우리 나름대로 선별했다. 각 세대에서 생활비와 약간의 세금을 합쳐 일정금액은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날짜에 납부하는 것도 잊지 않기로 했다. 그걸 토대로 디테일한 분류봉투를 만들어 투명하게 공개했다. 이를테면 쌀값 - 반찬 값 - 세금, 등으로 나눠 공동 생활비를 책정한 뒤 순서대로 돌아가며 식사준비를 하기로 약속했다.

한 달 메뉴를 정할 때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고 특별히 선호하는 음식이나 제철에 맞는 재료 등을 선별해 추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계부 기재는 당연하고 생활일지 같은 의미로 하루 이야기를 돌아가며 적어놓기도 하고 좋은 시어가 생각나면 언제든 노트해서 공유하기도 했다. 어제와 오늘이 같은 듯 하지만 결코 같지 않다는 걸 일지를 쓰면서 서서히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행주로 닦아놓은 듯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까치가 노래하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잔뜩 흐려 미세먼지가 대기 속에 가득한 날도 있었다.

낙엽 떨어지는 속도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제각각이다. 어느 건 직선으로 급히 떨어지는가 하면 어떤 것은 포물선을 그리듯 우아하게 하늘하늘 거리며 보도위에 떨어진다. 쇠털 같이 많은 날도 미세하게 다름을, 나는 일지를 통해 또는 일지를 쓰기위해 하루를 관찰하면서 느끼곤 했다. 우리 인간도 관찰해 보면 다른 듯 보이는데 비슷하고 비슷한 것 같은 데 많이 달랐다.

다행히 넓은 마당엔 조그마한 연못도 있고 텃밭도 마지기 반 즉 삼백평정도 있어 거기를 통해 푸성귀는 얼마든지 제공받는다. 아침이면 모두들 운동 삼아 텃밭에 나가 벌레도 잡고 잡초도 뽑아주고 호미로 흙을 파 뒤집기도 했으며, 넓은 거실 역시 공동으로 사용하는 장소로 손색없다. 거실 한 구석엔 트레드 밀과 빅 볼, 그리고 핏 밸런스 덜덜이 등을 갖다 놓고 수시로 운동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했다. 지역 신문과 부동산을 통해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문의를 해왔다.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선별하는 과정에서 일일이 면접까지 보면서 충분하게 이야기를 서로 나눴다. 그래야 나중에 말썽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남편은 계약서를 서로 작성하는 게 나중을 위해 필요하다고 역설했으나 나는 반대했다. 처음부터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가족 같은 공동체 생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가족끼리 계약서를 쓰고 우리가 함께 사는 건 아니잖은가. 같이 지내는 게 서로 부담스럽다면 계약서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연습 삼아 사 개월 정도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그다음에 정하는 것으로 우리는 최종합의를 봤다.

위 아래층을 합쳐 다섯 개의 방 중, 주인인 우리가 아래층 방 둘을 사용하기로 했으나 사실 우리만 사용하려고 그렇게 정한 건 아니다. 보통 때는 각자 따로 지내지만 혹여 공동체 세대의 친족이나 피붙이가 방문할 경우 잠자리 제공 즉 게스트 룸으로 사용하려고 하나를 더 차지한 셈이다.

이층엔 칠십 대 강노인 내외와 세탁소를 운영하는 육십 대 손노인 부부가 지냈고, 일층엔 목수 일을 했던 공노인 내외와 우리 부부가 사용한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부엌은 일층에 있어 주로 그곳에서 요리는 물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각방에 사람들이 채워지면서 우리부부까지 네 쌍, 그러니까 모두 여덟 명이 한 지붕 밑에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갈등의 원인을 처음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그래서 서로 자녀문제며 각각 집안 사정이나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일체 묻지 않기로 했다. 본인 스스로 말하기 전까지 묻지 않으니 마음이 편했다.

음식 종류 역시 공동으로 정해 일주일분 메뉴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게시판에 붙여 놨다. 그래서 미리 재료를 준비할 수 있게 했으며, 주말은 예외로 순서에 맞춰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한식이나 양식, 어떤 음식이든 본인이 제일 자신 있는 요리를 만들기로 했다. 제공하는 쪽의 성의에 군말없이 맛있게 먹는 일까지 포함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향일 뿐.

다만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멤버 중 가장 젊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뭐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도우려고 우리내외는 미리 마음먹었다. 우리가 연습 삼아 사 개월을 같이 살아보기로 한건, 한 달씩 돌아가며 한 세대가 요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갖자는 의미가 컸다. 연장자들의 공동체인 만큼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가사도우미를 불러 청소와 반찬 그리고 이것저것 도움도 받았다.

시간이 시나브로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들 삶의 궤적을 엮는 이야기들을 실타래가 풀리듯 조금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경청했고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했다. 살면서 상대방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만큼 그 사람의 마음을 여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얼굴생김 만큼이나 취미나 개인의 호불호가 다른 여덟 명의 공동체생활이 시작된 건 구정이 막 지난 후 부터다. “각자 또 같이는 우리가 내건 모토다. 취미가 같을 리가 없지만 만약 같다면 금상첨화다, 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모두들 교회에 다니고 있어 서로 얘기가 통했다지만, 그렇다고 다는 아니다. 모두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믿음이 같거나 가치관이 같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새벽기도는 물론, 일요일은 온종일 교회에서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부부와 마찬가지로 목수 일을 하는 공노인은 교회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오래된 교회 건물의 손보기는, 공노인이 도맡아 하는데 허밍으로 찬양을 부르며 일하는 모습이 정말 은혜가 되었다. 그래서 내 인생의 롤 모델로 공노인 내외를 따르고 싶었다.

누가 노년을 서럽다고 했나, 흔히 하는 말로 젊음 숭배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향해 우리는 도전했다. 나이 드는 건 열등한 것이고 그래서 노화를 최대한 지연해야 하는 것이 마치 지상의 목표인양 떠드는 일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머리털이 빠지고 피부가 늘어져도 인생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전혀 불행하지 않다는 걸 나는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다.

아래층에 두 세대, 이층에 두 세대가 버티고 있어 심심하지 않았다. 마당으로 나가면 누군가 먼저 나와 운동을 하거나 텃밭에 들어가 무언가 일을 하고 있었다. 거실엔 여러 책을 구비해서 조그마한 북 카페로 꾸미고 텔레비전은 딱 한 대로 한정지어 거실에 설치하려 했으나 각자 본인들 방에서 시청하고 싶어 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같이 지내되 가능하면 상대방에게 피해주지 말자, 는 게 우리 동거인들의 슬로건이 된 것 같다.

이런 공동체 생활을 영위해 나가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너 달이 훌쩍 지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마당으로 몰려온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무나 구령을 붙이면, 따라서 단체 체조를 하고 끝나면 중년을 지나 백발의 노인네들의 산행 행렬이 이어져 하나둘 뒷산으로 올라갔다. 등산이라고 말하기엔 다소 애매한, 평평한 황토 길이 쭉 뻗어나 있는 뒷산은 나도 즐겨 찾는 장소다.

나는 동거인들과 가끔 머리를 맞대고 신 메뉴를 개발하거나, 우르르 몰려간 전통시장에서 싸고 신선한 재료를 고르는 일이 새댁 때의 일처럼 흥분되고 즐거웠다. 신 메뉴라 해봤자 계란말이에 치즈를 넣느냐 마느냐 혹은 도라지무침을 하는데 통 도라지를 사다가 껍질을 벗기느냐 마느냐 같은, 누가 들으면 실소가 나올 법한 소소한 이야기지만 우린 깔깔거리며 모처럼 사람 사는 집처럼 떠들썩해 외로울 틈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 아들네가 방문한다는 연락을 해 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반가움이 지나쳐 자주 찾아주지 않음에 섭섭할 수 있으련만 전혀 그러지 않고 그저 무덤덤했다. 그렇다고 그 애들의 방문이 반갑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애들을 잠시 잊고 지낸 듯 새삼스럽게 아, 나한테도 자식이 있었지, 라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을 뿐이다.

그 애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만드는 대신 여기 여덟 명의 입맛에 맞춰 나는 시장을 봤고 요리를 했다. 그러는 내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위대해 보이는지 내심 나도 놀랬다. 오히려 나는 속으로, ‘그래 내가 느네들만 바라보며 짝사랑할 줄 알았지? 흥 어림도 없다.’ 라고 쾌재까지 불렀다. 이제부턴 너희가 더 우리를 부러워하고 아마 궁금해서 자주 오고 싶어 할걸, 나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한 때 엄마였고, 지금도 엄마이자 할머니다. 그런데 이렇듯 매정한 엄마가 또 있을까? 나는 뭔지 모를 용기와 자신감이 솟아나는 걸 느끼며 불룩해진 시장 가방을 트렁크에 싣고 콧노래를 부르며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오랜만에 시댁에 온, 우리 집 며느리는 아직도 본인이 내 딸인 줄 착각하는 눈치다. 새댁이었을 당시 그렇게 말한 책임이 내게도 있으니 딱히 야단을 치거나 가풍을 가르친답시고 뭐라 할 말은 없다. 하지만하지만 말이다, 내가 그렇게 말했던 건 서로 거리를 좁혀 친해 보자고 한 말인데 - 우리 며느린 아직도 친딸 행세를 하고 있으니.

현관에 신발을 벗어 던지다시피 하곤 소파에 털썩 누워버린 며느린 배고프다며 먹을 것부터 찾았다. 나야 이해한다 해도 다른 동거인들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나는 면목이 없어 부엌으로 황망히 숨어버리듯 도망가 버렸다.

처음 몇 번인가 어머니라고 부르던 것도, 내가 딸처럼 대하겠다고 하고 난 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엄마라고 불렀다. 친딸이나 다름없으니, 그래서 엄마를 엄마라고 부른다는데 난 왜 그리 그 말이 생경스럽던지 그런고로 몇몇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딸로 알고 있다.

그게 기분 나쁘다는 얘긴 아니고 다만 솔직히 말하면 조금 민망하다는 거다. 그 민망함의 농도를 나는 측정할 수 없지만. 모두 내가 저지른 업보 같아 뒷목이 뻐근하다. 인간은 나이가 든다는 것만으로 어른이 된다거나 인격이 성숙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았지만. 물론 본인이 자기 버릇이나 습관을 좀 알고 고치려고 피나게 노력하지 않은 한, 절대 변할 수 없음도. 그래서 말의 힘도 세지만 습관도 힘이 세다. 아무튼!

어찌되었든 큰마음 먹고 부모인 우리를 찾아 왔으니 반가운 손님이자 사랑스런 자식임엔 분명하다. 아예 브런치로 먹으려고 늦게 일어나 달려왔다고 아들 녀석이 옆에서 눈치 없이 말했다. 나는 부지런히 쌀을 씻어 휘슬러 압력밥솥에 안치고 전에 뜯어놓은 냉이를 된장과 버무려 쌀뜨물을 붓고 국을 끓였다.

칼집을 넣은 갈치에 소금 뿌려 석쇠에 굽고 돼지 등갈비는 빨간 고추장에 재 놨다가 익혀가며 졸였다. 식탁에 그득히 반찬들을 늘어놓고 다 같이 점심식사를 한 후, 설거지야 바로 일어난 며느리가 당연히 도맡아 해줄 거라는, 그러니까 소매 걷어 부치고 설거지통에 예쁜 손을 넣고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설거지를 할 거라고 나는 굳게 믿었다.

그런데 먼저 밥을 먹은 며느리는 후다닥 일어나 커피포트부터 찾았고 머그잔에 그득히 부은 커피를 들고 바로 마당으로 나가는 것 아닌가. 나는 씹던 밥을 삼키지도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해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 때 남편이 식탁 밑에 있는 내 종아리를 살짝 건들이며 큰소리로 말했다.

- 설거지는 제가 할테니, 모두 마당으로 나가 커피 드시지요. 허허허!

남편의 헛헛한 웃음소리가 그날따라 조금 처량하게 들렸으나, 순간 나도 모르게 쇼윈도 부부처럼 활짝 웃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 리얼리? 땡큐우우. 자 그럼 우리 밖에서 차 마실까요?

그렇게 말한 나는 커피며 보이차 허브차등을 골고루 챙겨 아들 편에 마당으로 내보냈다. , 그렇다고 우리 며늘애가 무례하다는 얘기를 하려던 건 절대 아니다. 싹싹하고 · 상냥하고 · 인정 많고 · 여러 달란트를 가진 우리 며늘애를 초장에 내가 버려(?)놨다는 것을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을 뿐!

오랜만에 진짜 오랜만에 남편과 시댁을 방문했다.

갈 때마다 여왕대접을 받으면서도 막상 갈 시간이 다가오면 조금 망설여지는 건 도대체 뭘까. 시댁이라서? 나는 친딸이나 마찬가지인데. 시댁은 한마디로 대변혁 중이다. 은퇴한 아버지의 오랜 구상의 결과물이기도 한 셰어하우스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에선가 중국에선가, 비슷한 연배끼리 공동체 생활을 하는 다큐를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유심히 보신 뒤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걸로 나는 기억한다.

기거하고 계시던 이층 주택을 리모델링한다는 얘기도 간간이 흘러나왔으나 나는 별 관심 없었다. 하긴 오래된 주택이니 두 분이 생활하기 편한 쪽으로 다시 고치고 보수하는 정도려니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시댁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엔 너무 더워 가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난방을 잘하고 냉방을 한다 해도 오래된 주택에서 나오는 서늘함과 음습한 냄새까지 제거하지 못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파트라는 공간을 떠나본 적 없는 나로선 주택이 주는 느낌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막상 도착해서 바라본 시댁의 주택외양이 은퇴세대 어른들이 기거하는 집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노인들이 지내는 집이라고 해서 우중충하기만 하랴만마치 꼭 잘 꾸며놓은 유치원 같았다. 색색의 나무 막대를 엮어서 박아 놓은 울타리는 꼬마아이도 넘을 수 있는 높이로 귀여웠다.

마치 무지개처럼 아이보리와 노랑이 주는 따뜻함과 조화로움 속에 간간이 회색과 블루 그리고 연두색의 조합이 전혀 유치하지 않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했다. 컬러가 주는 안정감이 있다는 걸 그 날 나는, 이론이 아닌 가슴으로 처음 알았다. 듣던 대로 마당에 많은 어른들이 모여 단체로 운동하는 모습이 생경스러우면서도 어느 노인대학 풍경과 닮아 도착하기도 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주 방문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가끔 상상하며 꿈꿨던 집의 모형을 눈앞에서 목도한 나는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냅다 달렸다. 시부모님과 같이 동거한다는 몇몇 어른들이 우릴 맞아 주었다. 그런데 며느리란 여자가 이제야 얼굴을 내 보인다고 생각하니 조금 민망했다. 그래서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배고프다는 핑계를 대고 나는 소파에 그대로 몸을 던졌다.

나이 비슷한 어른들끼리의 공동체 생활이 어떨지, 솔직히 나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누구나 지금까지 간직한 자기고집도 있을 것이고, 이기심도 작용할 텐데 그것을 감수하고 같이 지낸다는 게 아무래도 무리인 듯 했다. 그런데 직접 목격했을 땐 내 생각이 기우였음을, 즉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편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어머님을 비롯한 몇몇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지혜를 잠깐 엿볼 수 있었던 반면, 그들의 인상에서 살아온 날들의 궤적이 한꺼번에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인상이 그 사람의 인생이다, 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어느 어른은 인자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가 하면 또 어떤 노인은 말할 때마다 미간에 내천자의 골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늙어 어떤 쪽의 사람이 되나,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젊은이들에 대한 몰이해를 무슨 자신만의 특권인 양 휘두르며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꼰대형 옹고집 어른들은 아니었지만, 하룻밤 머무는 동안 여덟 노인들의 적나라한 개성을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었다. 각자 선생노릇을 하려고 했고 왕년에 즉 당신,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걸 은근히 나타내며 세 불리기를 한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었으나 어머니는 지혜롭게 피해가며 공감을 표했다. 그들의 공동체 조합은 아무리 봐도 미스터리다. 대화가 이런 식이다.

- 한 때 제자인 고놈아가 아, 글쎄 며칠 전 나를 찾아왔잖소? 나를 찾느라 무척 애를 쓴 모양이더구먼.

그러면 어머님은 이렇게 받아넘겼다.

- 어머 선생님은, 무척 존경받는 분이셨나 봐요?

나는 그들만의 대화에 낄 수도, 끼고 싶은 마음 일도 없었으나 어머님은 그런 식으로 그러나 성의 있는 공감을 표하곤 했다.

위층에서 지내는 강노인 내외, 편의상 나는 강 노인을 강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그 부인은 형님이라고 부른다. 공동체 생활에서의 호칭은 간단한 반면 중요하다. 남성은 무조건 성을 붙여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여성은, 모두 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형님으로 통일했더니 편했다. 물론 그들도 권사 혹은 여사님 어쩌구 그런 식으로 나를 부른다.

우리와 같이 일층에 사는 공노인 내외분은 성품이 온화하다. 그리고 손재주가 어찌 좋은지 집안에 고장 난 물건들을 두고 못 보는 성격인 듯 다 고쳐놔 수리공을 따로 부를 이유가 없다. 재주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남편대신 - 남편은 사실 거실 천장에 붙어있는 엘이디 등 하나도 교체 못하는 위인이다.

일부러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을 취사선택한 것도 아닌데 같이 공동체 생활하는 사람들의 면면이 정말 특이하게 장점이 많았다. 그래서 집안을 이끌어 가는데 소위 죽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할까? 잠깐 언급했든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공노인도 있고 세탁업을 하는 손 노인 내외는 집안의 빨래는 다 책임지고 빨고 다듬고 고치고 다리고한마디로 모든 의복의 해결사나 다름없었다.

어디 사람을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으로 나뉠까만, 제일 꼰대 같은 사람은 이층의 강 노인과 남편이었다. 과거에 어떤 일은 했든 여기서는 다 같은 한 집안 식구나 다름없는데 가끔 집안에서조차 권위를 세우려 하는 폼이 우습다 못해 같잖았다. 권위는 있을 수 있으나 권위자가 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나는 소망한다. 이들이 권위를 세우기보다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로 흘러 선한 영향력을 곳곳에 미치기를.

늘 그랬듯이 그날도 나는 그랬다.

시댁을 다녀오던 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오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좁은 엘리베이터 공간에서 몇 사람을 만나 같이 서있어야 하는 게 나로선 너무 괴롭다. 목례와 함께 잠깐 미소도 아닌 애매한 웃음기를 머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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