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광장의 시대, 비극을 읽는 이유
1960~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비슷하게 겪은 경험일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개발도상국으로, 가정집에서 더운물 구경하기 어려웠다. 추운 겨울에 목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난로 위에다 세숫대야를 올려놓고 물을 펄펄 끓여야 겨우 할 수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아버지와 함께 공중목욕탕에 가는 건 연중행사였다. 설날이나 추석, 혹은 입학식이나 졸업식 전날 같은 특별한 때였다. 그렇기에 목욕탕에 간다는 건 ‘목욕재계’(沐浴齋戒)라는 말에 값하는 의식이었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겠다는 준비이자 의례였으니까. 과거의 자신을 닦아내 늘 보던 제 몸을 새삼 새로운 양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과거의 자신’이라는 ‘괴물’과의 대결에 주목했다. 그 대결에서의 승리를 ‘카타르시스’라고 불렀다. 승리란, 그 괴물을 물리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안에 숨어 지내다 중요한 때 불쑥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 또 다른 나’를 수용해나가는 과정이다. 이러면 괴물은 방해꾼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인도자이자 안내자가 된다.
‘카타르시스’는 흔히 ‘정화’ 혹은 ‘(몸 안 불순물의)배설’로 번역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의 궁극적 기능을 ‘카타르시스’라 했지만, 정확한 뜻을 밝히진 않았다. ‘카타르시스’은 원래 ‘월경’(月經)과 관련된 의학용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생명탄생과 연관된 원초적인 단어를 정신적이며 문학적인 은유로 전환했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배설해야 할 감정의 찌꺼기를 버리는 ‘정신적인 목욕재계’가 카타르시스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도시의 최고 지성인들은 극작가였다. 이들이 매년 작품을 내놓아 경쟁하는 비극경연축제는, 그렇기에 성년이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였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을 떠올려보라. 안티고네, 펜테우스, 네오프톨레무스, 오레스테스, 오이디푸스 등등. 이 젊은이들은 쉬운 해답이 없고 결국은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릴, 윤리적으로 풀기 어려운 상황에 내던져진다. 비극공연에 참여해 그런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은, 그리스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과정이었다.
그리스의 젊은이들은 그 과정을 통해 시민으로서, 성인으로서 시민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도덕적이고 감정적인 성숙을 연마했다. 2,500여년 전 그리스 청소년들은 비극을 통해 더 이상 자신만의 이기심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 도시의 책임 있는 시민으로의 다시 태어났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하는 ‘민주주의’는 이런 의도적인 시민교육을 통해 가능했다. 지금이야 ‘비극’(悲劇)이란 명사와 ‘비극적’(悲劇的)이란 형용사는 개인적인 이런 저런 경험에 가져다 쓸 정도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일상용어가 됐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은 왜 그러한 시대적 요구를 껴안게 됐을까. 기원전 6세기에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새로운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었다. 그 공동체는 헌법을 기초로 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다.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20세기 초까지 왕정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기적이다.
기원전 6세기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라는 귀족이 등장해 그리스 정치지형을 변혁했다. 당시 아테네는 평원지대에 살고 있는 전통귀족들이 권력을 쥐고, 아테네 외곽 언덕에 모여 살고 있는 대부분의 평민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평민들의 지지를 얻어 지도자가 된 후, 평민들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재판관들을 지방에 직접 파견하였다. 그는 아테네 같은 조그만 도시가 당시 지중해부터 인도까지, 이집트에서 박트리아까지 세계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 제국과 견주어 생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능가할 수 있는 힘은 ‘문화’라고 생각했다. 그의 정치-경제 개혁과 더불어 참신한 문화개혁을 단행한다.
문화란 무엇인가. 곧 ‘공동의 기억’이다. 아테네가 지닌 ‘공동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찬양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수백년간 아테네와 그리스 기원에 대해 노래한 음유시인들의 노랫말을 그리스어로 수집-편찬했다. 이 노래가 서양 문학의 버팀목이 되었다는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다.
그리스인의 정신을 상기시키는 고전을 ‘의도적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 정신을 노래하는 두 가지 시 형식을 도입한다. 하나는 ‘디티람보스’(dithyrambos)이며, 다른 하나는 비극 드라마다. 디티람보스는 포도주 신인 디오니소스의 별명으로 포도주와 풍요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노래다. 비극 드라마는 ‘일리아스’ ‘오딧세이아’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삶에 관한 비극적이며 인간적인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것들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기원전 566년 모든 아테네 시민들이 참여하는 아테네 축제를 열었다. 아테네라는, 그 당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도시에서 일어난 축제는 그리스 문화와 서양문명의 씨앗이 되었다. 20세기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극장은 가장 탁월한 정치 예술이다. 그곳에서만 인간 삶의 정치적인 영역이 예술로 승화하였다.” 극장은 인간 삶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임무를 배우의 말과 행동을 통해 경험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극장에 온 관객은 점차 개인이 아니라 도시 시민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난다.
기원후 5세기부터 그리스도교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인간 삶의 핵심은 ‘비극’이 아니라 ‘구원’이라 주장하는 관점이 등장한다.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이나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edia) 등으로 상징되는 중세는, 그렇기에 비극이 아니라 희극(comedy)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신앙을 통한 구원이 있으니 ‘지금 여기 현실’이란 피안의 영원한 세계를 가기 위한 정거장일 뿐이다.
비극이 다시 등장한 시기는 르네상스 시기다. 그리스 고전연구가 유럽을 오랜 잠에서 깨웠고 비극연구는 새로운 유럽국가들, 특히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에게 독립적인 정체성을 심어주었다. 현대도 매한가지다. 현대가 여전히 빚지고 있는 철학자는 100년 전 독일의 니체(1844-1900)다.
니체의 첫 책 ‘비극의 탄생’(1872)은 인간에게 고유한 창의성의 역동적인 과정을 이해하려는 위대한 시도다. 니체는 저서 ‘에체 호모’(Ecce Homo)에서 ‘비극의 탄생’이 가져올 공헌 두 가지를 니체답게 예견한다. “첫째, 그리스인들 가운데 시작된 디오니소스 현상에 대한 이해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 예술의 근원이다. 둘째 소크라테스 철학의 재평가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본능’이라는 그리스 정신을 쇠퇴시킨 도구다. 합리성은 인간의 삶을 저해하는 위험한 권력이다.”
이 충격적인 주장을 당시 학자들이 반길 리 없었다. 그리스 예술과 정신이란, 독일 예술사학자 요한 요아킴 빙켈만이 주장한 것처럼 ‘숭고한 단순함과 조용한 웅장함’(edle Einfalt und stille Groesse)이어야만 했다. 그는 그리스 예술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그런 숭고함을 문학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빙켈만의, 바로 이런 서양문명의 근원에 대한 설명에 반기를 들었다. 니체가 보기에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 축제를 통해 노래를 주고받던 ‘디티람보스’ 를 정교화해서 완전한 예술작품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리스 비극은 완전한 시각예술이자 청각예술이다. 니체는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현대에서 비극은 오히려 죽음을 맞이했다고 선언했다.
이런 ‘비극’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왜 필요한가. ‘비극’은 서구문명, 특히 민주주의의 어머니 같은 존재다. 그 후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페리클레스와 같은 정치가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비극작가들과 함께 ‘민주주의’라는 지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아테네 시민들을 교육했다.
그렇기에 필자는 비극을 확대된 개념으로 쓰고 싶다. 인류는 감동적 이야기를 소통하는 동물이며, 국가는 그런 이야기를 기억하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소중하게 간직하는 공동체다. 비극적이며 감동적인 이야기는 그리스 뿐 아니라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이스라엘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극적 영웅들이 삶을 가치 있게 살려 한 이야기를 다른 문화권의 신화와 경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근처에 있는 극장에서 비극을 구경할 수 없지만, 이 지면을 통해 비극적이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응어리진 거추장스런 감정들을 배설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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