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형 받을 줄 알면서.. 프로메테우스는 왜 불을 훔쳤나
ㅣ아이스킬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인간에게 불을 선물함으로써 신ㆍ인간 경계 허문 프로메테우스
‘자유 의지’ 신념 위해 순교한 첫 영웅 아이스킬로스가 비극으로 형상화
누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가? 남들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가 발견하고 닦은 길을 걸어간다. 그는 혁신적인 길을 닦기 위해 스스로 희생할 수밖에 없다. 19세기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1819-1892)은 미국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런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영웅이다.
당시 미국은 유럽을 흉내 내고 부러워만 했다. 창의적인 인간은 남들이 감히 갈 수 없다고 미리 정해놓은 터부를 깨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휘트먼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이 터부 안에서 오히려 ‘자신만의 노래’를 불렀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미국인들 가슴에 미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심어놓은 위대한 시인이다.
영웅, ‘소중한 나’를 깨달은 자
그가 1855년에 발표한 ‘나 자신을 위한 노래’의 첫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내 자신에게 예배 드리고 내 자신을 노래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당신도 가질 것입니다. 내게 속한 모든 원자가 당신에게도 속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유유자적하면서 내 영혼을 초대합니다. 나는 몸을 땅에 기대고 편안하게 유유자적하면서 여름 풀잎을 관찰합니다.” 휘트먼은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처럼 뮤즈를 불러내지 않는다. 뮤즈에게 영감을 달라고 구걸하지 않는다. 그는 결정한다. 그 자신에게 뮤즈가 되기로. 그는 자신에게 예배하고 자신을 찬양한다.
휘트먼에게 ‘자신(自身)’은 그의 영감이다. 그는 세상 경험을 통해 자신을 점점 확장하여 ‘너’가 되고 ‘타인’이 된다. 그는 ‘자신’을 처음에는 동료 미국인들에게, 그리고 전 세계인, 심지어는 우주로 확장시킨다. 그의 ‘자신’은 ‘민주적 자아(民主的 自我)’로 갈등을 초래하는 계급과 신념을 초월한다. 그는 경계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허물며 “내가 가진 것을 당신도 가질 것입니다”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로 매 순간, 생각, 감정 그리고 물건들을 타인과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내가 진리라 생각하는 것을 타인도 진리라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동시에 타인의 진리가 내가 매달리는 진리를 전복시킬 것이다. 그런 후 나의 진리가 될 것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유일하고 영원한 진리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 종교는 내 자신의 영혼을 탐구하는 행위다. 뜨거운 태양 아래 시들어버린 풀잎 하나도 내 영혼을 불러내주는 뮤즈가 된다.
신성모독으로 단죄 당하는 영웅들
영웅들은 남들이 감히 가지 않은 위험한 공간인 경계에 진입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신념을 발견한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초연하게 목숨을 바치는 인간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아는 유일한 사실이라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고 말한다. 그는 이 깨달음으로 당시 아테네 지식인들에게 그들의 지식이 얼마나 허상인지 거침없이 공격한다. 그는 스스로 아테네라는 거대한 ‘말’이 잠들지 않고 최고의 경주마가 되도록 괴롭히고 훈련시키는 ‘등에’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의 언행은 아테네인들에게 신성모독이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고소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몇 마디 말을 궁색하게 지어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스스로 독배를 마셨다. 그는 스스로 판단하기에 가장 가치가 있는 행동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류에게 진리를 찾아가는 개인의 ‘신념’은 목숨을 바쳐 ‘순교’할 정도로 숭고하다고 가르친다.
예수는 1세기 유대사회의 금기를 깨뜨린다. 유대인들은 신을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거룩한 존재’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는 건넌 수 없는 무한한 간극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신의 이름을 감히 언급하지도 않아, 대신 ‘그 이름’이란 히브리 표현인 ‘하쉠’으로 신을 불렀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과 신이 하나다’라고 말한다. 그는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문다. 그는 더 나아가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 거침없는 청년의 생각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예수를 극형인 십자가형으로 살해한다. 예수가 신의 경계를 침입하였다는 이유다.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미국을 읽어낸 토머스 콜
자신의 신념을 위해 순교한 최초의 인물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다. 프로메테우스는 아직 불을 발견하지 못해 동물들처럼 지내고 있는 인간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그는 올림푸스 산에 살고 있는 신들만이 향유하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다. 불은 인간도 신처럼 살 수 있도록 돕는 도구다. 프로메테우스는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한다. 신들이 그를 용서할 리가 없다. 우주를 유지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틀은 ‘질서’다. 이 질서를 파괴하는 ‘혼돈’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 우주를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 ‘코스모스(kosmos)’의 기본 의미는 ‘질서’다. 프로메테우스는 이 질서를 파괴하여 형벌을 받는다.
휘트먼보다 조금 앞선 시대를 살았던 미국인 화가 토머스 콜(1801-1848)은 자신만의 회화를 창조하였다. 그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미국을 웅장한 산과 황무지를 통해 표현한다. 콜은 뉴욕을 중심으로 거친 풍경을 묘사하는 예술가들의 리더가 되었다. 후대인들은 이들을 ‘허드슨강파’ 예술가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19세기 초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신생국가 미국을 새로운 에덴으로 해석하였다. 그들에게 미국은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파라다이스다.
콜은 앞으로 태어날 위대한 미국정신을 담을 은유를 찾고 있었다. 그는 1846년 2월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라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 그림은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예술적인 해석이다. 콜은 15개월 동안 비극을 공부하며 작품에 몰입하여 1847년 4월에 완성하였다. 크기가 세로 182㎝, 가로 243㎝되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유작이다.
프로메테우스는 고대 스키타이에 위치한 카우카소스산 정상에 있는 큰 바위에 묶여있다. 카우카소스산은 이 세상에게 가장 높은 산의 상징이다. 산 정상은 얼음으로 덮여있다. 콜은 이 그림을 누구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의 신념을 화폭에 옮겨놓았다.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다 순교한 프로메테우스를 그렸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는 달리 오늘날 현생인류로 발전시킨 결정적인 사건은 아마도 ‘불의 발견’일 것이다. 구운 고기 섭취는 인류에게 많은 혁신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인류는 구운 고기를 이전보다 많이 씹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입과 치아가 작아졌고, 음식을 소화하는 시간이 줄어 내장이 짧아졌으며, 그 대신 그 에너지가 뇌로 옮겨가 뇌 크기가 급격하게 커졌다. 그들은 불을 피워놓고 처음으로 맹수들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고 잘 수 있었으며, 모닥불을 펴놓고 음식을 함께 먹는 조그만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모닥불 주위에서 그날 사냥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정보를 교환하여 공동의 기억을 간직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정보교환을 통해 후대 일어날 예술과 문명의 얼개를 만들었다.
단죄를 알고도 자청한 프로메테우스
콜은 인간에게 불을 전달하여 극형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여는 영웅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는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비극을 인간의 자유의지와 오래된 질서에 편입하는 순응의 대결로 보았다. 콜은 우선 카우카소스산이 우뚝 선 풍경에 집중하였다. 이곳은 얼어붙어있고, 삭막하며 광대하다.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경계다. 하늘을 차갑고 끝이 없으며 무시무시하다. 카우카소스산을 휘감은 거친 바위들은 단단한 얼음 눈으로 덮여있다.
이렇게 웅장한 자연 속에 생물이 두 개 등장한다. 이 파노라마와 같은 화폭 맨 꼭대기에 공포 그 자체가 그려져 있다. 가장 높이 솟아오른 정상에 연약해 보이는 보통 인간이 바위에 묶여 있다. 그는 옷이 벗겨져 외롭고 불쌍하게 바위에 걸려있다. 콜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의 일부로 묘사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낮에는 제우스의 강력한 태양빛으로 살을 태우고, 밤에는 추위로 살이 에인다.
그가 자연을 통해 받는 고통은 화폭의 중앙아래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독수리가 가져다 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독수리는 매일매일 조금씩 재생하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조금씩 쪼아 먹는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그런 극형을 내렸다. 프로메테우스는 왜 이런 고통을 예상하면서도, 인간에게 불을 선물했을까? 프로메테우스라는 그리스 이름이 선견지명(先見之明)이란 뜻임을 감안하면, 그가 이런 형벌을 받을 줄 알면서도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사실은 역설적이다. 아이스킬로스는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아테네 시민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했을까?
'배철현 칼럼(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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