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의 길.. 비극은 스스로 택한 결단의 행동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 안에서 지낸다. 내가 그 틀을 매일 새롭게 인식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제와 똑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과거의 나’ ‘진부한 나’로 남게 된다.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를, 내가 간절히 원하는 ‘자기 신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은 전략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하나? 내가 오늘 하는 행동이 미래의 시점에서 내 자신에게 감동적인가? 그 행위는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가?
인류는 자기신화를 위해 고군분투한 인물들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를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야기를 비극, 희극 그리고 서사시로 구분한다. 인류는 자신들이 살았던 파란만장하고 흥미로운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지금-여기’를 새로운 시선으로 볼 것을 충고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를 말한다. 이야기의 전개와 구성(뮈토스), 인물(에토스), 말, 이성, 무대장치, 그리고 음악이다.
비극의 핵심, 인간의 행동 뮈토스
비극은 관객들에게 공포와 연민을 가르쳐, 자신이라는 과거, 이기심, 그리고 습관으로부터 탈출하도록 하려는 훈련이다. 관객들이 비극을 관람하면서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엑스터시를 경험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누가 배우인지, 그 배우가 하는 말, 혹은 이야기의 이성적인 전개, 화려한 무대장치나 스펙터클한 분장, 혹은 감동적인 노래와 춤이 아니다. 그것은 ‘뮈토스’다.
뮈토스는 ‘이야기의 전개와 구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의 전개와 구성’을 ‘특정한 행동들의 배치’라고 정의한다. 비극은 사람에 관한 재현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들과 삶에 관한 재현이다.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느냐에 달려 있다. 인생의 목적은 단순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달렸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바라보면서 바로 지금 이 시간에 전략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찾을 때, 반드시 피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다. 그러나 내가 이 난관에서 심오한 묵상을 통해 어떤 선택을 해도, 그 선택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이 난관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시가 있다.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뜻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다. 프로스트는 1912년에서 1915년까지 영국에서 지내면서 시를 썼다. 그 당시 영국 작가 에드워드 토머스와 가깝게 지냈고 함께 여행과 산책을 즐겼다. 프로스트는 1915년 자신의 집이 있는 미국 뉴햄프셔로 돌아와 ‘가지 않은 길’을 발표했다. 친구 토머스는 이 시를 읽고 너무 감동을 받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프로스트는 자신의 시가 토머스에 의해 잘못 해석되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프로스트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단락에 인생의 난관과 자신의 처방전을 숨겨 놓았다. 이 단락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단락) 두 길이 노란 숲에 갈라져 있었다. 내가 두 길 다 갈 수 없어 서운했다. 한 길을 가야 하기에, 한참 서 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데까지 한참 내려다 보았다. 그 길은 덤불 안으로 굽어져 있었다. (2단락) 그래서 나는 똑같이 좋아 보이는 다른 길을 택했다. 그것이 더 좋은 선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풀이 우거져 내 발길을 원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 길을 간다 할지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이 시는 도덕적이거나 창의적인 삶을 살라고 충고하는 시가 아니다. 인생은 딜레마의 연속이며, 어떤 선택을 해도, 그 장단점이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선택 전에 깊이 숙고하고, 선택 후에는 최선을 경주하는 것뿐이다. 이 시는 자기 기만을 찬양한 시다.
네덜란드 라이덴 주택가에 새겨진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제목과 첫 문장.
“결혼을 막아주십시오” 여인들의 절규
50명의 이집트 여인이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미지의 땅 아그로스가 보이는 해변에 도착하였다. 이 여인들은 자신들의 사촌들인 아이깁투스 아들들과 결혼해야 하는 운명을 수용하지 않았다. 아이깁투스는 이집트의 왕이고, 그의 아들들은 왕자들이다. 고대사회에서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를 떠나는 행위는 금기이자 자살행위다. 고대 사회에서 고향은 자신을 보호하는 법적인 장치다. 왜 정혼기에 들어선 50명의 여인들은 고향을 떠나 무슨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는 머나먼 아그로스 항구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저울질하는 것인가?
그들의 이유는 한 가지다. 자신들이 결혼할 아이깁투스 아들들이 정욕과 오만에 빠져, 자신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여인들은 간청한다. “당신은 결혼을 관장하는 신들이십니다. 우리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정의(正義)가 승리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저 야만스러운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들의 오만(傲慢)이 당신의 혐오로 정복당하게 하십시오. 결혼이 인간의 권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 전쟁에 시달려 온 피란민에게도 파괴로부터 피란민들을 보호할 제단이 있으며, 신들에 대한 존경심이 그들을 안전하게 지킨다는 사실을 알려주십시오.” (78~85행)
이집트 여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분명한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딜레마를 자초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결혼이라는 인류 생존의 가장 고귀한 전통이 이집트 남성들의 ‘오만’을 통해 파괴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탄원하는 여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정의’라고 말한다. 그들은 낯선 타국의 해변가에 도착한 자신들의 선택이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전략이라고 믿었다.
크게 보면 같은 일족이라는 깨달음
50명이나 되는 이집트 여인이 이집트를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아버지인 다나우스가 동행했기 때문이다. 다나우스는 이집트왕 벨루스의 쌍둥이 아들 중 한 명이다. 벨루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아이깁투스를 지명하자, 자신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딸들이 결혼할 사위들에 의해 살해당할 것이란 신탁을 받는다. 다나우스가 이집트로부터 나온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신탁 때문이다. 그는 자기 딸들과 함께 먼 친척이 있는 아그로스로 가기 위해 최초로 배를 건조한다.
다나우스가 아르고스로 간 이유는 그의 오래된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와 딸들은 장황하게 자신의 조상 ‘이오’라는 여인 이야기를 아르고스의 왕 펠라스고스에게 말한다. 이오는 아르고스의 여사제이자 공주였다. 하늘의 신, 제우스는 이오와 사랑에 빠진 후, 질투가 많은 자신의 아내 헤라가 이오를 보지 못하도록 세상을 구름으로 뒤덮는다. 헤라는 제우스의 이런 행동을 의심하고 올림포스 산에서 내려와 구름들을 쫓아낸다. 제우스는 그 순간 이오를 하얀 암소로 변신시켜 헤라의 눈을 속이려 한다. 헤라가 속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암소를 선물로 달라고 졸라, 암소를 차지한다. 그녀는 아르고스 판옵테스를 시켜 이오를 24시간 감시하게 만든다. 아르고스 판옵테스는 100개의 눈을 가진 괴물이다.
제우스는 음악의 신이며 이야기의 신인 헤르메스를 시켜 이오를 데려오게 한다. 헤르메스는 목동으로 변장해 음악과 이야기로 아르고스 판옵테스의 신뢰를 얻은 후, 그를 잠들게 만든다. 헤르메스는 잠든 아르고스 판옵테스를 살해하고 이오를 해방시킨다. 헤라는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 판옵테스가 죽은 것을 보고, 그가 가진 눈을 자신이 좋아하는 새인 공작의 꼬리에 심어놓는다. 고대인들은 자연현상의 기원을 종종 신화를 통해 이처럼 설명하였다. 화가 난 헤라는 암소 이오를 괴롭힐 등에를 보내, 이오를 지속적으로 물게 한다. 아르고스 판옵테스의 죽은 영과 등에의 괴롭힘에 이오는 그리스 전역을 헤매다 이오니아 바다(‘이오’에서 이름을 따왔다)를 건너 이집트로 간다. 제우스는 이제 이오에게 여인의 모습을 되찾아주었다. 이오는 그곳에 정착하여 다나우스와 아이깁투스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이집트와의 전쟁위험까지 무릅쓴 결단
아르고스의 왕 펠라스고스는 다나우스와 그의 딸 50명이 타자가 아니라, 먼 옛날에는 같은 조상을 모신 친척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나우스와 이집트 여인들의 탄원은 펠라스고스의 마음을 움직이는 ‘뮈토스’였다. 펠라스고스는 이들을 난민으로 수용하기로 결정했지만,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이집트 여인들에게 말한다. “내가 아르고스의 왕이지만, 내 국민의 동의 없이 당신들을 난민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내 시민들이 ‘당신이 외국인들을 수용하여 아르고스가 파괴되었습니다’라고 한탄해선 안 됩니다.” 펠라스고스가 이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도시 안에서 자신의 왕권을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의 전쟁을 감수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그는 이 갈림길에서 자신의 도움을 찾는 다나우스와 그의 딸들이 타인이 아니라, 그들은 조상이 같은 아르고스인이며 친척이라고 생각하여,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 딜레마에서 그들을 수용하는 것이 자신과 아르고스의 최선이라 판단하였다.
'배철현 칼럼(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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