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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두근두근

by 자한형 2022.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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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 정희승

성긴 눈발이 휘날리던 날, 너는 아픈 울음을 허공에 길게 남기며 산모통이를 돌아 사라졌지. 붉은 깃발을 접어든 차장은 이미 역사로 들어섰지만, 나는 여전히 플렛폼에 서 있었다. 잘 살아, 하는 말을 하지 못했으므로,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손을 흔들고 있었다고 할밖에.

 

모든 이별은 쉽게 잊히는 걸 두려워한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들은 헤어지면서 으레 이렇게 말하지. 잊지 말자. 죽는 날까지. 어쩌면 우리도 그랬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너는 점점 멀어지면서도 네 자신을 끊임없이 나에게 보냈다. 울먹이는 너를,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는 너를, 발에 전해오는 진동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근두근 나를 흔들며 왔던 너는, 결국 두근두근 나를 흔들며 떠났다.

 

어지럽게 휘날리는 눈발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네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았는지, 아마 너는 모를 것이다. 붙잡지 못한 나를 너에게 보낼 수 없어 안타까웠다. 나는 네 슬픔의 수신자였지. 내 슬픔의 발신자는 아니었다. 그것은 남겨진 자의 비애였다. 어쩌면 영원히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네가 완전히 감감해질 때까지, 나의 기억에서 까맣게 지워질 때까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길은 외부로만 아니라 내부로도 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점점 굵어지는 눈발들이 네가 사라진 허공에서 엔딩 자막처럼 내릴 때,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내 안으로 난 길을 따라 쓸쓸히 돌아섰다. 멀어지는 너를, 떠나가는 너를, 내 심장에 담고서. 불멸의 사랑을 꿈꾼 것도 아닌데 왜 우린 헤어져야만 했을까? 운명의 신에게 그 이유를 물도 또 물으면서.

 

그날 이후 나는 너의 멀어짐에서 생명을 얻어 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텼다. 너는 떠난 게 아니라 단지 멀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교차하는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빌딩 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무심히 쳐다보기도 하였으며, 낙엽이 질 때는 옷깃을 여미면서 문득 뒤돌아보기도 하였다. 늦은 밤거리에서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길가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를 붙들고 구토를 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왜 앞만 보고 똑바로 걷는 게 그렇게도 힘들었을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는 스쳐지나가는 풍경에 눈을 두면서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구구절절 다 내 노래 같았다. 고요하게 눈이 내리는 날에는 고개를 숙이고 숙연한 마음으로 걸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커피숍에서는 맛보다는 향이 좋은 커피를 찾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네가 두근두근 멀어지는 심장으로 집을 나섰다. 기뻐서 웃었고, 슬퍼서 울었으며 때로는 분에 겨워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끔 심장이 아프기도 했다. 그래도 도리 없이 그걸 견뎌야 했다. 내 밖에 아닌 내 안에서 네가 울고 있었으므로, 내 밖에는 네가 부재했으므로. 나는 결코 잠가버린 외투의 단추를 풀지 않았다.

 

또 몇 년이 지났다. 나는 그 심장으로 군에 갔고 그 심장으로 제대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너는 점점 멀어져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심한 시간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너의 속도와 방향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 뒤 나는 회사에 들어갔고, 선을 보았고, 너와 갈라놓았던 운명의 신이 정해준 여인을 만났다. 그리고 그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랑이었다. 어쩌면 우린 자신의 임무, 운명을 섬기는 거역할 수 없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결국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내 머리도 이젠 반백이 되어 희끗희끗해졌다. 그동안 살면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럼에도 너는 여전히 내 몸 속에서 두근두근 멀어지고 있다. 심장을 떠난 너는 동맥과 정맥을 지나 이제 실핏줄 노선에서 어깨를 들먹이며 떠나간다. 그 두근거림이 아련하고 요원해서 감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너의 떠남은 아직도 종결되지 않았다. 단지 나는 아스라이 먼 곳에서 지금도 멀어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인 채로 있다.

 

너는 지금 두근두근 어디쯤 가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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