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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수필가작품

국화옆에서

by 자한형 2021.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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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돈묵

앙증맞다. 두 뼘이나 됨직한 화분에 국화가 수형樹型을 이루고 꽃을 피웠다. 노란색 소국이다. 배달되어 온 화분을 책상머리에 놓고 한참을 완상하다가 코를 가까이 들이민다. 향이 은은하게 내 몸으로 흘러든다.

매년 이맘때면 국화분이 하나씩 배달된다. 몇 해 전 지역 농업기술센터에서 가을 축제명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온 적이 있다. 여러 의견을 존중하고, 내 생각을 조금 가미하여 거제섬꽃축제로 정해 주었다. 여태껏 사용하던 덜 다듬어진 긴 명칭은 버렸다. 이름을 바꾼 후로 이곳의 대표 축제로 성장하여 매년 가을을 수놓고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에게 전달되는 국화분이 더 멋스럽고 품격이 고고하다.

이번에도 직간으로 키운 화분이 왔다. 화분의 중앙에서 조금 빗겨난 꽃대는 반대쪽으로 가지를 더 키웠다. 비단이끼가 융단처럼 뿌리를 덮고, 화분의 언저리엔 굵은 마사 흙이 채워졌다. 멋스러운 수형이 고목 앞에 선 기분을 자아낸다. 가지 끝에 핀 꽃이 앙증맞다. 밑가지에 늦게 맺은 꽃눈은 아직도 녹두알만 하다.

국화분재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시야가 어릿어릿하다. 흐린 시야 저편에서 이것을 키웠을 사람의 형상이 나타난다. 지난해 가을부터 지금껏 돌봤을 그의 손길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낙엽을 썩혀 부엽토를 만들고, 좋은 묘목을 얻기 위해 삽목에서부터 갖은 정성 다 쏟았겠지. 부지런히 이식과 적심을 반복하며 수형을 잡아주었을 그의 손길. 잎을 따주며 희생지도 제거하고, 깻묵도 넣어주었겠지. 녹두알처럼 성장하는 꽃눈을 바라보면서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오로지 아름다운 꽃을 그리며 중양절을 기다렸을 것이다.

나름 키운 사람의 깊은 마음을 음미하며 국화 향기 속에서 보름을 지냈다. 이제 점차 국화가 시들어간다. 절정의 시간을 내게 제공하고는 시름시름 아름다움을 접는가 보다. 거무칙칙하게 변해가는 꽃잎이 안쓰럽다. 보름의 화려함을 바라본 죄로 나는 국화분의 처리에 고민한다. 내게는 저것을 보살펴 다시 피워낼 자신이 이젠 없다. 그동안 보살폈던 농부의 손길도 지켜보고 그들의 땀내도 같이 맡아 보았지만, 전혀 용기가 나지 않는다. 결국 나는 야생화로 변해갈 것을 분명 알면서도 정원에 묻기로 결정하고 만다.

화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축제명을 만들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은 분명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의 바람은 없었을까. 그냥 절정에 달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라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있다면 큰일이다. 미욱한 나를 마음속으로 탓할 것이니까. 가령 내가 국화를 기르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든가, 더 나아가서 꽃을 기르는 농부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라는 의미였다면 나는 한참 모자라는 사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화분을 보내신 분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참으로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어느 것 하나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늘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그들과의 관계가 매끄럽지가 못하다. 상대의 눈빛에 민감하지 못한 나는 언제나 행동이 어눌하다. 나름 배려한다고 고민 끝에 취한 행동이 비수가 되어 내 등에 꽂혀 있음을 발견하고 전율하기도 한다. 차라리 성격이라도 소탈했다면 그 비수를 뽑아버리고 너털웃음으로 응대할 텐데 그러지도 못하니 자책 속에서 산다. 어찌하면 이웃들과 원만한 삶을 꾸릴 수 있을까. 생각은 자꾸만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배려란 것은 베풂만으로 충족하지 못한다.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려야 한다. 오래전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만 해도 그랬다. 식탁의 채소는 내가 재배하여 먹기로 하였기에 늘 채소를 가꾸었다. 무농약은 아니어도 저농약 채소니 내가 생산한 채소에 대해 긍지감도 있었다. 시장에 나와 있는 채소보다야 좋은 것이려니 하고 식탁에 올렸다. 단 두 식구 살다보니 수확한 채소가 남아 아파트 통로에서 나눠주기도 했다. 나름 마음이 뿌듯했다. 애호박도 서너 개씩 가르고, 열무도 한 아름씩 안겼다. 주변 사람들이 내가 경작한 채소를 먹는다는 게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이 즐거움은 이틀을 가지 못했다. 열무를 다듬고 쓰레기를 버리려고 아파트 앞에 놓인 커다란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자 그 속에는 내가 준 채소가 시퍼렇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차마 뚜껑을 덮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던 나는 미욱한 자신을 책하며 돌아섰다. 그래, 모두가 내 생각만 한 거야. 상대의 처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던 거야. 한 번도 채소를 만져보지 않고 완제식품만 사서 먹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렁이나 벌레가 채소에 붙어 있는 것을 본 적도 없는 아파트 사람들에게 내가 한 행동은 무례한 짓일 수도 있다.

자신과 이웃의 관계는 수시로 변한다. 지금까지 나의 선입견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은 의미가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은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다. 그 변질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오늘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이 한 시간의 삶이 두 시간의 고통이 되지 않기만을 기도하면서.

미욱한 내가 겨우 얻어낸 말이 그냥이다. 국화는 그냥 앙증맞게 보면 되고, 잎이 시들면 그랬구나.’ 하고 접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많은 오해와 갈등 속에서 남은 생을 마쳐야 할까. 욕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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