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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수필가작품

잃어버린 조각

by 자한형 202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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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대

L형의 목소리에는 취기와 슬픔이 묻어 있었다. 전화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한참동안 내뱉던 그는 숫제 울고 있었다. 횡설수설한 구절과 단어들을 조합하여 추측해 보니 치매가 온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셔놓고 오는 길인 듯하였다. 아흔이나 되신 노인을 떼어놓고 오는 심정이니 오죽할까.

환갑이 넘도록 독신으로 살아 온 그는 어머니와 둘이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연세가 많은 어머니는 차츰 정신이 흐려져 갔고 두 달 전부터는 심한 치매까지 왔다는 것이다. 아내가 없는 자신의 형편으로는 돌보는 일이 힘들었으리라. L형이 괴로워하는 마음에는 결혼을 하지 않아 불효했다는 심정도 있었을 것이다. 자책하며 내뱉는 독백을 들으면서도 딱히 해줄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아 안타까웠다.

의료수준이 높아지면서 노인이 많아졌다. 덩달아 치매 환자도 눈에 띄게 불어났고, 요양원 또한 우후죽순 마냥 숫자를 늘려가고 있다.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부모님을 요양원으로 모시면 주위로 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불효자라는 생각을 하였지만 요사이는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오히려 전문교육을 받은 간병인이 상주하는 그곳이 환자를 잘 돌보아준다고 생각한다.

L형의 전화를 받은 다음날, 몇 달 만에 아내와 같이 숙모님을 뵈러 갔다. 어린 시절,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시던 숙모님도 요양원에 계신다. 맞벌이를 하고 있는 동생내외가 환자를 혼자 둘 수 없어 몇 년 전 그곳으로 모신 것이다.

평일 오전이라 요양원은 한적하였다. 숙모님은 간병인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나오셨다. 얼굴은 맑아 보였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휠체어를 넘겨받아 앞뜰로 산책을 나갔다. 건물모퉁이 은행나무 아래에 빈 벤치가 보였다.

숙모님은 나를 보면 항상 어머니의 안부를 물으신다. 당신께서는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맏동서와 시숙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계신다. 심지어 지아비인 숙부님의 죽음조차도 알지 못한다. 본시 기억력이 좋으시어 집안어른의 제사는 물론 자질구레한 날짜까지 꿰고 있었던 분이셨다. 그러나 이제는 방금 전 물어 보았던 어머니의 안부도 다시 묻는 것이다.

내가 어렸던 시절, 숙모님은 제사 때마다 집에 오셨다. 학교에서 돌아 왔을 때 부엌에 계시면 그날은 틀림없는 제삿날이었다. 뵐 때마다 웃으셨고 험한 말씀은 하지 않아 늘 평안하신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숙부님의 유유자적한 생활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숙부님은 풍채도 좋았고 성격 또한 호탕하셨다. 남에게는 돈도 잘 쓰고 정을 많이 내셨지만, 정작 가족에게는 제왕처럼 군림하셨다. 주위로부터 받는 인기와는 달리 사업에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내가 사회의 물정을 조금씩 알아 갈 무렵부터 보아온 숙부님은 여러 가지 사업을 하였으나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하시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으니 나중에는 낚시로 세월을 보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숙모님과 함께 낚시를 갔다가 사고를 당하여 나란히 입원을 하셨다. 고집이 세었던 숙부님은 조금 움직일 정도가 되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하여 홀로 시골로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생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고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음료수를 마시던 숙모님이 잊어버린 과거를 기억해 내려는 듯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셨다. 적요를 깨고자 밥은 잘 드시냐는 물음에 일어서 걷지도 못하는 당신께서 직접지어 먹는다고 하여 황당한 웃음이 났다. 그 말에 장난기가 동하여 내 생일이 언제인지를 물어 보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확하게 말씀하시어 깜짝 놀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힘들었던 기억들은 모두 잊어버리셨고 말씀 내내 즐거웠던 기억만 떠올리셨다.

시간이 한참 되어 방으로 모셔드리며 살펴보니 시설이 깨끗하고 간병인들도 많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자주 찾지 못하여 죄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기거하시는 방 입구에는 스웨덴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고, 옆방은 캐나다, 프랑스 등 이름들이 걸려 있었다. 입원하신 분들이 꿈길에서라도 아픈 몸 훌훌 털고 세계여행을 다녀보라는 설립자의 마음일까.

시간이 흘러 해가 기울어져 갔다. 헤어지기가 아쉬워 손을 붙잡는 숙모님에게 자주 들리겠다는 자신 없는 답을 드리고 일어섰다. 숙모님은 계단을 내려서는 우리에게 어린애처럼 손을 흔들고 계셨다. 치매를 앓고 계시는 숙모님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아내의 얼굴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하였다.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마지막 길에도 행복한 죽음은 분명 있을 것이다. 재산을 많이 물려주고 자식의 성공을 보고 눈을 감는 것은 행복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또한 자식을 앞세우지 않고, 소망한 일 이루고 아프지 않게 살다가 자식이 지켜보는 앞에서 눈을 감는 것도 큰 행복이다. 그러나 재산이 없고 아픈 삶을 살았더라도, 나쁜 기억의 조각들은 버리고 좋았던 날만을 기억하며 생을 마감하는 것 또한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숙모님도 오늘처럼 항상 편안한 얼굴 하시고 좋은 추억만을 기억하시기를 돌아오는 차 속에서 기원 드렸다. 치매라고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서창으로 보이는 석양이 숙모님의 얼굴을 뵈는 듯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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