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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언론사 연재물 등

내 삶의 가치는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가?

by 자한형 2023.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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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가치는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가?/김형철

영국에 한 영감이 살고 있었다. 살아 생전에 돈만 보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자기 가게 부하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면서도 양심의 가책 한 번 느끼지 않은 사람이다. 남을 위해서는 돈 한 푼 안 쓴 구두쇠다. 매일 밤 돈 세는 재미로 살아 온 거다. 그러던 어느 크리스마스 날 오래 전에 죽은 친구이자 동업자의 유령이 찾아온다. "여보게! 날 따라오게! 자네가 미래에 죽으면 하게 될 장례식을 보여 주겠네!" 자신의 죽음 뒤에 벌어지는 상황이 궁금해진 영감을 친구 유령을 따라 나선다. 어떤 사람들이 와 있을까? 사람들은 커녕 개미 새끼 하나 얼씬 하지 않는자신의 장례식 장면에서 그 영감은 충격을 받는다.

대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생활이 연속되는 가운데 하는 말들이다. 어떤 충격적 사건을 맞이해서 대오 각성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 사람도 변한다.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물마시고 난 사실을 알게 된 후 완전히 변한 것을 봐도 그렇다. 원래 그 영감도 어렸을 때는 책도 열심히 읽고, 공부도 잘하는 착한 어린이였다. 지독한 가난에 찌들다 보니 구두쇠로 살아 온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주변 사람에게 잘하고 베풀면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변증법적 운동법칙을 따른 것이다. 찰스 디킨스 소설에 나오는 애비니저 스크루지 영감 이야기다. 스크루지 영감이 처절하게 깨달은 것은 "내가 보는 나""남이 보는 나" 사이에는 엄청난 벽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죽기 전에 깨달았길래 다행이다. 자신의 행동을 바꿀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얼마짜리 인간인가? 내 삶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정말 정확하게 알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 사고라도 나서 내가 죽는다면 보험회사가 보상해주는 돈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 현재 벌고 있는 소득과 미래에 벌어 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소득을 합친 것 정도일 것이다. 내가 현재 받고 있는 연봉이 ""의 가치가 될까? 몇 년전 대한민국 최고의 갑부들만 모인 독서 클럽에서 인문학 강의를 10회에 걸쳐서 한 적이 있다. 정말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늘 얼굴은 어두웠다. 그 사람은 스타트업을 해서 돈을 벌었다. 정말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 얼굴을 왜 저렇게 어두울까?

문제는 돈을 정말 많이 벌었다고 신문에서 매일같이 보도되면서부터 시작됐단다. 친척, 친구,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와서 만나자고 했단다. 만나자는 사람은 크게 두가지 유형이더란다. 하나는 "한 번만 도와주게. 딱 한 번만."라고 말하는 형편호소형, 또 하나는 "여기에 투자하면 1년 후에 2배로 갚아줄게"라는 투자유치형이다. 공통점을 돈을 달라는 것이다.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필요한 건 돈이더란다. 대학 동창회에 나가면 서로 옆자리에 앉으려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서로 다투기까지 한다. ", 오늘은 니가 양보해라. 넌 다음 주에도 얘 옆자리에 앉을 기회가 있잖냐" 듣기에도 보기에도 민망한 자리 쟁탈전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정말 싫었다. 그래서 동창회도 나가지 않게 되더란다. 그 사람은 돈을 벌고 나서, 정작 돈도 잃고, 친구도 다 잃었다.

그러면 내가 누리고 있는 권력, 또는 사회적 지위가 ""의 값어치일까? 몇 해전 장관을 하다가 그만 둔 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김 교수, 장관하다 그만 두고 나면 뭐가 가장 아쉬운 줄 아는가?" "저야 안 해봐서 모르죠! 아마도 수행비서, 운전기사, 비행기 1등석, 호텔 특실, 일류 식당, 등등을 무상으로 그리고 그것도 대접 받아가면서 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천박하고 세속적 사고방식에 기초한 답이어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김교수, 장관 있는 동안 나는 친구들을 많이 잃었어!" 장관되고 나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수많은 친구가 면회를 신청한다. 대학 동창, 고등학교 동창은 기본이고, 중학교, 초등학교, 그리고 잠깐 연수 가 있었던 외국대학 동창생까지 아는 사람이란 아는 사람은 다 연락이 오더란다. 그냥 만나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청탁 건을 가지고 만나잔다. 애당초 그런 것은 절대 안 들어주기로 굳게 마음먹었던 터라 다 거절했다. 비서한테 말해서 면담 자체를 짤랐다. 그랬더니, "친구"들이 싹 다 끊기더란다. 퇴임 후에는 자기가 먼저 만나자고 하기도 뭐 해서 지냈더니 아무도 연락도 오지 않더란다. 퇴임 후에도 연락이 많이 오는 다른 장관들은 재임 시에 뭐 어떻게 했길래 하는 생각이 들더란다. 권력도 그 사람의 가치는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명예, 평판, 인기가 ""의 가치일까? 인기 있는 연예인들 보면 가는 곳마다 팬들이, 그것도 찐팬들이 따라 다닌다. 식당엘 가나, 거리를 걸어 가나 다들 알아보니까 참 좋겠다는 생각드는가. 그런데, 막상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도대체 숨 쉴 곳이 없단다. 한 번은 조용히 쉬고 싶어서,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눌러 쓰고, 선글라스도 쓰고, 밖에 나갔다가, "찐팬"이 알아보는 바람에 순식간에 길거리에서 포위된 적이 있었다고 한숨짓는 연예인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남들이 자신을 알아봐주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여러분들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이 평소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아는가? 야생본능을 억눌러 놓고 우리에 갇혀 있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그런데 그것을 능가하는 스트레스는 바로 사람들이 자신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한 두 명도 아니고 하루에 수백 명 수천 명이 와서는 자신을 요리조리 관찰하고 간다는 것이 그들을 지치게 만든다고 한다. 사람이야 더 말 할 나위가 없다.

명예나 평판도 마찬가지 부작용이 있다.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명예가 더럽혀질 위험이 크다. 그래서 한 번 얻은 명예는 정말로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허튼 행동을 하면 바로 더럽혀진다. 문제는 명예를 고이 간직하려고 하면 할 수록 더럽혀질 확률은 더 올라간다는 명예의 역설이다. 마치 흰 와이셔츠 잘 입고 식당가면 꼭 뭐가 튀기 쉬운 것도, 그리고 눈에 정말 잘 띄는 것도 같은 논리다. 전쟁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을 하는 사람은 이길 확률이 높다. "내가 죽어도 우리가 이기면 된다."는 각오로 싸우는 사람은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다. 명예를 먹고 사는 사람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일수록 전쟁에서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사즉생(死即生)이 아니라 사즉승(死即勝)이면 다행인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전장에서 죽은 이순신의 최후가 말해주지 않는가? 그렇다고 이순신의 명예가 드높여졌던가? 전쟁에서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작정한 사람은 살 확률이 높다. 대신에 그런 사람은 포로가 되기 십상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명예를 얻기는 힘들지만, 버려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명예도 인기도 평판도 다 허무한 일이다.

미국에서 직원들을 스카웃 할때 꼭 물어 보는 것이 하나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잘 모르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저는 사실 제가 이기적이다는 말을 들을 때 제일 억울합니다. 저는 그렇게 남을 괴롭히거나 잘 못한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니까요"라고 답한다면, 과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기적일까? 이타적일까? 사실 이 사람은 이기적일 확률이 매우 높다. 남들이 보는 객관적 시각이 자신의 주관적 평가보다 훨씬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실시간으로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객관적 시각이 나 스스로에 대한 주관적 평가보다 훨씬 정확할 확률이 높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누구든지 돈, 권력, 명예를 추구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것들이 "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측정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내 몸"값에 불과하다. 내 몸 값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 권력, 명예만큼 정확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객관적 가치라고 하는 것은 남들이 나에 대해서 평가한 것을 말한다. 남들은 내가 가진 것을 보고 "내 몸"값을 감정한다. 내 삶의 진정한 가치는 아마 남들이 매긴 교환가치에 기초한 객관적 평가가 아니다. 객관적 평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스크루지도 미래 장례식을 보고 나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확실하게 바꾼 것이다. "인류 역사는 인정 투쟁의 역사다."라고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말한다. 즉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다. 남으로부터 무시 받고 가만있을 사람은 없다. 당장은 무서워서 움츠려 들지는 몰라도 결국은 복수한다. 그래서 서로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싸우는 거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추구하는 돈, 명예, 권력은 내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내 삶의 진정한 가치는 내가 추구하는 내면의 활동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 주관적 가치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