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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화가, 미술, 회화 , 미학 등

서양미술의 역사2

by 자한형 2023.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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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의 역사 2: 르네상스에서 로코코까지/by rooun 2022. 5. 30.

 

르네상스 미술은 지오토, 마사치오, 도나텔로 같은 초기의 여러 창조적인 미술가들의 실험정신과 활동에 힘입어 약 1500년경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 전성기의 대가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 등 유수한 작가들로 넘쳐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예술가들이 활발히 예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이면서도 과학자, 지질학자, 식물학자였고 또한 발명가이면서 전쟁 무기 개발 등 공학도이기도 한 모든 분야를 섭렵한 만능인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끊이지 않게 한 결과 그는 미술작품을 많이 제작하지 못했고 제작된 작품들도 제대로 보존된 경우가 많지 않았다.

르네상스 종교화의 특징은 중세와 비교해 볼 때 그림에 있는 성인에게서 신성과 인간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측면이 잘 나타난다. 예를들어 레오나르도 다빈치 초기 작품인 [암굴 속의 마돈나]에서 마리아는 이전의 마리아와는 다르게 더 이상 신성한 후광을 갖고 있지 않아 이 그림을 주문한 수녀원에서는 그림 받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광과 같은 상징의 도움이 없더라도 마리아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면서 동시에 인간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암굴의 마돈나], 1483-1486, 루브르 박물관

강렬하고 신비스러운 레오나르도의 마돈나에 비해 라파엘로의 마리아는 따뜻하고 다정하면서 편안한 모성을 나타낸다. 라파엘은 개성이 강하거나 독창적인 화가는 아니었지만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대부분 조화롭고 명확한 구성과 자연스러운 빛의 처리 속에서 성스러우면서 이상적인 인체를 보여준다.

라파엘로, [The virgin and the child with Saint John the Baptist], 1507, 루브르 박물관

조각의 경우에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미켈란젤로였다. 그의 작품은 회화나 건축도 있으나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은 대리석 조각이였다. 초기의 [피에타]상에서부터 축적된 에너지가 느껴지고 완벽한 인체미를 가진 [다윗]상과 [노예], 그리고 후기에 제작된 절망과 공포의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그는 여러 단계의 양식적 변화를 가졌었다. 그의 다양한 양식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괄적인 관심사는 늘 인간의 정신과 그것을 반영하는 인체의 표현에 있었는데 그에게 조각은 인간의 경험을 구체화하여 구현한 것이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에타], 1499, 대리석, 성 베드로 성당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다윗], 1501-15-4, 아카데미 미술관, 이탈리아 피렌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죽어가는 노예], 1513-16, 대리석,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1541,프레스코,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은 피렌체와 로마 외에도 상업의 도시 베네치아에서도 활발하였다. 피렌체와 로마 두 도시가 엄격하고 지적인 분위기와 근육적인 인체 중심의 미술의 경향을 보인 반면 상업적인 도시 베네치아에서는 자유롭고 역동적인 구성과 따뜻하고 감각적인 색채가 발달하였다. 베니스 화파의 기초는 지오바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에 의해 다듬어지고 이를 전성기에 이르게 한 화가는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90년경-1576년경)였다. 티치아노와 그 이후 화가들의 그림들에서는 자연 속에서 활동하는 건강하고 생명감 넘치는 인체와 그 인체들을 훈훈히 감싸주는 빛과 사치스러운 비단이나 동방의 보석 같은 사물이 즐겨 사용되어 상업적 도시에 맞게 매우 세속적이고 화려한 그 도시의 취향을 반영하였다.

지오바니 벨리니, [마돈나와 아이]

티치아노, [고치 제단화]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이후에 플랑드르(현재의 벨기에)에서는 얀 반 아이크(Van Eyck)와 같은 화가들에 의해 르네상스 회화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의 미술은 이탈리아의 이상주의와는 달리 세밀한 사실주의적 특징을 나타낸다. 또한 대표적인 화가인 피터 브뤼겔(Pieter Brughel de Oude)은 플랑드르에서 16C에 활약한 중요한 화가로 농민들의 생활을 관찰하고 계절에 따른 자연과 풍경과 인간들의 모습은 조감도적인 구성으로 그렸다. 세세한 일상생활의 모습을 통해 브뤼겔은 인간의 모습과 자연과의 관계를 보여주려고 했다.

반 아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영국국립미술관

반 아이크, [대법관 롤랭 제상의 성모], 루브르 박물관

브뤼겔, [농민 웨딩] , 1568

브뤼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1566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북유럽에 들여온 가장 중요한 화가로 고전주의에 심취하여 원근법, 인체 비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탐구하였다. 이탈리아를 여러 번 여행했던 뒤러는 이론적 지식 못지않게 시각적인 관찰을 중요하게 여겼다.

뒤러, [자화상], 1500

17C에 들어오면서 카톨릭 교회는 신교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종교적 승리와 영광을 보여줄 수 있고 대중들을 감탄시킬 수 있는 미술작품들을 대거 후원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단의 증축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에 못지않게 중요한 미술의 후원자들은 강력한 권력과 부를 축적한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의 절대 군주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호했던 미술 양식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적 형식과 질서를 고수하면서도 한층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변화된 양식으로 이 시기 미술 양식의 형식에는 절대군주의 취향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17C 이후의 사람들은 이 시기의 미술을 르네상스의 완벽한 고전주의의 비해 괴기스럽고 저속하다는 부정적인 의미인 바로크로 불렸고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열등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바로크 미술은 19C후반에 뵐플린과 같은 통찰력 있는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재평가되었고 비로소 르네상스 미술과는 다른 독자성이 있었음이 인식되었다.

바로크는 17C 유럽의 미술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성격을 띠고 발전하였다. 대체로 르네상스 미술이 각 부분의 균형과 질서를 통한 이상적 미를 추구하였다면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총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총체적 특징은 특히 회화, 조각, 건축이 종합되어 마치 장엄한 오르겐 음악이 울리는 듯한 착각을 주는 경이롭고 황홀한 교회나 궁전의 천장화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바로크 양식은 강한 명암의 대조와 동적인 움직임을 강조하면서 관람자가 작품의 공간에 참여하고 그 순간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시기에 많이 사용되었던 수직, 수평인 안정감이 있는 3각형의 정적인 구도보다는 동적인 대각선이나 나선형의 구도가 많이 사용되었다.

17C에 국제적으로 유명했던 화가는 플랑드르의 루벤스(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였다. 젊었을 떄 이탈리에서 8년을 보내면서 고전을 충실히 공부한 루벤스는 처음에는 종교화를 많이 다루었으나 그 이후에는 신화, 종교화, 초상화에 이르는 폭넓은 주제를 소화하여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유럽 전역에서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의 작품의 많은 부분이 특히 후기 작품들은 그의 조수들에 의해 그려졌으나 루벤스 자신의 마지막 손길만으로도 루벤스의 고유한 느낌을 살릴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루벤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움],1610, 목판에 유채, 460 x 340 cm, 안트베르펜 대성당, 안트베르펜, 벨기에

루벤스가 활약하던 플랑드르와 인접한 홀란드(현재의 네덜란드)17C 미술사에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이 시기 스페인에서 독립한 홀란드는 신교 국가 칼빈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그림에 조각 장식을 하지 않았고 다른 가톨릭 국가처럼 귀족이나 성직자들의 기반이 탄탄하지 모했다. 그 대신에 이곳에서는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면서 중산 계급의 생활이 풍요롭게 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집에 알기 쉽고 보기 좋은 소품을 걸어놓기를 원했다. 현재의 인테리어 개념이 일반화된 시기였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집에 걸어놓고 보기엔 부담스러운 장엄하고 거룩한 종교화보다는 사실의 느낌을 담은 정물화,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들, 초상화, 풍경화들이 더 인기를 끌게 되었다. 풍경화의 경우를 예로 들면 홀란드의 풍경은 더 이상 인물의 배경으로서가 아닌 하나의 독립적인 미술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어느 곳이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을 그렸는데 이야기적인 요소가 배제되었고 광선, 공간, 대기 자체가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 순간의 변화와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관찰을 심도 있게 하였다.

프랑드르 회화

풍경화뿐만 아니라 정물화 일상생활의 장면을 그린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평범한 주제와 사실 주의는 지금까지 언급한 다른 주변 국가에서 성행된 바로크 미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홀란드 미술의 경우에는 바로크 양식이 적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암스테르담과 같은 몇몇 도시에서는 많은 군소 화가들이 있었고 직업적인 화상들을 통해 그림을 팔며 생활하였다. 당시 가장 잘 알려진 화가로는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와 프란즈 할스(Frans Hals)가 있다.

렘브란트,[야경, 프랑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 1642, 레이크스 미술관, 암스테르담

프란즈 할스,[하를렘 양노원의 여성 이사들]

17C에 국력이 크게 신장된 국가는 프랑스였다. 특히 부르봉 왕가의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유럽 최고 군주로 군림하였다. 루이 14세는 이탈리아의 미술처럼 지나치게 극적이고 역동적인 양식보다는 장엄하면서도 엄격한 형식적인 양식을 선호한 결과 프랑스의 바로크 양식은 다른 나라보다 절제된 고전 양식을 특징으로 한다.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은 이런 프랑스의 고전적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그는 교훈적이고 명상적인 그림을 추구하였고,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의 대가들과 고전 사상에 입각한 완벽하고 이상화된 화면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생의 이러한 고전주의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기반이 되었고 이후 세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푸생은 후기에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의 고전적 풍경화는 변화무쌍한 자연을 이상화시킨 자연의 영원함과 고귀함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었다.

푸생, [포키온의 유골을 모으는 그의 아내]

푸생과 동시대 활약한 클로드 로렝(Claude Lorrain)은 전적으로 풍경화만 그리던 화가였다. 로렝의 풍경화 역시 이상화된 고전적 풍경이었으나 정확하고 엄격한 푸생의 그림과는 달리 자연을 직접적으로 관찰하여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는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끌로드 로렝, [Landschaft mit Hirten]

끌로드 로렝, {해지는 항구], 1639

프랑스는 루이 14세가 죽은 이후 중앙집권적인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과 중산계급이 부유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귀족들은 향락과 사치에 탐닉하고 있었으며 지성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게 재치에 찬 화술과 감각적인 취향이 돋보이는 사교생활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제 이들의 실내장식은 은빛이나 분홍색, 또는 연두색을 주조로 하면서 아라베스크 장식으로 얽히고 변형된 가구와 벽장식, 그리고 우아하고 세련된 장식품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림이나 조각들도 이러한 살롱에 맞는 작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프랑스에서 1715년경에서부터 1755년경까지 계속된 이러한 미술 양식을 로코코 양식으로 불렸다. 이는 조금씩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영국으로 퍼져나갔다. 로코코의 대표적인 화가로 프랑스의 앙트와 와토(Jean Antoine Watteau)와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였다. 와토는 당시 가장 많이 그려지는 주제인 남녀의 사랑을 주로 다뤘다. 그러니 와토가 그린 야외에서의 젊은 남녀들은 다른 수많은 화가들이 그린 그림과 같은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와는 달리 가냘프고 섬세하며, 실제의 인물과 같은 생명감보다 오히려 꿈과 같은 환상을 느끼게 한다.

장 앙투와 와토  [키테라 섬에서의 출발]

부쉐, [에우로파의 납치],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