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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수필 작법, 글쓰기 , 기타 ] 비평 수필이론 등

문학은 글짓기가 아니다.

by 자한형 2023.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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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글짓기가 아니다 / 김종완

우리는 왜 수필을 쓰는가

-글짓기의 단계를 넘어서

저는 수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당신 3년 안에 수필로 떼돈을 벌 가능성이 있어? 라고 묻는다면, 떼돈은 무슨, 잡지나 낼 돈이나 벌었으면 해,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개떡 같은! 이런 실정이라면 안해야지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하는 걸 보면서 그는 속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 친구가 미래를 보는구먼, 그래서 물을 것입니다. 당신 죽기 전에 떼돈을 벌 자신은 있는 거지? 그러나 나의 대답은 똑 같을 것입니다. 돈 걱정 없이 잡지나 냈으면 해. 정말, 이건 정말 빌어먹을 일 아닙니까? 그는 의아해 하며 질문 할 거예요. 사람이 희망 없이도 살 수 있어요? 어디 세상이 부자들만 사는 곳입니까? 부자 되어야만 성공하는 것입니까?

나에게 정말 희망이 없냐? 아니에요.

대학에서조차 인문이 몰락하는 이 시대에 한국에선 대중이 역으로 작가가 되려고 합니다. 이 기운은 보통 예사로운 기운이 아니에요. 저는 가끔 희망에 부풀어 잠을 못 잘 때도 있어요. 어느 시대에도 글 써서 밥 먹고 살았던 때는 없었고, 파생상품을 팔아먹고 살았지요. 세익스피어 박지원 박제가 추사 김정희 정약용 등. 조선 오백 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시절은 세종조와 영정조 시대일 것입니다. 저는 드라마 <대왕세종>을 봅니다. 노무현 정권이 물러났을 때 정조에 대한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전 그걸 보면서 민중의 한을 봅니다. 깨우쳐진 민중이 있을 때, 새로운 시대가 열려요.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는 솔론의 개혁을 낳았던 아테네의 시민이 있어서 가능했었지요. 정신의 승리지요. 격변기엔 대중을 깨우는 새로운 정신이 나왔어요. 러시아 혁명기, 유럽의 68 세대 그리고 우리가 정신의 그 시대를 열 것 같아요. 촛불집회를 지켜보며 그 조짐을 감지했습니다. 분명 칼 같은 문장만이 역사의 세월을 살아남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거창합니까? 그러면 가장 작게 이기적으로 이야기 합시다. 남는 장사여야 하니까.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겨요. 돈으로 유산 남겨 주어봐야 3대가 못 가요. 재벌가의 교육열을 소문이 나 있지요. 돈도 남겨 주고 글도 남겨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전 글을 남겨주라고 권하겠습니다. 문집을 남기면 정신을 남기는 것 얼을 남기는 것,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고스란히 남기는 것이지요. 글 쓰는 게 남는 장사지요. 왜 글 써? 남는 장사하려고 쓴다. 그런데 문제는 글을 재미없게 쓰면 자손들의 누구도 안 읽는 다는 거지요. 쓰레기가보(家寶)인 거지요.

처음부터 이야기가 옆길로 새었지만 분명한 것은 수필 써서 돈을 벌 수는 없다는 것이고, 그래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아니 바닥부터 시작했으니 우리에겐 희망밖엔 없다는, 이거 얼마나 희망찬 미래입니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도 썼는데 이렇게 희망차니 우리는 랄랄라 수필을 쓰고 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수필을 씁니까? 여러분은 이런 제목의 강연이라고 하니까 속으로 들으나 마나 한 이야기라고 단정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유사 이래 이런 식 질문에 답을 준 적이 없어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에 하나의 답이 나온 적이 있습니까? 그 많은 종교와 철학과 예술이 궁극으로 제기한 질문이 그거지요. 그러나 그 답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지금까지 종교도 철학도 예술도 존재하는 거지요. 하지만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너무나 많은 것이지요. 그 수많은 답이 다 답이지요.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각자가 했다는 답이 다 답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이 아니라 나는 왜 수필을 쓰는가? 로 질문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왜 쓰냐? 마려워서 써요. 왜 똥 싸? 마려워서 싸? 그러면 그 다음 질문은 왜 마려워? 지요.

그 답을 헤겔이 멋지게 했어요.

헤겔은 원래 관념론자입니다. 태초에 하늘엔 정신이 먼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서 들어본 것이지요. 요한복음 11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 로고스 즉 정신이지요. 그런데 정신 그 자체로는 추상적인 것이라 실현이 안 되고 그냥 정신적인 상태로만 남아있어. 어느 날 정신은 자기 자신을 알고 싶었던 거야(내가 누구지? 내가 어떻게 생겼을까? 한마디로 마려운 거지요). 그래서 정신은 자기 자신을 투사해서 자연을 만들었습니다. 관념에서 물질이, 자연이 나온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관념론입니다.(물질에서 정신이 발생 - 유물론).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했어? 자기가 누군지 궁금했던 것이지요. 누굴 위해서 천지를 창조했을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지요.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했다는 예수도 궁극엔 메시아로서의 자기를 위해서 죽은 것이지요. 명색이 메시아인데 빌라도에게 날 살려달라고 울면서 빌고 매달렸다면 인상 팍 구긴 것이지요. 이왕 죽을 거라면 폼나게 죽자. 그래서 3년 동안 이룬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그가 죽으면서 하는 말이 나는 다 이루었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폼이 납니까. 니이체는 그걸 알아버렸어.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통쾌한 농담으로 시작해요(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이 유쾌한 농담을 들으면서도 웃지를 않아. 괜히 너무 심각하는 거야).

서른 살에 산속으로 들어간 다음 10년 후, 마음에 변화가 왔어.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동이 트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말하는 거야.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추어줄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너는 지난 십 년 동안 내 동굴을 찾아 올라와 비추어 주었다. 내가 그리고 나의 독수리와 뱀이 없었다면 너는 필경 너의 빛과 그 빛의 여정에 지쳐 있으리라.”

태양더러 네가 날 비춰준다고 폼 잡지 말라는 거지. 되려 지켜봐준 나에게 감사하라는 거야. 싸가지가 하나도 없지요. 우리 아이놈이 날 위해 날 낳았어요? 둘이 좋다가 내가 생긴 거자나? 나 키우는 재미로 살았지 나 없었으면 심심해서 어쩔 뻔했어?”라고 말 하는 격이잖아요?

로고스의 자기 투사. 하나님의 자기투사, 그것이 자연이에요.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한자가 뜻글자인데 이렇게 그 뜻을 잘 살린 한자는 없는 것 같아. 그러면 거꾸로 물어봅시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냐? 이렇게 생긴 거지요. 허나마나한 말이지만 엄청난 말이지요. 모든 진리는 동어반복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에요.

헤겔에 의하면 그 정신이라는 것이 막 마려웠던 거야. 그래서 자신을 투사해서 드러난 것이 자연이야. 여기까지만. 더 설명하면 바로 바닥 드러나니까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로 갑시다. 천지창조 여섯째 날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126-7) 그처럼 우리도 우리의 가슴에(머리인가?) 어쨌든 내 안에 있는 걸 투사해서 드러낸 것이 우리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런데 우리는 수필을 써놓고 그럴 수 있었나? 우리는 보시기에 비참했노라. 하도 이상해서 나온 작품을 놓고 그 앞에서 물었어. 너는 누구냐? 그러자 작품이 말하는 거야. 나는 바로 너다. 요즘 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볼 때마다 낯설어. 아저씬 누구세요? 그러면 똑 같이 그 아저씨도 물어. 아저씬 누구세요? 똑 같은 걸 보면 틀림없는 나지. 도대체 그 잘났던 나는 어디로 가고 이런 후줄근한 거죽만 남은 거야?

헤겔은 정신의 자기투사가 자연이라 했어요. 어릴 때 거울을 보고 자신인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신은 자연을 대할 때 자신이 외화(外化)된 모습이라는 걸 몰라. 자연은 일종의 타자가 되는 거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볼 수 있는 것만은 보았다는 걸 알게 되고 곧 그것은 자기 정신의 투영임을 인식하게 돼. 자기 동일성의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자연이 정신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지요. 정신이 또 다시 정신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그런데 이때 정신은 옛날의 정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식에 도달한 정신, 즉 자기자신의 실현에 도달한 정신이 되는 것. 이걸 헤겔은 외화(外化)’라고 하지요. 자기 자신을 바깥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이지요.

후줄근한 아저씨를 보고 , 나구나!”하고 끝나면 안 돼요. “오매, 아저씨가 바로 나란 말여! 그런데 어찌 그렇게 되야뿌렀수?” 하고 거기에서 나를 찾는 거예요. 새롭게 나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어야지요. 아까 과거의 나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었지요. 바로 여기에 있어요. 내가 스무 살의 때를 거기에 두고 온 것이 아니잖아요. 두고 온 줄 알지만 두고 올 공간이 있어야지요. 존재란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과거란 온전히 현재에 있어요. 내 사상 내 감정의 변천의 족적이 온전히 거기에 있어. (타임머신이란 불가능 해. ? 가야할 과거도 미래라는 시간이 따로 존재하는 공간은 없는 것이니까.)

내가 쓴 작품을 봐. 그게 나라는 걸 아는 것.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작가라면 독자가 만나는 당신은 바로 작품 속에 있어요. 외화(外化)를 통해서 비로소 나를 봐. 못나고 늙어 후줄근한 외모가 진정한 내가 아니라면, 그 내면의 나는 어떻게 생겼냐고? 내 사상이 무엇이냐고? 그것은 나의 내면의 외화인 나의 작품이 나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시 얘기합시다. 왜 쓰냐?가 아니라 왜 쓰이나? 제가 제시하는 첫 번째 답은 외화를 통해서 작품을 통해서 자기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수필은 다른 장르에 비해서 직접적이지요).

앤디 워홀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앤디 워홀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그냥 내 그림과 영화의 표면을 보고 나를 보라. 그러면 거기에 내가 있다.” 진짜 나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외화 속에 내가 있다. 그는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복사하듯 연작으로 그렸다. 워홀에게 진짜 마릴린 먼로는 저 유명한 여배우, 영화나 신문이나 잡지 속에서 만들어져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이지요. 피상적 이미지 뒤에 숨어 있는 그의 진정한 모습? 이 따위 것이 정말 있기나 할까요? 있다하더라도 그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가 아는 마릴린은 어차피 미디어의 산물이지요. 진짜 마릴린은 있는 그대로의 마릴린이 아니라 미디어에 의해 각색된 대로의 마릴린입니다. 먼로의 이미지 너머? 사진 너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에겐 작품으로 말해지는 모습 말고는 다른 모습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인식은 곧 자기실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헤겔은 외화라 한다고 했어요. 왜 글을 써? 마려워서. 왜 마려워? 자기실현하려고. 여러분의 작품이 여러분이 그리려는 것으로 바로 그려졌을 때, 그게 여러분의 자기실현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더라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시기에 심히 안 좋더라예요. 이게 뭐야!’ 이수태의 <취중대오>란 글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술을 마시다가 그러다 보면 어디메쯤에서 넘어가고, 그러다 어느 순간 기똥찬 진리를 깨닫는 거야. 그래서 나중엔 괴발새발 적어놓고는 다음 날 읽어봤더니, 이건 깨달음은커녕 그저 너무나 평범한 거에 불과해요. 나는 이수태에게 반했어요.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걸 고백 안 해요. 끝내 대단한 걸 깨달았다고 우기지요.

누구든 작가라면 마음속에선 거창한 용을 꿈꾸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토하거나 싸지요. 그런데 토해놓고 보니 용은커녕 지렁이에 불과해요. 토한 당사자도 처음엔 용이 좀 이상해 보여. 그런데 보고 또 보니까 서서히 용의 모습이 떠오르는 거야. 얼마 전 그 흐리멍텅하게 보인 것은 걸작이 내는 후광, 즉 아우라였다는 착각에 빠져. 내가 꿈으로 잉태해서 낳은 저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내 눈엔 분명히 용이야. 잡지에 글 내 놓고, 잡지 오면 자기 글만 백번도 읽었다는 사람이 있어요. 바로 그런 사람은 자기만 알아볼 용의 어머니이겠지요. 그 사람들이 하는 말. 요즘 비평이 주례사에요. 세게 강하게 하세요. 그도 눈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 글이 지렁이라는 게 보이거든. 그런 지렁이와 함께 자기 글이 있으니까 그 용스러운 게 보이지 않고 묻혀버렸다는 거지요. 그런데 누가 그거 용 아니고 지렁이라고 말하면 원수 되는 거지. 이런 괘씸한 놈이 있나. 저 놈은 좀 괜찮다고 해서 용을 용으로 볼 수 있겠지라고 기대했더니만 저 놈도 눈이 삐었지. , 지렁이라고? 야단이 납니다. 이제 우리는 정직하게 말할 때가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그게 토룡이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 정직한 한마디가 당장은 그를 죽일지라도 결국은 그를 살리는 길일 겁니다. 그런데 수필계는 말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아니 인격이란 너그러워야한다고 그 지렁이를 보고 틀림없는 용이라고 사기를 쳐요. 서울에 오서 처음 수업을 열었을 때 모인 이들이 어디에도 뿌리 내리길 거부하는 낭인들이었습니다. 합평을 하는데 거기 모인 작가들이 평론가들보다 말을 더 잘해요. 뻔드르한 허나마나한 이야기지만 완전히 칭찬에 질이 나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