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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수필 작법, 글쓰기 , 기타 ] 비평 수필이론 등

문학은 글짓기가 아니다.2

by 자한형 2023.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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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글짓기가 아니다 2/김종완

자기 깨짐의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자가 어디 작가입니까. 절망해서 몇 번 죽어보지 못한 작가가 어디 작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모두들 다 죽어보았대. 바보야, 그렇게 죽은 것은 죽은 것도 아냐! 내 눈으로 그게 토룡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을 때 비로소 죽은 거지요. 우리가 창작과정에서 수없이 경험하는 게 이런 것 아닌가요? 분명 용을 그렸는데 나온 것은 토룡뿐. 그렇다면 내가 가슴속에서 키웠던 것이 지렁이에 불과했었구나! 왜 내 가슴속에는 토룡만 사는 거야! 하며 가슴을 치는 경험이 있어야지요.

자기실현이란 무엇일까요? 내 가슴속에 살고 있는 용을 용답게 그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사고가 명료화 되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은 그게 토룡이었던 것이지요. 그 증거를 하나 들어 볼까요. 제목보고 내용 맞추기. 수필이 답찾기 게임인가봐. 그런데 그 답이라는 게 너무나 뻔해. 이 뻔한 말 하려고 그렇게 생폼을 다 잡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야. 그들이 성공했다는 낯설게 하기의 지랄 맞을 가벼움이여! 문제는 그런 사람일수록 오늘에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어떤 변화도 하지 않으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가슴엔 처음부터 용이 살고 있었을까? 용은 처음부터 용이 아니라 이무기가 변한 것이잖아. 누구나 처음엔 토룡으로 살다가 그게 미꾸라지로 변하고 그게 뱀으로 변하고 이무기로 변하고 드디어 그게 승천하면 용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토룡을 용으로 키워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실현입니다. 어떻게 키워? 담론을 통해서.

참문학이란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와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괴테와 <파우스트>의 괴테는 같은 사람인데도 틀려. 초기의 헤르만헷세와 <유리알유희>의 헷세는 틀려.

조정래의 <태백산맥> 1권과 10권의 차이. 80년대 현대사나 역사철학 등 거대담론의 발전 없었다면 태백산맥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작가도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엔 자기실현에 가장 적합한 장르가 수필 같습니다. 수필은 미래에 가장 적합한 장르입니다.

요즘은 각 대학마다 문예창작과가 있어 창작을 가르쳐. 문예창작과는 그해 신춘에 몇 명을 당선시키느냐에 목숨을 겁니다. 창작의 노하우를 가르친다는 것인데, 우리 땐 서라벌 예대라는 게 있었지만 문학을 글쓰는 방법을 배워서 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어요, 저도 수필선생인데, 동아문화센터에서 수업 때 일인데, 사람들의 눈초리는 수필창작 매뉴얼을 공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게 어디에 있어요? 누구의 문하생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흠모한 선생이 있으면 그분께 쓴 작품을 보이는 것이고, 그러면 간단한 논평을 듣는 것. 그럴 때 선생은 흠모의 대상이면서 극복의 대상이지요. (바둑에서 이창호가 조훈현의 문하생)

선생으로 나서면서 저의 1성은 나는 당신의 선생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하지만 속으론 당신들 복 터진거야. 이렇게 말하는 선생 보았어? 선생이 아닌 선생이 진짜 선생이지요. 그러면 선생노릇 하는 대신에 내가 할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당신의 독자가 되어 주는 것. 전 안 가르쳐요. ? 다행히 아는 게 없어서 가르칠 것이 없어. 그래서 당신께 질문하는 거야. 당신이 당신을 가르치는 거지. 덤으로 나도 배우면 좋고. 안 가르치고 돈을 버니 백 % 남는 장사이지요. 어디 처음부터 안 가르치나. 처음엔 나도 봐줘.

고비는 문장을 이 잡듯 봐 주는 단계. 평면에 삼각형을 그리는 단계. 이 단계만으로도 수필계에선 대접 받어. 문장을 봐 주면 공부 많이 했다는 흐뭇한 표정을 짓는데 사실 그것 하자고 한 것 아니거든. 선생 있고 학생 있는 단계란 작가와 작가가 만나는 단계가 아니에요. 그 단계를 넘으면서부턴 왈 담론의 단계가 펼쳐져요. 글짓기의 단계를 넘어서 문학하는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지요. 학생이 선생이 되는 단계. 선생인 나는 공짜로 거저 먹는 단계. 하지만 그런 수업 하고나면 녹초가 되지요.

가장 고약한 친구들, 비밀도 많아. 밀제조창으로 알아. 행여 <에세이스트>에서 공부하는 게 소문날까 봐 쉬쉬해요(날 위해서 그런대. 자기 선생이 무서운 사람이어서 자기가 여기에서 수업하는 지 알면 자기선생이 날 죽인대. 언제 내가 당신 오라고 했어? 찾아 온 손님 어쩔 수 없어서 수업에 동참시킨 건데). 그러다 작품 완성되면 발표해서 박수 짝짝짝, 그 사람 속으로 말 할 거야. 수강료 냈잖아. 엣기 여보 쇼, 그 돈 벌자고 수업한 것 아니지. 당신 속에 잠자고 있는 진정한 작가를 깨워 만나지고 수업한 거잖아. 그런 사람 그 거지근성 버리지 못하면 평생을 해도 작가가 못 돼. ? 독립적이지 못하고 남의 눈치나 보는 사람이란 아직 노예지. 거지지. 그런 사람은 항상 거기까지, 글짓기 단계에서 머무르고 말아요.

차원의 문제. 평면과 공간. 삼각형과 정사면체.

3차원의 물체가 2차원에 오면 어떻게 보일까? 그림자만 보여.

평면에 삼각형 그리기도 못해. 삼각형을 그리는 것은 글짓기가 된 거야. 이야기 꼴이 갖춰져 있는 차원. 그런데 우리 수필 선생들은 그런 걸 훌륭한 글쓰기라고 해.

: < 봉선화> 시적 표현, 사물을 빗대서 인간의 심리를 그림.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 이야기 아니 줄거리만 있어. 즉 등장인물의 성격이 없어. 다 죽은 거지.

요즘 수필계는 마이너 리그는 활성화 되어 있어. 분명 메이저 리그도 있었는데 요즘 선수가 없어. 노장들은 늙었고, 중견들은 자고 있고, ? 신인다운 신인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야. 스타가 없으니 관중이 없지. 그러다가 판의 주도권을 마이너리그에게 뺏길 것. 그러면 수필이 그들이 쓰는, 글짓기도 못 되는 게 되어 버려.

평면의 세 점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것들은 그 생명력 때문에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욕망하기 시작하고, 그러면 꼴리는 거야(도올의 꼴림’) 불끈불끈 일어서서 드디어 한 점을 찍는 거야. 평면이 3차원의 공간이 되는 것. 삼각형이 정사면체의 되는 것. 그 한 점이 바로 정점이야. 그 전복의 점.

<구양근의 상수리 숲을 지나며>

수업이란 끝없이 질문해서 서로 담화함으로써 그 점을 찍도록 하는 것이야. 나는 그때 그 사람들의 감격한 표정들을 잊지 못해. 사람이 변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져. 그는 삶에 각이 나와.

그런데 그것도 익숙해져요. 한마디로 질이 나는 것이지요. 머리 좋은 친구들은 그것도 흉내를 내. 세상에 깨달았다는 놈들의 태반은 흉내내기야. 내가 보기엔 세상에서 가장 악질적으로 나쁜 놈들입니다. 도를 닦다보면 돈오할 수 있지요. 돈오란 천지개벽 같은 충격으로 옵니다. 그 혁명은 순간일 수도 있고 얼마간의 기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뼈를 깎는 점수(漸修)가 없으면. 점수하지 않으면 그 세계는 유지가 안 되고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사유만큼 부패가 심한 게 없을 것입니다. 본인도 믿기지 않는 거지요. 따르는 사람들의 기대는 있고, 어쩔 수 없이 그 다음은 흉내를 내는 거지요. 사람들은 까빡 속아요. 호모사피언스란 말이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말이라지만 보통인간들의 사유세계라는 얼마나 한심한가(상상력의 위대함이여. 그러나 상상력의 빈곤함이여!). 우리가 현대에 사는가. 우리는 중세에 살아. 근대란 신의 부정으로부터 출발해요. 신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드러 선 것이요. 점치러 가는 사람. 교회에 가서 복 주라고 비는 사람. 그의 사고는 아직 중세에 있는 거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은 그리스 사람들이 배운 유크리트 기하학을 지금까지 배운 것이지(학교에선 비유크리트 기하학은 가르치지 않아) 대중의 상상력이라는 것도 크게 보면 너무나 소박해.

그 한계를 벗어나는 것. 삶에 각이 나오는 것. 그 자는 문학을 쓰기가 아니라 직접 되기한 거야. 내 생각엔 그것이 참다운 점수야. 혁명이야.

<최진석의 예> 라깡되기 노자되기.

완성된 되기의 세계가 문학으로 되는 4차원이 아닐까요. 몸으로 되기. 4차원의 세계는 분명히 존재해. 상대성 원리. 평행선의 공리. 블랙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수신의 의미는? <데미안>의 알이 깨어지는 아픔.

평천하의 의미는? 휴먼이즘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지요. 생명사상.

촛불은 치국의 단계에 머물렀어. 소의 생명권에 대한 고찰이 없어. 도룡룡이 고소를 했어.

세상의 기득권자들은 우리에게 수신한 다음 제가나 하라고 해. 그러나 수신이 완성될 때가 평천하 하는 것이고, 평천하하는 게 바로 수신하는 것.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삼보일배. 티벳의 3 1배처럼 극락왕생코자 한다면 난 비웃고 말아. 이게 바로 평천하운동. 곧 수신이야. 제가야 치국이야.

우리는 왜 수필을 쓰는가. 왜 써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에 나름의 답을 찾아 보았습니다.

수필의 내가 경험한 것을 쓴다고 할 때, 그 경험에는 내가 느낀 것, 내가 생각한 것까지를 포함한다고 할 때, 수필은 내 (과거의) 삶을 도막 내 이야기 화()하기입니다. 삶은 서사가 아닙니다. 시작도 전개도 클라이막스도 대단원도 없는 밋밋한 것이지요. 내가 경험한 걸 쓰면 수필이라고 하더라며 내밀면 안 됩니다. 플롯을 짜고, 그런데 왜 이런 번거로운 짓거리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나를 찾기 위해서 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냥 밋밋하게 살아 온 나의 과거의 삶을 조각내서 그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나의 삶을 완성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미가 절로 부여 돼? 똑 같은 짓을 또 반복하면 안 돼. 하늘 아래 새 것이 없어. 모든 이야기는 이미 다 해진 이야기야. 그 시대에 맞게 새로운 버전의 글을 쓰는 거야. 그러면 눈을 떠냐 돼. 어떻게 눈을 뜰 것인가? 그 유일한 수단은 담론이라 했습니다. 담론이란 만남입니다. 오늘 한국수필에 필요한 것은 담론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만나야 합니다. 수필가들이여, 대구에서 떼로 만납시다가 아니고, 담론으로의 만남. 만나야 할 사람들이 헐렁한 네트웍을 통해서 사랑으로 뼈 드러날 때까지 토론하는 만남. 한 발 앞서 열기가 힘들지. 일단 열면 따르기는 쉬워요.

나라는 존재가 나 홀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된 존재라는 면에서 수필의 대상은 무엇인가 등 더 해야 될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한 된 시간으로 여기에서 끝내고 다음을 기약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