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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6

서창

by 자한형 2024.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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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書窓 / 윤미영

굵은 나무들 사이로 드러난 단층 건물이 나직하다. 1938년에 첫 기적을 울린 후 역사驛舍는 지금껏 변함없이 부동으로 서 있다. 역 이름은 80여 년 세월을 이겨낸 화본花本이다. 마치 이야기 꽃나무 같다. 역명답게 갖가지 화초를 사철동안 피워내면서 여행자를 푸근하게 맞아준다. 바람처럼 스치는 여행자에게 화본花本은 왜 꽃의 근본, 꽃의 중심이란 의미를 생각하게 할까.

화본역은 군위군에서 여객열차가 유일하게 정차한다. 하루 평균 이용객이 20~30여 명 남짓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2011년에 새롭게 단장하면서 여행자들이 부쩍 찾아온다. 큰길 쪽으로는 마을 사람들의 옛 모습, 신화와 전설, 삼국유사를 주제로 한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철길 옆 폐기차를 이용한 레일카페에서는 꽃과 역사 냄새에 한꺼번에 젖을 수 있다.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니 여행자의 발길에 깔렸던 먼지가 폴폴 일어난다. 보사노바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면 멈춘 시계가 깨어날 정도로 한갓지다. 웃음과 뭉글한 수다가 사라진 한 녘에는 승무원들이 썼던 낡은 모자와 빛바랜 책자들을 볼 수 있다. 이런 간이역의 모습이 어찌 화본에만 있을까.

화본의 진경은 딴 데 있다. 천원으로 입장권을 사서 철길을 건너가면 작은 새들이 나무에서 울고 사람손이 성근 논밭이 보인다. 마을사람들이 성급히 오가던 옛길이자 생활의 가교였던 길. 시끌벅적했던 나들목이 이젠 만개한 꽃 속에서 쉬는가. 그 때 일순간 하늘을 가린 우람한 물체가 시선을 가로막는다. 화본의 진경!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탄탄한 시멘트로 쌓아올린 둥근 탑이다. 17m 높이의 우뚝한 성새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경주 첨성대瞻星臺같다. 수십 년 세월을 온전히 지켜 온 급수탑이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저수탑貯水塔으로, 지금은 간이역 박물관이 되어 있다. 담쟁이가 굵은 줄기로 탑의 몸피를 칭칭 감아 보호막을 친 가운에 탑과 담쟁이는 서로를 안으며 버티고 있다. 칠이 벗겨지고 풍파에 시달린 듯 곳곳이 마모 되어 있다. 하지만 쇠붙이 빗장은 역사의 표상인양 옹골차게 붙어있다.

빗장을 밀어보니 문이 안으로 스르르 열린다. 어두운 내부로 희뿌연 빛과 함께 들어섰다. 굵고 가는 두 개의 쇠관이 무거운 천정을 굳건히 받치고 있다. 동맥과 정맥이 연상된다. 가느다란 관은 급수정에서 끌어올린 물을 천정 위 탱크에 채우는 동맥이고, 열차에 쏟아내는 물은 정맥 같은 굵은 배수관을 통하여 배출된다. 금방이라도 고막이 터질 듯한 폭포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당시의 위용을 지켜내고 있어서다.

탑의 중턱쯤에 천문天門이 뚫려있다. 햇빛과 별빛이 은은히 스며들도록 한 틈이 공기창이거나 숨구멍일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창가에 금빛 작은 소녀상이 놓여 있다. 곱게 땋은 갈색 머리가 허리에서 찰랑거리고, 책을 가슴에 꼭 껴안은 손이 작고 여릿하다. 옆에는 작은 고양이가 창틀에 걸터앉아 소녀를 지긋이 바라본다. 소녀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역과 이어진 기찻길을 멀리 바라본다.

무엇을 생각할까,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갈까?’

소녀는 책을 읽으며 밤늦게 돌아올 부모를 기다릴지 모른다. 기적 소리를 들으며 소꿉놀이와 고무줄놀이를 하던 친구들은 어머니가 저녁밥을 먹으라고 부르면 달려간다. 그 시각 집에 아무도 없는 소녀는 홀로 노을이 깔린 철로를 조금이나마 더 멀리 보기 위해 급수탑으로 뛰어 오른다. 한 손에 책을 들고 뒤에는 고양이가 따른다. 친구들이 가족과 저녁을 먹을 때 공부하고 있어!’ 라던 어머니의 부탁을 기억하며 가족을 기다린다.

화본 가까이에 인각사가 있다. 인각사는 일연스님이 건국신화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장대한 역사를 집대성한 <삼국유사> 집필지로 알려져 있다. 활을 쏘며 광활한 들판을 가로지르던 주몽을 보며 소녀도 꿈을 꾼다. 소녀에게 책 속의 세상은 시골보다 더 꿈이 많고, 도시보다 더 미래가 담긴 것이다. 하루에 몇 차례씩 기차가 오면 도시로 떠날 꿈을 품는다. 마을을 벗어나 산을 넘고 강을 지나 불빛 찬란한 큰 도시에 도달하는 미래를 그린다. 그 기다림이 있어 하루가 지루하지 않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학교의 울타리는 부산역의 높고 긴 담벼락이었다. 부산역에서 새마을호가 기적을 울리며 매일 서울로 출발했다. 서울은 이름만으로도 어린 가슴이 마구 설렜다. 수업 중에 기적소리가 울리면 가끔 공부를 가르치던 선생님도, 떠들던 아이들도 동작을 멈추었다. 그럴 때 나는 자리에 앉아 발꿈치를 들고는 창 쪽으로 눈을 돌리곤 했다. 서울로 뻗은 선로 위의 기차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4학년이 되면서 기적 소리가 교육 환경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학교는 문을 닫고 말았다. 서울로 향하던 나와 친구들의 꿈의 기차는 더 이상 기적을 울리지 않았다.

급수탑의 창은 별이 조금이나마 더 오래까지 비치도록 높게 자리 잡았다. 땅거미가 깔리면 이번엔 달이 찾아온다. 달빛 창가에서 소녀는 부모님을 기다리다 지쳐 어깨를 창틀에 기댄다. 기차소리에서 기다림을 배우고 달빛에서 부모의 마음을 배운다. 창은 어린 소녀가 또래보다 철이 먼저 드는 곳이다. 소녀에게 창은 세상을 읽는 서창書窓이다. 창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세상을 이해하는 문이다. 책을 통해 엄마의 마음을 알고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를 이해한다.

소녀의 아버지는 화부火夫일 것이다. 화부는 불을 떼고 물을 데워서 기차를 달리게 한다. 증기가스로 터번을 돌리려면 화실火室에서 석탄을 쉬지 않고 떼야 한다. 증기기관차가 뿜어내는 하얀 연기는 화부의 거친 숨결이다. 무엇보다 가족을 보고 싶어 하는 한숨이기도 한다. 기차는 달리고 화부의 몸과 옷이 검은 땀으로 얼룩질 때 소녀도 잠이 든다.

급수탑을 뒤로 하고 건널목을 향해 걷는다. 현재는 과거라는 발자국 속에서 시작한다. 삶의 너덜겅에서 팔십 여 년을 살아온 증인을 만나 비로소 기다림을 배운다. 기다림이 사람사이의 끈이다. 삼국유사는 신라와 지금을 잇는 글의 끈이지만, 화본 급수탑은 가족과 가족의 정을 담은 탑이다.

우뚝 선 급수탑 주변에 꽃이 만발하다. 꽃의 근본이 뿌리이듯이 화본花本의 뿌리는 급수탑이다. 사람의 심장도 급수탑이다. 여행자도 자신의 가슴에 탑하나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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