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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 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월간중앙 연재물),52

최익현 2(3/2) 개항, 개화 반대 운동 민씨 정권과의 갈등 최익현은 곧 외국과의 통상을 논의하기 시작한 민씨 정권과도 곧 마찰을 빚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가일층 부각되었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개항을 해서는 안되는 다섯가지 이유를 적어 개항오불가(開港五不可)의 5조(條)로 된 '병자척화소'(丙子斥和疏)를 올렸다. 척사소에서 그는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일제의 강압과 정부의 수교방침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그 무렵 모든 개항반대상소 중에서도 가장 잘 지은 내용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 상소는 외면되었고, 그는 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극렬 반대하다가 이번에는 흑산도에 4년간 위리안치된 것이다. 최익현이 반대한 개항 후의 사태는 개화, 주화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근대문물을 앞세운 일제를 .. 2021. 9. 19.
최익현(1/3) 최익현 본관은 경주이고, 초명은 최기남(崔奇男), 자(字)는 찬겸(贊謙), 아호(雅號)는 면암(勉庵)이다. 김기현과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노론 화서학파의 지도자이자 위정척사파의 중심 인물이었고,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동부승지, 참의, 돈녕부의 도정 등을 역임했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대,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1873년 음력 10월과 1874년 음력 11월, 이토록 두 차례씩 흥선대원군을 공격하여 끝내 실각시켰다. 그 뒤 의정부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남곤, 정인홍, 한효순,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을 친구 김평묵과 함께 여.. 2021. 9. 19.
장기려박사 김규태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4개월 만인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환했다.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의사였던 장 박사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을 오가며 부상자 진료에 밤낮이 없었다. 그 해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대전환, 국군은 평양을 철수하게 된다. 이 때 장기려박사는 남으로 가기 위해 환자용 버스에 태워졌다. 부모와 부인, 그리고 5남매를 두고 차남만 데리고 떠났다. 이 순간이 45년간의 긴 이별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족을 만난다는 일념으로 부산에서 피란생활이 시작되었다. 영도에서 천막을 치고 무료 진료소를 열었다. 절대 빈곤의 시대에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날이 갈수록 가족을 만난다는 것은 기약 없는 희망일 뿐이라고 여겨졌다. 경성의전에 들어갈 때부터 하느님 앞에 맹세한 대.. 2021. 9. 19.
한홍구 1 한홍구 2019년 2월부터 유튜버 활동을 시작했다. 채널명은 한홍구 TV, 역사 ‘통’. 1959년 7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대 국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후, 1999년 미국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나 훗날 북한 독재 권력 수립의 단초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민생단 사건을 다룬 (상처받은 민족주의-1930년대 간도에서의 민생단사건과 김일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에 소설가 김연수가 해당 사건을 다룬 소설 (밤은 노래한다)를 집필하고 단행본을 출간했을 때도 후기 형식으로 민생단 사건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2000년부터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한씨 집안이 참으로 대단한데 일단 한홍구의 직계 14대조가 인조 비 인렬왕후 한씨.. 2021. 8.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