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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631

손끝이 고르는 영혼의 소리 손끝이 고르는 영혼의 소리 / 변종호 예불을 알리는 법고 소리가 선암사 경내를 돌아 산기슭을 기어오른다. 두~둥 두~둥 위를 시작으로 안에서 밖, 밖에서 안으로, 우에서 좌로 이어진다. 양쪽에서 스님 두 분이 춤을 추듯 커다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번갈아 두들긴다. 쏟아져 나오는 파동이 전율을 일으킨다. 생경한 의식이라 경건하게 지켜봤다. 저승으로 떠난 소가 북이 돼 울었다. 두두~둥둥 울리던 북소리가 가슴을 뚫는다. 붉은 해를 삼켜버린 조계산으로 사위는 흐릿해지나 방문객은 합장하고 바라본다. 한동안 울리던 북소리가 지상의 생명을 제도한다는 범종 소리로 끝맺었다. 귀갓길, 울려 퍼지던 대북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두들겨 맞아야 울고 울어야만 길을 내는 대북은 여러 쪽의 소나무로 몸통을 짜고 양면은 소가죽.. 2023. 5. 31.
창/오미향 엄마가 돌아가신 후 물건 정리를 했다. 부엌 곳곳에 소주병이 숨겨져 있었다. 싱크대 아랫단에서, 양주병과 포도주가 진열된 찬장 구석진 곳에서, 간장병과 식용유 사이에서도 초록색 병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기제사가 끝나고 시누이와 시고모님의 거침없는 입담이 지나간 후에 돌아서서 몰래 찾아들었을 눈물 한 방울 소주 한 모금. 서울에 있는 여대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장녀라 지방교대를 가야했던 큰 언니가 단식 투쟁을 할 때에도 모른 척 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큰 오빠를 해병대에 보내고 돌아섰을 때에도, 지방 고위공무원으로 승승장구하던 아버지가 당뇨합병증으로 거동을 못 하셨을 때에도 남몰래 찾아 들었을 소주 한 병.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도록 답답하고 체증이 내려가지 않았을 때 혼자 식구들의 눈을 피해.. 2023. 5. 31.
아버지의 망치 아버지의 망치 /정석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락방을 정리하다 신문지에 돌돌 싼 작은 봉지 하나를 발견했다. 제법 묵직한 것을 조심스레 펼쳐 보니 망치머리 두 개가 앙증맞게 싸여 있었다. 양쪽 끝이 뾰족하게 생긴 이 망치는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가시고기처럼 사셨던 진부한 삶의 흔적이다.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연일 정씨 가문의 종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계셨다. 오랫동안 맡아 오던 협촌의 이장 직함에 대한 책임감도 대단하셨다. 하루 건너 한 번씩 창말재를 넘어 읍내로 나가셨고 면서기가 마을에 출장을 나와도 더운밥을 해 대고 사거리 김순경이 와도 닭을 잡아 대접했다. 그것이 관(官)에 대한 아버지의 예의였다. 소출이 적은 농지와 거의 무보수직인 이장일은 아버지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농토를 거의 없애버린 가.. 2023.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