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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3

1. 가해자의 얼굴

by 자한형 202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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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얼굴 -이청준

 

1

 

19506월 하순에서 9월까지, 당시에 ㄱ중학교 2학년 학생이던 아이가 더부살이로 얹혀 지내던 혜화동의 누님 집으로 그 석 달 남짓간에 아이의 자형을 찾아온 사람은 모두 세 파수였다. 몸을 피하려 했대도 아이의 자형은 어차피 그 중의 누구에겐가 붙잡혀 끌려가고 말 처지였다. 세 번 다 모두 아이의 자형과는 한동안 ㅂ연맹이란 단체에 소속을 함께 해 온 사람들이어서 그의 주변사를 빤히 다 알고 있는 처지들인데다, 마지막 세번째는 경우나 목적이 달랐지만, 첫번과 두번째는 각기 서로 다른 편을 위해서 동지를 붙잡으러 온 위인들이었던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차라리 아이의 자형이 첫번 연행자들에게 일찍 덜미를 붙들려가 버린 것이 어차피 치러야 할 뒷날의 난국을 얼마쯤 앞당겨 겪어버린 격이었달까. 하지만 아이나 아이의 누님은 그것이 자형이나 남편의 마지막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이의 자형은 그 무렵 몇 년간 그 ㅂ연맹이란 신생우익단체의 보호를 받아 오던 신분이었다. 일제 말기에 ㅇ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ㅈ중학교 교직생활을 해오던 아이의 자형은 그 동안 좌익사상에 꽤 마음이 기울어 온 탓으로, 8.15해방 이후엔 전국적인 규모의 한 좌경 교원단체의 일원으로 학교 일보다 그 일에 더 열성을 쏟은 적이 있었다.

그러다 48년 정부수립 이후부터는 돌아가는 정세나 활동 여건이 좋지 못한데다 그간의 젊

은 열정도 많이 시들해져 가고 하여, 끝내는 불가피한 호신책을 겸하여 '전과(前過)를 뉘우치고 새 민주 조국 건설에 몸바쳐 매진할 것'을 공개 서약한 뒤, 유사한 전력(前歷)을 지닌 사람들의 보호 교도 단체인 ㅂ연맹에의 가입을 단행하게끔 되었다. 그리고 그쯤 다시 옛 일자리로 돌아가 다른 큰 풍파 없이 두어 해 조심스런 연맹을 기해 오다 마침내 그 6월의 일을 맞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그 느닷없는 소동 앞에 이럴까 저럴까 갈피를 못 잡고 아연해있던 참에, 그 날 아

침 ㅂ연맹 사람들이 자형 데리러 와 준 것이 본인에게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차라리 다행스런 호신책이자 피신길로만 여겨졌다. 게다가, 전황까지 많이 불리하다는 뒤숭숭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그 26일 이른 새벽녘, 아이의 자형을 데리러 온 ㅂ연맹 사람들도 단언하듯 말했다.

김 동지, 나라가 이렇듯 위난을 당하고 있는 판에 우리가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소, 후방의 일이나마 우리도 일어서서 함께 싸우기로 했으니, 지금 바로 우리와 같이 집결지로 나갑시다.

우리는 사실 전향(轉向)의 권력자들 아니오, 우리의 전향이 저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반

역이 되는 것은 김 동지도 잘 알고 있는 일일 게요. 만에 하나 전세가 불리하게 기우는 날

, 우리가 살 길은 오직 이 길뿐 아니겠소. , 그러니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조금도 틀리거나 의심할 데가 없는, 동지로서의 충정과 결의에 찬 권유였다. 아이의 자형도 그렇게 생각했음이 분명했고, 그래서 그는 곧 동료들을 선선히 뒤좇아 나섰을 터였다. 뿐만 아니었다. 나중에 또 다른 ㅂ연맹 사람들이 이번에는 '배신자' 옛 동지를 처단하려고 아이의 자형을 연행하러 왔을 때 아이의 누님은 남편이 미리 남쪽 편으로 몸을 비켜서게 된 것을 얼마나 큰 다행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 두 번째 ㅂ연맹 사람들이 아이의 자형을 끌어가려 온 것은 그러니까 북쪽 군대가 아직

미아리 고개를 넘기 전인 27일의 저녁 어스름녘이었다. 먼젓번 사람들과 달리, 그 무렵 서울

에는 형식적인 전향으로 연맹의 보호를 받아 오다. 일이 터지면서부터는 제 본색으로 돌아가 북쪽 군대의 입성을 숨어 기다린 사람들이 아직 꽤 되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예상외로 빨라진 침공군의 기세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런 식으로 또 한번의 구명책을 좇아 나선 것이었을까, 위인들은 국군이 아직 한강다리도 넘기 전인 그 날 저녁, 미아리 쪽으로 다가오는 그 북쪽 군대의 포성속에 자신들이 전날의 전과(前過)를 벌충하려는 듯 몇 사람씩 미리 작반,'반역자' 색출에 열을 올리고 나선 것이었다.

여기가 반역자 김의 집이 틀림없지!

위인들은 서울이 이미 자기들 천지가 된 듯이 은밀스런 외유나 유인책 따위를 쓰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살기등등 '죄인'을 색출하러 온 형세였다. 그리고 그 죄인이 이미 남쪽 편으로 몸을 비켜가 버린 것을 알고는 이들을 갈아붙였다.

이 새끼는 보신이나 잠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마음으로 사상 전향을 햇던 게야.

그래서 옛 교원자리에 다시 나갈 수 있었잖아. 인민의 반역자 같으니라! 헌다고 이제 와서 제가 몇 발짝이나 살아 내뺄라구!

그 위인들이 허탕을 치고 돌아간 뒤 아이에게도 백 번 천 번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구엔 그런 위태로운 안도감이나 소망 또한 별 근거가 없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서울이 마침내 적치하에 놓이게 되고서였다. 그 날 이른 새벽 연맹사람을 따라나간 자형에게선 다시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이제는 어떻게 소식을 전해 올 길도 없었으므로, 그것으로 아이나 아이의 누님은 그가 그저 무사히 남쪽으로 살아 내려가기나 했기를 빌었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그와 전혀 반대의 절망적인 소문이 전해져 왔다.

남쪽을 위해 나섰던 ㅂ연맹 사람들은 한강도 건너지 못하고 모두 떼죽음을 당했다는구나.

거리 낌새를 살피러 마을에 나갔다가 어찌어찌 용케 같은 처지에 이른 옛 연맹 사람의 가

족을 만나 얻어들은 소리라며, 아이의 누님은 대문을 들어서는 길로 맥을 놓고 늘어졌다.

그 뭐냐. 예비검속이라더냐 뭐냐. 매형을 데려간 건 알고 보니 그런 것이었다는구나. 세가 불리한 쪽이 후퇴를 하면서 진지나 전쟁물자를 상대편에게 넘겨 주지 않기 위해 불태워 없애고 가는…… 그런 식으로다 사람까지……. 창졸간에 사람들이 다 데려갈 수 없는 위난 중에, 네 매형은 더구나 뒤를 믿을 수 없는 전향자 성분이었으니…….

하지만 그 붉은 완장패들의 매서운 눈길과 반동가족으로서의 절박한 위기감 때문이었으까. 아이의 누님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남편의 액운에 대해 뜻밖에 간단히 체념조가 되었다.

네 매형은 아무래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싶구나. 저 쪽 사람들 입에서 나온 소리들이라 다 곧이 들을 수는 없지만, 한강 다리가 끊어질 무렵 해서 네 매형 같은 사람들이

많이 상한 건 사실인가 보더라. 서대문 쪽으로 형무소나 경찰서만이 아니라 학교나 예배당 등지에서까지 그렇게 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닌까…….

한 며칠 남편의 종적이나 시신을 찾아보려 서울의 서쪽 지역을 헤매 돌아다니던 누님이 어느 날인가는 갑자기 사람이 아예 달라진 것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다 그런 저런 물정을 모르고 어정어정 뒤를 따라나선 네 매형의 운명 아니었겠니. 이 쪽이나 저 쪽이나 죽음밖에 기다리는 게 없는 터에 그대로 그냥 집에나 주저앉아 기다렸

대도 어차피 같은 일을 당하고 말 운명이었겠고…… 그러니 이제부턴 목숨이 붙어 남은 사람들이라고 어떻게 고비를 살아 넘어갈 궁리를 짜 보는 게 좋겠구나.

그러고 나서부터 아이의 누님은 그 남편의 종적이나 시신을 찾는 일을 중단한 채 그 무렵

부쩍 더 설쳐대기 시작한 완장패들의 독려에 따라 이곳저곳 전시사업 동원장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그 남편의 전향이나 연맹에의 합류가 전혀 불가피한 구명놀음이요 강제연행이었던 것처럼 줄기찬 소원(所願)을 되풀이하며, 그 억울한 남편의 희생에 대한 앙갚음으로 더욱더 열성적인 노력봉사를 결의하고 나선 한 갸륵한 여전사처럼.

그런데 그 기구한 한 생명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말이 다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아이의 자형의 운명은 거기서도 한 번 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한 것이다.

겨우겨우 7, 8월 두 달이 지나고 9월도 하순 고비를 넘어설 무렵의 어느 날, 이번에는 반대로 서대문 쪽에서부터 며칠 포성이 들려 오고, 수복군에 쫓긴 침공군이 지리멸렬 미아리 쪽으로 다 퇴각을 서두르고 있다는 그 날 이른 새벽녘. 아이의 누님은 야간노역 동원을 나가고 아이 혼자 떨고 있던 그 혜화동 집 창문을 조심스러우면서도 조급하게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전란이 시작되고부터 그의 집을 찾아온 ㅂ연맹 전력의 세번째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아이의 자형을 찾거나 끌어가려 온 사람이 아니라, 자신도 쫓기면서 그 자형의 소식을 전하러 온 같은 처지의 청년이었다.

난 너의 매형과 같이 있다 온 사람이다. 너의 매형은 입때까지 계속 나하고 같이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살아서 말이다.

아이가 엉겁결에 대문을 따 주자 불안과 공포에 쫓긴 얼굴로 급히 문간을 들어선 청년이

집안에 아이밖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는 급한 대로 그에게 자신의 신분과 자형의 소

식을 알려 온 소리였다. 하고 나서 청년은 구원이라도 청하듯 아이의 자형과 함께 자신이 겪고 처해 온 그 위급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두서없이 늘어놨다.

하지만 너의 매형 일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까지는 물론 나도 마찬가지 사정이었지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먼저 도망을 쳐 나온 거다. 너의 매형과 나는 그간 북쪽편 사람들에게 붙잡혀 서울 변두리 여기저기서 함께 강제노역을 해 왔는데, 요즘 들어 전세가 이 꼴이 되고 보니까 이젠 또 북쪽으로 죽음길을 끌려가거나 여차하면 아예 여기서 학살을 당하게 될 판이었으니까…… 우선 그저 그걸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게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들도나도 못한 채 두서없이 늘어놓은 그 설명의 요지인즉, 아이의 자형은 그간 어떤 곡절을 거쳐선지 용케 아직 그 서울 안에 북쪽 사람들이 죄수꼴로 목숨을 부지해 오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전세가 다시 뒤바뀌게 된 이즘에는 그로 하여 다시 또 죽음의 행길과 학살의 위험에 처하게 됐노라는 것이었다.

그래 너의 매형과 나는 미리 약속을 하고 서로 연락처를 나눠갖고 있었지. 언제 어디서든 기회를 잡는 사람이 먼저 놈들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면 뒤엣 사람의 집에다 반드시 그 소식을 전해 주기로 말이다. 그래 내가 먼저 이렇게 기회를 붙잡아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을 쳐 나온 거다. 놈들의 눈을 피해 수용소를 빠져 나올 때는 물론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아슬아슬한 고비를 몇 차례나 만났다.

청년은 일단 거기까지 말을 하고 나서 그의 탈출 경위가 새삼 전율스러운 듯, 그리고 집안에 정말 다른 사람이 없는지 진위가 미심스러운 듯 대문 밖 골목과 안쪽의 기척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아이로서도 이젠 대충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 난경에 처한 자형을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청년은 다만 그 자형의 생존 사실과 위급한 처지를 알려 주었을 뿐 아이가 할 일에 대해선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는 뭔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사람처럼 머뭇머뭇하면서도 아이가 그 자형을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해선 그 쪽에서 오히려 부질없어 할뿐이었다.

너의 매형이 지금 어디 있는지 그런 건 네가 알 필요 없다. 이젠 알아도 소용이 없을 일인지 모르구. 우린 잠시도 한곳에 머물러 있은 적이 없었으니까. 하긴 아직 움직이고 있기라도 한다면 네 매형한텐 더없이 다행한 일이겠지만.

웬지 한 번 그래봐야 할 듯싶어 꺼내 본 아이의 물음에, 웬 짜증이 섞인 청년의 대꾸였다.

그야 더 자세한 정황을 알았대도 아이로선 별로 그 자형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지만, 청년도 아이에게 그런 걸 주문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아이로선 다만 자형도 그 청년의 뒤를 이어 운 좋게 탈출에 성공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다른 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청년 역시 아이에겐 그런 희망을 전해주는 것으로 그가 할 일을 다한 셈이었다.

이젠 청년이 제 갈 길을 서둘러야 할 차례였다. 아이는 이제 초조하게 그것을 기다렸다. 바로 그 때문에 더욱 가슴이 조여들어 청년의 속마음을 미처 다 알아차릴 여유가 없었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아이네는 반동자 가족으로 끊임없는 감시의 눈길을 받아 온 처지에, 문 밖에선 밤새 쫓고 쫓기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일 새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까지 허다한 판국이었다. 그 통에 도망꾼 청년을 집안에 들여놓은 건 바로 제 죽음을 불러들여 놓고 있는 것과 한가지였다. 게다가 이제는 아침날까지 부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남의 눈에 띄기 전에 청년이 얼른 집을 나가 줘야 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아직도 뭔가 할 말이 남아 있는 낌새였다.

그러니까 그 때…… 6월 하순께 연맹을 찾아가서 말야…….

아이의 조급스런 속마음은 아랑곳없이 청년은 새삼 다른 집 안 사람의 기척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그 불안스럽고 초조한 눈길을 줄곧 안쪽으로 향한 채 중언부언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다.

우리는 금방 서울 후퇴가 불가피해져서 마포 쪽 한강가로 집결지를 이동해 갔지. 확실한 건 모르지만, 처음엔 우리를 강 건너 남쪽으로 소개시킬 계획이랬어. 우린 물론 모두 그렇게 믿었고 말야. 알겠어? 그런데 그 때나중에 안 일이지만, 미아리와 동대문 쪽에서 뒤에 남아 숨어 있던 ㅂ연맹 녀석들이 북쪽 군대의 진입을 맞으러 함부로 준동을 하고 나섰던 모양이야. 우리는 그런 저런 사정을 모른 채 다시 5~6명씩 소단위로 조를 나눠 임시 대기소로 분산수용을 당해 갔어. 더러는 형무소나 관공서 건물 같은 데로, 더러는 교회나 학교 교실 같은 데로……알겠어?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앞서 끌려와 있던 다른 수용자들 사이에 섞여 우리도 같은 죄수 취급을 당하기 시작했던거야. 그게 다 미리부터 계획된 일이었는지, 어떤 착오로 그리 됐는진 모르지만, 그런 저런 과정에서 ㅂ연맹 사람들이 상당수 희생을 보았다는 소문도 있었고 말야. 알겠어?

아이에게 무엇인가 오금을 박아오듯 자꾸만 "알겠어"를 되풀이해 가며 청년은 거기서도 아직 한참 더 장황한 이야기로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내가 너의 매형을 만난 건 그러니까 그 때 우리가 한 조로 나누어져 어떤 예배당 지하실로 함께 수용되어 가게 되면서부터였지. 그리고 우린 그 때부터 줄곧 행동을 같이 해 오게 됐는데, 그 때 우리가 함께 수용됐던 예배당 지하실에서도 우리 연맹 사람 두엇이 멋모르고

냉큼 호명에 응해 나갔다가 뒷소식이 영 사라지고 만 일이 있었어. 알겠어? 말하자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차례나 기다리고 있는 신세였는데, 그러던 중 어디선가 천지가 진동하는 큰 폭음이 들리고부터는 더 이상 우리를 불러 데려가는 사람이 없어졌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폭을 때 한강 다리가 끊어져 저마다 제 살길들이 다급해진 때문이었어 알겠어? 한데도 우리는 그런 사정을 모르고…… 하긴 그걸 알았대도 이젠 어디 마땅히 몸을 피해갈 곳이 없었겠지만마냥 두려움에 떨고 앉아 있기만 하다가 북쪽 사람들이 서울을 거의 점령한 뒤에 그 사람들 손으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됐던 거야. 알겠어, 알겠어?

어정쩡한 자세로 침묵만 지키고 있는 아이의 태도에 청년은 이제 더욱 마음이 조급하고 답답한 듯 예의 그 콧소리 섞인 "알겠어"를 두 번씩이나 거푸 되풀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자형을 위해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는 두 사람의 지난 일 따위가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다. 한데도 청년이 이젠 자신의 위험한 처지를 아예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갈수록 오금이 저려 왔다.

갈 길을 잊어버린 듯한 그 장황한 이야기와 요령부득의 다짐질에 아이는 불쑥불쑥 짜증기마저 일었다. 그렇다고 청년의 말을 중단시키거나, 이젠 집을 나가달라고 등을 떼밀어 댈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하였다. 그가 자신의 위험과 절급한 처지를 깨닫고 스스로 집을 나가 주기를 기다려야 하였다. 아이는 계속 초조한 침묵 속에 혼자서 조바심만 치고 있었다. 하니까 청년도 드디어 아이의 그런 기미를 알아차린 듯 목소리에 차츰 기운이 빠져가는 눈치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배신적인 전향의 전력에다 연맹의 소집에 응해나간 남다른 전과가 드

러나, 저들에게도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반인민적 반동신세 아니었겠어…… 다행히 아직은

쓸모가 남아 있어 교화니 노력 비판이니 하는 명목의 노역장으로 보내져 아직까진 이렇게 목숨을 부지해 오게 됐지만 말야. 한데 이젠 다시 전세가 뒤바뀌니까 우린 또 새로운 죽음의 올가미에 엮이게 됐던 거야…… 알겠어?

청년은 이번에도 그 "알겠어"를 되풀이했지만, 그것은 이미 아이에게 무엇을 다그치고 잇

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아이의 반응을 단념한 듯 그를 쫓던 눈길마저 슬그머니 외면을 해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집 안 기척을 확인하듯 그 힘없는 눈길을 천천히 휘둘러 대고 나서는, 자기 물음에 자신이 자답을 하고 있었다.

그래, 알겠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 기억했다가 너의 누님께 잘 말씀드려라. 그럼 이제 난 너만 믿고 가겠다. 잘 있거라. 정말 잘 있어야 해. . 알았어?

도리어 작별의 인사를 건네 온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에겐 역시 그 뜻이 석연치 않은 몇

마디 다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바야흐로 막 인적이 잦아지기 시작한 새벽 여명 속으로 황급히 몸을 던져나갔다.

 

2

 

아이가 성장하여 교직생활을 시작할 무렵에 그의 아내가 된 손 여사는 결혼 당시부터 남편에게 이따금 그 때의 일을 이야기 듣곤 하였다. 더욱이 남편은 그 어렸을 적 전란시의 어려움을 회상할 때면 반드시 그 이야기로 결론을 맺곤 하였다.

자형은 그러니까 양쪽에서 서로 잡아죽이려고 쫓아다녔던 셈이지. 그런 기막힌 상황이 거꾸로 자형을 잠시나마 더 살아 있게 한 거구. 처음엔 연맹 쪽에서 먼저 덮쳐가 준 것이 나중 사람들의 치명타를 비켜서게 해준 격이 됐고, 뒤참에 다시 죽음의 함정에 갇히게 됐을 때는 다른 쪽이 때 맞춰 뒤를 쫓아와 위기를 넘겨 준 꼴이었으니. 한 마리의 토끼를 두 마리 독수리가 함께 노리고 든 바람에 그 다툼의 혼란 덕에 일단을 목숨을 건지게 됐다 할까…….

하지만 남편은 대개 그 두 사람의 생존은 처음부터 단념을 하고 있었다. 새벽길로 다시 위험하고 지향없는 도피행을 나선 젊은이는 말할 것도 없었고, 북행과 학살의 절망적인 갈림길 속에 그 날 밤까진 아직 목숨이 부지되고 있었다는 자형에 대해서도 뒷날까지의 생존은 거의 바라고 있질 않았다.

나중 추측이었지만, 이 서울에선 달리 몸을 피해갈 막힌 곳이 없이 그 살기 가득한 새벽거리로 나간 청년이나, 죽음의 사슬에 매여 끌려다닌 자형이나 어느 쪽도 무사히 살아 남았기는 힘들어. 그 후론 어느 쪽도 더 소식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때 사정이 다 그랬어요. 자형도 뒤따라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음을 당했거나 저들의 손아귀에 그대로 잡혀 앉아 있다가 학살을 당했거나 했을 게야. 어떻게 용케 현장학살을 면하고 북행길을 나섰대도 폭격이나 굶주림으로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테구. 두 사람 중 한쪽이라도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면 수복 후나 국군북진 때 무슨 종적이 나타났을 거 아냐. 헌데 그 후론 전혀 아무 소식도 없었어요.

나중에 누님은 유골이라도 찾게 될까 온 장안을 뒤지고 다닌 끝에, 자형의 시신이 나타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다행으로 여기며 행여 무슨 소식이 전해 올까 하염없는 세월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러면서 그는 한동안 그 끔찍스런 회상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자신만은 그 아수라 속에 큰 변 당하지 않고 새 세상을 살게 된 것을 은근히 다행스러워하기까지 하였다.

계급 좋아하고 이념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때 일을 말할 때 흔히 이 쪽이 어떻고 저 쪽

이 어떻고 편을 갈라 세우길 좋아하지. 하지만 자형이나 그 청년에겐 그런 게 있을 수가 없었어요. 이 쪽이나 저쪽이나 죽음 길뿐이었거든. 편을 말하려면 무슨 선택이 가능해얄텐데. 그 사람들 앞에선 그런 게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죽음에서 도망을 칠 길은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지 않았지만, 적어도 총을 들고 맞선 전쟁이라면 어느 편이든 제 죽음의 자리라도 정해 죽을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데, 그런 게 아니었어요. 사방이 죽음의 함정뿐인 속에서 눈을 감고 마냥 허둥대기만 한 꼴이었달까.

그래 나같이 그 참극의 마당을 멋모르고 무사히 스쳐 지내온 사람들은 우정 더 몸서리를 쳐 대면서 제 고마운 행운을 두고두고 더 소중스러워하게 되는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리 엉겁결에(본인은 아직 그렇게 말한 일이 없었지만, 혹은 제법 영악하게) 별다른 큰 변고 없이 그 시절을 겪어 넘긴 자신의 행운에 대해 남편은 차츰 그 감회가 달라져 가고 있었다. 신혼시절도 채 끝나기 전인 30대 중반 무렵 남편의 주위에서 이상하게 요절을 해가는 친구들이 자주 생기면서부터였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남편은 자기 일처럼 맥을 놓고 비감어린 탄식을 내뱉곤 했다.

그 전쟁은 죽은 자들만의 삶을 빼앗아간 게 아니었어. 제대로 철이 들 나이는 못 되었지만, 나모양 그 땐 운좋게 명을 부지해 나온 사람들도 영혼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있었던 거예요. 이를테면 그 인생에 회복 불능의 큰 얼이 가고 만 거지. 전란을 겪고 난 우리 연배들 중에서 요즘 들어 시들시들 요절이 잦은 것은 그 보이지 않는 영혼의 얼을 이겨 낼 수가 없었던 탓인 게요. 삶의 신명기나 기를 잃어버렸다고 할까, 난 까닭없이 이따금 그런 막막한 절망감 같은 것이 느껴질 때가 많아요.

4.19 의거가 일어나고, 학생들이 판문점으로 "북쪽 학생들과 얼싸안고 통곡이라도 하러 가자"고 외치고 나섰을 무렵엔, 집으로 찾아온 옛 제자들을 앉혀 놓고 전날의 그답지 않게 이편저편을 갈라 세우며 학생들의 생각에 지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자네들이 저 쪽 체제나 그 체제의 속성을 겪어 보지 못해서 그래. 저 쪽 사람들의 생각은 민족의 화해나 힘의 통일이 아니라, 오직 남한의 적화투쟁과 정복통일 뿐이야. 6.25의 경험이 그걸 잘 증명해 주었지 않아. 민족의 화해나 통일을 말하려면 6.25를 일으킨 저들 북쪽

이 먼저 그 죄과를 사죄하고 진심에서 그것을 원해 올 때라야 가능해. 이런 식으로 조급하게 이 쪽에서 먼저 그것을 외쳐 대고 나서는 건 저들의 교활한 전략전술을 도와주고 또 한 번의 재난을 자초하는 길밖에 안 된다는 얘기야. 이편도 저편도 선택이 불가능했다던 그 혼란기의 와중에서 그는 이제 분명히 한쪽으로 자리를 골라 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신도 그 치유불능의 피해자의 자리에서 가해자와는 영영 등을 돌리고 살아야할 요지부동의 신념을 쌓아 가고 있었다.

남편의 그런 피해의식과 투철한 대공 시각은 이후부터 빈번해진 대남간첩 침투사건으로 갈수록 민감한 반응을 일으켰고,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저 681월의 김신조 일당 내습사건으로 그 절정을 이뤄 가고 있었다.

그 호전배들. 그새 그 잔학스런 본성이 어디로 갔을라구. 이젠 어느 정도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어 힘이 자란 징조지. 앞으로 야차처럼 계속 엉겨 들어올 텐데 골칫거리겠구먼.

1.21에 이어 그의 예견대로 무장부대의 남파가 빈번했던 그 해 겨울의 그 울진삼척지역 공비침투 사건까지를 당해서는 차라리 할 말 잃은 채 그저 입술만 푸들푸들 떨어 댔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월은 그를 언제까지나 그 피해자로서의 당당한 반격성 권리만을 누리게 해두질 않았다. 혹은 그는 어쩌면 이전부터도 자신 속의 다른 무엇으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 부러 그 피해의식을 더 과장해 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70년대 들어서 몇 차례 적십자회담 끝에 그 남북 사람들간에 마음의 길을 트고 살자는 7.4 공동성명이 나오고 부터였다.

그는 이 때부터 서서히 다시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 공동성명 자체에 대해선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유다르게 이렇다 할 감흥이 없어 보이던 그였다.

뜻이야 더할 바 없이 좋지. 언젠가는 결국 그런 식의 시도나마 꾀해봐야 할 과젤 테구. 하지만 성명서 한 장으로 문제가 해결되기엔 그간의 골이 너무 깊어. 공연히 흥분하고 서둘러 나설 일이 아니에요. 긴가 민가 싶어하는 구석이 없이 보이진 않았지만, 대체로 그는 과분하고 신중한 반응 속에 주변의 들뜬 기대를 나무라거나 어이없어한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때부터 그의 태도엔 전날과는 어딘지 다른 변화가 나타났다. 공동성명이 나오고 나서 한동안은 적십자회담이니 조절위원회회의니 남북에 제법 사람이 자주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어느 날, 남편은 전에 없이 손 여사에게 지나가는 소리처럼 좀 엉뚱한 소리를 해왔다.자형이 혹시 아직 이북 땅에 살아 계실 수도 있을까. 그러기는 어렵겠지만, 그 때 혹시 운 좋게 이북 땅까지 무사히 살아 끌려가기만 했다면 말요.

그 무렵 이산(離散)의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으레 한번쯤 지녀봄직한 소망이었다. 조금도 가망이 없는 일로만 여겨 오던 그 남편의 때늦은 희망을 손 여사도 처음엔 그쯤 대수롭잖게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남편은 그게 아니었다. 남편의 마음속에선 언제부턴가 그 죽은 자형이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요즘 TV에 나타나는 북쪽 사람들 가운데에 남쪽에서 얼굴을 알아보고 친척이나 연고자가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다잖소. 자기들끼린 은밀히 상대 쪽에 남겨둔 인척의 소식을 서로 수소문해 주는 일도 있는 모양이고.

북쪽으로 끌려가기 전에 미리 탈출을 해 나온 젊은이는 이 쪽에고 저 쪽에고 이미 그럴 가망이 없지만, 그의 자형의 경우엔 만에 하나 북쪽에 살아남아 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남편은 그럴 경우를 혼자서 많이 상상해 온 듯 지레 엉뚱한 조바심에 싸여들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만약에 그 자형이 살아 나타나거나 누구를 몰래 보내어 돌아가신 누님이나 우리 소식을 물어 오면 어떡하지?

그리고 그는 그런 식으로 북쪽 사람들이 회의차 남쪽으로 오기만 하면 TV세트 앞에 시종 붙어 앉아 불안스레 혼자 조바심을 쳐 대곤 하였다. 하지만 그가 자형이 나타나거나 사람을 보내어 이 쪽 소식을 물어 올 경우를 가상하여 부심한 대응사는 그의 말마따나 그 전란의 충격으로 역시 40을 넘기지 못하고 요서(夭逝)해 간 그의 누님의 불행한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그 청년은 내게 숨을 곳을 찾아왔던 게야.

어느 날 남편은 다시 참회자처럼 참담하고 허심탄회한 어조 속에 스스로 괴로운 심증을 털어놨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온 누님의 탄식과 호된 꾸중 앞에 나는 곧 그걸 깨달았어.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난 누님이 오기 전부터도 이미 그걸 알고 있었어요. 그가 자형의 소식을 전하고 나서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뒷소리를 이어대면서 "알겠어?…… 알겠어"하고

나를 채근 해온 것은…… 쫓기는 사람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달까……

뭔가 아직 할말이 남아 있는 듯하면서도 겁에 질린 아이 앞에 차마 터놓고 말을 못하고 돌아섰던 그 청년의 마지막 다짐은 내게 그 마음으로 숨을 곳을 호소한 소리였어요. 네 자형과 서로 상대방의 집을 찾아가 소식을 전해 주고 도움을 받기로, 두 사람 사이에 사전 약속이 있었던 터에 나는 지금 이 서울엔 갈 곳이 없는 사람이다

그 청년의 눈길과 미적거리는 태도에서 나는 당시에도 이미 그것을 충분히 읽고 있었던

거란 말이오. 한데도 나는 그 때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그걸 끝끝내 모른 척한 거예요. 그를 숨겨 줘야 한다는 마음속 소리에조차 짐짓 귀를 틀어막은 채…… 그리고 그를 그 죽음의

새벽 거리로 내몰고 만 거예요.

그러니까 그가 그 무렵 자형의 일로 하여 고심을 한 것은 정작에 그 자형이나 누님의 때이른 죽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그 날 새벽 그가 비정하게 다시 등을 떼밀어 내보낸 그 이름 모를 젊은이의 일로 해서였다. 다름 아니라, 그는 마침내 그 무고한 수난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가해자의 괴로운 자리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완전범죄를 확신해 온 범인이 뜻밖에 결정적인 목격자의 출현을 맞게 된 것처럼 두려움과 회오 속에 자형의 소식을 불안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공연히 깜짝깜짝 놀라고, 밤늦게 때없이 대문 두드리는 소리라도 들려 올 때면 자기도 모르게 금방 얼굴 색이 변하며 긴장을 하곤 했다. 더욱이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는 그가 미리 예상했던 대로 이북쪽 함정의 서해영해 침범에다 땅굴발견 사건 등등 남북간의 대림과 갈등이 오히려 더 격화되어 갔고, 그에 따라 북쪽의 간첩남파 사건도 유례없이 더욱 빈도가 자심해지고 있었다.

겉으론 애써 내색을 않으려 했지만, 그런 보도들이 나올 때마다 남편은 좀처럼 TV세트 앞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의 신경은 온통 늘 대문 앞 골목 쪽으로 쏠려 있곤 하였다.

그 대문간 밖에 남편은 언제부턴가 다시 그 옛날의 어린 중학생 아이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손 여사는 이제 그 남편의 표정에서 그걸 읽고 있었다. 그 불안하고 초조한 아이의 기다림그가 기다리는 것은 그 자형의 출현일 수도 있었고 그의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심지어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갔을 젊은이나 그의 사후 소식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는 또 그것을 기다리기보다 그런 일이 없기를 거꾸로 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남편의 초조롭고 착잡한 표정 속에 손 여사는 때때로 그런 느낌이 들기까지 하였다. 어느 한때 세상이 조용한 시절이 있었다고, 이만한 사단쯤으로 저이가 이제 새삼 저리 되어 가고 있을꼬……

하지만 알고 보니, 남편이 그 어린아이로 대문 앞을 불안하게 서성댄 것은 실상 그 무렵부터 새로 갑자기 시작된 일도 아니었다. 성장을 멈춘 채 마냥 문 밖에 떨고 서 있는 그 아이

를 위해 손 여사는 그 무렵부터 남편에게 집을 한번 옮겨 보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친 일이

있었다.

요즈음 이 쪽 집 값이 많이 올랐나봐요. 모두들 새 건물을 올린 지가 오랜데 우리만 너무 그 동안 집이 헐어 왔어요. 그렇다고 우리 형편에 새성주를 할 처지도 못 되고, 이 참에 이 땅 팔아서 변두리 쪽으로 좀 넓게 옮겨가면 어때요?

그런데 그에 대한 남편의 대답 속에 들을 수 없었던 사연이 불쑥 흘러나왔다.

그간 손해보고 눌러 앉아 온 것이 그걸 몰라서 그런 줄 알아요. 이 집은 내 손으로 팔 수 없는 집이에요. 누님이 돌아가실 때 이 집을 내게 넘겨주시면서 당부한 일이 있었어요. 너 매형의 소식은 이 집으로밖에 올 데가 없으니, 매형 소식을 알 때까지는 이 집을 그냥 지키거라……

다시 말하자면 아이가 그 문 밖을 서성대기 시작한 것은 남북공동성명따위로부터의 일이

아니라, 그 누님이 세상을 뜨고부터, 아니 그보다 그 젊은이가 그의 자형의 소식을 전하고부터, 그리고 그 청년이 죽음의 벌판으로 위험한 새벽길을 떠나간 그 때부터였음이 분명했다. 무서운 전란을 겪고 난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남편도 외견상 억눌리고 상처 입는 수난자의 입장을 내세워 왔을 뿐, 그 실은 어릴 적부터 그 자형과 젊은이에 대한 은밀스런 죄책감 속에 거기 줄곧 그렇게 불안감에 쫓기며 조그마한 아이로 서 있어 온 것이었다. 그것이 남북간 공동성명을 계기로 너무나 급격히 무너져 내리면서 끝내는 그 당당한 피해자의 자리와 반격성의 권리를 잃게 된 것뿐이었다.

한마디로, 손 여사는 이제 남편이 그 전란의 총격으로 하여 주위 동년배들의 요사가 많다고 한 수난자로서의 탄식이나 그 즈음 들어 갑자기 괴로운 가해자로서의 죄책감과 두려움을

외면할 수 없게 된 속마음을 어렵풋이나마 두루 다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정이 그렇고 보니 그 만편 속의 아이는 이후로도 그 혜화동의 낡은 한옥 앞 골목께를 여전히 떠나갈 수가 없었다. 손 여사의 어떤 회유나 애소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언제까지나 거기 그 자리에 그냥 불안스런 서성거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은 저 80년대 초반의 남북간 총리회담 교섭과 이후 여러 경로의 당국자간 접촉과정들, 그리고 무엇보다 KBS의 이산가족찾기 사업의 열기를 함께 지켜보아 오면서도 전혀 어떤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변화의 기미는커녕 그도 금명간에 그 자형이나 그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될 것처럼, 이제는 그게 이미 눈 앞의 기정사실로 불가피해진 일이듯 자신의 처지를 달래고 부추겨 대기까지 하였다.

쓸 만한 친구들이 앞서 가는 마당에 하필 쭉정이 같은 내가 아직 이날까지 이런 삶을 부지해 오게 된 숨은 섭리가 무어게…… 난 자형의 소식을 들을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했던 거예요, 게다가 이젠 어쩌면 그것이 불가능한 노릇이 아닌 것 같거든.

그러나 그 같은 남편의 거듭된 다짐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려자인 손 여사의 느낌 속엔 아무래도 남편 속의 아이가 제 자형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형상만은 아니었다. 아이는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감 속에 등을 돌려 제 종적을 감추고 싶은 충동에 끝없이 시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이제나마 지난날의 부끄러운 허물과 맞서나서 그 날의 아픈 빚과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신과의 힘든 싸움(동년배의 죽음을 빌려 자신의 죽음을 꿈꾼 것도 실상은 그런 자기 가책의 표현이 아니었을지)에 파리하게 지쳐가는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남편의 초조하고 불안스런 자기 견딤 속의 기다림은 이후로도 그냥 몇 년이나 더 계속되어 나가고 있었다.

 

3

 

그러던 어느 해, 그러니까 그 해 봄 갓 대학을 들어간 그 김사일(金仕日) 씨의 외동딸아이

수진(秀眞)이 입학 첫학기부터 운동권 일에 뛰어들었다가 종당엔 학교도 제대로 못 나가고 집에만 숨어 박혀 지낼 때였으니, 바로 87년 초여름 무렵이었다.

사일 씨는 물론 이 때까지도 그 자형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채 괴로운 기다림만 계속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사일 씨에게 이 무렵 또 한 가지 딸아이와의 심한 갈등과 불화가 겹쳐들고 있었다. 그 딸아이의 운동권 활동에 대한 시비와 거기에서 파생된 민족의 화합과 나라의

통일문제에 대한 부녀간의 의견 차이가 그 불화의 사단이었다. 한마디로 딸아이는 조건 없이 통일부터 이뤄 놓고 봐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인 데 반해, 아버지인 사일 씨는 좌우(左右)나 남북 사람들간에 서로 이해와 믿음이 앞서야 한다는 점진적 통일의 전제와 절차를 고집했다.

그 대립이 얼마나 심했던지 언제부턴가는 두 부녀간에 일상의 대화마저 끊어진 채 서로 소 닭 보듯 상대방을 무시하고 지내게끔까지 되었다.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불신감 속에 식탁에서까지 서로 얼굴을 마주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다.

손 여사로선 두 사람의 소상한 속생각까지는 다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런 부녀간

의 어색한 불화와 백안시를 더 두고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이번에도 혼자서 늦은 저녁을 끝내는 길로 먼저 거실에 나앉아 있는 제 아버지를 피해 얼핏 방으로 비켜 들어가려는 딸아이를 곁으로 함께 불러 앉혔다. 리고 다짜고짜 먼저 그 딸 아이년을 상대로 두 사람간의 갈등과 불화의 뿌리를 캐고 들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 나도 좀 속사정을 알자꾸나.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갈라진 백성

과 나라를 다시 합해 보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부녀간에서까지 서로 이렇게 속 주장을 따로따로 등을 돌리고 지내는 게 답답하고 우습구나. 듣자하니 아버지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덴 한 마음이신 모양이던데, 너하고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서 그러냐. 일테면 졸지에 삼자대면식 말가름판이 벌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쯤으로 딸아이가 금세 입을 열어 올 리는 만무였다. 손 여사의 추궁이 너무 갑작스러웠던데다, 못 들은 척 신문만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제 적수격인 아버지를 바로 곁에 한자리였다. 딸아인 처음 그런 이야기라면 아버지한테나 알아보라는 듯 그 쪽으로 시큰둥한 눈길을 보내고는 냉큼 자리를 다시 일어서려 하였다. 그 딸아이를 손 여사가 다시 완강하게 팔소매를 붙들어 앉혔다. 그리고 그 손 여사의 반 강압적인 다그침 앞에 딸아이도 결국엔 마지못해 하는 목소리로, 그리고 여전히 시큰둥한 어조로 간단히 대꾸했다.

뭐 별거 아니에요. 통일이나 화합을 위해서 저는 서로가 부당한 피해를 본 수난자의 처지로 만나야 한다는 데 반해 아버지께선 거꾸로 가해자의 마음가짐이나 자세로 임해야 한다

는 차이뿐이에요.

그런데 그게 어찌 그리 중요한 일이냐. 그 피해자와 가해자의 자세가 민족의 화합이나 통일의 길에 어떻게 다른 차이가 지길래 부녀간에서까지 서로 삐걱삐걱 틈이 벌어지느냐 말이다. '가해자''수난자'라는 소리에 손 여사는 얼핏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이 있었지만, 실마리가 나선 김에 그 이견의 핵심을 겨냥하여 딸아이를 계속 추궁해 들어갔다. 딸아이도 제가 어차피 내친 김이라는 듯 어른들에 대한 제 주장의 내 용이 훨씬 당돌스러워지고 있었다.

제가 서로 수난자의 자리에서 상대방을 만나야 한다는 건 그것으로 서로 상대방과 같은

민족으로서의 일체감을 형성해 나가기가 쉽다고 본 때문이에요. 좌우익이나 남북으로 갈라져 분단상황을 살아 온 우리의 역사적 사실이 실제로 그랬구요. 제국주의 외세로 인한 우리 민족과 국토의 분단, 자본주의 지배이데올로기 아래서의 인민에 대한 일방적인 억압과 수탈상, 반민중적 독재권력으로부터의 기본 생존권과 인간성 말살 현상…… 우리 모두가 그런 모순상황을 타파해 나가는 데는 우리 민중 전체가 공유한 그 동질성의 수난자 의식으로 한데 뭉쳐 나아가는 것이 불가피할뿐 아니라, 그것이 결정적으로 유리한 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아버지가 굳이 이상한 가해자의 자세 같은 걸 앞세우고 나서시는 이유가 저에겐 아무래도 아직 알쏭달쏭이란 말이에요……. 어쩌면 또 모르지요 아버진 지나간 역사 속에서까지 그 데데한 가해자의 자리를 승자의 그것으로 착각하고 계시는지두요.

그새 여러 차례 아버지와 맞서 왔음이 분명한 그 딸아이의 일사천리식 주장은 손 여사가 새삼 놀랄 만큼 논리가 정연하고 당당했다. 하지만 이제 손 여사는 거기서 더 이상 딸아이를 채근하고들 필요가 없었다.

별거 아니라, 모르겠는데? 게다가 이 애비가 착각을 하고 있다? 너 계집아이가 섬머슴아이들처럼 얼렁뚱땅 비약으로 뭉쳐 넘기려 들지 마라.

그 때까지 계속 신문만 보는 척하고 있던 사일 씨가 마침내 그 딸아이의 비아냥투를 못 참고 불시에 이야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네가 정 그걸 모르겠다면 내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해 주마……. 네 어머니 말대로 나 역시 누구 못지 않게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소망하고 있다는 건 너도 잘 아는 일일 게다. 하지만 나는 그 통일이 아무리 이 나라 이 민족의 지상 과제라도 어느 한쪽에 상처를 입히거나 희생을 강요하는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아내와 딸아이 앞에 모양새가 좀 안 좋아 보였던지, 사일 씨는 벌떡 보던 신문까지 내던지고 덤벼들던 처음 기세와는 달리, 이내 스스로 흥분기를 가라앉히며 목소리를 침착하게 낮춰 가고 있었다.

너는 그 수난 의식의 공유화로 나라의 통일을 앞당길 수가 있다지만, 설령 그것이 그리

될 수 있는 일이더라도 가해자 없는 피해자가 있을 수 없는 터에 거기엔 필연코 재물로서의 가해자가 필요해지게 마련인 게다. 화해와 통합을 위한 일에 또 다른 가해자가 필요하게 되고, 한쪽이 다른 쪽에 원한과 복수의 새 빚구실을 쌓아 가는 가해자와 수난자 관계의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길이랄 수는 없을 게다. 내가 너의 그 일방적인 피해나 수난 의식의 합의론을 경계하는 것은 그것이 그 가해의 장본을 외세니 이데올로기니 될수록 바깥이나 먼 데서만 찾아 헤매고 있는 건지 모르지만, 그 숱한 실제의 대립이나 다툼은 현실의 우리 삶 가운데서 빚어지고 있고, 게다가 중요한 것은 또 우리들 개개인의 현실적인 삶인 거다. 전에도 몇 번씩 되풀이한 말이지만, 그야 어찌보면 우리들 모두가 가해자이면서도 동시에 피해자일 수도 있을 게다. 그리고 그런 뜻에서 우리는 너나 없이 모두 네가 말한 수난자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 일엔 수난자로서보다도 가해자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이유가 그거다.

딸아이를 차근차근 달래고 있는 듯한 사일 씨의 어조는 어찌 들으면 그 딸아이보다 아내인 손 여사를 향한 간곡한 해명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사일 씨는 과연 거기서 두 사람의 반응을 알고 싶은 듯 뒷말에 잠시 뜸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손 여사는 이번에도 그 남편의 말뜻이 아직 확연하지 못했다. 아이 앞에선 별로 내색을 보인 일이 없어 딸아이로선 이해가 어려울지 몰라도, 자형의 일로 오랫동안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온 남편으로선 그 분단의 문제에 누구보다 생각이 깊고 반응이 민감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건 진작부터 이해를 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통일이란 걸 실현해 나가는 데에 굳이 가해자와 수난자의 처지를 따로 나누고 나선 데까지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남편이 굳이 가해자 쪽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 가해자의 자세로서만이 또 다른 새로운 수난자를 낳는 악순환을 빚게 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는, 그 속뜻을 확연히 다 짚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손 여사는 그 역시 남편에게 다시 물을 필요가 없었다. 잠시동안 혼자서 말뜸을 들이고 난 사일 씨가 그걸 스스로 말하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내가 겪어 온 경험으로 말하더라도, 처음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한동안은 서로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고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꼴이었다. 그가 다시 자신의 말을 쉽게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동안 세월이 흐르다 보니, 처음에 피해자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간 피해자로서의 과도한 자위권과 반격권을 누림으로 하여 어느덧 새 가해자의 딱지를 얻게 되고, 이들 앞에 가해자로 억압을 받아 온 사람들은 그간의 수난과 자기 회복의 갈망 속에 목소리가 서서히 드높아가면서 새로운 수난자로서의 요구를 내세우고 나서는 형편이었다. 수난자 의식은 그런 식으로 일정한 시간대를 거치면서 항상 새 가해자로 변신해 가는 과정을 좇게 되고 그 수난자와 가해자의 자리를 번갈아 가면서 복수와 보상, 억압과 수난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되더란 말이다. 하지만 가해자 의식은 다른 가해자를 용납하려 하지도 않으려니와 더욱이 새로운 수난자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자기 속죄의식을 덕목으로 하고 있기 대문이다.

그래서 그 같은 가해자 의식으로 해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억압과 수난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너와 나 사이에 진정한 화해와 이해를 지향하고 만남의 문이 열리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다. 세월의 힘을 빌려 가해자와 수난자의 자리가 바뀌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래서 나는 너나 없이 늘 가해 당시의 자기 자리에 서서 그 때의 제 허물을 생각하고 그 빚을 갚으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6. 25 전란 당시의 좌익이나 우익, 남쪽이나 북쪽, 심지어는 억울하게 남과 북으로 헤어진 1천만 이산가족들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말이다……. 민족의 화합이나 통일 운동에는 당국자간의 합의서나 성명서, 거기다 너희 같은 젊은 학생들의 몰아붙임도 중요하겠지만, 거기에는 사람과 사람간에 그런 이해나 화해 속의 만남이 우선 가능해져야 하는 거구. 무엇보다 그래야 서로 이쪽저쪽간에 새로 또 상처를 입는 일도 덜할 것 아니냐…….

사일 씨는 그쯤해서 겨우 말을 다 끝냈다. 손 여사로서도 이제는 그 남편의 심중을 분명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남편도 바로 그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셈이었다. 두려움과 당황결에 자신도 모르게 그 피신처를 찾아온 청년을 쫓아보낸 오랜 자책감, 그 부끄럽고 참담스런 허물의 값을 끝내 가해자에서 치르고 싶어하는 질긴 속죄의식, 그 자형의 출현이나 소식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며 언제까지나 조그마한 아이로 불안하게 기다려 온 괴로운 자기 견딤

그의 그 치열한 가해자 의식이나 속죄의식, 그리고 사람과 사람간의 화해스런 만남을 우선 시키려는 그의 점진적 통일 과정의 주장들은 바로 그런 자신의 심중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만큼 손여사는 그 남편의 마음을 깊이 수긍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딸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전란의 혼란 중에 그저 애꿎은 죽음으로 시신도 못 찾은 그 형식상의 '6. 25실종자' 정도로 되어 있는 제 고모부의 일을 소상하게 들은 일이 없는데다, 그 아수라통을 직접 겪어 보지 못한 딸아이로선 그런 아버지의 깊은 심중이나 거기서 빚어나온 그 가해자 의식의 진의를 잘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결국 아버진 이 나라의 통일을 두려워하고 그 통일을 가로막을 구실을 찾고 계신 거예요.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그런 식으로 어느 하세월에 통일이 가능하겠어요. 사람들간의 화해부터 이루기 위해서라는 아버지의 그 가해자 의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얼마 동안이나마 그걸로 통일을 미뤄 보자는 구실에 불과한 것 아니에요?

사일 씨가 침묵 속에 반응을 기다리는 낌새를 보고 딸아이는 역시 간단히 결론지어 버렸다. 그 딸아이의 비아냥기 어린 단정에 사일 씨는 이제 더 말을 이어나갈 기력도 없어진 듯

갑자기 체념기가 배인 어조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 이젠 너 좋을 대로 생각하려무나. 하긴 남을 가해한 일이 없는 세대가 굳이 거짓

가해자 의식까지 억지로 지어 지닐 필요는 없을테니까. 그게 너희들 젊은 미체험 세대의 권리이자 늙은 체험 세대와의 차이일 테구.

그러나 딸아이는 이제 그런 아버지의 물러섬조차도 쉽게 용납하지 않을 기세였다.

젊은 세대, 어린 세대, 미체험 세대, 그런 식으로 간단히 몰아붙이려 들지 마세요. 아버진 그럼 체험세대로서 무엇을 어떻게 보고 겪으셨단 말씀이세요. 누구에게 어떤 몹쓸 노릇을 하셨다고 죄인처럼 그리 늘 가해자 타령만 되뇌고 계시냔 말씀이에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난리통을 무사히 겪어 나오고 지금까지 이런 무사한 세월을 누려 오셨다면 아버진 도대체 가해자는 고사하고 내세울 만한 피해자도 못 되시지 않아요.

가만 좀 있어 봐라……. 그건 되려 아버지가 너한테 묻고 싶어하실 소리 같구나. 사일 씨가 이젠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릴 낌새를 보이자 이번에는 결국 손 여사가 딸아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자신이 애초에 자리를 벌여 놓은 처지에 그녀로서도 이젠 그 모지락스런 딸아이 앞에 무언가 분명히 해둬야 할 일이 있는 듯싶어서였다.

어디, 너부터 한번 말을 해봐라. 너는 대체 어디서 무슨 피해를 보았더냐. 통일이 안 되어 손해보고 상처를 입은 게 무어길래 너는 그리 한사코 분단의 피해자 자리를 고집하고, 통일이라면 죽자사자 수난과 처지를 앞세워 기세등등 목소리를 높이고 드느냔 말이다.

그야 물론 아까 말씀드린 그 민족분단의 모순상황이 초래한 왜곡된 역사와 현실의 피해

들이지요. 하지만 지금 제가 드린 말씀은 아버지가 피해를 당하신 게 없다 는 뜻이 아니었어요. 제가 보기에 아버진 가해자 보다 피해자 쪽에 훨씬 가까운 분이셨으니까요. 그런데 그

피해자로서나 아버지가 내세우시는 가해자로서나 어른들은 도대체 그 왜곡과 모순상황의 극

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 오셨느냐는 뜻이었어요. 그저 늘 혼자서 가해자연하시는 비생산적이고 무기력한 지난날의 자난 날의 자책밖에……. 저나 우리 젊은 세대가 그 어른들에 앞장서 통일을 서두르고 나서는 이유도 바로 거기 있을 거예요. 제가 어떤 피해를 입었느냐고 물으시지만, 그 왜곡과 모순상황의 피해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세대뿐 아니라 저의 젊은 세대들의 삶까지 부당하게 억눌러 대고 있으니까요. 통일이야말로 이모든 왜곡과 모순상황, 오늘의 반역사. 반민족적 장애물들을 일거에 극복. 제거해나갈 수 있는 근본과제거든요……. 하지만 어머닌 그런 건 모르세요. 모르시면 그냥 가만히 계세요.

딸아이는 불쑥 질책기부터 돋우고 드는 손 여사쯤은 더 이상 상대도 않으려는 식이었다. 딸아이는 일방적으로 제 할 말만 늘어놓고 이내 제 아버지 쪽으로 다시 말길을 돌리려 하였다. 하지만 손 여사는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 다시 말을 이어받으려는 남편을 저지하며 다부지게 딸과 맞서 나섰다.

그래, 이 에미는 너처럼 깊은 데까지는 모르는 게 사실이다. 네 말대로 분단의 모순이나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 건질 알지도 못하고……. 하지만 그 대신 이것 한 가지만은 나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네가 말한 그 분단의 모순이나 역사의 왜곡이 빚어 낸 폐해라는 건 지금 네 아버지나 내겐 그리 절실한 것이 못 된다는 걸 말이다. 네 아버지 말씀마따나 우리의 삶은 현실 속의 과제다. 그리고 그 분단이나 통일문제 역시 우리에겐 그 현실 속의 삶의 문제여야 한다. 그런데 네가 말한 그 모순상황과 왜곡된 역사의 폐해라는 건 말이 너무 크고 고급스러워 그런지 아무래도 그런 것과는 거리가 떨어진 것 같단 말이다. 그 대신 네 아버지가 당신의 삶 속에서 실제로 짊어져 오신 그 괴로운 가해자 의식은 그리 명분이 크거나 이념적인 것은 못 되더라도 당신의 일생 동안 매우 구체적이고 일관된 지향성를 지녀 왔고, 당신의 삶을 거기에 실천적으로 순응시켜 오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그런 구체적인 지향성과 실천적 순응의 사례가 어떤 것이었게요? 그리고 그게

아버지나 우리 가족, 나이가 우리 민족공동체나 이사회에 어떤 창조적 역할이나 역동적 역사성을 더해나갈 수가 있는 것이었던가요?

거기 그렇게 요란스런 명분을 달아 큰 목소리로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의 고모부 일로 해서 이 날 이 때까지 이 집을 떠나지 못하고 계시다. 나는 그저 한 평범한 아낙으로 살고 싶어 그러는지 모르겠다만, 그 악몽이 깃든 이 집, 너도 알고 있고 그걸 원해 왔다시피 이걸 팔아 옮겼으면 물심 양면으로 몇십 배 편안한 안식처를 마련할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호시절을 눈 꼭 감고 외면한 채 지금까지 끝내 이 어려운 처지를 참아 오셨다. 그리고 이 날까지 네 아버지 속에선 그 때에서 한 치도 더 자라지 못한 어린 중학생 아이가 저 문 밖에서 초조하게 불안 속에 떨면서 네 실종된 고모부의 소식을 기다려 온 거다. 큰 눈길로 보면 그건 하찮은 개인사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한 개인이나 집안 일로 말하면 그보다 힘들고 통절한 삶도 없을 거다. 그리고 네가 말한 수난자 의식을 내세운다면 그보다 힘들고 통절한 삶도 없을 거다.

그리고 네가 말한 수난자 의식을 내세운다면 그보다 한갓되고 철저한 수난자……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런 피해자의 덕성도 그리는 쉽지가 않을 거다. 이 어미의 눈에는 네 아버지가 때론 그런 수난자의 모습으로 보이는 게다. 그런 뼈아픈 가해자 의식을 통해서만이 참으로 진정한 수난자의 얼굴이나 또 다른 시대에서의 어떤 도덕적 정당성이 드러날 수 있을 것 같아 보여 한번 해본 소리다만. 같은 체험 세대의 공감대에서랄까. 남편 사일 씨의 심중 그대로를 대신하고 있는 손 여사의 어조에는 그 딸아이에 대한 일반적인 공박기가 갈수록 가파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예기치 못한 손 여사의 공세에 오히려 입맛이 써진 듯 이번에는 사일씨가 오랜

만에 다시 아내를 가로막고 나섰다.

이제는 그만들 해두는 게 좋겠구먼. 공연한 엄살로 쓸데없이 일을 너무 과장하려 들지말고……

그는 그 손 여사의 참견을 부질없는 과장이나 엄살기쯤으로 치부해 버린 다음 이제는 이미 전력을 내고 있는 듯한 딸아이에 대해서도 논쟁을 일방적으로 결론지어 나갔다.

그리고 너도 이제는 이런 일로 이 애비하고 굳이 승부를 다투려들지 않는 게 좋겠다. 오늘 이 언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승리는 어차피 네 것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니까. 앞으로의 세상은 결국 너희 젊은 세대의 것이니 그런 뜻에서 너는 애당초 이 애비에 대해 승자로 태어난 것 아니냐……. 통일문제만이 아니라 인생사엔 언제나 뒤에 오는 자가 진정한 승자가 되어야 하겠기에 하는 소리다.

사일 씨는 일단 그런 식으로 아이를 다독이고 나서, 그러나 어딘지 신음기 같은 것을 숨긴 허허한 목소리로 딸아이에 대한 당부를 덧붙이고 있었다.

네 어머니 말대로 그런 뜻에서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피해자의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

는 건지 모르겠다. 허지만 네가 이 애비에게 진정한 승리를 거두려면 아직은 조금 더 기다리는 참을성도 지녀야 할 게다. 지나간 일을 묻지 마라, 과거의 잘잘못 따위는 깨끗이 씻어 잊고 우선 서로 말을 합해 통일로 나아가자…… 너의 생각은 대개 그런 쪽인 줄로 알고있다. 하긴 우리 세대가 그런 식으로 너무 부질없이 지나간 일에만 얽매여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그래 요즘들은 그런 태도나 현상에 반성의 바람이 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앞만 보고 함부로 그 과거라는 걸 훌훌 벗어 던져 버릴 수 없는 것이 나 같은 체험 세대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인 듯싶다.

그러나 그런 세대는 이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불완전하나마 체험 세대에 낄 수밖에 없는 애비도 그런 자의식이 좀 끈질긴 편이지만, 나 역시 그리 오래잖아 사라져가게 될 것이고, 나 자신 늘 그럴 각오를 지니고 살고 있다. 더욱이 오늘이라도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그걸로 곧 세상의 뒷마당으로 물러가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 그 때 까진 좀 기다려 주는

게 좋겠구나. 그리고 너는 그 애비의 자기 승복과 패배, 그 부끄럽지 않은 물러섬의 뜻을 거두는 지혜를 통해서 너의 승리를 더욱 값진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딸아이는 이제 그 사일 씨의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얼른 작정이 안 서는 듯 얼마

간 곤혹스러운 표정 속에 어정쩡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손 여사는 새삼 더 참담스런 심사 속에, 오랜 세월 조그맣게 한자리에만 맴돌고 있던 그 남편 속의 아이가 성장기도 없이 별안간 그대로 하얗게 늙어 버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더 두고볼 수가 없어서 서둘러 그 남편을 대신해 나섰다.

그래요. 통일 이야기는 전에도 오래 끌수록 공소하고 감정에 흐리기 쉽던데, 오늘은 이

만해둬요. 이러다가 하필이면 그 좋은 통일 이야기로 한 집안 부녀간에서 엉뚱한 이산가족이 생겨날 것 같아 우습고 걱정스러워요.

이날 밤 사일 씨와 딸아이와의 대립은 손 여사의 희망대로 그쯤에서 일단 끝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일의 마무리가 아니라, 더 큰 분란을 불러올 서막에 불과했다.

손 여사가 이 날 밤 농담 삼아 흘린 소리 그대로, 한이틀 내내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수진이 끝내는 집을 나가 종적을 감추고 만 것이다.

……죄송해요. 아버지, 전 이제 아버지나 아버지의 세대를 충분히 이해 할 수 있게 됐어요. 아니, 그건 아마 아버지나 어머니의 말씀을 듣기 이전부터도 다 알고 있었던 일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전 아버지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 아버지 곁에 아버지와 함께 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버지의 삶엔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하게 체험되고 완성되어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삶이지 저나 제 또래의 체험, 삶이 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 피해와 수난의 체험까지도 자신의 삶 속에 더없이 알뜰한 의미로 꽃 피우고 열매 보아나가는 아버지의 빈틈없는 치밀성, 그리고 아버지께서 '패배'라고까지 말씀하신 그 부끄럽지 않은 물리성에마저 어떤 떳떳한 명분이 필요하신 완벽성, 그것들이 제 자신의 삶과는 아직 거리가 먼 점들이라는 생각에 저는 두렵고 견딜 수가 없어요. 게다가 아버지는 그 '물러서심'을 아시면서도 제 아픈 몸짓과 삶의 마당을 앞당겨 열어주기 위해 스스로 물러서실 생각은 없으시지않아요……. 결국엔 제가 이렇게 떠나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아직 모자라고 빈 곳만이 제 몫인 듯싶구요.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모두가 이루어진 분들 곁에서보다 비슷하게 모자라고 어린 데를 지닌 사람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 스스로 찾아 채워나가야지 않겠어요. 저는 아버지 앞에 빈틈없이 이루어진 생애가 어떤 아름다운 슬픔 속에 서서히 물러가심을 기다림에서보다도 그런 헤매임과 열어나감을 통해서 제 삶을 더 값진 것으로 만들 수 믿고 있으니까요……. 저를 기다리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께서도 아시겠지만, 그 열어나감이나 구하고 채우는 일이 쉽고 간간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 날 해질녘 수진이 집을 나가면서 제 아버지 앞으로 남긴 하직의 글이었다.

그러나 사일 씨는 이제 그 딸아이의 글을 보고서도 새삼스레 놀라거나 실망을 하는 기색이 없었다. 시야비야 말이 없이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는, 이튿날 아침 딸아이가 빠진 식탁을 앞에 하게 되고서야 탄식을 깨물듯 혼잣소리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것 참…… 내 이 나이가 되어 또 하나 기약도 없이 기다릴 사람만 늘게 된 셈인가…….

그러게요……. 그 망할 것이 그래 우리들을 그저 기다리기만 하다가 가는 사람으로 만들려는지……. 그게 제 일방적으로 당신을 한 번 더 괴로운 죄인꼴로 만드는 노릇인지도 모르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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