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 은 방 -임철우
하나
모든 게 그저 그렇군. 오늘도 변한 거라곤 하나도 없어 건성으로 신문을 뒤적이며 나는 중얼거린다. 세상은 늘 그대로인 모양이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 그 전날도 그랬던 것처럼, 지극히 상투적인 사건들이 역시 상투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들로 그저 그렇게 맥빠지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특대 활자로 찍힌 일면의 기사들도 그렇고. 잇새에 긴 음식 찌꺼기 모양 어수선하게 박혀 있는 사진들도 그렇고, 죄다 하나같이 진부하고 낡아빠진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오른쪽 한 귀퉁이엔 어제 있었다는 대학가의 시위에 관한 몇 줄안 되는 기사가 붙어 있고, 인천과 마산 어딘가의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최루탄 분말을 잔뜩 들이마셨다는 구절이 마지못해 간신히 끼여 있긴 하지만, 그에 대한 짤막한 논평 하나 실려 있지 않다.
요즘 신문은 얼굴이 없고 기사 속엔 목소리가 없다구. 몽땅 껍데기뿐야. 너나없이 껍데길 뒤집어쓰고서 너도나도 다투어 껍데기 행세만 하는 거라구. 어제 밤 술집에서 그렇게 악을 쓰듯 했던 게 누구였더라.
영어과 유 선생이었던가. 그런데 왜 그때 그 얘길 하는 유 선생의 얼굴 역시 똑같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까 몰라. 아니.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들 모두가 하나같이 두껍고 무표정한 데드마스크를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어.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정작 하단의 정력 강장제 광고며 영화 광 고 따위들은 꼼꼼히 훑는다. 하지만 그것들도 마찬가지로 새로울 건 하나 없다.
여보. 지금 몇 시야, 정확히!
나는 변기에 걸터앉은 채로 소릴 지른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때문일까. 재차 똑같은 소리를 아까보다 더 크게 되풀이 했을 때에야 화장실 문밖에서 응답이 온다.
십삼 분, 아니 십이 분 전예요. 아직 멀었어요?
으응. 알았어.
서둘러야 한다, 오늘따라 영 내장이 뜻대로 구실을 해주지 않는다. 도대체 언제나 이놈의 창자가 제대로 말을 들어먹는담. 오늘따라 더더욱 신통찮은 까닭은 필시 어제 저녁 늦게까지 퍼마신 술 탓일 게다. 아침에 곤욕을 치를 게 두려워서 간밤 내 나름으로는 짐짓 게으름을 피워 가며 잔을 비웠는데도 이 꼴이니 원, 벌써 이 나이에 다된 걸까, 하긴 애꿎은 창자 탓만해서도 안될 일이다.
아침마다 변기 위에 걸터앉아서 아내에게 서너 번씩이나 벽시계를 읽어 달라고 궁상을 떨어가며 신통찮은 내장을 억지로 쥐어짜지 않아도 좋을, 그런 여유 있는 일자리로 옮겨갈 수는 없을까, 최소한 지금보다 삼십 분 정도만이라도 늦게 출근할 수 있는 그런 직장 말이다. 정말, 이건 해도 너무 한다 싶다. 새벽같이 질어나 출근했다가, 보충수업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아홉 시이니, 원. 어느덧 입버릇처럼 되어 버린 한심스런 푸념을 뇌까리다 말고
나는 까닭 없는 한숨을 내쉰다.
아유, 늦겠어요, 여보. 여섯 시 십오 분예요. 버스를 놓치면 택시 잡기가 더 힘들다면서.
으응, 알았다니깐.
여전히 뒤가 미진하긴 하지만, 나는 별도리 없이 서둘러 꼭지를 내리고, 고양이 세수하듯 대충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른 뒤에 밖으로 나온다. 그 다음부터는 모두 정해진 대로다. 와이셔츠, 넥타이, 양말, 양복을 입고 매고 걸치고 껴 신고, 그리고는 팔목에 시계를 끼우며 식탁 앞에 주저앉아 허겁지겁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서야 한다. 일 년 중 얼마 안 되는 휴일, 그리고 보충 수업 때문에 쥐꼬리만해진 방학 몇 날을 뺀 나머지 날들을 매양 이렇듯 똑같은 꼬락서니로 허둥거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내가 뭐랬어요. 이십 분만 더 일찍 일어나시면 될 텐데두, 꼭.
아내는 그런 내 모습을 안쓰럽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하다는 듯이 서서 지켜보며, 어제도 그제도 해 왔던 식상한 소리를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고, 나 역시 입안에 남은 밥알을 우물거리는 채로 바바리 코트에 어깨를 끼우며 현관으로 나선다. 아내가 도시락이 든 가방을 건네주었다. 방안에서 딸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제야 잠을 깬 모양이다.
오늘은 꼭 잊지 않고 알아보시는 거죠?
윌 말야?
학교 장학 금고에서 돈을 대출할 수 있다고 그랬잖아요, 당신.
그거? 아. 알았어. 어서 들어가 봐 애가 울어.
아내는 그래도 한마디 더 붙인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시는 거예요. 또 어제 저녁처럼 술 드시지 말구.
탁 하고 현관문이 닫히고 아이의 울음소리도 함께 끊어졌다, 나는 잰 걸음으로 복도를 질러 계단을 뛰어내린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띵동 소리를 내며 눈앞에서 열린다. 아무도 없다. 오늘은 운수가 좋은걸. 뭔가 잘 풀리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안으로 뛰어 들었다. 백오십 세대나 모여 살고 있는 십오 층 건물에 승강기라곤 꼭 한 대뿐이어서 아침이면 늘상 애를 태우기 일쑤다.
그러고 보니 이 아파트로 옮겨 온 지도 어언 일 년째 되어가나 보다. 결혼 후 이 년 넘게 줄곧 큰방 사람들 눈치 보느라 주눅이 든 채 곁방살이를 하다가. 비록 남의 집이긴 해도 열아홉 평 아파트를 독차지하고 살게 되었을 때 아내는 여간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엊그제 집주인으로부터 삼백만 원을 더 올려 받아야겠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는, 그녀는 공연히 분수에 맞잖은 짓을 한 건 아닌가 싫다며 금방 울상을 지었다.
어떻게 되겠지 뭐. 학교 장학금고에서 교직원들에게 이백만 원 까지는 대출해 준다니까. 한번 알아볼게. 이자도 은행보담야 훨씬 싼 편이니까.
그렇게 말해 놓고서도 막상 벌써 여러 날째 나는 그 일을 미적 거리기만 하고 있는 터이다. 이사장의 아들인 서무과장 작자에게 아쉬운 소릴 하기가 무엇보다 싫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나 반말 투로 말꼬리를 잘라먹는 버릇을 가진 그 육군 대위 출신의 교활하고 능글맞은 눈빛을 떠올리려니 울컥 역겨움이 치민다. 그러나 오늘은 어쩔 도리가 없다. 목마른 쪽이 손을 벌릴 수밖에. 문득 오늘따라 가방이 터무니없이 무거워져 오는 듯한 느낌에 공연히 손
만 번갈아 바라 본다. 정말이지, 나란 녀석은 이게 뭔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건가,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풀이해 온 그 지겹고 익숙한 푸념을 다시 씨부렁대면서도, 눈으로는 재빨리 팔목시계를 확인하고, 두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한다.
눈이라도 쏟아지려는가 잔뜩 찌푸린 하늘이 멀리 도시의 머리 위에 낮게 걸려 있다. 초겨울 이른 아침의 공기는 제법 맵차다. 식료품 가게 앞에서 젊은 주인여자가 생선 궤짝을 배려놓고 두 손에 호호 입김을 쬐고 있는 게 보인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고 일부러 땅을 내려다보며 걷는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내게 인사를 보내곤 했는데, 그것이 아파트 주민들에겐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장사꾼다운 속셈에서임을 짐작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그녀의 인사가 거북스러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약국 앞을 돌면 삼층 연립주택 건물 두 채가 나란히 서 있고, 그 건물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면 한길로 이어진다. 거기서부터 정류소까지는 정확히 오 분 거리이다. 자칫하면 버스를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나는 약국을 지나면서부터는 거의 달음질하듯 다리를 부지런히 옮기기 시작한다. 워낙 변두리 동네인 까닭에 버스는 십 분마다 한 대 꼴로 다니고 있다. 그래서 늘 정확한 시각에 이곳을 지나치는 버스를 놓치게 되면 그날 아 침은 보나마나 지각이다.
팔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연립주택 모퉁이를 마악 돌았을 때다.
나는 하마터면 누군가와 몸을 부딪칠 뻔했다. 처음 내가 얼핏 본 것은 다만 누군가의 곤색 잠바였는데. 그와 맞부딪치지 않기 위해 반사적으로 얼른 몸을 피했다. 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곤색 잠바는 오히려 이쪽을 향해 정면으로 다가온다. 나는 의아해 하며 무심코 고개를 든다.
잠깐만.
사내는 단지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몸집이 운동선수처럼 단단하면서도 날렵해 뵈는 근육질의 사내다. 좀 전의 그 낮고 짤막한 한마디가 정말 이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의심하며, 나는 멈칫해서 그를 살핀다. 작고 날카로운 눈빛의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이다. 사내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다시 말한다.
실례합시다. 오기섭 선생이쇼?
네? 아,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
학부형들 가운데 한 사람인가, 아니면 우리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 중 하나인가. 나는 한순간 기억을 헤집어 그 낯선 사내의 얼굴을 찾아내려 애쓴다. 그러나 역시 알 수가 없다.
잠깐 함께 가 볼 데가 있소.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기로 하고.
사내가 다짜고짜 내 왼쪽 어깨를 확 움켜쥐었고, 이내 오른쪽 에서 또 한 사내가 다가와 내 다른 쪽 겨드랑이와 어깨춤을 두 손으로 우악스레 나꿔챈다. 그러고 보니 사내들은 둘이다. 내가 첫 번째의 사내와 마주 서 있는 동안 다른 사내는 서너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큰길 쪽을 등으로 가리고 서 있었던 것이다. 도망 칠 방향을 미리 막고, 동시에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리라. 두 번째 사내는 우람한 체격에 손바닥이 엄청나게 크고 두꺼워 뵌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누구요. 당신들은,
나는 눈 깜짝할 순간에 그들에게 간단히 결박당한 채로 다급하게 소리친다. 목구멍에 돌멩이라도 턱 걸려 버린 듯 숨쉬기가 거북하고 가슴이 무서운 기세로 쿵쿵쿵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조용히 하시지. 곱게 얘기할 때 말요. 당신 동네에서 이렇게 떠들어 봐야 꼴만 흥하잖소, 응?
야, 차에 태워!
두 번째 사내의 팔이 파충류의 혓바닥처럼 내 허리에 척 감겨 오더니, 이내 믿을 수 없을 만큼 완강한 힘으로 길 쪽을 향해 밀어붙인다. 불과 사오 미터 거리에 회색 승용차 한 대가 서 있다, 아마 아까부터 그 자리에 대기해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여태까지 왜 그걸 보지 못했을까. 비명을 질러야 할까. 도대체 이 자들은 누군가. 경찰? 하지만 나를 왜. 무슨 일로? 사내들의 팔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그런 갖가지 잡다하고 혼란한 의식들이 어지럽게 얽혔다 풀리고 다시 얽힌다. 문이 열리고, 사내들이 나를 뒷좌석으로 밀어 넣으려 할 순간 나는 그래도 마지막 안간힘을 써 본다,
놔! 이거 무슨 짓들요. 당신들은 누구냔 말야.
어. 이 친구가 죽을라고!
이봐. 곱게 말할 때 순순히 듣는 게 좋다잖소. 가 보면 알 거 아냐.
사내들의 표정이 일순 험악하게 굳는다. 두 번째 사내의 손목이 어느 틈에 내 넥타이를 그러쥐고 있고, 나는 그 자의 엄청나게 큰 눈알이 바로 내 코앞에서 무섭게 희번덕이고 있음을 본다. 순간, 반항할 힘과 의욕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가방이 땅바닥에 떨어져 구른다. 그 동안에도 나는 줄곧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싸 넣어 준 도시락. 그리고 김치 통이 가방 안에서 엉망으로 뒤집혔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엉뚱하게도 까닭 모를 억울함과 서러움 같은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가방, 내 가방을,,,,,,.
어느 틈에 내 몸뚱이는 뒷자리 안쪽에 쑤셔 박혀져 있다. 내 입에서는 당치도 않게 가방이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첫 번째 사내는 운전석 옆에 탄다. 두 번째 사내가 내 곁으로 앉으며, 탁 하고 거칠게 문을 닫는다.
자, 가방 여깄소.
두 번째 사내가 내게 가방을 밀어 주었고, 나는 그걸 받아 재빨리 두 팔로 허겁지겁 감싸 안는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차창 밖 거리의 풍경이 뒤로 밀리고 있다. 왠지 모든 것이 물 속에라도 잠긴 듯 침침하고 무겁게 보인다. 그것이 차창 유리의 짙은 채색 탓임을 곧 깨닫는다. 급작스런 혼돈 속에 빠져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 나는 호흡을 가다듬느라 애쓴다, 무어라고 항변을 해야 한다는 걸, 이대로 순순히 끌려갈 수만은 없음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 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장을 보여 주시오. 이런 법이 어딨소. 출근하는 사람을 무작정 연행하다니 말요.
대단한 분노에 아 있음을 나타내기엔 내 목소리는 너무 작고 더더구나 역력하게 떨리고 있다. 그건 비참한 일이다.
영장? 체, 선생이라고 배운 티를 되게 내는구만. 그런 건 이따가 가서 따지쇼. 우린 상관없는 일이니깐.
앞자리의 사내가 힐끔 넘겨다보며 빈정댄다,
뭐라구요. 세상에. 이런 무법천지가 어딨소.
무법천지라구. 이봐, 법 없이 설쳐 대는 쪽은 당신야. 그렇게 법에 빤한 친구가 왜 법을 어겨. 일단 가 보면 알 거 아냐.
예? 내가 뭘, 어쨌다는 거요. 내가 무슨.......
이보쇼 선생. 제발 조용히 합시다 응 우리도 피곤한 사람들야. 아직 아침밥도 못 먹었다구.
이번엔 옆자리의 사내가 노골적으로 얼굴에 불량기를 드러내며 말한다. 금방이라도 그 커다란 주먹을 휘두르기라도 할 것처럼 눈 알을 험악하게 굴리며 나를 째려본다. 그러더니 으아아, 하고 입을 한껏 벌려 하품을 한다. 나는 시도하려 했던 모든 항변과 거부의 몸짓을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이들에겐 아무런 말도 논리도 통할 구석이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내 생각을 미리 정리해 두는 쪽이 더 급한 일일 것이다. 도대체 이들은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인가. 법을 어겼다고? 앞자리의 잠바는 조금 전에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나는 허리를 잔뜩 웅크리고 가방은 가슴에 껴안은 채, 그간의 나 자신의 행적에 대해 어떤 혐의점이 숨겨져 있었던가를 찾아내기 위해 분주히 기억을 헤집어 댄다. 하지만 얼핏 마음에 짚이는 것이 달리 있을 턱이 없다.
혹시 어디서 내가 입을 잘못 놀렸던 건 아닐까. 수업 중에 시국에 관한 얘기를 슬몃 던져 본 적은 가끔 있지만, 설마 아무러면 그런 정도를 갖고야,,,,,, 하긴 대학 때 은사 한 분은 술집에서 취중에 지껄인 소리 때문에 연행되어 가서 유언비어 유포죄로 구류를 산 적이 있었다. 손으로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할 사람이었는데도---가만, 누구한테 빛 보증 선 일도 없지. 또 설마 그런 일로 이렇듯 살쾡이가 닭 채가듯 하지는 않을 테고. 투서를 했는지도 모르지. 누군가 나를 겨누고 모함을 했을 수도 있지 아냐. 그것도 아닌 듯하고,,,,,, 혹시? 순간 가슴이 텅 하고 내려앉는 듯한 충격에 눈앞이 아찔해 온다, 그와 함께 누군가의 초췌한 얼굴이.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한 남자가 불현듯 시야로 떠오른다. 그것은 철이 들면서부터 내 의식의 밑바닥에 깊고, 어두운 흉터로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때라도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숨막히게 하던 바로 그 모습이다,
그는 바로 내 큰아버지이다.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없고. 퇴색한 사진 한 장 들여다본 기억도 없는데도, 그는 항상 내 의식의 음습한 한 모퉁이에서 그렇듯 검은 한복 차림에, 윤곽이 분명치는 않지만 초췌하고 우울한 얼굴 모습으로 말없이 서 있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큰아버지가 현실로 나타난 것일까. 북으로 올라갔다는 소문만 남긴 채 종적이 없다가 지금에야,,,,,것 삼십 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에야,,,,,,? 혹시, 간첩이 되어? 모종의 어마어마한 지령을 받고? 서. 설마,,,,,, 나는 두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지금껏 평범한 내 일상의 내부에 은밀히 숨겨져 있던 하나의 가정이 드디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설마 그럴 리야 없으리라.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말이다. 무슨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영화에 나오는 얘기쯤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
나는 잔뜩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비로소 약간 펴고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그런데도 양쪽 무릎이 덜덜 떨려 오고 있다. 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쥐고 누른다. 낯익은 거리가 스쳐 가고 있다. 목욕탕 굴뚝으로 검은 연기가 퐁퐁 피어오르고 있고.
언젠가 은단을 산 적이 있는 약국, 금붕어집, 미장원 그리고 복덕방 간판이 차례로 지나갔다. 아파트로 이사를 오기 전, 집을 구하느라 그 복덕방엘 들른 적이 있었지. 연립주택 이층 하나가 나와 있긴 했는데, 은행에 담보로 잡혀 있다는 점이 꺼림칙해서 그만두었던 기억이 난다.
뭐야, 아침부터 하품만 하구. 어젠 몇 시에 들어갔었나, 이 형사,
앞자리의 잠바가 내 옆의 사내에게 묻고 있다.
말도 마슈. 쓰발,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들어갔다구요. 그 새낀 한번 술판에 앉았다 하면 꼭지가 돌기 전에는 끝장을 안 내거든. 어제도 오차까지 갔지 뭡니까.
그 새끼라니. 또 술 먹었구먼. 누구랑?
최 과장 말입니다. 최달식이. 그 친구가 오랜만에 한잔 사겠다고 전활 했는데, 안 갈 수가 있어야죠. 에이, 그랬더니 마누라는 한밤중에 질질 짜고. 게다가 애새끼까장 덩달아 악악대고, 에잇 참, 이틀 만에 집이라고 찾아 들어가 보니 속만 상해서 원.
옆자리의 사내는 또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다. 그러고 보니 사내에게서 술내가 훅 끼쳐 오는 것도 같다.
최달식이? 아, 알겠어. 작년엔가 O과로 옮겼다든가, 아마? 자네하곤 동기라고 했지?
아닙니다. 나이는 동갑이긴 해도. 내가 일 년 늦게 시작했죠. 그 친구, 그쪽에선 이젠 아주 이력이 붙은 모양입니다. 어제도 한 건 해치웠다고, 꽤 생기가 나 있던데요.
사내들은 참으로 무심한 어조로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얼핏, 지금 여느 아침처럼 출근을 위해 낯 모르는 사내 둘과 우연히 합승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고, 이내 제발 그것이 사실이기를 빌고 싶어진다.
네거리로 차가 진입한다. 앞 유리창에 시내버스의 뒷면이 확대되어 나타난다. 그건 바로 내가 늘 타고 다니는 38번 버스이다. 이럴 수가 있담. 난 지금쯤 바로 저 버스에 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붐비는 사람들 속을 뚫고 삼분의 이 지점쯤으로 들어가, 손잡이를 찾아 쥔 채 비로소 느긋하게 창 밖을 내다보고 있거나, 아니면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우리 학교 아이들 중 한 녀석으로부터 요행히 자리를 양보 받아 편안하게 앉아 있어야 옳을 일이다. 그런데 터무니없게도 내가 왜 지금 여기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인가. 이건 억울하다. 참말이지, 너무나 분통 터지는 일이잖은가.
나는 여전히 잡담을 지껄이고 있는 그 낯선 사내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한없이 천연스덥고 평범해 보이는 그들의 얼굴과 음성과 웃음소리가 더없이 생경하고 이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별일이야 있을라구. 뭔가 착오가 있는 걸 거야. 나는 점차 온몸을 옥죄어 오는 어떤 불길한 예감을 한사코 부인하려 애쓰며 뇌까린다. 그리고 되도록 태연한 척. 차창 밖을 내다본다. 놀랍게도 세상은 모두가 그대로이다. 횡단 보도를 건너는 행인들도 그렇고,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속에서 이쪽을 멀거니 내어다보고 있는 허연 얼굴의 아이들도 그렇고, 핸들에 팔꿈치를 괸 채 껌을 찍찍 씹어 가며 신호등이 바뀌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운전수들도
그렇고------거리는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 모두가,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듯이. 하나같이 진부하고 상투적인 모습으로 무심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오직 변한 것은 나 혼자뿐인 것 같다. 바로 조금 전 아파트 앞 골목을 돌아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짐작조차 못했던 어떤 놀라운 변화가 내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어디론가 끝 모를 어둠 속으로 추락해 내리고 있는 듯한 아득한 절망감에 자꾸만 발끝이 저려 온다, 아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딸아이는 이제 겨우 돌을 이십여 일 남겨 두고 있는 터이다. 참. 교무회의가 곧 시작할 텐데,,,,,, 텅 빈 내 자리가 눈 앞에 보인다. 오늘은 1교시부터 시작해서 자그마치 여섯 시간이나 수업이 있는 날이잖은가. 내 수업은 누가 대신 해준담. 교감이 화가 잔뜩 나서 집으로 전화질을 해대겠지...... 나는 불현듯 그런 갖가지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해 믿기 어려울 만큼 절실한 애정과 그리움을 난생 처음 확인한다. 그리고 내게서 그것들을 빼앗아 가려 하고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 분노와 공포심으로 무릎을 떨기 시작한다. 차는 어느덧 거대한 백색의 건물 안으로 기어들고 있다, 정문에서 제복 차림의 보초가, 뭔가 알아듣기 힘든 짧은 구호와 함께 경례를 붙이는 모습이 보인다
둘
오늘 밤엔 필시 눈이 쏟아질 모양이다. 하늘 한쪽이 우중충하고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다. 피고름 덩어리 같은 구름장들이 두텁게 엉겨 붙은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멀리 고층 아파트의 유리창들이 하나 둘 불을 켜기 시작하고 있다.
목욕탕 문을 나서자마자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다. 주머니를 더듬어 보았지만 츄리닝 바람으로 집에서 나온 까닭에 담배가 있을 턱이 얼다. 아무래도 이걸 끊어야겠는데. 나는 길을 가로질러 맞은편 가게에서 '솔' 한 갑을 산다. 지난번엔 겨우 닷새를 채 넘기지 못하고 다시 담배를 피우고 말았다.
아유. 냄새가 난단 말예요. 옆 사람 보기가 민망하지도 않아요. 당신. 전번에도 목사님이 집에 오셨을 때 미안해서 혼났어요. 정순이 그년이, 재떨이를 치우라고 그렇게 시켰는데도 글쎄, 응접실 탁자 밑에다가 고스란히 모셔 왔잖아요. 하필이면 권 목사님 앉으신 자리 바로 앞에다가 말예요. 겉으로는 안 보신 척하셨지만, 그걸 못 보셨을 리가 있어요. 이게 뭐예요. 교인이, 아니 명색이 교회 집사라는 양반이 골초라니 원.
여편네가 입만 벌어지면 줄줄줄 쏟아 놓는 핀잔이다. 어쨌든 틀린 얘긴 아니다. 예배 나갈 때마다 양치질을 한다 옷을 갈아입는다 신경을 쓰긴 하지만, 몸에 밴 냄새가 쉬이 지워질 리가 만무하다. 주일날 교회에서 찬송가를 뒤적이다가도 문득 손가락 끝에 누렇게 절어 있는 담뱃진을 감추기가 어려워 당혹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아편처럼 좀체 끊기 어려운 게 이거 아닌가 지난해 간염으로 입원했던 동료 이 형사도, 거기 누웠을 땐 당장 끊겠노라고 장담이더니, 퇴원하자마자 다시 예전의 골초로 돌아가질 않던가, 젠장.
나는 한 모금을 맛나게 빨아올리며 골목길을 걸어 오르기 시작한다. 사우나실에서 한바탕 땀을 주욱 빼고 나니 한결 몸이 가뿐해진 듯싶다. 아무래도 어제 밤의 술이 과했던 모양이다. 사 차였던가 오 차였던가 그랬었지 아마.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긴 했지만, 도끼로 패 대는 것 모양 골이 지끈지끈 쑤시고 당겨 오는 통에 오후까지 내내 드러누워 시달려야 했다.
그나저나 이번 녀석은 아주 악질이었다. 처음엔 금방이라도 술술 털어놓을 듯하더니만 입을 꽉 다물고, 아예 날 잡아 잡수쇼 하는 식으로 오리발을 내미는 통에 나흘 동안 나까지 덤으로 잠 한 숨 제대로 편히 자 보질 못했으니깐. 요즘 젊은 녀석들은 겉보기만 그렇지, 형편없이 겁대가리가 많고 약아빠진 것들이 대부분인데. 그래도 이번 자식은 제법 간간하게 버티려고 용을 썼다. 그래 보았자 결국 저만 손핼 봤다는 걸 이젠 알았겠지만 말이다. 츳, 병신 같은 새끼. 어차피 처음부터 그렇게 끝나도록 다 되어 있는 건데. 그걸 모르구.
나는 길바닥에 찍 소리가 나게 침을 뱉고는 획획 휘파람을 불어 본다. 어제 밤 맥줏집 '아방궁'에서 내 옆에 앉았던 계집애는 꽤 쓸 만했다. 몸집은 후리후리한 편이었는데, 의외로 살집이 통통하고 탄력이 있어서 은근히 회를 동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가슴을 멋대로 주물러도 꼼짝 않더니, 스커트 밑으로 손을 집어넣는 것만은 한사코 막으려 앙탈을 부렸다. 다른 년들 같았으면야 대번에 귀싸대기에 손이 올라갔겠지만, 왠지 그년한텐 그러기가 싫었다. 어제 밤엔 같이 있던 동료들이 별로 생각이 없는 듯한 눈치길래 모르는 척하고 따라 나왔지만. 내 기분이야 정말이지 오랜만에 외입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쯧. 나흘 넘게 집에도 못 들어가고 그 자식 족치느라 진을 다 쏟고 났더니, 원,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사지가 녹작지근해 오는 게 영 뭐 같았다. 덕분에 오랜만에 마누라 좋은 일 시키긴 했지만. 흐흐. 마누라가 간밤엔 제법 용을 썼다. 며칠 굶겼더니 어지간히 맛이 당기기도 했겠지만, 나 역시 왠지 기분이 개운찮고 허전해 있던 터라, 참말 오랜만에 한바탕 격렬하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며칠 동안 실갱이를 한 끝에, 마지막으로 조서를 다 꾸며 놓고 나서 녀석들을 넘기는 일만 남게 되면 그렇듯 이상스런 기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뭐랄까, 가슴 한 귀퉁이 어딘가에 구멍이 뻥 뚫려 있어서, 그 구멍을 통해 내 심장의 피가 밖으로 솔솔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만 같다. 허탈감이 랄까, 아쉬움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엇인지 모를 것에 대한 지독한 분노와 자포자기식의 절망감 같은 게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곤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교 후에 슬며시 찾아 드는 칙칙한 절망감 같은 거랄까, 누구에겐가 속임을 당하고 난 느낌 같은, 그런 영 뭐 같은 기분 말이다.
나는 공터 옆길로 접어든다. 얼마 전부터 벽돌이며 자갈 따위를 실은 트럭들이 드나들더니, 어느새 집을 짓기 시작한 모양이다. 붉은 벽돌로 대충 쌓아 올려놓으니 그런대로 집 꼴이 되어간다. 오늘 일을 마악 끝낸 참인지, 인부들이 장갑을 툭툭 털며, 뭐라고 떠들어대면서 골목을 내려오고 있다.
우리 집은 공터 반대편 끝에 붙은 이층 양옥이다. 아내는 늘상 등 뒤쪽이 휑하니 트여 있어서 불안하기도 하고 을씨년스럽다며. 어서 빨리 공터에 집이 들어섰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투덜대곤 했었는데, 이잰 그런 투정은 듣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이르러 마악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을 때다. 느닷없이 머리 바로 위에서 벽력같이 터져 나오는 짐승의 소리에 나는 기겁을 했다.
저, 염병 맞을 눔의 개새끼가!
순간 머릿속의 피가 한꺼번에 왈칵 곤두서는 듯한 분노에 사로잡혀 나는 소리쳤다. 형편없이 더러운 털을 흔들어. 대며 발바리 하나가 사납게 짖어 대고 있다. 이층의 발바리다. 돌멩이를 집어 들고 던지는 시늉을 해 보이자, 놈은 오히려 이빨을 앙당하게 드러내 놓고 더욱 앙칼지게 짖어 대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당장 저 놈의 아가리를 갈기갈기 찢어 발겨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은 충동 때문에 나는 금방 담장을 기어오르고 싶을 지경이다. 그런데 마침 대문이 열리고, 아내가 이쪽을 내어다본다.
왜 그러세요. 여보.
저 쌍놈의 개새낀 어찌 된 거야. 집주인도 못 알아보고. 아주 잡아 먹겠다고 길길이 날뛰는구만, 쓰발, 톱으로 모가지를 썰어 버릴까!
홧김에 욕부터 터져 나온다,
그러게 말예요. 당장 팔아 치우라고 해야지 원.
사람들이 염치가 없는 거지 뭐야.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주제에 개새끼는 무슨 개새끼람! 정 키우려면 목줄을 매어서 짖지 못하게 단속을 하든지.
아이 조용 좀 해요. 이층에서 다 듣겠수.
아내가 내 등을 떠밀어 넣는다,
그 사람들도 들으라지. 아니, 들어 보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셋방 사는 것들이 무슨
나는 더 큰소리로 씨부렁거려 주고는 마당으로 들어선다, 암만 해도 세를 잘못 내어 준 모양이다. 이번 사람들이 들어온 건 보름 전쯤이었는데, 처음엔 신혼부부 단 두 식구뿐이라더니. 막상 이삿짐을 옮길 때 보니까 동생들이랍시고 군식구라 둘이나 붙어 있었다. 둘 다 대학에 다닌다는 사내녀석들은 이쪽을 쳐다보는 눈초리가 당돌하고 시건방져 보여서 썩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당장 나가랄 수도 없으니, 몇 달 기다렸다가 전세금을 몇 백쯤 더 얹어 달라고 요구하면 별 수없이 꼬리를 사리고 나가 주겠지
현관으로 들어서자 막내딸이 아빠아, 하고 양팔을 벌린 채 달려든다. 아이구 내 새끼. 나는 딸년을 번쩍 안아 올리며, 쪽 소리가 나게 뺨에 뽀뽀를 해준다. 본디 남들 모양 나긋나긋하고 잔정스레 대할 줄을 모르는 무딘 성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핏줄이라 그런지 아이들을 마주 대하면 나는 어린애처럼 단순해지고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곤 한다. 여고 졸업반인 큰딸은 오늘도 밤이 늦어서야 학교에서 돌아올 것이다. 날마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서는 도시락을 두 개씩이나 싸 들고 집을 나갔다가, 꼭 밤 열 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오는 까닭에 나하고는 정작 얼굴을 마주 대하는 기회가 드물다. 몸도 약한 녀석이 어떻게 잘 견뎌 내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다.
나는 막내딸을 어깨에 태우고 안방으로 들어선다. 중학교에 갓 들어간 아들녀석은 텔레비전 화면에 눈길을 박아 둔 채 아예 본체만체하고 있다, 한기야. 이 녀석, 아빠가 들어오시는데도 돌아보지도 않는구나 맨날 텔레비전만 보고 있으면 공부는 언제 할 거야. 숙제는 했어? 나는 아들놈을 밉지 않게시리 나무란다. 그러나 웬일인지 녀석이 입을 뿌루퉁해 가지고 힐끔 돌아다본다.
몰라, 치이, 오늘은 숙제도 많은데. 방에 들어갈 수가 없어, 치.
아니, 네 방이 어때서? 엄마가 지난번에 예쁘게 벽지를 발라 줬잖아. 네가 아기동물원 그림이 든 걸로 사 달라고 했잖았어.
그래도 아들은 뭔가 화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싫어. 내 방엔 들어가기도 싫단 말야. 냄새가 나서 토할 것만 같다니깐. 흐으응.
아들은 아예 울상이다. 나는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껐다, 무슨 소리냐. 냄새라니.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이 녀석이 공연히 또 심술을 부리려는 거지. 너, 아빠한테 혼날 거야. 나는 짐짓 눈을 부릅떠 보인다. 하지만 나는 내심 긴장한다.
사실 나는 이따금 아이들에게 심하게 손찌검을 할 때가 있다. 그건 모두가 내 잘못된 성격 탓이다. 그들 나이 특유의 고집스러움으로 아이들이 막무가내 반항을 하는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러면 나는 어느 순간엔가 정말로 눈앞이 칵 막혀 오면서 이성을 잃어버린 채. 눈앞에 있는 게 철없는 어린아이들이라는 사실을 깜박 망각하고 무섭게 주먹을 휘두르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는 내 큰아들을 잃었다. 아니, 아내의 말대로 아이의 죽음은 그것과는 무관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 녀석이 사실은 바로 내가 휘두른 주먹 때문에 결국 죽게 된 것이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 불쌍한 녀석을, 내가 그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다.
큰딸 은옥이와 아들 한기는 여섯 살이나 터울이 진다. 그러니까 그 가운데에 한수라는 이름의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몇 해 전에 저 세상으로 가토 말았다, 병원에선 뇌막염이라고 했지만 그 아이의 죽음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때 열한 살이었으니까 지금의 한기녀석보다 두 살 어렸을 것이다. 병원에서 시체를 받아 안고 나오던 날, 밖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나는 아이를 업고 온 세상과 나 자신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리
고 앞으로 다시는 이 세상을, 인간을, 또한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그 아이가 죽기 몇 달 전에 그 애에게 주먹질을 무섭게 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정말 어처구니없을 만큼 사소한 일 때문에 나는 녀석의 뺨을 미친 듯 몇 차례나 후려갈겼다. 그때 그 녀석은 지푸라기인형 모양 픽 쓰러졌는데. 그 녀석의 코에서 주르르 흘러 나오던 자줏빛 선연한 핏물은 지금도 내 뇌리에 생생히 박혀 있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어쩌면 죽는 날까지 나는 그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다.
말해 봐. 냄새라니. 네 방에서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야.
나는 텔레비전 앞을 가로막으며 눈을 부라린다,
똥 냄새가 난다니까. 할머니가 내 방 한가운데다가 똥물을 갈겨 놓았단 말예요. 으허헝.
뜻밖에 한기놈은 그렇게 소리를 질러 놓고는 지레 울음을 쏟아 놓는다.
뭐라구. 할머니가 왜 네 방에다가,,,,,, 왜 거길 들어갔단 말야.
아내를 불렀다. 두 번이나 커다랗게 악을 썼는데도 대답이 없다. 나는 화가 잔뜩 치밀어 올라 마루로 뛰쳐나간다. 아내는 욕실에 쪼그려 앉아 빨랫감을 주무르고 있는 참이다.
그래요. 어머님이 글쎄. 좀 전에 아이 방에다가 그래 놓았지 뭐예요. 나도 모르겠어요. 어느 틈에 네발로 북북 기어서 그 방으로 들어갔는지. 이래저래 정말이지 나도 이젠 더 이상 못살겠다구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몇 년째예요.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난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노망 난 늙은이의 똥오줌이나 받아야 하우.
아내가 발딱 일어서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마구 퍼부어 대기 시작한다. 그녀가 끼고 있는 붉은 고무장갑이 문둥이의 곯아 문드러진 손처럼 흉측하게 보인다. 아내는 아마 그때까지 어머니의 오줌 걸레를 빨고 있었던 참이리라. 무슨 소리야, 새삼스럽게. 파출부가 있잖아. 나는 금방 기가 팍 죽고 만다. 어머니에 관한 한 나는 아내에게 할말이 없는 까닭이다.
뭐라구요. 파출부라뇨. 파출부 떨어진 지가 언젠데 그래요. 아니, 또 그 사람들은 쓸개도 없을까, 파출부 하는 여자들이 남의 집 노망한 노인네 똥오줌까지 뒤치다꺼리해 준답디까? 당신, 정말이지 해도 너무하는구려. 나도 이젠 더 이상 못 견디겠다니까요!
아내는 그 흉물스런 손 허물을 억지로 벗겨 내더니, 그것을 욕실 바닥에 내팽개치며 앙칼지게 고함을 지른다. 순간 나는 눈이 확 뒤집히게 화가 치밀어 오른다.
옘병할, 이게 무슨 지랄인가. 난 왜 이리도 재수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놈일까. 어머니 때문이다. 아직 저 나이가 되도록, 숨이 끊어지기는커녕 똥오줌도 못 가리면서도 멀뚱멀뚱 눈을 뜨고 염치 없게시리 살아 있는, 저 노망한 어머니 때문에 집안 꼴이 항상 이 지경인 것이다.
나는 머리꼭지까지 화가 치밀어서 맨 구석방으로 달려가 와락 문을 열어 젖힌다. 방안은 어둡다. 해가 완전히 져 버린 시각인데도 어머니는 전등을 켜지 않고 있다. 하긴 늘 그랬다. 아내나 내가 켜 주지 않는다면. 어머니는 밤새 내내 캄캄한 방안에 누워 이따금 혼자 낄낄대거나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거나 하면서. 똥오줌을 갈기기도 하고 아예 그 고약한 덩어리를 손바닥으로 떡 주무르듯 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나는 어두운 방안을 들여다보며 짧은 순간 망설인다. 훅, 코끝으로 끼쳐 오는 역한 냄새. 지린내와 땀 내음과 늙은이의 썩어 가는 살비듬 냄새 따위가 뒤범벅이 된 그 기묘한 악취에 콧구멍이 터질 것만 같다.
나는 문 가까운 쪽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낸다. 몇 번 깜박이던 형광등에 이윽고 불이 들어온다. 방안 풍경은 간단하다. 가구 따위를 대부분 꺼내어 창고 등지로 옮겨 놓았으므로 키 낮은 이불장 하나만 한쪽에 달랑 놓여 있을 뿐이다. 그 이불장에 구부정하니 등을 기댄 채 속옷 차림의 늙은이 하나가 귀신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허옇게 센 머리카락은 영락없이 쥐에 뜯긴 모양으로 가위질 흔적이 듬성듬성 남아 있다, 그건 아내의 솜씨다.
나는 한동안 문 앞에 선 채 움직일 수가 없다, 제발, 이게 악몽이었으면. 저 귀신같이 끔찍스런 몰골로 이쪽만 멀거니 올려다보고 있는 늙은이가 어째서 내 어머니여야만 한다는 말이냐. 이건 말도 안 쇤다. 억울하다. 나는 그렇게 마구 고래고래 고함이라도 질러 대고 싶어진다. 으흐크크. 별안간 어머니가 이쪽을 올려다보며 웃기 시작한다. 서너 개밖에 남지 않은 시커먼 앞니를 드러낸 채 어머니는 기묘하게 입술을 흐느적이며 웃고 있다. 저승꽃이 만발한 어머니의 얼굴에 깊은 고랑 같은 주름살이 잡힌다.
쥑여라아. 아암. 느그들이 시방,,,,,, 나알,,,,,, 쥑일라고 그러지이. 그래애. 쥑여라아,,,,,, 어서 쥑여어.
무슨 불길한 주문을 외듯이, 혹은 아주 지쳐빠진 사람이 억지로 소릿가락을 겨우겨우 읊어 가듯이, 그렇게 잔뜩 쉰 목소리로 어머니는 나를 노려보며 말한다. 대관절 어머니는 왜 그런 소릴 해대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곧잘 그런 지긋지긋한 소리를 혼자 씨부렁거리곤 했던 것이다.
아아, 그래요. 어머니. 나도 참말 그러고 싶소. 어머니 말대로 그냥 칵 죽어 버립시다. 어머니도 죽고. 나도 죽고. 여편네랑 새끼들까지 모조리 칵 죽어 버립시다. 제발이지, 그렇게 해서 이놈의 세상살이 후련하게 끝장을 내 버립시다, 염병맞을!
나는 깩 소리를 지르며 문을 쾅 닫고 나와 버리고 만다. 문득 목구멍 안쪽에서 무엇인가가 불끈 치밀어 오르면서 가슴이 빡빡하게 차 오른다. 차라리 어린애처럼 와악 울음이라도 터뜨려 버리고 말았으면 싶다. 안방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 연기만 뻑뻑 빨아 대기 시작한다. 정말이야. 모조리 끝장을 내 버렸으면 좋겠어. 온 식구가 너나없이 쥐약이라도 훌훌 처마시고 함께 죽어 버리면 그만 아냐.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러
진다. 그렇다. 이건 모두가 아버지의 탓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망한 어머니를 내게 남겨 놓고 간 것도, 내게 그 지긋지긋한 전쟁의 추악하고 소름 끼치는 기억들을 남겨 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이제는 얼굴 모습도 기억해 내기 힘든 조부모와 큰아버지, 큰어머니, 그리고 작은아버지 내외까지 모조리 떼죽음을 당하도록 만든 사람도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만 아니었더라면 우리 집안이 이 꼴로 몰락하지도 않았을 터이고, 6,25때 그 일을 겪고 난 후부터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한 어머니가 끝내 저렇듯 추악한 몰골로 노망한 늙은이는 되지 않았을 테고, 허구한 날 똥오줌 빨래에 진력이 났다고 투덜대는 아내의 원망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또 나도 지금쯤은 남들처럼 대학을 나와, 누구 못지 않게 그럴듯한 직장을 붙들어서 남 보란 듯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아아, 한수 그 불쌍한 내 아들 한수도 그렇듯 처참하고 가련하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처음부터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내가 그 애의 얼굴에 짐승처럼 주먹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리고 그 녀석이 몇 달 후 별안간 뇌막염으로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그 저주받은 것들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그 소름 끼치는 복수와 원한의 응어리까지도 내 핏줄 속에 남겨 놓은 것이다. 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꾸깃꾸깃 부벼 끄고는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린다.
아버지는 경찰이었다. 해방 전에 경찰에 투신했던 아버지는 해방되고 난 뒤에 고향인 남해안의 섬 낙일도에서 근무를 했다. 낙일도엔 조부모와 아버지의 형제들이 모두 살았다. 내 외가도 거기에 있었다. 전쟁이 터졌고, 아버지는 우리들을 섬에 남겨 둔 채 육지로 소집을 받아 떠났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아홉 살이었고 여동생 달숙은 네 살 아래였다.
늦여름 어느 날, 갯가 얕은 물 속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나는 처음으로 인민군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광경을 보았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우리를 외가로 떠나 보냈다 나와 달숙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동백리로 몸을 피했다. 머리에 작은 옷보퉁이를 이고 등엔 달숙을 업은 어머니를 따라 나는 캄캄한 밤길을 걸어야 했다. 가도 가도 끝이 나타나지 않을 것만 같던 그 비탈진 산 길이며. 발밑으로 끊임없이 씨근덕거리던 파도 소리, 그리고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이따금 머리 바로 위로 푸드덕 날아 오르곤 하던 산새들 때문에 나는 줄곧 겁에 질려 있었다.
외가에 닿자마자 외조부는 우리 세 식구를 다시 산 너머 섬 끝의 외딴 초가집으로 데리고 갔다. 외조부가 멸치 그물을 치는 어장 근처였는데, 그 작은 집은 멸치를 잡아 올려 말릴 무렵에 일꾼들이 거처하는 어막이었다. 그 어막의 헛간에 숨어서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놀랍게도 아버지가 외조부와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났다. 청산도까지 후퇴했던 경찰이 다시 낙일도에 상륙했고. 인민군은 철수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제서야 알았다. 달숙이와 나는 반가움에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는데. 아버지는 우리를 껴안고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덩달아 어머니마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나는 어른들이 왜 우는지를 몰랐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을로 돌아왔을 때에야, 나는 집안 어디에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내외도 마찬가지였다. 인민군이 철수하기 전, 빨갱이들에게 거의 온 일가족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걸 우리들은 몰랐던 것이다.
마당가에 우두커니 선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어머니는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나와 달숙은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혀 뜻 모를 울음을 따라 울었다. 그런 어느 순간. 아버지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 끌고 어디론가 급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자. 네 눈앞에서 내가 원수를 갚아 줄 텐께! 봐라. 이따가 가서 똑똑히 봐 두란 말이다. 달식아. 알았지야?
아버지의 모습이 별안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나를 쏘아보는 아버지의 눈은 빨갛게 핏발이 서 있었다. 아버지는 원수를 갚아 줄 테니 똑똑히 봐 두라는 소리만 연신 되풀이하며 나를 면사무소 마당까지 데려갔다, 잠시 후, 창고에 갇혀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남자 두 사람을 끌고 나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들을 담벼락에 세워 둔 채, 직접 자신의 총으로 쏘아 죽이는 광경을 내 눈앞에서 보여 주었다.
봐라, 달식아.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봐 둬야 해, 바로 이놈들이 빨갱이들이여. 느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죽인 철천지 원수란 말이다. 원수여 원수 빨갱이는 모조리 원수다. 알았제. 뼈를 우둑우둑 갈아 마시고 간을 꼭꼭 씹어 먹어도 분이 안 풀릴 철천지 원수 놈들이란 말이다. 알았냐, 달식아.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내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듯 잘했다.
나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선다. 그리고 장롱에서 바지와 검은색 가죽잠바를 꺼내어 입는다.
어딜 가시려고 그래요. 당신?
아내가 방안으로 들어서며 묻는다.
어디긴 어디야. 출근하는 거지. 오늘 야근이라구. 또 며칠 걸릴 지 몰라.
나는 퉁명스레 쏘아붙인다. 그녀는 말이 없다. 오늘밤부터 근무라는 걸 알고 있을 터이지만, 그래도 불만스레 입을 내밀고 있으리라는 것쯤은 굳이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다. 나는 현관으로 나와 구두를 신는다.
여보. 모레 점심때는 꼭 집에 오셔야 해요.
왜
전번에 기껏 얘기했잖았수. 목사님에서 우리 집에 심방 오시는 날이란 말예요. 이번 주엔 우리 차롄데, 당신이 없으면 큰일 아니우. 명색이 집사님 댁인데------.
참, 그랬던가. 이번 투엔 우리 집에서 예배를 보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알았어. 한 시쯤에 잠깐 빠져 나와 보던지 할게. 잘하면 일이 금방 끝날 수도 있으니깐. 나는 마당을 질러 나온다. 아빠아, 들어올 때 내 선무울.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빠.
한기와 막내딸이 마루 끝으로 달려 나와 인사를 보낸다, 나는 녀석들을 한번 힐끔 돌아보고는 집을 빠져 나온다. 한길은 제법 바람이 차다. 밤이면 기온이 뚝 떨어지는 듯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지처럼 깜깜하다.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지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마침 앞쪽에서 다가오는 빈 택시를 향해 팔을 들었다.
셋
유치장 벽 위쪽에 나 있는 창유리 위로 전등 불빛이 반사되고 있을뿐,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은 없다. 해가 진 지 왜 오래되었다는 증거다. 부질없이 나는 또 고개를 숙여 팔목시계를 들여다 본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집 앞에서 그 자들에게 끌려 온 그 시각부터 꼬박 열세 시간이 지난 셈이다. 열세 시간. 그 긴 시간을 나는 터무니없이 강탈당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직 약과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할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엉덩이가 얼얼해져 왔으므로 나는 허리를 비틀어 엉거주춤 들어올린다. 콘크리트 맨바닥은 딱딱하고 차다. 스팀 파이프가 두 군데에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실내 전체를 덥히기엔 어림도 없는 눈치다. 이럴 때 가방이라도 있었으면 그거라도 깔고 앉아 있을 텐데, 아까 취조실에서 그들은 그걸 가져가 버렸다.
여보쇼. 스탠드바 주인을 불러 달란 말요. 그 사람이 다 알고 있다니까는, 끄윽.
창살을 붙잡고 서서 사내 하나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외친다. 사내의 와이셔츠 앞자락은 허리띠 밖으로 기어 나와 있고 넥타이가 후줄근하게 풀려 있다. 누구한텐가 주먹으로 두들겨 맞은 듯 광대뼈가 퉁퉁 부어 있는데다가 코피를 흘린 흔적이 남은 걸로 보아, 아마 술집에서 싸움을 하다 끌려 온 모양이다. 사내가 다시 뭐라고 소리를 쳤지만, 저만치 출입문 옆 책상에 앉아 있는 전경들은 아예 귀를 닫은 채 둘이서 무슨 얘긴가에 열중해 있다.
유치장 안엔 나까지 모두 다섯 명이 갇혀 있다. 좀 전의 그 술취한 사내말고, 나머지 셋은 모두 갓스물이 범은 듯한 또래인데. 미루어 보건대 절도 혐의로 잡혀 온 듯싶다.
쓰발눔의 새끼, 저 혼자만 먼저 토시면 우린 어쩌라는 거야. 드런 새끼.
야, 그래도 아까 고 새끼 이름은 들먹이지 말걸 그랬어. 솔직히 그 새낀 이번 일하고는 관계가 없잖냐. 안 그래.
너, 무슨 소릴 하니. 지금 이렇게 된 게 누구 탓인데 그래.
시끄러, 임마. 이제 와서 그렇게 다퉈 봐야 뭘 할 거야. 징 치고 막 내린 거야, 쓰발,
셋은 전부 다 머리를 맞대고 연신 투덜대고 있다.
그러나저러나. 그 자들은 도대체 왜 나를 여기에 끌어다 놓고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일까.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들의 속셈을 이리저리 짐작해 보려 애쓴다. 처음 이곳에 도착하자, 그들은 일단 취조실인 듯싶은 어떤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나무 책상 한 개만 달랑 놓여 있을 뿐인 그 방안에서 나는 혼자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아무도 좀체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입술만 바작바작 태우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너 차례나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는데, 문을 열고 나가면 복도 맨 끝에 붙어 있는 그곳까지 전경 하나가 어김없이 내 곁에 꼭 붙어 다녔다.
그러다가 이윽고 한 사내가 나타났던 것이다. 회색 잠바를 입은 중키의 사내였다. 좨 큰 편인 코끝이 뭉툭해서 어딘가 둔해 뵈는 인상을 주었지만, 눈빛이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것이 은근히 기분 나쁜 삼십대 후반의 얼굴이었다, 사내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 앉았다. 처음엔 인적 사항을 묻고, 내가 대답하는 대로 종이에 적어 넣었다. 나는 내 이름과 나이, 주소, 직업, 주민등록 번호 등등을 불러 주면서도, 문득문득 내가 지금 전혀 낯모르는 타인의 인적 사항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이상한 착각이 들곤 했다 아니, 차라리 그것이 정말 나하고는 티끌만큼도 무관한 다른 사람의 것이기를 바랐다. 지금 이 을씨년스럽고 기분 나쁜 자리에 전혀 엉뚱하게도 내가 다른 사람 대신 끌려 와 있는 것이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착오였기를 나는 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씀해 주시오. 대관절 무슨 일로 이러십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인적 사항을 기입하고 나서 그걸 눈으로 다시 읽어 내려가고 있는 사내에게 그렇게 물었다. 비참하게도 내 의도와는 달리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러나 그나마도 미처 말끝을 맺지 못하고 맥없이 우물거리고 말았다. 그 뭉툭한 코가 박혀 있는 누리끼한 얼굴을 천천히 들어 리며, 사내가 나를 말없이 쏘아보았기 때문이다.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사내의 눈은 퍽 가소롭다는 식의 경멸과 오만함을 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방금 그랬오?
사내의 기세에 눌려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응?
그렇습니다, 난 도대체 ,,,,,,.
나는 우물거렸다.
어이, 지금 누구랑 농담 따먹기 하고 놀자는 거야 뭐야? 내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아? 허, 이 친구 제법 웃기고 있네.
어느 틈에 사내는 반말투로 바뀌고 있었다.
이봐 그걸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아? 이제 와서 오리발 내놓으면 통할 것 같은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사내가 칵 하고 가래침을 울궈 내더니 바닥에 탁 뱉고 나서 구둣발로 쓱쓱 문질렀다. 나는 자꾸 목이 말랐다. 숨이 가빠 오고 가슴도 답답해 왔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나는 스스로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혹시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아니 일부러 기억해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어떤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이 짧은 순간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사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따금 얼굴도 모르는 큰아버지의 모습이 소리 없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상준이가 잡혔어. 이상준이 말야. 그래도 시치미를 뗄 거야?
마침내 사내가 그렇게 말했고, 나는 잠시 멍청해지고 말았다.
이 ,,,,,,상,,,,,,준이 라구요?
이상준. 가만있자, 이상준이 누구더라. 나는 여전히 미몽 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온 시야에 자욱이 깔린 안개 속을 헤매던 나는 무엇인가에 탁 하고 발이 걸려 넘어졌다.
아, 그렇구나. 그게 그 사람 이름이었지, 맞아. 나는 불시에 뺨이라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그 친구야. 내가 왜 여태 그걸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무슨 일인가로 수배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 그랬었지. 그 친구가 잡혔구나. 결국,,,,,, 하지만, 그게 대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얘긴가. 나는 다만 일주일쯤(아니 열흘이 좀 못 되었을까) 그 사람을 우리 집에서 재워 준 일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그 일 때문에? 숨겨 주었다는?
그제서야 나는 조금은 안도했다. 그보다 더 두려운, 어떤 어마어마한 혐의가 내게 뒤집어씌워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잔뜩 겁에 질려 있었던 터였으므로, 나는 마치도 발목에 묶여 있던 무거운 쇳덩이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홀가분함마저 느꼈다.
자, 여기에 자술서를 써 봐. 단 한 가지도 숨김없이, 사실 그대로, 자세하고 정확하게 적어야 해, 되도록 많이. 알았소?
사내는 내게 여러 장의 종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자술서라곤 난생 처음이었으나, 사내가 시키는 대로 나는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로 이상준과 만나게 된 경위, 그가 우리 집에 와 있었던 기간의 일 따위를 중심으로, 기억나는 대로 적었다. 하지만 두어 시간이 걸려 그걸 다 마쳤을 때, 사내는 의외로 그것을 대충 한번 훑어보기만 하는 눈치더니. 다시 나를 이곳 유치장으로 데려다 놓고 가 버렸다.
여보세요.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언제 집에 돌려보내 주겠소?
유치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사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그랬더니 사내는 예의 그 비웃는 듯한 웃음을 입술 새로 터뜨리며 퉁명스레 대답하던 것이었다.
여기서 잠자코 기다려 보쇼. 이제 겨우 조사가 시작된 셈이니깐.
그럼 집으로 전화라도 하게 해주시오. 집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나는 창살을 움켜잡은 채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자 사내는 대답 대신, 출입구 옆에 서 있는 전경을 부르더니, 일부러 내 귀에까지 들리도록 이렇게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봐, 저 작자한텐 전화도 안 돼. 보안사범이니깐.
옛. 알았습니다
앳된 얼굴의 근무자는 내 쪽을 힐끗 쳐다보았고, 사내는 곧 문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줄곧 이렇게 갇혀 있는 꼴이었다.
입안이 깔깔하다. 소금 덩어리를 머금고 있는 것 모양 혀끝으로 쓰디쓴 물이 괴어 온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빵 한 쪽과 우유 한 봉지밖에 먹은 게 없다. 점심때, 사내들이 국밥을 시켜다 주겠노라고 했을 때 나는 대신에 빵과 우유를 원했다. 그나마도 목 안으로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저녁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밖에서 사식을 시켜 먹을 수는 있었으나, 아예 입맛이 떨어져서 도대체 쌀 한 톨 삼킬 수 있을 성싶지가 않아서였다.
지금 아내는 집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일찍 들어오라던 그녀의 야윈 얼굴이 떠오른다. 교감이 전활 하지 않았다면. 아내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내가 또 술자리에서 늦어지는 줄로만 여기고, 이따금 이마를 찌푸리며 시계를 올려다보곤 할 것이다. 딸아이는 잠이 들었을까 요즘에야 겨우 얼굴을 알아보는 듯, 아이는 나를 보면 제법 반가운 시늉으로 그 조그마한 손을 펴서 흔들어 대곤 했다. 유난히도 활달하게 움직여 대는 녀석이었다. 잠시도 얌전히 앉
아 있는 법이 없이 여기저기 무릎으로 불불 기어다니면서. 아무 것이나 손에 잡히는 건 모두 입으로 가져갔다.
아내는 날마다 아이하고 단둘이서 집에서 지내야 한다. 원래 몸이 허약한 편이기도 하지만, 온종일 아이의 뒤를 쫓아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일이 힘에 겨운지 요즘 들어 얼굴이 많이 야윈 듯싶다. 핼쑥한 얼굴로 시계를 초조하게 올려다보는 아내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떠오른다. 아이가 울고 있다. 아직 돌도 채 안 된 내 아이가 다급하게 울음을 터뜨리며 보채고 있다.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아이의 울음소리가 영락없이 귓전으로 들려 오는 것 같아서 나는 가슴이 터져 버릴 듯하다. 이럴 수가 있는가, 적어도 가족에게만은 내 거처를 알려 줘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영장도 없이 사람을 멋대로 감금해 놓고,,,,,, 정말이지 이건 말도 되지 않는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쭈그려 앉은 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는다. 불현듯 견디기 어려운 피로가 일시에 전신을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아내가 기다릴 텐데. 늦어도 열두 시가 되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전화라도 해주어야 할 텐데,,,,,, 나는 온몸이 모래 구덩이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드는 듯한 심한 졸음기를 느끼며, 한사코 그런 저런 생각들의 꼬리를 붙잡으려 애쓴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기섭. 오기섭이 누구야.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퍼뜩 고개를 든다.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유치장 창살 밖에서 전경 근무자가 서 있다.
예, 나요.
나는 얼결에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간다. 전경이 문을 따 주었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따라오쇼.
전경은 짧게 한마디 내뱉더니 출입문 쪽으로 걸어 나간다.
어딜 가는 거요. 집으로 보내 주는 겁니까, 예?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며 물었지만. 상대는 대꾸가 없다. 짧은 순간, 나는 이제야 겨우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게 아닐까 하고 가슴을 졸인다. 그러면 그렇지. 그까짓 일로 더 이상 이렇게 잡아 둘 필요까지야 있을라구. 나는 제법 확신에 차서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출입문을 지나 복도로 나왔을 때 나는 그것이 얼마나 당치도 않은 계잔이었는가를 깨닫는다. 복도에 두 사내가 서 있다. 아침에 나를 끌고 왔던 바로 그 자들이다. 온몸의 힘이 일시에 빠져
나가는 허탈감에 무릎이 휘청거려 온다.
철컥 사내들이 내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양쪽에서 내 겨드랑이를 움켜잡고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간다. 텅 빈 복도 천장엔 몇 개의 형광등이 길게 붙박혀 있을 뿐이다. 복도 끝 출구 바로 앞에 회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다.
들어가. 반항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사내 하나가 문을 열고 나를 뒷자리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한다. 사내들은 앞자리와 내 옆자리에 각각 앉는다. 이윽고 차가 발동을 걸고 움직이기 시작할 즈음, 옆자리의 사내가 돌연 손바닥으로 내 목을 짓누르며 낮게 말한다.
머리 숙여!
나는 엉겁결에 앞으로 허리를 굽힌다. 사내는 내 이마가 무릎에 거의 닿을 지경이 되기까지 대단한 힘으로 뒷목을 짓눌러 댄다.
그리고 나서 내 바바리 코트 자락을 뒤에서부터 훌렁 걷어 올리더니, 그걸로 내 머리끝까지 온통 감싸 버린다. 자연히 나는 자루를 거꾸로 뒤집어쓴 채 엎드린 꼴이 된 셈이다. 눈을 떠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둡다. 이렇게 간단하게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렇다, 알고 보면 어느 한 사람의 목숨쯤이야 참으로 손쉽고도 간단하게 해치워 버릴 수 있는, 그렇듯 소름 끼치는 야만과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막상 그걸 까맣게 모르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기로 한다.
가슴이 쿵쿵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이대로 소리 없이 죽게 되는 건 아닌가.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는 기회는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자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힘껏 쥐어박은 다음,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뜨리고는 사람 살리라고 고래 고래 비명을 지른다면 행인들이 듣고 뛰어오겠지. 그렇지만 결국은 다시 붙잡히고 말 것이다 이 자들은 신분증을 내보일 테고, 나는 그 즉시 압송 중에 탈주하려던 흉악범쯤으로 치부되어질 게 뻔하다. 사람들은 으레껏 이 자들의 신분증을 곧 법이라고 여겨 버리고 말 테니까. 아아, 그거야말로 얼마나 위험하고 무책임한 방임인가. 나는 미칠 듯 분개한다. 하지만 사실 나 역시 지금껏 늘상 그래 왔었음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온갖 신문과 방송을 통해 매일 매일 헤아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크고 작은 사건과 사건들,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낯선 사람들에 관한 보도 따위에 나는 거 의 귀를 기울여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것들이란 나하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라고 여겨 버린 채, 그저 무심히. 너무도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나 자신이 바로 그 하찮고 대수롭지 않게만 여겼던 사건들 중의 하나에 억울하게 끌려들어온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하찮고 흔해 빠진 것일 뿐인, 그래서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고 눈길 한번 돌려 주지 않는 그런 사소한 사건 속으로 말이다. 아아, 이거야말로 어떻게 된 일인가......
나는 엎드린 채 그런 저런 생각을 한다. 무릎이 떨고 있다. 그것이 내 몸의 일부라는 게 얼핏 믿어지지 않는다. 그 동안에도 차는 어디론가를 향해 꾸준히 달리고 있다. 번잡한 시가지의 어디쯤을 통과하는 중인지, 수많은 자동차의 경적 소리, 엔진음, 그리고 거리의 갖가지 소음들이 들려 온다. 이따금 잠이 정지했다가 다시 움직이기도 하는데, 아마 신호등 때문일 것이다.
자네, 오늘도 야근인가?
앞자리 사내의 음성 같다.
예, 오늘 같은 날은 참말 지겹구만요. 아까 오후엔 또 병원엘 갔다 왔어요.
병원? 아니, 왜.
마누라쟁이가 입원을 했지 뭡니까. 젠장맞을. 몸살감기에 입원까지 다 하구. 꼴에 참, 호강에 빠졌지. 쯧.
몸살감기야?
그렇다니까요. 다 뒈져 간다고 어찌나 엄살을 떠는지 나는 팔자에도 없는 새끼 하나 또 까 내는 줄 알았다니까요.
흐흐. 엄살이 아냐. 이 사람아. 요즘 독감은 그렇게 지독하다는구만. 우리 박 과장님도 그것 땜에 이틀이나 결근했었다구, 전번에. 그게 아주 사람 죽인다더라니깐. 뭐, 독감주의본간 그런 게 다 내렸다지 아마.
맞아요. 그런 모양입니다. 아주 지독하다던데요.
조심해야지, 한 사람이 걸리면 온 집안 식구가 다 앓는다구.
그게 큰일예요. 우리 막내 놈은 몸이 너무 약해서 말입니다.
막내? 유치원에 다니는 놈?
아뇨. 올해 국민학굘 들어갔죠. 그런데 그저 맨날 코피만 줄줄 흘리고 다닌다니까요.
코피가 잘 터지면, 그게 문젠데. 애들이 가끔 그럴 수가 있긴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 담에 커서도 약질 면하기가 어렵다구 우리 큰놈이 그랬으니깐.
그랬어요? 전 번에 보니까 몸이 건강해 뵈던데요
건강하긴 뭘. 그놈 밑으로 인삼 녹용 사다 바치느라고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몰라.
그래요? 우리 애도 인삼하고 녹용을 먹여야 할까 모르겠는걸.
내들은 참으로 태연스레 그런 얘기를 지껄이고 있다. 나는 버스 속이나 술집에 앉아 옆자리로부터 들려 오는 낯모르는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내 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거리감을 문득 깨달았고, 다시 아득한 절망감과 숨막힐 듯한 공포에 짓눌린 채 허우적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반시간쯤 달렸을까. 갑자기 차체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비포장도로인 모양이다. 대관절 어디로 가는 걸까. 지난 해, 우리 반 아이들을 데리고 가을 소풍을 갔던 비포장도로가 떠오른다. 부옇게 피어오르던 먼지며 형편없이 고르지 못한 노면, 길가엔 코스모스들이 밀가루 같은 마른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쓴 채 늘어서 있었다, 비탈진 언덕길을 돌아 오르자, 돌연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도 나타나던 저수지의 파아란 수면, 금방이라도 까마득히 곤두박질쳐 떨어져 내릴 듯한 두려움에 지레 현기증이 일었었다. 지금 이 차는 그런 낭떠러지 위를 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낭떠러지 위에 다다르면 차를 세운 다음 나를 끌어내려 놓고 등뒤에서.....,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천길 벼랑에서 떨어져 내리는 나 자신의 몸뚱이가 마비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또렷하게 비쳐온다. 어느새 등허리에 진땀이 질펀하니 배어 있다.
얼마 후, 심하게 몸체를 떨어 대며 달리던 차가 이윽고 정지한다.
다 왔어. 내려.
사내의 손이 내 어깨를 잡아끈다. 그들은 아까처럼 내 양쪽 겨드랑이를 붙잡았다. 뜻밖에 발바닥의 감촉이 푹신하다. 잔디밭인 모양이다. 어디일까, 왠지 공기의 느낌이 다르다. 어쩌면 교외의 야산 기슭이거나 나무숲 속인지도 모른다. 바바리 코트를 거꾸로 뒤집어쓴 채 나는 그들이 끄는 대로 더듬더듬 발을 옮기기 시작한다. 자갈 같은 것이 발에 밟히더니, 이내 사내들이 내 걸음을 멈춰 세운다. 딩동 딩동 딩동.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이다, 이윽고 덜커덩,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 육중한 철대문 같다. 다시금 등뒤에서 문이 닫히고, 대여섯 걸음을 더 옮겼다.
여기서부터 오르는 계단이야. 일곱 계단.
사내 하나가 내게 말한다. 하나 둘 셋,,,,,, 일곱. 두어 번 발부리가 걸려 비칠거리긴 했으나 사내들의 팔이 균형을 잡아 주었다.
다시 또 잔디밭이 분명한 땅을 지나자 콘크리트 바닥이 나왔고, 또 다른 철문이 끼익 열리는 기척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훅 끼쳐 오는 훈훈한 공기. 분명 어느 단독주택의 실내인 모양이다. 라디오 소리, 아니, 텔레비전인 듯싶다. 사내들은 아직도 내 머리에서 코트를 치우지 않는다, 한쪽 사내의 손바닥은 여전히 내 귓머리를 앞쪽을 향해 짓눌러 대고 있다.
어디로 데려가지?
백일호실로 데려가십시오. 최 과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또 다른 사내의 음성이 들린다. 처음 듣는 목소리다.
최 과장? 아, 최달식 과장님 말이지.
사내들이 다시 팔을 끌고 간다. 와르르르르 느닷없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수많은 여자들의 웃음소리 어떠세요, 김 박사님. 지금 한 주부께서 무척 흥미 있는 질문을 해 오셨는데, 정말 생리학상으로 여성의 눈물샘이 남성의 그것에 비해 훨씬 떠 발달해 있다는 설이 맞는 겁니까. 아주 새로운 학설 같은데요. 그렇게 묻는 남자 목소리에 이어 또 와그르르 터지는 웃음소리. 그제서야 나는 그것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일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한다.
여기서부터는 내려가는 계단이야.
이번엔 사내가 층계 수효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넷,,,,,, 아홉. 그리고 나서 왼쪽으로 돌더니, 다시 또 다른 아홉 개의 계단을 내려선다. 지하실인 모양이다. 덜컹. 철문이 열린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듯한 누군가와 짧게 몇 마디 나누더니 사내들은 몇 걸음을 더 걸어 나간다. 그리고 또 다른 문(이번엔 약간 작은 문 같다)을 열더니, 나를 안으로 밀어 넣는다. 마침내 겨드랑이를 움켜잡고 있던 사내들의 손이 빠져나간다.
"일어섯?“
나는 겨우 허리를 펴고 선다. 바바리 코트 자락이 획 벗겨져 내린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한다. 이, 이럴 수가,,,,,,! 이건 악몽이야. 난 지금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어. 나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버린 채 한동안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다. 피의 지옥, 맨 처음 뇌리 속에 떠오른 느낌은 바로 그랬다. 나는 마주하고 서 있는 그 풍경을 차마 현실로 인정하기가 어렵다. 붉은 방. 사면 벽과 천장까지가 온통 시뻘건 선지피 빛깔의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것이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뭉크의 그림. 화면 전체가 한꺼번에 무서운 속도로 불에 녹아들고 있는 것처럼 기괴하게 뒤틀리고 있는 속에서. 역시 똑같이 뒤틀리고 일그러진 해골 같은 사내 하나가 두 손으로 게 귀를 틀어막은 채 무어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림 말이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어디선가 단말마의 비명이 우렁우렁 고막을 떨게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내일까. 뭉크의 그림 속 그 사내가 온몸에 피를 뚝뚝 흘리며 이 방을 찾아 들어와 벽과 천장을 온통 저렇게 피칠갑을 해 놓은 것일까. 나는 한순간 사람의 고기를 통째로 솥에 삶는다는 괴물의 집이라든가 피의 지옥 그리고 흡혈귀들의 소굴 따위와 같은. 어린 시절의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상상들까지 엉뚱하게 떠올렸다. 이건 틀림없이 미친 자의 짓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정신을 가진 어느 누가 이런 구역질나는 짓을 행여 생각이라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고 단순한 방을 내가 이렇게 소름 끼치는 붉은 빛깔의 방으로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몰라. 나는 그만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어진다. 그 기괴한 빛깔로 채색된 방안에선 더 이상 견뎌 낼 자신이 없다. 이것은 광기야. 미치광이의 장난이 틀림없어.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문 쪽을 향해 비칠비칠 뒷걸음질을 친다.
어딜 가, 그대로 있어!
순간 그 붉은 피의 늪 저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아온다. 쇳소리가 섞인 차갑고 단단한 목소리. 나는 멈칫 선다. 그때까지 나는 방안에 나 혼자만 있는 줄로 알았던 까닭이다. 어딘가. 어디에서 이 소리가 들리는 것인가. 나는 흘린 듯, 몽롱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거기. 한 사내가 책상 앞에 소리 없이 앉아 있다. 붉은 벽을 배경으로 한 채, 검은 가죽잠바를 걸친 사내의 얼굴이 석고처럼 유난히 하얗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지금껏 저 사내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사내는 책상 모서리에 팔꿈치를 세운 채 두 손을 맞잡고 조용히 앉아 있다. 그 사내에게서 풍겨 오는 어떤 섬뜩한 이질감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며 나는 무심코 후두둑 몸을 떤다.
거기, 그 자리에 앉아!
다시 사내의 싸늘한 음성이 붉은 방 안을 울린다, 나는 주춤주춤 방안을 살펴본다. 얼핏 무슨 호텔 방과 비슷한 구조이다, 한켠에 나무 침대가 있고. 맞은편 벽 가까이 욕조와 양변기가 설치되어 있다. 변기와 침대 사이엔 그리 크지 않은 목재 가리개 하나가 형식적으로 세워져 있다. 그리고 사내가 지금 앉아 있는 책상 앞에 의자가 셋, 천장에 붙은 형광등 둘 그것이 방안에 있는 집기의 전부인 듯싶다. 나는 침대 쪽으로 주춤주춤 다가간다,
아니. 거기 말고.
---?
침대 앞에서 나는 엉거주춤 사내 쪽을 돌아다보았다.
바닥에 꿇어앉아! 내 말 안 들려?
당혹과 굴욕감에 언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사는 안간힘을 쓰듯 겨우 사내를 쏘아본다.
앉아!
사내는 여전히 데드마스크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반복한다. 나는 입술을 떨며 간신히 용기를 내어 발음한다
못하겠소. 내가 왜,,,,,,
꿀꺽. 마른침을 넘기느라 말끝이 잘라졌다.
이 새끼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사내가 으르렁거리듯 말한다. 그러더니 별안간 깩 호통을 친다,
야! 이리 들어왓!
그런자 출입구가 덜컹 열리더니 네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방안으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첫눈에도 그들은 모두 무쇠로 만든 로봇처럼 다부지고 강해 보이는 체구들이다. 그중 하나는 야구 방망이보다 약간 작은 몽둥이를 들고 있다. 이 새끼가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다, 이거로구만. 옷 벗어! 그중 하나가 명령한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기 시작한다. 코트를 벗고, 양복 저고리를 벗는다. 손끝이 너무 떨려 쉽사리 단추를 찾아내지 못한다.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를, 그리고 바지마저 벗고 나니 이젠 내복 차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조차 벗기를 요구했다. 결국 나는 단 한 장의 팬티말고는 아무 것도 가린 것이 없는 알몸뚱이가 되고 말았다.
꿇어앉아!
나는 선 채로 그들을 쏘아본다. 수치심과 노여움 그리고 까닭 모를 슬픔으로 뒤범벅이 되어 눈물이 핑글 돎을 느낀다. 벌써 무릎을 덜덜 떨고 있다.
이 짜식 좀 봐라!
순간 발길이 날아왔고, 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개구리처럼 아무렇게나 쓰러진다. 이내 내 몸뚱이 위로 다투어 덮쳐 오는 사내들 무수히 쏟아지는 발길질과 주먹 그리고 몽둥이,,,.,, 등허리와 허벅지, 옆구리. 엉덩이 할 것 없이 몽둥이가 떨어져 내릴 때마다 나는 컥컥 숨이 막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욱욱, 신음만 터뜨리며 내 육신 위로 쏟아져 내리는 사내들의 체중을 고스란히 받고 있어야 할뿐이다.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짐승 같은 기묘한 괴성과 욕설------그렇게 온 몸뚱이가 조각조각 부서져 내지는 고통을 확인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허리, 옆구리, 가슴, 목, 팔, 머리, 무릎, 허벅지, 등, 어깨. 장딴지-----내 몸의 모든 관절이란 관절, 살점이란 살점들이 모조리 해체되어 가고 있다. 아아, 숨이, 숨이 막혀 온다. 가슴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그만, 제발 그만...... 그만 해.
넷
가소로운 녀석. 제까짓 게 뻗대어 봐야 얼마나 견딜 것 같애? 나는 눈을 지그시 뜨고, 빙긋이 웃음을 흘리며, 녀석의 얼굴이 금방 흙빛으로 변해 가고 있음을 지켜본다. 알몸뚱이로 뒹굴며 고통스러워하는 꼬락서니가 천박해 보이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짜아식. 피골이 상접한 녀석이 버틸 게 뭐 있다구, 쯔쯧. 하기야 이런 녀석들은 으레 그렇다. 이 방에 데려다 놓으면 대개는 처음부터 기가 팍 죽게 마련인데, 그래도 제법 뻣뻣하게 튀기는 치들도 있는 것이다, 영장을 제시해라. 후회할 것이다. 법정에서 따지겠으니 각오해라 - 어쩌고 하면서 제깐엔 간덩이 부은 시늉을 해 보이기도 하지만, 츳, 웃기지 마라, 그래 봐야 오 분도 못 되어서 제 꼬락서니가 어떻게 되는지,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절실히 깨닫게 될 테니까 말이다.
나는 인적 사항이 적힌 종이를 대충 훑어본다. 오기섭. 흐음. 고등학교 선생이시라. 어, 본적이 약산도잖아. 호오. 이거 재미있는 일인데. 약산도 미황리가 어디더라. 칠산리나 명사리라면 나도 가본 적이 있는데, 미황리는 잘 모르겠군 하여간, 이거 부쩍 구미가 당긴다. 약산도라면 잘 안다. 내 고향 낙일도와는 이웃한 섬이기 때문이다. 해진항에서 연락선을 타고 가면 낙일도 바로 전에 닿는 섬이다. 낙일도보다도 작지만, 그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약산은 인근 섬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산은 골짜기가 깊고 숲이 무성해서, 예전엔 낙일도 사람들도 배를 타고 건너가서 땔감을 해 오곤 했었다. 나 역시 두어 번 거길 가 본 기억이 있다. 빽빽하게 우거진 동백나무숲이 무척 볼 만했었다.
제발,,,,,, 그만 해. 그만 해요. 제에발.
녀석의 입에서 마침내 그런 다급한 소리가 기어 나온다. 이 친구는 별로 시끄럽게 굴지는 않는 편이다. 퍽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먹이 날고, 살점이 짓뭉개지도록 구둣발로 지근지근 짓밟아 댈 때마다 욱욱 하는 낮은 신음 소리만을 내지를 뿐, 다근 놈들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깩깩 비명을 질러 댄다거나 엄살을 피운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런 부류일수록 오히려 다루기가 쉽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제깐엔 제법 깡다구라도 있는 양, 처
음엔 이빨 앙다물고 버티는 녀석들일수록 한번 기를 꺾어 놓으면 그 이후엔 술술 털어놓게 마련이다. 오히려 살살 기면서 엄살을 떨고 금방 죽는 시늉을 하는 부류들 중엔 겉으론 순순히 말을 잘 듣는 체하면서도 속으로 한 자락 깔아 놓고 슬슬 딴청을 부리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런 교활한 녀석들은 으레 머리가 비상한 편이어서, 다루려면 여간 골치깨나 썩이는 게 아니다.
어쨌든 이 녀석도 대학까지 나오고, 더구나 분필 가루 먹고 사는 작자이니 머리 회전은 빠를 테지. 그래 봤자 제까짓 게 얼마나 견디랴만, 그래도 아직은 제법이다, 이 정도 손을 봐 놓으면 뭔가 기별이 올 텐데 말이다. 바닥에 개구리 모양 발랑 뒤집힌 채 몸을 꼼지락대며 죽는 시늉을 하면서도, 살려 달라는 소릴 안하고 있다.
그만, 제발 그만두시오. 도대체 왜,,,,,, 으윽, , ,, 왜, 날,,,,,, 끅 아이구우.
녀석이 머리통을 싸쥔 채 바닥을 구른다.
뭐. 왜라니? 이 짜식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만. 여기가 어딘 줄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살려 달라고 싹싹 빌 때까지 계속해!
나는 차갑게 명령한다, 다시 부하들의 활발한 몸놀림. 그들은 이 분야에선 닳고 닳은 베테랑들이다.
아악. 사, 살려 주시오,,,,,, 그만, 그만, 사람 살려,,,,,, 주, 주시오. 제발.
드디어 녀석의 입에서 살려 달라는 소리가 나온다. 좋아. 그쯤 해 둬. 자네들은 올라가서 바둑이나 두고 있으라구. 나는 못 이기는 척 부하들을 만류하며 의자에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다, 부하들은 옷을 털며 방을 빠져나간다. 이제 이 붉은 방 안에 남은 건 우리 둘뿐이다.
이봐요, 오 선생 세상 일은 순리대로 풀어 가는 게 상책이지. 이쯤 되었으니 여기가 어딘 줄은 알았을 테고,,,,,, 이제 남은 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를 당신이 결정하는 것뿐이라구.
나는 담배를 꺼내어 작자에게 내민다. 작자는 잠시 멍하니 내려다볼 뿐 그걸 집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작자의 흐린 시선이 썩은 생선의 그것 모양 맥없이 풀려 있다. 나는 그 중 한 개비를 뽑아 그의 입에 물려 준 다음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 준다. 그리고는 나도 하나를 문다. 녀석도 비로소 연기를 두어 모금 뻐끔거리기 시작한다.
오 선생. 설마, 여기에 와 있는 이유를 모른다고는 않겠지.
나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른 채 그를 내려다보며 묻는다.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까닭에 그 자의 얼굴은 바로 내 무릎 가까이에 와 있다.
죄. 죄라뇨,,,,,,.
녀석의 입술이 가늘게 떨고 있음을 나는 본다. 겁에 잔뜩 질려 있다는 표시이다. 이럴 땐 앞뒤 잴 것도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몰아붙여야 한다.
다 알고 있어. 당신, 사회주의자지. 그렇지?
예?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난 사회주의가 뭣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역시 녀석이 제법 당차게 부인한다. 건방진 녀석, 그래도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겁에 막 질려 있음이 역력하다,
허. 이 친구. 보기보다는 되게 머리가 안 돌아가누만. 순순히 말로 할 때 자백해.
정말입니다. 자백할 게 있어야 털어놓을 것 아닙니까.
증말, 꼭 이럴 거야?
믿어 주시오. 제발, 이건 정말입니다. 난 아무 것도 몰라요. 도대체 왜 이러는지조차 모르겠소.
녀석이 손으로 와락 내 무릎을 움켜 쥔다.
몰라? 아무 것도 모른다구?
나는 신고 있던 내 운동화 한 짝을 벗어 들고 다짜고짜 녀석의 뺨을 짝, 짝 소리가 나게 힘껏 두 번 갈겨 준다. 시건방진 놈들의 콧대를 꺾는 데는 이런 방법이 가장 좋은 특효약임을 나는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있다. 으윽, 하는 신음 소리를 토하며, 녀석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모로 고꾸라진다.
이 새끼! 일어낫! 어서!
녀석이 볼따구니를 싸쥐며 이쪽을 힐끔 노려보는 것 같다. 순간 나는 머릿속의 피가 한꺼번에 거꾸로 치솟음을 느낀다. 그리고 놈을 닥치는 대로 발로 차고 짓밟고 또 주먹으로 패기 시작한다. 으아아. 아이구우. 놈이 다 죽어 가는 시늉으로 엄살을 떨면서, 모로 쓰러지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뒤로 자빠지고, 그러다가는 이내 버러지 모양 바닥에서 뒹굴어 댄다. 믿어 달라구? 홍. 가소로운 놈 같으니라구. 네놈들 입에 붙은 말이야 항상 그렇지. 교활한 자식들. 믿어 달라구? 누가, 누굴? 가소로운 놈. 내게도 그럴 술수가 통할 것 같나?
---달식아 봐라.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봐 두란 말이다. 이 빨갱이 놈들이 느그 할아버지 할머니를 죽인 원수여, 철천지 원수라니께. 아버지는 면사무소 마당에 피투성이가 되어 나자빠져 있는 두 사내 곁으로 나를 끌고 갔다. 싫어라우. 무서, 무서워라우. 나는 마구 발버둥을 쳤지만 아버지는 엄청난 힘으로 내 몸뚱이를 번쩍 안아 들어 올리더니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봐, 보란 말이다. 빨갱이는 모조리 원수들이다이. 이놈들은 우리 철천지 원수들잉께, 아주 이 세상에서 씨를 말려 버려야 한다이. 알았냐. 달식아. 아버지는 내 턱을 손으로 잡아당겨서 그 무서운 시체들을 억지로 보게 했다. 눈을 떠라, 이 자식, 뭐가 무서우냐. 눈을 감으면 원수들을 보지 못하는 법이여. 그리 겁이 많으면 빨갱이를 어떻게 때려 잡으려고 그러냐. 봐라. 어서! 나는 간신히 눈을 떴다. 죽어 누워 있는 사내들 중 하나는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이따금 놀러가 본 적이 있는 재 너머 마을 한씨 집의 머슴이었다. 우리는 그를 용술이 아저씨라고 불렀다. 언젠가 논둑에서 나한테 삘기를 뽑아 주기도 하고. 보릿대를 깨물어 피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던 아저씨였다. 그 용술이 아저씨의 넓은 가슴팍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벌컥벌컥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그 곁에 모로 쓰러져 누운 사내의 가슴과 목에서도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너무도 곱고 빨간 빛깔에 눈이 부셨다. 그렇게 선연하게 붉은 빛깔을 나는 그날 처음으로 보았다.
녀석은 넋이 반쯤 달아난 표정으로, 벌거숭이가 된 채 바닥에 나자빠져 있다. 등허리며 허벅지에 군데군데 살집이 멍들고 부풀어오른 흔적이 보인다. 앙상한 어깻죽지를 축 늘어뜨린 꼴이 좀 처량하기도 하다. 짜아식, 그러기에 내가 뭐랬었나. 순순히 불면 모든 게 쉬울 텐데, 허튼 수를 부리니깐 그렇잖은가. 나는 핏빛으로 단장된 사면의 벽과 천장을 휘둘러보며 코웃음을 친다.
자, 일어서. 저쪽 침대에 가서 앉아도 좋아,
나는 짐짓 긴장을 풀며 말한다. 하지만 녀석은 일어설 기력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움직이질 않는다. 내가 다가가서 일으키려고 팔목을 쥐는 순간, 녀석은 반사적으로 몸을 흠칫 사리더니. 겁에 질려 부르르 몸을 떨어 댄다, 솔직히 이럴 땐 나도 모르게 조금은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제 그런 풋내 나는 소심증 따위야 떨쳐 버린 지 오래다. 그 따위 값싼 감상은 젖 덜 떨어진 신참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이건 엄연히 하나의 전쟁이다. 말하자면 피차 속고 속이는 치열한 싸움판인 셈이다. 싸움판에 인정은 가당찮다, 죽느냐 죽이느냐,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뿐이다. 내가 당하지 않으려면 상대를 속여야 한다. 아차 하다간 되레 내 쪽이 속아 넘어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심문이고 수사고 없이 저쪽의 장단에 맞추어 개나발 불고 곱사춤 추는 격이 되고 만다. 더구나 이런 작자들은 시시한 일반 잡범 나부랭이들하고는 해골 돌리는 것부터가 다르다, 대부분 대학물도 먹고 책깨나 읽었답시고 주둥아리만 살아 나불거리는 치들인데, 어쨌거나 해골 속에 주워담은 건 적잖아서 호락호락 넘어가질 않는다. 어쩌다가 그 자들의 이런저런 말장난과 그럴싸한 변명에 귀를 솔깃해 주는 눈치만 보였다 하면. 아예 이쪽을 떡 주무르듯 가지고 놀려고 드는 놈들이다. 사사건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썰을 풀어서 은근히 부아통을 건드리기도 하고, 대학 문턱 구경도 못한 나 같은 놈 의 자존심을 은근슬쩍 깔아 뭉개려는 자식들도 얼마나 많던가.
(절대로 믿어선 안 된다. 아주도 믿지 말아라. 인간이란 건 원래가 그런 교활하고 더러운 족속이니라. 너나없이 얼굴엔 가면을 쓰고, 타인을 속이기 위해 한시도 쉴 틈 없이 눈알을 굴리고 있는 게 바로 인간이란 짐승이다. 더더구나 머리에 빨갱이 사상을 담고 있는 놈들은 절대로 호락호락 상대해선 안 된다.)
바로 이것이 내 인생의 신조라고 해도 좋다. 사실 그건 내 아버지의 말이기도 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시골 지서장을 끝으로 옷을 벗은 아버지가 노상 입에 붙여 놓고 되뇌곤 하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에 아버지는 내게 그와 비슷한 얘기를 해주었었다. 두 명의 마을 사람들을 면사무소 앞마당에서 직접 자신이 권총으로 처형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봐라. 달식아. 네 원수놈들이다, 느그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큰집과 작은집 어른들의 원수를 갚았단 말이다. 자, 빨갱이들은 모조리 우리 원수이니라, 똑똑히 기억해라. 아암, 빨갱이들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놈도 살려 두어선 안 되는 거여. 그놈들은 악마다. 성경에 나오는 사탄이 바로 그놈들이란 말이다이. 악마는 표식이 없느니라.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모른다이. 그러니께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여. 알았냐. 달식아.
독실한 신자였던 아버지는 술 취한 사람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나와 그 끔찍한 빨갱이들의 시체들을 번갈아 내려다보며 외쳤다. 그러더니 문득 내 눈앞에 자신의 피 묻은 손바닥을 활짝 펴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원수의 몸에서 묻어 나온 피였다.
난 무서웠지만 울진 않았다. 울 수도 없었다, 이젠 어른이 되어도 영영 울어서는 안 되리라는 걸, 아니 절대로 울 수 없게 되리 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온통 피투성이로 우리들의 발 밑에 쓰러져 숨을 거두어 가고 있는 그 두 개의 추악한 살덩이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아버지의 손이 내려와 내 손을 조용히 찾아 쥐었다. 피에 젖은 아버지의 손은 끈적거렸다. 내 작은 손바닥과 손등으로 흥건하게 젖어 오는 끈끈한 피의 감촉, 그리고 미지근하면서도 비릿한 피의 냄새를 나는 또렷하게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앞에서 온 세상은 소리 없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늘, 땅, 나무, 꽃. 면사무소. 학교....., 그 모두에게로 그 선연한 핏물이 눈앞에 서 붉게 붉게 번져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준일 맨 처음 만난 게 언제야?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볼펜과 종이를 꺼내며 묻는다.
가을. 지난 가을입니다.
가을 언제. 정확히 대.
그때가....., 그러니까,,,,, 시월 중순이었든가,,,,,아마
시윌 십삼일. 토요일야. 그렇지?
아, 예. 그럴 겁니다.
어디서 만났지?
녀석은 얼핏 머뭇거리는 기색이다.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수작일 게다.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좋을 거야. 이상준인 벌써 여기 잡혀 와 있어. 맞은편 방에 말야. 더 말해 줄까? 서정민이도 모셔 왔지. 이미 며칠 전에 모두 털어놨으니까, 남은 건 당신뿐야. 헛소리해 봐야 내가 손바닥에 놓고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깐, 알아서 해.
녀석의 눈동자가 얼핏 커졌다가 작아진다. 꽤 놀란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자, 다시 시작하자구. 어디서 만났느냐니까.
그러니까, 그게 토요일 오후였는데,,,,,, 다방에서. 저, 송죽다방에서 서정민이하고 만나기로 약속을 해서,,,,,, 그래서 나갔습니다.
거기서 서정민이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만날 사람이 있으니, 잠깐 어디로 가서 얘기하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뿐입니다. 그게 전부예요. 난 모릅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이상준이란 사람이 확실히 누구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는 처지입니다.
거짓말! 또 사기 치려 하고 있어. 이봐 당신, 그렇게 안 봤는데, 안 되겠구만.
저, 정말입니다, 서정민 그 친구가 하도 도와줘야 한다고 부탁을 하길래,,,,,
서정민과는 어떻게 사귄 친구야?
군대 동깁니다. 훈련소에서 처음 만났는데, 부대 배치도 함께 받았죠. 삼 년 동안 한 중대에서 지냈고, 그래서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죠. 제대 후에도 이따금 만나서 술도 마시고,,,,,, 뭐 그랬습니다.
서정민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하는 일이 뭔 줄이나 알고 있어?
나는 녀석이 썼다는 자술서를 건성으로 훑어보며 묻는다.
글쎄요. 확실히는 나도 모릅니다. 무슨 사회운동 비슷한 걸 한다고, 그렇게 말하더군요. 말하자면, 확실한 직장 같은 건 따로 없는 것 같았지요. 기독교 계통의 사회단체인가 어디에서 일을 보고 있다고 했는데,,,,,, 참, 야학도 하고 신문도 만들고,,,,,, 뭐, 대강 그런 정도로 얘길 들었을 뿐입니다,
녀석은 하나마나한 소리만 지껄이고 있다. 그런 따윈 우리도 빤히 아는 일이다. 이게, 애 녀석들 교무실에 데려다 놓고 가정환경 조사서 같은 걸 작성하고 있는 줄로 아는 건가, 츳. 하지만 놈은 연신 더듬거리며 빤한 소리들만 주절주절 외어 댄다. 이게 능청을 떠는 건가. 겉으로 봐선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 같기도 한데,,,,,, 그렇지만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 완벽한 확신이 들 때 까지 수없이 확인하오 또 검토해 보아야 한다. 하긴 이 녀석이 정말로 숙맥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이 친구 정도는 처음부터 별로 기대할 게 없었으니까. 그래도 혹시 뜻밖에 큰 걸 캐낼 수 있을까 해서 데려온 것뿐이다. 아니면. 이상준과 서정민이 저리 악착같이 부인을 하며 버티고 있는 참이니, 이 작자를 족쳐서 차근차근히 각본을 엮어 갈 수도 있는 일이다.31)
아이구 아악, 아버지이---
앞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 온다. 그쪽은 또 시작인 모양이다. 으윽, 아이구우. 사람 살리시요오. 서정민이다. 어지간히 시끄럽고 골치 아픈 녀석인 듯싶다. 쿵쿵 무엇인가를 바닥에 굴려 대는 듯한 소리가 나기도 하고, 무언가 둔탁하게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도 들린다. 나는 얼른 내 앞에 앉은 녀석의 표정을 흥미 있게 염탐한다. 녀석은 분명히 겁에 잔뜩 질려 있다 눈알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벽을 통해 비명과 고함 소리가 들려 올 때마다 가느다랗게 몸을 떨고 있다,
불안한가, 오 선생?
예? 뭐라고요,,,,,,.
녀석이 멀거니 나를 쳐다본다. 겁먹은 눈빛이 흡사 비 맞은 강아지 꼴이다. 비에 흠씬 젖어 털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채 가죽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런 강아지 말이다.
언젠가 우리 집에 그런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었다, 갈색 털이 길게 너불대는 놈이었는데, 이름은 잊었지만 외국 종자였다. 이민간 친척에게서 여편네가 얻어 왔었는데, 나는 그놈을 처음 보자마자 발길로 배를 한 방 걷어차 주고는 당장 내다 버리라고 악을 썼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아이들은 저희들이 걷어차이기라도 한양 금방 숨이 넘어가게 울어 대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아빤 나빠! 아빤 미워! 이젠 우리 아빠 아냐! 특히나 죽은 내 아들 한수, 그 녀석은 그 강아질 좋아했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개새낄 방안에까지 끌고 들어와 함께 먹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언젠가는 내게 눈알이 튀어나을 만큼 혼이 만 일도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내 눈앞에서는 그 강아질 숨기려고 애를 쓰는 눈치였다...
어쨌든, 그 강아진 삼 년이 넘도록 우리 집에 붙어 있었다. 한수가 죽고 나자 이내 어디론가 집을 나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아내는 차라리 그 개새끼가 집을 잘 나가 주었다고 말했다. 차라리 없어지길 잘했죠. 그걸 보고 있으면 공연히 한수 불쌍한 그 아이만 생각이 더 나고......
불안하겠지, 어때? 그렇지? 이젠 여기가 어딘 줄 알 거야. 저건 약과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도 아무런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곳이라구. 공연히 잔머리 굴리며 버티려 하다가는 뼈마디가 어디 한 군데 성해서 나가기는 틀렸어. 알아들어?
녀석은 말이 없다. 이쪽을 한번 슬쩍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고 바닥만 내려다본다. 앙상하게 드러난 어깨뼈가 둥글게 휘어져 있다, 아빤 나빠, 난 아빠가 싫어. 강아지를 껴안은 한수 녀석이 와락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그 더러운 강아지가 한수의 품에서 바르르 떨고 있는 걸 나는 보았었다.
이봐, 오 선생. 당신을 위해서 충고해 주려는 거라구. 모든 걸 사실대로 고분고분 털어놓으면 되는 건데. 공연히 저 지경으로 산 송장 꼴이 될 필요까지야 없잖겠나. 안 그래? 당신이나 나나 피차 몸 팔아먹고 사는 무식쟁이 노가다 놈들도 아니고, 알 만한 것은 다 알고 지내는 사람들인데, 야만인들처럼 폭력을 휘두르면 뭐가 좋겠어? 아, 나도 그만한 정도는 아는 사람야. 이런 자리가 아니고 어디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오 선생이나 나나 넥타이 목에 걸고 점잖게 마주 앉아서 술잔이라도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나, 응?
슬슬 구슬리며. 나는 짐짓 녀석의 눈치를 떠본다.
그, 글쎄요.
그러니까, 사실대로 털어놓으라는 게 아냐?
하지만, 정말입니다. 난 속이고 있는 게 없다니까요. 지금까지 말한 게 전붑니다. 믿어 주세요, 제발.
녀석의 얼굴에 간절함이 떠오른다. 어쩌면, 녀석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정말로 그저 수배자 한 녀석을 별생각도 없이 며칠 제 집 안에 숨겨 주기만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힐끗 녀석의 얼굴을 쏘아본다. 볼품없이 벌거벗은 앙상한 몸뚱이와 계집년의 그것처럼 희멀겋고 창백한 얼굴, 또 그 위에 떠올리고 있는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왠지 까닭 없이 나를 짜증스럽고 불쾌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불쾌함은 이내 역겨움으로 변한다. 왜일까. 무엇이든 허약하게 보이는 것을 나는 깡그리 증오한다.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 -그것이 창유리이거나 혹은 사람의 비굴하고 나약한 표정이거나 간에 -만 보면 나는 참기 어려운 증오와 혐오감이, 부패한 송장의 부풀어오른 뱃가죽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다. 그것을 깨뜨리고, 짓뭉개고, 처참하게 짓밟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정말입니다. 왜 사람이 사람의 말을 믿어 주지 않숩니까.
이 짜식이 증말!
나는 벌떡 일어나 잠바를 벗어 젖히고는 한바탕 녀석을 적당히 손봐 준다. 녀석의 코에서 싱겁게도 붉은 물이 터져 나왔으므로, 나는 그쯤에서 참기로 한다. 나는 옷을 다시 갖춰 입고, 옷매무새를 고친다. 한바탕 활발하게 사지를 움직이고 나니 등허리로 흥건히 땀이 배어 난다.
담배를 물고 불을 댕긴다. 그리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가 토해 낸다. 당신도 참, 해로운 줄 알면서 왜 그건 딱 끊지 못하세요. 다른 교인들 보기가 민망하지도 않나요. 무엇보담 당신의 건강이 문제라구요. 그렇잖아도 기관지 땜에 입원까지 했던 양반이 목을 조심해얄 텐데. 글쎄, 하루 한 갑으로도 부족하다니 말예요. 애들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만일 당신이 어떻게 되시기라도 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라구요, 여보. 아내의 잔소리
가 귓가에 쟁쟁거린다. 마흔이 다 되어가자 유난히 잔소리가 늘었다. 예전 같으면야 대번에 그놈의 주등아릴 쥐어뜯었을 텐데도, 나 역시 그대로 못 이기는 척 참아 내고 있는 걸 보면, 나일 먹긴 한 모양이다. 쯧, 빌어먹을.
이봐. 고개 들고, 그만 옷을 입지.
나는 한쪽에 치워 놓았던 작자의 옷을 던져 준다. 그는 바닥에 후줄근히 퍼질러 앉은 채 고개를 처박고 있다. 쯧. 비참할 게다. 정말이지 이놈의 세상 드럽고 치사해서 더는 살고 싶은 정이 천 리 만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을 거다. 그래. 하지만 그게 실은 중요한 것임을 녀석은 모르고 있다. 한 가닥 자존심입네 염치입네 하는 따위조차 훌렁 벗겨 내고, 알몸뚱이 그 자체가 되어야만 사람이란 누구나 비로소 술술 털어놓는 법이다.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럴 듯한 차림으로 행세를 하고 다녔겠지만, 일단 여기 발을 디딘 다음엔 그 따위야 똥 묻은 걸레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이치를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흥. 대학 나온 놈들? 돈깨나 가진 부모 잘 만난 덕에 배고픈 줄 모르고 껀중껀중 가방이나 둘러메고 느이들이 계집애들하고 히히덕거리며 노닥대고 있는 동안, 나는 일찌감치 대학 따위야 꿈도 못꿔 볼 신세가 서러워 허구한 날 대가리 처박고 살아야 했단 말이다. 왜, 머리통이 느이들보다 미련해서 그
런 룰 아니. 우리 집도 예전에 남부럽잖게 살 수 있었다. 빨갱이들 손에 우리 조부모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일가까지, 모두 합해서 아홉 사람이나 떼죽음을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버지는 화병이 들 리도 없었을 테고, 날이면 날마다 술이 취해 돌아와서 어머니와 나, 달숙이를 미친개처럼 두들겨 패지도 않았을 거고, 알코올 중독이 심해져 끝내는 옷을 벗기우다시피 해서 쫓겨 나는 일도 없었을 테고, 결국,,,,,, 그렇게 비참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란 말이다. 정말이지.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어머니가 저렇듯 노망기가 들어 똥오줌을 떡 주무르듯 하지도 않았을 테고, 나도 너희들처럼 대학을 나와서 지금쯤은 더 그럴 듯한 직장을 잡았을 테고. 근사한 폼으로 책상 앞에 근사한 명패 하나 붙이고 앉아서 거드름 피우며 배 두드리고 지낼 수 있었을 거란 얘기다. 한때 난 은행원이 되고 싶었다. 좀 있다간 은행장이 되어서 검정 세단차로 골프를 치러 다니고. 식구들과 함께 품위 있는 양식집에서 품위 있게 외식도 하고, 대지 삼백 평 정도의 빨간 양옥을 지어, 마당엔 융단 같은 잔디도 깔고, 사시사철 난초에 물이나 주면서, 그렇게 곱고 품위 있고 고상하게 살아가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런데 난 그 어느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무엇 때문이냐. 빨갱이 때문이지 뭐야. 그 철천지 원수 빨갱이 놈들이 우리 집안을 망하게 만들었고,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남들을 부러워하는 건 또 아니다.
천만에, 그럴 까닭이 있어야 말이지. 돈 많고 학식 높아 사회에서야 비까번쩍 폼내고 다니고, 모가지 부러지도록 무게 잡고 다녔을 지 모르지만. 일단 죄를 짓고 이리로 끌려오면 누구나 똑같은 알몸뚱이 개구락지 꼴이 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이처럼 공평하고 평등한 질서와 정의가 또 어디에 있으랴 싶다. 사장이고 전무고 교수고 박사고 품팔이꾼이고 노가다고 의사, 목사, 창녀, 귀부인, 학생, 장사치 할 것 없이, 직업 귀천도 신분 차별도 없애 주는 여기, 우리들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민주사회의 법이요 질서요 정의가 아니겠느냐, 이 얘기다.
어서 입으라니까. 내 말 안 들려?
그제서야 작자가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자. 일어서서 구부정하니 허리를 굽혀. 바지에 다리를 꿰다가 넘어질 듯 비칠댄다.
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벌써 밤 한시가 가깝다. 벌써 이렇게 되었다. 목이 칼칼한 게 시원한 맥주 한잔이 간절하다. 피곤하다. 잠시 쉬어야 할까 싶다. 옆방에서도 기척이 뜸하다. 나는 작자에게 의자에 앉도록 명령한다. 자. 지금부터 여기에 자술서를 쓰는 거야.
나는 종이와 볼펜을 녀석에게 던져 준다.
저, 자술서는,,,,,, 여기 오기 전에도 썼소. 녀석아 탈진한 표정으로 우물거린다.
그건 쓸데없어. 또 써야 한다구. 어쩌면 앞으로 수십 번 더 써야 할지 몰라. 물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양심껏 쓰기만 하면야 단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말야.
---.
나도 솔직히 이러구 싶잖아. 지겨워. 만사 제쳐 놓고두 발 쭉 펴고 잠이나 자고 싶다구. 정말야. 당신도 마찬가질 거 아닌가. 제발 서로 협조하자구. 이따가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다 해 놓으라구.
그래도 녀석은 말이 없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후줄근히 앉아 있다. 나는 문 쪽으로 걸어 나온다. 문을 닫고 나가려다가 잠깐 뒤를 돌아다보니. 녀석은 여전히 그대로 앉아 있다, 붉은 방 안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작자의 모습이 얼핏 잡혀 온 작은 짐승처럼 보인다.
다섯
가만, 뭔가 끔찍스럽고 이상한 소리에 후두둑 정신을 차린다. 얼핏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모래알이라도 긴 듯 눈꺼풀이 꺼끌꺼끌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목이 탄다. 이내 시야를 꽉 채우고 들어오는 붉은 빛깔의 세상. 사면의 벽과 천장을 덮고 있는 그 핏빛의 공간 한가운데서, 문득 나는 전신이 어느 틈엔가 온통 붉게 물들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잠시 졸았던 것일까. 고개를 간신히 세워 방안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피잉, 현기증이 인다. 어떤 무중력 상태의 공간에 붕 떠 있는 듯한 묘하게 비현실적인 느낌. 책상과 의자, 변기, 욕조, 샤워 꼭지 그리고 내가 누워 있는 침대,,,,,, 그 모든 사물들이 마치도 무대 위의 소도구들처럼 퍽으나 생경하고 낯설어 보인다. 그건 어쩌면 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붉은 빛깔 때문일 것이다. 저 광기의 빛깔 속에서는 모든 것이 기괴하게 뒤틀리고 일그러져 보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나는 무심코 진저리를 친다.
이건 악몽이어야 해. 지금 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나는 감당할 길 없는 공포에 전율하며 질끈 눈을 감아 버린다. 으아아...... 아.
그 이상한 소리가 벽을 뚫고 다시 들려 온다. 인간의 육신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처절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 누굴까. 허리를 웅크린 채 그 목소리의 임자를 가려 내려 애를 써 본다. 이상준인가. 아니면 서정민? 하지만 그 어느 쪽의 목소리인지 쉬이 가려낼 수가 없다. 아까 그 사내의 얘기로는 그 둘 말고도 여럿 여기에 와 있노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다른 누군가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우. 으아아,,,,,, 아아. 비명은 복도 맞은편 방이거나 바로 옆방에서인 듯하다. 나는 귀를 틀어막는다. 식육점 진열장 안의 붉은 불빛. 그리고 그 안에 가득히 걸려 있는 짐승의 빨간 살덩어리. 앙상하니 드러난 갈비뼈, 허벅지 바로 아래 부분부터 뭉툭하니 절단된 채 걸려 있는 소와 돼지의 다리,,,,,, 그런 을씨년스런 풍경이 짧은 동안 시야에 떠올랐다 지워진다. 아아. 이제 나는 꼼짝없이 이대로 죽게 되는 걸까.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를 등에 매단 채 어느 깊숙한 바닷속이나 강물 속에 가라앉아 허옇게 뼈만 남기고 고기밥이 되거나, 한밤중 어느 들판 철길 위에 의식을 잃은 채 내버려져 있다가 열차 바퀴에 깔려 수천 수만 개의 살점과 뼛조각으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갈가리 찢겨져 버리고 마는 걸까. 그런 저런 엽기적이고 괴기스런 연상들이 뒤죽박죽으로 어지러이 떠오른다. 마치도 거대한 얼음 덩어리에 어금니를 왁 쑤셔 박고 ◎디어 있는 것만 같은 지긋지긋하고 소름 끼치는 공포에 짓눌려 숨이 가빠 온다. 등허리며 무릎, 허벅지 여기저기가 저리고 아프다. 나를 짓밟고 패고 짓뭉개 대던 그들의 광기 어린 눈빛들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한참이니 옆드려 있다.
어쩌다가 내가 여기까지 끌려 와서 이 지경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이상준이 원망스럽다, 아니, 이상준을 탓할 건 없다, 모두가 서정민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내게 전화를 해 오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언제나처럼 학교와 집 사이를 오가며 순탄하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눈만 뜨면 숨가쁘게 시작되는 일과, 아내와의 사소한 말다툼, 늘상 따분하고 지겹기만 하던 교무회의, 때까치란 별명이 붙은 교감의 잔소리. 스물일곱 시간이나 되는 힘겨운 수업, 방과 후 학교 근처 술집에서 동료 교사들과 마시는 술,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진부하고 맥빠진 화제들,,,,,, 그런 사소하고 무의미하게만 여겨지던 내 일상들을 나는 턱없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어 했던가.
내겐 꿈이 있었다. 주옥같이 감동적인 시들을 써내겠다는 미련을 나는 최근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늦은 저녁을 먹고, 방바닥에 배를 깔고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 채널만 이리저리 돌려 대다가, 차츰 눈꺼풀이 무거워 오면서 이윽고는 코를 골며 잠에 떨어지곤 하는 게 늘 정해진 일과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시인이 되겠다는 어쭙잖은 꿈을 버리지 않았다. 막상 단 한 줄의 시구도 끄적여 보지 못한 게 벌써 여러 해인데도, 이따금 베란다로 나가 어두운 도시의 밤풍경을 내려다보거나 혹은 밤늦은 만원 버스 속에서 똑같이 피곤에 전 사람들과 함께 이리저리 서로의 몸무게를 저울질하며 서 있을 때면. 나는 불현듯 모르는 새에 매일매일 소리 없이 죽어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몸서리를 쳐야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처지를 저주하고 원망했다. 돈과 자식과 아내와 직장. 그 모두를 송두리째 나는 증오했다. 그것들이야말로 내 육신과 영혼을 저 무의미하고 부패한 삶의 땟국물 속에 푹 처박히도록 만드는 원흉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것들 모두가 눈물겹도록 그립고 소중하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듯 하찮고 무의미하게만 보였던 작고 평범한 일상들이 별안간 엄청난 의미를 지닌 채 나를 간절한 그리움에 떨게 만들고 있다.
아 으으읏. 어, 어머니. 으아아아 -앗.
다시 그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아. 서정민이다. 나는 그제서야 그것이 분명한 서정민의 목소리임을 직감한다. 그렇구나. 그도 역시 여기에 끌려 와 있는 것이다, 아아악. 또 비명 소리. 금방 숨이 끊어질 듯 다급하고도 절박한 그 비명이 터져 나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일어서는 것 같다. 안경을 쓴 서정민의 얼굴이 떠오른다. 과묵하고 신중하면서도 인정이 넘치는 친구였다, 훈련소에서 내가 발목을 다쳐 절뚝이며 다닐 때, 지성스레 쫓아다니며 보살펴 준 기억 때문에 나는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뒤틀리고 망가져 가는 세상에서, 힘없이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그를 가까운 친구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늘 자랑스러웠고 소중했었다. 그 때문에 그날 그가 내게 그런 뜻밖의 부탁을 해 왔을 때, 한편으로는 두려움과 조바심으로 자꾸 뒷걸음질치고 싶은 유혹을 느끼면서도 끝내 응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나 자신의 나약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자책감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였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날 서정민이 전화를 해 온 것은 퇴근 시각이 가까운 토요일이었다.
퇴근하자마자 나는 학교 앞 다방에서 그를 만났다. 알고 보면 그것이 바로 모든 불행의 시초였던 셈이다,
부탁이라니. 자네가 다 내게 부탁할 일이 있구만. 허허.
무척 오랜만에 만나는 정민 앞에서 나는 웃었다.
사실은, 이런 부탁을 꼭 해야 할까 하고 왜나 망설였네. 하지만 자네라면 믿고 얘기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자칫하면 남에게 해를 미치게 될 수도 있는 일이라서 말야. 물론,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거든 지금 거절해도 좋아. 난 자네에게까지 위험부 담을 요구하고 싶진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의아해 하는 나를 데리고 정민은 다방을 나섰다. 그러더니 한적한 골목길을 걸으며 내게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후배 한 사람이 시국 관련 사범으로 수배를 받고 쫓기고 있는데, 며칠 동안만 내 집에서 지내도록 해달라는 얘기였다. 당연히 불안하고 찜찜한 일이었으나, 나는 결국 응낙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정도는 그다지 위험한 일은 아니리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이 있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시위의 배후 인물이라는, 그의 후배 하나쯤 숨겨주는 일이 뭐 그리 큰 죄가 될까 싶었다.
이튿날 저녁, 약속한 시간에 정민은 이상준을 데리고 나타났다. 처음. 아내는 대뜸 거부 반응을 보였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학 교육까지 받은 여자가 그 따위 소견머리밖에 없어, 남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하는데, 고작 그만한 불편쯤 못 참아 주겠다고 해서야 말이 되느냔 말야. 나는 제법 아내 앞에서 그런 호기까지 부렸다. 이상준은 약 보름 정도 우리 집에서 숨어 지냈다. 서재 겸 쓰고 있던 내 방을 그에게 빌려주고. 그 동안 나는 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셋이서 안방을 사용했다. 이상준은 나보다 두 살 아래였는데, 왜나 말수가 적고 침착한 성격 같았다. 나와 얼굴을 마주치는 기회는 적었다. 밤 늦게야 돌아오면 우선 드러눕기에 바쁜 터였고, 되도록이면 그가 불편해 하지 않도록 내 쪽에서 조심하기도 했던 까닭이다. 두어 번인가 바둑을 둔 적이 있었고, 그가 다른 거처를 찾아 옮기기로 한 전날 밤, 이별주 삼아 서정민과 셋이서 맥주 몇 잔을 기울였던 일 말고는 별로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조차 서로 나눈 일도 없었다. 정말이지 그저 그뿐이었다. 때문에 나는 그가 정민과 함께 밤중에 내 집을 빠져나간 후로부터는 이내 그 일을 거의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었고, 설마 그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르게 될 줄은 애당초 상상도 못했던 참이었다.
나는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다. 참을 수 없게 오줌이 마렵다. 뒷머리가 욱씬거리고 어지럽다. 일어서려는데 무릎이 휘청거린다. 어느 틈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니 젖어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비칠대며 변기 앞으로 다가가 일을 치른다. 그 짧은 동안 두 다리로 몸을 받치고 서 있기조차 힘이 들 지경이다. 침대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아서, 팔다리 여기저기에 푸릇푸릇 멍든 자국을 살펴본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자들은 다짜고짜 달려들어 내 전신을 그렇듯 개 패듯 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그 순간엔 그들의 눈빛은 알 수 없는 야릇한 희열과 쾌감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그처럼 철저한 증오와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 자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조직? 충성심이라고 불리는 저 맹목적이고 야만적인 광기?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 아까의 그 사내가 들어온다. 나는 오싹 몸을 사린다.
어디 보자. 자술서는 다 썼나?
사내는 혼잣말처럼 뇌까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아 둔 종이를 집어 들고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가슴이 불안스레 뛰기 시작한다. 나는 거의 모든 내용을 사실대로 거기에 적어 놓았었다. 그러나 사내가 요구하는 건 필시 그런 내용이 아닐 것임을 나는 짐작한다. 사내는 별로 흥미 없다는 투로 내가 적어 넣은 글자들을 대충 훑고 있는 눈치다.
이봐, 오 선생.
이윽고 사내가 종이쪽을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더니 나를 부른다. 그의 입술에서 떨어질 다음 말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며 나는 쳐다본다, 붉은 벽을 배경으로 하고 서 있는 사내의 몸뚱이가 별안간 엄청난 부피로 확대되어 시이를 압박해 들어온다. 사내의 가죽잠바가 숯덩이처럼 새까맣다
오 선생. 공연히 거짓말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게 되었어. 너희들의 조직은 다 깨어져 버렸으니까 말야.
사내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싸늘하게 나를 쏘아보며 말한다. 조직이라니,,,,,? 나는 무릎이 안으로 오그라드는 듯한 한기를 느끼며 멍하니 그를 올려다본다.
바로 조금 전에 서정민이가 모든 걸 털어놓았어. 이상준이도 곧 불게 될 거야. 아, 이젠 당신도 얘길 해줘야겠어. 지금까지의 내용만으로도 구속은 충분해. 말하라구. 이상준과 무슨 모의를 했었지?
모의라뇨. 우린 서로 얘기해 본 적도 별로 없습니다. 이따금 신문을 가져다 달라고 해서는 그저 이런저런 얘길 한 적은 있지만,,,,,, 정말 난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게 말이나 돼? 누굴 허깨비 취급하자는 수작인가 이상준인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놈야. 제 입으로도 그걸 자백했어. 체제를 전복시키고 폭력혁명을 획책하기 위해.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을 포섭해서 뭔가 음모를 꾸미려 하고 있었던 거라구. 당신 집을 그 아지트로 삼고. 안 그런가?
아, 아입니다. 난 정말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그랬잖소.
그래 봐야 소용없대두. 사정민과 대질시켜 줄까.
그래요. 차라리 대질시켜 주시오. 지금 당장 말입니다.
이봐. 수 쓰지 말고 순순히 말을 듣는 게 신상에 이롭다구. 그때 당신의 아파트로 이상준이를 몰래 찾아와 만나고 간 놈들이 있을 거야. 이름을 대. 누구누구였지?
모릅니다. 서정민이가 서너 번 밤에 들렀을 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방한성과 채형택, 맞지?
그런 사람이 누군지 모릅니다. 이름조차 처음 듣는 사람들이오.
나는 데드마스크 같은 사내의 무표정한 얼굴을 쳐다보며 완강히 고개를 흔든다. 정말이다. 그런 이름은 들은 적조차 없다. 사내는 지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들을 엉뚱하게 이 일에 개입시키려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들이 꾸며 놓은 각본을 완성시키기 위해 바로 내 증언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불현듯 온 신경을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운명은 내 입술 하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준, 서정민 그리고 방한성과 채형택이라는 인물들이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라는 문제를 내가 혼자 고스란히 책임져야 한다는 얘기인 셈이다.
모릅니다. 믿어 주시오. 난 그 두 사람은 만난 적도 없소. 이상준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요. 모든 것은 거기에다 써 놓았소. 아시겠소.
나는 털썩 무릎을 꺾고 사내에게 애걸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어느새 나는 형편없이 비굴하고 비겁해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건방진 녀석. 말해! 너희들의 조직 이름이 뭐야. 가담한 놈들은 몇 명이지? 무슨 음모를 꾸몄었느냔 말야!
조직도 음모도 없었소. 제발 믿어 주시오. 사람이 사람의 말을 믿어 주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무엇을 믿는다는 말이오. 차라리 그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시오. 그럼 다 밝혀질 게 아니오.
안 되겠군. 정신이 들게 해줘야넸어!
사내가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벌떡 일어나더니 출입문을 덜컹 열고 누군가를 부른다. 이윽고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사내들. 바로 아까 그 자들이다. 눈앞이 아찔해 오는 충격에 나는 금방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은 몸뚱이를 간신히 지탱한다,
옷을 벗겨!
사내가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그들은 내게 달려들어 다짜고짜 양팔과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놔! 내 손으로 벗겠소.
어떻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낀다. 그들이 기다려 주겠다는 눈치를 보였고, 나는 순순히 내 손으로 옷을 벗기 시작한다, 티셔츠의 단추를 풀고, 바지 그리고 위아래 내복까지도 벗었다. 입안은 바싹바싹 타 들어가지만 이상스레 이번엔 손끝이 떨리지 않는다. 이윽고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그들 앞에 선다. 알몸이지만 왠지 별다른 한기조차 느낄 겨를이 없다. 그러다가 무의식중에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가슴을 애써 편다. 당당해져야 한다. 이렇듯 비참하고 초라한 꼴로 너희들 앞에 서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난 당당하다. 당당해져야 한아. 나는 입 속으로 되뇌며, 턱없이 용기를 가장하려고 노력해 본다. 그때,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나를 쏘아 보고 있던 사내가 차갑게 말했다.
다 벗어! 팬티까지도.
나는 그를 노려본다. 처음으로, 가슴 밑바닥 깊은 어디쯤에선가 억누를 길 없는 맹렬한 분노가 고개를 들고 일어서고 있다. 그것은 꼬리를 밟힌 독사의 대가리처럼 완강하고 대담한 것이어서 내 스스로도 놀랍다. 드디어 나는 그것마저 벗겨 내리고 만다. 좋다. 원하는 대로 해주마. 이젠 완전한 알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 살갗에 남은 그 손수건만한 천조각까지 빼앗겨 버린 순간 나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강탈당해 버리고 말았음을 확인한다. 그러자 바로 조금 전까지 내 가슴속에서 솟구쳐 일어서던 어떤 맹렬한 분노는 내가 알몸뚱이로 변해 버린 그 순간에 허망하게도 스러져 버리고 만다. 이젠 억지로 어깨를 펼 기력조차 잃어버린 채 나는 한 마리 짐승으로 서 있을 뿐이다.
그들은 빙 둘러서서 재미있다는 듯이 내 알몸뚱이를 훑어보고 있다. 이 친구, 돈벌어서 뭘 했나.고기 한 점 못 사먹어 본 놈같이 뼈하고 가죽밖에 없잖아. 짜식. 그것도 물건이라고 차고 다녀?
으흐훗. 가죽잠바의 사내가 빙글빙글 웃었고, 다른 사내들 역시 덩달아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내 놓고 능글맞게 웃고 있다. 그들의 그 기분 나쁜 웃음 속엔 어떤 지긋지긋한 권태 같은 것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권태 뒤엔 무엇인가를 부수고 짓밟고 망가뜨리고 싶어 견딜 수 없어 싸는 듯한, 섬뜩한 파괴에의 욕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럴 때 가도를 올리는 법이라도 알고 있었으면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하느님이니 신이니 하는 존재는 대관절 어디에 있는 건가. 왜 그는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정작 숨어 버리고 마는 건가. 나는 혀로 입술을 할아 본다. 놀랍게도 입술이 종잇장처럼 바싹 말라붙어 있다. 사내 하나가 내 팔을 뒤로 돌리더니 수갑을 채운다. 이어 양켠에서 내 팔을 움켜 쥐고 그들이 나를 벽 쪽으로 밀어붙인다. 자, 목욕 좀 해봐. 아주 시원할 거야.
사내 하나가 내 머리채를 뒤로 바짝 잡아챈다.
난 고개를 까딱할 수조차 없다. 알몸뚱이로 사내들의 엄청난 악력에 완전히 결박당하고 만 채로다. 눈앞에 나타나든 샤워 꼭지. 내 얼굴은 정확히 그 샤워 꼭지의 방향으로 들려져 있다. 이윽고 쏴앗,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는 물줄기, 물줄기,,,... 짜릿한 고통이 순식간에 온몸을 엄습한다. 사내의 손이 머리카락을 더욱 완강하게 잡아채고, 내 콧구멍은 정면으로 물줄기를 향해 노출되어져 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눈이 떠지지 않는다. 얼굴은 살얼음에 덮
인 듯, 아니 얼음장 그 자체가 되어 버린 듯 아무런 감각도 없다.
눈을 떠야 할 텐데,,,,,, 숨을, 숨을 쉬어야 할 텐데,,,,,, 목을 돌리려 해도 움직여 주질 않는다. 이 자식이 어딜. 조심해 임마. 물이 내 쪽으로 튀잖아! 그들이 뭐라고 낄낄대고 있다. 이 자식, 어딜 버티려구? 몸을 비틀어 댈 때마다 쏟아지는 발길질과 주먹질. 얼핏 정신이 흐려져 온다. 소리. 엄청난 물소리. 그건 폭포다. 폭포 밑에 나는 지금 알몸으로 서 있는 것이다.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 한꺼번에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추락해 내리는 물줄기들을 고스란히 두들겨 맞으며 서 있다. 물소리,,,,,, 얼마쯤 지났을까. 문득 폭포가 멎는다.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물소리, 그리고 정적,,,,,, 마치도 물 속 깊이 돌멩이처럼 가라앉아 가든 듯한, 그런 기이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눈을 뜨자, 밀려 들어오는 핏빛의 세상. 한순간 내 눈알의 모든 실핏줄이 일제히 터져 버린 건 아닌가 싶다.
이거, 보기보다 독종인데! 끌어내려. 안 되겠구만.
검은 잠바가 말한다. 나는 어느새 비닐이 깔린 나무 침대에 뉘어져 있다.
여보시오. 다, 당신들도 인간입니까, 왜 애매한 사람을 이렇게---,
하지만 그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내 얼굴 위로는 파란색 얇은 타월이 덮여진다. 눈을 떠 본다. 붉은 천장은 지워지고 순식간에 세상은 파란 빛으로 바뀌어 있다. 발목과 무릎 그리고 가슴에 딱딱한 감촉의 끈이 묶여진다.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그 일을 해치우며 천연스레 얘기를 나누고 있다,
라디오, 어디에 갖다 뒀지?
글쎄. 어제는 못 봤는데. 김 과장이 자기 방에 모셔 간 건 아닌가.
아니라구. 이 방 어디에 있을 텐데. 아까 내가 가져왔잖아. 아. 저기 있어.
주전자, 이리 내. 내가 할 테니까.
이봐. 그쪽 머리를 꼭 잡아.
에이 참. 염려 마십쇼. 그깟 양복, 별로 비싸지도 않게 보이는데. 훗
몸이 부들부들 떨려 온다, 춥다. 앞니가 심하게 떨고 있다. 어금니를 깨문다. 견디자. 견eu 내야 한다. 추한 꼴을 보이지 않아야 돼. 이 자들 앞에서, 암, 당당하게 굴어야 해, 주문을 외듯 그렇게 혼자 다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설픈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지금 저 자들의 눈에 나는 단지 한 마리의 천한 짐승에 지나지 않을 뿐이리라. 언젠가 여름날, 개 잡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개는 자루에 넣어져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어깨 없는 러닝 셔츠를 입은 사내 셋이 몽둥이와 괭이로 그것을 미친 듯 두들겨 패었다, 자루 속에서 날뛰던 개는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자루 밑으로 빨간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별안간 콸콸콸콸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얼굴 위에서 주전자로 물을 붓고 있다. 안 돼. 어어억. 소리를 지르려 하자, 그보다 먼저 벌려진 입과 콧구멍으로 가차없이 물이 침입해 들어온다. 물을 몇 차례 삼켰다. 목구멍이 터질 것 같다. 물 냄새. 쇠붙이의 녹 내음처럼 비릿하면서도 금속성의 무게를 지닌 듯한 역한 냄새. 속이 메스꺼워지면서 울컥울컥 구역질이 솟구친다. 폭포, 물소리, 녹 냄새 그리고 눈앞으로 번쩍, 번갯불 같은 섬광이 터졌다가 사라진다. 아악. 그만 해. 그, 그만 해. 가슴이 터질 듯하다. 안 돼. 제바알. 나는 온몸을 버둥거린다. 완강하게 짓눌려 오는 사내들의 체중. 눈앞이 노오랗게 변한다. 나는 꼼짝없이 묶여 있을 뿐이다.
---신 선생님. 영화배우 되신 지가 왜 오래되셨죠. 정확히 햇수로는 얼마나 되셨죠(여자 목소리).
글쎄요. 정확하게 따지면, 십구 년 째던가, 아마 그럴 겁니다(남자).
아유, 이십 년이 다 되었군요. 제 기억엔 바로 몇 해 전 같은데. 호호호.
글쎄요. 길다면 긴 세월인데, 솔직히 아직도 기분은 그래요. 맨 처음 데뷔한 게 스물네 살 때였죠. 군에서 막 제대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은 어디서 들려 오는 것일까. 뒤늦게야 나는 사내들이 라디오를 틀어 놓았음을 짐작한다 잠시 뜸하던 물줄기가 다시 코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어머머. 무슨 겸손의 말씀이세요. 제가 보기엔 얼굴 모습도 예전과 거의 다름이 없으신 데요 머. 아직 이십대 청년 같아요. 호호호. 어이구, 감사합니다. 우리 집사람이 들으면 좋아하겠군요. 허허허. 아녜요, 정말이라구요. 참, 사모님인 엄미란씨도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이시잖아요. 얼마 전에도 롯데호텔에선가 패션쇼가 아주 성황리에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렇죠? 그래서 그런지 신 선생님도 옷 입는 감각이 아주 뛰어나다는 평들인데,,,,,, 숨이 막힌다. 이젠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콧속이 불이 붙은 듯 화끈거려 온다. 끊임없이 눈앞으로는 불길이 솟구쳤다가 잦아지고, 목구멍은 불덩이를 삼킨 양 아파 온다. 물을 마셔선 안 되는데, 입을, 입을 벌리지 말아야 해 참자. 견뎌야 한다. 조금만,,,,,, 아아,,,,, 조금만 더..,.., 견며 내 봐.
나는 묶인 몸을 미친 듯 버둥거리려 한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거대한 물체가 온몸을 내리누른다. 폭포. 아아. 폭포 밑 천길 물웅덩이 속으로 아스라이 곤두박질쳐 가라앉고 있다. 내 몸뚱이가------목이, 목구멍이,,,,,, 터질 떳 같다. 호호호호. 아마 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주부님들 중에선 신 선생님의 열렬한 팬들이 많을 겁니다, 전성기에는 인기 스타 신정일씨가 어디에 나타났다더라 하면, 그냥 가는 데마다 여성 팬들이 구름같이 몰려들고 그랬을 때잖아요. 사실 나도 그 여성 팬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요, 호호호. 아이구, 이거 영광입니다,,,,,, 나는 발악하듯 버둥댄다. 모래밭 위에서 하릴없이 펄떡이는 피라미 한 마리. 오뉴월 뙤약볕에 아이들의 손에 붙잡혀 논둑 바닥에 힘껏 내팽개쳐진 개구리 한 마리. 허옇게 뒤집어진 채 헐떡거리는. 그 불룩대는 배. 참, 이거 봐. 이 계장, 자네한테 아까 전화 왔었어. 나한테? 어딘데? 몰라. 여잔데, 자네 마누란 아냐. 목소리가 꽤 세련됐더라구. 아방궁 오 마담이 아닌가 몰라. 으흐훗. 젠장, 쓸데없는 소리, 그게 뭐 하러 날 찾어? 보나마나 뻔하지 머. 외상값 독촉이겠지, 어제가 월급날인데. 외상 같은 건 없어. 그건 자네한테나 해당되는 사항이겠지.
아이구. 그나저나 쥐꼬리만한 윌급에 이것저것 떼고 나니깐 마누라 얼굴 보기가 민망하더라고. 어이. 그쪽 좀 잘 잡아. 물이 튀기잖아, 참. 이 친구는 제법 잘 참는데 독종이라 그렇지. 쓰발. 암만 생각해도 때려치우고 장사나 할까. 이번이 보너스 타는 달인데,
왜. 보너스는 무슨. 난 빈털터리야. 학자금 융잔가 뭔가 애들 밑으로 들어간 게 있어서 한푼 남김없이 다 떼인다구. 아, 요샌 고등학생 하나 보내는 것도 무시 못해. 대학생 못잖다니까...... 점점 사지의 힘이 빠져나간다. 이젠 버둥거릴 힘도 없다. 정신이...... 정신이 혼미해져 가기 시작한다. 진흙뺄 속으로 서서히 빠져드는 느낌. 발목------무릎,,,,,, 허벅지,,,,,, 허리, 그리고 이젠 가슴팍까지 깊이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다. 물소리,,,,,, 콸콸콸---콰르르르. 이윽고 턱까지 차 오르는 진흙. 쇠바퀴 소리. 거대한 탱크의 바퀴가 보인다. 새까맣고 육중한 그것의 몸체가 진흙밭 위로 나를 덮쳐 오고 있다. 끌끌끌끌,,,,,, 도망쳐야 할 텐데. 늦기 전에, 아 아....., 그대애 차앙문을 열어요오 그대 차아앙문을, 오우오우. 헤이헤이. 달빛 창가에서 밤새워 기다아리는 나아를. 워우워우. 헤에이 헤에이. 노랫소리에 맞춰 내 머리맡의 사내가 흥흥 콧노래를 따라 부른다. 워우워우. 다알빛 창가에서 밤새워 기도하는 나아를...... 워우워우 테에이 헤에이,,,,,, 아아, 나는 인간을 저주한다.
천길 폭포 아래 알몸뚱이로 내동댕이쳐진 나는 온 세상을 증오한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저주한다. 나를 이 꼴로 만든 서정민과 이상준과,,,,,, 그리고 지금 내 몸뚱이를 나눠 갖기 위해 히히덕대고 있는 이 자들과, 나를 깔아 뭉개려 다가오는 저 어마어마한 탱크를 나는 한꺼번에, 착치는 대로, 미치도록 증오하고 저주한다. 죽여 버리고 싶다. 아무나,,,,,, 그저 닥치는 대로 목을 졸라 주겠다 아아. 원수들. 원수들이 나를 나누어 가지려고...... 다시 물소리. 폭포의 엄청난 압력. 목구멍이 찢어지고 있다, 검은 물이, 온통 새까맣게 썩어 버린 물이 내 코와 입과 목구멍 안으로 쑤시고 들어온다. 그대애, 차앙문을 열어 줘어. 워우줘 우. 그대의 차앙문을. 워우워우 헤에이 헤에이. 아아, 나는 죽어 간다. 이대로 죽어 가는구나. 워우워우. 헤이헤이. 이렇게 어처구니 없게, 이렇듯 볼품없는 꼬락서니로,,,,,, 이유도 없이. 헤에이 헤에이. 물소리..... 노랫소리,,,,,, 콧노래,,,,,, 헤에이 헤에이. 워우 우.......
물줄기가 멎었다. 폭포의 물소리도 그쳤다. 끌끌거리던 거대한 탱크의 바퀴음도, 진흙의 늪도,,,,,, 사라졌다. 끝났다. 끝난 것이다.
순간 믿을 수 없으리만큼 맹렬하게 치밀어 오르는 욕구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난 살아야 한다. 죽어선 안 돼. 아아, 나는 헐떡이며 번쩍 눈을 뜬다. 그리고 목구멍이 찢어져라 외친다.
사, 살려 주시오! 말하겠소. 뭐든지. 시, 시키는 대로 다 말하겠소. 모두 다!
사내들의 무표정한 얼굴들이 나를 지켜보고 딨다. 가죽잠바의 사내가 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잡아 올리며 히죽이 웃는다.
이봐. 아직 정신을 덜 차렸군.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게 아냐. 사실대로 털어놓으라는 거지.
아, 아니오. 말하겠소. 뭐든지. 사실대로 자백하겠소. 살려만 주시오. 제발!
사내의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엷게 떠오른다. 우욱. 나는 헛구역질을 토해 낸다. 하지만 목구멍을 넘어오는 것은 없다. 전신이 물과 땀으로 흥건하다 나는 무너지듯 고개를 꺾으며 눈을 감는다.
그러길래 뭐랬나. 진즉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면 이런 언짢은 일은 서로가 피할 수 있었잖아. 쯔쯧. 우린 다 알고 있었다니깐 그래. 참, 오성수가 누구지? 당신 큰아버지라는 친구 말야. 여기, 기록을 찾아보았더니, 육이오 때 월북한 걸로 쇄 있구만. 빨갱이 중에서도 왜 거물이었던 모양인데. 어때, 안 그런가?
순간 내 가슴 한 귀퉁이 어딘가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그리고 그 구멍 속으로 들여다보이는 칠흑의 암흑.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그 완벽한 암흑의 함정 -한번 발목을 잡혀 끌려 들어가면, 두 동강이 난 이 땅의 그 누구도 결코 다시 빠져 나을 수 없는 거대한 함정이 내 눈앞에서 서서히 입을 벌리기 시작하고 있음을 나는 본다. 이제 모든 것이 이미 끝나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나는 예감한다. 천천히 눈을 뜬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치의 여백도 없이 온 시야를 가득히 물들이며 쏟아져 내려오는 단색의 세계. 그 핏빛 세상. 왜일까. 어느새 눈자위에 까닭 모를 눈물이 피잉 괴어 온다.
여섯
윌북한 즈이 큰아버지의 이름을 들먹였더니, 녀석의 낯빛이 삽시간에 허옇게 질려 버린다. 그것 보라지. 이런 작자들에겐 이게 그야말로 특효약이라니까. 겉보기엔 왜나 순진해 빠진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런 치들의 뒤를 캐 보면 대부분 성분에 문제가 있는 집안인 경우가 많은 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콩 심은 데에서 팥 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사상이 불온한 집구석에서 자란 녀석들이니 어려서부터 머리 돌아가는 방향이 으레 삐딱해질 수밖에. 어쨌건 이 작자도 이젠 결딴이 난 셈이다. 이제부터야 겁 없이 버티거나 요리조리 말꼬리 돌려 가며 달아날 궁리도 하지 못할 게다. 오히려 제 한 몸이나마 어떻게든 구해 내기 위해 안달을 피우겠지. 이젠 내 손아귀에 온전히 들어온 거다, 나는 핼쑥하니 질려 있는 녀석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흘린다.
녀석은 탈진한 듯 눈을 감은 채 후줄근히 앉아 있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맹물 몇 모금만 억지로 먹여 놓으면 신통하게도 오뉴월 개구락지 모양 쭉쭉 늘어 자빠지는 게 인간의 생리 구조이니까. 하지만 나 역시 피곤하다. 밤낮없이 잠을 설치며 끈질기게 몰아붙여야 하는 이 직업이 이젠 신물이 난다. 때로는, 차라리 미련 없이 훌훌 옷을 벗고 말까 하는 충동이 불쑥불쑥 치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막상 달리 무엇이든 해먹고 살 뾰족한 궁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런 충동은 매양 생각으로 그치고 말 뿐이다. 아이들은 점점 커 나가고, 아내 역시 돈맛을 알게 되어 늘상 살림 투정이다. 게다가 어머니를 생각하면 골이 빠개질 지경이다. 생각하면 산다는 게 어찌 이리도 항상 팍팍하고'쪽팔리는 일인지 모르겠다, 가정을 걸머지고 사는 세상 남자들이 다 그럴까. 내가 날이면 날마다 우리 사회의 암세포 같은 이런 작자들과 실갱이를 벌이고 있는 판에(바로 이 순간에도) 집에서 여편네는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고, 노망한 어머니는 자신이 갈겨 놓은 배설물 위에 퍽지근히 주저앉아. 그걸 손으로 주물러 벽이며 방바닥에 현란하게 떡칠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자식들이야 무슨 탓할 건덕지가 없긴 하지만, 머리통이 굵어 가면서부터는 학비다 용돈이다 옷값이다 해서 그놈들 밑구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돈이 엄청나게 늘었다. 오냐. 아무튼 공부만 열심히 해라. 그래서 큰아이 너는 계집애니까 지방대학 약대라도 졸업해서 돈 많은 녀석 만나 시집 가면 그만이다만. 큰아들 너는 꼭 사관학교 그것도 육사에 들어가야 한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엽전들은 그래야 출세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따금 기분 좋게 얼근히 취해 집으로 들어가는 날은, 나는 아이 놈들을 불러다 놓고 그렇게 우격다짐하듯 타이르곤 한다. 그러면 녀석들은 으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다소곳이 듣고 있게 마련인데, 그런 모습을 보면 괜히 콧날이 시큰해질 만큼 녀석들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와락 껴안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다.
하늘나라라구? 흥. 이봐, 오 선생. 이게 무슨 뜻인가, 이상준이가 이런 얘길 당신한테 했단 말이지,
작자가 써 놓은 자술서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나는 묻는다.
예. 그건 그냥,,,,,, 뭐랄까. 우리들이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 아니냐는,,,,, 그런 뜻 같았습니다만.
작자는 잔뜩 주눅이 들어, 어눌하게 더듬더듬 대답한다.
사람다운 세상이라구? 흥. 그게 왜 하늘나라야? 하늘나라는 천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건, 천국이 반드시 사후 세계에 따로 존재하는 허구의 세상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도 그와 같은 기준으로 종내는 만들어 가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상준은 자신이 기독교 신자라고 우기던데, 오 선생도 신자인가?
신자는 아닙니다만, 나도 이상준의 생각이 틀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소. 그래서,,,
흥. 그래?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란 뭔가? 그것도 마찬가지로 소위 사람다운 세상이겠군?
글쎄요 뭐, 그렇다고 해도 되겠지요,,,,,,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서로 아끼고 도와주면서, 가난한 자도 억울한 자도 없이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그런 사회이겠지요.
오호라, 역시 그렇구만, 과연! 그게 바로 사회주의 국가이지. 그래서 당신들은 체제를 뒤집어엎고 폭력도 불사하겠다 이거지. 그래서 불순분자들을 포섭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모의를 했었던 거로구만! 아닌가?
나는 책상을 탕 소리가 나게 손바닥으로 치면서 쾌재를 부른다, 녀석이 질린 눈빛으로 허둥지둥 나를 쳐다본다,
헛. 평등하게애? 가난한 놈도 억울한 놈도 착취당하는 놈도 없이 모두가 똑같이 사는 세상? 그게 하늘나라라구? 천만의 말씀. 이봐. 당신은 웃기는 소릴 하고 있구만, 아니. 그럼 이 세상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악한 놈들은 어떻게 하고? 이 세상에서 수없이 우글거리는 버러지떼 같은 악한 놈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방치해 두고서도 세상이 절로 천국으로 바뀐다는 건가? 말도 아닌 헛소리! 악한 놈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해. 독사의 새끼들은 하나 남김없이 밤아 죽여야만 한다구. 성경에도 분명히 씌어 있지.
최후의 심판날에는 온 세상이 환란의 지옥으로 바뀌고,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상을 불로써. 불벼락을 내리쳐서 심판하실 거라고 말야. 그러므로 사탄의 자식들은 한 놈 남김없이 뿌리째 태워 죽여야만 해. 오로지 의인의 자식들만 하늘나라에 들 수 있는 거라구.
그런데도. 뭐, 악한 자들이나 선한 자들이나 함께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라구? 똑같이 혜택을 누리고?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회주의라니, 무슨......
작자가 뭐라고 변명하려 한다. 나는 또 손바닥으로 책상을 쾅쾅 두들겨 대며 소리친다.
어림없는 소리! 그건 부당해. 아암. 평등과 평화는 오로지 심판과 징벌로써만 가능한 거야. 흔히 알고 있듯,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이르셨지만, 그건 알고 보면 전혀 다른 뜻이야. 그 말은 참회하고 뉘우치고 회개할 줄 아는 선택된 원수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말이지, 사탄의 자식들은 아냐. 바로 너희 같은 작자들이 사탄의 자식들이지. 아니, 사탄 그 자체이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놈들. 공산주의자들, 다시 말해 빨갱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독버섯이야. 그런 독버섯은 뿌리를 뽐아 죽여야지. 씨까지 깡그리 말려서 다시는 이 세상에 돋아나지 못하도록 최후의 한 놈까지 완전히 말살을 시켜야 한다구. 너희 같은 독버섯과 병균들이 완전 멸종되는 날이 세상은 마침내 천국이 될 수 있을 거란 말야. 그러기 위해서 바로 우리가 이렇듯 밤잠 한번 편히 못 자고 허구한 날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지. 어쩔 수 없이 말야. 알겠어.
한바탕 퍼부어 주고 나니 속이 조금은 후련하다. 언젠가 주일예배 때 내가 특별기도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일어나서 그런 내용의 기도를 멋들어지게 해치웠던 적이 있다, 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은 훌륭한 기도였다고 누누이 칭찬을 해주었고, 아내 역시 감탄을 연발했다. 정말 감명 깊은 기도였어요, 최 집사님. 바로 최 집사님 같은 분들이 이 타락해 가는 세상에서 악의 세력과 밤낮으로 대적해 싸우고 있는 덕택에 우리 나라가 오늘날 이만큼이나마 번영과 안정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신자들도 이제부터는 더욱 적극적이고 용감하게 복음 전파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또 줄기차게 싸워야겠지요. 목사님은 송구스럽게도 그날 예배를 마치는 기도 속에서까지 내 얘기를 인용해 주었던 것이다.
똑똑,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이내 정양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내민다.
저어, 최 과장님. 국밥을 가져왔는데요.
아. 들어 와.
정양이 신문지로 덮은 쟁반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나간다. 나는 신문지를 벗겨 낸 다음 그것을 작자 쪽으로 밀어낸다.
자. 먹으라구. 국이 식으면 먹기가 곤란하지. 기름기가 많거든.
나는 약간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말해 준다. 암 먹어야지, 이제부터 시작인데, 잘 먹고 힘이 나야 술술 주문하는 대로 불 수 있을 게 아냐. 나는 내심 적이 흡족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작자는 마지못해 수저를 집어들고서 잠시 머뭇거리다가는 이윽고 느릿느릿 먹기 시작한다. 잔뜩 풀죽은 몰골로 숟가락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측은하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먹는 모습은 본디 초라하고 비굴해 보이는 데가 있다, 나는 그 동안 신문지를 펴 든다. 어제 조간신문이다. 프로야구 신인 스카웃으로 각 구단이 한참 열을 올리고 있고, 「람보」라는 미국 영화에 관객이 몰린다고 한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대학생녀석들은 여전히 철딱서니 없이 날뛰고 있고, 애꿎은 최루탄만 아깝게 헛돈으로 날리고 있다는 소식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이다. 제기랄, 신세 한번 드럽군. 어떤 놈들은 한가하게 영화관 앞에서 날마다 진을 친다는데, 쯧. 나는 크악, 가래침을 울궈 내어 바닥에 뱉고는 구둣발로 쓱쓱 문질러 버린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엔 박의 머리통이 불쑥 나타난다.
최 과장님. 댁에서 전홥니다.
나는 신문지를 내려놓고 일어나 방을 빠져 나온다. 빌어먹을. 왜 또 전화질이람. 투덜대며 계단을 올라간다. 전화기는 일층에 있으므로, 한 번씩 들락거릴라치면 여간 짜증스럽지가 않다.
여보. 나예요. 이젠 차라리 날더러 아예 죽어 버리라고 하세요, 제발!
수화기를 들자마자 아내는 느닷없이 징징 우는 소리부터 질러댄다.
뭐야. 또. 옘병할!
당신 어머니 말예요. 또 일통을 저질러 놨다구요.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글쎄 내가 잠깐 요 앞 슈퍼에 다녀오는 틈에, 어떻게 거실로 기어 나왔는지, 소파에다가 오줌을 질펀하게 싸 놓았지 뭐예요. 아무리 걸레로 지우고 향수를 뿌리고 해봐도 지린내가 가시질 않아요, 글쎄. 조금 있으면 목사님이랑 손님들이 들이닥칠 텐데, 어쩜 좋죠.
아내는 울음을 꺽꺽 삼키는 시늉이다. 나는 머리 꼭대기까지 차 오르는 짜증을 주체할 길이 없다. 집에서였더라면 전화통을 내던져 박살을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보. 오늘 목사님 심방 오시는 날인 거 알죠? 한 시 반에 오신댔어요. 당신한테 해줄 말씀도 있으시다니깐, 늦지 말고 잠깐이라도 들렀다 가세요. 알았죠?
난 수화기를 쾅 소리가 나게 거칠게 내려놓는다. 잡지를 뒤적이고 있던 박과 정이 힐끔 내 눈치를 보더니 얼른 시선을 돌린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문다. 눈이 수북이 쌓인 마당으로 찬바람이 낮게 쓸리고 있다. 어제 아침부터 퍼붓기 시작하던 눈은 그 사이 발목까지 파묻힐 만큼 쌓였다. 지금은 약간 멎은 듯하지만, 예년에 비해 대단히 많은 강설량이라고 오늘 아침 방송에서 말하는 걸 들었다. 화단가 벽돌 위에 쭈그리고 앉는다. 화단엔 이파리를 모두 지우고 뼈대만 앙상하니 남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껑충하니 서 있을 뿐이다.
여보. 이젠 뭔가 해결책을 찾아요. 어머니 혼자 때문에 우리 온 식구가 언제까지 이렇게 지옥 같은 생활을 해야 하우. 전번에 알아봤던 그 기도원 말예요. 다른 데보담은 시설도 괜찮은 편이고, 원장이 크리스천이라니까 믿을 만도 하잖겠어요. 제발 이번엔 어머닐 기도원으로 보냅시다. 어떡해요, 건강한 사람들이라도 살아야지. 또 그리 하는 게 어머니한테도 좋을 거예요. 남들이야 우리 사정을 빤히 아니까, 부모를 기도원에 맡겼다고 싫은 소릴 하지도 않을 거구요. 얼마 전부터 아내는 기도원 얘기를 들먹이며 부쩍 안달을 하는 기색이었다. 나 역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벌써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이 굴뚝같았다. 아내는 모르고 있지만, 그녀에게서 얘기가 나온 바로 얼마 뒤에 내 발로 걸어서 혼자 그 기도원이란 델 찾아갔었다. 처음 느낌으로는 그곳은 기도원이라기보다는 무슨 정신병자 수용소 같았다. 무허가 여인숙의 그것 모양 다닥다닥 붙은 수십 개의 방문마다엔 하나같이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겉으로 보기엔 머리통 하나 겨우 디밀 수 있을 정도의 철창문말고는 통풍구 하나 제대로 붙어 있지 않았다. 그 조그만 방안에 칠팔 명씩의 노인들을 수용해 놓고 겨우 매끼니 밥만 넣어 주는 모양인데, 그들 대부분이 정신 질환자이거나 노망 난 늙은이들이라고 했다. 더러는 발작이 심한 편인 환자들의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 두기도 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십여 마리도 넘는 개들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사납게 짖어 대는 그런 지긋지긋한 곳에다가 어머니를 버려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뒤틀려 오고 머리통이 깨져 버릴 것만 같아서 그만 도망치듯 산길을 내려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나도 더 이상 견디어 낼 자신이 없어졌다, 어떻게 하겠는가. 어머니를 거기에 보내 버릴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잖은가. 나는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자꾸만 끓어오르는 짜증스러움을 억누르려 애쓴다. 어머니를 맡겨? 거기에다가,.....나는 또 가래침을 뱉는다. 누런 가래침이 횐 눈 위에 고름덩이처럼 엉겨 붙는다. 불현듯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철길에서 최후를 마쳤다. 한마디 유언도 비명도 없이 아버지는 그렇듯 처참하고 흉측하게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날 아버지의 검붉은 피가 철길 주변에 어지러이 널려 있던 광경이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걸레쪽처럼 온통 갈기갈기 찢겨져 버린 아버지의 시신을 헌 가마니 한 장이 간신히 덮고 있었다. 연락을 받고 맨 처음 그곳에 달려갔을 때, 나는 아예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만 추악하고 혐오스럽다는 느낌. 그리고 그 무엇인가에 대한 엄청난 증오와 적개심으로 나는 몸을 떨며 서 있었을 뿐이다.
아버지를 이 꼴로 만든 게 누구인가. 무엇이 그를 이렇듯 추악하고 흉물스런 살덩어리의 파편과 핏물로 해체시켜 버린 것인가. 나는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원수를 상상해 내려고 애썼다. 분명 술이 취한 채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별안간 철길로 미친 듯 뛰어들어 그 지경을 당한 것이었으나, 그것을 단순한 사고나 자살이라고 돌리기엔 나로서는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분명 누군가의 책임이어야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놈들이 누구인지를 찾아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강제로 옷을 벗고 실직자가 된 후,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변했다. 저놈들, 저 빨갱이들을 죽여야 해. 달식아. 저놈들은 모두가 네 원수다. 피는 피로 갚아야 해. 은혜는 당대로 끝나지만, 원수는 수백 수천 년이라도 내리물림을 하는 법이니라. 애비가 못다 푼 한을 네가 풀어 다오. 그래야만 땅속에 억울하게 누워 계시는 네 조부모님과 큰집 작은집 식구들이 편히 눈을 감을 것이니라. 빨갱이 놈들의 씨를 말리지 못하면, 이 땅에 통일도 평화도 오지 않는다. 암, 남북 통일은 너희들 손으로 기어코 이루어야 한다.
아버지는 아직 어린 나를 붙잡고 때로는 징겅징겅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멸공. 반공. 방첩. 나는 책상 앞 벽에 그런 표어를 언제나 붙여 놓았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어김없이 감격하곤 했다. 또 아버지는 이런 말도 했다. 사람을 믿지 마라. 피를 나눈 가족들말고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 인간이란 족속은 모두가 그렇게 음흉하고 사악한 종자이니까. 눈앞에서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가깝고 다정한 척 웃고 호들갑을 떨어도, 속마음엔 언제나 칼을 품고 있다가, 이쪽이 돌아서는 순간 등뒤에서 어김없이 찌르는 법이니라. 빨갱이들이 바로 그러했다. 네 할아버지도 그렇게 해서 돌아가신 거다. 다른 놈들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서 은혜를 원수로 갚은 그 짐승 같은 놈들이 그랬단 말이다. 아버지의 그런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며 자랐지만, 막상 나는 그런 얘기들에 대해 그다지 실감하는 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철길 위에 흩어져 있는 아버지의 살덩이와 피의 웅덩이를 눈앞에 바라보며 서 있는 순간, 나는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내 몸 속엔 아버지의 그 붉은 피가 저주처럼 흐르고 있음을 그제서야 또렷하게 깨달았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학살당한 내 조부모와 친척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원한과 복수와 저주와 증오의 피였다. 그들의 피는 아버지의 몸 속에서 하나가 되었고, 아버지의 피는 다시 내 몸 속으로 흘러 들어와 내 심장과 실핏줄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마침내 원수를 찾아내었다고 생각했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았다. 내 조부모와 친척들 그리고 아버지를 그토록 처참하게 죽인 원수는 하나였다. 그 원수는 이번엔 내 목을 조르려 덤벼들 것이고, 또한 머잖아 틀림없이 내 아들과 딸과 내 아내를 노릴 것이며, 나아가 내 손자들과 또 그들의 아들들, 또 그들로부터 나들 더 많은 내 자손들까지 해치우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그들은 도처에 숨어 있었다. 이 자유로운 땅에서도 그
놈들은 곳곳에 독지네처럼, 독버섯처럼 숨어서 호시탐탐 활개 치고 기어 나을 틈을 엿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빨갱이들이었다.
국가를 혼란시키고 평화로운 세상을 뒤흔들어서 끝내는 암흑과 피의 소굴로 만들고자 획책하는 사탄의 자손들 -바로 그놈들이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선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심호흡을 해본다. 폐부로 스며 오는 차갑고 신선한 공기, 기분이 적이 나아진 듯싶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가깝다. 이제 일은 대충 끝이 난 셈이다. 어쩌면 오늘 저녁엔 '아방궁' 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실 수 있을지 모른다. 참, 그러기 전에 점심땐 집에 들러야 한다. 목사님 심방이 있는 까닭이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올리면, 찌무룩하던 기분도 훨씬 나아질 것이다. 정말, 신앙이란 참으로 오묘하고도 신비한 힘이 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눈을 감아 기도하는 시간엔 얼마나 평화롭고 따뜻한 은총이 가슴속에 느껴져 오는지. 그 놀라운 체험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가끔 마음이 약해지고 용기가 없어지면 즉시 주를 찾으십시오. 그때 주님께선 항상 최 집사님을 팔 벌려 안아 주실 것입니다. 최 집사님 같은 분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이 세상의 귀한 파수꾼 종이시니, 필시 다윗과 같은 용기와 솔로몬 같은 지혜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목사님은 오늘도 내게 그런 격려의 기도를 해줄 것이다. 그렇지. 나는 나 혼자만의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니잖나. 내겐 이 사회와 국가를 저 간악한 악의 세력들로부터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해. 아암.
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지하실로 이르는 계단을 내려간다. 그 동안에도 동료들은 수고하는 모양이다. 이방 저방에서 고함 소리와 신음 소리가 활기 있게 흘러나오고 있는 참이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붉은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일곱
푹신한 소파에 몸을 디밀고 앉아서도 팔을 들어 올리기조차 힘겹고 거북하다. 초콜릿 빛깔의 부드러운 소파의 천을 쓸어 보며, 마치도 그것이 난생 처음 구경해 보는 것처럼 생경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 의아스럽다. 그것이 지닌 부드러움이 오히려 심한 비현실감을 주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말을 정말 믿어도 좋은 것일까. 나는 시큰거려 오는 무릎을 손으로 주무르며 생각한다. 뭔가 사정이 달라졌으리라는 예감을 한 것은 저녁 무렵부터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오랫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그들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 난 그들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있음을 알아냈다. 어딘가 느긋해 하는 눈치가 보였고, 반말투가 없어졌으며, 노골적으로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려 했다. 저녁이 되자, 그들은 여럿이 함께 나타나 내 몸의 여기저기를 살폈고. 믿어지지 않게시리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대해 안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가죽잠바 사내가 말했다. 오 선생. 당신, 어제 밤에 꿈을 잘 꾼 모양이야.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말야.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막상 놀라지 않았다.
성기씨. 첨부터 우린 만나선 안 될 사람들였어요. 결국 이렇게 처참하게 깨어져서 서로 등을 돌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었던 거라구요(여자) 무슨 쌀이야 은애. 은앤 지금 일부러 거짓말을 하구 있어, 그렇지(남자) 고개를 들어 텔레비전에 눈길을 준다, 화면 속에서 두 남녀가 강둑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지금 이 시간 텔레비전 앞에서 저 남녀의 유치한 말과 동작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인가. 뭔가에게 철저히 기만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나는 입술을 악문다.
유리창 밖. 어둠 속으로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실내의 불빛이 유리창 너머 땅바닥을 비스듬히 드러내고 있고, 그 저편의 공간은 희미하게 지워져 있다. 여기가 어딜까. 아무리 보아도 평범한 단독주택의 거실처럼 꾸며져 있는데, 그렇게 넓은 지하실이 그 밑에 감춰져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 주변을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이나 소음이 전혀 없는 걸로 보아, 시내에서 꽤 떨어진 어느 야산 기슭이나 들판에 이 건물만 따로 떨어져 있
는 모양이다,
나는 한동안 창 밖으로 소리 없이 내려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허망하고 몽롱한 기분에서 쉬이 깨어나지 못한다. 버무나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그 풍경이 왠지 터무니없게 허황하고 어처구니없게만 여겨진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봐요, 오 선생. 날 원망하겠지만, 사실을 알고 나면 되레 감사해야 할 거요. 이렇게 불구속 처리하게 된 게 누구 덕인지 모를 거요. 허허헛.
사내가 말한다. 나는 창 밖으로 초점 풀린 시선을 보내며 생각한다. 어제 밤이 꼬박 새도록 사내는 그 붉은 방에서 내게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해 왔었지만. 지금은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하고는 무관하고 전혀 이해할 수조차 없는 언어의 파편들을 그저 몽유병자처럼 되풀이하고 또 주문을 외듯 따라 하기를 강요당했다는 사실말고는.
아하하하. 오호호호호. 텔레비전 화면의 남녀들이 호들갑스레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나는 차마 눈을 감아 버리기로 한다. 까닭도 대상도 알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떨게 만든다
이보쇼. 오기섭씨 모든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서로 상쾌하게 잊읍시다. 까짓 거, 나 역시 그러고 싶어서 한 일도 아니구. 이거 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다 보니까 부득이 생긴 일 아오. 참, 밖에 나가서 말조심하시구려. 하긴 사리를 분별할 만한 사람이니까 믿겠소만. 이건 경고라기보다는 충고요. 허허 자. 악수나 하고 헤어집시다. 웃는 낯으로 헤어져야, 담에 만나더라도 쑥스럽지 않은 법이오. 허허. 가죽잠바 사내가 악수를 청한다. 나는 멀거니 그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 사내가 가진 얼굴은 대관절 몇 개 쯤일까. 이런 모습도 인간의 표정이랄 수 있는 걸까. 정말이지, 인간이란 족속의 정체란 어떤 것일까. 나는 아직도 지긋지긋하게 길고 끔찍스러운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다. 사내는 혼자 손을 내밀었다가 내가 끝내 거절하자 쑥스러운 기색도 없이 도로 거두어 갔다.
그 사이 차가 도착했고, 사내들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맨 처음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바로 그 사내들이다.
잘 가요, 오 선생. 내 이름은 최달식이오. 그리고 아까 내가 한 말, 잊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요. 그럼.
문이 닫히기 전, 가죽잠바가 내게 말한다. 나는 뒷자리에 실려졌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최달식이라고? 그런데 그 자는 왜 제 이름을 내게 가르쳐 주었을까. 철대문을 나서자 사내들 중 하나가 자기의 저고리를 벗더니 내 머리 위에 씌운다. 거기서부터는 모든 게 처음 이리로 실려 오던 때의 되풀이다.
한동안 비포장길을 흔들리며 달려가던 차는 이윽고 덜컹거리기를 멈추고 부드럽게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사내들 중 누군가가 스위치를 넣었는지 라디오 소리가 흘러 나온다, 뉴스 시간이다. 증권 시장의 주가가 연일 상승세이고. 설악산은 폭설로 교통이 막혔다는 소식을 아나운서가 전한다. 간밤엔 비무장지대에 북괴군의 도발로 인한 약간의 총격전이 있었다고 유엔 사령부가 발표했으며, 서울 어느 아파트에 들어온 강도가 주부와 딸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 달아났고, 이라크의 폭격으로 이란의 한 도시가 불탔는데 사망자는 수백여 명이 넘었다 한다. 세계 챔피언인 우리 나라 프로 권투 선수는 부산에서 상대를 케이오시켜 방어에 성공했고, 마지막으로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성금 모금에 참여한 단체와 개인의 이름들이 호명되어지고 있다.
엎드린 채 그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왠지 자꾸만 웃음이 터질 듯하다.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세상과 시간들에 대한 며칠 동안의 얘기들이다. 어느 날 아침, 아무런 흔적도 없이 나는 세상으로부터 끌려 나와서 그 기괴한 빛깔로 채색된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고 아무런 관심도 기울여 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그 동안에도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가고 시간은 여느 때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있다. 또 피싯, 웃음이 터진다. 날 원망하지 마쇼.
이렇게 몸 성히 돌아가게 된 것만도 천만요행인 줄 알아야지. 최달식이라는 그 사내가 아까 그랬었다.
그래, 정말 이런 건 아무 일도 아닐는지 몰라. 난 어쩌다가 아주 허술한 함정에 빠져서 잠시 허우적대다가 다시 빠져 나온 정도에 지나지 않을 거야. 정작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숨겨진 밀실 혹은 지하실에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무서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행방 따위엔 눈길 한번 돌리지 않은 채 참으로 태연하고 태평스럽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아니, 누구보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 바로 그랬었다. 칠판에다 시험 문제를 풀어 가면서, 무심히 거리를 지나면서,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텔레비전 앞에서 턱을 괴고 엎드려 프로야구를 보면서. 나는 바로 그 똑같은 시간 이 땅 어딘가에 그렇듯 괴이하고 기묘한 붉은 방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예 상상조차 못하고 지내 왔던 것이다.
문득 머리에서 저고리가 벗겨져 나간다.
이젠 됐소. 일어나도 좋아요.
창 밖으로 가로등의 불빛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눈에 익은 거리. 상점의 간판들, 그리고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바쁘게 귀가하는 행인들이 보인다. 워우워우. 당신의 그 모습이 좋아. 귀여운 그 모습이 조오와. 워우워우. 타디오에선 노랫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다. 이윽고 차가 멎었고, 앞자리의 사내가 뛰어내리더니 뒷문을 열어 준다.
자, 내리시오. 여기서부턴 걸어가시는 게 좋겠소. 그리고 이거 받아요.
사내가 내게 가방을 안겨 준다. 그걸 받아 안고 나는 말없이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사내들을 태운 차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엉거주춤 서서 지켜보았다. 길바닥에 쌓인 눈이 가로등 불빛을 하얗게 반사하고 있다. 나는 한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눈에 익은 골목길. 그곳은 바로 며칠 전(나는 아직 그 동안 몇 날 몇 밤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사내들에게 붙잡혀 차에 태워졌던 바로 그 자리임을 나는 깨닫는다.
이윽고 나는 걷기 시작한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두어 발쯤 옮기다가 나는 전신주에 겨우 몸을 기대고 섰다. 저만치 십오 층짜리 아파트 건물이 어둠 속에 껑충하니 솟아 있는 게 보인다. 거기엔 내 집이 있다. 아내는 딸아이를 안고 초조하게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나는 눈어림으로 아파트의 창을 아래서부터 한 칸씩 세어 올라간다. 하지만 내 집이 있는 구층까지 이르기도 전에 시야가 엉망으로 혼란을 일으킨다. 닭장처럼 촘촘히 박힌 창문마다엔 환한 불빛들이 켜져 있다. 불현듯 피잉 눈물이 돈다. 돌아온 것이다. 내 집으로. 아내와 딸이 기다리는 우리 집으로,,,,,, 그러나 얼른 걸음을 옳길 수가 없다. 어찌 된 영문일까. 나는 지금 이 눈밭에 서서 내 집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육신이 정말 나 자신의 소유라는 게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제 난 결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예전의 나를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것이다.
붉은 방에서 보낸 그 몇 개의 밤과 낮 동안 내 육신과 영혼은 만신창이로 갈가리 찢겨져 버렸고, 그 자들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소름 끼치는 환멸과 증오로 걸레쪽처럼 찢겨져 버린 내 육신을 다시 내 집 앞에다가 멋대로 내팽개친 채 유유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자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겁고 단단한 불덩이 같은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차츰차츰 내 전신의 구석구석까지 뜨겁게 퍼져 나가다가 이윽고는 엄청난 열기로 타오르는 그것은 분노였다.
나는 집을 향해 다시금 걸음을 옮긴다. 누군가 맞은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인다,
여보세요. 오늘이 며칠입니까! 무슨 요일입니까!
나는 다짜고짜 고함을 지르듯 그렇게 물었다. 낯선 중년의 사내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여덟
차가 떠나고, 철제 대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저 친구. 용궁에 왔다 살아 나가는 기분이겠구만. 흐흐.
철문을 닫고 나서 현관으로 들어가며 박이 지껄인다. 나는 마당에 혼자 남아 허리에 손을 걸친 채 밤하늘을 쳐다본다 먹지 같은 하늘엔 아무 것도 빛나지 않는다. 얇은 눈가루들이 어둠 속을 날아와 뺨을 스치며 떨어진다, 왠지 까닭 모를 허탈감이 몰려온다. 이상하게도, 붉은 방에서 며칠씩 함께 씨름을 하던 작자들을 일단 떠나 보내고 나면. 늘상 이렇듯 바람 빠진 풍선 모양 허전하기도 하고. 누구에겐가 지독스런 모욕을 당하고 난 것처럼 불쾌하고 꺼림칙한 기분에 젖어 들곤 하는 것이다. 뭐랄까, 뭔가 대단히 아까운 것을 놓쳐 버린 듯한 아쉬움이, 어떤 맹목적인 증오랄까 분노 같은 것과 함께, 유독한 기포처럼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크악, 가래침을 뱉어 내고, 나는 거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소파에 등을 묻고 앉는다. 그러다가 문득 방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찾아낸다, 나이보다도 훨씬 늙고 추한 얼굴 그리고 주름진 이마 아래 박혀 있는 음울한 눈빛 속에서, 나는 오랜 세월 고통과 증오와 분노로 찌들려 온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죽여 버리고 싶어.
난 네가 싫다. 널 죽이고 싶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고 싶단 말이다. 나는 유리창 저편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는 그 흉측스런 얼굴의 사내를 향해 까닭도 없이 그렇게 마구 고함을 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다. 나는 일어나서 지하실로 통한 계단을 내려간다.
복도는 지하묘지처럼 음습하고 희뿌연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으아아아. 우욱. 삼호실에서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는 모양이다. 숨 넘어가는 시늉으로 질러 대는 비경 소리가 스테레오로 새어 나온다. 나는 맨 끝 방으로 들어가.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켠다. 파르르르. 형광등이 푸들푸들 불빛을 털어 내며 깜박이다가 켜진다. 온 방안으로 가득히 쏟아져 들어오는 핏빛의 바다,,,,,,
언제부터인가 이 붉은 방에 들어서면 나는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음을 느끼곤 했다. 붉은 벽, 붉은 천장. 붉은 침대 -그 속에서 사는 늘 쾌감 같기도 하고 통증 같기도 한, 어떤 아찔한 현기증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그래선지 이 방의 아늑하고 친숙한 분위기를 나는 좋아한다.
나는 기도를 올리기 위해 책상에 양 팔꿈치를 가지런히 세운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느라 허공의 어느 한 점을 조용히 응시한다.
이윽고 그 붉은 바다 위로 핏방울처럼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형체들,,,,,, 아버지, 용술이, 그리고,,,,,, 뇌막염으로 죽은 내 아들 한수,,,,,, 불쌍한 내 아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주님. 악을 멸하시고 의인을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 이 죄인을 버리지 마시옵고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굳건한 믿음으로 지켜 주시옵소서. 오오 주여. 저희들 비록 죄 많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양들이오니,,,,,,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어느새 성스러운 은총과 기쁨이 내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기 시작하고 있음을 나는 역력히 느긴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이 붉은 방 안을 가득히 채우기 시작하고 있다.
(현대문학, 198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