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 도 -이청준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은 없
었기 때문이었다.
1
해군 함정까지 동원한 파랑도 수색전은 작전 2주일만에 완전히 끝이 났다. 마라도 한 곳을 제외하고 나면 제주도 남단으로부터 동지나해 일대의 광막한 해역 안에는 섬 비슷한 것 하나도 떠올라 있는 것이 없었다.
예정된 해역 안을 갈아엎듯이 누비고 다닌 두 주일간의 치밀한 수색전에도 불구하고 배들은 끝내 섬을 찾아 낼 수 없었다.
섬은 없었다. 배들은 다시 항구로 돌아왔다.
작전 임무가 끝난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도 도깨비 장난 같은 수색이었다. 결과야 어느 쪽이든 한 가지 조그만 사고만 없었더라면, 이제 이 해역 안에 파랑도라는 섬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된 이상 작전 임무 자체는 그런 대로 원만히 완수되어진 셈이었다.
그런데 작전 중에 한 가지 개운찮은 사고가 일어났다
천 남석 기자 - 파랑도 수색 현장 취재를 위해 두 주일 전 출항 날부터 작전 함정에 함께 승선해 온 남양일보사 천 남석 기자의 영문 모를 해상 실종 사고가 생긴 것이다. 작전 수행 과정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민간인 사고였다. 작전 당국이 최종 책임을 져야 할 성질의 사고는 물론 아니었다, 사고처리 방법도 간단했다. 문제될 일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천 기자의 실종은 어쨌든 이번 수색전 수행 중의 한 불행스런 오점이 아닐 수 없었다. 사고 원인이나 경위에 대해서도 아직 석연찮은 점이 없지 않았다.
취재 기자의 실종 사고에 대해 작전당국으로서도 일단 마무리를 지어 둬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섬을 찾으러 나갔다가 새로운 섬 이야기 대신 한 취재 기자의 실종 사고 소식을 싣고 돌아오는 수색 함정들의 귀항에는 두 주일 동안의 작전 임무두 종료에도 불구하고 개운찮은 숙제를 남기고 있었던 셈이었다.
배들이 항구로 돌아온 날 저녁 무렵, 전령선 한 척이 멀리 외항에 정박중인 작전 선단을 떠나 쏜살같이 내항 부두를 향해 달려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전령선은 중위 계급장을 단 해군 장교 한 사람을 부두에 내려놓고, 엔진도 끄지 않은 채 그 길로 다시 뱃머리를 선단 쪽으로 되돌려 가 버렸다.
부두에 혼자 남은 중위는 우선 현기증부터 주저앉히려는 듯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고 있는 전령선을 한참이나 우두커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몸매에 대리석을 깎아지른 듯 하얀 얼굴이 드물게 세련돼 보이는 젊은 장교였다. 배가 한참 멀어져 간 다음에야 중위는 이윽고 몸을 돌이켜 세웠다. 그리고 이제부턴 그 자신도 무슨 부산스런 생각에 쫓기기 시작한 듯 얼굴 표정이나 거동이 갑자기 조급스러워지고 있었다. 빠른 걸음걸이로 부두를 걸어나온 중위는 시가지로 들어서자마자 흔히 길이 서툰 사람들이 그렇듯이 방향을 가리지도 않고 대뜸 지나가는 택시부터 불러 세웠다.
"남양일보사로, 남양일볼 아시오?"
"남양일보요? 알구말구요. 하지만 길을 좀 돌아야겠습니다. 중위님이 거꾸로 가는 차를 잡으셨어요."
중위는 그제서야 뭔가 생각이 망설여지는 듯 자기의 팔목시계를 잠깐 들여다본다. 5시 50분. 다소 시간이 바르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 쪽으로나,,,,,,빨리만 데려다 주시오."
그는 곧 차 속으로 몸을 디밀었다.
"그야 이 쪽이나 저 쪽이나 시간은 대략 마찬가집니다. 시내를 한바탕 몽땅 돌아간다 해도 길이 얼마 돼야죠."
운전수갸 그 중위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시간이야 얼마를 더 먹었든 적어도 중위가 바란 만큼은 약속을 지켜 준 셈이었다.
남양일보사 현관 앞에서 차를 내린 중위가 수위실 전화를 통해 이 신문사의 편집국장을 찾았을 때, 이층 편집국의 양 주호 국장은 할 일도 대충 끝냈겠다 이제 막 그의 자루처럼 커다란 웃도리를 찾아 꿰고 있던 참이었다. 잠시 후에 이층 편집국으로 올라간 중위가 엉거주춤 석양을 등지고 앉아 있는 양 주호 편집국장의 커다란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편집국장님 이십니까?"
중위는 제복을 입은 사람답게 정중하고도 절도 있는 목소리로 양 주호 국장에게 물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 양 주호를 응시하듯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면도가 잘된 정결한 얼굴로 해서 그의 눈길은 절도 있는 말씨만큼이나 분명하고 정중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편집국 일을 맡아보고 있는 양 주홉니다만."
양 주호가 잠깐 그의 거대한 몸집을 의자에서 들썩여 보였다. 그는 이 거동이나 생김새가 너무도 분명해 보이는 젊은 중위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어떤 가벼운 긴장기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표정이었다. 몸집이 큰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주호의 호인다운 미소가, 중위를 대면하면서부터는 그의 투수수한 볼 수염에 가려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중위는 여전히 그 분명하고 정중한 목소리로,
"아, 그렇습니까. 전 이번에 우리 해군에서 수행한 파랑도 수색 작전의 작전 사령부에서 나온 정훈 장교 선우 현 중위입니다."
착임 신고라도 하듯 가차없는 자기 소개를 끝내고 나서, 새삼스레 다시 허리를 잠깐 굽혀 보이고는,
"귀사에서도 이번 저희 작전에 취재 기자를 한 분 파견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만."
"아, 그렇습니까.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희 신문사에서도 기자 한 사람이 따라갔었지요. 사회부에 천 남석 기자라고......"
양 주호는 그제서야 중위에게 그의 그 독특한 호인다운 웃음을 잠깐 웃어 보이고는 창문 아래쪽에 놓인 응접 소파로 뒤늦게 중위를 안내했다. 무겁고 둔해 보이는 몸집에다 한곡 다리마저 절뚝거리고 있어서 양 주호는 그 때 그 자기의 자리에서 소파까지 몸을 운반해 가는 데도 테이블 한쪽에 기대어 두었던 몽둥이 모양의 투박한 나무 지팡이 신세를 지고 있었다. 한데 양 주호는 벌써 중위가 말하려는 용건을 분명히 눈치채고 있을 텐데도, 웬일인지 그 쪽에는 아직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젠 배가 들어온 게로군요. 작전은 다 끝났습니까?"
두 사람이 소파로 자리를 잡아 앉자 양 주호가 중위에게 담배를 권하면서 남의 일처럼 말했다.
"그렇습니다. 작전은 지난 X일 18시를 기해서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섬은 찾았습니까?"
"작전 지역 안에는 파랑도라는 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양 주호는 예상하고 있었던 대로라는 듯, 그러나 중위의 말은 별로 깊이 수긍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몇 차례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중위는 아무래도 양 주호가 무슨 딴전을 피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불행한 사고가 한 가지 발생했습니다. 국장님께서도 이미 보고를 받고 계실 줄 압니다만. "
그는 양 주호 국장이 다치 화제를 흘리기 전에 용건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양 주호의 반응은 아직도 마찬가지였다
"사고라니요? 무슨,,,,,,무슨 사고가 있었습니까?"
"귀사에서 파견하신 천 남석 기자의 실종 사고 말씀입니다, 아직 보고를 못 받고 계셨습니까?"
"아, 그 천 기자의 일이라면 나도 벌써 얘길 들었습니다. 그저껜가요? 통신실로 연락이 들어왔더군요."
그는 역시 사고를 미리 알고 있었다. 한데도 그는 도대체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만한 사고 이야기라면 일부러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할 필요도 없었다는 듯 멀거니 맥이 빠진 눈초리로 중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중위는 차츰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흰 최선을 다해서 다시 천 남석 기자의 수색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조바심이 치미는 어조로 민첩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천 기자의 구조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저횐 천 기자의 시체 인양마저 불가능했습니다. 제가 여길 찾아온 용건은 귀사 측에 사고의 경위를 말씀드리고, 저희 작전 부대를 대신해서 이 불상사에 대한 유감의 뜻을---"
그때였다. 양 주호가 갑자기 중위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 말씀이시라면 전 자리가 아닌 것 같군요. 전 이 회살 대표할 만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우리 사장님을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일부러 이야기를 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중위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담뱃불을 비벼1L고 말았다. 양 주호는 자기가 신문사를 대표해서 중위의 전갈을 접수할 쉬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국장이 회사를 대표할 수 없다는 건 물론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굳이 그런 일반의 질서만 따져 가릴 수가 없는 경우였다. 신문사라는 곳의 체제나 업무 성격도 그러하거니와 처음부터 중위가 편집국장을 찾은 데는 또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 주호의 태도가 좀 지나친 것 같았다. 그것은 이미 겸손이 아니었다. 중위는 기분이 언짢았다. 느닷없이 엉뚱한 고집이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표현해 버리지 않을 만큼 충분한 참을성이 훈련되어 있었다. 그는 조금도 언짢은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은 채 아까보다는 좀더 정중하고 상냥스런 어조로 말했다.
"아닙니다, 사장님까지 뵐 필요는 없습니다. 공식적인 사고 화인은 저희 작전 사령부로부터 다시 서면 통보가 있을 테니까요. 전 다만 국장님께 구두로나마 일차 사고의 전말을 확인해 드리고 저희 작전 부대의 유감의 뜻을 전해 올리면 그것으로 임무가 끝납니다."
"사고 경위야 전번에도 대략 설명이 되어진 거 아닙니까. 그 때문이라면 일부러 이런 번거로운 걸음걸일 하실 필요가 없었는데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게도 사고에 대한 일단의 책임은 있으니까요. 경위를 분명하게 설명드려야 할 책임이 말씀입니다.”
"사고 책임 문제 때문에 무슨 말썽이라도 생길까봐 걱정이신가 보군요. 하지만 그건 우리가 따지고 싶지 않다면 그걸로 그만 아니겠습니까? "
양 주호는 이제 노골적으로 짜증스런 어조가 되고 있었다.
중위는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 이 몸집 큰 중년 사내의 힐난조에 오히려 어떤 수수께끼 같은 호기심이 동해 올랐다. 중위는 천천히 다시 담배를 한 대 집어 물었다. 불이 꺼져 있는 양 주호의 담배에다 먼저 라이터를 켜 붙여 주고 나서 자기의 담배에도 불을 붙였다.
"국장님은 이를테면 이 신문사에서 천 남석 기자의 직속 상사가 아니십니까? 그리고 전 실상 사고가 나기 전에 천 기자로부터 국장님의 말씀을 자주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국장님을 찾아뵌 걸 후회하진 않겠습니다."
"선생은 그럼 배에서 천 기자하고도 함께 지내신 일이 있으십니까?"
마지못해 응대해 오는 양 주호의 대꾸.
"물론입니다. 사고가 나기까지 천 기자와 전 줄곧 같은 배에서 지내다시피 했으니까요. 전 정훈 장교 아니겠습니까. 이번 일도 실은 그래서 저한테 임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
"천 기자가 절 뭐라고 하던가요?"
역시 관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말투. 중위는 그만 맥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용기를 내어 정중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항아리라고 하더군요."
"항아리라니, 무슨 항아리 말요?"
"그야 물론 술을 담는 항아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술을 다섯 말쯤 부어 넣어도 속이 차 오를 줄 모르는 초대형 항아리라구요. 죄송합니다."
"아니 천 남석이 그 녀석이!"
짐짓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눈을 껌벅이고 있던 양 주호가 드디어는 그 커다란 배를 들먹이며 털털털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술항아리 이야기가 나오자 천 남석 기자의 사고 같은 건 이제 머릿속에서 까맣게 사라지고 만 듯 더없이 유쾌한 얼굴로 중위에게 물어 왔다.
"그래 선생은 그 말을 곧이들었소? 날 보니까 그 말이 진짜 정말이었던 것 같소?"
"글쎄올습니다. 술을 부어 담아도 좋은 항아린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항아리라면 어쨌든 큰 항아리일 거라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전 아까 이 방을 들어서고 나서 아무한테도 국장님을 물을 필요 없이 곧장 이리로 걸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중위도 좀 안심이 된다는 듯 미소 어린 눈길로 양 주호 국장을 바로 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이 터무니없이 몸집이 큰 사내의 성미에 대해선 어느 정도 자신을 얻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관심에서 여쭙는 것입니다만,,,,,,"
중위가 이번에는 허물이 훨씬 덜한 말투로 양 주호에게 다시 궁금한 대목을 묻기 시작했다.
"국장님께선 아까 천 남석 기자의 실종 사고에 대해선 경위나 책임을 따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셨는데 그건 무슨 까닭입니까? 천 기잔 그토록 괴사에서 외톨박이 꼴이었다는 겁니까, 아니면,,.... 아, 그야 물론 저희 입장에선 그럴수록 일이 간단해지긴 합니다만,,,,,,"
“선생들의 입장이 좋아지셨다면 그걸로 그만 아닙니까, 경윈 따져서 뭐 합니까? 천 기잔 아마 자살을 한 걸 텐데 말입니다."
이번에는 다시 또 무관심해지는 듯한 양 주호의 대꾸. 그러나 중위는 이제 그 양 주호 국장의 무관심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기세인 것 같았다.
"천 기자가 자살을 했을 거라구요?"
중위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양 주호에게 덤벼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양 주호는 정말 엉뚱한 말을 하고 있었다. 천 기자의 사고 경위를 따지지 않는 이유를 그는 천 기자가 아마 자살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선우 중위의 입장만 점점 더 편리하게 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중위는 물론 그 양 주호의 말을 무심히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중위 역시 그 천 남석의 죽음에는 처음부터 늘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느껴져 오고 있는 터였다. 배에서도 그랬고, 전령선을 내려 이 신문사를 찾아오고 있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이 속을 짚어 낼 수 없는 사내 앞에서 공식적인 그의 용무를 치러 차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실상 그 천 남석 기자의 죽음에 대한 끝없는 의구가 맴돌고 있던 참이었다.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중위는 양 주호 국장 앞에 그런 말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섣부른 상상이나 추리만으로 사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양 주호 국장이 먼저 그 천 기자의 자살로 추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듯 관심이 덜한 그의 목소리가 오히려 더 단정적이었다, 수수께끼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중위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양 주호는 잠시 대꾸가 없었다.
중위는 연거푸 물어댔다,
"다시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만, 그럼 천 남석 기자는 이번 수색작전 결과에 대해 무슨 특별한 확신 같은 거라도 가지고 있지 않았었나요?"
"특별한 확신이라니 무슨,,,,,,"
"이 신문사에서 천 남석 기자를 선발해 보내신 것은 물론 국장님이셨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국장께선 가령 그 천 기자가 누구보다도 이번 작전에서 섬을 찾게 되리라는 화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든가. 적어도 섬을 찾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는 여겨지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진 모르겠어요. "
양 주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갈수록 아리숭해지고만 있었다.
"이번 취재는 제가 그를 선발해 보내고 말고 할 여지가 없이 천 기자 자신이 자청을 하고 나선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마 그 천 기자에게서 섬에 대한 무슨 화신 같은 게 엿보였지 않았을까 하는 선생의 생각은 쓸데없는 추측일 겝니다. 천 기잔 실상 평소부터 섬을 잘 믿으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확신이 있었다면 섬에 대한 기대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섬 이야기 따윈 제대로 곧이듣고 싶지가 않았던 쪽이었을 겝니다. 천 기자가 이번 취재 여행을 자청하고 나섰던 것도 오히려 그런 자기 확신을 위해서였지 않았나 싶구요."
"그렇다면 천 기자는 이번에 저희가 섬을 찾아 내지 못한 데 대해서도 특별히 실망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실망이 아니라 만세를 불렀을지도 모르지요. 한데 선생은 도대체 제게 무얼 알고 싶으신 겁니까?
"글쎄요. 똑바로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아, 이건 물론 저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한 일입니다만, 저 역시 천 기잔 어쩌면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기보다, 그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들고 있었거든요. 한데 천 기자가 그때 실망을 할 필요가 없었다면 국장님께선 어떻게 그의 자살을 단정하고 계신지 저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럼 선생도 정말 그 천 남석이 자살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천 남석이 섬을 찾지 못한 실망 때문에?"
양 주호는 비로소 표정이 바뀌었다. 천 남석이 정말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중위의 말에 그는 마치 죽었던 천 기자가 다시 돌아왔노라는 소리라도 들은 듯 불시에 어떤 생기 같은 것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러고는 중위의 질문은 제쳐두고 자기 쪽에서 먼저 그 중위를 다짐하고 나섰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의심이 떠올랐지요? 천 기자한테서 무슨 그럴듯한 기색이라도 엿보인 데가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
양 주호 역시 천 기자의 자살을 추측하고 있으면서도 아직은 어떤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던 것일까. 천 남석의 죽음이 중위에게서마저 그런 의심을 받고 있는 이상 그는 이제 그 중위에게서 어언 새로운 확신이라도 얻어내고 말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기는 이제 중위에겐 절대로 다른 대답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위협기 어린 눈초리로 중위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중위는 물론 아직 그 양 주호 국장을 만족시킬 만한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중위는 잠시 말이 궁해진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는 마침내 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내 앞에 전에 없이 자신 없는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전 물론 아직 천 기자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할 만한 근거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고가 있기 전날 밤 천 기자의 태도는 아무래도 평상시와는 좀 다른 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전 그날 밤 그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 밤 천 기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그야 물론 섬 이야기였습니다. 1날은 마침 수색 작전이 모두 끝나고 난 날 밤이었는데 저녁 무렵부터 느닷없이 심한 폭풍우가 몰아닥쳐 왔어요. 천 기자는 그날 밤 저의 방으로 와서 저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폭풍우의 소동 속에서 둘이 함께 술즐 마시면서 그가 새삼스럽게 섬 이야기를 꺼냈거든요. 이야기가 자정을 넘도록 길게 계속되었어요. 무척도 절망적인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고는 마치 무슨 이상한 예감에라도 사로잡힌 사람처럼 무척도 열심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1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이야기가 끝나고 그는 제 방을 나갔습니다. 한데 그러고는 그만이었어요. 그게 제가 천 기자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날 밤 천 기자가 섬 이야기를 한 건 이어도가 아니었습니까? 이번에 당신들이 찾으려고 했던 파랑도가 아니라 이어도라는 섬 말입니다."
양 주호가 조급한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그러자 중위는 미처 그 자신도 아직 자기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얼굴로 자신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천 기자는 처음부터 우리가 찾고 있었던 파랑도와 이어도를 늘 같은 섬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섬을 부를 때는 항상 그 이어도 쪽을 택했으니까요. 이어도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아마 국장님께선 곧이 들으려 하지 않으시겠지만, 천 기자의 불상사가 정말 그의 고의에 의한 사고였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날 밤 천 기자의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었던 어떤 치명적인 절망감은 바로 그가 그 이어도를 만날 수 없었던 데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나, 전 그런 식으로만 추측해 오고 있습니다. 천 기자의 실종이 확인되고 난 다음에 저에게 떠오른 생각이라곤 이상하게도 늘 그날 밤 그 천 기자의 이어도 이야기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천 기잔 정말로 자살을 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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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기자의 실종 사고가 그날 밤 그의 이어도 이야기와 어떤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선우 중위의 추측은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니었다.
이어도-그 이어도에 관해서는 선우 중위로서도 물론 이번 작전과 관련해서 어차피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어도에 관한 이야기는 파랑도 수색작전이 시작되기 전서부터 충분한 조사가 행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이어도는 실상 작전의 한 간접적인 동기가 된 섬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를테면 오랜 세월 동안 이 제주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 전설의 섬이었다. 천리 남쪽 바다밖에 파도를 뚫고 꿈처럼 하얗게 솟아 있다는 제주도 사람들의 피안의 섬이었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지만, 제주도 사람들의 상상의 눈에서는 언제나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수수께끼의 섬이었다. 그리고 누구나 이승의 고된 생이 끝나고 나면 그 곳으로 가서 새로운 저승의 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제주도 사람들의 구원의 섬이었다. 더러는 그 섬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한 번 그 섬을 본 사람은 이내 그 섬으로 가서 영영 다시 이승으로는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섬이었다,
언제부턴가 이 곳 제주도 어부들에게선 이어도가 아니라 그 이어도와 비슷한 또 하나의 섬 이야기가 전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파랑도의 소문이 생겨난 것이다. 파장도의 소문은 이어도하고는 달리 좀더 구체적이고 널리 퍼져 나갔다. 망망 대해 어느 물길 한 굽이에 잿빛 파도를 깨고 솟아오른 파랑도의 모습을 보았다는 어부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섬을 보았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늘과 바다를 걸어 자기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단언했다. 이윽고 파랑도 소문의 주변에는 서서히 현실석인 이해 관계가 얽히기 시작했고, 보다 더 구체적인 관심 속에서 소문의 근원이 따져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혹시 썰물 때만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밀물 때가 되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거대한 산호초 더미가 아닌가 의심했다. 3.게 정말로 섬의 모양을 갖춘 것이라면 남해 지도가 온통 다시 고쳐 만들어 져야 할 판니었다. 사람들은 마침내 이어도의 전설을 생각해 냈다. 옛날부터 이 바다의 어디엔가는 이어도라는 섬이 숨어 있다는 구전이 전해 내려오는 터이었다. 이어도에 관해서는 언젠가 그것을 보았노라는 사람의 전설도 남아 있고 아직도 제주도 일대에는 그 이어도에 관한 분명한 민요까지 남아 있지 않느냐. 이어도의 전설은 아마 아랑도의 실재에서 비롯된 제주도 사람들의 구전에 의한 또 다른 전설의 하나일 것이다. 파랑도의 실재 가능성은 이어도의 전설로 하여 좀더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파랑도를 찾아보자. 그리하여 당국은 마침내 파랑도의 수색 작전을 계획했고, 결국은 파랑도고 이어도고 이 세상엔 그런 섬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피 파랑도가 실재했느냐 안 했느냐보다도 그에 대한 천 남석 기자의 태도였다. 양 주호 국장이 이미 점을 치고 있었던 대로 그는 과연 수색 작전 취재를 위해 배를 올라오고 나서도 파랑도의 실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정말로 섬을 찾아 낼 수 있다고 보세요? 작전이 끝나고 나면 사실이 다 밝혀지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무슨 동화 같은 기분만 드는군요.
-나, 나말요? 그야말로 섬을 찾아 내지 못한다면 당신네들의 우스꽝스런 뱃놀이를 구경온 셈이 되겠지요. 하하------
작전 결과에 대해서는 도대체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싱거운 소리를 곧잘했다. 어떤 때는 아예 그 수색 작전 동기에 대해서마저 심히 회의적인 언동을 서슴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어도의 전설을 파랑도의 실재 가능성에 대한 근거로 삼고 있는 당신들의 생각이야말로 전혀 순서가 뒤바뀐 것 같아요. 아직은 가상의 존재에 불과한 그 파랑도가 이어도의 전설을 만들어 냈을지 모른다는 가정이 가능하다면, 그 역으로 이어도의 허구가 파랑도라는 또 하나의 허구를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보다 설득력이 더하지 않을까요. 파랑토고 이어도고 아직은 우리 눈에 들어온 일이 없는 지금 형편으로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가정이 동시에 가능하다면 당신들은 차라리 그 파랑도보단 처음부터 이어도 쪽을 찾아나선 편이 더 동화적이지 않았겠어요. 허구가 쌓은 또 하나의 허구를 찾아 나서느니보단 차라리 첫 번째 허구에 해당하는 이어도 쪽을 찾는 편이 더 그럴듯하지 않았겠느냔 말입니다.
그리고는 도대체 다음부터는 파랑도 수색 작전 명령 자체를 그 혼자는 이어도 수색 작전이라 부르며, 이어도, 이어도, 언제나 그 이어도라는 이름으로 파랑도의 이름을 대신해 부르고 있던 것이었다.
작전 결과에 대해선 누구보다 여유가 만만해 보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천 남석 역시도 알고 보면 그의 말처럼 실상 그렇게 여유가 만만해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다만 늘 그렇게 여유가 만만해 보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는 내심 누구보다도 섬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 중위는 그렇게 생각했다. 작전중 천 기자가 갑판 난간 같은 데에 기대서서 청
동색 파도가 끝없이 밀려 올라오는 남쪽 수평선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때
-그는 늘 표정이 가지런하고 빈틈이 없어 보이는 편이긴 했지만, 그가 그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을 때 그의 그 꿈을 꾸는 듯한 눈길 속엔 늘 어떤 간절한 소망 같은 것이 어려 있곤 했었다, 그리고 그 가지런한 두 어깨죽지에선 문득문득 어떤 무기력한 낭패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섬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섬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오히려 늘 어떤 여유 같은 것을 가지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파랑도와 이어도의 혼동도 천 기자에겐 아예 그 파랑도고 이어도고 이 세상에선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강렬한 자기 회의의 표현일 수 있었다.
한데 마침내 그 두 주일 동안 수색 작전이 끝나고 이젠 정말 파랑도고 이어도고 모두가 그 허활스런 소문의 섬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나자 천 남석은 그만 갑자기 여유를 잃고 만 것이었다.
작전이 끝나던 날 밤이었다. 선우 중위가 양 주호에게 말한 대로 그날 밤은 느닷없이 몰아닥친 폭풍우로 해서 바다와 하늘이 온통 어둠 속에 한데 뒤엉키고 있었다. 작전을 끝내고 기지 귀환 길에 오른 함정들마저 미쳐 날뛰는 바다의 행패를 견디다 못해 최저한의 항진 속도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서도 선우 중위는 이 날 밤 천 남석 기자와 함께 사령선 자기 침실에서 모처럼 기분 좋은 취기를 즐기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불어닥치기 시작한 폭풍이 밤 10시쯤부터는 배를 아주 들어 엎을 듯 기세가 더욱 사나와지고 있었는데, 그러자 천 남석 기자가 자기 방에서는 혼자 그 소동을 견디기가 어려웠던지 모처럼 선우 중위의 침실로 술병을 숨겨 들고 온 것이었다.
"굉장하군요. 전 이런 잠자리 대접은 처음입니다. 술이나 마십시다."
천 남석이 선우 중위의 방을 들어서면서 한 말이었다. 선우 중위는 대뜸 천 남석의 그 농기 어린 목소리에 그가 좀 검을 먹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천 남석 기자로선 아닌게아니라 고런 잠자리는 처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배를 자주 타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런 밤 얼마간 겁을 먹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고는 무심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당히 기분좋은 속도로 알알한 취기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한데 그렇게 한참 술을 마시다보니 선우 중위는 이 날밤 천 남석의 거동이 여느 때하곤 좀 이상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아, 이거 너무한걸. 이래도 배가 괜찮을까요?"
배가 한 차례 크게 내려앉고 술병이 흔들릴 때마다 고는 그답지 않게 자주 바깥 쪽 소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불안스런 기색을 감추려는 듯 술잔을 비워 내는 속도도 선우 중위보다는 곱절이나 더 빨랐다, 그는 완전히 여유를 잃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듯 느닷없이 그 이어도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때 아마 우리 조상들은 이어도라는 섬을 생각했던 모양이지요. 아마 폭풍에 배가 깨지고 나면 그 이어도로 헤엄을 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선우 중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근심한다거나 불안해하는 빛을 함부로 엿보여 본 적이 없던 천 남석이었다. 이어도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토록 적대적인 회의픈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천 남석이 이 날 밤은 너무도 쉽사리 겁을 먹고 있었다. 너무도 진지하게, 그리고 새삼스러울 정도로 섬을 저주하고 있었다.
"이어도라는 그 터무니없는 허구가 사람들을 무참히 속인 거지요. 사람들은 이어도에 속아 죽음이 기다리는 바다를 두려워할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폭풍을 만나고도 속수무책으로 이어도만 찾다가 가엾은 물귀신이 되어가곤 했습니다. 선우 중위도 아시겠지만,,,,,,"
그는 부재가 확인되고 난 이어도의 위험스런 허구에 대해서 좀더 신랄한 비난을 계속했다. 그는 한사코 이어도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싶어했다.
"선우 중위도 아시겠지만 이어도란 원래 이 제주도에선 사람이 죽어 저승으로 가서 그 저승의 삶을 다는 섬? 불행한일이지만 이어도가 정말 죽음의 섬이 분명할 거라는 덴 제법 그럴듯한 소문까지 나도는 판이죠. 이 곳 뱃사람들 가운덴 꿈에선지 환각에선지 가끔 그 섬을 본 사람이 있다는 말도 있는데, 그렇게 한 번 섬을 보게 된 사람은 예외 없이 며칠 후엔 곧 세상살이를 그만두고 만다는 겁니다. 섬을 한 번 보기만 하면 누구나 곧 그 섬으로 가고 만다는 거지요. 그게 죽음의 섬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제주도 사람들 사이에선 또 그 죽음의 섬을 이승의 생활 속에서 설명하려는 망칙스런 버릇들이 생기고 있었던 것 같아요. 유식한 말로 이어도의 꿈이 있기 때문에 현세의 고된 질곡들을 참아 낼 수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언젠가는 그 섬으로 가서 저승의 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희망 때문에 이승에선 어떤 괴로움도 달게 견딜 수가 있노라고 말입니다. 죽음의 섬이 마침내 구원의 섬이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이 섬은 이승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세의 생활까지 염치없게 간섭을 해 오고 있는 꼴이지 뭡니까."
살아 있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그 섬사람들에게도 죽음이나 그 저승의 꿈은 결국 그들의 현세적 삶의 한 방식으로서 존재하고 있노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천 남석은 바로 이어도의 그런 현세적 기여를 무엇보다도 못 마땅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섬사람들이 어차피 배를 타지 않으면 안 뒬 운명이었다면, 이어도의 존재야말로 그 사람들에겐 커다란 위안이 아니었겠소. 배를 타지 않으면 안 뒬 운명이 분명하면 분명해질수륵 이어도는 그 사람들의 구원이 아니었겠느냔 말입니다. "
선우 중위가 모처럼 한 마디 끼여드는 소리에 천 남석은 느닷없이 발칵 화를 내기까지 했다.
"배를 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라뇨? 처음부터 세상을 그렇게 타고난 운명이 어디 있단 말요. 운명은 타고나진 게 아니라 바로 그 섬이 만들고 있었던 거예요. 이어도의 환상이 그 허망한 마술로 사람들을 섬에서 떠나지 못하게 묶어 놓고 끝끝내 배만 타게 만들어 버린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길고 짧은 생애들을 고스란히 이 섬 위에서 견디게
했다가 종내는 그 죽음의 섬으로 가엾은 생명들을 흘려 다고 있었던 거란 말예요."
이어도에 대한 천 남석의 저주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고 있었다. 폭풍은 여전히 기세가 켜이지 않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갈수록 선체가 오히려 점점 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도에 대한 저주 때문인지, 아니면 그 지독한 폭풍의 행패 때문인지 천 남석의 불안감은 이제 극도에 달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고는 거의 자기 혼자서 양주병 하나를 바닥까지 비워가고 있었다. 선우 중위로선 형용키조차 어려온 어떤 근심기나 초조감 같은 것이 천 남석의 얼굴 위로 쉴새 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근심기나 초조감이 심하면 심해갈수록 천 남석의 이어도에 대한 저주는 점점 더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트는 자기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잠시 말을 끊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전 그 이어도 이야기는 좋아한 편이 아니었어요."
이 날밤 배 안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회고였다.
“어머니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머니 곁에만 가면 전 항상 어머니에게서 그 이어도의 노래를 들을 수가 있었으니까요. 전 유년 시절을 온통 그 어머니의 이어도 노래 곁에서 그 소리를 들으면서 보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선우 중위야 듣고 있든 말든 천 남석은 그 절망적인 목소리로 자신의 기이한 유년 시절을 차근차근 들춰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또 이어도가 이야기의 실마리가 되고 있었다. 실마리뿐만 아니라 그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온통 이어도와 그 이어도와 상판해서 기억될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의 회상뿐이었다.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역시 그 이어도였다. 무척도 긴 이야기였다. 그리고 듣고 있던 선우 중위까지도 나중에는 어떤 기묘한 감동 같은 것으로 몸을 멸고 있었을 만큼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새벽 1시가 훨씬 지나고 있는 시각이었다. 천 남석은 이야기를 모두 끝내고 나서 잠시 술기라도 식히고 싶은 듯 말없이 혼자 선우 중위의 침실을 나갔다. 그리고 그는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이어도가 문제였다. 천 남석의 죽음에 선우 중위의 추측처럼 아직 어떤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숨겨지고 띤다면. 그 비밀은 아무래도 그날 밤 천 남석의 그 이어도에 대한 절망적인 이야기 속에 열쇠가 감추어져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3
선우 현 중위는 이 날 저녁 전혀 계획표엔 들어 있지 않았던 장소에서 역시 처음 계획표엔 예정이 없었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집 (이어도). 술집 간판이 그 이어도 섬 이름을 딴 것이었다. 중위로부터 천 남석 기자의 자살 추측을 전해들은 양 주호가 다짜고짜 이 방석집 규모조차 못 되어 보이는 허름한 주막집 안방으로 그를 납치해 버린 것이었다. 이 날 저녁 중위는 실상 천 남석의 집을 찾아가서 유족에게도 따로 조의를 전한 다음, 적당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은 아침 일찍 배를 탈 예정이었다. 그런데 양 주호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천 남석에겐 따로 가족다운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 날 저녁엔 우선 자기하고 술이나 한 잔 나누자고 했다. 천 남석의 집은 그런 다음에 자기와 같이 찾아가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사코 중위를 차에 태워 끌고 온 것이 이 교외 해변가의 (이어도) 안방이었다.
그가 하필 이런 이름의 술집으로 중위를 안내해 온 데는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았다. 양 주호는 이 날 저녁 처음부터 태도가 예상외로 거칠었다. 편집국 문을 나서면서부터는 갑자기 한 신문사의 국장다운 구석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상습 알콜 중독자의 그것처럼 아무렇게나 말하고 아무렇게나 행동을 했다. 커다란 몸집이 오히려 체신머리가 없어 보일 만큼 언동이 무질서해지고 있었다. 뭔가 천 남석의 실종 경위 같은 걸 듣고 싶어 술자리를 청한 것 같았는데, 그는 이내 그 중위를 붙잡게 된 동기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천 남석의 죽음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천 남석이 그날 밤 이어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중위의 말 한가지로 그의 자살을 이미 굳게 믿어 버리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기 확신을 지키기 위해 사정을 다시 뒤엎어 버릴지도 모르는 그날 밤의 다른 이야기들은 한사코 듣기를 회피해 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자꾸 그 이어도와 이어도 술집에 관한 이야기를 횡설수설 떠들어대고 있었다.
-우린 날마다 이 이어도를 찾아옵니다. 하루라도 이어도를 찾아오지 않으면 못 사니까요. 이어도를 찾아와서 술을 마시고, 이 이어도 여자와 노래도 부르고 사랑도 하면서 하루하루씩을 더 살아갑니다.
-선우 선생, 오늘 저녁엔 선생도 나와 함께 이어도를 오신 겁니다. 멋지게 취하셔야 해요. 아시겠습니까. 이어도, 아까 보니 선생님 벌써 이어도 이야기는 왜 자세히 알고 있는 모◎인데 말이또.
술집 문을 들어서면서는 그 이어도와 (이어도) 술집조차 잘 구별을 하지 않은 채 벌써부터 취기 어린 주정투가 되고 있었다. 천 남석의 죽음에 대해 정화한 사실을 알고 싶은 것은 오히려 중위 쪽이었다. 중위가 양 주호를 따라 그럭저럭 술집까지 온 것은 실상 그 천 남석의 죽음에 관한 어떤 새로운 사실을 양 주호로부터 얻어 낼 수 있을까 해서였다. 양 주호가 처음부터 천 남석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고 나서는 덴 필경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는 그게 궁금했다. 그걸 알아야 했다. 천 남석의 자살이 사실로 확인될 수 있다면 그의 실종 사고를 처리함에 있어서 그의 부대에 바칠 수 있는 공헌은 오히려 둘째 문제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실 자체였다.
무슨 일에 대해서나 명확한 근거로 해야 하는 선우 중위의 사고방식은 그것이 곧 그의 주장이자 공인다운 미덕이었다. 사실에의 봉사는 언제나 중위를 즐겁게 했다. 사실을 밝혀야 했다. 그는 이제 차라리 어떤 사명감마저 느껴져 오고 있었다. 사실을 알지 못하면 천 기자의 자살은 믿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그는 양 주호로부터 그의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싶었다. 그것은 작전 부대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양 주호는 도대체 그날 밤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궁금해하질 않았다. 중위의 궁금증 같은 건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중위를 방해만 하고 있었다. 중위로선 그런 양 주호의 기분에 함부로 말려들어 버릴 수가 없었다.
중위는 아직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양 주호라는 사내의 속셈을 알 수 없었다. 한데다 술집 이름까지 또 하필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양주호를 따라 (이어도) 문을 들어서면서 선우 중위는 자신이 마치 진짜 그 저승의 섬에라도 들어서고 있는 것 같은 이상스런 요기마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선우 중위의 기분이 더욱 더 갈피를 잡을 수 업게 된 것은 정작 그 양 주호와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고 난 다음부터였다.
(이어도)는 뱃사람들만이 단골로 다니는 술집 같았다. 소위 홀이라는 것은 없고 술손들은 모두가 방이 아니면 마루로 올라앉아 끼리끼리 낭자한 취기들을 즐기고 있었다. 양 주호와 선우 중위는 그 중 손님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안방 비슷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한 여자가 곁에 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아 앉기가 무섭게 부르지도 않은 술상부터 미리 받쳐들고 들어온 여자였다. 좁고 동글동글한 얼굴에다 살이 밴 참빗질로 긴 머리채를 보기 좋게 빗어 묶고 있는 여인의 몸맵시는 마치 무슨 암무당의 외동딸이라고나 해야 알맞을 만큼 야릇한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이어도의 미인입니다. 허허,,,,,,이어도에선 누구든지 이 여자와 사랑을 할 수가 있답니다. 허허허."
술잔을 들다 말고 양 주호가 뜻을 알 수 없는 웃음을 허허 웃어대고 있었다.
"어때요. 오늘밤 선생도 한번 멋진 연앨 해보실 생각 없소? 아 그야 이 이어도에서만은 한 여잘 여러 사내가 함께 사랑하더라도 허물이 되지 않아요. 선우 선생은 선생 물만 사랑을 하면 되는 거니까 말입니다."
양 주호 자신도 자기의 몫을 사랑하겠다는 듯 여자의 한쪽 팔을 끌어가고 있어도 여인은 병어처럼 조그맣게 입을 오므린 채 전혀 아무 대꾸가 없었다. 한데 술자리가 시작되고 난 다음부터 선우 중위가 더욱더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술기가 웬만큼 알알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양 주호가 문득 생각난 듯 여자에게 지껄이고 있었다.
"아 참, 오늘 내 자네한테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네. 뭔 줄 아나. 자네 이제 이 섬을 떠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단 말야. 자넬 쫓아 내지 못해 한을 품고 있던 작자가 먼저 여길 떠나버렸거든."
천 남석 기자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인 듯했다. 양 주호는 마치 천 기자의 실종이 여자에겐 지극히 반가운 소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말투였다.
"자네 무슨 소린 줄 알겠지. 천 남석이란 작자, 그자가 이젠 아주 여길 떠나가고 말았단 말일세. 자넨 이제 안심하고 여기 있어도 되네. 그 작잔 이제 절대로 여긴 다시 안 오니까."
나중에야 양 주호가 중위에게 일러 준 말이기만, 알고 보니 (이어도)는 양 주호보다도 천 남석 기자가 먼저 길을 트고 지내던 그의 단골 술집이었다. (이어도의 여인) 역시 천 남석과는 특별히 은밀스런 정분을 나누고 지내던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 남석이 어느 때부턴가는(아마도 그것은 양 주호가 그녀를 (이어도의 미인)이 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하고 부터였던 것 같은데) 느닷없이 이 여인을 질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여인에게 섬을 떠나라고 매일같이 (이어도)를 찾아와서 그녀를 못 견디게 했다고 했다. 여인이 섬을 떠나 주지 않으면 자기까지 괜히 섬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는 배를 타기 바로 전날까지도 두고두고 그런 식으로 협박과 설득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작자의 성화를 견디다 못해 막판에는 이 친구도 정말 섬을 떠나버릴까 했다지 않소. 한데 이건 작자가 먼저 선수를 치고 나선 셈이지 뭐요. 이 친군 이제 여길 달아날 일이 없게 되어 버린 거란 말요. 하하."
양 주호는 무엇보다도 그게 다행스럽게 된 일이라는 듯 털털털 다시 싱거운 웃음보를 터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선우 중위는 그 양 주호의 호인스런 웃음이 아무래도 무심스러워 보이질 않았다. 양 주호가 다리까지 절뚝거리며 할 일 없이 이 술집으로 자기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천 남석의 죽음이 정말로 자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 남석이 여인에게 자꾸만 섬을 떠나라고 한 데도 그런 만한 사연이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여인을 섬에서 내쫓고 싶어했던 일과 양 주호의 말마따나 마지막엔 그 자신이 먼저 섬을 떠나가 버린 일을 상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거기엔 필시 고의 죽음과도 상관된 어떤 수수께끼가 숨어 있을 수 있었다. 양 주호는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게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천 남석의 죽음에 대해선 자기 나름의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래서 뿐선 선우 중위를 일부러 이 (이어도) 술집까지 데리고 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양 주호는 이번에도 그뿐이었다.
선우 중위로부터 무슨 다른 얘기를 듣고 싶어하기는커녕 천 남석에 관한 일은 그쯤에서 아예 뚜껑을 덮어 버리려는 눈치였다. 무엇 때문에 천 남석이 그토록 여자를 섬으로부터 내쫓고 싶어했는지를 물으려 하자, 양 주호는 갑자기 술맛이 달아나는 듯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중위의 말을 가로 잘라 버렸다.
"그야 녀석이 이치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겠지요. 원래가 엄살이 좀 심한 편이긴 했지만 천 남석 제 녀석이 이 섬을 죽어도 못 견뎌 했거든요. 자기가 견딜 푸 없는 곳엔 좋아하는 계집을 놔 두기도 싫었을 거 아뇨. 하지만 뭐 이제 그런 건 따지지 맙시다, 술이나 들어요. 그리고 참 너두 이젠 소리나 좀 해라."
웃음 한방을 흘리지 않고 적막하게 앉아 있는 여인에게 느닷없이 노래를 청해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마치 태엽을 감아 놓았던 소리통처럼 양 주호의 주문이 떨어지자마자 이내 노래를 시작해 버리는 것이었다. 중위는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입을 다문 채 도리 없이 여인의 소리에나 귀를 기울이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렇게 잠시 여인의 노랫가락을 듣고 있노라니 이번에는 그 여인의 노래마저 또 이어도 타령이었다
이어도하라 이어도하라
이어 이어 이어도하라
이어 하멘 나 눈물난다
이어 말은 말낭근 가라
선우 중위도 이미 배 위에서 천 남석에게 들은 일이 있는 소리였다.
폭풍이 몰아치던 마지막 날 밤 천 남석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이어도)의 가사를 용케도 잘 선우 중위에게 외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곡조를 붙인 여인의 소리는 실상 노래라고는 말할 수가 없는 괴상한 것이었다. 가사도 분명치가 않았고 곡조도 특별히 귀에 띌 만큼 구성진 대목이 없었다. 옛날 시골마을의 물렛방 같은 데서 흘러나오는 노인네들의 노랫가락처럼 애매한 입 속 웅얼거림뿐이었다. 물레소리에 묻혀 들었다간 되살아나고 그러다간 또 문득 그 물레 소리 속으로 다시 묻혀 들어가 버리곤 하는 노인네들의 그 노래도 한탄도 아닌 흥얼거림처럼, 흑은 그 느릿느릿 젖어드는 필생의 슬픔처럼 취흥을 돋을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인은 이상스럽게 그 노래에만은 열심이었다. 눈먼 여자 점장이처럼 창연하고 요기스럽게 소리를 거푸 두 번씩이나 읊어 나가고 있었다.
"이어도여, 이어도여, 이어 이어 이어도여, 이어 소리만 들어도 나 눈물난다. 이어 소리는 말고서 가라. 이어 소리는 말고서 가라,,,,,,아, 이 노래 어떻습니까?"
여인의 소리가 끝나자 그 역시 눈을 감고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양 주호가 번역이라도 해 주듯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가사를 한번 더 풀어 외고 나서 중위를 찬찬히 건너다보았다. 여인의 소리에 그는 몹시 감동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어떻소, 물론 선생은 아마 잘 이해 못할 거요. 하지만 들어 봐요. 이어 이어 이어도여, 그 빌어먹을 이어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지 않소. 이게 이 곳 섬사람들의 생활이었소. 이어도를 꿈꾸면서, 고 이어도 갈 날만 기다리면서 살아온 이곳 섬사람들이란 말요. 그리고 나 같은 놈들은 아직도 이렇게 폐인처럼 술이나 마시고 그 이어도 노래나 부르면서,,,,,,"
천 남석 기자도 결국은 그랬다는 뜻인가. 그는 바로 그 천 남석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그렇게 천 남석처럼은 절망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천 남석처럼 절망을 하지도 않았고 천 남석처럼 섬을 저주하거나 부정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상스럽게 갑자기 충혈이 되어 오는 눈초리로 선우 중위를 한참 쏘아보고 있더니, 이윽고는 정말로 무슨 폐인이나 되어 버린 것처럼 황량하게 술잔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다시 또 폐인처럼 횡설수설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어도는 그러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나, 물결 청동 골짜기, 어느 날 서북 바람이 자고, 눈썹 불태우는 수평선의 섬. 제주 어부들의 핏속에 있는 다음 딸의 울음의 섬, 어치에 있나 어디에 있나,,,,,, 아 이건 요즘에 읽은 고 누구라는 시인의 글 한 구절이오. 이어도라는 시예요. 선생은 아마 군인이니까 시 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이건 정말 굉장한 십니다.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나, 나 이 작자한테 완전히 반했습니다. 고 아무개 이 작자 아마 이 섬에서 나간 친구가 틀림없어요. 이어도를 알고 있는 친구란 말입니다.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나,,,,,, 난 이 보잘것없는 연에도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이어도를 모르는 자가 이렇게 가슴을 울릴 수가 없어요. 아우도 정말 이어도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완전히 주정이었다. 양 주호는 술이 취할수록 점점 더 그 이어도에 미쳐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여인에게 이어도를 노래시켰다. 그리고 한 번 더 그 음산하고 수심기 어린 여인의 노랫소리가 끝나고 나자 양 주호는 발작이 라도 일으키듯,
"그런데--- 그런데 천 남석이 제깐 놈이 저 혼자 이어도를 찻아냈다는 거야? 흐음 건방진 녀석 같으니라구."
느닷없이 다시 천 남석 기자를 저주하더니, 그 저주는 이내 선우 현 중위에게까지 서슬이 뻗쳐 오고 있었다.
"하기야 녀석은 그래도 제법이었지, 당신네 작전을 완전히 망쳐 놓았거든. 중위님도 아마 그 점을 다시 알아야 할 거요. 녀석이 용케 당신네 작전에서 섬을 구해 냈단 말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선우 중위에 대한 저주야 어떤 식이었든, 양 주호는 제풀에 문득 천 남석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양 주호의 말은 더욱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천 남석이 혼자서 섬을 찾아냈다고 한 것이나 그가 이번의 수색 작전에서 섬을 구해 냈노라는 양 주호의 말들은 선우 중위로선 도대체 이해할 루가 없는 소리들이었다. 선우 중위는 다시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천 남석의 실종 사고는 이번 작전 과정상의 일대 불상사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고가 작전 자체의 실패를 좌우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양 주호의 말을 납득할 수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는 사실을 따라 말하고 있었다. 사실을 따라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양 주호에게서 보다 분명한 말을 얻어내자면 그는 오히려 양 주호와는 정반대편에 서서 천 남석의 자살을 거꾸로 부인하고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양 준호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어 버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빙글빙글 입가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이 세상엔 이어도라는 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그 성과 때문에 말요?"
듣고 보니 그 역시도 파랑도와 이어도를 완전히 혼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우 중위는 미처 양 주호의 그런 혼동까지를 교정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전에 천 남석 기자에게서도 그런 혼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자주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전의 목적은 섬을 찾아내는 것으로 한정되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섬의 실재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작전의 목적이었습니다."
"그야 섬이 없을 때라면 그런 결과로 족할 수도 있겠지요."
"섬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천 남석 기자도 함께 확인을 한 사실입니다. 그의 실종 사고가 일어난 것은 작전이 모두 완료되고 난 시각 이후였으니까요."
양 주호가 다시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하고는 딴판으로 그는 갑자기 술기가 훨씬 가선 버린 얼굴이었다. 목소리도 몰라보게 차분해지고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요. 천 기자도 작전 중엔 물론 섬을 볼 수가 없었을 테지요"
"그렇다면,,,,,,"
"그러나 그는 결국 섬을 찾아냈습니다. 당신들이 실패한 섬을 그 혼자서 말입니다."
"국장님께선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군요. 천 기잔 그날 밤 섬을 찾아 낼 수 없었던 절망감으로 오히려 미친 사람처럼 섬을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중위가 자신에게 단언했다. 하지만 양 주호는 다시 술잔을 집어들며 타이르듯 하나하나 중위의 추리를 뒤엎기 시작했다.
"물론이지요. 당신들은 아닌게아니라 이 세상엔 이어도라는 섬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걸 훌륭하게 확인해 주었어요. 그리고 그날 밤 천 기자는 아마 절망을 했던 것도 사실일 겝니다. 하지만 천 기자가 그날 밤 절망을 한 것은 섬을 찾아 내지 못한 실망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섬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겝니다."
“……“
"선생이 말한 것처럼 천 기자는 귀재를 떠날 때도 실상 이 실재하리라는 기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쪽이 을을 겝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구요. 그의 러재 목적도 오히려 고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섬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던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천 기자는 막상 그가 바랐던 대로 이 세상엔 정말 이어도라는 섬이 실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난 순간에 오히려 그 섬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건 참으로 무서운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섬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 섬을 만났기 때문에 절망을 했을 거란 말입니다."
“……“
"아 그야 물론 그가 본 이어도 역시 실재의 섬은 아니었겠지요. 오랫동안 이 성에 살아온 이어도란 원래가 그 가상의 섬이 아니겠습니까. 천 기자가 본 이어도 역시 그런 가상의 섬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천 기자는 그때 문득 그 이상스런 방법으로 자기의 섬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오히려 절망을 하고 만 것입니다,,,,,,하지만 고건 참으로 황홀한 절망이었을 겝니다. "
“……“
"이제 아셨지만 당신들이 찾아 나선 이어도 역시 물론 그런 섬이었습니다. 당신들은 당연허 섬을 찾아 낼 수가 없었지요. 따라서 작전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닙니까. 더구나 그런 식의 실패로 해서 당신들은 이 섬사람들에게서마저 영영 우리 이어도를 빼앗아 가 버릴 번했단 말입니다. 그것을 천 기자가 간신히 다시 살려 낸 것이지요. 천 기자의 죽음이 우리 이어도를 지켜 낸 것입니다."
"결국 이어도의 부재가 천 기자의 사고를 낳게 되고 천 기자의 사고는 또 다른 이어도의 존재를 증명해 낼 수 있었다는 말씀이 되겠군요."
선우 중위가 참을성 좋게 양 주호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하지만 양 주호의 결론은 좀더 단호하고 엄중한 항의조의 그것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된 셈이지요. 하지만 천 기자의 사고에 한해서만 말한다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와 이어도의 해후보다는 당신들의 작전 자체였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요. 몇 번 되풀이하는 말입니다만 이어도란 원래가 실재하는 섬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천 기자가 정말로 차기의 섬을 만나고 있었다는 국장님 말씀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국장님 말씀대로라면 천 기자는 그런 식으로 섬을 만나야 했을 만큼 그것을 원하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왜 섬을 만나 원망을 해야 했습니까?"
중위가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은 얼굴로 양 주호에게 물어 왔다. 양 주호의 말은 모두가 그 천 남석의 섬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우 중위로선 역시 그 천 남석이 그때 자기의 섬을 만나고 있었을 거라는 양 주호의 말은 쉽사리 믿어 버릴 수가 없었다. 천 남석의 죽음에 대한 양 주호의 추리에는 무엇보다도 우선 그 점이 중요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양 주호는 이제 추호도 생각을 머뭇거리는 빛이 없었다.
"원하진 않았겠지요. 뿐만 아니라 천 남석은 한사코 자기 섬의 존재를 부인하고 싶어했어요. 그는 늘 이어도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이 섬마저 떠나버리고 싶어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역시 이 제주도 사람이었습니다."
4
두 사람이 술집 (이어도)를 나섰을 때는 자정이 거의 다 가까와졌을 무렵이었다. 양 주호는 아직도 몇 차례나 더 여인의 이어도에 취하고 나서야 뱃길을 떠나가는 서방님처럼 아쉬운 표정으로 여인을 헤어져 나왔다. 물론 번 남석의 사고를 자살로 단정할 만한 증거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은 채였다. 양 주호는 다만 천 남석이 섬의 부재를 확인한 순간에 오히려 자기의 섬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이 곧 사고의 직접 동기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야 뭐라고 말을 했든 천 남석이 그때 그 자기의 섬을 보고 절망을 하게 된 이유를 양 주호는 그가 바로 이 습습한 바람의 섬 제주도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가장 중요한 대목을 그 제주도 사람이라는 한 마디로 설명을 간단히 비약해 버리고 있었다. 엄청난 비약이었다, 그 비약의 폭만큼이나 제주도 사람에 대한 선우 중위의 이해는 막연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천 남석의 절망이 어째서 그의 자살을 단정할 수 딨는 근거가 되고 있는지도 중위에겐 여전히 아리숭한 수수께끼일 뿐이었다.
하지만 양 주호는 도대체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천 남석의 죽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엇을 알곤 싶어하지도, 자기 속엣것을 털어놓으려 하지도 않았다.
선우 중위는 그만 스스로 지치고 말았다. 그 역시도 이젠 머리를 좀 쉬어 두고 싶었다. 천 남석의 직장 상사라는 사람이 그쯤 자살을 믿고 있는 터라면 더 이상 이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이어도) 문을 나서자 바깥은 폭풍우가 지나간 섬 날씨답지 않게 아직도 검은 구름장들이 드문드문 밤하늘을 북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간단없이 일려드는 파도소리가 자정으로 가라앉아 들어가는 이 외로운 섬의 잠세 취한 숨길처럼 고즈넉했다.
선우 중위는 그러나 이제 기분이 한결 가뿐했다. 습습한 바람결에 어디선가 은은한 귤꽃 향기가 묻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만 오늘은 양 주호와 헤어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선우 중위 혼자의 생각일 뿐이었다. 술집을 나오자 양 주호는 이상하게 갑자기 풀이 죽어 버린 멋 같았다. 커다란 몸집에 어깨를 추릿하니 늘어뜨린 모습이 느닷없이 어떤 황량스런 외로움 같은 것에 젖어 버리고 있었다. 그 양 주호가 중위보다 먼저 행선지를 정하고 나섰다.
"선우 중위. 그럼 이제부턴 나하고 그 자의 집을 가 봅시다."
집엘 가다니요. 이젠 밤이 너무 늦었는데요."
선우 중위는 노골적으로 사양하고 싶은 어조였다. 차지만 양 주호는 벌써부터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중위를 단념하지 않았다.
"왜, 이젠 그만 잠자리라도 찾아가고 싶어진 게로군요. 하지만 아직은 서두를 필요 없어요. 이 섬엔 통행금지가 없으니까요."
"통행금지보다도 이젠---저 혼자라도 상관없으니까 천 기자의 집은 내일 아침 다시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열두 시 전엔 잠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것도 통행금지 시간 같은 걸 정해놓고 사는 사람들의 습관이지요. 하지만 여기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자, 갑시다. 나선 김에 마저 일을 끝내야지요."
거진 강제나 다름없는 말투였다. 할 일을 끝내지 않으면 절대로 중위를 가게 하지 않겠다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천 기자의 집엔 별로 만나볼 만한 가족도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중위는 목소리가 다소 짜증스러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양 주호는 좀 더 여유가 만만했다.
"아 참 그랬던가요. 그래요. 그때는 물론 그랬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좀 달라졌어요. 한 사람한테 그의 마지막 소식을 전해줘야 할 데가 있을 것 같군요. 아깐 선우 중위가 말한 유족이란 말에 그 사람이 합당한지 어떤지를 모르겠어서 우선 그렇게 말해 버렸지만 말요."
"그 사람이 누굽니까? 천 기자완 어떻게 되는 사람입니까?"
"가 보시면 아마 곧 만나볼 수가 있을 겝니다. 여기선 그리 멀지 않으니까 슬슬 함께 걸어서 가도록 하지요."
양 주호는 벌써 지팡이를 휘두르며 중위를 앞장서 걷고 있었다. 선우 중위는 다시 한번 도깨비 장난 같은 것에 자신이 흘려들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젠 기왕 내친 걸음이었다. 갈 때까지 가보리라 금방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거기서 뜻밖에 양 주호가 그처럼 천 남석의 자살을 쉽게 믿어 버리고 있는 이유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희끄무레한 어둠 속을 절뚝절뚝 앞장서 가고 있는 양 주호의 그림자를 천천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한데 그때였다.
중위를 두어 발짝 앞장서 걷고 있던 양 주호가 이번에는 아무래도 미리 귀띔을 해 놓아야 좋을 듯 싶었던지 모처럼 만에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려 왔다.
"그런데 참 내 이것만은 선우 중위에게 미리 일러두겠는데, 당신이 이따 거기서 만날 사람은 천 기자가 왜 걱정을 많이 하던 여자라는 걸 알아두십시오. 당신이 만날 사람은 바로 천 기자의 여자란 말입니다."
"여자라니요?"
중위가 약간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천 남석에게 아내가 있노라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중위가 천 남석을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애송이 총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말은 물론 아니었다. 천 남석은 원래 자신의 주변 일을 입에 담기 좋아하는 성미라 아닌 것 같았었다. 그리고 양 주호가 아까 그 천 남석의 소식을 전해 줄 데가 한 사람 있노라 했을 때도 선우 중위는 어렴풋이나마 그 천 남석의 여자를 상상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만나러 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천 남석의 여자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선우 중위는 막상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양 주호가 하필 이런 오밤중에사 여인을 만나러 나서자고 한 것부터가 이미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한데다 양 주호는 웬일인지 여인에 대해 아무개의 부인이나 아내라는 호칭조차 인색하게 아껴 버리고 있었다. 몇 마디 말 속에서였지만 그는 다만 천 기자의 (여자-라는 한 마디로 이상스럽게 그 여인에 대한 호칭을 비하시키고 있었다. 하지간 양 주호는 이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 뭐 부인이라는 말을 하긴 좀 뭣한 여자지요."
"부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면---?"
"그저 그렇게 만나서 잠자리나 같이 하고 지내는 식의 여자를 뭐라고 부릅니까?"
역시 그럴 만한 데가 있어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는 식이었다. 중위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밤중에 굳이 여자를 찾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도대체가 양 주호라는 사람의 거동은 매사에 늘 엉뚱한 동기가 숨겨져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고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러나 그것을 중위에게 말해 주는 대신 그 스스로 그것을 경험하고 깨닫게 해 주기 위해 이리저리 그를 끌고 다니며 일을 꾸며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중위는 이러기도 저거기도 난처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까지 와서 다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는 말없이 양 주호의 커다란 그림자만 열심히 뒤따라가고 있었다.
양 주호는 밀감 밭의 제법 무성하게 우거진 들길을 가로질러 이번에는 다시 그 밀감 밭이 잇대어 선 작은 언덕길을 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선우 중위도 이젠 천 남석의 집은 원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언덕 아래 어딘가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천 남석은 그 언덕 부근의 어디선가 보낸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긴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그는 그날 밤 자신의 절망을 이기기 위해 그 자기의 섬과 무슨 피나는 싸움이라도 계속하고 있는 것처럼 이어도와 이어도를 꿈꾸는 섬사람들의 삶, 이를테면 그의 섬의 모든 것을 한결같이 부인만 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것은 양 주호의 말대로 바로 이 제주도와 제주도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에 대한 천 남석의 마지막 항거처럼 생각되는 그런 내용의 이야기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조그만 밭뙈기가 하나 있었다고 했다.
소년의 어머니는 무슨 까닭인지 조그만 밭뙈기에서 사시사철 쉬지 않고 돌을 추려 내고 있었다. 언제나 축축한 습기가 묻어 오는 바닷바람은 언덕 위로만 불어 왔고, 소년의 어머니는 날만 새면 그 축축한 습기에 온몸을 적시며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 밭뙈기의 돌멩이를 추려 내다 시름시름 한쪽으로 긴 돌더미를 쌓아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소년의 어머니한테선 언제나 또 빠짐없이 이어도의 노랫가락이 흘러 번지고 있었다. 가사도 분명치 않고 곡조도 그저 그렇고 그런 소리로 소년의 어머니는 언제나 그렇게 돌을 추리면서 이어도 노랫가락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그런 때 입을 움직이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별로 분명치가 않았다. 소년이 곁으로 다가가 보면 어머니는 오히려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어머니가 직접 입으로 소리를 웅
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몸 어느 한 곳에다 소리를 매달고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많았다. 돌을 추리고 있는 어머니 근처에선 언제나 그렇게 바닷소리처럼 웅웅거리는 듯한 이어도의 노랫가락이 쉴새없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바람소리 속에서, 바다가 울면 바다 울음소리 속에서, 웅웅웅 한숨을 짓는 것도 같고 울음을 울고 있는 것도 같은 소리가 문득문득 소년의 귀까지 스쳐 오곤 했다. 바다에 안개가 짙어지거나 구름이 몹시 바르게 움직이는 날이면 어머니는 돌을 추리다 말고 구름장이 사납게 얽혀드는 하늘을 쳐다보거나 짙은 회색 안개 속으로 바다가 하얗게 뒤집히는 모양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을 때가 많았는데, 그런 때는 어머니의 소리도 더욱더 극성스러워진 것만 같았다.
소년은 언제나 어머니가 추려 내다 놓은 돌더미 근처에서 그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소리를 듣고 있으면 공연히 사지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아졌고, 마음까지도 그 축축한 바닷바람의 습기에 젖어 오는 것처럼 기분이 암울스러워져 버리곤 했다. 무엇인가 몹시 슬픈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때문에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올 때도 있었고, 그러다간 또 자신도 모르게 터무니없이 긴 한숨이 터져 나올 때도 있었다.
소년은 소리만 들으면 짜증이 났다. 그리고 늘 그 어머니의 소리를 떠나버리고만 싶었다. 어머니의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어머니의 소리를 맘대로 떠나버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소리를 떠나려면 그는 아버지를 찾아 낼 수 있어야 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한 달이면 보름도 더 넘는 날들을 항상 바다로만 나가 지내고 있었다. 한번 수평선을 넘어가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좀처럼 다시 그 수평선을 넘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수평선을 넘어오기만 하면 소년은 아버지 곁에서 어머니의 그 지긋지긋한 소리를 듣지 않아도 좋을 때가 하루쯤 마련되었다. 아버지가 수평선을 넘어오고 나면 어머니는 비로소 돌을 추리는 일을 그만두고 집안에서 집안 일을 하고 지냈다. 그리고 그런 날은 소년의 어머니도 이상하게 그 이어도의 노래를 씻은 듯이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오고 나서도 소년이 이어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깜깜한 밤중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 밤이면 소년은 다른 날보다도 대개 깊은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잠 속에서 소년은 때때로 웅웅거리는 바다 울음소리나 지붕을 넘어가는 밤바람소리 같은 것을 들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소년은 그것이 바다 울음소리나 밤바람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어머니가 다시 그 간절한 이어도의 곡조를 참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때의 어머니의 소리는 생전보다도 더욱더 간절하고 안타까운 느낌이 드는 것이어서 어머니는 꿈결 속에서 마치 그 이어도를 정말로 만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흘려드는 듯한 이어도의 곡조도 한고비 지나고 나면,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이내 아득한 잠 속으로 가라앉아 들어가 버렸고 방 안은 이윽고 다시 먼 바다소리만이 가득해지곤 했다. 아침이 되면 어머니는 간밤의 일 같은 건 아예 기억에도 없듯이 말짱한 얼굴이 되어 있곤 했다.
아버지가 곁에 있는 동안은 어머니의 입에서는 어쨌든 그렇게 이어도 노래를 자주 들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이어도 노래는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바다로 나가지 않은 날은 대개 하루 종일 바닷가 자갈밭에서 상한 그물을 손질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루 종일 상한 그물을 손질하면서도 어머니처럼 입에서 이어도 노래 같은 걸 웅얼거리고 있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일이 없었다.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얼크러진 그물을 풀어내거나 상한 곳을 레어 이으면서, 그리고 바람이 심한 날든 가끔가끔 그 흐트러진 수평선 쪽을 향해 근심스런 눈길을 던지면서 좀처럼 이어도의 노래 같은 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소년은 그럴 아버지 곁에서 그가 그 찢어지고 흐트러진 고물을 새것처럼 말끔하게 손질해 내는 것을 구경하면서 기분 좋게 하루 해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아버지의 그 그물 손질은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뿐 그물이 다시 말끔히 -손질되고 나면 아버지는 이내 다시 수평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곤 했다.
천가여 천가여,,,,,,
마음이 격해지면 어머니는 소년의 아버지를 천가여 천가여 하고 아이 이름이라도 부르듯 해댔는데, 어머니의 그런 안타까운 부름도 소년의 아버지는 들은 체 만 체였다. 그러고 나면 소년의 어머니는 또다시 언덕배기 밭뙈기로 나가 돌 자갈을 추리면서 웅웅웅 그 축축한 바닷바람 속에서 이어도의 노랫가락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지겹게도 많은 돌이었고, 지겹게도 극성스런 노랫가락이었다. 돌 자갈은 다하는 날이 없을 것처럼 많았다. 돌 자갈이 다하지 않는 한 어머니의 노래도 언제까지나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고, 아버지는 또 그 돌 자갈이 다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바다를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부지런히 수평선을 넘어갔다. 그리고 또 아버지가 수평선을 넘어가기만 하면 소년의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그 언덕배기로 나가 돌 자갈을 추리며 이어도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마침내 소년의 아버지에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수평선을 넘어간 아버지의 배가 한 번은 전에 없이 여러 날 동안 다시 그 수평선 위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개 바다로 나가고 나서 사흘이나 나흘. 늦어도 닷새 정도가 되면 까맣게 다시 그 수평선을 넘어오곤 했다. 그러다 이번에는 닷새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아버지의 배는 영 소식이 없었다. 어머니는 차츰차츰 말이 적어져 갔다. 끼니도 상관 않고 언덕배기 밭뙈기로 나가 돌 자갈만 추리고 있었다. 암울스런 이어도의 노랫소리가 끝도 없이 극성스러워 가고 있었다.
천가여 천가여--- 어둠녘이 다 된 다음 소년의 어머니는 무슨 저주나 원망처럼, 또는 아직도 체념이 서러운 한숨처럼 길게 한 번 그 천가여를 토해 내고 나서야 비로소 하루의 노랫가락이 간신히 끝나곤 했다. 그런데 혹은 그 어머니의 극성스런 노랫소리에 무슨 효험이라도 본 벗일까. 수평선을 넘어간지 꼭 열 하루째가 되던 날 아침 요술에라도 이끌려 온 듯 홀연히 소년의 아버지가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버지가 배를 타고 수평선을 넘어온 것이 아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때 배를 타고 수평선을 넘어갈 때하곤 전혀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신발을 신고 있었다. 양복 같은 건 한 번도 걸쳐 본 일이 없는 아버지가 새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바다로 나갈 때의 그 두툼하고 낯익은 누더기 대신 느닷없이 싸구려 양복 비슷한 것을 헐렁하게 걸쳐 입고 있었다. 신발도 코끝이 닳아 터진 휜 고무신 대신 검고 투박한 새 운동화 같은 것을 끼고 있었다. 곰팡이처럼 허연 소금기 속에서 언제나 까칠까칠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는 턱수염은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깎여 있었다. 수염을 깎았는데도 훨씬 더 초췌하고 기력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런 차림 그런 모습을 하고 배를 타고 수평선을 넘어오는 대신 배를 버린 채 혼자 물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아버지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멍청스럽게 눈알을 비룩디룩 굴려댈 룬 며칠 동안은 도대체 아무 말이 없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그 알 수 없는 침묵에서 깨어난 것은 그가 집으로 돌아온 지 열흘쯤 지난 다음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돌아오자마자 곧 자리에 눕고 말았는데. 자리에 누워서도 그는 한동안 통 그렇게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천정만 쳐다보고 누워 있었다. 고러다가 열흘쯤 시간이 흐르고 나자 그가 돌연 말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어머니에게 들려 준 아버지의 이야기가 또한 이상했다.
-나 이어도를 보았네.
소년의 아버지는 정말로 이어도를 보고 돌아왔노라는 것이었다. 몹쓸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졌는데, 소년의 아버지는 물로 뛰어들어 무작정 어디론가 헤엄을 쳐 나가고 있었다 했다. 한참 그렇게 헤엄을 쳐 나가다가 기진맥진 힘이 다 풀릴 때 쫌 해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다 저쪽 파도 끝에 문득 하얗게 부서지고 있는 섬이 떠올라 있더라고 했다. 그는 새로운 힘이 솟아 정신없이 그 하얀 섬 해변을 향해 헤엄을 쳐나갈 수가 있었는데, 그러다가 또 어느 틈에 정신을 잃었던지 눈을 떠보니 그는 어떤 크고 낯선 고깃배의 선실에 눕혀져 있었고 그 사이 시간은 꼬박 하루하고도 한나절이 다 흘러 버렸더라는 것이었다.
-파도 위로 하얗게 떠올라 있는 섬, 그건 이어도가 틀림 없었다네.
섬을 한 번 본 사람은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올 수가 없다는 말도 잊어버린 듯 소년의 아버지는 이상스럽게 차분한 목소리로 단언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어도 때문에 다시 기력을 회복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한 번 더 그 바다에의 모험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어떤 은밀한 음모라도 꾸미고 있는 사람처럼 어머니의 만류도 못들은 체 그의 새로운 모험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어디선가 헌 배를 구해다가 그럭저럭 쓸만한 물건을 만들어 냈다. 일이 시작된 지 한 달쯤 뒤엔 그런 식으로 벌써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준비를 끝내 놓고도 소년의 아버지는 하루 이틀 아직도 무엇인가를 더 기다리고 있는 듯하더니, 어느 바람이 잔잔한 늦가을 오후 마침내 그는 그 숙명처럼 언제나 눈앞에 아득히 떠올라 있는 수평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천가여, 천가여......천가여를 외어대는 어머니의 음성은 여느 때보다도 안타깝고 간절했지만 소년의 아버지는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영영 수평선을 넘어오지 못했다. 이번에는 수평선 대신 이상한 차림으로 물길을 걸어 돌아오는 일도 물론 없었다. 소년의 어머니가 그 짜증스런 이어도의 곡조를 애태워 불러대기 시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시 수평선을 넘어간 그날부터 이미 언덕배기 돌밭에서 다시 자갈을 추리기 시작했고, 웅웅웅 바닷바람 소리 같은 고 단조롭고도 구슬픈 이어도의 곡조를 읊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노랫가락은 이제 수평선을 넘어오는 뱃소식이 까마득하면 까마득할수록 점점 더 극성스러워지기만 하고 있었다. 수평선을 넘어 오는 뱃소식이 없는 한 그것은 열흘이 지나 한 달이 지나도, 돌밭의 자갈이 다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그 습기 많은 바닷바람이 언제까지나 섬을 적셔 오고 있는 것처럼 도대체 끝이 나는 날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는 소년의 어머니마저 그 이어도 노랫가락 속에서 아버지의 섬을 보았던 것일까. 남쪽 절후라곤 하지만 이 섬 바닷가 언덕에도 이제는 제법 쌀쌀한 강풍이 마른 낙엽을 몰고 다니기 시작한 어느 초겨울 날이었다. 이날은 아침부터 하루종일 구름장이 낮게만 달리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무너질 듯이 바다 복판으로 배가 잔뜩 처져 내려 있던 하늘에선 때 이른 진눈깨비까지 함부로 흩뿌리기 시작했다. 바람소리와 파도소리가 전에 얼이 소란스런 날이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이 날도 물론 언덕배기 자갈밭에서 아침부터 계속 돌을 추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의 어머니는 점심때가 되어도 끼니마저 잊은 채 쉴새없이 그 이어도 노랫가락만 웅얼웅얼 읊조려대고 있었다. 소년은 날씨도 수상하고 때도 고프고 해서 이날사 말고 어머니를 밭에 둔 채 혼자서만 먼저 집으로 내려와 있었다. 어머니는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해도 언덕을 아직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저녁때가 거의 되어갈 때까지도 소년의 어머니는 언덕을 내려오는 기척이 없었다. 어둠이 바다쪽에서부터 서서히 섬을 덮어오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소년은 어머니를 찾으러 언덕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소년이 그 언덕께로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때가 늦고 있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치마폭에 돌을 싸 안은 채 언제부턴가 밭이랑 사이에 축축하게 몸이 젖어 누워 있었다. 소년은 넋을 잃고 말았다. 어머니를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정신없이 언덕을 굴러 내려왔다. 그리고 불기도 별로 없는 아랫목에 어머니를 눕혀 놓고 무작정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고,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가엾은 어머니가 정신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끝내는 모두가 허사였다.
진눈깨비는 다시 빗줄기로 변해 무섭게 문 창살을 두드려 댔고, 바람소리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밤새도록 지붕을 넘어갔다. 아버지는 찾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잠깐 눈을 떠서 소년의 손목을 꼭 쥐어 주었을 뿐, 그리고 그 힘없는 음성으로 천가여 천가여를 두어 번 중얼댔을 뿐. 그대로 영영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언덕배기 자갈밭에 아직도 못 다 추린 돌멩이를 남겨 둔 채, 소년의 어머니는 그날로 그만 그 이어도의 노래를 끝내 버리고 만 것이었다
5
선우 중위가 양 주호와 함께 천 남석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이제 자신도 이어도의 어떤 비밀스런 힘에 흘려들고 만 것 같은 야릇한 기분이 되고 있었다,
-여자가 오기 전에는 천 기자가 혼자서 식은 밥 위에다 양념도 하지 않은 통조림 꽁치를 얹어 먹고 있는 걸 볼 때가 가끔 있었어요.
양 주호의 말이 아니더라도 천 남석의 거처는 생활을 사는 사람의 그것이라기보다는 1냥 그 생활을 견디고 있었다는 편이 어울려 보일 만큼 비좁고 궁색스런 곳이었다. 밀감 밭이 한창 무성하게 어우러져 가고 있는 언덕배기 아래 몇 년째 사람의 손길 한 번 스쳐 본 일이 없는 듯한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돌 지붕 오두막이 그 역시 무슨 생활이 깃들기를 기다리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힘겨운 세월을 고집스럽게 견뎌 내고 있었다. 부엌이나 방안 꼴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여자가 생겼다고는 하나 방이나 부엌 어느 한구석에도 사람의 체온이 스민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케이스가 다 닳은 트랜지스터 라디오 한 개와, 거울 한쪽이 부옇게 흐려 들어오고 있는 손 경대 하나, 그리고 밥솥이나 국 남비를 올려놓았던 자국이 낭자하게 얼룩진 몇 권의 묵은 잡지 나부랑이를 제외하고 나면 방안에는 별로 눈에 띄는 가재 도구가 널려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느낌부터 어수선하고 창연스런 풍경뿐이었다. 선우 중위가 무엇엔가 흘려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것은 물론 그런 황량스런 집안 몰골 때문만은 물론 아니었다. 천 남석의 집에서는 또 한 가지 예기치 못했던 일이 선우 중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선우 중위가 먼저 이 집으로 와서 그 도깨비 장난 같은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편이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양 주호와 선우 중위가 천 남석의 오두막엘 도착했을 때, 집안에선 아무도 두 사람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데도 양 주호는 제 집처럼 한사코 고 빈 집 방안으로 선우 중위의 등을 떠밀어 넣으려고 했다.
"이것저것 너무 언짢게 따질 것 없어요. 이제 곧 모든 걸 알게 될 테니까."
그는 중위를 방안으로 밀어 넣은 다음 자기도 곧 그를 뒤따라 와서는 방 구석에 걸려 있는 작은 호롱에다 익숙하게 성냥불을 켜 붙여 놓았다. 그러고는 다리를 낭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완력으로 선우 중위의 어깨를 풀썩 눌러 주저앉혀 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는 선우 중위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또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시원스런 말이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이제 곧 여자가 나타날 테니까."
다분히 위압적인 한 마디를 남겨 놓고는 이제 그 자신은 할 일을 다한 사람처럼 방을 나가더니 터벅터벅 혼자 언덕길을 되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선우 중위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어둠 속으로 한동안 부침을 계속하며 사라져 가고 있는 양 주호의 모습을 바라보고 앉아서 이젠 그를 쫓아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곧 모든 걸 알게 될 테니까 이것저것 너무 언짢게 따질 건 없다는 양 주호의 말이 아직도 그를 꼼짝 못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양 주호의 거센 완력이 아직도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선우 중위는 아직 그 양 주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혼자 주인 없는 방을 멍청하게 지키고 앉아 있었다. 가물가물 희미한 호롱불에 알 구 없는 요기가 어리고 있었다.
하지만 선우 중위는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양 주호는 한번 언덕을 내려간 다음 다시 소식이 없었다. 양 주호 대신 그가 말한 대로 여인이 먼저 나타나 버린 것이다. 언덕 아래서 조심스런 인기척이 올라오는가 싶더니 이내 침침한 호롱불 빛이 내비치는 방문 앞으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 방문 앞 호롱불 빛 속으로 얼굴을 드러낸 여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방금 전에 양 주호와 함께 선우 중위가 술집 (이어도)에서 헤어지고 나온 그 암무당의 외동딸 같은 이어도의 여인이었다, 이제 곧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던 양 주호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선우 중위는 물론 그 양 주호의 귀띔처럼은 될 수가 없었다. 여인을 보자 그는 점점 더 머릿속이 어리둥절해질 뿐이었다, 영락없이 무엇에 홀려 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인은 또 선우 중위를 보고도 놀라거나 당황해 하는 빛이 전혀 없었다. 여인은 처음부터 선우 중위가 집을 찾아와 있을 줄 알고 있었기라도 한 듯 그를 보고도 표정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술집에서보다도 표정이나 거동이 더 한층 침착하고 정연했다. 그녀는 마치 첫날밤을 맞은 신부처럼 가지런한 몸짓으로 말없이 방문을 들어섰다,
그러고는 아직도 표정이 어리벙벙해 있는 선우 중위 앞으로 조용히 몸을 접어 앉았다,
"그분은 정말로 못 돌아오시는 건가요?"
여인의 첫마디였다. 천 남석에게 정말로 그런 사고가 있었는지 어쨌는지를 새삼스럽게 물어 오고 있는 것이었다. 설명이 충분했던 건 아니지만, 이어도에선 아직 곧이를 듣지 않고 있었던 듯, 그러나 자기 사내의 죽음을 묻고 있는 사람 같지 않게 여인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선우 중위는 대꾸가 난처했다-이런저런 사정을 술집에서부터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이런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다시 여인에게 그 사내의 죽음을 확인시켜 준다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 좋은 일이 못 되었다. 하지만 선우 중위는 이제 이 무더운 여름날의 가로수처럼 무겁고 적막스런 여인 앞에 언제까지나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유감입니다만 그것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위가 마침내 어려운 대답을 했다, 여인은 말이 없었다. 잔잔한 눈동자 위로 희미한 수심기 같은 것이 잠깐 스쳐갔을 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그 한 순간의 짧은 시간 동안뿐이었다. 여인은 이내 다시 표정이 가지런해지고 있었다. 방안은 한동안 먼 바닷소리만 가득했다. 중위는 침침한 호롱불 아래서나마 여인을 차마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번 불상사의 경위를 자세히 설명드릴 수 없는 것이 보다 더 유감입니다. 천 남석 기자의 사고는 확실한 경위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다만, 그날 밤 저는,,,,,,"
사고가 일어나던 날밤 천 남석과 마지막 술자리를 가진 사람이 선우 중위 자신이었다는 것과. 그날 밤 천 남석의 분위기나 거동으로 보아서는 그의 죽음을 자살로 추측해 볼 수도 있었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한데 말을 하다 보니 여인이 문득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고 있었다. 천 남석의 죽음이 자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부인하고 있다기보다 자살이든 사고사든, 그리고 그 경위가 어떤 것이었든 이제는 어떻게 다시 돌이킬 수가 없게 된 일을 부질없이 되새기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분은 이제 다시 돌아오시진 못합니다."
조용히 한 마디를 내뱉고 나선 비로소 어떤 슬픔 같은 것을 견디려는 듯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여인에겐 천 남석의 죽음이 확인된 이상 거기서 더 자세한 내력 같은 건 아무 것도 알고 싶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중위는 다시 말을 잃고 말았다. 바닷소리가 다시 한동안 방안을 가득 채워 오고 있었다. 중위는 그만 자리를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몸도 피곤하실 텐데 그만,,,,,,"
그는 마치 여인의 그 가지런한 분위기를 다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몸을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양 주호는 끝내 소식이 없었다.. 그 양 주호를 만났을 때보다, 그리고 그가 중위를 혼자 빈 집에 남겨 두고 가면서 이제 곧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는 귀띔을 남기고 혼자서 언덕길을 내려가 버렸을 때보다 더 알아진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고 물을 것도 없었다. 그 곳에 여인과 함께 밤을 지키고 있어야 할 일이 없었다. 여인은 아직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왜 중위의 말은 귓가에도 스치지 않은 듯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전 그럼 이제 고만 가 보겠습니다.”
중위는 이번에는 좀더 큰 소리로 말하면서 자리를 반쯤 일어섰다. 여인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위에겐 끝끝내 눈길 한 번 바로 건네 오지 않았다. 선우 중위는 자리를 일어서다 말고 터무니없이 낭패스런 눈길로 여인을 곰곰 내려다보았다. 중위는 그제서야 여인에게서 어떤 새삼스런 요기 비슷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는 문득 여인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
다고 생각했다. 여인은 슬픔을 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중위는 반쯤 일으켜 세웠던 몸을 다시 여인 곁으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고 자신에게도 뜻이 분명치 않은 말을 꿈꾸듯 여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피곤할 텐데 이제 그만 잡시다."
-이어도는 사람을 홀리게 합니다.
실상 이어도가 사람들을 흘린다는 말은 한때나마 그 여인의 사내였던 천 남석 바로 고가 선우 중위에게 한 말이었다.
-제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지요. 제 어머니도 숨을 거둬 간 그날까지 쉴새없이 그 이어도 노래를 부르다가 마침내는 넋을 잃고 이어도에 홀려 가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유년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끝내고 나서 천 남석은 이어도야말로 가엾은 섬 사람들을 터무니없이 절망적인 종말로 홀려가 버리는 저주의 섬일 뿐이라고 몇 번씩 단언을 했다. 사실이었는지 모른다. 고리고 고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그토록 섬을 저주하고 있었던 천 남석 자신마저도 종내는 그 이어도의 마술에 흘려 그를 앞서 간 많은 사람들의 숙명을 뒤쫓아가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 남석의 추억은 그가 애초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시작했든 선우 중위로선 참으로 이상스럽게 폼이 저려 오는 감동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 남석은 애초에 이야기를 꺼낼 때의 태도도 그랬었지만, 이야기가 한참 계속되는 동안도 그 이어도에 관해선 내내 부정적인 어조로만 말을 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모두 끝내고 났을 때도 그는 이어도에 관해서는 추억을 되새기는 것조차 허황하고 짜증스런 일이라는 듯 냉담스런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그의 말에 한정된 노력일 뿐이었다. 냉담스러워지고 싶은 것은 고의 말뿐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싶어하면서도 그는 너무도 이야기엔 열심이었다. 이야기를 좇고 있는 그의 표정 역시 너무도 열심이었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이야기에 너무도 자세한 데까지 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얼굴 표정이 갑자기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기도 챘다. 그는 자신을 건지기 위한 어떤 치열한 싸움을 끈질기게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끈질긴 싸움 끝에도, 그리고 입으로는 제법 냉담스럽게 이어도의 존재와 고것의 의미를 부인하고 싫어하면서도 그 싸움에는 끝끝내 이길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이야기를 끝내고 난 천 남석의 표정은 두려움과 초조감이 극도에 달해 있었다. 그는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무엇인가를 몹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초조하게 선우 중위를 쏘아보오 있었다. 선우 중위는 물론 할 말이 없었다. 밤을 새우고 말 듯싶은 폭풍의 소란만이 귓전에 가득했다. 천 남석이 이윽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진 듯 자리를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말없이 중위의 방을 나갔다. 선우 중위는 그 천 남석을 말리려 해 보지도 않았다. 제 자리에 굳어져 앉은 채로 이제 아마 천 남석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술기라도 식히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선우 중위에겐 천 남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날 아침 천 남석은 배 위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간밤의 술 때문에 늦잠이라도 들었나 싶어 선우 중위가 그의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려 보니 대답이 없었다. 간밤에 침구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밤 사이에 천 남석의 모습을 스친 갑판 근무병으로부터 잠시 후에 그의 동정이 보고되어 왔다. 천 남석은 새벽 한 시쯤 해서 갑판까지 올라와 술기를 식히고 있었다고 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난간에 기대서서 위태롭게 몸을 굽히고 서 있는 고를 보고 갑판 근무병이 주의를 주고 지나갔다고 했다. 천 남석이 선우 중위의 침실을 나간 지 5분 후쯤 일이었다.
-조심하십시오. 폭풍 때문에 아직 상어들이 잠을 못 들고 있을 겁니다.
갑판 근무병은 천 남석이 주의를 받고 나서도 태연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바람에 무심히 혼자 농담을 건네고 나서 그를 비켜 버렸노라고 했다. 다음 번에 그를 본 것은 그로부터 다시 20분쯤 시간이 지난 뒤였는데 이번에도 또 같은 갑판 근무병이었다. 아직도 파도 끝이 스치는 난간가에 몸을 깊이 굽히고 서 있는 천 남석을 보고 녀석은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감기약깨나 준비를 해 오신 모양인데, 이제 그만 들어가 보십시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천 남석에게서 아무런 대꾸를 들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웬일인지 그 칠흑 같은 어둠을 향해 무섭도록 눈을 커다랗게 부라리고 있었는데, 곁에 선 사람이나 말소리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은 듯 표정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열심히 찾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또는 어디론가 넋이 훌쩍 흘려 나가 버린 사람처럼 몰아치는 비바람에도 부라린 눈이 한 번도 깜박이고 있는 것 같지가 않더라는 것이었다. 녀석은 갑자기 그가 이상스럽게 두려운 생각이 들어 자리를 일단 비켜났다가 아무래도 마음이 걸려 5분쯤 후에 다시 가 보니 이번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도가 사람을 홀리는 마술을 지닌 것이라면, 그리고 그 이어도의 부재가 확인된 순간에 천 남석이 비로소 그의 섬을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양 주호의 말을 신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천 남석은 아닌게아니라 그날 밤 그 이어도에 홀려 스스로 그렇게 섬을 찾아가 버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어도가 이번에는 우연이나마 그 천 남석 기자의 죽음을 쫓게 된 선우 현 중위에게까지 엉뚱스런 마력을 뻗치기 시작한 잣이었을까
잠시 후 선우 중위는 여인의 침묵에 흘려 끝내는 그 여인의 기괴한 비밀의 섬을 보고 있었다.
"어째서 넌 나를 가게 하지 않았지?"
“……”
"처음부터 넌 내가 이렇게 널 찾아와 있을 줄 알았겠지?"
방안은 칠흑 속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어딘가에 사고가 있었던 날 밤의 그 천 남석의 눈초리가 무섭게 중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양 주호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그 어둠 뒤쪽 어딘가에서 기분 나쁘게 껄껄대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치올라오는 언덕배기 자갈밭에선 한 아낙의 가난하고 암울스런 노랫가락이 아직도 바닷소리에 묻어 오고 있었다. 바닷가 자갈밭에 펼쳐 세운 그물코 사이로는 아직도 그 옛날의 바람소리가 솨솨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선우 중위는 어둠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너무도 역력하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좇기 위해 땀을 흘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쉴새없이 여인에게 허튼 소리를 지껄여대고 있었다. 여인은 어둠 속에서도 역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저 모든 것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그리고 기다리면서 견디는 것뿐이었다. 중위가 돌아가기를 단념할 때를 기다렸고, 그가 돌아가지 않겠노라는 말을 침묵으로 견디고 있었다. 중위의 말이 떨어지자 그녀는 비로소 습기를 쇤 씨앗처럼 천천히 그 답답한 침묵의 껍질을 벗기 시작했는데,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침묵으로 말을 하고 몸으로 말을 했다. 그녀는 남자가 정말 섬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것을 알자 스스로 옷을 벗은 것이었다. 스스로 자리를 펴고 스스로 불을 끄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 중위가 다가가자 그녀는 별로 긴장하는 빛도 없이 고스란히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중위의 체중을 지그시 견디면서 무엇인가를 또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 끈질긴 침묵의 수렁 속에서였다. 그녀 자신이 온통 어두운 침묵의 수렁이었다. 선우 중위는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견딜 수가 없었다,
"넌 이 제주도 자갈밭에서 죽을 때까지 돌을 추리던 여자였을 게다,”
“……”
"바닷바람에 몸을 벗어 말린 여자다!"
뜻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무슨 소리든지 지피는 대로 부지런히 놀려대지 않고는 질식을 하고 말 것 같았다. 그는 깜깜한 침묵을 타고 몰려드는 가지가지 환각들을 쫓기 위해 잠시도 말을 쉬지 않고 있었다. 여자로 하여금 무슨 소리든 입을 벌리게 해놓지 않고는 도대체 그 자신의 환각들을 끌 수가 없었다. 난폭스럽게 여인을 학대했다. 여인은 끝끝내 아무 대꾸가 없었다, 아니 끝끝내 대꾸가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인의 그 수렁 같은 침묵에도 결국은 바닥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중위가 한참 더 정신없이 지껄여대며 여인을 학대하고 난 다음이었다. 여자에게서 마침내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우 중위로선 참으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괴한 반응이었다, 여인의 입술에서 문득 희미한 웅얼거림 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음 같기도 하고 한숨 소리 같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면 마치 제주도의 바닷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바다 울음소리나 파도 소리 같은 그 웅얼거림은,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니 이어도, 그 오랜 제주도 여인들의 슬픈 민요가락이었다. 중위는 그만 번쩍 정신이 되돌아왔다. 불시에 등골에서 식은땀이 솟고 있었다. 천 남석의 어머니도 남편이 수평선을 넘어오는 날이면 비로소 그 걱정스런 밤의 어둠 속에서 이어도를 만나곤 했다던가. 선우 중위는 잠시 멀어져 가는 듯싶던 환각들이 일시에 다시 방안으로 가득 밀려들어오는 듯한 착각 속에서 모질게 다시 힘을 모두 이 여인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환각들을 쫓기 위해서는, 그리고 여인의 고 끝없는 침묵을 끝내 주기 위해서는 어쨌든 다시 그 여인의 소리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많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여인의 노랫가락도 점점 더 분명하고 안타까운 가사로 여물어져 가고 있었다.
이어도하라 이어도하라
이어 이어,,,,,,
6
이튿날 아침 선우 현 중위는 여인을 헤어지고 나오면서 이제 비로소 천 남석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기의 실마리가 풀려 가는 느낌이었다. 여인은 새벽녘에 다시 한번 선우 중위의 학대를 견디고(견딘다는 말처럼 여인에게 적합한 말이 있을까) 나서 비로소 띄엄띄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여인은 처음부터 자기 내력조차 분명히 알질 못하고 있었다. 여인의 부모는 그녀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렸을 때 이미 수평선을 넘어가 버렸고 (천 남석이 그랬듯이 여인도 번번이 그렇게 말을 했다.) 여인이 아직도 희미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어린 오라비는, 좀더 나중에 그가 혼자서 배질을 할 수 있을 만큼 팔심이 올랐을 매 다시 고 수평선을 넘어가 버렸다. 여인의 머릿속엔 간간이 그런 희미한 기억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세상을 혼자서 살아 온 거나 다름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고 바닷가 마을들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저절로 철이 들고 저절로 여자가 된 것이었다. 여자가 되어 가면서는 점점 더 큰 마을을 찾아다니며 바닷사람들에게 술을 팔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천 남석을 만나서 술집여자 겸 한 사내의 괴상한 계집노릇이 시작된 것이었다. 여인이 천 남석을 만난 것은 바로 그 술집 (이어도)에서의 일 년 전쯤 일이었다. 천 남석은 한두 번 그 (이어도)를 드나들다가는 재빨리 그녀의 남자가 되어 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여인을 그 돌 지붕 집 골방으로 끌어들여다 놓고 이상하게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여인더러 한사코 섬을 떠나라 하더라는 것이었다. 천 남석은 여인으로 하여금 섬을 떠나게 하기 위해 참으로 무참스런 수모도 서슴지 않았던 것 같았다. 천 남석은 여인에게 두 가지 해괴한 버릇을 숙명처럼 길들여 놓고 있었다. 여인이 섬을 떠나지 않는 한 잠자리에서 언제나 그 이어도의 노랫가락을 읊조리도록 한 것이 그 첫 번째였다. 그리고 천 남석이 여인에게 길들이고 있었던 두 번째 작업은 그녀의 미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여인은 언젠가 자기의 사내인 천 남석이 다시 섬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길 때 반드시 그 소식을 따지고 오는 남자에게 옷을 벗도록 해놓고 있었다. 천 남석이 다시 섬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그가 영영 섬을 떠나 뭍으로 나가게 되는 경우를 뜻했는지, 아니면 그 자신 자기의 종말에 대해 미리부터 어떤 예감을 가지고 여인에게 그런 말을 남겼는지는 확실치가 않았다. 하지만 천 남석은 어쨌든 그런 식으로 여인을 이상하게 괴롭혀 대면서 자기의 종말과 관계되는 숙명 비슷한 것을 여인에게 미리 길들여 주고 나서 자신은 정말로 다시 섬을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 버리고 만 것이었다.
떠듬떠듬 여인의 그런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창 밖은 이미 날이 훤히 밝고 있었다. 선우 중위는 그때 이 여인이야말로 어쩌면 천 남석이라는 사내의 운명의 한 쑤분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 천 남석 역시 여인에겐 그녀의 한 필연적인 운명일 수가 있었던 것처럼도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제 여인은 천 남석이 자기에게 지워 준 운명을 끝까지 감내해 내고 난 사람처럼 얼굴 표정이나 거동이 훨씬 부드럽게 누그러져 있었다. 천 남석에게 기대해 오던 여인의 운명도 이젠 간밤까지의 일로 해서 모두 마감이 되어 버린 것처럼 묘하게 홀가분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선우 중위는 그러자 마치 그 여인의 다음 번 운명을 천 남석이 바로 선우 중위 자기에게 떠맡겨 버리고 가기나 한 것처럼 그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중위는 곧 옷들을 꿰어 입고 여인의 방을 나왔다. 어디 가서 해장이나 한 그릇 하고 곧바로 배를 탈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둣가까지 나가 아침 해장을 끝내고 나서도 그 길로 곧 배를 타 버리지는 못했다. 그는 배를 타기 전에 먼저 남양일보사 쪽으로 발길을 되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배를 타기 전에 양주호를 한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 중위에겐 아직도 그 양 주호에게 확인해 보고 싶은 일들이 한두 가지 더 남다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확인해 보고 싶은지는 선우 중위 자신도 분명하게 떠올라 있는 생각이 없었다. 천 남석의 죽음에 대해서 (양 주호의 추측대로 자살일 가능성은 훨씬 커지고 있었지만 그것도 장담을 할 계제는 아니었다. 양 주호의 그 부랑배처럼 짓궂은 처사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여인의 새로운 운명의 비밀에 대해서, 그 모튼 것들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양주호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 두고 싶었다. 하지만 중위에겐 그런 젓보다도 양 주호를 만나서 여인에 관해 일러두고 싶은 더욱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저 오늘 섬을 떠날 거예요."
중위가 그 돌 지붕집 사립을 나서려고 할 때, 이상스럽게 낭패스러워진 표정으로 주뼛주뼛 발길을 망설이고 있는 그를 보고 여인이 안심이라도 시키듯 불쑥 던져 온 말이었다. 천 남석의 존재는 아닌게 아니랴 여인의 불가항력의 운명 같은 것이었다고 할까. 천 남석은 여인을 섬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 한사코 그녀를 괴롭혀 왔다고 했다. 하지만 여인은 또 여인대로 천 남석이 섬에 있는 한 끝끝내 그 곳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천 남석이 정말로 섬을 돌아올 수 없게 된 지금 여인은 비로소 섬을 떠나겠노라는 것이었다. 중위는 일순 기묘한 배반이 느껴져 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천 남석의 존재가 이 섬과 관련해서 얼마나 완벽하게 여인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었는가를 다시 한번 분명하게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뭐 좀 알아진 게 있습니까? 허허허."
시간이 이른데도 양 주호는 벌써 그 커다란 국장석 테이블을 덩그라니 혼자 지키고 앉아 있다가 선우 중위를 반갑게 만나 주었다. 아침 일찍 사무실을 나와 중위를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양 주호의 표정은 이제 어젯밤 (이어도)와 천 남석의 집을 찾았을 때의 그것하곤 전혀 딴판이 돼 있었다. 폐인처럼 황량스럽기만 하던 표정이나 거동이 방금 바다에서 올라온 뱃사람의 그것처럼 건강하고 상쾌했다. 불편한 한쪽 다리 때문에 더욱더 거동이 불편해 보이던 그의 커다란 몸집도 테이블 한쪽에 기대어 놓은 그의 굵고 튼튼한 지팡이처럼 우람스러웠다. 선우 중위를 보자 배를 들썩거리며 너털대는 그 호인 풍의 웃음소리를 제외하고 바면 그는 마치 사람까지 온통 달라져 버리고 있는 걸 같았다. 어딘지 늘 짓궂은 음모를 숨기고 있는 듯한 웃음소리만이 전날의 그것 그대로였다. 그는 이미 이 쪽의 속을 환히 다 꿰뚫어보고 있는 사람처럼 그 짓궂은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중위를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중위에게 물어대기 시작했다.
선우 중위는 이제 이 자가 모든 걸 알 대로 다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천 남석의 죽음뿐만 아니라 간밤 동안 여자가 띄엄띄엄 털어놓은 이야기를 그녀의 내력이라든가, 천 남석이 어떻게 그녀의 운명을 길들이고 있었으며, 어떻게 그것으로 그토록 여인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었는가 하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그는 알만큼은 다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양 주호 자신도 그처럼 여인을 가까이 할 수가 있었다면. 그리고 어딘지 늘 천 남석의 죽음을 미리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양 주호 그 사람이고 보면, 여인이나 천 남석의 언동을 통해 그런 데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 있을 터이었다. 밤사이 여인과의 일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었다. 중위와 여인이 간밤에 어떻게 되었는가는 양 주호 자신도 질문을 말끔 생략해 버리고 있었다.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천 남석의 죽음이었다. 천 남석의 죽음에 관해 자기 말을 좀 곧이들을 만하게 되었느냐는 말이었다.
"글쎄요, 별로 분명하게 알아진 건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쓸데없이 제가 실수를 한 것 같더군요."
중위는 일부러 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면구스러운 듯 양 주호를 힐끗 스쳐보았다. 그런데 그 양 주호에 관한 선우 중위의 추측은 별로 크게 빗나간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실수라니, 무슨 일이 있었소?"
양 주호는 일단 무심하게 반문해 왔다.
"천 기자의 소식, 제가 전하지 않을 걸 그랬어요.
"선우 중위가 전하지 않으면 그럼,,,,,."
"국장님께서도 전해 줄 수가 있었을 텐데.....”
"그야 난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을 일부러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던 걸요. 허허허 ,,,,,,"
양 주호가 비로소 무슨 소린 줄 알겠다는 듯 새삼 빈 웃음을 너털거렸다. 그리고 그는 이제 별로 말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 선우 중위의 추궁 앞에 시원시원 속을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젯밤 여자는 제가 아니라 국장님께서 집까지 소식을 다시 가져오리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던걸요. 당연히 그랬을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천 기자가 그런 심부름꾼을 미리부터 여자에게 귀띔해 놓고 있었던 것도 국장님을 염두에 두고 그랬었던 것 같구 말씀입니다."
"아니 천 남석이 그런 심부름꾼을 미리 일러 놓은 것은 어떤 특정한 인물을 염두에 두고 한 짓은 아니었을 게요. 작자는 다만 자기 혼자서 여자를 끝내 책임지기가 싫었던 것뿐이었을 테니까요. 죽어서까지 한 여자의 운명을 자기에게 붙들어 매두기가 싫었다고나 할까. 하여튼 녀석은 누구에 의해서든지 자기 계집의 운명을 바꿔 줄 사람만을 원하고 있었을 겝니다. 누구였든지 상관이 없었을 거예요. 표현이 좀 거꾸로 되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를테면 녀석은 늘 철부지같이 제 계집더러 섬을 떠나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국장님은 마치 그 천 기자로부터 여자의 다음 운명을 떠맡은 기분이었겠군요. 그래서 직접 소식을 전하지 않으려고 하신 겁니까?"
"허허 이 양반 사람을 너무 겁장이로 만드는군. 하지만 아직 그렇게 겁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소. 사실은 겁을 먹을 필요도 없구요. 녀석이 설령 그러길 바랐다고 하더라도 그걸로 한 여자의 운명이 바뀐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천 남석의 존재가 여인에겐 그토록 절대적이었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지요. 반대이기 때문에 여인의 운명은 바뀌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인의 운명은 천 남석이라는 한 아내가 아니라 그 사내의 섬에 보다 단단하게 붙들려 매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여자가 아무리 사내를 바꾼다 해도 그녀는 어느 사내에게서나 똑같은 섬의 운명을 만나고 맙니다. 나 같은 섬 사내라면 천 남석도 바랄 만한 인물이 아니었을 겝니다."
듣고 보니 양 주호의 이야기는 어느새 중위를 표적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가 이 섬에서 다시 섬 사내를 만났을 전 운명이고 뭐고 바뀔 여지가 없는 것이다. 여자는 섬을 나가 섬과는 상관이 없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 그때서야 여자는 비로소 자기의 운명을 바꿔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말을 뒤집으면 바로 그런 뜻이 되고 있었다. 선우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문득 주의가 곤두서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젯밤 국장님이 일부러 제게 소식을 전하게 한 것은 제가 역시 이 섬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목소리마저 조금씩 두렵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양 주호는 여전히 태연스런 어조였다.
"그랬기가 쉽겠지요. 무엇보다도 아마 천 남석이 그 편을 원했을 테니까
"그럼 국장님께서도 뭔가 여인의 운명이 바뀌기를 기대하셨겠군요."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 여자의 운명은 그걸로 쉽게 바뀌어지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전 이 섬의 남자가 아닌데두요?"
중위는 계속해서 물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양 주호는 이제 거기서 한동안 대답을 참고 있었다. 중위의 기분을 환히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눈길로 멀긋멀긋 그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더니 그는 중위를 달래기라도 하듯 천천히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젯밤 여자한테 꽤 겁을 먹고 있는 게로군요. 하지만 염려하실 건 없어요. 여자가 운명을 바꿔 갖자면 또 하나 전제가 있어요. 운명이 바뀌자면 무엇보다도 여자는 먼저 섬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 남석은 여자에게 먼저 그걸 바랐었지요. 하지만 여자는 섬을 떠나지 못합니다. 여자가 섬을 떠나지 못하는 한 중위도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자는 섬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섬을 떠나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중위는 머릿속이 다시 혼란스러웠다. 양 주호가 중위를 너무 이리저리 휘둘러대고 있었다. 그는 고런 혼란 속에서도 아침에 여자가 섬을 떠나겠노라 하던 말은 아직껏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양 주호의 알이 아직도 불안했다. 양 주호는 여자가 섬을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헛점이라면 헛점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양 주호의 헛
점은 바로 선우 중위 자신의 약점과도 같은 것이었다. 선우 중위는 마치 그 양 주호 스스로 자기의 헛점을 메워 주기를 바라듯 초조한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하지만 양 주호는 선우 중위의 그런 의구 따윈 끝내 아랑곳을 않는 어조였다.
"그야 물론 여자가 섬을 떠나고 싶어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섬을 떠나고 싶어한 것으로만 말한다면 여자보다도 천 남석 그 녀석 쪽이 훨씬 더 정도가 심했지요. 천 남석이 여자에게 그토록 섬을 떠나라고 한 것은 고 여자에 대해서보다 차라리 자기 자신이 섬을 떠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으니까요. 섬을 떠나고 싶어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는 섬을 떠날 수가 열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섬에서 태어나고 이 바닷바람에 씻기며 살아 온 제주도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섬을 떠나지 못하면서 여자더러만 그러라고 한 것은 이미 그 자신은 자기의 운명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도 결국 섬을 떠나지는 못합니다. "
여자의 말을 일부러 귀띔해 줄 필요는 없었다. 여자의 말을 알고 나면 양 주호는 그것을 오히려 여자가 섬을 떠나지 못할 가장 좋은 증거로 둔갑시켜 버릴 게 틀림없었다. 바로 그런 양 주초의 분위기에 선우 중위는 마침내 자신을 압도당하고 만 것이었을까. 그는 이제 마치 그 양 주호에게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여인을 섬에서 떠나보내지 않는다는 약속이라도 받아 낸 것 같은 기분 속에서 목소리가 훨씬 침착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미 일이 다 그럴 줄을 아시면서도 어젯밤 국장님은 무엇 때문에 절 굳이 여자에게로 보내셨던 겁니까?"
"글쎄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천 남석 그자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었겠죠.”
"결과를 미리 알고 계셨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글쎄요. 거기 꼭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한다면 고가 여인에게 씨를 뿌리
고 길을 들여놓은 것들은 그가 정해 놀은 방법으로 거두게 해 주고 싶었다고 할까요.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한 남자와 여자가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됐다면 그걸로 다 그만인 게지요."
"천 남석 기자도 그걸 바랐을까요?"
"적어도 자기 계집이 옛날 그의 어머니처럼 되지 않게 될 것만은 다행스러워 하겠지요. "
"국장님은 앞으로 (이어도)엘 다시 가시게 될까요?”
"글쎄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이번에는 양 주호 쪽이 오히려 글쎄요를 자주 연발하여 자신 없는 대답을 되풀이하고 있다. 말을 자꾸 계속해 나갈수록 그의 얼굴에선 비로소 그 헤프디 헤프던 옷음기가 사라지고 커다란 체구에는 이상하게 쓸쓸한 수심기마저 어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우 중위는 이제 그 양 주호가 오히려 점점 더 두려워져 가고만 있었다. 그에게는 도대체 이 섬과 섬의 운명, 그 리고 천 남석의 죽음과 그의 여인에 관한 비밀, 그 모든 것이 한결같이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 가운데는 심지어 한 사내에게 모든 운명을 걸러 버린 여인이 마지막엔 자신의 임종마저 먼저 간 자기 사내에게 바치고 간, 그 고집스런 섬 여인의 사연까지도 이미 다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우린 날마다 이 이어도를 찾아옵니다. 이어도를 찾아와서 술을 마시고 이 이어도 여자와 노래도 부르고 사랑도 하면서 하루 하루씩을 더 살아갑니다. 그 이어도의 술집 덕분이었을까. 양 주호는 술집에서 체념조루 지껄인 것과는 반대로, 일단 그 (이어도)를 돌아서기만 하면 그의 삶은 친 남석의 고것에 대해 너무도 태연하고 정색스러운 편이었다. 선우 중위는 그 양 주호가 마치 어떤 커다랗고 불가사의한 괴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편집국 안은 이제 출근 시간을 대어 나온 기자들로 주위가 왜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한데도 양 주호는 그런 주위의 기척 같은 건 귀에도 들려오지 않는 듯 조금은 의례적인 것일 수도 있는 엷은 수심기 같은 것이 어린 얼굴로 중위를 빤히 건너다보고 있었다. 이젠 할 말도 거의 다 끝이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선우 중위로서도 이제 들을 만한 이야기는 거의 다 들어 버린 셈이었다. 여인이 섬을 떠나겠노라 하던 소리도 이제 와선 굳이 고 양 주호에겐 건네 둬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이제 그만 자리를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때였다. 양 주호가 그런 선우 중위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리고 아직도 무슨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았던지 새삼스럽게 불쑥 말머리를 끄집어냈다.
"어떻게 이쯤 되면 선우 중위도 좀 신용이 가는 것 같소? 천 기자가 자살을 했을지 모른다는 거 말이요?"
"그야 국장님께서 이미 고렇게 생각하고 계신 게 아닙니까?"
중위는 양 주호의 의도를 얼핏 알아볼 수가 없어서 엉거주춤 대답하고 나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웬일인지 양 주호는 거기서 그만 또 말이 없었다. 고개만 1L덕1L덕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리고 있었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던 일입니다만 국장님께선 역시 처음부터 이번 일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던 게 틀림없었어요. 아니 그렇게 믿으려고 애를 쓰고 계셨지요."
중위가 다시 양 주호의 내심을 대신 말하고 나서 자리를 고쳐 앉았다. 말을 하다 보니 그는 실상 가장 궁금했던 말을 빠뜨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가장 궁금스런 말을 자기 쪽에서 먼저 꺼내 오고 있는 것을 보면 양 주호는 이제 비로소 그 천 남석의 죽음에 대해서도 입을 열 것 같은 기미가 엿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좀더 자리를 앉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장님에서는 무엇으로 그토록 천 기자의 자살을 확신하고 계신지 그걸 알 수가 없군요."
이번에는 다시 중위가 질문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야 이 섬을 알면 그쯤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은 이 섬의 내력이나 현실이 스스로 말을 하니까요."
양 주호 역시 이젠 목소리가 다시 담담해지고 있었다,
"이 섬이 어떻게 그 천 기자의 자살을 설명할 수 있는지 전 아직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건 선우 중위가 아직도 이 섬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 기자는 무엇보다도 우선 이 섬에 운명이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국장님께선 어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그가 이 섬사람이었다는 건 무엇을 뜻합니까?"
"싫든 좋든, 그리고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이 섬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이어도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이어도를 그지없이 두려워들 하는 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내 그 이어도를 사랑하고 이어도를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이어도가 없이는 이 섬에선 삶을 계속할 수가 없다는 걸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다 마침내 어느 날은 그 이어도를 만나 이어도로 떠나갑니다. 그것이 이 섬사람들의 숙명이자 구원인 것입니다."
"하지만 천 기자는 이어도를 사랑하려고 한 일이 없지 않았습니까?"
"전 어제 아마 그렇게 말을 했을 겝니다. 그가 별로 이어도를 사랑하려고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건 사실입니다. 작자는 늘 그 이어도가 실제로 살아 숨쉬고 있는 이 섬마저 떠나고 싶어했을 지경이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리 섬을 부인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속에 은밀히 숨쉬고 있는 그의 이어도를 그는 끝끝내 부인해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섬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그는 자신이야 뭐라고 말하고 싶어했든 어쩔 수 없는 이 제주도 섬 사람이었으니까요. 아니 천 남석 그자야말로 그가 그토록 자기의 이어도를 부인하고 섬을 떠나고 싶어했던 만큼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그 이어도를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역설 같군요."
"역설이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다만 그 이어도를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 사람과는 달랐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기의 섬을 너무도 깊이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섬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 것뿐입니다."
양 주호는 무슨 영감이라도 내린 사람처럼. 또는 그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닷없이 열이 오르고 있었다. 그의 설명 역시 순전히 그 자신의 영감을 쫓고 있는 것처럼 심한 비약을 감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선우 중위는 모 양 주호의 기세에 눌려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문 채 잠잠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양 주호가 아직도 한참 더 말을 계속했다.
"천 남석의 영혼 속에도 다른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부터 벌써 이어도는 은밀히 다가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어렸을 때부터 섬에 대한 두려움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고 자기의 섬을 다른 사람들처럼 쉽게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워만 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에 섬을 따나고 싶어했고 일부러 그것을 외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얼핏보면 일찍부터 그 두려움을 견디면서 자기의 섬을 사랑해 버린 사람들보다도 훨씬 깨인 것처럼 조이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작자가 아무리 아닌 척해도 끝끝내 그가 이 섬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는 결국 자신의 섬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는 이 섬을 떠나지 못하고 섬의 운명을 좇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고 있었습니다. 고래서 그는 자기 고집에게까지 예감 어린 당부를 남겨 두지 않았습니까. 그는 처음부터 자기 속에 숨어 있는 그 섬의 운명을 부인할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두러워하고만 있었지요. 하지만 그 두려움이야말로 그가 그 자기의 섬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이어도가 얼는 곳으로 섬을 떠나고 싶어하면 할수록 더욱 더 자기의 섬을 떠날 수가 없었고, 그리고 그 자기의 이어도를 두려워하면 할수록 그만큼 그 이어도를 사랑하게 되고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그는 끝끝내 그 밀감나무 무성한 언덕받이 한 구석에서 누구보다도 융통성이 없는 방법으로 그 이어도의 꿈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밀감 밭처럼 무성해적 가는 섬사람들의 각성 속에서도 이젠 하루하루 숨결이 멀어져 가는 그 기어도의 허무한 꿈을 위해서 말입니다."
양 주호는 이제 완전히 신이 들려 버린 것 같았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목이 마른 듯, 사환아이에게 커피까지 시켜 왔으나, 막살 그 커피가 날라져 왔을 때는 목이 마른 것도 잊어버린 듯 그 쪽은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고 애꿎은 담배만 연거푸 바꿔 물고 있었다.
"그렇다면 천 기자는 그 자기의 이어도를 만나고 나서 왜 절망을 했습니까? 절망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선우 중위가 마치 자신도 이젠 그 이어도를 눈앞에 보고 있는 듯 조심스럽게 끼어 들었다. 하지만 양 주호는 중위의 그 궁금증에 대해서도 이미 비슷한 대답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는 섬을 보고 나서 그 섬으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 그걸 어제도 아마 무척은 황홀한 절망이었으리라고 말했을 겝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그의 자살이 불가피했던 이유는 천 남석 자신도 그가 그 자기의 이어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던가를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다른 사람처럼 섬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질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에선 그 점이 무엇보다 섭섭한 일입니다만 만약에 그가 그런 걸 알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이 섬으로 가지 않고도 좀더 그 이어도를 사랑할 수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오래도록 섬을 두려워할 줄밖에 몰랐습니다. 그리고 한사코 그 자기의 섬에서는 외면만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그 자기의 섬을 만나고 나서 그 섬을 오래오래 사랑해 온 사람들처럼 자기의 섬을 정직하게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섬의 운명이 원래 그런 것처럼 그렇게 밖에 자기의 섬을 사랑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편집국의 유리창을 넘어 들어온 아침 햇살이 어느새 두 사람의 무릎까지 훌쩍 기어올라와 있었다.
"놀랐습니다. 예감치곤 앞뒤의 연결이 너무도 정교하게 연결된 예감이군요."
선우 중위가 마침내 항복이라도 하듯 머리를 절절 내흔드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양 주호의 비약과 영감 투성이의 열변을 겪다 보니 자신도 이젠 제법 천 남석의 자살에 어떤 분명한 화신이 얻어진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양 주호를 가볍게 추궁했다.
"그런데 국장님은 자신의 예감이라는 걸 그토록 철저하게 신용하고 계신가요? 국장님께선 사고 경위는 한 번도 제게 묻지 않으셨던 게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는 일 같군요."
말을 하고 나서는 제풀에 짓궂은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하니까 양 주호는 그제서야 좀 안심이 되는 듯,
"예감을 신용했다기보다 고만큼 난 천 남석이 스스로 그의 섬을 찾아갔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래도 녀석을 그의 섬으로 보내고 싶어하질 않는 것 같았어요. 끝끝내 그의 자살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단 말입니다."
"전 사실을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사실의 화인 없이 그의 자살을 믿어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 사실이라는 걸 단념하십시오. 사람들은 때로 사실에서보다는 허구 쪽에서 진실을 만나게 될 때가 있지요. 그런 때 사람들은 그 허구의 진실을 사기 위해 쉽사리 사실을 포기하는 수가 있습니다.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겠지요. 천 남석이 이어도를 만난 것도 아마 그 사실이라는 것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가 주변의 가시적 현실을 모두 포기해 버렸을 때 그에게 섬이 보이기 시작했단 말입니까. 당신도 아마 그것을 포기하고 나면 보다 쉽게 천 남석의 자살을 믿을 수가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마 어젯밤부터 내가 당신한테 뭔가 해드리고 싶은 일이 있었다면 당신에게서 바로 그 사실에 대한 집착이나 욕망을 포기시키는 일이었을 겁니다."
턱수염이 부수수한 양 주호의 얼굴에 비로소 은근한 웃음기가 번지고 있었다.
"으슴푸레 짐작이 바는 것 같군요. 하지만 국장님께선 천 기자의 죽음이 그토록 자살이었기만 바라고 계셨다는 말씀이겠군요."
"자살이 아니었다면 작자는 끝끝내 자기 섬을 만날 수가 없었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결국 국장님께서도 처음부터 별로 자신은 못 가지고 계셨군요."
"아닙니다. 난 처음부터 믿고 있었읍니다. 난 처음부터 당신의 그 사실이라는 걸 포기하고 있었으니까요."
"저에게도 그게 포기될 수 있을까요?”
“……”
양 주호는 웃고만 있었다.
선우 중위는 이제 자리를 일어섰다. 양 주호도 고 선우 중위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무릎에 얼룩져 있던 아침 햇살이 동시에 마루로 흘러 떨어졌다. 탁자 위엔 손도 대보지 않은 커피잔 두 개가 그대로 고스란히 식어 있었다.
"그럼 우리 이제 그 천 남석이란 잔 그렇게 자기의 섬을 찾아간 걸로 해줍시다.”
양 주호가 솥뚜껑처럼 괴다란 손을 내밀며 마지막으로 선우 중위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그 선우 중위의 희고 깔끔한 오른손을 잔뜩 움켜잡은 채 한동안 정신없이 마구 배를 들썩거리며 껄껄대고 있었다
7
선우 중위가 작전 선단으로부터 전령선을 타고 섬을 떠나간 지 열흘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파랑도 수색 작전을 끝내고 돌아온 해군 함정들이 항구를 떠나 기지로 돌아간 다음 바다는 며칠째 텅텅 비어 있었다.
이어도의 여자는 아직도 섬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남양일보사 양 주호 편집국장은 아직도 시간만 끝나면 그 이어도의 술집으로 가서 폐인처럼 술을 마선대며 여인의 노샛가락에 취해 있곤 했다. 하지만 양 주호는 이제 천 남석의 체온이 묻은 여인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의 이야기는 다시 입에 올리는 일이 없었다. 여인이나 양주호에겐, 아니 어쩌면 이미 이 섬을 떠나간 선우 현 중위에게서마저도 천 남석은 이제 영영 그 자기의 섬 이어도로 간 사람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천 남석은 이어도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밤사이 바닷가에 불가사의한 일이 한 가지 일어나 있었다. 천 남석이 마침내는 자기의 섬을 만나 이어도로 갔을 거라던 양 주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 양 주호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천 남석 자신은 그 사나운 폭풍우 속에서 끝끝내 초 이어도엔 도달할 수가 없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가 그토록 떠나고만 싶어했던 이 섬을 거꾸로 그 이어도로나 착각을 한 것이었을까, 이어도로 갔다던 천 남석이 동지나해에서 그 밤 파도에 밀려 홀연히 다시 섬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기이한 일이었다. 한데 더욱더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조화는 그 여러 날 동안의 표류에도 불구하고 천 남석의 육신은 그 먼 바닷길을 눈에 띄는 상처 하나 없이 고스란히 다시 섬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아침해가 돋아 오를 때까지도 그 심술궂은 썰물 물끝에 얹혀 용케도 다시 섬을 떠나가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이청준(李淸俊: 1939- )
전남 장흥 출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1965년 월간 <사상계>의 신인 문학상에 <퇴원>이 당선되어 등단. 1967년 <병신과 머저리>로 동인 문학상 수상. 78년 <잔인한 도시>로 이상 문학상 수상. 그의 작품은 주로 생활과 예술, 혹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과 고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관념적이기는 하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집요한 솜씨를 가진 작가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인간의 심리적 내면적 고통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하다. <당신들의 천국>,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소문의 벽>, <매잡이>, <조율사>, <자유의 문>을 비롯한 많은 소설집이 있으며, 작품에 「병신과 머저리」, 「소문의 벽」 등 다수가 있다. 관념과 지성의 깊이, 그리고 한의 정서를 독특하게 보여준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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