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처기 -임옥인
경성에서 차를 타고 S읍에 가까워질 때까지 그 동안이 실로 여덟 시간도 넘건만 남편은 시무룩 해서 창 밖만 바라보다가 가끔 고개를 건들거리며 졸 분, 별로 말이 없었다. 내가 물어보는 말에 겨우 대답이나 할 뿐, 신혼 제삼일 만에 하는 여행으로선 슬쓸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는 첫 인상과 같이, 무뚝뚝하고 말이 없을 줄 짐작은 했었지만, 또 그러므로 해서 믿음성이 있어 보이는 까닭에 결혼까지의 과정을 밟은 것이지만, 일평생 저렇게 재미 없는 사람과 함께 늙으려니 하면 내 가슴엔 벌써 알지 못할 불안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아니다 후회한 내게 당치 아니한 약한 짓이다 하고 나는 자칫하면 흐려지는 눈을 끔벅여 가며 손을 모으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나는 속으로 내 친한 동무가,
『생이별 자리엔 가두 죽은 후취론 안 갈 일야』
하던 말을 생각하곤 혼자 고소했다. 그리고 보아 그런지, 바로 맞은 편에 앉아 실신한 사람 모양을 하고 희미한 시선으로 창밖 멀리 바라보는 남편은 꼭 무슨 사라진 그림자를 따르는 사람같이 보였다. 그것은 내 마음에 일어나는 부질없는 착각일는지도 모른다. 나는 겁이 더럭 난다. 오래오래 함께 살 사람을 벌써 이렇게 의심하고 어찌자는 것인가, 나는 내 마음을 꾸짖고 더욱 긴장한 자세를 하고 앉아 있었다.
차가 길고 높은 기적을 뽑았다. S읍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넓은 벌이 나타나고, 먼 산이 아득히 보이고, 그 산 위에 흰 구름발이 피어오르고, 넓은 강이 번득이며 나타났다. 이 강이 유명한 N강인 것이다. 멀리서 보아도 맑고 깨끗한 강이었다. 나는 새땅에 처음 오는 호기심을 참기 어려웠다.
『아아 N강 저것 보셔요, 저 강을』
하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편의 무릎을 몹시 흔들었다. 남편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본다. 손에 쥐었던 부채를 창턱에 놓고
『강물 못 봤어? 무에 그리 신통해?』
남편은 이렇게 퉁명스레 쏘아 주고 턱을 치켜들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는 등골에 솟은 땀을 손수건으로 닦고 창 밖만 시름없이 내다보았다.
S읍에 내려야 내가 면목 있는 사람이라곤 별로 없을 게다. 결혼식에는 참례 안 하셨던 시부모와 시동생들이 있을 게고, 그리고 그 애들이 있을 것이다. 영수는 아홉 살, 복희는 일곱 살이래지. 어떤 애들일까. 저희 아버지를 닮아서 저렇게 무뚝뚝할까? 소문으로만 들은 저희 어머니를 닮아 상냥할까. 나를 보고 엄마라고 할까? 나는 그 애들을 만나는 순간 무엇을 느낄 것인가?
그보다도 나는 어서 내 것으로 사 놓았다는 물건들이 보고 싶다. 오천 원 짜리 피아노, 오백 원 짜리 오트간, 삼백 원 짜리 삼면경, 도 양복장 등등. 중매를 선 신 이사를 통해 내가 제일로 주문한 것은 피아노였다. 나는 일찍 피아노 없는 내 신 가정을 상상해 본 일 조차 없었다. 상대야 누구든 내가 가는 집엔 꼭 피아노가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정말 그에게 사게 한 것이다.
내 욕망도 그러했거니와 아무리 서른 살 먹은 신부이기로 여학교 교원이요, 전문학교를 나온 소위 재원인 나를 이규철 즉 남편이 셋째 번 후취로 요구한다며 나도 어떤 무리한 주문이라도 하고야 결혼을 승낙할 용기가 난 것이다. 돈에 굳기로 유명하다는 이규철이가 신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천 원을 들여 피아노를 사다니 꽤 반한 상대이리라는 평판이 돌았다지만, 그가 내게 대해 애정을 가졌는진 모르나 나는 그에게서 정다운 공기와 전적인 열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이 내게 있어선 오히려 다행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나는 몇 해 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여자이다. 그도 의사였다. 서른이 채 못된 젊은 의사였다. 그는 미나라는 아름다운 간호부와 나를 피해 만주로 가버리고, 나는 결혼날만 기다리던 노처녀였다.
그런 일이 내 마음을 더욱 강하게 반동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남에게 지지 않겠다는 괴퍅한 성미가 이런 실패에 부딪쳐 더욱 굳어져 버렸다.
나는 결혼하되 꼭 그와 같은 의사와 하기로 작정이었다. 세 번째거나 네 번째거나 그와 같이 깨끗한 예방의를 입고 청진기를 들고 사람 앞에서 엄숙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그런 의사가 원이었다. 내 남편 되는 사람이 의사이기로 그것이 내 과거를 메꿀 만한 무엇이 있을 것인가? 나는 내 남편의 전 모습에서 나를 버리고 떠나간 사람의 전부를 느끼려는 것인가?
그러나 내 맞은 편에 앉은 의사라는 내 남편은 마음 속으로 암만 깨끗한 예방의를 입히고 왕진 가방을 들려 보았대야 의사다운 데가 없다. 얼굴이 희고 이마가 넓고 수염이 검은, 즉 말하자면 풍모가 수려한 것이 의사라고만(이것은 나의 어리석은 우상 때문에 그러한, 검은 <로이드>안경테 속에서 살기를 띤 듯한, 쓰윽 째진 듯한 붉은 두 눈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고는 내 관념 때문에 현실엔 아무 기쁨도 못 가져오는 생활의 출발을 저질렀고나 하고 뉘우쳤다. 그러나 나는 이 차를 내리는 시각부터 당당한 의사부인으로, 더군다나 수십만 재산가의 부인으로 행세를 할 것이요, 이 S읍 부인들 위에서는 인텔리 주부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내 기쁨 때문에는 행복할 수가 없었지만, 투쟁심 때문에는 충분히 즐거울 수가 있었다.
남편이 개업하고 있는 병원에서 길을 사이에 놓고 조금 떨어진, 꽤 큰 집이 우리 집이라 한다. 밖으로 보나, 안에서 보나 다 내 취미에는 안 맞는다. 안의 세간들도 그러하다. 벌써 전에 부친 내 짐은 끄르지 않았는데도 안에는 바로 전 시간가지 여편네가 살던 집 같은 공기와 세간이 온 집안에 그득 차 있었다. 내 짐은 끄르지 않아도 그대로 살 수 있는 차림차림이다.
집에는 수염은 허옇게 세었을 망정 얼굴이 검붉게 윤나는, 건장하게 생기신 시아버지와, 키가 자그마한, 고생으로 늙어버리신 듯한 시어머니와, 그 밖에 촌에서 온 많은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시부모라고 무턱대고 공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나이 많고, 시부모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운 존재련만 나는 마음으로부터 머리가 숙여지지를 않았다. 그저 인사라고 서먹히 하고, 시부모도 나를 그렇듯이 반겨 주시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었다 치더라도 내 첫인사를 받고는 지금까지 계시던 촌으로 곧 가버리신 것을 보아도 알아지는 것이었다.
왜식으로 꾸민 응접실에 나를 위해 샀다는 피아노와 오트간 그리고 삼면경이 놓여 있었다. 피아노와 오트간은 뚜껑을 열고 건반을 눌러보고 만족했다.
나는 나 이외에 이 집에 가득 차 있는 또 다른 여자 즉 내 남편 된 사람에게 가장 가까워 보이는 그림자를 방안에서 본 듯해서 매우 불쾌했다.
인사 왔던 사람들이 다 흩어진 후 몇 시간을 방문도 열지 않던 한 오십 되어 보이는 여자가 입을 조금 삐죽하고 두꺼운 아랫 입술을 내밀고 나타났다.
『내 딸 대신 온 사람이요? 아이를 데리구 고생하겠소』
매우 거만스런 태도요, 도전적이다. 나는 그 태에 못지 않게 대답하고 이것도 내 버릇인 두꺼운 아랫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부인은 이어 담배를 피워 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에서 나는 그의 젊은 시절을 여러 가지로 상상해 보았다. 키가 크고 몸이 균형 지고 살빛은 검을 망정 선명한 윤곽의 얼굴, 음성이 둥글고 멋지다. 이 S읍에서 제일 예뻤다는 이 여자의 딸 즉 내 남편의 전처를 나는 이 여자 속에 느끼고, 만나는 시각부터 속이 좋지 아니했다. 담배를 피워 문 소매라든가, 앉음앉이라든가, 옷 입은 거탈이 여염집 부인 같지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이 여자가 괘 강한 내적인 것을 직감해 버렸다.
남편이 여장을 풀고 병원으로 나간 뒤 나는 심란한 마음을 억눌러가며 피아노 앞에 걸터 앉았다. 악보는 없이 짚어지는 대로 건반을 때렸다. 내 마음을 상징하는 즉흥곡이었을지 모른다. 곁엣방에 앉았던 남편의 장모는 무어라고 고함을 지른 양도 싶은데 나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피아노에서 손을 떼었을 때,
『아 영수 애비 어디서 미친 걸 데려왔군. 팔자 사납다보니 별 꼴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남자들처럼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못 들은 척했다.
오후 세시 반이나 됐을까 현관문이 좌르르 열리더니
『할머니』
귀여운 사내아이 음성이다.
『옳다 영수다』
하고 현관에서 <랜드셀>을 매고 들어오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나를 보더니 발을 딱 멈추고 시커먼 눈을 끔뻑하고 서먹히 웃어 보였다. 나는 또 속으로
『옳다 따르게 할 수 있는 애다』
하고 마주 나가 머리를 쓸어 주었다.
『영수야 이리 온, 게서 뭘하는 게야』
영수는 외할머니 방에 뛰어 들어가고 말았다.
영수가 학교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아니 되어 계집아이 복희가 돌아왔다. 나를 보더니
『저게 누구야 난 싫어 할머니』
어디선가 빗자루를 들고 오더니 내 등 뒤를 갈겼다. 나는 어떻게 해야 옳은가?
『요 계집애 꽤 힘 들이겠다.』
고 중얼거렸다. 일곱 살이라고 하나 얼굴이나 말하는 것이 닳아먹어서 못 된 어른 같다. 오히려 오라비인 영수 놈이 순진해 보인다.
내가 이 집에 오기 전까지 애들 외할머니가 식모를 데리고 살림을 보아왔다 한다. 전 처가 삼 년 전에 죽었다니까 그 후로 주욱 그렇게 내려온 모양이다. 나는 그와 도저히 한 솥의 밥을 못 먹을 줄을 알고 남편과 상론해서 딴 집을 잡게 했다. 나갈 때 자기 딸이 쓰던 살림을 전부 달라는 것이었으나 낡은 재봉틀과 작은 농짝과 또 남비나 그릇 같은 세간을 얼마 내 보내고 다른 것에는 손을 대게 못했다. 아무리 쓴다기로 이런 촌 살림에, 식모까지 다섯 식구에 먹는 데만 사백 원씩 썼다는 여자다. 있으면 흥청망청 쓰고, 없을 땐 좁쌀 알도 없이 살았다는 소문의 주인공이다. 나는 모든 뒷소리를 각오하고 내 마음대로 결정을 짓고 아이들 남매는 내 손에 돌아오게 했다. 말이 되라면 말이 되어 방바닥을 기고, 무엇을 사달라면 밤중을 가리지 않고 사다 줬다.
『저게 저게』
하던 복희도 점점 나를 엄마라고 부르게쯤 되었다. 외할머니와의 거래는 절대로 금했다. 내 눈을 속여서는 가는지 몰라도 내가 보는데는 가는 일도 없이 되었다.
일할 줄 모르고 더럽고, 손이 거칠고, 처먹기만 하는 식모도 내어 보냈다. 남편과 나와 아이들 남매, 이렇게 네 식구만으로 되었다. 시부모는 십리 밖 촌에 계시고 시동생들은 유학 중이었다. 그래도 먼 데와 가까운 데서 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아서 나는 매일 매일을 바쁘게 지냈다. 찬거리는 물론, 빨래 비누 휴지 같은 일용품도 다 내가 사들였다. 뜰 안에 우물이 없어서 물도 공동 우물에 가서 내가 길어왔다. 열 대여섯 살에 곧잘이던 물동이를 처음 일 땐 조금 무거운 듯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허리가 휘청거려서 물을 흘리곤 했지만 그것도 곧 익숙해졌다.
『왜 사람을 못 시켜? 창피하게 물동인 왜 여』
『참 별 일 다 보겠어, 물동이 이는 게 뭐 그리 창피하담, 당신 서울 사람요?』
남편과 나는 가끔 이런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한 편 나는 내 짐을 정리하고 전 처의 농 속을 보게되었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는 결혼할 때엔 아무 것도 아니 해 오고 시집와서 다른 색시들 치장을 구경하고는 그렇게 많이 했다는 것인데 장롱 속에는 값진 비단 옷이 헤일 수 없이 꽉 들어 차 있었다. 나는 거먼 장은 보기 싫으니 패 때든지 그의 어머니에게 주든지 하고 속의 옷들만 꺼내 내 장 속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하나 남편은 전 처의 분위기를 없애는 것이 허수한지, 그가 쓰던 세간은 그대로 두자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해 가지고 온 옷들이 전 처의 것만 못해도 깊이 간직해 두고 부엌일 같은 궂은 일에 전 사람의 옷들을 꺼내 입는다. 치마 같은 것은 뜯어서 아이들 이부자리도 하고 방석 같은 것도 만들었다. 나는 전 사람의 그림자를 쫓되 내가 소비해서 없애려는 심산이다.
하루는 남편의 서재를 정리하다가 두꺼운 앨범을 발견했다. 그 속에는 남편과 옥숙과의 역사를 얘기하는 여러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주을 온천에서 그의 어깨를 붙잡고 해죽이 웃으며 찍은 남편의 모양이나, 상상보다 훨씬 어여쁜 그의 신부 차림이라든지 각각 어린애들을 안고 찍은 가족사진이 다 내 비위를 긁었다. 더구나 그의 확대한 요염한 반신상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발작적으로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무어라 중얼거리며, 마는 무슨 말을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사진을 있는 대로 다 쪽쪽 찢고 그리고 그것들을 아궁이에 쓸어 넣고 성냥을 그어 댔다. 나는 가슴이 후들후들 몹시 떨렸다.
이 일이 남편에게 알려 안질 리 없다. 그리고 아이들 외할머니한테도 내 동무인 덕순의 말을 들으면 내가 사진을 찢어 없앤 것을 알고 벼락같이 성을 내다가
『사위 면목을 봐서래두 노연 생각을 참으셔요』
하는 덕순의 말을 듣고 나와 맞붙는 것을 피했으나 자기가 꼭 한장 갖고 있던 달의 사진을 크게 확대시켜서 저희 방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아이들을 더구나 복희를 사랑하는 일은 특별했다. 내가 이 집에 온 밤부터 소위 신부와의 한 자리 속에도 복희를 꼭 안고 자는 것이었다. 그 애의 모습이, 보면 볼수록 제 어머니다. 동그스럼한 얼굴에 오똑한 코며 조금 눈초리가 올라간 것이라든지 입 모양이 유난히 선명한 거라든지 모두 내가 사진에서 본 그 애의 어머니 같았다.
『쟨 꼭 저 엄마야, 점점 더 이뻐져』
보는 사람마다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복희를 못 견디겠다는 듯이 쓰다듬고 더 유심히 들여다본다. 나는 이 복희가 꼭 죽은 저희 엄마의 몸과 마음을 본떠서 나를 볶는 것만 같이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이들의 예습과 복습을 꼭 보아주었고 도시락도 알뜰히 싸 주었다. 내복이나 입는 옷들이나 이부자리들을 늘 깨끗이 해 주었다. 처음에는 저희들의 비위를 맞춰 주다가 차츰 좋지 못한 버릇을 한 가지씩 고쳐갔다. 웃 어른께 인사하는 것, 고맙다는 말과 앉음앉음과 간식을 조절하는 것과 함부로 돈푼을 집어 안 주는 일과, 이런 것을 가르치고 고치고 타일러서 점점 나아졌다. 남편은 여기에 대해선 내게 고맙다는 듯을 품는 모양이었으나 조금 정도를 지나치면 눈을 부릅뜨고,
『애들을 왜 못 견디게 구는거야, 되지 못하게시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당장엔 웃어 보이다가도 며칠을 두고 비꼬고 트집을 썼다.
『저 계집앤 꼭 저희 어멈을 닮았나봐!』
내 입에선 이런 말도 나오고,
『조 계집앤 꼭 첩이야』
이렇게도 소리쳤다.
복희는 점점 내가 보는 데선 태연스레 엄마 엄마하고 말 잘 듣는 척하다가도 돌아서면 어른 이상으로 내게 대한 준렬한 비판을 내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복희가 커가는 것이 무섭기까지 하다.
애들 외할머니는 집을 나간 뒤로 생활이 곤란하기 짝이 없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거나 또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이 여자는 무엇이나 남겨두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젊어서는 여러 부호들의 주머니 끈을 풀게 하고 딸을 시집 보내 놓고는 그 덕에 흥청망청 쓰다가 내가 들어선 다음부터는 꼴이 말 아니다. 자연히 내게 어열이 올 것은 물론이지만 남편도 내 살림살이를 보고 전 장모가 얼마나 헤펐다는 것을 깨닫는 모양이어서 일 년 동안 쌀 섬이나 대어 주고는 그만인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통쾌했다. 늘 머리에 기름만 반지르르 바르고 담배를 피워 물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쓸데없는 얘기만 하고 날을 보내는 게으른 여자를 미워 안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집에서 살림을 시작한 이후 생활비는 전 장모와 전 처가 있을 때보다는 삼분의 일로 충분했다. 그렇다고 한 달에 한 차례씩의 곰국과 닭찜을 걸른 것도 아니었다. 닷새에 한번씩의 장날이면 장에 가서 여러 가지 찬거리를 사되 영양이 있고 값싼 것으로 했다. 풋고추나 호박이나 오이를 사는 데도 부르는 값에서 일전이라도 깍아야 마음이 놓였다. 내 버릇인 뒷짐을 지고 두꺼운 아랫입술을 쑥 내밀고 그리고 안경을 쓴 내 꼴이 장안에는 곧 알려졌다.
『이 의사 새댁이래』
수군거렸다.
『애구, 무슨 우리에게 깎을라구 그래시오? 돌아가신 그 전 부인은 깎기는 커냥 다문 얼마래두 더 주던데』
『흥 안 될 소릴, 그럴 사람 다루 있죠, 우린 돈 귀한 줄 아니까』
나는 바구니 하나로 찬거리를 사들고 거릿길을 덜렁덜렁 걸어서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괜히 전에 하던 대로 우리 집에 와서 일을 돕는 척하고 얻어먹으려 드는 사람들에게 대해선 극단으로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다. 김장 때 같은 때에 좀 도와주고도 많은 보수를 요구했으나 나는 딱 잡아떼고, 최소한도의 보수를 했을 뿐이다. 촌에서 시부모가 오셔도 보통 식사대로 했고 남편이 병원에서 들어오기 전에 시아버니가 저녁상을 재촉하시면,
『이 집에선 주인이 와야 저녁 쓰는 법입니다.』
하고 호기스레 대답했다. 시아버지는 그 길로 문을 크게 닫고 가버리셨다.
한번은 촌에서 시어머니가 남편이 좋아하는 명란젓을 석유통으로 하나 맛스레 담가 보내셨다. 집에서 날것으로 혹은 두부 찌개에도 넣어 먹고 온 동삼을 두고 먹었지만 그대로 많이 남았길래 남을 주는 것도 아깝고 해서 하루는 장에 이고 나가서 죄다 팔아 버렸다.
아는 여편네들을 만나면,
『이 봅세, 명란 좀 사 줍세』
하고 수작을 걸었다. 저물 때까지 팔았으나 그래도 남은 것은 가지고 들어와 소금을 더 뿌려서 꼭꼭 눌러 두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촌에 계신 시부모는 다시는 아무 것도 안 보내 주셨다. 나도 아무 것도 아니 보내기로 했다. 좁은 S읍 안에 이 의사 부인이 명란을 팔았단 소문은 굉장한 모양이다.
『기생의 소생이래두 옥숙의 편이 그래두 점잖았어. 돈을 쓸 줄 알고 인정이 있었거던. 그러게 그가 있을 제 그 집에 좀 많이 드나들었어?』
『참 그래. 점잖은 사람 부인다웠지. 옥숙의 전 부인도 무식은 했을망정 좀 듬직했어? 아여 지금 것은 새도랭이라니, 깍쟁이구』
『그래두 애들은 잘 거두나 보든데』
『그럼 그렇지두 못함 죽일 년이게?』
『아무러나 애들 잘 거둠 그만 아냐?』
이렇게들 내게 대한 비평은 자자한 모양이고 덕순을 제하고는 병원에서 오는 심부름꾼 외에 우리 집 문 앞에 들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세간들을 기름이 긇게 닦달질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말끔히 치우고 화초를 기르고 빨래는 한 가지라도 밀릴세라 빨아 다리고 장독대를 보암직히 차려 놓고 마당을 슬고 목욕탕을 소제하고, 이렇게 날마다 분주했다. 나는 무엇이나 손에 일감을 쥐고야 배겼다. 낮동안에는 바느질도 했다. 명주 빨래도 손수 해서 다듬었다. 한번은 남편의 명주 바지를 솜 두어서 뒤집는데 복희가 우유를 쏟아서 다시 빨던 일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나는 덕순이 이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을 마음 편하고 또 다행히 여겼다. 덕수은 같은 여학교를 나온 동무이다. 그가 소학교 교원의 아내로 다섯 아이의 어머니로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라도 부지런히 알뜰히 해나가는 것이 반가웠다. 구식 여성에 지지 않게 일할 줄 아는 것이 기뻤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동지다.
가끔 서로 털어놓고 얘기도 많이 했다. 나는 이 덕순이에게서 내 남편의 지난 얘기들을 들었다. 신중한 덕순은
『괜히 이런 얘기해도 괜찮을까?』
다짐을 하고 내가 무슨 얘기든 꺼리지 말고 하라고 조르는 바람에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 주었다.
『병원 선생님은 복희 엄마를 잃고 중이 됐드랬어』
『중이?』
나는 못 알아들은 듯이 재우쳐 물었다.
『중이 되다니?』
『응, 중이 됐다니 입산위승이 아니라 그렇게 중같이 지냈단 말야』
『여편네 잃구 중같이 지냈음 왜 또 장가는 가?』
『그러게 말야』덕순은 입맛을 다시고
『그래도 왜 지금 잘만 지내시는데』
우리의 부부 사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나 사이는 처음부터 담장으로 막힌 듯 내부적으론 아무 교섭도 없는 듯하다.
『처음 부인은 아주 조혼이래, 정이 없어 갈라졌구, 복희 엄마완 열렬한 연애결혼이지, 참 선생님이 연애를 다 하시구 호호』덕순은 웃었다.
복희 엄마와는 오 년 동안을 재미있게 살았는데 처음 여편네와 헤어지기 전에 옥숙이가 임신을 했고 이혼하는데 그 사이의 말썽이란 말할 수가 없었다 한다. 첫 여편네는 남편과 헤어져 나가면서 복희 엄마에게 몹쓸 방투란 방투는 다 했다는 것이다. 무당을 시켜서도 그러고 손수 지붕 위에 칼날을 박아 놓는다든지
복희 엄마가 결핵으로 시름시름 오래오래 두고 앓으면서도 앓는 기색을 안 내고 드러눕는 법 없이 늘 앉아 있었던 까닭에 다른 사람들은 병이 고된 것을 몰랐다한다. 사람을 보면 늘 상냥히 웃고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에겐 두텁게 주고 마음이 서글서글한 데가 있었고 남편의 마음도 잘 조종해서 남편은 우직스런 그대로 전 마음을 그에게 부었던 것이라 한다. 그 무뚝뚝한 사람이 늘 집에 들어오면 히죽히죽 웃고 얘기하고 떠들었다 한다. 그러다가 그의 병이 위중한 것을 알자 병원에도 나가지 않고 병간호를 하고 밤낮 그 방을 지켰다 한다.
『참 숨이 끊어지자 그 큰 몸이 떼굴떼굴 굴러가면서…….』
『아이구 난 어쩌라우 난 어쩌라우』
동네방네 떠나가게 울더라는 것이다.
그 후로는 남편은 일체 고기를 못 먹었다는 것이다. 아내의 각혈하던 양과, 또 숨이 끊어지기 전에 낳은 갓난 애기를 본 것이 오래오래 눈에 선연하던 까닭일 것이다.
『독신으로 지낼 테야』
남편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아내의 대상과 소상 등 범절을 다 했다 한다. 나와 결혼한 이후론 가끔 자리를 가지고 병원 진찰실 옆방에서 자는데 친한 동무와 얘기하는 걸 들으면, 그런 밤이면 못 견디게 복희 어미의 생각이 나는 때라 한다. 또 가끔 우는 때도 있고, 그것은 나와 결혼한 까닭에 더 생각난다고 하고
모든 조건이 나보다 남편의 마음을 글게 생겼던 그 여자, 그 우직스레 생긴 남편의 순박한 마음을 독점하고 죽어도 그 마음에 깊이 자리잡은 채 있는 그 여자……. 그 환영은 곧 복희에게 있을 것이다. 그 애에게 그 애 어머니를 느끼고 남편은 그것으로 낙을 삼을 것이다. 첫 여편네에게서 난 계집애는 어미를 따라 보냈는데 그 애는 남보다 더 미워한다는 것이다. 복희 모가 죽은 후 전 처가 더나면서 발악을 한 일과 방투질 한 것을 생각코 전 처를 만나기만 하면 죽이고 싶다고 한다고
덕순을 쓸데없는 얘기를 했다는 듯이 그리고 내게 대해 충심으로 미안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표정 없이 시무룩해 앉아 있었다.
사람을 부리기마 하고 손 끝 한 까딱 않고 놀고 먹은 복희 모는 남편의 마음을 독점했다. 나는 이 집의 하녀 노릇밖에 더 한 것이 무언가? 그에게서 따뜻한 음성과 시선과 애정을 느껴본 일이 있는가. 아니다. 한번도 나는 내 마음을 괴롭혀 주던 옛 사람을 결혼이란 한 직무 속에 매장해 버렸지만, 그는 나로 인해 죽은 아내를 더 생각는다지 않는가. 나는 내 고집 때문에 인망이 없고 사람들 앞에서 경원을 당하나 눈 코 뜰새 없이 충실히 일하고 부지런하지 않은가. 내 이 자랑을 왜 몰라주는가?
나는 마음으로 여러 생각을 하는 것이 귀찮아졌다. 아무 말도 듣기 싫고, 아무 말도 하기가 싫다. 또 그것들은 내게 불필요한 것이다. 덕순이와는 그 날 이후 절교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외롭지가 않다. 외로울 게 어딨어? 못난 생각이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세상과 더불어 사귀기를 그만 두고 완전히 고립해 버렸다. 나는 일함으로 즐거울 수 있었고, 재산 많은 이 의사의 부인이란 간판 대문에 다른 사람을 경멸할 수가 있었고 교제를 아니함으로 번거로움에서 떠날 수가 있었다.
나는 내 악기들과 재봉틀과 옷들과 기타 내 세간들에게 깊이 애착한다. 그것들을 거울같이 닦아놓고 나는 만족히 빙그레 웃는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 기쁘고 일하는 것만으로 자랑스럽다. 나는 나 이외의 모든것을 풍분히 경멸할 수가 있다. 남편의 마음도 경멸하고, 나를 비평하는 모든 사람을 경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영수와 복희의 학교성적은 다 좋았다. 통신표를 바라볼 때의 만족한 남편의 얼굴은 우습기까지 했다.
『고것들 꽤 잘 했네』
남편은 세 번째라고 쓴 영수의 것과 다섯 번째라고 쓴 복희의 통신표를 언제까지나 놓을 줄 몰랐다. 나는 속으로
『저희들이 잘나서 그런가 뭐? 다 내 덕이지』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속에 움직이는 내 유일한
『고 것』은 나서, 커서, 저 애들보다는 몇 배나 더 잘 할 것만 같았다.
덕순이를 절교해 버린 내 주위에는, 집 식구 이외엔 강아지 새끼하나 어른거리는 것이 없었다. 이런 외부의 사교에서 멀리멀리 떠나도 털끝만치도 고독과 허전함을 느끼잖는다. 내 속에 커 가는 한 생명이 내 유일한 벗이요,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나는『내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터질 듯이 기쁘다.
내 주위는 점점 제한되어 가나 그러나 내 마음은 무한정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새 세계에서 내 뱃속에 커 가는 아이의 태동을 빙그레 웃으며 느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