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 상 의 봄 -이청해
"요새도 책 읽어?"
남자는 그렇게 반말이 된다. 여자도 이제야 뻣뻣한 새 겉옷을 벗었을 때처럼 편안해진다.
"책?"
여자는 생각해 본다.
그들은 오늘 16년만에 처음 만났다. 따져보니까 그랬다. 어색해서, 서로 우물우물 말꼬리를 흐려가며 아이가 몇이고 어느 동네에 살며 각기 아내와 남편은 무얼 하는가, 어떤가, 따위를 간략히 주고받은 후 그는 예전처럼 반말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들은 뭐 연인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연인 이상이었을 수도 있다. 뭐라고나 할까. 이성간의 사랑이 금지된 동기간들처럼 서로를 너무 자세히 알며, 한 사무실에서 4년간 같이 일했던, 말하자면 친하디 친한 동료였다.
책? 책을? 그 동안 책을 읽었던가?
여자는 막막한 기분이 된다. 바람이 분다. 무언가를 읽은 것 같기는 하지만 책다운 책은 한 권도 읽은 것 같지가 않다. 아쉽고, 허전하다. 모처럼 편안해진 기분에 파도가 인다. 옛날로 단숨에 환원해 버리던 그의 반말도 약간 떨떠름해지고, 강물처럼 생겨나던 공동 정서에도 구멍이 뚫린다.
"나는 아이작 싱거의 단편들이 좋던데.....요즘 젊은 친구들은 다른가봐."
여자는 웃는다. 웃으며 이제는 완전히 그를 느낀다. 그는 이렇게 엉뚱하다. 옛날에도 그랬다. 눈에는 욕심이 담겨 있고, 장난스럽고, 기분파이며, 뱃속 저 안에 야심도 있지만---- 그의 가장 큰 특성은 이 엉뚱함일 것이다. 언제나 무슨 생각에 젖어 불쑥 중간 말을 해 버리는 것이다. 분열증 환자처럼. 남자들은 다 그런가, 여자는 그때도 종종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는 여자를 보는 순간 책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고, 옛날 둘이서 떠들었던 순간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르며, 그러자 자연 최근에 겪었던 책에 얽힌 어떤 일화가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설명이 없다. 그것이 그다. 여자는 입을 다물고, 좀더 한참 웃는다.
"아무리 권해 봐도 나중에 읽고 와서 말하는 걸 들으면 머 꼭 쉰 밥 먹은 얼굴들이야. 아무 감흥이 없나 봐."
여자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는 키가 크다. 남자도 여자를 내려다본다. 그들은 서로의 머리칼에 섞인 중년(中年)을 의미 있게 확인한다. 반갑다. 편하고, 서로 안심이 된다. 한 떼의 젊은이들이 그들 옆으로 지나갔다.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에 짧은 치마, 헐렁하거나 달라붙은 셔츠, 볼이 푹 퍼지고 뭉그러진 신발들이 소리를 내며 절그렁절그렁 앞으로 나아갔다.
"아이작 싱거? 독일 사람이야?"
반말의 감회가 여자에게도 다가든다. 아이작 싱거? 아이작 싱거? 여자는, 아이작 싱거라는
이름은 이렇게 입에 익숙한데 어째서 그의 작품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까. 정말로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었던가 머릿속으로 더듬어본다. 그러나 캄캄하기만 하다.
"아냐, 유태인이야. 이디쉬어로 작품을 썼어."
이디쉬어? 이디쉬어가 뭐지? 하는 의문이 여자에게 다시 든다. 이렇게 생소한 언어가 내게 있었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여자는 솔직해지기로 한다. 지금까지 살아 온 경험으로, 모르는 곳에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 가장 보기 좋았었다.
"이디쉬어? 아이작 싱거? 요즘에도 그 책들이 책방에 있을까? 어느 출판사에서 언제 나왔는지 알아?"
여자는 가다가 사 볼 생각이었다. 자신도 그 책을 읽고 쉰 밥 먹은 얼굴을 하게 될지 어떨지.
또 한 떼의 젊은이들이 사납게 그들 앞으로 나아갔다.
"78년이나 79년일거야. 한 출판사는 수문서관이었는데.....또 다른 출판사는 모르겠어."
"어떻게 그렇게 연도를 정확히 알아?"
"아, 그치가 78년에 노벨상을 받았잖아. 어쩐지 그 해가 기억에 남아있어. 그랬으니까 아마 78년말이나 79년쯤에 출판되었겠지. 그랬을거야."
78년? 여자는 눈을 까마득히 뜬다. 78년이라면 지금부터 14년 전이다. 결혼을 하고 2년쯤되었을 때인데---- 그때 자신은 무엇을 했던가? 무엇을 했길래 이런 작가가 노벨상을 받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이 이디쉬어로 씌어진 그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도 몰랐을까? 여러 출판
사에서 번역되어 나왔을 책들과 그에 관한 기사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까?
78년----
스산한 바람이 분다. 그때 여자는 T시에 있었다.
연이어져오는 군대의 차량 행렬이 눈앞에 다가든다.
겨울 같다. 아니, 초봄일까? 국방색의 그 트럭 뒤칸에는 초록 기와 빨강 기를 든 '쫄병들'이 한 명씩 방한모를 쓰고 앞을 향해 부동 자세로 서있다. 맨 앞차에 '운전 연수'라는 빨간색 글씨가 씌어졌던가? 운전석에도 역시, 아마 상병도 되지 못한 듯한 이등병이나 일등병 정도의 '쫄병'이 타고 있다. 어느 차나 똑같다. 추위에 얼어 푸르뎅뎅한 그들의 얼굴을 볼때마다 여자는 가슴이 아리다. 공연히 그들의 어머니나 누이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빨간 고추를 거두어들이며 혹은 산밭에 거름을 내며 그이들은 아들이나 오빠를 얼마나 그리워할까? 여자는 근거도 없이 '쫄병'들을 산골 출신으로 간주해 버린다. 근거도 없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어떤 동시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날랑 앞에서 끌께 엄닐랑 뒤에서 미세요. 군에 간 형을 그리며, 힘겹게 마늘농사를 지어 그것을 손수레에 싣고 장으로 가며 산골 소년은 그렇게 읊고 있었다. 한밭 사십리길 쉬엄쉬엄 가세요. 밀다가 지치시면 손만 얹고 오세요....어느 순간, 트럭 뒤의 사병이 깃대를 갈매기처럼 도도하게 앞으로 내민다. 앞으로 내뻗는 수직의 그 동작은 대단히 오만하고 엄숙해서 무슨 거창한 의식을 치르는 것만 같다. 바람에 조그만 삼각 기가 펄럭인다. 어떤 때는 초록 기가, 어떤 때는 빨강기가 사병의 앞에서, 또는 머리 위에서 큰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위엄 있게 펄럭인다.
주도로가 나오자 그들은 다른 모든 차들을 통제시키고 수십 대도 넘어 보이는 자기 차들을 진입시킨다. 대단한 표정들을 하고 여러 군인들이 진입로에서 동분서주한다. 여자는 진입 정지 당한 차안에 앉아서 그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비장해진다. 날은 흐르고 국방색 차들이 무섭게 지나가고, 그들이 도도하게 깃대를 펼칠 때----- 여자는 처음으로 군대를 병사를 느낀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여자는 지금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는 중이다. T시의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남자 고등학교가 그녀가 근무하는 학교다. 군인들은 그녀의 학교를 지나 청도쪽으로 더 멀리까지 간다. 거기에 무슨 목적지가 있는지 그들은 허구한날 그리고 갔다가 몇 시간 후면 돌아오곤 했다. 학교 앞으로 무엇을 사러 나갔다가 그들 행렬을 만나는 수도 있다. 그들은 스물일곱 살인 여자를 알아본다. 그녀의 등을 향해, 또는 면전을 향해 무엇이 툭, 날아온다. 돌멩이인 수도 있고 휴지 조작을 뭉친 것일 때도 있다. 저 녀석들이 김 선생을 처녀로 아는 모양이지? 옆의 나이든 선생들이 혀를 찬다. 그러나 여자는 군인들이 싫지 않다. 추파거나 희롱이거나 무조건 손을 흔들어 준다. 그들이 희희 웃는다. 여자도 웃는다. 봉함 편지가 날아오는 때도 있다. 여자에게가 아니라 자기 애인한테다. 미리내 이영자 앞---- 이런 것도 있고 우정면 탑리 현영애 귀하---- 이런 것도 있다. 그들의 응석어린 믿음에 웃음이 난다. 대한민국 남자와 여자 사이의 믿음. 여자는 그것들을 열심히 주워 우체통에 넣어 준다. 넣어 주면 그들의 내무반 생활을 생각한다. 상사가 검열을 하는 모양인가? 연애 편지는 쓰지 못하게 하나? 나중에는 우표를 붙이지 않은 것도 날아온다. 여자는 구멍가게 앞에 서서, 우표를 사서, 그 편지를 부쳐 주며 누구에게로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따뜻함, 그리움.....그런 것들을 희망한다.
먼지를 부옇게 날리며 지금 그 차량들이 오고 있다. 바람이 분다. 여자는 안타깝다. 바람
사이로, 햇빛이 내밀며, 또 하나의 장면이 삽입된다.
교련 검열을 받으려고 구보 연습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꼭 굴비 두름처럼 몸집 순서대로 나란히 꿰어져 구령을 외치며, 노래를 부르며 운동장을 달린다. 그것이 8렬 횡대라는 것을 여자는 나중에야 안다. 운동장의 모서리를 돌 때는 곶감 꼬치처럼 줄을 허물지 않고 부챗살을 그리며 직각으로 꺾이느라 수많은 애들이 주먹 세례를 받는다. 하나, 둘, 셋, 넷.....그들의 얼굴은 벌갛게 달아 있고 땀범벅이 되어 있다.
계급장 없는 군복 차림의 교련 선생은 인정사정이 없다. 아이들은 한없이 뛴다. 뒤쪽의 키
작은 두름은 앞의 키 큰 두름이 형성해 놓은 나비가 큰 발걸음을 따라가느라 온몸이 휘청거린다. 웃을 수도 없다. 산봉우리에 해가 지고 해가 뜰 때에, 부모 형제 너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이룬다.....부모 형제 너를 믿고, 너를 믿고.....단잠을 이룬다, 이룬다, 이룬다.....
여자는 건물의 그늘에 기대어 서서 허공으로 메아리쳐 흩어지는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며 속으로 운다. 어떤 땐 겉으로도 운다. 딱히 그 가사 때문만이었을까. 여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부조화를 생각하고, 자기가 걸어온 길을 메마르게 더듬는다.
종이 울린다. 여자는 교실에 있다. 학생들은 서울말을 쓰는 젊은 그녀를 좋아한다. 좋아하지만 좋아하기 때문에 더욱더 애를 먹인다. T시에서 쫓겨 나온 그들은 공부에 흥미가 없다. 시간마다 그녀를 곯린다. 진도는 나가야 하는데 수업 방해자들이 한 반에 몇 명씩 진을 치고 있다. 화가 나면 그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손바닥을 때린다. 몽둥이를 물에 불렸다 때리라고 옆의 남선생이 가르쳐 준다. 몽둥이를, 물에 불렸다가, 출석부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지만 소용이 없다. 아이들은 싱글싱글 웃으며 서로 맞으려고 다투어 나온다. 여자는 핏줄이 솟도록 남을 때린다. 손목시계의 바늘이 획 돌아가 버린다. 여자는 시계를 끌러놓고 다음 아이에게 몽둥이를 내려친다. 힘껏 후려쳤던 몽둥이가 아래에서 꿈쩍 않는다. 녀석이 그것을 꾹 움켜쥐고 수염 난 얼굴로 지그시 바라본다. 웃음기 띤 녀석의 유들유들한 표정에 여자는 소름이 돋는다. 여자는 이런 인간 관계를 처음 경험한다. 녀석의 손은 현실적으로 덕석 같다. 여자는 몽둥이를 빼내려 하지만 끄떡도 하지 않는다. 녀석의 키는 여자보다 머리 하나쯤 크고 몸집도 두 배 가량이나 된다. 교실 뒤로 돌아가면 그들의 앉은키나 여자의 선키나였다. 어떻게도 못 할 형국, 여자는 두렵다. 육십 명의 아이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여자는 쥐구멍이라는 말을 비로소 실감한다. 그녀는 그 순간 꼭 죽고만 싶다.
이 모든 것이----- 너무 힘에 겹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추위 아니면 더위. 불화. 그리고 부조화.....
조용히 해요, 거기 떠들지 말아요, 자 16과를 펼쳐요.....
공허한 자신의 소리들.
여자가 아무리 말해도 아이들은 듣지 않는다. 그들은 '말'이나 '학과'로는 통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에서 주먹이 제일 센 녀석이, 앞에서 쩔쩔매는 여선생을 어쩌다가 동정하여, 조용히 해! 라고 한 번 외치면 씻은 듯이 조용해진다. 물을 끼얹은 것 같다. 여자는 물리적인 '힘'의 위력을 느끼고, 자신의 나약함을 동시에 느끼고, 그리고 속으로 씁쓸히 웃을 수 밖에 없다.
나는 왜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여긴 나와 맞지 않은 곳이야.....
운동장으로는 황량한 바람이 분다. 쓰레기 더미를 메운 그 운동장으로는 가으내 겨우내 봄내 그렇게 스산한 바람이 분다.
여자는 냉장고같이 차고 육중한 건물 안에서, 그리고 황사 바람이 불어닥치는 운동장에서,
누비옷을 입고----- 자신의 결혼 생활을, 그 부조화를 그렇게 스산하게 견디고 있다.
"아직 점심 전이지?"
남자가 묻는다. 여자는 남자와 점심을 먹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다. 그와 얘기하는 것은 좋
지만, 새삼스럽게 대좌하여 입을 벌리고 음식을 쩝쩝 씹을 생각을 하나 싫고, 번거롭다.
"밥은 무슨.....그냥 차나 한잔 마시지."
"왜? 무슨 약속 있어?"
남자는 금방 뚱해져서, 볼 부은 표정으로 얼핏 딴 데를 바라본다. 그는 골이 나 있다. 여자는 그것을 안다. 그는 제 욕심껏 안 되면 언제나 이렇게 화를 내었다.
"아냐, 그냥.....맨날 먹는 밥은 무슨.....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허 참,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밥을 먹어야지. 밥도 먹고 차도 한잔 마시고....."
그는 꼭 밥을 같이 먹어야 할 것처럼 말한다. 무슨 의무감을 가진 사람 같다. 여자는 그의
출신지를 떠올린다. 강릉 어디라던가, 그는 아마 장손이었나 했다. 고향의 집안 오라비가 타지에서 누이를 만나 맨입으로 돌려보냈다가는 문중의 어른들에게 큰 꾸중을 당할 것처럼 그는 군다. 여자는 그를 따르기로 한다. 예전에는 한 그릇의 우동에 둘이서 입을 대고 먹은 적도 있었다. 그녀가 우동을 먹는데 취재에서 돌아온 그가 무조건 달려들어 퍼먹기 시작한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한참 후루룩 대다 보니 두 사람의 입에 우동 가락이 같이 물려 있었다.
킬킬 웃으며 가운데를 나무젓가락으로 툭 쳐 삼키기도 했던 것이다. 뿐인가, 그 춥디추운 인쇄소에서, 새벽에, 장의자에 둘이 발을 맞붙이고 잔 적도 있다. 물론 얼굴은 서로 반대쪽으로 돌리고 서지만 말이다. 추워서, 상대방의 엉덩이 밑에 발을 들이밀고서, 그래도 자기 발 건드리지 말라고 고함을 쳤었다. 졸려 죽을 것 같았고, 다른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사회 생활을 하느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정서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자신은
힘겨웠던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만 있어 이만한 일도 서툴러졌나보다고 여자는 생각한다.
그들은 조금 걸어 '아리산'이라 이름이 붙은 2층의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중국 음시점이었
지만 실내는 서양식으로 품위 있게 꾸며져 있다. 조각이 된 검정 나무의자들과 질감이 우아한 담홍색 테이블 덮개, 같은 감으로 된 냅킨이 점잖으면서도 화사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그들을 맞았다. 남자는 그 집과 구면인 것 같았다. 익숙하게 홀 한 켠으로 여자를 안내했다.
그들은 창가의 테이블에 앉았다. 깨끗한 식당이었다. 장미꽃이 한 송이 작은 꽃병에 꽂혀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옛날을 생각한다. 장미꽃, 핑크빛, 결혼, 신혼.....그러자 그의 구체적인 결혼이 궁금하다. 여자는 묻는다.
"그때 그 여자하고 결혼한 거야?"
"누구?"
"왜 있었잖아. 간호사라던가, 자기 아버지가 자기 직업 충실치 못하다고 선보였다는 여자 말야. 고향 근처 도립병원에 근무하는데 서울 어디로 옮기느니 어쩌느니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거기까지만 보고 갔어."
"응, 아냐. 그 아가씨랑 못 했지. 내가 서울서 다른 여자와 놀고 다닌다고 누가 일러서 말야. 사실, 자기 다 알잖아, 나 노는 여자도 없었는데....."
그는 씩 웃는다. 민망한 모양이다. 여자도 웃는다. 그들은 젊은 연인들처럼 '자기'라는 말을 서로 번갈아 사용한 것이 우습다. 마땅히 지칭할 다른 호칭이 없기 때문이었지만 이 야릇한 단어가 주는 어색함도 모면할 수가 없다. 여자는 생각을 돌리려 한다. 마침 웨이터가 왔다.
남자가 메뉴 책을 집는다.
"이 집 이름이 붙은 허름한 정식이 있는데 그거 먹지, 응?"
남자가 양해를 구한다. 여자는 끄덕인다. 매, 난, 국, 죽.....그 정식에도 이렇게 몇 가지의 구분이 있는 모양인데 남자는 그 중 국 정도에 해당하는 요리를 시키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하나 하나 일일이, 어느 걸 선택하면 뭐가 나오고 어느 걸 선택하면 뭐가 안나오는지를 꼼꼼히 따진다. 여자 앞에서 좀 부끄러운 듯 관자놀이가 붉어지면서도,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꼬치꼬치 캐묻고, 무엇이든 확실히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여자는 일상 속에서의 그를 다시 느낀다. 옛날에는 째째하다고 그를 놀리기도 했었다. 웨이터장처럼 보이는 나이든 주문자도, 이런 유의 손님을 제법 겪어본 듯 인내심 있게, 성의를 다하여 그에게 대답하고 있다.
"네, 거긴 죽이 나오죠. 아뇨, 거긴 수프에 탕이 하나 더 나옵니다. 예, 거긴....."
여자는 웨이터와 남자의 대화를 들으며, 아까 하던 남자의 여자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녀는 그가 조금쯤은 놀았으리라고 짐작한다. 처음 그가 그녀 앞의 책상에 앉게 되었을 때, 그때는 그는 순진했다. 그런 것 같았다. 둘이서 퇴근하여 충무로 길을 걸어 내려가노라면 당시
대학을 졸업한 여자의 직장으로는 꽃이라고 지칭되던 한국은행 여행원들이 역시 퇴근을 하여 주욱 걸어 올라왔다.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인물도 좋고(인물이 좋아야 그곳에 취직이 된다는 설이 있었다), 집안에 '빽'도 있다는 여자들이었다. 그 멋쟁이 여자들이 거의 전부 체격이 그럴싸하고 미남인 그를 쳐다보았다. 어떤 여자는 숫제 뻔뻔하게 번들번들한 눈으로 그의 아래위를 끝까지 훑었다. 당장 잠이라도 잘 듯이. 여자는 나중 그들이 한국은행 정사과라는 곳에서 하루종일 돈만 센다는 사실에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지금으로 치면 오천 원권이나 만 원권을, 백 장씩 묶인 다발이 열 개씩인 뭉치를, 그 열 뭉치가 모인 덩어리를, 또 열 개하고도 뭐 몇 개......하는 식으로 그들의 하루 일할 분량이 매일처럼 책상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두 헌 돈이려고 했다. 다 세어서, 태울 것은 태우고, 다시 내보낼 것은 내보낸다 하였다. 여자는 사람들의 상식을 의심했다. 대체, 그런 데에, 시집을 잘 간다 하여, '빽'을 써서 취직을 시키는 사람들이나 또 취직을 하여 다니는 여자들이 다시 보여졌었다.
그러나 그땐 그랬다. 여자의 직업은 그 정도에서 멈추어 있었다. 어쨌든 한국은행 정사과에는 오륙십 명씩 단위를 이루어 돈을 세는 여자들이 몇 학급이나 있다는 얘기였고, 퇴근하여 명동의 최고 멋쟁이가 된 그녀들이 거의 전부 그를 쳐다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얼굴이 붉어졌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여자는 그 이상은 잘 모른다. 그러나, 그랬으므로, 그가 좀 놀았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 계속 있었지? 언제 서점에서 보니까 편집부장이 됐던 것도 같고......"
그들은 출판국 내의 여성지 부서에 같이 있었다.
"응, 그래. 편집부장, 편집국장 그런 거 다 했지. 다 하다가 17년 만인가? 이리로 옮겼서 내가 다시 차렸지."
그는 명함을 꺼낸다.
'두 손 기획'이라는 회사 이름이 여자의 눈에 들어온다. 여자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뭐 하는 회사야? 왜 이리로 옮겼어?"
"광고 이벤트 회사야. 책도 너무 오래 만드니까 싫증이 나서....."
그는 실제로 닭이 깃을 터는 흉내를 내었다.
"옛날엔 우리 그래도 교양 경쟁을 했었잖아. 여성지도 두세 개밖에 안되었고 연예지는 따로 있었고. 이젠 못 해먹어."
여자도 생각이 난다. 여성지는 너무 많이 변했다. 무엇이든 변했지만 정말 많이 변한 것은
여성지다. 그때는 개인의 사생활 같은 것은 품격 문제라고 다루지 않았다. 웬만한 것은 시를
쓰던 최 부장이 데스크에서 심사숙고하고, 연구하고, 잘랐다. 여자도 제주도까지 요리를 싣고 가 서귀포 바위 위에 올려놓고 찍은 경험이 있다. 인쇄도 지금만 못하고 종사하는 사람도 지금보다 적었지만 잘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은행에 가서 그놈들을 펴 보노라면----- 무게만 무거워지고 광고만 요란했지 읽고 싶은 기사를 찾기 어려웠다.
"이젠 반대로 되어서 데스크에서 오히려 더 저질이 되도록 종용해야 한다구. 더 더 험악해지고 더 더 자극적이 되라고 맨대가리서부터 교육을 시켜야 한다니까. 그래야 팔려. 사주들이 뭐 다른 것 생각하나? 그저 돈벌 궁리지."
그는 엽차를 마신다.
"그때만 해도 사장들은 일종의 문화 사업으로 그런 일들을 했잖아. 지금은 아냐. 오히려 이용할 대로 이용해서 떼돈을 벌려고 해. 사람들도 변했어. 교양 운운했다간 당장 망해나가는걸. 지겨워서, 신물이 나서 더 못해먹겠더라구. 내 사업이나 해서 의욕도 일으키고 돈도 좀 벌려고 했는데....."
그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는 얼굴이다.
여자는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지겨워서 그만둔 것까지는 알겠는데 광고 이벤트 회사라니? 광고면 광고지 이벤트란 뭔가? 광고 이벤트? 광고 이벤트? 광고가 되는 행사를 치러 준다는 말인가?
"무슨 일을 하는 거야?"
남자는 자기가 한 일들을 열거한다. 작년에는 <이슬람 문화전>과 <이탈리아 현대 디자인 단면전>을 유치했고, 올해는, 좀 거창하긴 한데, <이조백자 명품전>을 준비중이라고 했다. 전시적인 성격의 것들도 있지만 행사적인 것도 있어, 이런 일에도 자기가 각본을 쓰고, 준비를 하고, 연출을 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런 일들을 해주고 돈을 어디서 받아?"
"여러 군데서 받지. 정부 기관에서도 받고 다른 데서도 받고....."
여자는 여전히 황당하다. 그러나 더 이상 이해하기를 포기한다. 그는 원래 황당했었다. 황당한 것을 좋아하고, 그 와중에서 잘도 견뎌 냈었다. 기획을 하라 해도, 특집을 꾸며도 언제나 엄청나고 이상한 것들을 끌어왔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자기가 끝까지 책임졌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끌고 가는 거겠지. 아마 자기의 장기를 살리는 걸거야. 그런 추진력이 그의 강점이요 밑바탕 힘이 아니던가.....여자는 그렇게만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준 명함을 다시 들여다본다. 대표이사라고, 그의 이름 위에 적혀 있다. 여자는 이제야 그것을 본다.
"뭐야 사장이네?"
"흐응, 뭐 식구가 없으니까."
남자는 회사 이야기를 한다. 그의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서, 여자는 그가 타고 다니는 차가
국산으로는 최고급 대형차이며 운전 기사까지 딸려 있다는 현실적인 정보를 얻는다. 여자는
자연 현상처럼 묻는다.
"잘되나 보지? 성공한 거야?"
"성공?"
순간 남자의 눈빛이 멍해진다.
"그렇게 보여?"
"아니, 자기가 좋은 차 타고 다니는 것 같길래."
"으응, 그거, 렌탈이야."
남자는 씁쓸히 웃는다. 그의 시선이 먼 데 가 있다.
여자는 그의 사업상의 고충을 알 것 같다. 렌탈, 렌탈이란 무엇일가. 빌려서 타고 다닌다는 말이겠지. 사업은 복잡한 것일 것이다. 대외적으로 보여야 하는 자기 위신 같은 것도 있을 거고, 그럼으로써 얻게 되는 여러 가지 득실도 따져야 할 것이다. 저녁마다 술을 마셔야 하므로 기사 딸린 렌탈 차가 더 속 편하다고 남자는 말하지만 어쩐지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닐 것 같다. 여자는 춥다. 여자는 이야기를 돌리고 싶다. 그녀는 그의 가정으로 들어가서, 그의 아내 얘기를 떠 본다.
"둘이--- 좋아?"
그는 시선을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다가 대답한다.
"응, 그래 우린 그런대로 재밌게 사는 편이지. 애들도 괜찮고.....
그들은 한참 아이들 얘기를 한다. 학군 얘기, 학교 얘기, 공부, 몇째가 반장이라는 얘기.....그는, 집에는, 아내에게 조그만 차를 하나 사 주어 동네에서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는 모양이라는 말을 끝으로 자기 얘기를 마감한다. 그리고 그쪽은? 하는 눈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목에 무엇인가가 걸린 것 같고 자꾸 가슴에서 쉬잉쉬잉 바람이 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내 이야기를 하나. 여자는 이런 유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보여 준 성의에 거짓으로 답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솔직함 앞에, 그의 친밀함 앞에, 두꺼운 위선이나 무관심을 바르고 다른 곳에서처럼 메마르게 지껄일 수는 없으리라.
"참 그 친구는 잘 지내나? 내가 왜 즉결재판소에 가서 빼 줬지. 술을 먹었던가? 하루나 이틀쯤 거기 갇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 안나? 자기 애인이었잖아."
남자가 짓궂게 되살려 묻는다. 여자의 남자 친구 이야기다. 세 번째쯤 사귄 남자였다. 세 번째? 하다가, 내가 세 번씩이나 연애를? 하고 여자는 스르르 웃는다. 사실 한 번도 제대로 연애를 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도망쳤던 것만이, 지하도에서 남산에서 연 다방에서 남자들로부터 도망쳤던 기억만이 그녀에게는 남아 있다. 도망치는 기분이라고 좋았을까. 내장에 썰물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누가 알까. 그 어둠과 쓰라림. 자신의 아버지를 상대방 가족에게 설명할 수 없었던 여자는 첫 번째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수천만 원에 달한다는 혼수 비용이 겁나 두 번째 남자에게서 또 도망치고, 그리고 만난 것이 조각을 한다는 세 번째의 그였다. 그녀는 아마 계산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라면, 그에게서라면 나의 약점들이 무화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예민한 예술가는 마음이 차지 않는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투정을 부리고 떼를 썼다. 술을 먹고, 싸우고, 잡혀가고.....그러다가 언젠가는 갇혀서 자기를 좀 빼내달라고 타인을 시켜 여자에게 연락을 한 모양인데 마침 여자는 그때 자리에 없었다. 전화를 받았던 부장이 남자와 의논을 하고, 그가 돈을 마련해 즉결재판소로 달려갔었다는 것이다.
"몰라. 그때 그러고 그만이었지 어떻게 알아."
여자는 그의 황폐한 생활을 더 견딜 수 없어서 과감하게 조각가를 떠났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 결혼을, 그것을 어떻게 했던가? 여자는 결혼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한다. 어느 여류 소설가는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텔레비전에 나와서 말했었다. 그 여자의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얼굴이 떠오른다. 좋은 옷을 입고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나와서, 호령을 했었다. 여자는 텔레비전을 보며, 인생이 뭐길래 저 여자가 저렇게 자신만만한가, 무엇이 저런 여자들을 저렇게 방자하게 만들 수 있나 의아스러웠다. 여류 소설가는 소설의 세계에서는 미미했으나 출세한 남편을 가진 여자였다. 흔한 경우지만 남편을 통해 이룬 세속적인 성공이 그것을 이룬 남편들보다도 더 여자들을 설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노력 없는 보상이었다. 여류 소설가는 말했다. 목숨 걸고 사랑하지 않는 한 결코 결혼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해서 한 결혼은 모든 것을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책임, 책임.....무슨 책임을 져야 할까?
그 여자는 그러므로 결혼 전에 적성 검사 같은 것을 해서 이 사람이 결혼에 적합한가 아닌가를 검사해야 한다고도 했다. 히틀러와 비슷한 식이었다. 그러면, 목숨 걸고 사랑하여 행복한 결혼을 한 자기 같은 사람은 일등으로 합격한다는 말인가? 여자는 이후로 여류 소설가라는 명칭이 붙은 여자들을 경멸하게 되었다. 인생의 단선적인 이해 방식에 숨이 막히고, 도무지 얘기할 맛이 나지 않았다. 결혼이, 모든 사람의 결혼이 어찌 그리 단순히 이루어지던가. 사람의 만남은 번번이 우연이며 흐름이 아니던가. 조건을 따져 본다 하지만 단지 그것은 표피에 지나지 않을까.....그리고 이십 년 전에는 결혼이, 거의 선택이 아니었지 않은가. 주위 사람들의 염려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것은 자연적으로 진행되어야만 하는, 누구의 몇 번째 생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때도 독신이란 말이 있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 한했다. 그리고 모든 여자들은 결혼 때문에 이 특별한 경우에 속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말만 그렇지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들에게는 거의 자립의 의지가 키워지지 않았다.
기존의 사고 방식이나 형편은 더 굳어 있었다. 물론 이 방면에서도 선구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독신'이라는 매력적인(?) 개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그랬다. 결혼은 거의 필수적이었다. 여자도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선이라는 것을 본다. 상품 대 상품이 마주앉아 상대방을 뜯어보는 이 형식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고 생각했다. 누가 소개를 했던가. 모든 조건을 밖으로 꺼내 맞추어 보는 따위의 구차스러움은 생략했다. 여자는 믿어 보기로 작정한다. 이번에야말로 어떻게든 되겠지. 제발 이번에는 좀 잘 되거라.....눈 질끈 감고 밀어붙이던 마음이 통했던지 상대가 결혼을 하자고 했다. 맞춤하게도 그는 인격자로 보였고 그녀의 제반 조건이 그리 문제될 성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끌었던 말은, 그가 고등학교 시절 문예부원이었으며 시까지 썼다는 수줍은 고백이었다. 그는 그 말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었다. 자기가 쓴 시가 당시 자기 학교의 교지에 실려 있다고 했다. 그녀는 왠지 웃음이 나고, 순전히 예감 하나로 잡은 이 시를 좋아한다는 남자를 정말 믿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요리가 날라져왔다. 그들은 순서대로 수저질을 한다.
여자는 생각을 잇는다.
남편이 특별한 단점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후의 적응에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녀는,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살지는 못했지만 일찍이 의식이 깨인 진보적인 성향의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더구나 여고를 졸업하고 그녀는 무턱대고 여자 대학에 진학했는데, 그여자 대학의
교수들은 거의 구십 퍼센트 이상이 미국 유학을 한 이들이었다. 그 후 또 여자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남들의 의식을 앞질러 가는 책을 만들었다. 알게 모르게 그녀는 너무 튀어나와 있었다. 반면 여자의 남편과 그 일가족은 아직 물도 묻지 않은 영남의 보수 집안 사람들이었다.
여자는 이것을 심각히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었다. 선보는 자리에서는, 그는 양복을 입고,
신식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T시로 가서, 그의 부모와 일가붙이들과 더불어 사는 동안
여자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여자는 회의했다. 더구나 그가 교지에 실었다는 그 시를 우연찮게 읽고는, 여자는 자기의 감수성에 대한 예감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는 지
금도 몇 구절이 생각나는데, 뭐, 흰 구름 흘러가고, 아스라한 추억들.
....하는 식이었다. 아무리 고등학교 2학년 때 쓴 것이라지만 여자는 그 상투적이고 별조없는 표현 앞에 그의 얼굴이 겹쳐져 괴로웠다. 여자가 다시 학교라는 직장으로 나갈 결심을 한 것도 이런 복잡한 심리 선상의 저변에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힘들게 힘들게 서로를 적을 시키며 살아 왔다. 이제는 한숨을 쉴 만큼 되었다. 남편과의 애정도 견고해졌다. 그의 촌스러운 감수성에는 의외로 순박함이 들어 있고, 그런 사람에게는 다른 장점도 많다는 것을 발견해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여자는 지금 생각한다. 그 동안의 생활이, 꼭 자기가 수천 년을 넘나들며 춤을 추어 온 것만 같다. 맨 처음, 딸을 낳고 백일잔치를 하려던 그녀를, 딸을 낳고도 미역국을 먹으며 딸애의 백일 잔치라니 이 무슨 해괴한 행사냐던 그들의 상식을, 이제 그 딸을 의과대학에도 보내고 음악 교수도 시키고 싶다는 쪽으로 전환시킨 것은 순전히 자신의 노력 덕분이 아닌가. 물론 변화시킨 것만이 대수가 아닐지도 모르긴 하다.
그러나, 적어도, 내 자식을 세상에 맞게 키워보려는 의지는 사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 여
류 소설가한테는, 부조화에서 조화를 이끌어 낸 이런 노력이 휴지 쪽이나 다름없다는 것인
가. 미리 딱 적성검사를 해 가지고, 적격자만 골라내어, 서로 목숨걸고 사랑하여, 절대 후회
없는 결혼을 하여야 한다는--- 그러니까 나머지는 가스실로 보내든지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어야 한다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절대 논리가 어떻게 소설을 쓴다는 머리에서 나오는가. 여자는 지금 또 턱없이 분개하는 마음이 된다.
"괜찮아?"
그릇들이 치워지기를 기다리며 그가 다시 한 번 묻는다. 남자는 여자가 결혼하고 나서 가
버린 후의 사무실 분위기를 생각할 것이다. 모두들 염려했을 것이다. 소식이 딱 끊어져,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여자는 대답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 뭐라고 하나.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순간 '퀼트'라는 손누비물들을 들고 와서 화랑에서 전시하던 여교수의 얼굴이 생각난다. 고대소설을 강의하며 다산(茶山)에 대해서도 이이(李珥)에 대해서도 연구가 깊던 그 학구파 여 교수는 어떻게 어떻게 되어 남편 따라 미국에 갔는데, 거기서 슈퍼마켓을 하고 산다고 했으며, 그 슈퍼마켓 생활 십사 년만에 미술품인지 수예품인지 모를 그런 물건들을 들고 와 친구의 화랑에서 전시를 했던 것이다. 수화(樹話)의 그림처럼 달도 걸려 있고 산도 있고 시내도 흐르는 어린애 이불 만한 그것들을 바라보며 여자가 생각한 것은 교수가 겪은 시간의 아픔이었다. 한 작품을 누비는 데만도, 그렇게 효과를 내어 촘촘히 누비자면, 몇 년은 걸려 보였다. 여자는 질려서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 교수에게, 미국에서의 슈퍼마켓 생활이란, 카운터에 앉아 허구한 날 창 밖을 내다보는 생활이란--- 자신에게 있어서의 T시에서의 인내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여자들은 그것을 어떻게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자식을 키우는 것이다. 모성이 우위였던 원시 시대에도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두 팔을 아이에게 앗겨 계집녀자의 형국을 이루었다. 그녀는 얼마 동안 남자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가 자라 혼자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4년 정도의 시간이 그 시대에는 필요했을 것이라고 어느 인류학자는 말했다. 그 다음 여자의 팔은 다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자식을 길러내는데 어찌 4년만이 필요하랴. 그 몇 배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면, 여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을까. 해서 그 교수는 퀼트를 하고 나는 서예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서예에 생각이 머물자 그녀는 할말이 뚫린다.
"응, 난 좀 유별난 집으로 시집갔지. 어떻게 그렇게 되었어. 말하자면 지독히 구식이랄까
보수적인 옛날 양반집인데...... 그 풍속이 순하게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이 아니라 중간 중
간 오면서 이상하게 변질된 것 같았어. 그때 내겐 그렇게 보였거든. 사실 옛날 풍습이란 그
대로 유지되어 왔다 하더라도 고칠 게 많잖아. 그래서 내가 좀 반기를 들었지."
여자는 자기의 얘기를 하자니 대단히 쑥스럽다. 그래서 과일을 집어 딴청부리듯이 아삭아삭 씹는다.
"나 잡지사 있을 때 자기하고도 많이 싸웠잖아. 내게 악담 많이 했던 것 생각나 ?"
둘이서 소리를 지르며, 책을 던져가며 다투던 장면들이 테이블 사이로 솟아오른다.
---- 미쳤어? 여기자하고 결혼을 하게? 다방 레지하고 했으면 했지 골 아프게 여기자하고는 절대 안 하네.
누군가 둘이 잘 해보라고 했을 때 남자가 쏟아 놓은 말.
---- 아주 홀딱 빠졌구만. 이게 기사야? 창피하게시리. 왜 아주 연서를 쓰지 그랬어 ?
어느 아리따운 여자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남자의 호의적인 기사가 지나쳤을 때 여자가 송곳같이 날린 말이다.
---- 포천서 왔어?
이건 여자의 외모에 대해 서다. 기지촌에서 왔느냐는 말로, 그녀가 핑크색 꼭 끼는 바지를
입고 갔을 때 (그 핑크 색이 지금 생각하면 좀 너무하긴 했다. 꼭 흑인들이 즐겨 입는 선정
적인 진분홍이었으니까)그의 악의 어린 평이다. 그래도 그는 여자가 브래지어가 훤히 비치는 뜨게옷을 입고 갔을 때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안을 들여다보기만 했었다.
---- 꼭 간에 붙고 쓸개에 붙고 남자가 줏대 없이 무슨 꼴이야 ?
부장하고 국장하고 싸움이 붙었을 때 그가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던진 말.
---- 그런 녀석을 애인이라고 달고 다니니, 앞일이 뻔하다!
즉결 재판소에 갔다와서 그가 퍼부은 악담이다. 그러면서도 그때 그는 질투심으로 눈을 번득였다. 아직 그에게는 애인이 있기 전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탁자를 내려다보며 소리내어 웃는다.
"외유내강이라고 내가 참 속으로 강한가 봐. 지금은 엔간히 다 넘기고 괜찮아. 남편과도 좋은 편이고. 우린 동화하고 적응하는데 무지무지하게 오래 걸렸어. 덕분에 난 서예가가 되었지. 도 닦는 기분으로 그 동안 글씨를 썼어. 지난번 석운 공모전에서는 문공부 장관상도 받았다구."
여자는 자랑처럼 말한다.
"그래? 그랬어?"
남자는 반가와 한다.
"언제 그 글씨 한 번 보고 싶네. 한글이야, 한문이야 ?"
"응, 나는 한글 주로 써. 그리고 요즘은 궁체보다도 고체에 더 매력을 느껴.
여러 가지 변용을 시도해 가며 나만의 것을 열러 가는 재미를 다른 사람들은 아마 알 수 없을 거냐."
남자는 신기하다는 얼굴을 풀지 않는다. 그녀가 글씨를 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실내가 너무 더워서 다른데 가서 차를 마시기로 하고 그곳을 나온다.
큰길을 지나서 골목도 들여다보고, 건너편 쪽으로도 살펴보고 했지만 쉽게 다방이 나타나지 않았다.
"요샌 다방이 드물어. 뭐 요상한 이름들을 붙여 가지고 다방인지 술집인지 레스토랑인지 모르게 칠갑을 해 놓았거든."
남자가 개탄 비슷하게 말한다.
버스 정거장 위쪽에 '난다랑'이라는 글씨가 보여 그들은 그리로 걸어갔다. 그러나 역시 경양식 집인지 다방인지 모를 그곳은 아직까지도 문이 닫혀 있었다. 그들은 조금 더 올라갔다. 큰 건물들이 죽 이어지고 있었지만 생각대로 다방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람한 건물들이 끝나고 5층쯤 되는 옛날 건물이 하나 초라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 2층 창에 쓰여진 '커피수 영타임'이라는 먼지 묻은 글씨를 그들은 보았다. 너무 오래 찾았기 때문에 망설일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은 그리로 올라갔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거대하게 둥근 기둥 모양의 장식대가 가슴팍을 막아섰다. 그들은 어리둥절했다. 실내는 어두웠고 크리스마스 트리에 다는 것 같은 여러 가지 색등이 시절 없이 그 장식대를 아래위로 장식하고 있었다. 홀은 그 장식대 저편 안쪽으로 미로처럼 퍼져 있어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리를 찾아 장식대를 돌며 두리번거리며 서로 어쩔줄 몰라했다. 어느 자리에 앉으려 해도 스피커가 너무 가깝고 좌석이 되똑맞았다.
그들은 어정쩡하게 통로 옆의 의자에 앉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미로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담배 연기와 소음, 팬티를 입었는지조차 의심이 가는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무스 바른 머리들과 한쪽에만 매달려 있는 귀걸이...... 무었에건 반기를 드는 그들의 도전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여자는 자기가 오래 전에 그들을 건너왔음을 감지한다.
"이 다방 이름이 영 타임이야."
"그래. 영 타임. 나도 봤어."
"우리도 저랬을까?"
남자가 매무시가 흐트러진 젊은이들을 건너다본다.
여자도 다시 그들을 본다. 그리고 속으로 되뇐다. 그래. 그랬지. 우리도 저랬어. 젊은 시절이란 게 별건가, 그냥 저러고 다니는 거지. 객기에, 혈기에, 책임이 없는 시절이지. 아직 부모도 있고, 조금 기대도 되고, 그래서 든든하고, 또 스스로는 홀가분하기도 하잖아. 뭔지도 모르고 저렇게 제멋대로 하고 다니는 때지. 패기와 어설픔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기......
그러면서 여자는 자신을 생각하고 치미는 웃음을 누른다. 정말 그랬다. 그때는 몸에 도배 것 같은 분홍빛 바지나 브래지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뜨개 옷을 남자들에게 어떤 느낌을 유발하는지도 모르고 멋대로 입고 다녔었다. 결혼 후에도, 학생들이 사 준 빨간색 하이힐을 교문 앞에서 갈아 신고 용감하게 걸어 들어갔었다. 육십 명의 아이들이 백이십 개의 눈동자
가 그 신을 신고 오나 안 오나 유리창 밖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헐거덕 거리는 빨간 신을 신고 학교 안으로 과감히 들어갔던 것이다.
다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런 일들이 지금 여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갑자기 음악의 톤이 낮아졌다. 그들은 젊은이들에게서 눈을 떼고, 청각에 신경을 모은다.
반사적 반응이다. 순간, 귀에 익숙한 음성이 물처럼 스며 들어온다.
예스터데이-----
내 모든 시름은 멀리 사라져 버린 것 같아---
폴 매카트니가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음악에 젖었다.
"이제 우리도...... 좋은 시절 다 갔지 ? "
남자가 나른하게 푸념처럼 말한다.
좋은 시절 ? 정말 다 갔을까 ? 여자는 어쩐지 승복하기가 싫다. 그런 시절을 지나온 것 같긴 하지만, 지나온 것은 확실하지만 다 갔다고 하기에는 어쩐지 억울하다. 못다함이 많기 때문일까. 확 피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단지 기분이 그렇기 때문일까. 정말로 좋은 시절이라는 것은 있었고 그것이 다 흘러가 버렸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몇 살에서부터 몇 살까지가 과연 좋은 시절이었나......
다시 군대의 차량 행렬이 여자의 눈앞에 떠오른다. 국방색 트럭들은 봄이고 여름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허구한 날 그렇게 줄지어 몰려갔다가 또 줄지어 돌아오곤 했다. 붉은 기와 푸른 기를 도도히 앞으로 위로 펼치고 근엄하고 오만하게---- 여자는 늘 그것을 보며 저들은 어디로 가서 무슨 중요한 임무를 치르고 매일처럼 저렇게 돌아오나 엄숙했었다. 아무 것도 싣지 않은 것을 뻔히 보고도 무슨 수송 임무 같은 것도 생각하고 훈련이나 소집, 전투 같은 말들도 생각했다. 언제나 두려웠다. 그러나 어느 날 멀리로 산책을 가서, 그 차들이 무엇을 하고 오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작은 다리가 나오자 그 다리를 건너지 않고 쉬엄쉬엄 옆으로 완만히 내려가더니, 고작 흘러가는 시냇물에 바퀴와 차체를 시적시적 씻고는 느리게 U턴하여 돌아오는 것이었다. 여자는 그 허망함에 한나절을 웃었다. 병사들은 바지를 걷어붙이고 차도 씻고 물장난도 했다. 그저 그것 뿐 이었다. 그들은 그 짓을 하러 그렇게 허구한 날 도도하고 오만하게 깃대를 펼치며 달려갔던 것이며 또 근엄하게 돌아왔던 것이다.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어딘가 꼭지점에는, 그 환상의 시절에는, 확 핀 젊은 날에는 대단한 무엇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만 실제 그들은 거기서 물장난을 하거나 시적시적 차를 씻어 다시 대열로 진입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 봄이라는 것은, 그렇게 따뜻하고 화사하며 아름답다는 봄은 실제 명확하게 오긴 왔던가. 겨우내 바람이 불고 먼지가 날렸었다. 여자는 2월부터 3월부터 범을 기다린다. 쓰레기 더미를 메운 운동장으로는 을씨년스러운 황사 바람이 쉬지 않고 분다. 어서 사월이 오면, 어서 청명이 지나면...... 여자는 누비옷을 입고 냉장고 같은 건물 안에 서서 감질나게 감질나게 봄을 기다린다. 봄이 오면 꽃이 피겠지. 훈훈한 바람이 불고 노랑 분홍의 꽃들이 피겠지. 그러나 오월이 와도 그 황사 바람은 그치지 않고 휴지쪽들만 을씨년스럽게 날아다닌다. 어느 날은 빗방울이 듣고 어느 날은 진눈깨비 같은 것이 날린다. 여자는 춥다.
건강 때문인가, 궁여지책으로 그런 생각도 한다. 그러고는 어느새 유월, 한 이삼일 따뜻한가 했는데 벌서 무덥다. 무덥다고 생각한지 며칠만에 한여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찌는 듯한 무더위. 그 긴긴 여름...... T시의 봄은, 그 학교에서의 봄은 그렇게 언제 왔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리곤 했다. 항상 추위와 더위만이 있었다. 여자는 그것을 생각한다. 봄은, 젊은 시절은, 결혼은, 신혼 시절은...... 그렇게 아름다웠던가. 사실 이상으로 사람들의 의식에서 환상에 덮씌워 있지는 않았나. 그 시절에도, 아침마다 세수를 하고 주변을 청소하는 그런 일상스러운 일들이 그저 그렇게 나열되어 있지 않았던가. 누구에게나, 언제나 견뎌 내야 할 삶이 있는 것처럼 그 시기에도 그저 살아 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단지, 지나간 봄은, 조금 신선했고 감미로웠으므로, 또한 지나갔기 때문에---- 아름답게 각인되어 있을 뿐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너무 빨리 시절을 몰아낸다. 특히 나이든 사람들이 더 그런 것 같다. 여자는 요즈음 그것을 느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때묻지 않은 햇것. 새로움.
햇콩같은 젊은이들이 저렇게 동글동글하고 예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연푸른 짧은 시기가
그리운 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비릿한 날콩만이 어디 콩일까보냐고 여자는 속으로 항변해 본다.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인 클린턴보다도 우리가 몇 살 덜 먹은 것 알아?"
"그렇던가 ?"
"그래 이상하잖아. 미국에서는 그 인물이 패기에 넘치는 신세대의 기수에다 매력적인 젊은 사십대라는데 우리는 거기에 비해 너무 늙은 것 같지 않아?
"듣고 보니 그러네."
"우린 지탄받아 마땅한 기성세대에다, 때가 잔득 묻었고, 그래서 한물간 세대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것 같애. 우리 스스로도 말야. 왜 그럴까?"
"조깅을 안 해서 그런가?"
"사실 그런걸 안 해서 그런지도 몰라. 젊어지려는, 새로워지려는 노력이 없잖아. 특히 의식에서는 말야."
"그럴까 ?"
남자도 생각해 보는 얼굴이었다.
여자의 머릿속으로 관저 담을 훌쩍 뛰어넘어 신선하게 잔디밭을 질러가는 운동복 차림의 클린턴이 보인다. 그는 정말 젊다. 소탈한 성품과 거리낌없는 행동, 젊은 사고 방식, 패기 발랄한 모습...... 새벽에 햄버거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짓거리도 신선하기 짝이 없다. 가식이나 위선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더 고차원적인 가식과 위선일까. 어쨌든, 클린턴은 시작하는 인생 같은데 그들은 마감 길로 접어든 인생 같다.
"클린턴처럼은 안 되더라도, 잘 익은 과일은 어쩔까 ? 적어도 그런 위치에는 서야 할텐데.
깊은 맛을 두루 갖춘...... 향기도 알맞은......"
"과일?"
남자가 어이없어 한다. 전달이 덜 되었음을 여자는 안다. 그래도 얘기를 지속한다.
"때가 묻었다면, 이렇게 때가 묻은 게 누구 때문이겠어? 우리 잘못일까? 우리가 무얼 했길래? 그냥 살아 왔을 뿐이잖아."
"그래, 그랬을 뿐이지."
남자도 결국 동조한다
"처자식 벌어 먹이느라고 정신없었지. 우리에겐 그것이 제일 중요했으니까. 그러나......
아마 정치 탓인지도 몰라. 너무너무 지겨우니까. 경제도, 사회도 그렇고, 모두들 콸콸 솟는
새 샘물을 양껏 마시고 나야만 정상의 눈으로 돌아올지 모르지."
그들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와하하 ----
웃음소리가 귀청을 때리며 들려 온다. 진동 때문에 먼지들이 풀썩이며 날아올랐다.
남자와 여자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다본다. 무슨 내기를 한 모양으로, 종이 쪽지와 볼펜
같은 것들이 탁자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다.
"저들이, 우리가 16년만에 만났다는 것을 알까?"
"짐작도 못할걸."
여자는 가늠해 본다. 16년, 16년만에 그들은 만났다. 저 젊은이들의 나이에 육박하는 햇수다. 여자는 얼마 전 사람과 사람 사이에 60년이라는 세월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노모를 통해서 경험했다. 팔순의 노모가 동백꽃이 피던 고향집을 너무 그리워해 기회를 대어 그곳엘 갔는데, 거기서 59년 만인가 60년만에 소녀 시절의 동무를 만나 어린애들처럼 기뻐 날뛰던 것을 본 것이다.
유장한 세월
저 애들의 나이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엔 여자의 잚은 날이 있다. 여자는 T시의 봄을 생각한다. 그 기다림과 더위---- 책이나 노벨상 같은 것은 관심에도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어떤 느낌만은 지금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다. 일종의 열기, 스산함, 혹은 젊음의 호흡 같은 것...... 연이어져 오는 군대의 차량 행렬, 교련 검열을 받는 아이들, 스쿨버스를 놓쳐 가금씩 타게되는 1번 시내버스에서의 지긋지긋한 Y대생들...... 그들의 땀 냄새와 열기가 새삼스럽게 그립다.
그러나, 그 시절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특별히 나쁘지만은 않다...... 여전히 언제나 아쉽고 허전하며, 돌아올 날들이 불안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아늑하고 차분하기도 하다......
이런 것을 저들은 알까.
느린 음악이 끝나가고 있다. 남자가 라이터를 집었다.
이청해
1948년 생. 소설가. 이화여대 국문학과 졸업. '91년 계간 < 세계의 문학 >에 단편 '빗소리'를 발표하여 데뷔했으며 발표작품으로 강, 하오, 빗소리, 머나먼 광주, 풍악소리, 환상의 봄 등이 있다. 또한 KBS방송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