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 (孤高) -정비석
-春坡先生 末年記-
책 몇 권과 원고용지 몇 첩을 마련해 가지고 절간으로 찾아들어온 그 날 저녁 저녁상을 물린 뒤에 산보차로 법당(法堂)뜰 앞에 썩 나서자 산들바람이 대령이나 했던 것처럼 후유 가슴에 안겨 들어서 나는 제물에 얼굴을 번쩍 들며 뜻하지 않고
『가을!』
하고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팔월 가위를 지낸 지도 이미 열흘――음력은 구월 머리로 접어들려는 시절이 시절이라 수목은 벌서 단풍에 물들어 산 전체로가 크낙하고 다부지게 핀 꽃송아리처럼 불그레하다.
어디서 불려오는지 나뭇잎 한 조각이 뱅글뱅글 바람에 따라 허공에서 맴을 돌며 법당 뜰 앞에 내려 앉는다.
맞은 산 봉우리에는 상기 노을이 찬연한데 이 용흥사(龍興寺)에는 이미 구석구석에 모색(暮色)이 창연하다.
일 년을 두루 가야 별로 찾아오는 이도 없는 절인지라 법계(法階)에조차 잡초와 다래 넝쿨이 얼크러질대로 얼크러져서 다래 넝쿨 밑에서는 몇 백 년의 긴 세월이 그대로 묵어나고 썩어나고 하는가 싶다.
대웅전(大雄殿)앞에 돌조각으로 묻어놓은 화단에만은 아직도 몇 포기의 백일홍과 맨드라미가 피어 있기는 하나 그것 조차가 찬 바람에 시달려서 싱싱한 것은 한송이도 없고 그저 간들간들 연명이나 해가는 셈이다.
멀리 발 아래로 아득히 굽어보이는 두루 산병풍 속에 같히운 용읍(龍邑)마을은 지금은 쇠락했으나 옛날에는 그래도 원님이 사시던 곳으로 우물이 아흔 아홉――백 개에 하나가 모자라서 왕 도읍지가 못 되었다는 전설이 시방도 이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거니와 용흥사의 흥망도 저 용읍의 성쇠와 운명을 같이 하여 시방은 명색이 절일 뿐이지 은성하던 옛날의 자취는 찾아볼 길조차 아득하다.
성안 백성들의 저녁인심과 새벽잠을 놀라게 하던 인경(人更)과 법고(法鼓) 소리도 울기를 그친 지 이미 오래며 산천만이 의구한 채로 회고에 잠겼을 뿐 말없음이 더욱 애달프다.
나는 아닌 때에 감상에 잠기는 자신을 깨닫고 서서히 담배를 한대 피어물며 뒷산으로 걸어올랐다. 풀에 잠겨 형적을 찾기조차 어렵던 실낱같은 오솔길이 산 속 깊숙이 접어들면서부터는 아주 잡초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굳이 길을 찾아야 할 필요도 없어 나는 낙엽을 짓밟는 보드라운 촉감과 구수한 향훈을 즐기며 걸었다.
산 속 깊숙히 들어오자 바람은 자고 황혼에 풀어진 송진 내음새만이 코 끝에 짙게 아롱진다. 소나무 사이사이를 거닐면서 나는 가슴이 뻐개져라고 공기를 탐내어 들여마셨다.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에 놀란 산비둘기가 잠자리를 옮겨 앉고, 다시 적막 속에 잠들려는 공산에 문득 이름 모를 산새가 한 곡조 구슬피 울며 먼 하늘가로 사라지고 말아 어두워가는 산 속은 한 겹 더 처량하다.
나는 거닐던 발을 멈춘 채, 새가 우짖으며 사라진 하늘가를 하염없이 우러러보다가 천천히 담배를 한 모금 빨아서는 입을 금붕어처럼 공그려가지고 혀 끝으로 가만히 연기를 내밀어 보았다. 아슬아슬 저물어 간 송림(松林) 속에서 한 움큼의 하아얀 연기는 요술장이와도 같이 나붓이 신기로운 형상으로 나부기다가 고요히 사라지고 만다.
맞은 산 중턱에 외따로 떨어진 초가 막사리에서는 이제야 저녁을 짓는지 가느다란 연기가 굴뚝으로 한가로이 떠오르는 것이 보인다.
산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절방으로 돌아와 램프에 불을 켜고 책과 마주 앉았으나 어쩐지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다. 전등 밑에서 살아온 나에게는 램프라는 존재가 이상하게도 몇 세기를 단박에 뒷걸음치게 하여 나는 램프를 쓰던 시대에 생겨난 문학과 전등 밑에서 이루어진 현대문학을 비교해보고 싶은 부질없는 생각만이 솟아올랐다. 그 뿐더러 좁다란 방만 보아온 나에게는 이 휑뗑하니 넓은 통 삼간의 절방은 암만해도 어색하다.
조용한 산 속에서 보람 있는 원고를 써 보겠다는 욕심에서 오십리 산길을 찾아는 왔으나 주위의 생소하고 지나치게 적막한 분위기에 나는 부질없이 애달픈 감정만 솟아올랐다. 초저녁부터 울어대는 접동새의 처량한 소리를 듣는 것도 마음 상하는 노릇이거니와 램프등의 기름 쪼는 애잔한 소리는 또 얼마나 몸에 젖어드는 애처러운 음악인가.
나는 책도 읽지 않고, 줄기 있는 생각에 잠기는 일도 없이 얼마를 멍하니 앉아서 담배를 연달아 피우며 램프불만 바라보고 있다가 급기야 살며시 일어서서 다시 뜰로 나섰다.
달 없는 하늘에는 별이 유난히 총총하여 야기는 차츰 차거워오고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는 쏟아지는가 싶게 자못 소란스럽다. 나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멀리 산밑에 있는 마을을 굽어 보았다. 검은 장막이 찰가분이 내리엎인 골짜기에서는 반딧불 같이 빨간 불들이 집집의 창호지에 비쳐 개똥벌레 불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하나 둘 셋 넷…… 세어가는 동안에 반딧불은 이 구석에서도 방끗 저 구석에서도 방끗 수효가 차차 늘어가더니 마침내는 하늘의 별들과 같이 자꾸만 불어가서, 나는 혹시 저 불이야 말로 별들이 땅 위에 내려앉은 것이나 아닐까 생각하였고,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는 무턱대고 저기까지 내려가보고 싶은 충동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험한 산골길을 걸어 내려가는 위험을 돌아볼 새 없이 저도 모르게 어둠 속의 길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나 웬일일까. 차츰 마을로 내려올수록 빨간 불들은 하나씩 둘씩 어둠 속에 숨어버리더니 급기야 동구안에 다다랐을 때에는 두 세 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자장 반짝이던 것이 별이었던가 보다고, 그 별들이 이젠 모두 다 하늘로 올라가 버린 것인가 보다고, 의심하면서 걸어가고 있노라니까 문득 아카시아 울타리가 마주선다. 그것은 과수원 울타리였다.
『과수원!』
이라고 알자 나는 문득 아까 산 위에서 바라본 그 불들은 그러면 과수원의 능금알들의 조화가 아니었던가 하고, 참으로 엉터리 없는 공상에 사로잡힌 채 아카시아 울타리를 얼마간 끼고 오느라니까 정문 비슷한 문이 나타났고, 거기서 바로 정면으로 빨간 등잔불이 하나 들여다 보인다.
나는 저것이었다고 부르짖으면서 서슴지 않고 빨간 불을 찾아갔다. 차츰 가까이 가면서 자세히 보니 나무 그늘에 켜놓은 램프등 아래에 두 늙은이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인기척에 놀래어 말을 끊고 어둠 속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대뜸 태고시대로 돌아간 듯한 감격에 가슴 울렁거림을 간신히 내리누르며 가만가만 다가가다가 등불 아래에 앉아 있는 두 늙은이 중의 한 분이 틀림없는 춘파(春坡)선생님을 발견하고 깜짝 놀래었다. 참말 용흥사에까지 와서 계림원 주인 춘파선생을 감쪽같이 잊어버렸던 것이 대뜸 죄송스러운 생각조차 들어서 나는 걸음을 빨리하여 그의 앞으로 다가가며
『춘파 선생님!』
하고 내가 듣기에도 엄청나게 높은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나는 그렇게 밖에 달리 부를 말을 미처 찾지 못했던 것이다.
『아, 정 공! 정 공이 웬일이시오?』
춘파 선생도 나를 알아보시자 벌컥 버선 말로 맞받아 나와서 나의 손을 덤썩 붙잡으며 물으신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는 겨우 이런 말을 하였으나 그는 못 알아들으신 듯 깔아놓은 멍석 위로 나를 잡아끌며
『아 참 정 공이 웬일이시요?…… 이리 좀 올라 앉으시오!』
한다. 나는 주인영감에게 묵례를 하고 멍석 위에 올라 앉았다.
『아 언제 오셨소? 여길…….』
『오늘 왔습니다. 저어 용흥사에 놀러…….』
나는 그의 귀가 먼 것을 알기에 고락고락 소리를 질렀다.
『용흥사에?』
하고 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책 읽으러 오셨군?』
하는데 보니 허줄한 옷을 입으신거라든지, 옷깃에 따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것이라든지, 차림새는 이태 전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으나 그러나 머리에는 흰 털이 늘었고, 가뜩이나 움푹 박힌 눈이 좀 더 뚝 두드러져 보였다.
다만 예전보다 더 탐된 것은 수염만으로 한 자가 넘던 것이 시방은 자 반으로 넉넉할 듯하다.
이태라는 세월이 이렇게 선생의 육신상에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나는 내 속 무상감(無常感)에 눌리우며, 그러나 시방도 선생의 풍채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어딘지 모르게 고상한 기개를 발휘하는 것만은 역시 인격의 소치인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생불(生佛)을 대한 듯이 저 모르게 경건한 감흥에 잠겼다.
『그래, 여러 날 묵으시려우?』
『네, 한 사오일쯤…… 내내 몸은 건강하셨습니까?』
나의 물음에 그는 손으로 귀바퀴를 감싸 가지고 듣고 나서
『몸이야 그저 그렇지! 한 사오일 묵으셔?』
『네.』
『등화가친(燈火可親)할 시절이니까, 글 읽으러 오셨군? 구식시대 같으면 밤 글을 읽을 때거든.』
그러고 그는 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었다.
『참 금년 과수원 성적은 좋으십니까?』
『다들 염려해 주신덕분에…….』
하고 나서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마주 앉은 주인 영감더러
『능금 초실한 걸루 몇 알만…….』한다.
나늘 먹이자는 요량인 것 같아 나는 먹지 않겠노라 하니까
『그럼 그만 두. 있다가 내 집 것을 자셔 보도록 하지…… 왜 내 집으로 찾아오실거지!』
하고 그는 핀잔주듯 나무란다.
얼마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나는 일어서며 절로 돌아가 봐야겠노라고 하니까
『올라가시려우? 그럼 나두 같이 올라갑시다. 오래 간만에 정공을 만났으니 이야기나 할 겸, 오늘 밤만은 미안한대로 날 위해 할애(割愛)하시오.』
하며 그는, 따라 일어선다.
그래 나는, 어둡고 길도 사납고 한데 오늘 밤은 이대로 헤어지고 밝은 날 찾아와 뵙겠다고 했으나 그는 굳이 듣지 않고, 얼마를 따라 오시다가 지름길에 이르더니
『미안하오만 슬근슬근 먼저 올라가시오. 내 집에 잠깐 다녀서 뒤로 올라갈테니…….』
하고는 수격수격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신다.
나는 선생님이 올라오실게 아니라 내가 찾아 뵙겠다고 하고 싶었고 설혹 올라오시더라도 밝은 날에 오시라고 만류하고 싶었으나 워낙 그의 고집을 짐작하는지라 여러 말 못하고 길에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러나저러나 그를 뵙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이번 길에 큰 보람이 있었다고 혼자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늙은이를 만난 것이 이렇게 반가워 보기는 나로서는 일찍이 있어 보지 못한 거룩한 경험이었다.
이태 전에 꼭 한번 뵈온 선생이 용히도 대번에 나를 알아보시는 그 고마움에 나는 거의 눈물겨웁기가지 하였다.
내가 춘파 선생을 처음 뵈온 것은 이태 전의 가을에 친구 김석호군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었다.
사회운동가로 이름을 날리던 김 군이 그 후의 시대 정세에 따라 운동에서 발을 씻고 고향인 용읍으로 돌아와서 농촌계몽운동에 종사하면서 나에게 한번 놀러 오라는 편지를 띄웠으므로 나는 즉시 오래간만의 친구를 찾아갔던 것이다. 지금은 그것마저 집어치고 서울로 가서 가부를 하지만 그 때의 김군의 정열이란게 대단한 것이어서 그는 용읍 마을 동구 밖에 있는 연당(蓮堂)으로 나를 끌고 가서 여러 가지로 자기의 계획을 들려 주었다.
그러하다가 김 군은 문득 손을 들어 연못가를 가리키며
『자네 저 영감님 모르나?』하고 물었다.
친구가 가리키는 방향을 더듬어 보니 웬 파랭이 쓴 늙은이가 연못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앉아 있었다.
『모르겠네 그려. 누군가?』
『기인일세! 내 소개할까? 소설 재료가 능히 되리』
『기인이라니?』
『기인(奇人)말일세 기인!』
『기인? 어째서?』
하고 내가 사뭇 호기심을 가지고 물으니까 김 군은
『저 영감님, 아니 춘파 선생으로 말하면 말일세.』
하고 친구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춘파 선생――본명은 이응성(李應星), 춘추는 예순 셋, 춘파는 그의 아호고, 워낙 용읍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영철하여 한문을 배우되 능히 문일지십(聞一知十)을 하여 신동이라 일키웠고 개화하자 일본 유학을 갔었는데, 때마침 이조의 정변이 생겨서 그는 학생의 몸으로 청운의 뜻을 품고 동경서 표연히 상해로 건너갔다. 그 후 그가 귀머거리 폐인이 되어서 다시 용읍에 돌아오기까지 그의 십오 년의 해외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고, 당신도 거기에는 굳게 입을 다무셨다 한다.
뜬소문으로는 좌익운동을 하였다고도 하고, 혹은 민족운동을 하였다고도 하지만 모두가 추측뿐이지 실지로 그의 생활을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귀가 멀게 된 원인도 폭탄을 맞은 탓이라고는 하나 그 역시 긴가민가 한 일이라는 것이다. 젊은 혈기에 정치적인 충격을 받고 상해로 뛰었더니 만큼 가만 놀고만 있지 않았으리라고는 누구나가 다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쨌든 해외생활 십오 년 동안에 그는 한번도 집에 소식을 알린 일이 없어 아내는 남편의 생사조차 의심하였다고 한다. 그 때(지금도 그렇지만) 혈육이라고는 어린 딸 하나 뿐이었고 가산이래야 겨우 사오십 석거리 전답이 있을 뿐이었으나 그것도 그가 떠난 지 오래잖아 없어져서, 딸은 열 네 살에 시집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집 형편은 아주 마루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 지 십오 년만인 어떤 여름 날 석양에 동구 밖 연당에서 눈물을 머금고 측연이 연꽃을 바라보며 서 있는 폐포파립(弊袍破笠)의 초췌한 늙은이가 있었으니, 그 늙은이야말로 누구나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춘파선 생이었던 것이다.
돌연한 소식에 놀란 것은 마을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그의 늙은 아내와 시집간 딸이었다. 죽었던 사람이 소생해 온 것같이 반가왔으나 그는 벌써 성성하던 옛날의 그가 아니고 귀 먼 폐인이었었다. 그는 돌아오는 날부터 아주 두문분출로 날마다 무엇인가 원고를 쓰고 있었다. 추측컨대 그것은 아마 한말풍운사(韓末風雲史)가 아니었던가 싶은데, 원고만 쓰기를 꼬박이 오 년, 육 년째 되는 해에 그는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지금껏 써온 원고를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는 몸소 몇 십리 혹은 몇 백리 상거에 있는 옛날 친구 몇몇을 찾아가서 이백원의 돈을 구하여 가지고 그 돈으로 부란기(孵卵器) 한 틀과 <레구홍> 종란(種卵) 이백 알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코웃음을 치며,
『흥, 저 화상이 도사리구 들어백였더니 인제 아마 살림이 몹시 군색해졌는가 보군. 양계로 돈을 모아볼 궁리를 할적에는!』
이렇게 비방이 여북지 않았다. 그러나 춘파 선생은 그런 비방을 들은 둥 만 둥 이십일 후에는 이백 마리의 병아리를 까 내려서는 집집마다 찾아가 열 마리씩 나누어주면서
『알 잘 낳는 닭이니 이 열 마리를 잘 길러서 달걀을 받도록 하시오. 그리고 내게는 가을에 가서 수탉으로 한 마리만 돌려주시오.』
하고 부디 잘 기르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두 차례에 사백 마리. 그러나 그 해 가을에 그에게 닭을 가져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달걀을 받기는커녕 모두들 영계 채로 반반 팔아먹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위의 산을 이용하여 용읍 마을을 양계촌으로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을 부유하게 하려던 선생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 그는 또 다시 두문 불출로 이번엔 책만 읽었다.
그러한 춘파 선생을 보자, 몇몇 뜻 있는 친구들이 구수 회의를 거듭한 결과 그에게 아직 산림이 한 삼천 평 남아 있음을 다행으로 거기에다 사과나무를 심어 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춘파 선생으로 하여금 계림원 주인이 되게 한 것이었고, 손수 과수를 어루만지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 되면서부터 그는 가끔 낚시질을 다니기도 하였다. 술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나 거리의 주막에는 아직 한번도 나와 본 일이 없고, 소일거리라고는 단지 낚시질뿐이라는 것이다.
『낚시질을 무던히 좋아해서 새벽에 떠나면 해가 져야만 돌아온단 말일세…… 그 영감이 바루 시방 저기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았는 저 영감일세.』
하고 김 군은 긴 이야기를 마치며 또 한번 그를 가리킨다.
나는 뜻하지 않은 데서 훌륭한 어른을 만나 뵙게 된 것이 여간 반갑지가 않아서,
『만나 뵙고 싶으니 소개해 주게나, 자네 잘 아나?』하고 김 군에게 말하였더니,
『잘 알구 말구 소개하지. 아마 춘파 선생도 자네를 퍽 반가워하리. 청년들을 퍽 좋아하시는 분이니까.』
하고 김 군은 일어서더니 그이에게로 성큼성큼 걸어 간다.
친구가 춘파 선생을 연당으로 모시고 올 때까지 나는 거룩한 어른을 만나는 감격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이윽고 친구는 그를 모시고 연당으로 돌아오자 나를 가리키며,
『정비석 군이라구, 내 친굽니다. 소설도 쓰죠.』
하고 고래 질러 소개한다.
내가 공손히 인사하였더니,
『허 그러시오? 나 이응성이오! 소설을 쓰신다구? 매우 좋은 직업이시오!』
하고 그는 퍽 다정한 음성으로 말하며 어서 앉으라고 권한다.
『요새도 낚시질 자주 다니십니까?』
이윽고 김 군이 묻는 말에,
『그래…… 별로 허는 일이 없어서…….』
하고 그는 나를 돌아보며,
『정공은 창작을 하신다니 매우 귀한 사업이시오.』
하고 자못 탄복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신다.
『선생께서도 무슨 저술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되셨습니까?』
나는 아까 친구의 말을 들은 결이라 이렇게 물었다.
『허…… 저술이 무슨 저술이겠소. 내가 주야로 모시고 있던 선배 몇 분의 행적을 기록해 보노라 했지만 도무지 붓이 서질 못해서…….』
『탈고하셨거든 출판이라도 해보시죠?』
『열에 달떠서 쓰기는 썼지만, 써놓고 읽어보니깐 하두 피투성이의 기록이 되서 훗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은 생각이 없기에 그대로 불태워 버렸소.』
『모처럼 쓰신 아까운 원고를 왜?…….』
『그런 걸 읽느니보다 차라리 지금 청년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새로운 역사를 첫 줄부터 창조해야 하오.』
하고 선생은 깊은 감회에 잠기시는 듯 눈을 무겁게 감았다 뜨신다.
나는 문득 선생에게서 무한한 외로움을 깨닫고
『친구 어른들은 지금도 가끔 만나십니까?』하고 물었더니,
『다들 바뻐서…….』
그리고 그는 눈을 스스르 감아 버리시었다.
나는 함부로 그에게 지저분한 질문을 들이대는 것이 어째 죄송스럽게 여겨져서 얼마를 잠자코 있으려니까 그는,
『정 공은 창작을 하신다니 많이 읽고, 힘들여 쓰시오. 뭐니뭐니 해도 사후에 남는 생명이라고는 저술밖에 없을거요!』
하고 나를 격려하는 그 말씀이 나의 게으름을 훈계하는 것 같아 나는 새삼스럽게 진땀이 났다.
그 날은 그만 헤어졌으나 그러나 선생의 고결한 인격에서 받은 향훈을 나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선생을 뵈온 것은 그 이듬 해 초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친구가 끄는 대로 오래간만에 나는 궁동이라는 늪에 낚시질을 갔었는데 알맞는 낚시터를 잡으려고 늪을 한바퀴 돌다가 외따른 갈밭 속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앉아 계시는 춘파 선생을 문득 발견하고 나는 한편 반갑고 한편 놀래었다.
금시로 와락 달려가 그 앞에 꿇어 엎드리고 싶은 충동을, 그러나 나는 억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갈밭에 콱 주저앉아서 무아삼매경(無我三昧境)에 잠겨 있는 선생을 나는 차마 외람되이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도저히 침범할 수 없는 어떤 위대하고 거룩한 힘이 나의 경솔한 거동을 허락하지 않는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선생 눈에 띄도록 그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 기다리기를 한 시간 또 한 시간―― 행여 나를 거들떠 보아주실까 하고 아무리 눈이 감도록 고대해도 선생은 마치 자기 자신조차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눈 한번 파는 일없었다.
댁에서 삼십 리 상거나 되는 여기에 언제부터 오셔서 저러고 계시는지 그리고 또 언제까지 저러고 계시려는 것인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얼마 후에 공교롭게도 갑자기 난데없는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오르더니 삽시에 온 하늘을 휘덮고 숲 위에까지 두터이 내리 덮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는 비가 되어 삽시에 밤알 같은 빗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지기 시작했다. 험악한 기세가 한 소나기 내리 쏟을 징조여서 낚시꾼들은 제각기 서둘러 낚시와 도롱이를 거두어 메고 집으로 내 빼었고 나도 떠날 차비르 다 차렸으나, 그러나 춘파 선생만은 비가 쏟아지거나 우박이 퍼붓거나 오불관언(吾不關焉)이란 듯이 태연부동한 자세로 <따부>만 견주어 보고 있었다. 참말 무슨 힘이 저 선생으로 하여금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일까. 선생은 언제까지 저러고 계시려는 것일까. 커다란 한 덩어리의 바위와도 같이 무표정한 선생은 필연코 하늘 땅과 더불어 영원히 저러고 계시려는 것이나 아닐까. 내게는 암만해도 꼭 그렇게만 여겨졌고 그러므로 아무리 기다린대야 도저히 선생을 만나 뵐 가망이 없을 것 같기에 아쉽고 안타까운 대로 나는 발길을 집으로 돌리고 말았다.
돌아오면서도 나는 소나기 퍼붓는 늪가에 외로이 웅크리고 앉아서 역력히<따부>만 쏘아보고 게시는 그 고마움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옴을 느끼며 어두운 길가에서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동안이나 기다렸을까. 시간 관념을 잃어버린 채 발부리에서 우짖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선생의 추억에 잠겨 있노라니까 문득 저만치 어둠 속에서
『<락키이>야! <락키이>야!』
하고 부르며 선생이 이리로 걸어오시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락키이>?』
나는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기울이며 어둠을 뚫고 내다 보았다. 두손에 무엇인가를 든 선생이 과시 개 한 마리를 달고 이리로 오신다.
『어두운대 욕보십니다.』
내가 마중 나서니까 선생은
『기대리셨소? 먼저 돌아가시지 않구!』
하고 나서 나를 보고 짖으려는 개의 등을 툭툭 치며,
『츠! 츠! <락키이>야! 가만 있어!』
하고 달래인다.
나는 선생에게로 다가가 손엣 것을 내가 들고 가겠노라 하니까 바른 손에 들었던 한 되 들이 술병을 내게로 내밀며 묻는다.
『정 공은 술 잘 하시오?』
『네, 몇 잔 합니다만…… 웬 술을 이렇게 많이…….』
나는 가슴을 푹 찔리는 듯한 감격을 느꼈다.
술을 무척 좋아하시면서도 아직 한번도 거리의 주막에는 얼씬한 일이 없고 꼭 친구를 만나야만 술을 자신다는 선생이 손수 술병을 들고 오신 것은 나를 족히 술벗이 된다고 생각하신 때문일까? 나는 스스로 등골에 진땀이 흐름을 느끼면서 아무리 술 마실 줄 몰라도 차마 고지식하게 못 마시노라 대답할 수는 없었다.
절에 다다르자 선생은 개를 토방에 앉혀 두고 방안에 들어오시면서
『공부 오셨는데 미안하오』
한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고 말하자 그는 손에 들고 온 보자기 꾸러미를 끌러 헤치며,
『이거 내 집 사관데 하나 자셔 보시라고 가져 왔소.』
나는 미처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사과를 받아 들었다. 사과 알은 빛깔이 빨갛다 못해 검붉은 정도로 영글기는 했으나 이상하게도 모두가 군데군데 멍이 박힌 파치들이었다. 그래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노라니까,
『모두 꼬두머리의 것이 돼서 험 잽이지만 맛은 고작 일께요.』
하고 말씀하시어, 나는 또 한번 선생의 도타운 정에 찔리지 않을 수 없었다.
즉석에서 한 알 벗겨 먹어 보았는데 그 맛이란 과연 입 안에서 녹아 스러지는 듯이 달았다.
이윽고 나는 외람된 짓이라고 알면서도 선생과 주안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선생은 소년처럼 낯에 홍조를 띠셨다. 갑자기 귀도 밝아지신 듯 하였다.
『정공은 용읍에 여러 번째 오시오?』
『웬걸요. 재작년에 선생님을 뵐 때가 처음이었고 이번이 두 번쨉니다.』
『그러시오? 용읍은 참 경개로는 빼난 곳이오. 금수강산이 어딘들 부실한 데가 있으리오만 게중에도 용읍은 참 승지(勝地)오. 산천 기개가 좀 적은게 흠이지만…….』
『저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주 정이 들어요.』
『아암. 내 고향이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소만 용읍처럼 그리운 고장도 없었소. 인생 도처에 유청산이란 말은 젊고 혈기방장할 때의 일이고 그리운 곳은 역시 뼈 묻힐 곳이었소.』
하고 선생은 술을 단숨에 쭉 들이키신다.
십오 년만에 고향땅을 밟은 선생이 석양 노을 비낀 연당가에서 눈물로 연꽃을 바라보셨다는 그 심정을 나는 그제야 깨닫고 몸소름이 끼쳤다. 뜻을 이루기 전에는 죽어도 고국에는 돌아오지 않을 결심을 품고 떠났을 선생이 다시 용읍 땅을 밟게 된 것은 그가 고향산천을 극진히 사랑하기 때문이었을 것이오. 늙어갈수록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한참 침묵이 계속된 후였다.
『정공은 용읍팔경을 다 구경하셨소?』
하고 물으며 잔을 내게로 주신다.
『못했습니다. 용읍팔경은 무엇무엇입니까?』
『용읍팔경이라구――.』
하고 선생은 내가 쓰다 놓아 둔 만년필과 원고지를 잡아당겨 다음과 같이 기록하시면서 입으로 설명을 달으신다.
『西門望秋(西門領에서 가을 바라보기)
運堂廳雨(運堂에서 빗소리 듣기)
龍興種聲(龍興寺의 人更소리 듣기)
南山杜鵑(南山에 杜鵑우는 소리)
獨鎭冷泉(獨鎭의 冷泉 滴水 맞기)
衙後彌勒(衙舍後에 있는 彌勒佛)
射臺松音(射臺에서 松뢰 듣기)
그리구…….』
하고 선생은 잠깐 붓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시며 빙그레 웃고 나서
『鷄林聞香(鷄林園에서 香薰 맡기)』
라고 쓰신다.
<계림원>이란 당신이 경영하시는 과수원 이름이었다. 일러 놓고 보니, 딴은 모두가 그럴 듯했으나 「鷄林聞香」으로 미루어, 이른바 용읍팔경이란 옛날부터 일러 내려 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지으신 것이 분명하였다. 이 한 가지로 미루어 보아도 그가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시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방이 산이 돼서 닭 짐승 같은 것도 치기에 좋겠습니다.』
나는 친구에게서 들은 일이 있기에 이렇게 말했더니 선생은,
『허어, 나두 그런 생각에서 계획을 세워 봤소만…… 일을 하재두 덕이 있어야지! 덕이…….』
하고 수염을 내리쓸며 한탄하다가,
『참 김공 소식 더러 들으시오? 지금은 서울 가 있다지?』
하고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묻는다.
『네 가끔 편지 옵니다.』
『아까운 사람이 고향을 떠났지…… 농촌진흥운동을 착실히 하더니만…….』
『농촌운동을 하재두 돈이 있어야겠다구 돈 좀 모아 가지고 다시 시작하겠다구 그러더군요. 지금은 서울서 가부를 허죠.』
『허어 돈을 알게 되면 일은 틀리지!』
『그래두 오만 원만 모으면 다시 돌아와 사업을 하겠다고 그러더군요.』
『욕심에 어디 한정이 있겠소? 오만 원만 모으면 십만 원 모구 싶구, 십만 원 모으면 백만 원 모구 싶구, 그런게지…… 원체 일을 붙잡으면 돈은 생기는 법인데…….』
『그래두 지금 세상에서야 돈 없이 무슨 일을 붙잡을 수가 있습니까?』
『돈은 필요한 물건이오만 그렇다구 유용히 쓰자구 돈인데 사람이 되려 돈에 잡혀서야 무엇에다 쓰겠소. 옛 어른들은 그러지들 않으셨건만…….』
선생은 탄식조로 뇌아리시고 나서,
『김 공은 참 아까운 사람이…….』
하고 다시 애석해 하신다.
『아마 언제든 또 돌아오겠습죠.』
『글쎄말이오! 어려울걸…….』
그리고 선생은 술을 따르신다. 어찌보면 사무치는 시름을 술로 풀어 보시자는 심사인 것도 같았다.
한 되 들이 술병이 바닥이 날 때에는 산 속의 밤도 어지간히 깊었다. 주안상을 물리고도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은 돌아가시겠노라고 일어서시므로
『이 밤중에 돌아가시나뇨! 불편하신대로 하룻밤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내려가십시요.』하고 만류하니까,
『아니 웬걸! 길이 서툴까봐서? 눈 감고도 다닐 곳인데…….』
하고 선생은 막무가내하신다.
『얘기도 더 하실 겸 주무시도록 하세요.』
『자구는 싶으오만 개를 데리고 와서…… 개를 한 데서 재울 수도 없구…….』
『참 그건 웬 갭니까? 혹시 보신용으로?』
『허허…… 날 누가 해하리라구 보신용이겠소? <락키이>라구, <셰퍼드>종인데 내 유일한 벗이오! 참 의리(義理)에 굳은 짐승이거든…….』
『훈련을 받은 갭니까?』
『암, 워낙 군견(軍犬)인데 불하돼서 내 친구가 기르는 걸 내가 가져왔지. 시방도 군적(軍籍)에 매어 있으니까 일단 유사지추에는 불려 나갈는지 모를게요』
하고 선생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시며,
『<락키이>야! 기다렸지?』
마치 사랑한 아들에게나 말하듯 인자하시다.
밖에 나서니 하늘은 맑으나 워낙 캄캄해서 도저히 험한 산길을 내려가시라고 할 수가 없어서,
『못 내려가시겠습니다. 주무시고 내일 일찍 내려 가십시요.』
하고 또 한번 붙잡았으나 역시 무가내하신다.
『고단하실 텐데 늦어서 미안하오. 어서 들어가 주무시오. 가시기 전에 또 한번 놀러 오겠소.』
그리고 선생은 <락키이>를 곁에 달으시고 수격수격 내려가신다. 나는 모셔다 드릴 양으로 뒤로 따라 내려가니까,
『아, 왜 내려오시오? 용읍 마을 길엔 정공이 나보다 서투르실걸! 어서 들어가시오.』
하고 선생은 종시 나를 돌려보내고야 만다. 그 자리에 머물러 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선생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발자취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가더니 종내는 자취를 감춰 버리고, 잊을막 후에
『<락키이>야! <락키이>야!』
하고 개 부르시는 소리만이 고요한 밤 공기를 가냘프게 진동시키며 들려왔고 그것마저 사라진 뒤에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만이 온 산을 뒤흔들 듯이 소란하였다.
산 속의 밤은 접동새 울음으로 깊고 귀뚜라미의 울음으로 새어갔다.
이튿날 아침 나는 눈을 뜨기가 바쁘게 옷을 추려입고 계림원을 찾아 나섰다. 잠자리에 근심을 한 탓인지 춘파 선생이 낙상을 하신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계림원은 산길을 다 내려가서 마을을 지나 다시 맞은 편 언덕으로 추어 올라야 하는 산 중턱에 있었다. 단숨에 계림원까지 달려가서 막 과수원으로 들어서려던 나는 패랭이를 쓰고 도롱이에 낚싯대를 둘러메고 이리로 나오는 선생과 딱 마주쳤다.
『아, 선생님! 벌써 낚시질을 떠나십니까?』
나는 선생이 어젯밤에 무사히 내려오셨음을 알자, 어둡던 마음이 일시에 개었다.
『일찍 일어나셨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어서 낚시질 가보세요. 전 올라가겠습니다.』
『무얼…… 아냐 가면 가구, 말면 말군데…… 어서 들어오시오.』
하고 선생은 과수원으로 앞서 들어가신다. 나도 따라 섰다. 과수원 안에 한 발 들여놓자 참말 흐뭇한 사과 냄새가 코를 문씰 쏘았다. 과시「鷄林聞香」 이 거짓이 아니었다고 느끼며 나는 선생이 권하는 대로 나무 그늘에 가 앉았다.
선생 댁은 초가집으로 군데군데 서까래가 썩었고 이엉도 파락해서 움막같은 감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나 그 집을 에워싸고 있는 무성한 과수에서는 지금 한창 새빨간 사과알들이 다닥다닥 쥐어 붙어서 마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하였다.
『과수가 참 장합니다.』
『모두가 친구들 덕택에 이렇게…….』
『퍽 취미가 있으시죠?』
『그래! 자라는 나무를 보기란…… 우주의 천리를 보는 듯해서…….』
짜장 한 알 한 알의 붉은 능금알들이 대자연의 진리를 말하는 듯이 아름다웠다.
아침 볕에 비치어 새빨갛게 반사되는 능금알들은 그것이 단순한 나무열매이기 보다는 참으로 정성과 정열의 결정체인 것도 같았다. 이윽고 선생은 어제 것과 꼭 같은 사과를 몸소 끄트머리에서 한 이십 알 따가지고 와서 먹기를 권하시면서
『아침 사과는 금이라오. 한 개 자셔 보시오.』
『여기선 대개 어디로 가십니까? 낚시질을…….』
나는 사과를 깎으면서 궁동에서의 일을 연상하며 물었다.
『대중 없지. 서로 한 십리 가면 수리조합 대간선이 있구, 남으로 한 이십리 가면 용늪, 북으로 삼십 리를 가면 궁동 거기서 좀 더 가면 딴도리, 동으로 오십 리를 가면 물둥지, 이 근방엔 대개 그렇고, 한 육 칠십 리를 범위로 하면 얼마든지 좋은 낚시터가 많지.』
『육 칠십릴 갔다 돌아오십니까?』
『돌아오구 말구. 오늘 아침은 늦었소만, 먼동이 트자 떠나지』
『그렇게 재미가 나십니까?』
『허허 낚시질이란 큰 외도지』
『오육십 릴 가서 고기나 못 잡으심 화가 안 나세요?』
『화?…… 화가 무슨 화야, 허허, 낚시질의 취미가 고기 낚는 데만 있다고 알면 큰 잘못이지……. 거울같이 반듯한 늪에 일지청간(一枝淸竿)을 드리워 놓구 <따부>를 쳐다보구 있으면 세상만사가 스스로 그 속에 용해되고 말거든.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수양이지! 한 점 <따부>에 온 정신을 집중시켜 천지와 더불어 동락하는 취미란 비길 배 없을 게요. 불교에서 해탈이니 범열이니 고행이니 하지만 낚시질처럼 물욕지심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또 어데 있으리라구…… 혹자는 맥이 안 오면 안달복달하며, 연방 자리를 옮기는 것을 보았소만, 거 낚시꾼이 아니지.
첫째, 고기에만 눈을 건다는 것이 틀렸고
둘째, 자리를 연방 옮겨서야 어디 고길 잡을 수 있으리라구……그저 한 곳에 자릴 잡으면 거기 꾹 짓눌러 앉아 있어야…… 참말 일지청간에 심신을 의탁하고 앉았으면 영고성쇄와 부귀영화가 뜬 구름 같지! 뜬 구름 같구 말구.』
하고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락키이>의 머리를 쓰윽쓱 쓰다듬으며 의연히 낚시 철학을 베푸시는 선생의 얼굴에는 금시로 화기가 돌았다.
나는 궁동에서 선생의 요지부동하시던 태도를 또 한번 회상하며 세상에 선생같이 참다운 낚시꾼이 대체 몇 사람이나 될까 궁리해 보았다.
얼마 후에 나는 삼 사일 안으로 선생을 다시 찾아 뵈올 것을 사뢰며 싸주시는 사과를 가지고 절간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이튿날 집에서 어머님이 갑자기 탈이 나셨다는 기별이 와서 나는 절지기에게 말만 전하였을 뿐으로 다시는 선생을 뵈옵지 못한 채 섭섭하게 절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그로부터 어언간 이태가 지난 바로 요 몇날 전 일이었다. 농촌진흥운동을 하다 말고 서울로 돈벌이 갔던 김 군한테서 뜻밖에 지금 고향에 돌아와 있으니 곧 한번 찾아와 달라는 편지가 왔다. 나는 김 군 편지를 받고 춘파선생을 회상하면서 김 군도 역시 실패를 하고 고향에 돌아온 것이나 아닐까…….
이렇게 추측하며 어쨌든 이튿날 일찍 길을 떠났다. 김 군도 김 군이려니와 춘파선생을 한번 만나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오래간만일세. 그래, 그새 집에 있었나?』
찾아간 나의 손을 힘있게 붙잡으며 김 군은 얼굴에 벙글벙글 웃음을 띠었다.
『그새 재미 좋았나? 혈색이 좋을젠 오만 원 잡아 가지고 온 게로군?』
이태 반만에 만나는 김군은 예전보다 얼굴빛이 불그레하고 몸집이 알아보게 부대해지고――참말이지 객지에서 이 년 반씩이나 딩군 사람 같은 형색은 조금치도 보이지 않아서 나는 짜장 그가 계획했던 오만 원을 잡아 왔는 게라고 믿어졌다. 그러나 김 군은
『이 사람아! 오만 원커녕 단돈 오 원도 못 잡아 왔네. 잡긴커녕 콩국을 먹었단 말일세.』
『콩국만 먹고서야 사람이 그렇게 살이 찔 법이 있나? 허긴 콩국엔 영앵 <칼로리>가 많기 많겠지만서두……. 』
『하하하 <히니꾼>가? 만약에 십만 원 잡아 왔다면 그런 소린 못하겠지?』
『자네가 천만장자가 됐다기로 자넬 보는 내 눈에야 변동이 있을 법인가?』
『그래두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일세. 멋 모르고 운동이니 어쩌니허구 떠들어 댔지만 실사회에 발을 담거놓고 보니 모두가 돈이야 돈밖에 없어!』
『대체 자네는 언제부터 배금주의자(拜金主義者)가 됐단 말인가?』
나는 김 군을 여지없이 초라하게 보면서 문득「현대 사람들은 돈에게 지배를 받아 걱정」이라고 하시던 춘파 선생의 말씀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럴는지 모르지! 자네로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 문학하는 사람은 언제나 꿈을 사랑한 것이니까, 굳이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네만 정치가와 문학자와 갈라서는 정치적인 요소가 거기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허지만 배금주의가 정치적인 <이즘>은 아닐테지?』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래 지금 우리가 무슨…… 그만두세. 자네하구 이론 투쟁을 한대야 쓸데 없는 일이구. 사실인즉 논 마지기 있는 걸 팔아가지고 아예 서울로 솔가할 작정인데 논이 하루 이틀에 팔릴 일도 아니고 하니 자네가 성가신대로 좀 간섭해 주어야겠네.』
하고 김 군은 토지 처분을 내게 부탁이다.
나는 갑자기 대답할 바를 몰라서 잠자코 있었다. 춘파 선생은 일생의 결심을 굽혀서 고향으로 돌아오셨는데 김군은 조금도 애석해 하는 일없이 고향을 떠나겠다는 것이 어쩐지 내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우리는 오랜 동안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자네 춘파 선생 만나 봤나?』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못 봤어』
『찾아가 볼까?』
나는 갑자기 선생을 만나 뵙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암담한 가슴이 후련히 풀릴 것 같았던 것이다. 김 군과 내가 계림원을 찾아갔을 때는 마침 석양이라 과수에는 노을이 짙게 비치었으나 그러나 웬일인지 사과도 다부지게 열지 않아서 사과나무는 이상하게도 엉성했고 과수원 전체에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가을 기색이 농후하였다. 어딘지 모르게 숙조한 과수원을 발견하자 나는 또 한번 가슴 눌리우는 듯한 슬픔에 잠기며 사과을 따오는 부인더러
『춘파 선생 계신가요?』
하고 물었다.
『어디 나가셨는데요…… 아마 또 산에 올라가신게죠.』
『산이라뇨?』
『서문녕 고개 말이오. 가을이 되면서부터 날마다 고개에만 올라가 계시는 걸요.』
서문녕 고개라는 말에 나는 번개 같이 용읍팔경의 하나인「서문망추」가 생각나서 멀리 서문녕 고개를 한참 우러러보았다.
『요새도 낚시질 가끔 다니시나요?』
『웬걸요. 작년부터 눈이 침침해진다고 하더니 금년 여름 들면서 부터는 <따부>가 안 뵈서 낚시질도 못 가신다우.』
『낚시질을 못 가셔요? 그럼 밤낮 산에만 올라가시나요?』
『그렇죠. 밤낮 그저 산에만…… 개꺼정 없어져 놔서…….』
『개가 없어지다뇨? 개가 죽었단 말요?』
『웬걸요! 죽은 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에서 데려갔죠.』
『군대에서?…….』
나는 순간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 군적에 메었기 때문에 일단 유사지추에는 다시 불려 간다고 하던<락키이>가 아니었던가. 사변이 일어난 지도 이미 삼 년째,
유일한 취미던 낚시질도 못하고, 단 하나의 친구이던 <락키이>마저 전장으로 보내고 이제 외로이 가을바람 희살진 산등성이를 감돌지 않으면 안 되는 춘파 선생의 영자를 눈 앞에 그려보고 나는 가슴 서늘하였다. <락키이>가 어서 선생의 곁으로 돌아와야 하겠다는 단지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전쟁이 하루 바삐 끝나기를 바라는 바이나 그러나 설령 사변이 끝난다쳐도 <락키이>가 제대로 선생의 곁에까지 돌아올 수 있을까 어쩔까를 생각하자 나는 비길 바 없이 서러웠다.
이윽고 과수원을 나선 우리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뒷산으로 올라갔다. 단풍 든 칡넝쿨을 밟으며 우리는 오랜동안 말없이 걸었다. 산골짜기에 널려 있는 집집에서는 저녁 연기가 한가로이 떠오르고 있다.
『암만해두 서울로 떠나야 하겠나?』
산 위에 다 올라와서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김군은 아까와는 딴판으로 한참이나 말 없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섰다가
『응, 아무래두…….』
하고 나직한 대답이다.
나는 또 말없이 걷고 있었다. 김군과의 교분도 오늘로써 종막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궁리하면서…….
까마귀 너덕 마리가 머리 위로 분주히 날아 서문녕 고개를 넘어가 버린다. 우리는 까마귀의 뒤를 따라 저무르게 서문녕이 가까워 오자 나는 행여 춘파 선생을 만날까 하고 앞을 살펴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 다시 더 걸어나가며 고개를 저 편을 넘겨다보다가, 아, 나는 거기에서 선생을 발견하였다.
역시 전 날과 같이 허줄한 옷차림으로 가을 끝난 수수밭에서 선생은 허리를 굽혀 떨어진 수수이삭을 주워 모으고 계시었다.
나는 왈칵 달려가다가 다음 순간에는 발을 우뚝 멈추었다. 나를 만나시면 선생은 응당 반가워하실 것이나 그러나 우리는 다시 헤어지고 말 처지이니 헤어진 후의 선생의 심정을 헤아려 차마 손쉽게 선생을 찾아 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곁에 섰던 김군도 말없이 선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선생은 서문녕 고개 위에 올라서더니 바람에 구레나룻을 휘날리우면서 초연히 버티고 서서 안하에 전개되어 있는 창파만경격의 넓은 들판의 가을을 언제까지고 수연히 바라보고 계시었다.
눈이 어두워 낚시질도 못하시고, <락키이>마저 잃어버리시고, 참말 선생은 이제는 떨어진 이삭이나 주워 모으며 외로이 서문녕에서 가을을 바라보시는 오직 그 길 밖에 딴 도리가 없던가!
고향을 떠남으로 재상의 길을 닦으려 하는 김군에게 비기면 굶어도 고향의 경개 속에서 살아가려는 선생의 태도는 이미 처음부터가 비극적이 아니었던가
겨울이 머지 않은 황량한 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시는 선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숙명적으로 떨어진 이삭이나 주워 모을 그러한 말로를 타고나신 것이나 아니었던가 싶었다.
고개 위 바람받이에 초연히 서 계신 선생의 뒷 모습을 우러러보며 우리는 언제까지고 애달픈 감개에 잠겨 있었다.
정비석(鄭飛石: 1911-1991)
평북 의주 출생. 본명은 서죽(瑞竹). 니혼(日本)대학 문과 중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졸곡제(卒哭祭)>가 입선되고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城隍堂)>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 <매일신보> 기자 역임. 그는 초기에는 전통 풍속을 소재로 한 작품을 썼으나 그 후 역사 전기류를 각색한 소설을 많이 썼다.
주요 작품으로는, <제신제>, <청춘산맥>, <자유부인>, <민비>, <애정 무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