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時間) 여행(旅行)
조세희
1
부엌에 많은 칼이 있다. 아니다. 주방에 많은 칼이 있다. 신애의 부엌은 없어졌다. 먼 옛날 이야기 같다. 신애도 한때는 부엌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잤었다. 뒤에 연탄을 썼다. 지금 신애네 연료는 가스와 기름이다. 중동의 어느 사막에 탄화수소로 파묻혀 있었던 기름은 긴 바다 여행을 해와 밝은 아파트단지 안에서 타 없어졌다. 아파트에는 부엌이 없다. 그 대신 멜라민 냄새가 나는 깨끗한 주방이 있는데 젊은 여자들은 쉽게 -키친-이라고 말했다. 깨끗한 신애의 주방에 열 일곱 개의 칼이 있다. 수납장 서랍에 넣어둔 열 두 개는 식사용 나이프이다. 베고 써는 것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칼이 아니다. 무딘 날과 끝이 칼의 성격을 죽였다.
부엌에는 그런 칼이 없었다. 상투를 틀었던 처음의 우리 어른들은 푸른 눈의 서양사람들이 그 칼로 썰어 도막낸 고기를 작은 쇠스랑으로 찍어 먹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그때 신애는 이 세상에 없었다. 신애는 훨씬 뒤에 태어났다. 우리 글의 철자법 일람표가 간행되고, 일본 사람들이 싫어한 비밀 단체를 제국대학의 학생들이 만든 해였다. 그 해에 만주사변이 터졌다. 인도에서는 대폭동이 일어났다. 영국사람들은 간디를 석방했다. 신애는 수납장 서랍 안의 나이프들을 별로 써본 적이 없다. 그것들은 칼의 숫자만 불려놓았다. 신애는 과일칼과 두 개의 작은 식칼을 썼다. 이런 칼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도 없다. 그러나, 키 큰 수납장 철망선반 위에 놓아둔 큰 식칼과 긴 생선 칼만은 달랐다.
아파트로 이사올 때 그것들을 버리려고 했었다. 칼자루를 잡을 때마다 무서운 생각이 떠 올랐다. 큰 식칼은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신애는 이따금 칼 가는 사람을 불러 그 칼을 갈게 했었다. 칼을 가는 사람은 좋은 칼을 알아보았다. 요즘 사람은 백 번을 죽었다 살아나도 이런 칼을 만들 수 없다고 칼 가는 사람은 말했다. 신애는 상상할 수 있었다. 대장장이는 수많은 담금질, 수없이 많은 망치질을 했을 것이다. 대장장이 아들은 풀무질을 했을 것이다. 풀무질을 왜 쇳덩어리를 빨갛게 달구었을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직 살아 있는지 모른다. 살아 있다고 해도 눈 붙일 때마다 어린 시절 꿈을 꾸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새벽 첫 전차 소리론 듣고 일어나 대장간으로 나가고는 했을 대장장이는 벌써 전에 죽었을 것이다.
대장장이가 아직 살아서 망치질을 하던 때에 그 칼을 만들게 해 써온 시어머니도 돌아갔다. 신애도 어느새 살아온 세상을 자꾸 돌아보는 나이가 되어 아무도 모르게 머리를 젓고는 했다. 철망선반에 그 큰 식칼과 함께 놓아둔 긴 생선 칼은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칼날이 팽팽하게 서 있고, 끝은 뾰족했다. 등의 두께가 삼 밀리미터밖에 안 되는데 날의 길이는 삼십 이 센티미터나 되었다. 남편이 사온 칼이었다. 신애의 남편 현우는 수입 연모를 파는 백화점 진열대에서 그 칼을 집어들었다. 그는 물론 지하 식품부에 들러 우리 어부들이 태평양까지 나가 잡아 온 큰 갈청색 생선 한 마리를 함께 사들고 왔다.
2
옛날 어른들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조선의 어떤 왕도, 또는 황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왕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어부들이 먼 바다 날짜 변경선까지 넘어가 고기를 잡아왔다. 우리 어부들도 다른 나라의 어부들처럼 태평양 날짜 변경선을 넘으며 하루를 빼던가 더했다. 일억분의 일 지도에서는 아무리 멀리 가도 십 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거리지만 일하다 아찔한 현기증이 나 고개를 들어보고는 했을 그곳 수평선 끝에서는 꿈속보다 먼 이 땅까지. 어부들은 낯선 바다에서 펄펄 뛰는 단백질의 덩어리를 잡아 싣고 왔다. 그러니까 현우는 식구들의 단백질 섭취를 돕기 위해 그 생선 칼을 사왔을까? 그는 특별히 얇게 저민 생선회를 혀 위에 올려놓고 싶었을까? 그는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거구의 대식가였나? 아니면, 도덕상의 결함은 한번도 문제삼아 본 적이 없는 천구백칠십 년대의 미식가였나?
아니다. 음식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칠십 년대에 그는 굴뚝새처럼 조금 먹었다. 두 개의 칼을 아파트로 옮겨온 사람도 바로 굴뚝새처럼 작은 위장을 갖고 있던 현우였다. 땅집 부엌에 아무도 모르게 빼놓은 것을 그가 찾아들고 나왔던 것이다.
"버려요."
신애가 말했었다
"제발 쓰레기통에 넣어버려요."
"왜 그러오? 몇 해 전 일을 아직도 잊지 않았오?
"그 일과는 상관이 없어요. 어느 불한당이 뛰어들어와 행패를 부려서 내가 그 칼들을 휘둘렀었죠. 그래요. 나는 우리 마당에 튀어든 무법자를 그냥 와둘 수 업었어요. 그 악당이 피하지 않았다면 정말 무서운 일이 생겼을지 몰라요."
"그 일은 잊어요."
"물론 생각도 하지 않아요. 이사를 가기 때문에 그 칼들을 빼놨을 뿐예요. 이제 옛날 칼과는 헤어져야죠. 긴 생선 칼도 필요가 없어요. 이번 이사는 단순한 이사가 아네요."
“그럼?"
"나는 국경이라도 넘어가는 기분이예요."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며 신애가 말했었다. 그날 두 개의 칼날에 닿은 빛은 하나하나 점이 되어 튀어 나왔다. 그러나 칼날의 작은 반사광 파편 같은 것은 신애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다. 두 개의 칼날이 조각 내 던진 빛을 막내인 영희가 막았고, 신애는 바로 그 순간에 딸의 가슴에서 반짝 하고 빛난 대학뱃지를 보았다.
"엄마."
영희가 끼어 들었다.
"시간이 됐어요. 그럼 이제 국경을 넘어요."
3
좀 별난 어머니였던 신애에게 그것은 확실히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1979년 봄에 이사를 해 간 곳이 아파트였던 것이다. 물론 좋은 아파트였다. 이름난 건설회사가 한강이 내다뵈는 땅에 지어놓은 쉰 두 평 짜리였으니까 그녀는 옛날생활과 작별했다. 어머니의 생활과, 할머니의 생활과, 할머니의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모든 옛날생활과 그녀는 작별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옛날식으로 따지면 열 아홉이고 만으로 치면 이제 열 여덟밖에 안 되는 막내딸 영희가 신애 앞을 막고 나섰다.
"이게 뭐죠?"
이사를 하고 한 달이 채 안 되었던 어느 날 - 신애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몰라도 그 위치가 가물가물한 아프리카의 한 나라가 팔십 팔 년 동안의 소수 백인 통치에서 벗어나 흑인 다수 통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총선거를 실시하고 있다는 뉴스를 아파트의 넓은 거실에 앉아 들은 날,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을 어떻게 해방시킬까 궁금해 한 날 - 학교에서 돌아온 영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엄마, 이게 뭐죠?"
알면서 묻고 있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기계가 벽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냉방기인 줄은 알아요."
영희가 말했다.
"그렇지만 여름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이건 누가 사 달자고 했죠? 아빠가 그러셨어요?"
"그렇단다."
"아빠도, 참."
"왜? 아버지가 이걸 달아놓고 지금부터 여름을 기다리시면 안되니? 그리고 우리는 이 아파트동네의 다른 집 사람들처럼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면 안돼?"
"아뇨."
"그럼 놀랄 것도 업지. 아까 언니가 다녀갔다. 우리가 산 소제기를 줬어, 저희 것은 말이 진공소제기지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고장이 나더래 그것을 만든 나라의 회사가 불량품만 내놓았다가 후진 동양권의 수입상들에게 슬쩍 눈감고 팔아버렸는지 모르겠다면서 웃더라. 카페트도 좋다면서 아이쳐럼 누워 뒹굴더라만 너무 커서 벗겨가랄 수가 없었다. 언니는 네가 부럽다고 말하더구나."
"언니가 그랬어요?"
"제가 결혼해 나가니까 우리 집에 좋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내가 말해줬다. 그때는 아버지가 열 여덟 해나 다니신 회사를 그만두기 전이었고, 그 열 여덟 해에 대한 퇴직금도 받기 전이었고, 엄마는 또 엄마대로 너희 외할아버지에게서 저금통장 하나를 물려받기 전이었다고 말야. 물론 언니도 알고 있어. 사실은 좋아서 한 말야."
"뭐가요?"
영회가 거실 큰 장식 등 옆에서 물었다.
"우리의 좋은 변화란 게 어떤 거죠?"
그 아이의 손에 타원형 풀잎이 들려 있었다.
"언니는 너와 달라."
신애가 말했다.
"회사를 옮긴 아버지가 이사가 되어 출근하실 때 언니는 새벽같이 택시로 달려왔었어. 너는 잠을 자고 있었지. 그래, 너는 잠을 자고 있었고, 그 시간에 언니는 전용 승용차로 출근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기 위해 달려왔었어. 일찍 와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가 뒷문을 열었어. 아버지가 타시자 그는 문을 닫아드린 다음 차를 끼고 돌아가 발동을 걸었어. 차가 움직일 때 언니는 한쪽 손을, 그것도 아주 조금 들었었다. 기사가 볼까봐. 하지만 아버지는 보셨지!"
"모두 이상해졌어!"
"뭐라구?"
"아녜요."
"이리 와 보렴. "
신애가 말했다. 그녀는 열려 있는 가사실 문을 닫은 다음 식당을 지나 주방으로 갔다. 따라 들어온 영희가 키 큰 요리용 화덕을 들여다볼 때 신애는 낮은 멜라민 수납장 앞에 서서 팔짱을 끼었다.
"근사하지?"
"네."
"이건 냉방기처럼 흔한 물건이 아냐."
신애는 피부 빛깔이 흰, 그리고 국민 대부분이 기독교도인 어느 나라의 전통적인 음식을 역시 그들이 만들어 작은 나라의 수입상들에게까지 판 전자 화덕에 구워 큰딸과 함께 먹어본 이야기를 했다. 심줄 자른 백 오십 그램 짜리 등심 두 덩어리를 오 분만에 꺼냈더니 피가 너무 비쳐 먹을 수가 없었다. 신애는 계시기를 다시 일분 삼십 초 연장해 놓고 심줄 자른 등심의 핏빛이 음전기를 띤 전자의 공격을 받아 없어지는 것을 보았다.
"맛이 괜찮았어."
신애가 말했다.
"감자도 끓는 물에 삶아낼 필요가 없었다. 저녁에 더 맛있게 해보마. 버터와 쇠기름을 알맞게 써야지,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깜짝 놀라셨을 게다. 설명해드리기도 어려웠겠지. 열전자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드린들 알아들으셨겠니? 그렇지?"
그러나 영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의 요리용 화덕에 타원형 풀잎을 넣고 들여다보는 참이었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다 아파트 앞 잔디밭으로 들어간 조경 담당자들이 잔디와 꽃나무를 북돋아 주기 위해 뽑아버린 다년생 잡초의 풀잎 하나를 뜯어 들고 들어왔는데, 그 풀잎은 신애의 새 화덕 안에서 삼십 초도 안 되어 바싹 오므라들었다.
"무슨 풀이냐?"
신애가 물었다.
"질경이예요."
"네가 질경이를 다 알아?"
"알아요."
영희가 말했다,
"길가에 무리져 야생하는 다년생 풀예요. 잎이 뿌리에서 나요, 잎에는 여러 개의 줄맥이 있어요. 여름에 엷은 자줏빛 꽃이 피죠. 수꽃술이 네 개이고 암꽃술은 하나예요."
"질경이가 그러냐?"
"네, 엄마."
“엷은 자줏빛 꽃이 핀다는 말은 맞아. 하지만, 질경이 같지 않다."
"경우가 질경이 이야기를 해서 사전까지 찾아봤어요."
"누구나 질경이에 대해 이야기는 할 수 있지. 네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야. 그 애는 질경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풀을 우리도 알아요. 밟히면서 자라는 풀예요. 질경이의 끔찍한 생존 조건을 생각하다 몸서리를 쳤어요. 밟히고 눌리고 상처 입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가는 풀이죠. 경우는 그 애 할머니에게서 옛날이야기를 듣다 말고 질경이를 어떤 생각에 응용시켰어요. -너는 매천이 되겠는가? -라고 그 애는 자신에게 물었어요. 물론 그 질문은 계속되는 것이었죠. -너는 김 옥균이 되겠는가? 민 영환이 되겠는가? 이또오 히로부미의 친구가 되겠는가? 안중근이 되겠는가? 유 길준이 되겠는가? 이 완용이 되겠는가? 이 완용 백작과 손잡는 사업가가 되겠는가? 한숨 쉬는 조선 황제의 승용차가 되겠는가? 외로운 가스등이 되겠는가? 아니면 이름 없는 질경이가 되겠는가? 너는 짓밟히는 질경이가 좋으냐? 끈질긴 질경이. 너무 끈질겨서 신경질 나는 질경이, 지겨운 질경이. 나의 원수 질경이, 어리석은 질경이, 눈물 홀리는 질경이, 무지한 질정이, 밟히면서 많아지는 질경이, 언제나 글을 못 읽는 질경이. 그런데도 끝이 없는 우리 질경이가 너는 좋으냐?-그렇지만, 경우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무엇이 될 수는 없어요. 그냥 생각할 뿐이므로."
"왜 그러니?"
“뭘요?"
“너희들 말이다, 너희들은 지난 역사 속에서의 중요한 사건들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세대이다. 그런데. 어린 너희가 지난 역사에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이유가 뭐냐?"
신애는 까마득하게 잊었던 세계를 발견하고 말할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남자 친구의 이야기를 할 때 딸의 눈이 빛났다. 영희는 예뻤다. 사람들은 영희가 신애를 빼닮아 예쁘다고 말했다. 영희와 영희의 남자친구에게 우리의 역사가 멍에로 존재한다는 것을 신애는 알았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영희의 남자 친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영희는 아직 신애의 뱃속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1960년에 영희는 없었다. 신애는 많은 총소리를 들었다, 전쟁 때 들어온 구식총들이 그해에 불을 뿜었다. 신애는 거리청소를 하는 학생들을 보았다. 그해 봄의 총알은 총구를 떠나 날아가면서 한숨을 지었는지 모르고, 고독을 느꼈는지 모르고, 순수한 심장에 박혀 울었는지 모르고, 박히는 순간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일본군대나 경찰이 쓰다 챙겨 가지 못한 총 얼마가 그 안에 끼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신애는 생각했었다. 1945년 8월부터 어쩌다 우리 어른들이 사용했을 그 총들은 1950년 전쟁이 고비가 되어 이 땅에서 사라졌을 것이라고 남편이 말했다. 그들의 구식장총은 주인이 돌아간 뒤에도 식민지였던 이 땅에 남아 무기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했다. 그 총은 사람을 쓰러뜨린 다음에 따악콩 소리를 냈었다
4.
전쟁 때 많은 무기가 쓰여졌지만 신애는 한번도 그것들을 잡아본 적이 없다. 우리가 만든 무기는 없었다. 세계대전에서 명성을 얻은 무기들이 몇 해 동안 휴식을 취하다 몰려들어와 무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했다. 어떤 속사총은 늙고 병들어 세계대전 때와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이 전쟁이 언제 끝나 귀국하게 되더라도 재래식 무기가 된 저희를 국민이 세금내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라 믿고 마지막으로 정말 끔찍하게 쏘아댔다. 좁은 땅에서. 여러 종류의 무기와 힘을 합쳐. 영혼 불멸설을 믿는 사람들은 굉장한 광경에 놀랐다. 죽은 몸에서 나온 영혼이 하늘을 덮었다. 날마다 수많은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다. 영혼이 투명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불투명체로서 빛을 차단했다면 이 땅에는 밤만 계속되었을 것이다.
영혼의 숫자만큼 많은 몸이 쓰러져 있던 어떤 곳에 -피가 웅덩이처럼 괴어-있었다. 이 땅에 무기를 만들어 들여보낸 어느 큰 나라의 한 작가는 19세기에 이미 -땅이 그 피에 빨아들여주지 않기 때문-이라 썼었다. 그러나 모든 무기들이 잔인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속사총의 총구를 꺼난 총알 하나는 어느 들판을 가로질러 날아가면서 작고 지저분한 집에 사는 농민 하나가 도자기를 들고 밭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볼품없는 옷을 입은 농민은 총알이 처음 보는 도자기를 갖고 있었다. 그는 총알이 보기에도 축사와 다를 것이 없는 더러운 집에서 나왔다. 그가 들고 있던 것은 도자기가 아니었다. 식구들이 잠을 바다 일어나 눈 오줌을 큰 오줌독에 옮겨 붓기 위해 그 농민은 이른 아침에 우리의 그 전통적인 요강을 들고 진흙 마당 끝으로 나가 서 있었을 분이다. 곧바로 날아간 총알은 총알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포기하고 농민의 심장 앞 공중에 몇 초 동안 떠 있었다.
농민이 허리를 굽혀 요강의 오줌을 부을 때 총알은 자기가 방금 살펴준 그 농민의 채마밭 위로 날아가 논두렁의 미류나무에 상처를 입히며 박혔다. 총소리가 뒤따랐다. 농민은 큰 오줌독과 농사지을 땅 사이에 찰싹 엎드려 귀를 막았고, 진보된 어떤 고성능 포탄 하나는 큰 각도를 이루며 날아와 농민이 땅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을 때려 박살냈다. 농민을 살려준 총알은 미류나무에 박혀 미류나무와 함께 눈물지었다.
땅이나 집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집안에 있던 농민의 식구들은 집과 함께 날아갔다. 불더미 속에서 아기 영혼, 엄마 영혼, 삼촌 영혼, 할머니 할아버지 영혼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1960년 봄 서울에도 농민을 피해 날아간 그 총알과 같은 총알이 있었나? 있었다. 반자동식 소총의 총알, 영희가 아직 신애의 뱃속에도 들어 있지 않았던 4월 어느 날 오후였다. 열 다섯 개의 총알이 송곳 모양의 공이 밑 탄창에 엎드려 대기하고 있었다. 그날 누가 명령했다. 누가 명령했나!
총알이 총구를 떠나 날아갔다. 탄창 안에 숨죽이고 엎드려 있던 여섯 번째 총알은 한발 앞서 나간 다섯 번째 총알이 한 젊은이를 가차없이 쓰러뜨려 숨 못 쉬게 해놓는 것을 보며 날아가다가 멈칫하고 섰다. 젊은이들의 영혼이 줄을 지어 전차길 위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총알이면서도 폭력을 증오한 여섯 번째 총알은 젊은 영혼의 대열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곧바로 날았지만, 자기가 그 몸 안으로 들어가 쓰러뜨려야 될 사람이 보이자 백만분의 일초도 생각하지 않고 총알의 권리를 포기했다. 총알이 마땅히 쓰러뜨려야 했던 사나이는 흰 종이를 머리 위로 쳐들고 걸어왔다.
여섯 번째의 총알은 사나이가 종이에 써 든 글을 읽었다. -이성이여, 논리여, 어디서 숨막혀 죽었는가! 죽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없었는가! 있게 하라. 나는 지겹다!- 영희는 언젠가, 끝까지 자신을 방어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은 컷은 그들이 믿고 내세운 무기들이었다고 말했다. 어느 탄창에 여섯 번째로 들어 있던 총알이 아니었다면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서른 한 살이었던 신애의 남편 현우는 회사에서 일을 하다 말고 뛰어나가 종이를 번쩍 들고 전차길을 따라 걸었었다. 그는 눈앞에 나타나 붕붕 날개치며 우는 한 마리의 널을 보고 바른손을 내려 휘저었다.
“몸을 낮추세요."
그 벌이 말했다.
"나는 총알입니다. 당신이 몸을 낮추면 그 사이에 지나가겠습니다. 돌담을 넘어 당신들의 옛 왕궁 숲으로 들어가겠어요. 어두운 숲! 나의 목표물은 그 숲 속에 있는 늘은 은행나무예요. 물론 당신을 겨냥해 발사된 총알이지만 나는 당신을 쓰러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다는 모든 것을 포기한 총알예요. 포기한다는 말 아시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니까 이렇게 마음이 편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인 당신과 총알인 내가 무엇을 포기한다고 했을 때 그 뜻은 아주 다를 거예요.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포기해본 적이 없죠? 당신은 분노에 차 있어요. 산처럼 높고 큰 분노. 무섭기도 하고, 참으로 불행하죠? 당신은 지금 열 아홉에서 스물 두 살 사이의 후배들 줄에 끼어 들었어요. 서른 한 살 된 사람은 당신 하나뿐입니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좀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당신은 후배들 줄에 끼어 앞으로 나가야 되고 나는 늪은 은행나무를 찾아 날아가야 됩니다. 이제 몸을 낮추세요. 나는 꿀을 따는 벌이 아네요."
그래서 신애의 남편 현우는 몸을 숙였고, 날개 치는 벌처럼 붕붕 소리를 내며 떠 있던 여섯 번째 총알은 현우의 머리 위를 지나고 왕궁 돌담을 넘어 어두운 숲을 향해 날아갔다. 너무 작아서 총알이 날아가는 모습을 현우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역사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순간에 속사총의 총구를 터나 명령을 거부한 작은 총알이 또 있었는가? 신애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비유를 좋아한, 그렇게 벌을 빼닮아 예쁜. 그렇게 적당히 애매하면서도 이성을 갖춘, 또는 그렇게 감상적인 총알이 또 있었을까?
5
그해 여름에 신애는 영희를 가졌다,
1960년 여름, 정확히 말해 국경일이어서 남편이 회사를 안 나가도 뒨 날, 신애와 현우는 왕궁 돌담을 넘어 날아간 사월의 총알과는 달리, 그 돌담을 뚫어 만든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 내고 문을 통과해 곧장 어두운 숲을 향해 달렸다. 두 사람은 가슴을 두근대며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 여름이라 낙엽이 없었다. 조선의 어떤 왕도 여름에는 낙엽을 밟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애는 첫눈에 이미 불쌍하게 보인 늙은 은행나무 밑에 서서 그 나무 위로 올라가는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나무의 새 살이 여섯 번째 총알을 덮었다고 현우가 말했다. 거대한 투시기가 있었다면 그 늙은 나무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일 톤의 쇠붙이가 은행나무에 박혀 있었다. 불쌍한 나무는 친 번이나 아파했다. 친 번이나 눈물 흘리며 새 살을 내 갖가지 쇠붙이를 덮어주었다.
시각과 촉각을 곤두세운 나무 위의 수색자 현우는 칠 세기나 더듬어 올라가 몽고군의 화살촉까지 찾아냈다. 남편은 오백 년 조선을 뛰어 건너 초토화된 고려에 닿아 한숨쉬더니 또 다른 화살촉을 발견하고, 이것은 일본 쓰시마 해적이 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뛰어 건넜던 조선으로 내려와 입을 다물었다.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은행나무! 고마운 아프리카! 아프리카만은 은행나무를 울리지 않았다.
나무 위의 남편이 소형투시기로 갖가지 구경의 총알을 찾아내 들여다볼 때 서른 살 신애는 그 어두운 숲 속에 서서 낯선 무기를 든 옛날 침략자들을 내다보고, 그들이 불질러 활활 타는 옛날 땅을 내다보고, 강간당하는 옛날 땅을 내다보고, 불질러져 또 불타고 또 학살당하고 또 할퀴어지는 은행나무의 옛날 땅을 내다보고, 이제 일 초도 참을 수 없다는 듯
"내려와요, 어리석은 짓예요, 당신을 살려준 사월의 총알에게 인사하고 빨리 내려와요." 발을 구르며 말했는데 현우는 한 시간이나 더 불쌍한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몹시 더운 날이었다.
그 무더운 날 현우는 늙은 나무에 박혀 있는 일 톤의 쇠붙이를 확인하고 내려와 온몸을 벌었다. 그는 도망치고 싶어했다. 두 사람은 키 작은 단풍나무 뒤로 도망쳐 숨었다. 숲이 두 사람을 쌌다.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남편은 단풍나무 뒤쪽의 아늑한 숲에 닿아서도 계속 도망치고 싶어했고, 서른 살 신애는 그 이상한 도망자를 위해 강아지풀이 섞여 있는 야생 잔디 위에 누웠다. 현우는 신애의 가슴으로 도망쳤다. 개미들이 줄을 지어 풀밭을 지나가고 있었다. 작은 개미들은 정글과 같은 야생 잔디를 헤치고 나가 그 끝 단풍나무 밑에 있는 싸움터로, 아니면 포획물 수확지로 돌진해 갔다.
그러나 신애는 개미의 줄을 볼 수 없었다. 현우가 신애의 가슴을 애무하고 있었다. 그는 난폭한 도망자가 되어 신애의 웃옷을 밀어 올렸다. 완전한 숲은 없었다. 한 줄기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들어와 벌거벗겨진 신애의 가슴 위에 떨어졌다. 신애는 어린 여자아이처럼 놀라며 몸을 틀었다. 그녀는 두 뼘 정도 바른 쪽으로 옮겨 누웠다. 싸움터로, 아니면 포획물 수확지로 가는 개미의 대열을 그녀가 끊어놓았다. 많은 개미가 풀과 그녀의 몸 사이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도망자는 스커어트를 걷어 올렸다. 수백 마리의 개미들이 끊어진 행군대열을 이어놓기 위해 참사 현장에서 두 뼘 벗어난 정글 속을 달릴 때 신애는 벽도 천정도 없는 불
완전한 숲에 누워 열 아홉 살 여자아이처럼 가슴 두근대며 남편을 도왔다. 남편이 신애의 몸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도망자는 숨죽이고 들어와 어린 여자아이처럼 가슴 두근댄 서른 살 신애를 지배했다. 오백 년 위기를 관리했던 왕들은 그 왕궁에 없었다. 신애는 두 눈을 꼭 감고 얇은 입술을 들었다. 숲 속의 도망자가 말할 수 없는 흥분을 주었을. 그 일이 생각날 때마다 신애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뻗어 야생 잔디를 뜯었다. 그녀는 자제력을 잃었다. 자제력이 그녀를 배신했다. 그녀는 부끄러운 것도 몰랐다. 그녀는 얇은 입술을 들고 신음했다. 꼭 감은 눈앞에 횐 색의 하늘이 펼쳐졌다. 그해 여름. 정확히 말해 국경일이어서 남편이 회사를 안 나가도 뒨 날, 신애와 현우는 고궁 돌담을 넘어 들어간 사월의 총알과는 달리 그 돌담을 뚫어 만든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 내고 문을 통과해 곧바로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갔었고. 그 숲에서 나왔을 때 갖게 될지도 모를 아이로 영희는 존재했었다.
신애는 상기된 얼굴로 남편을 따라 걸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엄마를 빼닮아 예쁘다고 말한 영희를 다음해 오월에 낳았다. 여섯 번째 총알이 후배들 줄에 끼어든 서른 한 살 현우를 쓰러뜨렸다면, 그리고 일 톤의 총알이 박혀 있는 늙은 은행나무 밑에서 위치와 불행의 반복성에 놀란 그가 분해하며 몸떨지 않았다면, 그러나 공포에 질려 있던 남편이 신애에게 도망쳐 들어왔을 때 그녀가 마지막 순간의 그 즐거움을 포기하고 자제력만 잃지 않았다면 영희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말이 새벽이지 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멀었던 캄캄한 밤에. 병원 밖 큰 어둠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분만실의 전등빛까지 몰아내도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던 밤에. 병원 사람들은 신애와 영희를 남겨놓은 채 사라졌다. 그들의 행동은 재빨랐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 당황하라! 무섭다! 무서워하라! 위험을 피해 꼭꼭 숨어라! 그들은 옛날부터 배워 익힌 대로 행동했다. 그들은 전통을 지켰다.
신애는 전통 수호자들이 분만실을 박차고 나간 다음에야 어떤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캄캄한 하늘을 가르며 와 신애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무슨 일인가? 전쟁인가? 옛날 중국 대륙의 어느 군대가 잠자다 일어나 무쇠총을 들고 와 총 쏘는가? 고니시 유끼나가의 병사들이 조총을 갖고 온 걸까, 그 후손들이 발전된 무기를 들고 온 것일까? 눈빛이 푸른 병사들이 화륜선으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수병총을 쏘는가? 러시아 군대가 베르당 소총을 쏘는가, 연발 기관총을 쏘는가? 총독부 시절의 군대가 아직까지 독립군을 뒤쫓고 있는가? 다 돌아가지 않고 숲 속에 막사 하나 숨겨 두었다가 독립군을 발견하자 뒤쫓으며 이 시간에 총 쏘는 것은 아닐까? 아닌가? 모두 지난 일인가? 그냥. 우리에게 올 것이 왔을 뿐인가? 갓 태어난 아이가 이제 첫 목욕을 끝냈을 뿐인데 이 아이가 살 세계에 무서운 일이 일어났는가! 아이는 안전할까? 어둠 속 분만대에서 내려와 네발 달린 짐승처럼 기었다. 신애는 영희를 찾아 안았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두 아이의 아버지, 그러나 몸을 숨긴 한밤의 병사들이 총 쏘기 바로 전에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앉아 있던 현우는 병원 경비원의 손전등을 빼앗아 들고 분만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손전등을 흰 벽에 비추었다. 아버지와 딸은 반사된 손전등 빛 아래서 성능 좋은 연발총 소리를 들으며 첫 대면을 했다.
6
"그러니까, 엄마."
나중에 영희는 몇 번이나 묻고는 했다.
"나는 총소리를 들으며 이 세상에 태어났지?"
"아냐. "
그때마다 신애는 말했다.
"우리 영희가 예쁜 배꼽을 갖도록 의사선생님은 탯줄을 자른 다음 조심조심 매주셨지. 그리고 간호원 언니는 영희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었는데 그때까지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어. 분명해. 총소리는 그 뒤에 들려왔어."
"그래서 사람들이 죽었어?"
"그걸 아는 사람은 없단다."
"왜?"
"밤이었으니까."
신애는 영희에게 말했었다.
"캄캄한 밤이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 그래서 엄마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네가 태어난 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야. 너는 말할 수 없이 평화스러운 오월 어느 날 밤에 태어났고, 사람들은 네가 태어난 것을 축하했어. 하늘의 별들은 영희가 저희보다 예쁘다면서 샘을 내기도 했지만 결국은 예쁜 영희를 위해 더 많은 빛을 내 그 밤에 반짝거렸지. 근사하지? 별들은 지구 뒤로 몸 숨길 시간을 어겨가면서까지 너를 위해 반짝거렸던 거야,"
"엄마도 동화를 쓰면 되겠네.
어린 영희가 말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가 꾸며낸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아.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알아냈어. 사람들은 밤에 총을 쏘았어. 낮에 총 쏜 게 아냐. 엄마는 밤에 총 쏘는 것이 삼에 아기를 낳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총쏘는 건 뭘 단념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영희는 아주평화스럽고 따뜻한 오월 어느 날 밤에 태어났는데 그 밤에 많은 별이 나와 반짝반짝 빛났다는 말은 이제 하지 마. 그건 숲 속에 사는 마귀가 작은 요정들을 두고두고 속이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과 같아. 엄마는 요정들을 괴롭히는 숲 속의 마귀가 좋아?"
"아니."
"나도 싫어!"
7
그 영희가 자라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할 때 신애는 캄캄한 밤의 분만실에서 영희의 나이만큼 멀어졌고, 몇 백 년 위기에 질질 끌려다닌 왕들의 그 왕궁 안 어두운 숲에서는 열 달 더 멀어졌다. 그녀의 옛날 부엌은 그 사이에 없어졌다.
지난 시절의 교과서식 표현을 빌어 쓰면 유구한 반만년. 그러니까 오천 년에 우리의 전통적인 나이 계산법에 따른 열 아홉을 더하고, 1948년에 만들어 1952년에 고치고. 1954년에 또 고치고, 1960년에는 6월과 11월에 걸쳐 두 번이나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1962년에 또 고칠 수밖에 없었던, 1962년에 또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1972년에 다시 뜯어고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헌법에서의 만계산법을 따르면 약혼이나 결혼은 할 수 있어도 성년이 되려면 두 해나 더 기다려야 되는 미묘한 나이 열 여덟을 더하고. 또 영희가 신애의 뱃속에 들어 있던 열 달을 더하면 신애는 5019년 열 달만에. 또는5018년 열달만에 어느 시대에 돌아간 이 땅의 어느 어머니보다 좋은 환경에 사는 어머니가 되었고, 그 어머니들이 살아나 보면 놀라 까무러칠 편리한 화덕까지 들여놓았는데, 1961년에 태어나 어떻게 하면 열아홉이 되고 어떻게 하면 열여덟이 되는 막내딸 영희는 손만 내밀면 잡힐 가까운 역사를 트집잡으며 그 요리용 화덕에 풀잎 하나를 넣었다.
그 풀은 잔디와 꽃나무를 북돋아주려는 조경 담당자들의 손이 다가가 힘줄 때까지 개량잔디와 검붉은 장미의 꽃밭 밑에 깔려버린 황토색 옛날 길에 약해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서울 토박이인 신애가 이상하게도 날마다 논두렁으로 나가 밭두렁에 난 질경이의 무리를 건너다보았다는 착각에 빠졌다. 이상한 수도의 시민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황톳길에 찰싹 엎드려 있는 다년생 잡초를 보았다. 그래서, 우리의 주부 하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막내딸의 남자 친구가 어리석다고 말했다는, 지겹다고 말했다는, 눈물만 흘린다고 말했다는, 무지하다고 말했다는, 우리의 원수라고 말했다는, 너무 끈질겨서 신경질 난다고 말했다는, 언제니 문맹이라고 말했다는 그 볼품없는 다년생잡초의 잠재 의식같은 것에 갇혀버렸나? 움직일 수 없는 풀의 잠재 의식에? 발이 없는 풀의 잠재의식에? 다른 풀들이 짓밟혀 없어져야만 짓밟히는 그 끔찍한 공간에서 이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좋은 환경이라며 저희끼리 무리져 끈질기게 식생한 질경이의 잠재의식에 신애는 감금되었나?
1979년의 신애는 쉽게 그런 것에 갇히지 않았다. 다른 대륙의 어느 원주민들이 총선거장의 투표소로 들어가기 위해 검은 줄을 섰을 시간에, 그리고 캄캄한 분만실에서 태어나 자란 이쪽 넓은 대륙 어느 좁은 땅의 한 여자아이가 엄마의 키 큰 화덕에서 바싹 오므라든 풀잎을 꺼내 들여다볼 때, 신애는 거실로 나가 의상실 사람을 맞아들이고, 수퍼마켓 배달부가 배달해온 맛있는 우리 나라 암소의 빛깔 좋은 진짜 등심살을 확인해 날마다 이른 아침에 와 일해주고 밤이 되어야 돌아가는 나이 지긋한 가정부에게 넘겨 냉장고에 넣게 한 다음, 새 옷 입은 모습을 침실 큰 거울에 비추여보았다.
"영희가 몇 살인지 아세요?"
그날 저녁 식탁 앞에서 신애가 물었다.
"알아요?"
"몇 살이지?"
남편이 되묻고 있었다. 신애의 남편 현우는 고개를 숙인 채 나이프로 작게 썰어 도막낸 고기를 입에 넣고 씹었다. 그는 오랫동안 씹었다. 버터와 기름을 둘러 익힌 우리 소의 진짜 등심살은 그의 바른쪽 어금니 밑에서 수퍼마켓 정육부 톱날기계를 통과해 나온 먼지보다 작게 잘라지고 이겨졌다. 그것은 현우의 목젖을 들었다 놓으며 식도를 따라 내려갔다. 잠시 뒤 그의 목젖은 으깬 감자를 넘기기 위해 다시 올려졌다. 그는 바른쪽 어금니로만 씹었다. 금으로 덮어씌운 이였다. 마흔 아홉에 망가진 현우의 바른쪽 어금니를 치과의사가 고쳐주었다. 마취주사를 놓은 깨끗한 치과의원의 의사가 마취약에 젖어 무신경해진 현우 바른쪽 아랫니의 신경을 뽑아냈다. 어금니 안의 신경은 아픔도 남기지 않으며 뽑혀져 나갔다.
그러나, 남편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치료의자 위에 길게 누워 괴로워했다. 재갈 때문이었다. 그의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치과의사가 스테인레스 스틸의 재갈을 물렸다. 반세기 가까이 살아온 바른쪽 어금니 안의 신경을 모두 뽑아버리라고 입 벌린 채, 신애의 남편 현우는 어쩌다 아버지가 물었던 나무 재갈을 생각했을까? 아버지는 물푸레나무 재갈을 물었었다.
그들은 물푸레나무 재갈을 물리고 아버지를 고문했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방에서. 그의 아버지는 무엇을 불었을까? 무엇을 자백했을까? 빛 한 점 없는 방의 일본인 고문리들은 어떤 역사의 주역들을 위해 신애의 시아버지를 엄지 졸라 매달고, 말하지 않는 입에 물푸레나무 재갈을 물렸었을까? 아버지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옳길 수 없는 공포에 눌려 있었다. 그들이 아버지의 고통을 측정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갖는 공포를 무게로 달았다. 그들은 고문을 무엇에 이용했나? 공포로는 무엇을 했을까? 공포가 그들의 제일 큰 무기였나? 신애의 시아버지는 아홉 번 고문 받고 아홉 번 의식을 잃었다. 돌아가는 날까지 그 어른의 시대, 사회, 역사와 불화했던 신애의 시아버지는 물푸레나무 재갈에 아픈 첫 이빨 자국을 남기며 캄캄한 고문실 바닥에 눈감고 누워 있었다.
"의사에게 화를 좀 냈오."
치과에 다녀온 남편이 말했었다.
"그의 재갈이 무서워서 그랬오. 무심히 쓰는 의사의 어떤 보조기구가, 환자가 살아온 세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치 행위 때문에 내가 옛날의 어떤 아픔에 빠져들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고 말했오. 오늘 받은 처치는 고문과 같았오. 그래서 의사에게 항의했지. 의사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디다. 우리 아버님이 고생하실 때 그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이 어금니로 음식을 씹었어."
"그게 무슨 상관예요?"
"하긴 그래."
현우가 말했었다.
"사실 그 사람도 치과의사로서는 훌륭했오. 좋은 치과의사야. 공포가 강력한 수습수단이 되었었다는 걸 모른다던가. 치과의 처치기구 하나가 피압박시대의 어떤 고문기구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가 항의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지. 어쨌든, 나는 망가진 이를 고쳤오. 신경을 모두 뽑아냈어."
남편이 그때 고친 이로 고기를 씹고 있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씹었다. 신경 하나 없는 바른쪽 어금니로, 신경을 뽑아낸 구멍에 합금을 넣어 땜질한 다음 강력 시멘트로 금관을 입혀 굳힌 바른쪽 어금니로 그는 아내가 온도 맞추어 저장해 두었다가 키 큰 화덕에 구워낸 우리 소의 등심살을 아주 천천히 씹어 넘겼다.
"영희가 벌써 열 여덟 살이 됐어요."
신애가 말했다.
"그것도 만으로 쳐서요."
"열 여덟을 강조하는 이유가 뭐요?"
"애 들에겐 중요한 나이예요."
영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오?"
“나도 모르겠어요. 이미 우리 곁을 떠났는지 몰라요.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할 때 그 애 눈빛이 어땠는지 아세요? 눈빛을 반짝거리며 -그것뿐이 아녜요- 자세가 달라지고. 목소리까지 달라진 상태로 남자 친구의 이야기를 했어요. 나하고는 말도 잘 안 하려고 해요. 제 남자친구와는 그러지 않겠죠. 논쟁을 좋아하는 애예요. 잘 들어요. <
'한국단편소설3' 카테고리의 다른 글
64. 어떤 솔거의 죽음 (0) | 2022.05.25 |
---|---|
63. 아메리카 (0) | 2022.05.25 |
61. 성황당 (0) | 2022.05.20 |
59. 농촌 사람들 (0) | 2022.05.20 |
58. 내 그물로 오는 가시 고기 (0) | 2022.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