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메 리 카 -조해일
1
검문 헌병이 올라와서 위엄 있는 표정으로 한 바퀴 둘러보고 내려가자 버스는 다시 신음소리를 토하며 출발했다.
나는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의 차창 밖으로 땅에 내려선 헌병의 모습을 흘낏 보았는데 그는 땅 위에서 외로와 보였다. 여름 한낮의 무거운 햇볕이 그의 위엄 있는 헬멧 위에 앉아 있었고, 아래로 내려뜨린 그의 흰 장갑 낀 손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으며,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인 듯한 자세로 잠깐 서 있었다, 버스가 곧 속력을 내기 시작했으므로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으나 나는 그가 대신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서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그는 땅 위에 남아 조그맣게 서 있었다.
"우리 유격대로선 너 같은 모범 조교를 떠나보낸다는 게 여간한 손실이 아니지만 할 수 없지, 자, 악수나 한번 하자. 제대를 축하한다."
하고, 제대 파아티라는 이름의 좀 궁상맞은 술좌석에서, 조교들간에 융통성 없기로 정평이 돌던 유격 교관 용 대위가 내 오른손을 잡았을 때 나는 의무병으로서의 내 35개월 동안의 군 생활이 비로소 그 손을 통해 스르르 빠져 달아나는 확실한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지금 저 헌병은 내가 빠져 나온 그곳에 조그맣게 서 있다. 잔뜩 위엄을 부리면서, 사실은 외로워하면서. 직무의 위엄과 개인의 외로움 사이에 오똑 서서. 나는 자칫 내가 아직 그곳에 서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착각에 잠길 뻔했다. 그리고 나는 포장된 이차선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가 그 속에 내가 타고 있음을 알려 주는 확실하고 믿음직한 진동을 고마워했다.
"실례지만 혹시 ㄷ까지 가십니까?"
나는 통로 쪽으로 앉은 내 옆 좌석의 여자를 돌아보며 예의바르게 물었다. 민간인다운 예절 있는 태도를 재빨리 취할 줄 알게 된 스스로를 한편으로 대견스러워하면서, 여자는 말대꾸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어떤가를 알아보려는 듯이 슬쩍 한번 나를 쳐다보고 나서 약간 성가시다는 듯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네."
"앞으로 얼마나 남았습니까?"
나는 다시 깍듯이 물었다. 여자는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았다. 아마 내 후줄그레한 제대복 차림을 눈여겨보는 듯했다. 나도 비로소 여자의 얼굴을 좀 자세히 바라보았다. 여자는 전혀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얼굴이 평소에 얼마나 화장의 학대를 심하게 받고 있는가를 숨기는 데는 실패한 듯해 보였다. 눈이 작고 볼이 두터운, 얼핏 심술궂어 보이기 쉬운 얼굴이었으나 뜯어보면 선이 섬세한 얼굴이었다. 눈을 거두면서 여자는 말했다.
"거진 다 왔어요."
"혹시 그럼 ‘압록강 홀’이라구 아십니까?"
"‘얄루 를럽’ 말이군요."
'제대하면 우선 우지 집에 와 있도록 하구 남은 군복무나 착실히 마쳐라. 너무 상심 말구. 뒷일은 또 어떻게 될 테지.'
제대를 두 달 앞두고 가족의 떼죽음을 당한 내게 당숙은 그렇게 말했었다. 나의 가족은 날림 공사로 지어진 아파아트에 살다가 잠든 채로 그 일을 당하였다. 부대에서 연락을 받고 달려나갔을 때 나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 두 누이동생의 시체가 무너진 콘크리이트 더미들 사이에서 끌어내어져 가마니에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당숙이 당숙모와 함께 거기 와 있었다. 방송을 듣고 달려왔다는 것이었고, 내게 연락을 취하게 한 것도 당숙이라고 하였다. 참혹하게 죽은 사람들 앞이었고 엄청난 불행의 무게에 눌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의 앞이었으나 당숙은 살아가는 일에 자신을 잃지 않은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자상하고 굳센, 현실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충격에 몸이 굳어 아무런 수용 능력도 없는 내게 당숙의 그러한 태도는 일어난 일을 우선 수습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는 시간을 단축해 주었을 란 아니라 망자(亡者)들에 대한 태도로서도 이상하게 조금도 야속한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 옥호는 ‘압록강 홀’이라구 하는데 미군들이나 거기 여자들은 ‘얄루 클럽’이라고 부르지. 아무튼 ㄷ에 와서 ‘압록강 홀’이 어디냐구만 물어라. 웬만한 사람은 안다."
당숙은 내게 말했었다. 당숙은 그의 사촌형인 나의 아버지를 몇 달에 한 번씩은 방문하곤 했으나 나는 한번도 당숙댁엘 가 본 적이 없었다. 당숙의 직업을 패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아버지가 그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아무리 의견이 다른 경우에도 아버지의 말 같은 걸 잘 거역하지 못하는 내 소심해 빠진 (군대 생활 동알에 다져 져서 이제는 제법 뻔뻔스러워지기까지 했으나) 성격 탓이었다는 게 옳겠다. 왜냐하면 나는 꼼꼼하고 엄격하기만 한 아버지에 비해서 늘 활달해 보이는 당숙을 내심으론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직업 같은 건 내겐 아무래도 좋았다.
"(얄루 클럽)을 잘 아십니까?"
"네, ,,,,,,나두 거길 나가는 걸요."
여자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내가 그곳을 찾아가는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어차피 그곳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바에야 굳이 감출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아주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나는 내친 김에 염치없이 말했다.
"길 좀 부탁해도 될까요? 초행이라서요."
"그럭 하세요."
여자는 이제 나를 향해 선선히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ㄷ두 이제 한물갔지요?"
"아무럼요. 옛날이 괜찮았지요."
내 앞좌석에 앉은 상인 풍의 두 사내가 거대한 철제 상자처럼 생긴 미군 PX차량이 움직여 가는 모습을 차창으로 내다보며 주고받았다.
버스는 여름의 태양이 가장 순도 높게 타오르고 있을 무렵에 ㄷ에 도착했다. 나는 몇몇의 승객과 또 나의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을 선선히 승락한 눈이 작고 볼이 두터운 그 여자와 함께 ㄷ읍(邑) 거리에 내려섰다. 백색의 햇빛이 거리의 속속들이에 스며 있어 거리는 마치 한밤중처럼 조용하게 보였다. 행인 몇 사람이 눈에 띄었으나 그들도 마치 햇빛의 일부분처럼 보였다. 햇빛의 일부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여긴 시내예요. ㅂ리까진 한 15분 걷거나 택시를 타야 해요. 얄루 를럽은 ㅂ리에 있어요."
여자가 말했다. 나는 그러나 여자가 시차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진 않았다. 내가 가 본 어떤 읍에서고 읍내를 시내라고 부르는 것이 상례였음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 나는 걷자고 부탁했다. 여자는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백색의 햇빛 속을 걸어 ㄷ읍내의 단조로운 일자(一字) 거리를 지나갔다. 도회지 모습을 갖춘 우리 나라의 어느 거리도 다 그렇듯이 거리의 양옆은 상점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었다, 잡화상, 양품점, 전파사, 금은방, 구두점, 모자 가게, 양장점, 양복점, 소아과 -내과 의원, 미장원, 이발소, 편물점, 사진관, 대중 식당, 신문사 지국 등등.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저마다 살아가고 있다는 자취의 소소한 꾸밈새를 바라보며 나는 즐거운 감정 같은 것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극장도 있군요."
"네, 세 군데 있어요."
"세 군데나요?"
"카바레도 두 군데나 있는데요."
여자는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비웃는 듯하기도 하고 유혹하려는 듯하기도 한 모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참 오랜만에 나누는 여자와의 대화이며 여자가 내게 건네어 오는 웃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이제 사람 사는 풍속에 끼어 들게 됐다는 신호이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얄루 클럽에 계시게 되나요?"
이번에는 여자가 물어 왔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여자는 다시 한번 내게 그 모호한 미소를 보냈다. 그것은 자기의 질문이 빗나가지 않은 걸 만족해하는 미소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나중에 가서 야 그 미소의 진정한 뜻도, 그리고 여자의 이름이 옥화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읍내가 그렇게 조용하던 까닭도.
여자가 여기서부터 ㅂ리(里)라고 일러준 거리에 접어들자 기금까지의 거리와는 판이한 풍경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길 폭이 좁아지면서 우선 곳곳에 무슨무슨 테일러(Tailor)니 무슨무슨 폰 숍(Pawn Shop)이니 무슨무슨 클럽(Club)이니 하는 영문자로 된 간판들이 도형감(圖形感) 있고 생생한 모습으로 내게 얘기를 걸어 왔다.
'이봐, 당신은 근사한 곳에 왔어. 이런 덴 처음 와 보지 ? 행운인 줄 알라구.'
그러나 나는 별반 두리번거릴 필요는 없었다. 두리번거리지 않고도 나는 내게 얘기를 걸어오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고 내가 보아주기를 기다리는 많은 것들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다리와 색채를 아끼지 않은, 속박을 벗어난 옷맵시와 화장술로 단장한 젊고 예쁜 많은 여자들을 볼 수 있었으며, 그들이 뿌리는 짙은 생(生)에의 친밀감을 내 것으로 했다. 나는 아마 그때 행복해 했던 듯도 하다. 그때 나는 내가 스물 여섯 살에 갑자기 고아가 돼 버린 신세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었던 것이니까.
"다 왔어요. 여기예요."
하고 여자가 말했을 때 나는 멈춰 서서 타일을 바른 큼직한 건물을 쳐다보았다. 영문자로 얄루 클럽 (Yalu Club)>이라고 큼직하게 쓰고 그 밑에 자그마하게 (압록강 홀)이라고 한글로 쓴 유리 간판이 보였고 (종업원 이외의 한국인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쓴 양철 조각 같은 것이 보였다.
"이리 들어가시면 안채가 있어요."
하고 여자는 그 건물 바로 옆으로 난 작은 샛골목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게 그 모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헤어지자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나도 고맙다는 인사로 소개를 마주 숙여 보였다. 근처에 있던 여자들이 노골적인 관심을 표시하면서 우리 두 사람의 수작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듯했다. 그녀는 조금 뽐내는 듯한 몸짓으로 여자들의 시선을 짐짓 무시한 채 나로부터 떠나갔다. 나는 샛골목으로 들어섰다.
안채는 살림집이란 인상보다는 여관이나 그 밖에 소규모의 아파아트 같은걸 연상케 하는 많은 수의 방을 가진 2층 슬라브 집이었다. 방마다 그 방의 호수를 나타내는 듯한 플라스틱 수자판들이 붙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마당 한가운데에 펌프가 있었고 거의 벗다시피 얇은 옷만 걸친 여자들이 그 둘레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가 낮선 사내의 출현에 잠시 일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마당 저쪽으로는 이 집의 뒷문인 듯한 작은 철문이 보였고 그 밖은 바로 철둑길인 듯 그때 막 요란한 바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기차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려 왔다.
"이게 누구야? 효식이 아냐? 어서 와. 집 찾느라구 고생 안 했니. 미리 연락이라두 좀 하지 않구."
수자 표지가 없는 한 방으로부터 당숙모가 달려나오며 말하였다.
2
"난 대학을 꼭 마치도록 하고 싶었는데, 네 의견이 정 그렇다면 뭐 좋다. 하긴 오래 있을 곳은 못 될는지 모른다만 사람이 아주 못 있을 곳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럼 경험으로 삼구, 그냥 노느니보다는 일을 좀 거들어 보는 것두 괜찮다만 난 쉬라구 권하진 않겠다. 무어든 빨리 시작하는 게 좋아."
당숙은 이렇게 말하며 내게 클럽의 문지기 일을 맡겨 주었다. 나는 물론 며칠 쉬고 싶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쥐고 싶기는커녕 내게 온갖 얘기를 걸어 올, 그리고 온갖 일락이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그 세계. 속으로 한시라도 빨리 뛰어들고 싶었던 것이다. 2년쫌 다녀 본 대학 따위, 그 백치(白痴)와 같은 순진한 허구의 울타리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
은 물론 털끝만큼도 없었다.
나는 도착한 이튿날부터 일하기 시작하였다. 문지기 일이란 클럽 안에서 가장 한가한 직책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저녁 다섯 시부터 (그때가 미군들이 클럽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클럽에 나오기 시작하는 여자들의 검진 패스를 확인하고 입장시킬 여자와 입장시킬 수 없는 여자를 가려내는 일과 망칙한 인각(印刻)이 든 라이터나 플라스틱 조화(造花) 같은 것을 팔러 들어오는 전상자(戰傷者)나 아이 업은 아주머니 등 잡상인을 막는 일, 구걸하러 오는 사람들을 적당히 구슬러 돌려보내는 일 따위가 그것이었는데, 여자들은 성병의 유무를 판별 받기 위해서 주(週) 2회씩 받게 되어 있는 검진을 대체로 충실히 받고 그 결과에 잘 순응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입장을 막아야 할 여자는 적었으며, 잡상인이나 구걸하는 사람이 자주 오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거의 구경꾼처럼 한가했다, 당숙은 아마 우선 내게는 구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클럽은 30평 남짓 되어 보이는 호올과 서양 영화 같은 데서나 구경해 본 적이 없는, 스탠드를 갖춘 카운터와 사이키델릭 음악을 주로 트는, 유리 상자 같은 레코오드 음악 재생실로 되어 있었다. 호울 한복판에 춤출 수 있 을 만한 장소만 남겨 놓고는 테이블과 외자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카운터는 뒷면에 유리로 된 진열장에 맥주병과 각종 음료수병, 깡통, 셀로판 봉지에 든 감자 튀김, 땅콩 같은 것들이 늘어 놓인 외에 (군표는 받씨 않습니다) (외상 거래는 사절합니다) (병을 가지고 나가지 말아 주십시오) (담배나 식사는 팔지 않습니다)와 같은 말들이 영문자로 쓰인 종이쪽지들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클럽의 양쪽 벽면에 장치된 스피이커 상자에서는 귀청을 따갑게 하는 사이키 델릭 음악이 쏟아져 나왔다. 다섯 시에 일과가 끝나는 미군들이 각양의 복장으로 쏟아져 나와 겨자들과 어울려서 그 음악에 맞춰 충을 추었다.
실내를 밝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둡게 하기 위해서 장치된 듯싶은 색 전등들이 호울 안을 불그레 상기된 환등 상자처럼 보이게 했고, 춤추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는 지구의(地球儀)만한 거울 공(Mirror Ball)이 서서히 회전을 거듭하는 동안 반사된 무수한 빛의 조각들이 춤추는 사람들의 어깨 위에서, 얼굴에서, 호울 바닥과 클럽의 네 벽에서 열대어처럼 헤엄쳤다. 그리고 춤추는 사람들은 그 무수한 빛 조각들의 흐름 속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었다. 미군들도, 그리고 여자들도. 그리고 춤춘다는 일의 즐거움, 단순히 팔다리와 어깨와 엉덩이를 움직일 뿐 아니라 음악에 맞춰서 움직인다는 즐거움, 단순히 음악에 맞출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규칙 속에 허용된 최대한의 일탈(逸脫)을 구사한다는 즐거움 속에 그들은 온 몸으로 탐닉하는 듯했다. 고 춤의 원산지에서 왔다고 할 수 있는 미군들에 비해서 여자들의 춤 솜씨에는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며, 또 신장의 차이가 큰 미군들과 짝을 이루면서도 그녀들은 조금도 작아 보인다거나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들이 여자라는 까닭만큼 그녀들의 춤은 보다 세련돼 보이고 보다 우아한 것이었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들은 모두 아름다워 보였다. 허벅지까지 드러낸 건강하고 미끈해 보이는 다리들이 우선 내 메말랐던 눈을 게걸스럽게 했고, 색 전등들의 조사(照射) 아래 발그레 요염해진 화장한 얼굴들이 내 부끄러운 눈을 황홀하게 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여자들을 보지 못하였었다. 이렇듯 짙게 화장하고 이렇듯 자유로이 팔다리를 드러낸 여자들은 더욱 보지 못하였었다.
나는 당숙이 우선 입으라고 빌려 준 양복바지와 남방샤쓰로 갈아입고 클렇의 입구께에 놓인 소파에 앉아 그렇게 게걸스럽게, 춤추는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곡 하나가 끝났다. 그러자 붉은 머리칼의 야윈 미군 하나와 짝이 되어 춤추던 옥화가 미군과 헤어져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그녀는 아까 클럽에 나타날 때 입구 께에 앉은 나를 발견하자,
"어마, 기도를 보시나 봐요. 잘 부탁합니다. 제 이름은 옥화라고 해요."
하고 우정어린 미소를 건네며 내게 검진 패스를 내 조였다. 버스에서와는 달리 거리낌없이 짙게 화장한 얼굴이었다.
미끈하고 탐스럽게 횐 다리를 뽐내며 내 앞에 다가와 선 옥화는 내 눈앞에다 손바닥 하나를 펴 보였다. 담배 두 가치가 가지런히 그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하나만 집으세요."
내가 그 중 한 가치를 집어들자 그녀는 나머지 한 가치를 제 입으로 가져가며,
"심심하지 않으세요?"
했다. 나는 제대 기념으로 동료 조교들에게서 받은 라이터로 비교적 침착하게 그녀의 담배와 내 담배에 볼을 붙이고 나서,
"심심해 보입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으시니까 딴 분 같네요. 여자 애들간에, 싸움깨나 벌어지겠는데요. "
엉뚱한 대꾸를 하며 그녀는 내 곁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네?"
"미남이시란 말예요."
"아, 난 또 무슨."
"두고 보세요. 저 애들이 가만 놔두나?"
그녀는 다시 어우러진 춤판을 눈으로 가리키며 예의 그 유혹하려는 듯하기도 하고 비웃는 듯하기도 한 모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는 그녀가 순간 내게는 아주 가까운 여자처럼 느껴졌다. 이 여자가 나를 유혹할 셈인 가, 하고 두근거려지는 심사를 애써 누르며 나는 짐짓 잡놈처럼 천연스럽게,
"여기가 그렇게 좋은 곳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반문했다.
"네?"
"여자들이 남자를 두고, 더우기 한국 남자를 두고 싸울 만큼 그렇게 좋은 곳입니까?"
"한국 남자니까 싸우죠. 두고 보시면 아실 거예요. 하지만 너무 좋아하진 마세요."
그녀는 다시 그 모호한 웃음을 한번 지어 보이고 나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카운터 쪽으로 멀어져 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와 나눈 삼류의 농담이 야릇하게도 나를 흥분시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감정이란 일쑤 삼류의 거래에서 더 잘 흥분되는지도 몰랐다. 나는 곧 삼류의 상상력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붙잡지 못 하였다. 저 여자와 사랑을 하게 된다면 아마 거추장스런 절차 없이도 곧 동침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아마도 저 여자의 방에서, 저 여자의 침대 위에 서겠지. 내가 공략을 시도해 보았던 어떤 다른 여자애들보다 저 여자는 침착하고 그리고 동물답겠지. 어른답겠지. 아마도 동물다움의 많은 비결을 알고 있겠지, 그러나 내가 돈주고 사 본 창녀들과는 달리 그것은 그리고 단순한 도구는 아니겠지. 그녀는 성의를 다 하겠지. 내 살갗에 닿는 것은 그러한 일에 어울리는 적당한 빛깔과 부드러움을 지닌 침구의 섬유와 그녀의 매끄럽게 저항하는 살결이겠지. 그녀는 충분한 암시를 내게 던져 오지 않았는가. 흑은 속단일까. 나는 계속 그녀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훌륭한 다리다. 카운터에서 그녀는 2홉짜리 맥주 한 병을 사 가지고 다시 내게로 왔다.
"와이로예요. 앞으로 잘 봐달라는 뜻. 그리고 여긴 내가 선배니까 한 마디만 미리 충고할래요. 낯선 남자가 새로 나타나면 여자애들이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아요. 새 여자애가 나타나면 물론 남자들이 가만 놔두지 않구요. 저기 저 카운터 장씨, 플레이어 홍씨, 그리고 저 소제하는 춘식이까지 보두 여자애 하나만 새로 나타났다 하면 입맛부터 다시기 시작하는 내
놓은 색골들예요. 비밀을 하나 말하면 날 맨 처음 건드린 건 저 꼬마 춘식이예요. 저래 봬두 열 일곱 살이나 먹은 나이박이예요. 마찬가지루 여자애들도 새 남자만 나타나면 서로 입맛부터 다시죠. 어쩜 나두 지금 선수를 치구 있는 건지도 모르죠. 그럴 만하잖아요? 버스에서부터 구면이니까. 호호 아무튼 조심하세요. 어때요, 내 충고?"
그녀는 말을 마치자 다분히 유혹의 속셈을 감춘 장난기 어린 얼굴로 내 두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나는 그녀로부터 받아 든 맥주병을 병째로 입을 향해 가져가다 말고,
“---기분 좋은 충곱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며칠 지나야 되겠지만 어쨌든 그럼 개시는 옥화씨한테 시켜드릴 테니까, "
하고 정말 잡놈처럼 대담하게 지껄이고 말았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했다. 그리고 뜻밖의 우수한 생도를 만난 여선생처럼 그녀는 얼굴이 활짝 펴지며 비로소 숨김없는 미소를 내게 보내 왔다. 그 미소는 모호하지 않았다. 은밀하게 내미는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나는 부끄럼도 없이 내 새끼손가락을 걸렀다. 그리고 그 삼류의 행위가 가지는 외잡한 실감은 그날 저녁 내내 나를 달뜨게 했고 영업 시간이 끝나서 (영업 시간은 11시 반에 끝났다) 당숙이 계산을 보기 위해 클럽으로 나와,
"어때? 왜 견뎌 내겠어?"
하고 내 두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ㄷ에서의 내 생활은 그런 식으로 여자들과의 접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5개월 동안을 군대라는 갇힌 사회 속에서 산, 굶주린 자다운 출발이었다.
옥화와 동침할 기회는 며칠 가지 않아서 왔다. 당숙은 여자들에게 세놓고 있는 안채의 스무나뭇의 방 가운데 빈 방 하나를 내게 준 다음 이곳 생활에 대해서는 스스로 배워 나가길 바란다는 태도로 내 행동에 관해 거의 아무런 관심도 표면상으로는 표시해 오지 않았오 또 다른 종업원들의 행동에 관해서도 영업 시간이 끝난 뒤의 그것에 관해서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클럽에서 일하게 된 지 닷새만에 옥화의 집으로 갔다. 당숙이 계산을 마치고 들어간 뒤 나는 클럽 어귀의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는 옥화와 더불어 어둡고 꼬불꼬불한 작은 골목들을 지나 그녀의 집으로, 정확히 말해서는 그녀의 방으로 갔던 것이다.
그 집은 세놓아 먹기 위해서만 지은 듯한 일자(一字)집이었고, 늦은 시간임에도 잠기지 않은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으로 면한 긴 툇마루 위로 여러 개의 방문들이 불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방문들 중에는 열어제쳐진 것도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는 거의 벗어붙이다시피한 여자들이 마당의 어둠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아마 손님을 잡지 못한 여자들일 것이었다. 옥화를 뒤따라 마당으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 그 중의 누가 웃는 듯도 했다.
옥화는 불 꺼진 한 방문 앞으로 다가가 자물쇠를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전등을 켜고 다시 나와 내가 허리를 꾸부려 벗은 구두를 벗어 방안으로 들여놓았다. 내가 들어서자 안에서 문을 닫고 그녀는 내게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큰 방이라고 할 수는 업었으나 침대 이외에 탁자와 의자까지 갖추어져 있었고 화장대와 전축과 찻장까지 들여놓아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플레이보이) 잡지가 몇 권, 그리고 서투른 솜씨나마 생화를 논은 화병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나은 그녀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잠깐 눈 좀 감으세요. 옷 갈아입을께요."
그녀가 말했으나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럼 그만두죠. 커피 드시겠어요?"
"그만두죠. 옷 갈아입으세요."
"술을 조금 하실래요? 양주 남은 게 조금 있는데."
"역시 그만두죠. 옷을 갈아입으세요."
그녀는 개구쟁이 생도를 대하는 여선생처럼 잠시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그럼 옷 갈아입겠어요."
그녀는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가더니 전등 스위치를 껐다. 전등 스위치는 그곳에 장치돼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가 옷 갈아입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다시 전등이 켜졌다. 그녀는 침대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전등 스위치를 껐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다시 그것을 켰다. 나는 홀랑 벗은 채로 침대 속 그녀 곁에 누워 있었다.
"자, 이제 커피가 한 잔 하고 싶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칭찬하고 싶어 죽겠다는 듯 나를 얼싸안았다. 그녀는 알몸이었다. 우리는 그로부터 격의 업는 친구가 되어 서로를 찾는 무더운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다소 서투르다고 할 수 있는, 그래서 성급하다고 할 수 있는 친구를 위해 상냥하고 호의적인 안내자 노릇을 해 주었고 나는 나 자신도 노력하여 친구의 성의가 헛된 것이 되지 않도륵 힘냈다. ---상황 종료의 신호로 그녀는 내 목을 가볍게 껴안았고 나는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편안히 기대었다.
"그대로 잘래요?"
그녀가 가만히 물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턱을 괴고 이마만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커피 한 잔."
그녀는 말없이 내 목으로부터 팔 하나를 회수해 가서 전등을 껐다. 가만히 나를 밀어 곁에 누이고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전등이 켜졌을 때는. 그녀는 손과 발이 소매와 바짓가랑이에 덮여 보이지 않는 커다란 남아용 잠옷을 입고 있었다. 누운 채로 바라보며, 그것은 이 방을 다녀간 많은 GI들이 입었던 것이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질투하지 않았다. 나는 질투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이미 두 번째 여행에 대한 희망으로 마음을 조급히 굴고 있었던 것이다, 아, 얼마나 나는 이 며칠을 참는 데 조바심쳐 왔던가.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엎드려서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그 커다란 남자용 잠옷을 입은 채였다.
"놀랬어요."
그녀가 커피잔을 머리맡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뭘?"
“버스에서 처음 봤을 땐 쑥맥처럼 보였드랬어요. 멍청한 사람처럼."
“그런데?"
“소질이 굉장해요. 첨은 물론 아니죠?"
"여기 와선 처음이지."
"그전엔?"
"종삼이 없어지기 전에 몇 번."
"어머 그런 멜 갔어요?"
"그런 데라니?"
"더럽다던데."
"하!"
나는 감탄했다. 이 여자는 자부심을 갖고 있구나 ! 이 귀여운 무지덩이.
'그럼 옥화는 깨끗한가? '
라고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다. 그런 건 내게 실상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는 그녀의 커다란 남자용 잠옷을 벗겼다. 그녀는 말없이 내 하는 짓을 돕고 알몸이 되자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우리는 다시 저 달콤한 시궁창 속으로 들어갔다.
아침 느지막이 옥화의 방에서 나와 클럽으로 돌아온 나는 마침 청소 중이던 열입곱 살짜리 소년 춘식이의 악의 없으나 의미 있는 미소에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써 대답하였다. 그리고 아침밥을 맛있게 먹어 치운 다음 나는 곧장 내 방에 처박혀 하루 종일 잠잤다. 클럽이 문을 여는 저녁 다섯 시까지.
그 뒤 나는 옥화로써 그치지 않고 클럽에서 반반하다고 느껴지는 여자들 (나는 물론 이곳에서의 첫날과는 달리 반반한 여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를 구별할 줄 알게 되었던 것인데)의 방은 거의 빼놓지 않고 방문하였다. 그곳에서도 물론 사랑은 비밀이 그것의 요점이었으므로 나는 그 일들을 될수록 은밀히 진행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일들이 완전한 비밀 속에 수행될 수 있으리라고는 물론 믿지 않았다. 나는 다만 그렇게 하는 것만이 그 일들의 과정을 기쁘게 하고, 또 그녀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당숙과 당숙모에 대해서도 필요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여자들과의 일락(逸樂)으로부터 시작된 ㄷ에서의 내 생활은 차츰 그런 대로 그곳 나름의 풍속에 동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나는 곳의 명절날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군들의 봉급날에는 이발할이나 면도를 할 줄 알게 되었고, 한가한 낮 동안에는 여자들 사이에 끼어 앉아 돈내기 화투도 칠 줄 알게 되었으며, 사소한 이해 관계나 감정상의 충돌로 골목에서 미군들과 한국 사람들 사이에 패싸움이 떨어지면 우르르 덤벼들어 미군들을 패주는 데 한몫 거들 줄도 알게 되었다. 고리고 다음과 같은 것들도 알게 되었다.
ㄷ의 중심부는 읍내가 아니라(그래서 읍내는 그렇게 조용하고 한산했던 것이다) 미군 부대가 가까이 있는 이곳 tl리(로)라는 것, 내가 몸담고 있는 것과 비슷한 종류와 규모의 클럽들 10여 개가 모두 이곳에 몰려 있다는 것, 읍내는 다만 영화 구경 가기 위한 곳이거나 시장 보러 가는 곳, 서울로 나가는 버스나 기차 같은 교통 기관을 이용하러 가는 곳, 또는 맹장염이나 임신 중절 수술 같은 것을 하러 가는 곳, 누구와 좀 조용한 데서 만나기 위해 다방 같은 것을 이용하러 가는 곳 정도의 의미밖엔 갖지 못한 곳이라는 것, 따라서 ㄷ읍의 경제권은 거의 ㅂ리에 사는 사람들의 손에서 움직인다는 것, 아니 ㄷ읍을 먹여 살리고 부지케 하는 자산의 대부분이 ㅂ리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 ㅂ리의 자산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은 주로 미군들의 호주머니로부터 떨어진 것이라는 것, 그런데 그 자산의 반 이상은 경제 활동으로서는 최저의 수단에 속하는 매춘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것, 그러나 그 주(主) 종사자들인 이곳의 여자들은 뜻밖에도 윤리적 열등감 같은 건 조금도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것, 오히려 고 생활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아니면 그것은 흑 이 나라 전체에 편재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또는 이런 종류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팔자에 대한 순응주의의 한 표상일 뿐이었을까)등등.
그러나 나는 이때 내가 중대한 착오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였다. 물론 이 수기(手記)를 적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의 과실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나 자신을 어떤 외방객, 이곳의 운명과 나 자신의 운명은 전혀 다른 것이고 언젠가는 이곳으로부터 떠나게 될 일개 기숙자, 내지는 한 사람의 구경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과실을 깨달을 날은 멀지 않아서 왔다.
3
유달리 가문 그해 여름은 8월로 접어들어서도 비 한 방울 오지 않았다.
ㄷ의 옆구리를 끼고 흐르는 개울도 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개울도 낮에는 벌거숭이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리고 밤에는 여자들의 더위를 식혀 주는 목욕터가 되었다.
밤 열 한시 반이 지나 클럽들이 문을 닫고 나면 손님을 잡지 못한 여자들 중 일부는 개울로 갔다. 공들여 한 화장과 애써 부린 교태가 허사가 된 그녀들은 한층 더위를 느끼는 듯했다. 물가에 닿기가 바쁘게 걸친 것들을 벗어붙이고 그녀들은 개울로 들어섰다.
개울물은 물론 풍부하지 못했다. 수량(水量)이 넉넉할 때는 양쪽 제방 사이를 거의 메우다시피 커다란 흐름을 이뤄, 사람들은 개울을 흔히 -강-이라고도 불러 왔다고 하나 유달리 가문 그 해 여름엔 넘은 개울 바닥 대부분이 추하게 말라빠진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는 한복판으로만 적은 양의 물이 흘러내릴 뿐이어서, 순화력이 부족해진 개울물은 또한 더럽기 짝이 얼었다. 그러나 밤은 여자들을 눈멀게 했고 물은 더위를 씻는 데 가장 값싸고 가까운 방편이라는 그녀들의 몸에 밴 생각이 또한 눈먼 그녀들을 개울로 떠밀었을 것이었다. 그녀들은 오랜 옛날부터 더운 여름밤이면 물에 간다는 지혜를 그녀들의 어머니들로부터 배워 몸에 익혀 온 터이며, 더우기 그녀들은 이제금 더러움에 대한 감각이 마비된 생활을 해 오는 터이다.
물에 들어선 여자들은 과장된 동작으로 물에의 오랜 친밀감을 나타내며 물의 저온(低溫))을 스스로들의 몸에 시험해 본다. 그리고는 물에 오면 몸을 씻는다는 버릇으로, 가져온 플라스틱 목욕 그릇 같은 것으로 물을 떠 끼얹기도 하고 실제로 몸을 씻는 시늉을 무심결에 하기도 하며 본격적으로 물의 저온을 탐내기 시작한다. 밤의 개울이 일시에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물을 끼얹는 소리와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고 여자들의 교성이 높아 간다. 이제 그녀들은 개울에 오기 전까지의 일들은 깨끗이 잊어버린 듯하다. 어쨌든 이제 하루가 지나가려 하고 있고 그것이 어떠한 하루였건 다만 그 하루의 더위를 씻어 버릴 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들은 위로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카운터 장씨와 나란히, 땀을 들이려고 개울가 제방 위에 앉아 있었다, 제방은 동네의 큰 골목에서 몇 발짝 샛골목 하나만 빠져 나오면 있었고, 벗은 여자들을 비록 어둠 속에서나마 집단으로 구경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으므로 바람을 쐬기 위한 곳으로서는 금상첨화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아래 개을 쪽을 그러나 비교적 대범하게 굽어보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런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개울을 경계로 해서 동네의 맞은편 언덕바지에 자리잡고 있는 미군 유류 저장소에서 비쳐 오는 불빛이 개울의 흐름과 그 흐름을 군데군데 차단하고 섰거나 엎드렸거나 또는 앉아 있는 여자들의 벗은 그림자를 검게 윤곽 지어 주고 있었다.
"김형 여기 온 지가 벌써."
옆에 앉은 장씨가 말했다.
"제법 됐죠?"
"한 달쯤 됐나요. "
나는 장씨의 네모진 윤곽만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이 사나이는 보통 사람보다 갈빗대가 석 대나 모자라는 사람이다. 병원에서 잘라냈다고 한다. 갈비뼈가 다 있었을 때는, 그는 폐병장이였던 모양이다.
"그 동안 몇 명이나,,,,,,?"
어둠 속에서 휜 이를 드러내 웃으며 그가 말했다.
"뭐 한 서너 명."
나는 거짓말을 했다. 7, 8명은 좋이 된다. 옥화를 비롯해서 노랑머리 경애, 젖큰이 춘자, 꼬마 샌디, 고고의 명수 써니, 얌전이 명자, 쥬리, 그리고 며칠 전 당숙의 안채에 새로 세 들어 온 미라 등등.
"하, 하아, 내 다 아는데 뭘 그러쇼?"
장씨는 그러나 곧이듣는 눈치가 아니다.
"말하리까? 새로 온 미라라는 아가씨두 김형이 싸악하셨지?"
어둠 속에서 장씨는 손바닥으로 입을 씻는 시늉을 해 보인다. 이 능구렁이 같은 작자가? 나는 탄복했다. 놀라운 염탐꾼이로구나!
"아니 건 또 어떻게 아쇼?"
아차! 이 쑥맥 좀 봐라. 넘겨 짚이고 있잖아? 아니나다를까 그는 내 어깨를 쳤다.
"하하, 이렇게 알지 어떻게 알겠소? 하기야 뭐 이렇게 아니더라두 다 아는 거 아뇨? 까짓, 그건 그렇구,,,,,,."
그는 짐짓 목소리를 무겁게 한다.
"김형은 서울에서두 얼마든지 취직자릴 구할 수 있을 텐데, 왜 이런 델? 대학 나왔죠?"
"나오긴요. 2년 중퇴죠. 나왔대두 그렇죠. 좀 좋습니까, 여기? 우선 아가씨들 많아서 좋고."
"아가씨야 서울이 더 많죠."
"많으면 뭐합니까? 깨놓고 말해서 어디 아무한테나 줍니까? 순수하게 줍니까? 요리 빼고 조리 빼고, 요리 따지고 조리 따지고, 말도 붙여 보기 어렵게 정숙하고, 한 껍질 벗겨 보면 시궁창하고 똑같은 것들이. 여기 아가씨들 얼마나 좋아요? 탁 털어놓고 순수하게, 아무 조건 없이, 까다로운 절차 없이, 시원시원하게 막힌 데 없고 "
나는 좀 흥에 겨웠던 듯하다. 어둠 속의 희미한 빛 속에서나마, 그리고 아무리 내가 대범해졌다곤 해도 나는 한 집단의 벌거벗은 여자들을 시야 아래 두고 있었으므로. 그때 우리의 존재를 알아챈 듯 여자 하나가 젖가슴을 가리며 개울 바닥에서 일어서서 소리쳤다.
"야! 어떤 개새끼들이야? 웬 똥개 새끼들이 싸가지 없이 구냐?"
곧이어 모든 여자들이 이쪽을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어 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야! 웬 수캐냐 이리 와, 이리 와."
"당장 꺼지지 못해? 얌체들아아!"
"이 쉬파리도 안 앉을 새끼들아아!"
"한 코 줄께. 와. 응, 이리 와아!"
'X대가리가 근질근질하냐?"
노성과 농지거리가 뒤섞인 그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천천히 제방에서 일어섰다. 나는 순간 야릇하게도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내 성감대의 어디가 반응한 까닭인지도 몰랐다. 이런 경첩은 처음이 아니다. 예컨대 여학생들의 운동 경기 도중 같은 때, 각기 자기가 속해 있는 학교의 선수들이 모기를 보였거나 안타깝게 실패를 저질렀을 순간에 들을 수 있는 응원석의 자지러진 함성 같은 걸 듣는 순간 나는 알 수 없게도 곧잘 눈시울이 시큰해지곤 하던 것이다. 여학생들이 집단으로 부르는 애국가라든가 유원지 같은 곳에서 술취한 아낙네들이 한데 엉켜 추는 춤, 또는 노래 같은 걸 보고 듣는 경우에도 그렇다. 서푼 짜리 정신 분석가식으로 나는 그걸 내 성감대의 어디가 남달리 민감하거나 좀 이상해서 그렇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짐작해 온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어딘지 미흡하다. 그것으론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순간의 그 어떤 설움 같은 감정이 충분히 설명되는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쌍년들 되게 지랄하네."
샛골목으로 빠져 나오면서 장씨가 말했다,
"어떻든 여길 빨리 떠야지, 희망이 없어요. 장래성이라군 없죠. 젊은 시절 한때 보내긴 좋겠지만. 그리구 김형처럼 당분간 와 있는 거면 또 몰라."-
그는 노인처럼 처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그때 골목의 동네 쪽 입구로부터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검둥이 하나를 보았다. 그는 맹수와도 같은 속도로 우리와 엇갈려 제방 쪽으로 사라졌다. 장씨와 나는 그가 우리와 엇갈려 사라진 방향을 잠시 멈칫해서 뒤돌아본 뒤 골목을 빠져 나왔다,
그렇게 마악 개울로 통하는 그 샛골목에서 빠져 나와 동네의 큰 골목으로 나서고 나서 얼마 안돼서였다. 개울 쪽에서 별안간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장씨와 나는 걸음을 멈췄다. 개울 쪽에서 들려 오는 소음은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는 불길한 울림을 데린 것이었다. 우리는 다음 순간 조금 전 우리가 빠져 나온 바로 그 골목 안에서 나는 다투는 듯한 발짝 소리와 함께 아주 가까이 들리는 여자의 외마디소리를 들었다.
장씨와 나는 거의 동시에 소리나는 쪽으로 몸을 돌이켰는데 순간 나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느꼈다. 아까의 그 검둥등이가 횐 이를 사려 물고 벌거벗은 한 여자의 머리채를 나꿔쥔 채 한 손으로는 기다란 면도칼을 내저어 우러를 위협하며 마악 골목을 나서고 있었다. 여자의 온 몸은 공포의 표정을 역력히 드러낸 채 잔뜩 활처럼 뒤로 휘어져 있었고 두 손은 제 머리채를 틀어쥔 검둥이의 손을 필사적으로 할켜 대고 있었으나 머리채가 당겨지는 아픔과 아무리 할켜 대도 조금도 늦춰 주지 않고 잡아채는 검둥이의 광포한 힘에 무력하게 질질 끌려 나오고 있었다.
장씨와 나는 거의 동시에 화다닥, 녀석이 내두르는 칼날을 피해 양쪽으로 갈라서서 길을 틔어 주었다. 검둥이는 다시 한번 무리를 향해 횐 이를 사려 물고 광포하게 칼날을 휘둘러 허공을 두어 번 베어 보이고 나서 내처 여자를 잡아채었다. 우리가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여자는 이제 몸만 잔뜩 뒤로 휜 채 거의 종종걸음을 치다시피 어둠 속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 앞에는 거짓말처럼 아무도 없었다. 후다닥 정신을 차려 몇 발짝 쫓아가 봤을 땐 어느 골목으로 사라졌는지 동네는 이미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장씨가 어색하게 어깨를 들썩했다 놓으며 말했다.
“새끼! 지독한데."
나는 잠시 넋 나간 사람처럼 어둠 속만 두리번거렸다. 그때 옷들을 대강 주워 걸친 여자들이 웅성거리며 골목에서 올려 나왔다.
"어느 쪽으로 갔어요?"
"아. 그래 남자가 두 사람씩이나 되면서 그냥 놔뒀어요?"
"칼을 막 휘두르는 걸 그럼 어떡허니? 얘."
“아휴! 몸서리쳐! 깜둥이 새끼들은 짐승이라니까. 짐승!"
장씨와 나를 에워싸고 여자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지껄였다. 여자들은 비릿한 물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얘, 근데 걔 누구지?"
여자 하나가 물었다.
"기옥이란 애 아냐."
"기옥이가 누군데?"
“바바상 클럽에서 후로 쇼(Floor Show)하는 애 있잖아, 왜."
"걔가 후로 쇼두 했나?"
"아, 그 까무잡잡하던 애 말야?"
"그래애. 뭐 그 전에 쇼단엔가 있었다던 애."
"개가 쇼단에 있었나? "
"자세힌 모르지만 그렇대나 봐. 왜 얼마 절에 동원 극찬에 쇼단이 내려 왔을 때 신 성일이 동생이라든가 남 석훈이 동생이라든가하구 걔가 다방엘 들어가더라느니 여관엘 들어가더라느니 하는 소문이 있었잖니?"
"그게 걔야? 근데 그 깜둥이 새낀 왜 저 지랄이지?"
“잘은 모르지만 얘가 빛이 많은가봐. 그 왜 수원 곰보네 있잖아? 그게 포주집인데 아무튼 빛이 여간 많지 않대. 그래서 한편으룬 미군을 받으면서 바바상 클럽에 후로 쓸 나간 모양이야, 빚 빨리 갚구 수원 곰보넬 빠져나갈려구 그랬겠지. 누가 아니? 그 신성일이 동생인가 남석훈이 동생인가 하구 동거 생활이라두 하기로 됐었는지. 어쨌든 그 판에 얘한테 잔뜩 반한 아까 그 깜둥이 새끼한테서 살림 돈을 먹었대나 봐. 뭐 2백 불을 먹었다던가? 아뭉든 쇼는 안 나가기루 하구 말야. 근데 얜 틈만 있으면 깜둥이 몰래 숄 나갔다는군. 사실 살림 돈 몇 불 얻어 먹었대두 그것에만 매달려 들어앉았을 년이 어딨니? 더구나 얜 갚을 빛이 태산인데. 좌우간 그러다 한 번은 깜둥이한테 들켜 가지구 반 죽다 살아난 모양이야. 눈깔이 뒤집혀서 숫제 죽이려드는 걸 수원 곰보가 나서서 이제부턴 자기가 책임지구 숄 못 나가게 할 테니 이번만 참으라구 애걸을 하다시피 하구서야 앨 살려 놨다는데, 그 후에두 얜 틈만 있으면 숄 나갔다는군. 년이 독종은 독종인 모양이야."
"얘, 하긴 살림 돈 준 년이 수많은 새끼들 앞에서 빨가벗구 지랄하는 걸 봤으면 깜둥이 새끼 환장하기두 했겠다."
"그딴 소리 하지두 마. 깜둥이 새끼가 어디서 돈 몇 불에 서방 행세야? 서방 행세가."
"아무튼 그게 또 들통이 난 모양이야. 틀림없지 뭐, 한 부대 있는 어떤 새끼가 고자질을 한 개. 또 초 죽음나구 말 거야."
"씨팔! 정말 니 팔자나 내 팔자나 양갈보 팔자 좆같다, 좆같애."
"좆 같긴 X같지."
얼굴이 남상으로 생긴 여자 하나가 그렇게 끊어 버리듯 뱉자, 여자들은 조금 웃고 나서는 곧 각자 자기 자신의 일로 돌아가는 표정이 되어.
"씨팔!"
“X같네 정말."
어쩌고 저마다 한 마디씩 입에 담으며 각기 계 처소를 찾아 어둠 속으로 흩어져들 갔다. 장씨가 경찰관 파출소로 연락을 하러 간 후 나는 곧장 내 방으로 돌아왔다. 전등도 켜지 알은 채 나는 맨바닥에 드러누워 수치스러운 감정에 마음을 뒤채였다. 방금 본 사건의 충격적인 모습과 끌려간 여자가 당할 폭력에 대한 상상력이 내 어두운 시야와 머릿속에 가득 차 나를 짓눌렀다. 그리고 광포한 폭력 앞에 아무런 방비 얼이 내던져진 여자를 위해 아무 일도 해 주지 못한 내 용렬한 자기 방어 본능이 견딜 수 얼이 부끄럽고 구역질 났다.
"써팔!"
하고 나는 어둠 속에 대고 투덜거렸다. 그때 내 방문을 작게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이어 소근대는 여자의 목소리로,
"자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자지도 않으면서 불을 껐군요."
여자의 보이지 않는 입이 말했다. 미라였다. 며칠 전에 이사 들고, 나와 잠자리를 한 번 같이 했던.
"아, 난 누구라구 "
"캄캄한 방에서 뭘 하세요? 자지도 않으면서."
"이제 잘려구."
"심심해서 와 봤어요. 내 방에 안 갈래요?"
"공쳤군? 글쎄, 갈까."
"나랑 화투나 쳐요."
"화투? 좋지, 씨팔."
"거기 왜 씨팔은 붙어요?"
"아, 그저."
나는 그녀를 따라 나섰다. 한집안 안이었으므로 그녀의 방까지는 열 발짝도 되지 않았다. 혼자 화투를 떼고 있었던지 그녀의 방바닥에는 화투짝들이 그대로 늘어 놓인 채로였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그녀가 말했다.
"좋지"
"왜 이번엔 그 담 말은 빼세요?"
"아, 좋지 씨팔."
"호호, 오늘 무슨 언짢은 일이라두 있었나부죠? 난 남자들이 뿌루퉁해 있을 때가 좋더라."
꽤 심심했던 모양이다. 라디오 연속극 같은 데서나 들었을 법한, 나이 지긋한 보급 창부의 대사 나부랑이 같은 걸 다 흉내내며 수다스러운 걸 보면. 나는,
"벗지."
하고 말했다. 그녀는 좀 놀란 듯했다.
"커피 안 드시구요."
"커피가 뭐에 쓰는 약이지?"
"어머?"
나는 여자가 이런 식으로 놀라움을 나타내며 짓는 맹추 같은 표정을 좋아한다. 나는 전등을 껐다.
"어머? 어머?"
그녀는 내 갑작스럽고 광포한 껴안음에 놀라며 즐거운 탄성을 내질렀다.
"가만, 가만, 벗을께요."
우리는 어둠 속을 더듬어 침대로 갔다. 그녀는 유리 그릇처럼 차가운 살결을 가지고 있었다. 먼젓번애도 나는 그녀의 그 차가움에 탐닉했었다. 그녀의 차가움은 이를테면 더운 것을 부르는 차가움이라 부률 만했다. 구석구석 나는 그녀의 차가움을 탐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탐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나는 잘 수행할 수 얼었다. 그녀는 침착한 태도로 내 등의 땀을 훔쳐 주고 나서 자기 쪽에서 돕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아등바등 싸울 의사를 잃었다. 위치가 바뀌고 그녀의 나를 돕는 행위가 더욱 적극적으로 되었으나 나는 이제 이미 여자와 함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우습다, 정말."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군요?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내심 깊게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왔다. 그 눈빛은 (별일이야) 또는 (어머?)하는 그 맹추 같은 표정을 띤 것이었으나 나는 그녀가 조금도 귀엽지 않았다. 내 그러한 심정을 눈빛에서 읽어 냈던지 그녀는 단념하는 태도로 가만히 내 옆에 누웠다. 나는 생각해 봤다. 아까의 그 사건이 나를 불능으로 만든 것일까? 그 사건이 지금에도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사건은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내가 와 있는 곳은 그럼 어디인가 하고. 그러나 결론을 얻을 수는 업었다. 머릿속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그것을 걷잡지 못한다는 무력감으로 들끓었고 옆에 말없이 누워 있는 미라의 존재가 또한 서럽게 나를 압박해 왔다. 나는 침대에서 말없이 빠져 나와 마당의 펌프가로 나갔다. 마당엔 아무도 업었다. 물을 뽑아 올려 머리 위에서부터 대여섯 번 뒤집어 쌨다. 천연수의 찬기가 뼛속까지 스며들면서 턱이 떨려 왔다. 기분이 좀 걷히는 것 같았다. 방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어둠 속을 더듬어 미라를 껴안았다.
"아! 차거! 어머? 어머?"
탄성을 지르며 몸을 펄쩍 빼려다가 이내 그녀는 내 몸에 감겨 왔다.
"근사한 사람!"
그녀는 기쁨에 들떠 말했다. 나는 설움 같은 감정의 밀물이 전신으로 밀러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수행할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동네에는 미군들의 금족령이 내려졌다. 한국인들의 미군 부대 내 출입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노무자와 종업원들까지도 아침 출근이 허가되지 않았다. 전날 저녁부터 이튿날 자정까지의 외출증을 가진 미군들도 아침에 모두 헌병들에게 불리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군표의 개신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예측해 똔 바라고도 말하였고 그러나 설마했었다고도 말하였다. 아침에 동네로 나온 헌병으로부터 직접 귀뜀을 받았다면서 그것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손해를 가능한한 최소로 하는 것만이 남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인이 군표를 갖는 것은 불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군표를 가진 사람들은 적은 수가 아니었다. 군표는 여러 가지 편리한 쓸모를 가지고 있었고 불법을 무릅쓸 만큼의 화폐로서의 우수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제 결흔한 여자들을 통해서나 안면 있는 미군들을 넣어서 PX로부터 이곳 ㄷ이나 서울의 수요층으로부터 절대적인 선호도로 사랑 받고 있는 고급 물건들을 사 내오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바로 그 군표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또 그것은 화폐 자체로서도 장사가 되었다. 미군들에게 물건이나 한국 화폐로 바꿔 주고 간을 낮게 매겨서 받은 군표는 그 군표를 수집하는 사람이나 서울의 암시장으로 가져가면 거기에 또 이윤이 따르는 것이었다. 미군들도 동네에서는 당연히 한국 화폐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부대에서 채 바꿔 가지고 나오지 못한 경우 거의 ,아무런 고려 없이 군표를 사용하였다. 또 구태여 바꿔 가지고 나온다는 수고를 치르지 않고 그냥 가지고 나와서 사용하는 미군들도 많았다. 그들은 둘레의 한국 사람들이 군표를 푸대접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군표 개신(改新)은 기지 주변이나 자국 군대가 주둔해 있는 나라에 그런 식으로 불법 거래되어 편재해 있는 군표들을 사멸시켜 버리는 데에도 뜻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국을 위한 현실적 이익도 될 터이었다.
온 동네가 바짝 긴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군표를 가진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상호 정보를 교환하거나 다소라도 손해를 줄여 보려고 동분서주했다. 남편의 임기를 기다리기 위해 국제 결혼을 하고도 아직 동네에서 살고 있는 여자들을 서둘러 찾아다녔고 미군들과 월 계약으로 살고 있는 여자들에게도 손을 썼다. 헛수고인 줄 알면서도 미군 부대 정문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릴없이 철조망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건져 낸 것은 아주 적은 액수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전혀 손해를 막지 못한 사람들은 낙담에 빠졌다. 윗동네의 시카고 클럽에서는 천 불을 건지고서도 2천 불을 손해봤다는 소문이었고 만하탄 양복점 주인은 1천 5백 불을 고스란히, 레코오드 가게를 겸하고 있는 우씨네 폰 숍에서는 바로 어제 3천 불을 서울로 내다 넘겼기 때문에 8백 불만, 쓰리 쎄븐 샌드위치 가게 여주인은 9백 불을 고스란히 손해봤다는 것이었고, 그리고 어느 클럽의 아무개가 몇 백 불, 양키 물건 장수 아주머니 누가 백 몇 십 불, 어느 약방의 누가 몇 십 볼, 이 서기(書記) 아무개가 몇 불, 또 누가 얼마, 누가 얼마, 손해봤다더라 하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다.
당숙은 모두 4백 90불을 가지고 있었는데, 3백 10불을 손해보았다. 백 80불을 건진 셈이다. 안채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여자들 가운데 결혼한 여자한 사람과 미군과 계약으로 살고 있는 여자 몇 사람이 자진해서 그 돈을 나눠 들고 나갔던 것인데 당숙네 집에서만 9년을 살다 올 봄에 결혼했고 내일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인 순옥이 철조망 근처를 집요하게 배회하다가 그녀의 키다리 남편에게 간신히 수교할 수 있어서 백 불을 건지고, 숙자 , 케니 두 사람만이 유사한 노력으로 80볼을 더 건졌을 따름인 것이다. 다른 여자들은 모두 실패였다.
클럽에서는 물론 군표를 본래 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술값으로 지불하는 군표를 거절할 경우 그 미군은 다른 클럽으로 가게 마련이며, 뿐만 아니라 불편한 클럽 또는 거만한 클럽이라는 나쁜 감정마저 갖게 하여 클럽으로서는 이중의 손실을 감수해야 하게 된다. 거기에 군표 자체가 갖는 화폐로서의 우수성마저 감안한다면 손해는 삼중으로 되는 것이다. 아마 이런 것들이 당숙으로 하여금 그만한 액수의 군표를 갖고 있게 했던 까닭인 성싶다.
당숙은 손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익숙한 듯해 보였다. 비교적 담담해 보였다고나 할까. 손해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는 건 평생을 통해 그가 얼마나 많은 손해들과 접촉해 왔는가를 말해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전에도, 그리고 이곳에 와서조차 내가 당숙과 자리를 같이할 기회는 이상하게도 매우 적었으나 당숙에 대한 나의 인상은 아주 강하고 따뜻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나는 혼란하고 어두운 시대를 온 몸으로 견디며 살아온 한 남자가 중년 이후에 갖게 된 앎에 대한 달관과 고로 인한 어떤 자신 같은 것에서 우러나는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나는 생존시의 아버지로부터 다소 모멸의 어조가 섞인, 당숙이 일제 때 한만 국경을 넘나들며 아편 장사를 했다는 얘길 들은 기억이 있다. (얄루 를럽), 즉 압록강 호올이라는 옥호는 당숙의 그러한 청년 시절의 파란 중첩한 생활에 대한 추억의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편을 항문 속에 감추었다던가. 그러고도 더러 왜놈 헌병들에게 들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더러는 감옥엘 가기도 했다던가. 그런 얘기들이 내게 작용한 탓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당숙은 손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성싶었다,
그러나 동네에는 그 손해들로 인한 후유증이 커 가라앉지 않았다. 양키 물건 장수 어느 아주머니는 앓아 누웠다는 소문이었고. 어느 폰 숍의 주인 누구는 홧김에 애꿎은 마누라를 구타했다는 소문이었으며, 포주 여편네 아무개는 미군 부대 앞에 가서 군표들을 발기발기 찢어 던졌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졌다. 물론 군표를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농담 삼아 입에 올렸다.
그런데 정작 알려졌어야 할 끔직한 소문은 그 군표 소동에 가려 저녁때에 가서야 밝혀졌다. 기옥이라는 여자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미군들은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야 비상이 풀려, 평소보다 좀 뽐내는 표정으로들 동네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누구의 입으로부터 비롯됐는지 알 수 없는 그 소문은 그때부퍼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도 아침에 잠깐 장씨에게 물어 보았을 뿐 (장씨는 경찰관 파견소에 연락만 해 주고는 돌아와 잤기 때문에 그 뒷일은 모른다고 했었다) 곧 그 군표 소동에 휘말려 어젯밤의 그 사건에 대해선 실상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시피 했었다. 그런데 저녁때, 비상이 풀린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클럽을 열어 놓고는, 뽐내며 나타나는 미군들을 눈인사로 맞아들이는 한편 여자들의 검진 패스를 일일이 확인하는 북새통 중에 방금 내게서 패스를 받아 쥐고 클럽 안으로 들어가며 주고받는 두 여자의 대화가 내 귀를 때렸다.
"니 들었나? 간밤에 깜둥이가 사람 직있닥 하는 거."
"응, 여자를 목 졸라서 죽였다며? 기옥이란 애라든가? 바바상 클럽에서 후로 쇼 하던 애라며?"
"아이고 몸서리야."
나는 순간 전신에 차가운 돌기들이 쭉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어이! 뭐라구?"
"여태 몰랐어요? 지금 한창 그 얘기루들 술렁거리는 판인데."
언제 나타났는지 옥화가 내 앞에 검진 패스를 내밀며 말하고 있었다.
"응, 어떻게 됐다구?"
"깜둥이가 저하구 살림하던 여자앨 목을 졸라서 죽였대요. 지난밤 누구의 신고를 받은 순경들이 헌병대에 연락해서 같이 수원 곰보넬 들이닥쳤다는데 그전 벌써 일이 벌어진 뒤더래요. 죽여서 벗겼는지 벗겨 놓구 죽였는진 모르지만 여자앨 홀딱 벗긴 채 침대 위에 반듯이 뉘어 놓고는 저두 홀랑 벗은 채 그 앞에 꿇어앉아서는 멍하니 죽은 앨 들여다보구 있더라는 거예요. 같은 집에 사는 애들이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다가 질겁을 해서 도망쳤대요. 깜둥이의 옆에는 이발소에서 쓰는 면도칼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건 사용하지 않았는지 여자애의 몸엔 상처 하나 없더라는군요."
마치 방금 들은 영화 얘기라도 옮긴다는 듯이 말솜씨를 부려 지껄이는 옥화의 입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헌병들이 수갑을 채우는 데두 반항 한 번 하지 않더래요.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 웟 해픈, 웟 해픈(무슨 일이람, 무슨 일이람) 하구만 중얼거리더라나요. 오늘 아침에 O시(市) 검찰청으로 넘겨졌대요. 사건을 한국 검사가 맡는대나 봐요."
나는 메스꺼움을 참지 못해 클럽에서 뛰어 나갔다. 그리고는 안채로 통하는 클럽 옆의 샛골목에다 정신없이 토해 놓고 말았다.
그날 밤 나는 아무의 방으로도 가지 않고 내 방에서 잤다. 밤새 악몽에 가위눌리며 쉴새 없이 깼다,
한 기옥의 장례식은 사흘 뒤., 이곳 여자들의 자치 조직인 ‘씀바귀회’ 장(葬)으로 거행되었다.
가문 여름날의 아침 햇볕 속에 푸른 차일을 친 상여가 나타나자 동네 사람들은 길 좌우로 늘어서서 말없이 장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상두꾼 모두다 화장 지우고 소복한, 바로 지금 상여 속에 누운 그 여자의 동료들이었고 역시 소복하고 뒤따르는 30여 명의 여자들은 울긋불긋한 만장들을 치켜들고 있었다.
"기옥아 잘 가라. 씀바귀는 써."
"나중에 만나."
"기옥! 안녕!"
"니가 가는 곳은 천당! 우리가 남는 곳은 지옥!"
"용서해 줘. 우린 널 위해 아무 것도 못해 줬어."
"꿈에라도 와 줘 응?"
바람 한 점 없는 카문 햇볕 속에 조용히 움직여 가는 만장들 사이로 ‘씀바귀회’ 회장이 메기는 상엿소리가 드높고 구성지게 울리기 시작했다. 목의 굵기가 좀 가는 여자의 허리통만큼은 되는 그녀의 목소리는 우람차고 구슬펐다,
"이팔 청춘 호시절에 니는 어이 홀로 갔노."
여자 상두꾼들이 받는 후렴 소리가 일제히 뒤따랐다.
"어어허 어어화."
"삼신산 불로초를 어데 가면 구하겠노, "
"어어허 어어화."
"봄은 가면 또 오는데 이 길가면 왜 못 오나."
"어어허 어어화."
"화류 생활 멘멘 년에 남는 건 이 길뿐가."
"여어허 어어화."
"북맹이 멀닥해도 내 집 앞이 북맹일세."
"어어허 어어화."
"씀바구야 씀바구야, 어껴 니만 밟히쌌노."
"어어허 어어화."
"부모 형제 소식 알면 땅을 치고 통곡켄네 "
"어어허 어어화."
"니 팔재다 내 팔재나 갈보 팔재 허맹쿠나."
"어어허 어어화 "
"어어허이 어어허이 갈보 팔재 허맹쿠나."
"어어허 어어화"
"그란해도 설운 목숨 비명 횡새 웬말이고 "
"어어허 어어화."
"베고파 몸판 것이 그다지도 죄란 말가."
"어어허 어어화 "
"양갈보라 왜 웃으며 양공주라 왜 침 뱉소."
"어어허 어어화."
"서럽고도 설운 목숨 씀바구야 잘 가거라. "
"어어허 어어화."
"더럽기도 더런 팔재 훌훌 털고 잘 가거라."
"어어허 어어화."
골목골목에서 뒤늦게 쫓아나온 여자들이 가담함으로써 장의 행렬은 더욱 길어졌고 상여가 동네를 벗어나 미군 부대의 정문께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백여 명을 훨씬 넘는 대행렬이 되었다. 그녀들은 -씀바귀회원-이외 사람외 장의 행렬 가담은 일체 허용하지 않았으나 많은 구경꾼들이 행렬을 뒤따랐다. 나도 장씨와 함깨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 묵묵히 행렬을 뒤따랐다. 행렬이 미군 부대의 정문께에 이르렀을 때에야 나는 장씨에게 물었다.
"장지가 어디랍니까?"
"참, 김형은 여자들 장례식을 처음 보시죠? 장지는 토산이라구 저 정문 앞에서 꾸부러져서 저기 보이는 다리를 건너 다시 한참 올라가야 하는 벌거숭이 산이랍니다. 이제 보세요. 한바탕 하구 갈 겁니다. 반드시 여기서 한바탕 하구야 떠나는 게 관례니까요. 오늘은 아마 더 볼 만할 겁니다."
아닌게아니라 상여는 미군 부대의 정문 앞에서 딱 멎어 버렸다. 정문의 미군 헌병이 긴장한 표정으로 상여와 장례 군중들을 주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숨을 눈으로 쉬는 듯한 분노의 긴장이 일순 여자들 사이에 펴져 흐르는 듯했다. 짧은 순간의 그 침묵을 뚫고, 상엿소리를 메기던 ‘씀바귀회’ 회장의 우람찬 목소리가 솟아 올랐다.
"미 X사단은 우리 한 기옥 양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상하겠는가? 책임자가 나와서 답변하라!"
한 여자가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여 크게 외쳤다. 그러자 백여 명의 여자들이 한꺼번에 외쳐 대기 시작했다. 어떤 여자들은 영어와 뒤섞어, 또 다른 많은 여자는 한국어로 외졌다.
"사단장이 나와서 답변해라!"
"우리 기옥이의 목숨을 돌려다오!"
"양코백이 새끼들아, 빨리 대답하라!"
"카맨더 나와!"
"당장 나오라구 해!"
"느그들한테 개죽음 당할라고 X파는 줄 아나!"
"씨발놈들 뭐 잡겄다고 꾸무럭꾸무럭허여!"
헌병들이 긴장한 태도로 무언가 의논하는 모습이 보였고, 언제 연락이 취해졌는지 무장한 헌병들이 두 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정문께로 달려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여자들은 무엇에 자극 받았는지 상여를 멘 채 정문으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했다.
트럭에서 뛰어내린 무장한 헌병들이 상여를 막아섰다. 여자들은 계속 밀고 들어가려 했고 헌병들은 필사적으로 이들을 제지했다. 두 트럭 분의 헌병이 더 증원됐고 불어난 저지력에 의해 더 이상 상여를 밀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상여의 후미 쪽에 있던 여자들로부터 돌팔매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돌팔매는 연달아 빗발치듯 헌병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격렬한 돌팔매질에 의해 상여는 몇 발짝 더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 미군치고는 작달막한 체구의, 고급 장교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지이프차를 타고 나타났다. 지이프차에서 내려선 그는 빗발치는 돌팔매에도 불구하고 뚜벅뚜벅 상여 앞으로 걸어와서 잠시 고개 숙인 뒤 곧 거기 높직한 정문 앞 교통 정리대 위로 올라섰다. 돌팔매가 멎었다. 한국인 통역관이 그 옆에 따라 올라 섰고, 그는 곧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이 부대의 참모장인 윌리엄 바커 대령입니다, 마침 사단장께서 중요한 회의차 나가시고 부대 안에 계시지 않으므로 내가 부대를 대표해서 여러분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나왔습니다."
통역관이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했다. 여자들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그것을 들었다.
"이번 사건은 한 미국 병사의 범죄로 인해 한국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우호적인 감정을 크게 손상시키게 될는지도 모르는 사건으로서 우리 부대로서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한 가지 여러분이 이해해 주셔야 할 것은 어느 병사 개인이 저지른 범죄가 우리 모두를 여러분이 미워하게 되든 원인이 돼서는 이에서 더 큰 불행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범죄를 저지른 병사는 법에 의해서 엄격히 처벌될 것입니다, 한국의 법정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그것으로써 우리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병사들에 대한 교육과 감독에 철저하지 못했음을 시인하고 여러분에게 사죄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과 감독에 더욱 철저를 기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여러분의 경건한 장례 의식을 돕는 뜻으로 약간의 금액을 준비했습니다. 물론 이것으로 여러분 친구의 불행한 죽음에 대한 보상을 감히 삼으려는 건 아닙니다만 여러분의 슬픔에 우리가 표하는 위로하는 마음의 일부로 생각해 주실 수 있다면 받아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친구의 불행한 죽음에 대해서 진심으로 슬퍼합니다. 그리고 사죄합니다. 댕큐."
그는 말을 마치고 내려서자 정중한 태도로 ‘씀바귀회’ 회장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그리고 부관인 듯한 젊은 장교 한 사람이 그녀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었다.
"얼마냐? 얼마!"
하는 소리가 후미 쪽에서 빗발치듯 일어났다.
“2만 원이다.”
하는 소리가 앞쪽에서 나자,
"2만원이 뭐꼬? 더 돌락해라!"
하는 소리가 나고, 이어,
"우리가 돈 받자고 하는 일여. 이것이?"
하는 소리도 났다. 그러자,
"됐다. 그만 가자."
하는 소리와,
"2만 원이 뭐야? 그걸루 뭘 하라는 거야?"
하는 소리가 엇갈려 났고,
"아, 방금 참모장이 허는 소리 못 들었남? 그만 가제."
"그래, 참모장이 사과했으니 양보하자."
하는 소리들이 났다. 여자들의 분위기는 대체로 그쯤하고 떠나자는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상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헌병들은 긴장한 자세로 대오 정연히, 상여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씀바귀회’ 회장이 메기는 만가 소리가 구성진 가락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씀바구 한 뗄기에 2만 원이 웬말이고."
"어어허 어어화."
"씀바구야 씀바구야 짓밟힌 씀바구야.
"어어허 어어화."
"노잣돈 모자리다 한탄 말고 잘 가거라.
"어어허 어어화 "
"어채피 우리 모두 찢긴 팔재 아니더냐.
"어어허 어어화."
"잘 가거라 잘 가거라 우리 씀박 한 기옥아."
"어어허 어어화 "
상여가 다리께로 굽어들자 거기서부터 후미의 여자들이 뒤따르는 구경꾼들을 막았다, 장씨가 내게 설명했다.
"여기서부터 자기네들끼리 갑니다. 장지에 도착하면 무덤도 자기네들끼리 파고 하관도 자기네들 손으로 마치고는 봉분도 자기네들 손으로 한답니다. 다 끝난 다음엔 술들을 진탕 퍼마시고 한바탕 뒹굴며 난장판이 벌어진다더구뇨. 나두 들었죠. 이따 저녁에 보세요. 저 횐 옷들이 왼통 진흙 투성이가 돼서들 내려올 겁니다 "
구슬픈 만가 소리를 남기며 상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여름날 가문 햇볕 속에 횐 옷 입은 여자들의 긴 대열이 눈물 자국처럼 그 뒤를 잇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정말 장씨의 말대로 장지에서 돌아온 여자들의 진흙 투성이 옷과, 만취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클럽 문을 마악 열고 문짝을 버팀 돌로 고정시켜 놓으며 허리를 펴는 내 시야에, 골목 위쪽으로부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만취한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침의 그 희던 옷들이 하나같이 온통 진흙 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얼굴들은 먼지와 눈물, 그리고 취기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녀들은 난생 처음으로 먼 길을 걷고 돌아오는 국민학교 1학년 생도들의 소풍 대열처럼 지치고 힘없어 보였으며, 말없이 다만 비틀거리며 골목을 내려왔다. 그 중 한 여자가 역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옥화였다.
"흥, 이만하면 꼴 좋죠? 아마 입맛 떨어질 거예요."
그녀는 술내가 확확 끼치는 입으로 말하였다. 진흙 투성이 저고리의 옷고름 한쪽이 어디론가 털어져 나가고 없었고, 치마도 거의 엉덩이까지 흘러 내려와 있었다.
'옥화도 갔었군."
"흥, 딴청 말아요. 요즘 아주 재미가 조오으시다던데. 누구한테 댕겨요? 나한테만 살짝 말해 줄 수 없어요? 잡아먹지 않을 테니."
"무슨 소리야?"
"저런 능청, 첨부터 사람이 어째 내숭스럽더라니. 그만둬요. 그만둬. 내 X싫어 딴 X쫒아간 걸 전들 뭐라겠수? 하지만 말야, 사람이 의리가 있음 어쩌다 코빼기 한 번씩은 들여놔야지."
"취한 모양인데, 옥화. 가서 쉬라구."
"흥, 쉬라잖아도 쉴 테니 염러 말아요. 쉬다 못해 푹푹 썩을 테니."
"옥화!"
"좋아요, 좋아."
그녀는 돌아설 듯 발을 바로 놓으려고 비틀거리다가 내 쪽으로 몸을 기대 귓가에 입을 갖다 대더니 한껏 작은 소리로 소근거렸다.
"이따 올래요? 기다릴께. 나 오늘 정말 죽겠어.”
그러고 그녀는 술기운으로 충혈된 눈을 들어 내 두 눌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이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 순간 당장 그 자리에서라도 그녀를 껴안아 주고 싶은, 강한 설움 같은 충동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에게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조금 웃어 보인 듯했다. 그리고는 말없이 획 돌아서서 비틀걸음으로 내게서 떠났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그녀에게 가지 못하였다. 초저녘부터 서서히 미열이 있기 시작하더니 클럽이 문을 닫을 무렵부터는 전신이 모닥불 속에 든 듯한 고열에 휘감겨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밤새 어두운 내 방에 누워 고열과 그리고 마음속의 혼란과 싸웠다. 몸의 고열은 어쩌면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비롯한 것인지도 알 수 얼었다. 찬 방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지는 고열과 혼미 속에서, 나는 내 가족의 참혹한 주검들과 군대의 유격 훈련 조교가 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가축 같은 몸의 혹사와 벌거벗은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칼날을 휘두르던 흑인 병사의 광포한 눈빛과 그리고 흰 옷 입은 여자들의 끝없이 긴 장례 행렬이 내 흠뻑 젖은 몸 위를 밟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순서가 뒤죽박죽인 슬라이드처럼 어지러이 되풀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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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흘 뒤에 일어났다. 사흘만에 나와 보는 동네는 며칠 동안 가렸던 안대(眼帶)를 떼었을 때처럼 좀 눈부셔 보였으나 새로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전히 가문 햇볕 속에 평온하고 태연했다. 마침 봉급날이었으므로 일찍부터 미장원이나 양장점을 드나드는 여자들의 서두르는 모습과 어딘지 들떠 보이는 표정에 의해 동네는 오히려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군표 소동이니 한 기옥의 죽음이니 하는 것들의 그림자라곤 이제 동네에,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조금도 납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이발소로 가서 그 동안 자란 수염을 대강 면도질한 다음 ‘씀바귀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무실이라고 해야 따로 건물이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고 회장이 세 들어 살고 있는 두 개의 방 가운데 하나를 그렇게 사용하고 또 그렇게 부르는 것뿐이었다.
갈색 계통의 비닐 장판이 깔린 방바닥 위에 나무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초록색 천을 씌운 소파 하나가 벽 쪽으로 놓여 있었다. 입구에서 마주 보이는 바람벽 위에는 어느 공공 관서에서도 볼 수 있는 태극기 하나가 액자에 넣어져서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는 흰종이에 먹으로 씌어진 무슨 격언류 같은 회원 맹세 비슷한 것이 서투른 솜씨로 붙여져 있었다, 좀 큰 글씨의 (씀바귀회 맹세)라는 제목 밑에 얼핏 눈에 들어온 것으로는,
1.씀바귀는 난잡한 복장을 착용하지 않는다.
1.씀바귀는 노름을 하지 않는다.
1.씀바귀는 낭비를 하지 않는다.
1.씀바귀는 빚을 싫어한다.
1.씀바귀는 자기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는다.
1.씀바귀는 속이지 않는다.
1.씀바귀는 항상 서로 돕는다.
등등의 귀절들이 있었다. 바로 옆방은 침실인 모양이었고, 마침 그 방의 주인이며 또 그 사무실의 책임자인 회장 여인은 책상 앞에 그 억세 보이는 얼굴을 쳐들고 앉아 맞은편 의자에 앉은 두 나이 어려 보이는 여자를 향해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과 고개로 인사하고 나서 잠깐 미소 띄운 눈짓으로 가리키는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나 때문에 잠시 중단했던 얘기를 다시 계속했다.
"그라고 또 미성년자는 가입을 못 시키 주기 돼가 있어요. 아무리 내한테 이야기해 봐도 소용이 없닥 하이."
나이 어려 보이는 두 여자 중 하나가 말했다.
"그렇지만 홀에서는 회장님한테 가입 확인서만 받아오면 등록을 받아 주겠다구 그러던데요. "
"크라부 사람들이사 한 사람이라도 더 받을락 하지. 뭣이 어찌됐든 그 사람들이사 즈그 장사만 잘되면 그만이니께. 내는 못 하겠소. 그리 알고 가보소."
그녀는 화난 듯이 잘라 말하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두 여자도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들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인사도 업이 방을 나갔다. 미성년자? 그렇게까지 어린가? 화장한 여자들의 나이는 짐작을 할 수 없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책상에 팔굽을 얹고 앉으며 나를 향해서 물었다.
"얄루 크라부에서도 누구 가입시킬라고요?"
"아, 아닙니다. 그저---"
"글씨, 여자 가입시킬락 하면 장씨가 올건데. 여게 처음이지요?"
“네."
"보시요, 저런 아이들이 옵니다. 하내는 열 일곱 살이고 .하내는 열 아홉요. 우리 같은 사람이사 난리 통에 굶지 못해 우쪄우쪄 이리 왔닥 하지마는 요즘 아이들은 머한다고 자꾸 이런 곳에 찾아오는지 모리겠는기라요. 한 달에도 저런 아이들 두시 번은 보는기라요. 우짜면 좋겠는교? 제발 얄루 크라부에서는 저런 아이들 오면 일로 보내지 말고 좀 쫓아 주소."
"저의 클럽에서두 미성년자 가입 의뢰를 해 오던가요?"
"그기 아니라, 얄루 크라부에서도 꼭 그랬다는 기 아니라, 앞으로라도 그런 일이 없도록 좀 협조해 달라는 이야기지요. 얄루 크라부에서는 찬조금도 잘 도와주시고 이번 장례식 때는 특벨히 또 2만 원씩이나 보태 주셔 -당숙이 그랬었었구나 - 우리 모두 고맙기 예기고 합니다만 정말 크라부 경영하시는 분들이 너무 협조를 안 해 줍니다. 미국 사람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을 여게다 내놓고 가게 하는 것이니께 아무래도 좋닥 하지만 어느 때는 정말 야속한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 장사도 좋고, 미국 사람들 돈도 좋고 다 좋지만 생각은 좀 해 가면서 장사했임 좋겠는 기라요. 물론 댁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서도."
"네,,,,,,. 그런데 전 회장님을 뵙는 게 그전에 한두 번 먼발치에서 뵌 것하구 엊그제 장례식 때 좀 똑똑히 봤을 뿐이고 직접 이렇게 만나 뵙는 건 지금이 처음인데, 회장님은 절 알구 계셨나요?"
"얄루 크라부에 계신 분이란 정도는 알고 있지요."
"그러셨군요. 전 계가 얄루 클럽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어떻계 아시나, 하구 놀랍게 생각했었습니다. "
“ㄷ에 오신 지 이제 달포 남짓 돼앴지요?"
"아니, 어떻게 그런 것까지 ?"
"하하, 이런 일으 회장이라고 맡고 보니 -애서 일어나는 엔만한 일은 다 알게 되네요. 놀랐지요? 얄루 크라부 주인 아저씨으 조카님 된닥 하는 것도 알고 있답니다."
순간 나는 당숙이 클럽 경영자라는 이유와 한테 묶여 이 체격이 큰 여자로부터 야유를 당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여 그녀를 좀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악의 없는 미소를 내게 보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우짠 일로?'
하는 듯이. 나는 좀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엊그제 장례식을 보고 나서 여기도 한번 와 보고 싶고 회장님도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만나 뵈면 무슨 얘기든 할 얘기가 있을 것 같고 뭘 좀 여쭤보구 싶은 것도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뵈니까 어쩐지 쑥스러운 느낌이 드는군요."
"우리가 지내는 장례식 아마 처음 봤지요?"
“네.”
"앞으로 자주 보면 날 만나고 싶은 생각 같은 것 안 하게 될껍니다. 처음 보면 누구나 좀 마음이 안됐는가 봅디다.”
"자주 있나요?"
"평균 한 달에 한 번쯤이락 하면 과히 틀리진 않을 껍니다. 우리 회원이 현재 1천 3백 14명인데 병들어 죽는 회원 있제, 자살하는 회원 있제, 겨울철로는 연탄 까스 맡고 죽는 회원 있제, 또 이번처럼 사고로 죽는 회원 있제 하이, 죽는 사람 수로 따지면 회원 수가 많이 줄어야 할건데 그래 줄지도 않는 폭이지요. 미군들 숫자는 날로 줄고 말이지요. 딴 지방에서도 오고 식모 하던 처녀나 크라부에서 웨이트리스 하던 여자들이 우짠 일인지 이것도 직업이라고 전업도 하고, 해서 그래 되는 모양입니다.”
"자살하는 여자들이 많습니까 ? "
"자살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도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여자들으 숫자에 비긴다문사 실지로 자살하는 여자으 수는 얼매 안 된닥 할 수 있겠지요. 해도 평균 두 달에 한 명 꼴은 자살자가 나옵니다. 빛 때문에 자살하는 여자, 신병 비관으로 자살하는 여자, 계속으로 놓은 얼라, 미국으로 입양시키 보내고 자살하는 여자, 본국 들어가서 결혼 수속해 보내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고 귀국한 미군한테서 소식 한자 없다고 자살하는 여자, 벨벨 짓을 마 해 봐도 미군이라곤 하나도 안 붙어 포주한테 구박받다 자살하는 여자,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꽁꽁 모아놓은 돈 도둑맞고 자살하는 여자, 한국 사람 기둥서방이 딴 여자한테 붙었다고 자살하는 여자, 벨벨 여자가 다 있지요. 우리가 사정을 미리 알아 우쪄우쪄 도와 가지고 자살까진 가지 않게 뒨 여자도 없진 안 합니다만 극소수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장례식 정도 지내 주는 기 고작이지요."
"어떻계 ‘씀바귀회’의 조직을 잘 좀 활용하는 방법이 업을까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조금이라도 개선된 상태에서."
그녀는 가만히 웃었다.
"보시요, 내도 양갈보요. 뽑아 주이 회장질을 합니다만 먹고살아야 해요. 이 일에만 우찌 매달릴 수 있겠는뇨? 더구나 내를 비롯해서 모두가 일자 무식인데다가 공부 좀 혔닥 해도 다 그기 그기지요. 회원으로 가입만 됐다뿐이지 대다수의 여자는 이 회에 대해서 관심도 업는 기라요. 한 달에 한 번 있는 월례회가 성원이 될라먼 몇 시간 걸리는지 압니까? 자그만치 두 시간이 걸려야 성원이 될똥말똥이라요 생각해 보시요, 안 그렇겠소? 누가 죽기락도 해야 제 서름도 포개고, 겸사겸사 우쩨 좀 모이지,,,,,,. 우째 좀 도와주고 싶은교?"
“네, 제가 도울 일을 가르쳐만 주시면."
그러나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엔 별안간 눈물이 가득 괴어 .오르기 시작했다.
"벨, 순진한 청년 다 있구마. 그만 두소. 크라부 일이나 잘 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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