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껍질 -전상국
망 초 1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이곳 풍암 계곡 입구까지 꼭 2시간 30분이 걸렸다. 버스의 종착지인 반곡리까지는 아직 두어 마장을 남겨 놓은 지점이라고 했다. 대부분 십대들인 등산객들이 기성을 내지르며 와그르르 쏟아져 내리자 버스 속은 금세 텅 비었다.
"아저씬 반곡까지 갈 거예요? "
키가 자그마한 안내원이 내 앞으로 손을 내밀며 핀잔주듯 말했다. 그럴 것이 등산 차림을 한 사람이 남들이 다 내리는 산 입구에서 내릴 생각은 안하고 있으니 말이다.
"반곡리에서 서울 가는 막차가 몇 시에 있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나는 황황히 주머니에서 버스 표를 찾아 건네며 몸을 일으켰다.
"네 시 반이오."
밀치듯 그렇게 안내원은 나를 땅바닥에 내던졌고 버스는 빈 차체를 덜컹거리며 산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이쯤에서 내리기를 잘했다 싶었다. 막상 이 시간에 반곡리까지 곧장 들어가 봤자 초행인 그 마을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얘기인가. 낯선 사람을 향해 개들이 짖을 것이다. 처음에는 한 마리가, 그리고 결국에는 온 마을의 개들이 다투어 짖으며 내 뒤를 따르겠지. 개를 불러들이는 시골 아낙네들의 낮선 사람에 대한 경계하는 눈빛, 그네들의 수군거림, 그 해 여름, 열 세 살의 나이로 마을을 지나며 그런 따돌림을 수없이 당하지 않았던가.
이 난리에 혼자서 어디루 가는 게여?
내게 보리밥 몇 술을 물에 말아 건네며 사람들이 묻곤 했다.
우리 할아버지한테 가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반곡 마을에 들어서서 내 아래위를 훑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가 내 아내의 고향입니다.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고개를 저어 어리석은 내 자신을 비웃었다. 내 아내의 고향,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요? 어쩌자는 것인가. 이 쩡쩡한 여름날 햇볕 속에서 나는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이럴 때 나는 항상 외로움을 느낀다. 나 자신을 누구에게도 접목시킬 수 없다는 이 막막한 단절감.
그러나 곧장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 낯선 시골 신작로 위에 내던져진 첫 느낌은 몹시 눈이 부시다는 것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쩡쩡 해맑은 하늘과 아침의 햇살이 아직 닿지 않은 그 깊숙한 산그늘의 은밀스러움과 온통 푸른 산 속을 꿰뚫으며 뻗어나간 하얀 신작로 바닥에 부딪혀 되반사하는 햇살들의 코오러스는 확실히 상쾌하고 눈부셨다. 길 밑으로는 풍암 계곡과 반곡리 쪽에서 각각 발원한 두 개의 실개천이 시나브로 합류하면서 보름여의 장마 뒤라 제법 큰 여울을 이루고 있었다. 물 밑바닥 돌이끼까지 선명하게 비치는 물 속에 이미 등산객 서넛이 발을 담그고 서서 얼굴에 물을 끼얹고 있었다.
버스 속에서 그렇게 시끌하게 들리던 등산객들의 목소리가 산 속에서는 산의 숨소리에 빨려들어 별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네들의 원색 계통의 등산복 색깔이 자연 속에 그런대로 조화를 이루었다. 어쨌거나 그들의 존재는 폭삭 왜소해진 채 두런두런 풍암 계곡으로 오르고 있었다.
나는 계곡으로 접어드는 입구, 신작로 한 귀서리에 자리잡은 구멍가게 평상에 털쌕 주저앉았다. 둘러보니 제법 구색을 갖춘 가게였다. 주로 음료수이긴 했지만 대형 냉장고 시설까지 돼 있는 게 등산객을 상대로 톡톡이 재미를 봄 직했다.
"서울서 몇 시에 출발하셨어요?"
사이다병 마개를 빠 내게 건네며 가겟집 처녀가 물었다.
" "6시 20분.
"차암, 오늘부터 차 시간이 바뀐댔지. 그전엔 7시에 첫차가 출발했거든요. 어쩐지,"
사실 나도 7시 출발로 알고 나왔다간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이곳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 덕택에 첫차를 타게 된 셈이다.
"일요일이라 손님이 많을 거예요. 몇 시 출발하는 찬지 몰라도 좀 여유 있게 나가 보세요."
아내는 내가 등산을 간다는 말을 해도 그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걸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다. 물었더라도 나는 행선지를 엉뚱한 데로 댔을 것이다. 실상 나는 아내의 귀를 겨냥하고 며칠 전 시외버스 터미널에 전화를 걸어 팔봉산 들어가는 첫차 시간을 물은 적이 있었다. 팔봉산은 내가 가기로 계획한 반곡리와는 거의 정반대 위치에 있는 관광지였던 것이다. 아내는 사람을 의심하는 법이 없다. 그네는 내가 지금쯤 팔봉산에 있으려니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집안 일 신경 너무 쓰실 거 없어요."
다락에서 등산 장비를 내려 먼지를 떨며 아내가 말했다. 언제나 표정 없는 얼굴이다. 애들 이모 문제를 꺼낼 때면 예외 없이 이처럼 표정이 굳고 차갑다. 실상 그때는 그 일로 해서 내가 신경을 쓰는 걸 못 견뎌했다
"이건 당신 혼자 감당할 문제가 아니야,"
"그렇다고 은주 아빠가 책임질 문제도 아니에요."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했잖아."
"거짓말 말아요."
"믿어 줘, 난 그런 사람이야."
"믿고 싶어요. 그러나 사실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난 믿지 않는 거예요."
똑같은 말싸움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벌여 왔던가. 그네들이 집을 나가버린 뒤 아내와 나는 개미 쳇바퀴 돌듯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결론이 있을 수 없었다. 평행인 두 선은 언제나 만나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결합에는 처음부터 서로 영원한 타인임을 묵계로 한 바 있었다.
"아가씬 이 동네에 산 지 오래 됐나?"
"5년 됐어요. 우리 아빠가 8년 전 저 계곡을 처음으로 개발했거든요. 저기 주차장도 우리 아빠가 만든 거구요, 반곡리까지 버스가 들어가게 된 것도 다 이 계곡 때문이라구요."
근래 서울에서 한두 시간 거리의 산 좋은 물치고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버스 노선이 닿고 관광버스가 줄을 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나?"
"평일에는 별로구요, 오늘 같은 휴일에는 관광회사에서 나온 차만 해도 스무 대도 넘게 와요. 작년 여름엔 최고 마흔 대까지 왔었다구요."
"이 가게가 바닥났겠구먼!"
"그러믄요. 오늘도 끝내줄 거예요. 지금 올라간 손님들한테만 소주 열여섯 병을 판 걸요."
"여러 가지로 좋겠군. 이 공기 좋은 데서 돈도 벌고,,,,,, 더구나 아가씬 얼굴도 예쁜데다 장사 수완도 대단하겠는걸. "
"남들이 모두 그러데요. 장사 잘 한다구요. 전 서울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곧장 이리로 왔지만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서울 등산객들만 상대하는 장사라 생긴 모습대로 말솜씨도 대단한 처녀였다. 문득 깨닫고 보니 쑤와--- 매미의 울음소리였다. 나와 같은 차를 타고 온 등산객들은 이미 계곡 속으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매미 소리가 아니었으면 산골짜기 전체가 온통 정적일 뻔했다.
"아저씬 산에 안 올라가시는 거예요?"
나 자신이 생각해도 쑥스러웠다. 새삼 등산 차림으로 온 걸 후회했다.
"이상한데. 여기 와 앉았으니까 산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는군."
"네, 그래요. 아저씨 같은 사람들 더러 있어요. 기껏 차를 타고 와선 여기서 술만 잔뜩 잡숫고 그냥 가던데요."
"몸은 여기 있었지만 마음은 산 속을 헤매다가 돌아갔을 거야."
"맞아요."
처녀애가 손바닥이라도 칠 듯 화들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손님들은 술을 잡수면서도 여기 저기 전국 명산의 경치를 줄줄 엮어내던데요. 꼭 신선 같아 보였어요."
나는 문득 객적은 소리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가씨, 반곡리까진 얼마를 더 가야 하나?"
"거기 가시려구요?"
"마을 경치가 좋다던데, 한 번 돌아보구 싶군."
"아, 아저씨 지질 조사 나왔나 보다."
"지질 조사?"
"그래요. 저번 때도 사람들이 다녀간 걸요. 반곡 철광 근처를 조사해 갔대요."
"반곡리에 철광이 있다구?"
그네들의 입에서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는 얘기였다. 도대체 그들은 철광은 고사하고 반곡리 얘기를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네들은 고향 마을을 입에 올릴 경우에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어머니, 지금 잣골 잣나무들이 엄청 컸겠지요?
그래, 많이 컸을 게다.
이 정도에서 그네들은 고향에 대한 얘기를 끝낸다. 한두 마디 대화 뒤에 계속되는 그 긴 침묵이 바로 그네들이 마음껏 유영하는 고향 나들이일 것이다.
반곡까지 버스가 다닌다더라.
가 보고 싶어요.
쯧쯧---
"아저씨, 신문도 못 보셨나와. 우리 나라에서 매장량이 가장 많은 게 바로 반곡 철광이라던데요. 그런데 교통두 그렇구 여러 가지로 경제성이 없어 개발을 안하고 있다는가 봐요."
"아, 그러고 보니 어서 들은 것두 같구. 그 반곡 철광이 바로 여기였군."
"지금도 반곡에 가면 일제 시대 일본 사람들이 하던 철광터가 있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 굴속까지 들어가진 .않는대요."
"왜, 그 폐광 속에 괴물이라도 있단 말인가?"
"괴물보다 더 무서운 거예요. 귀신, 귀신이 버글버글하대요."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가겟집 처녀가 몸을 자지러지게 움츠리며 놀란 표정을 했다. 그네의 눈길이 머문 곳에 한 사내가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새마을 모자 같은 걸 모자챙이 옆으로 가게 쓰고 쩡쩡한 대낮 검정 장화까지 신고 있었다,
"어머,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구하더니,,,,,, 저 아저씨도 그 폐광 굴 속의 귀신처럼 무섭다구요."
"누군데?"
"미 친 사람이에요."
그가 가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쩐지 그의 눈빛이 정상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술까지 취해 있는 상태였다.
"어, 자네 왔군."
그가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나는 하마터면 그의 능청스러움에 넘어갈 뻔했다. 잠깐 헤어졌던 친구를 만나 하듯 그가 손을 내민 것이다. 가겟집 처녀가 미친 사람이라고 귀띔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퍽 당혹했을 것이다, 그런대로 내 쪽에서도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손은 크고 거칠었다. 자세히 보니 마흔 대여섯 장년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자네두 이번에 모가지가 짤렸다지?"
뒷주머니에서 신문지 조각을 꺼내 펴 들며 그가 능청스레 말했다, 완전히 미친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면 술 중독에 걸린 그런 상태를 미쳤다고들 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문득 그를 떠보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나, 한충굽니다."
그러면서 불쑥 손을 내밀자 그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침을 찍 내뱉었다
"미친 새끼! 지랄까지 말고 술이나 한 잔 사라."
미친놈한테 당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얘길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내친걸음, 나는 맥주 두 병을 따게 했다. 술잔을 건네자 그가 이제까지의 거오스러움과는 생판으로 허리를 굽혀 절절 기는 시늉을 했다.
"예예, 선상님, 저 잣골 사는 김택준입니다유."
잔을 주거니받거니 실로 한심한 수작을 벌이고 있는 참인데 관광차 두어 대가 들어왔다. 나이 지긋한 등산객들이 쌍쌍이 쏟아져 내렸다.
"저 고만 가 봐야 되겠구먼유. 책임이 있어 놔서유."
김택준이란 사십대 사내가 자연 보호란 마아크가 달린 모자를 바로 쓰며 내게 굽실거린 다음 관광 버스 쪽으로 휭하니 걸어갔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 앞에 불쑥 손바닥을 벌여댔다. 여자들은 질겁을 하며 뒷걸음쳤고 남자들 중에는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손바닥에 던져 주기도 했다.
"자기가 풍암산 자연 보호 책임자래요. 저런 식으로 벌어서 먹고사는 거예요."
"식구도 있나 ? "
"무슨 식구가 있어요. 단 혼자 몸이에요. 잠도 아무 데서나 잔대요. 어떤 때는 그 무서운 폐광 굴속에서도 잔다던데요."
"저 사람, 여기서 산 지 오래 된 모양이지?"
"원래부터 반곡 토박이래요. 실은 저 사람이 아까 김씨라고 한 건 가짜예요. 진짜 성은 용씨라던데요. 그러나 누가 용씨라고 부르면 칼을 들고 덤빈대요."
용씨, 용 만수. 언젠가 겨우 주워 들을 수 있었던 내 아내의, 아버지 이름이 그랬다. 얼굴도 그 사진도 본 적이 없는 내 장인 어른의 이름이 용 만수였다. 그렇다면 지금 저 미친 사람과도 전연 무관한 사이는 아닐 것이다.
"아저씨, 뱀 잡수실 줄 아세요?"
"뱀?"
나는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심씨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택준이란 그 미친 사람과 내 장인 용 만수씨가 하나의 연상 작용을 통해 얼키는 과정의 그 연상 스크린 위에 느닷없이 심씨가 나타났던 것이다. 심씨는 우리 집의 머슴이자 아버지에게 뱀을 잡아 바치던 땅꾼이었다
"뱀이 그렇게 몸에 좋은가봐요. 저기 좀 보세요. 저기 누워 계신 할아버지가 바로 뱀탕을 하는 사람이예요."
가겟집 처녀가 손가락질해 보이는 개천 건너 둑방, 한 그루 우뚝 무성한 잣나무 그늘 밑에 누워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나는 어떤 예감에 떠밀려 몸을 저절로 일으켰다.
"저 할아버지 생사탕이 서울 사람들한텐 아주 명물이래요. 단골 손님이 많대요."
나는 소주 한 병과 안주가 될 과자 서너 봉지를 꺼내게 했다. 그리고 물건값을 몰아 치렀다. 바가지를 샜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쨌든 서울보다는 퍽 비싼 편이었다.
"아저씨, 이따 점심 잡수시려면 조기 윗집에서 시켜 잡수세요. 싸고 깨끗해요."
생사탕 소개에다 이번에는 식당 안내까지 하는 처녀애를 뒤로하고 나는 개천 길로 내려섰다. 내 앞에는 좀 전에 도착한 등산객들이 외줄로 늘어서서 계곡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울긋불긋한 원색 옷이 짙푸른 녹음 속에 퍽 이색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그들 등산객들에게 막연한 적의를 느끼고 있었다. 산의 신령스러움이 그들 남녀 쌍쌍에 의해 훼손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산은 언제나 경건한 불도량으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산은 잡다한 인간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항상 포용하는 듯한 자세를 지켰다. 때로 나는 그러한 산의 의연한 침묵에 대해 견딜 수 없는 불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근래에 내가 산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일어나 호령하고 몸을 용처럼 뒤틀어 잡다한 것들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그런 위대한 산을 나는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시게요."
잣나무 그늘 밑에 누워 있던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나는 몸 전체를 옥죄던 그 긴장의 줄이 풀리자 그만 맥살이 풀리고 말았다. 그 노인이 심씨일는지도 모른다던 내 예감은 빗나갔다. 세상에 그런 기적이 자주 있는 법은 아니다.
"내려 가 보실까요."
그는 턱으로 둑방 아래 개천을 가리키며 내 눈치를 살폈다. 뱀을 먹기 위해 온 사람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냥 노인장하고 얘기나 나눴으면 해서요.
"나 같은 늙은이하고 뭘 얘길 나눌 게 있다고,,,,,,"
노인은 내가 내미는 담배를 황송해 하는 몸짓으로 뽑아 들었다. 나는 소주 뚜껑을 열고 가게에서 가져온 플라스틱 잔에다 가득 술을 채워 건넸다. 노인의 입가가 벌쭉이 벌어졌다. 술을 왜 즐기는 편이라는 걸 대뜸 알아낼 수 있었다.
"선상님, 가만히 계셔. 내 불 좀 보고 올 것이니."
그가 좀 잔에 턱으로 가리키던 개울가에 한 가닥 연기가 퍼어 오르고 있었다. 아카시아 숲이 무성한 그 언저리였다. 그 아카시아 숲에서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애가 툭 뛰어나왔다. 노인이 허리를 굽히는가 싶자 그 여자애가 냉큼 등에 업혔다.
그 노인이 심씨가 아니란 걸 확인했으면서도 나는 마음이 개운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가 심씨였다고 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을는지도 모른다.
그때 심씨는 아버지에게 매일매일 뱀을 잡아다가 바치는 일이 그의 유일한 일거리였다. 심씨는 나보다 한 살 위인 기중이라는 아들과 함께 우리 집 행랑채에 살았다. 기중이 어머니는 심씨가 우리 집에 오기 전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기중이 어머니에 대해서 아버지가 아버지 친구한테 자랑삼아 하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 고향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아버지는 서울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해 방학 때 집에 내려왔다가 이웃 마을 처녀 하나를 범했다. 물론 결혼까지 할 그런 계제가 못되는 집안이었다. 처녀가 소나무에 목을 맨 걸 마을 사람들이 살려냈다. 처녀 집안에서 들고 일어섰다. 할아버지가 일을 수습했다. 머슴이던 심씨에게 돈푼깨나 쥐어 준 다음 그 처녀
를 데리고 도망치게 했다. 그 처녀한테는 아버지가 서울서 데리고 오란다는 거짓말을 해서 데리고 떠난 것이다. 그 뒤로는 아무도 심씨나 그 처녀 소식을 듣지 못했다.
아버지가 결혼을 하고 의사가 되어 고향과는 거리가 먼 면소재지에 공의가 되어 살 때였다. 어느 날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를 찾아온 심씨라는 남자를 보았다. 등에는 대여섯 살 사내애를 업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들을 우리 집아 있게 했다. 심씨는 그 뒤부터 우리 집 안팎의 일을 거들어 주면서 살았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심씨에게 뱀 잡는 일을 시켰다. 벨 일 다 보겠군. 글쎄 공의 양반이 뱀이라면 사죽을 못 쓴다는 기여.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러고 보니께 고것이 약은 약인가베 머, 그 의원 양반 정력이 어찌나 센지 여자 서넛은 있어야 된다는구먼. 누가 뭐래도 아버지는 뱀 먹는 일을 계속했다. 면의 유지인 아버지 친구들도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아버지처럼 뱀을 먹었다. 심씨 외에도 한 사람의 땅꾼이 도맡아 뱀을 잡아들였다. 나는 아버지의 그 피둥피둥하고 기름진 얼굴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났다. 아버지는 한 해도 몇 차례씩 명승지 유람을 떠났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병원은 문을 여는 날보다 문을 닫은 날이 더 많았다. 심씨가 그 아들 기중이와 함께 밥을 끓여 먹으며 아버지의 병원을 지켰다. 내가 열 살이 되던 가을, 아버지는 달포가 넘는 유람에서 돌아왔다. 얼굴이 해쓱하게 여위어 있었다. 심씨에게 뱀탕을 고라고 한 모양이었다. 심씨가 우리 십 후원 한 구석에 뱀을 끓이는 약탕관을 얹고 불을 피웠다. 그럴 때마다 기중이가 뱀 자루를 들고 나왔다. 그 뱀 자루는 항상 기중이네 방구석에 놓여 있었다. 기중이는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았다. 늘 풀 죽은 얼굴로 혼자 맴돌았다. 한 집안에 사는 나하고도 어울리는 법이 없었다. 계집애처럼 수줍음을 타며 도망치곤 했다.
그것은 모두 내 모함 때문이었다. 나는 항상 마을 아이들한테 기중이 얘기를 과장해서 전하곤 했기 때문이다. 기중이와 심씨는 밤에 그 뱀들을 온 몸에 감고 잔다든가 밥을 먹는 대신 뱀을 생으로 으적으적 씹어먹는다고 했다. 아이들은 내게서 그런 얘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나는 내 얼굴이 기중이를 닮았다는 마을 아이들의 그 놀림을 막기 위해서도 매일매일 거짓말을 만들어 내야 했다. 아이들 눈에 기중이는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기인이고 무서운 짐승이어야 했다. 심씨나 기중이는 결코 뱀에 물리는 법이 없는 걸로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심씨가 뱀을 다루는 데 있어 얼마나 조심을 하고 있는가를 잘 알았다. 기중이는 더욱 뱀을 무서워했다.
그날 우리 집 후원에서 기중이가 독사에게 물려 죽은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기중이가 뱀 자루 아가리를 벌려 잡았고 심씨가 나무 집게로 뱀을 끄집어 올렸다. 나는 그때 우리 집 대청 뒷문을 통해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집게에 허리를 집힌 뱀이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며 자루 속에서 나왔다. 그때 나는 묘한 충동을 받았다. 손에 들고 있는 하모니카의 높은음 부분에 입을 대고 째지듯 그렇게 소리를 냈다. 심씨와 기중이가 거의 동시에 내가 서 있는 뒷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짧은 순간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달맞이꽃 1
남편을 골목길까지 배웅하고 나서 나는 대문을 잠갔다. 가슴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독이 몰아쳤다. 외롭고 허전했다. 이처럼 가슴이 텅 빌 수가 없었다. 나는 남편이 먹고 나간 밥상을 주방에 그냥 둔 채 아직 곤히 잠들고 있는 은주 옆에 쓰러졌다. 은주는 여섯 살이었다. 내 뱃속으로. 난 자식이 아니었다. 물론 남편의 씨도 아니었다. 4년 전 두 살 난 은주를 영아원에서 얻어다 기른 것이다. 호적에는 우리들의 자식으로 올라 있었다. 혈액형도 남편과 같은 A형이었다.
그러나 결코 은주는 우리들의 피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은주를 입양시킨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다행스러운 일은 남편이 은주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한다는 것이다. 영채를 사랑하듯 은주를 사랑하는 남편을 대할 때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세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한집에서 사는 남편에 대한 미안스러운 생각에서 우러난 부끄러움이다. 이 세상의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아내를 이해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는 남편에 대해서 나는 진정 고마움을 느낀다.
"당신, 학교에 안 나가는 게 좋겠단 말이야."
남편은 결혼할 때부터 내가 직장 생활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
"아이도 없고 심심해서 그래요."
결혼 초에는 그런 핑계를 댈 수가 있었다. 남편이 은주를 데려오자는 데 동의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주를 통해서 나를 가정에 묶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는 내가 직장에서 겪는 고통을 헤아리는 것 같았다. 교육자가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고 아이들 앞에 선다는 그 괴로움을 누가 쉽게 이해해 줄 것인가. 직장 생활을 라면서 자기 동료를 이해와 믿음으로 사귀지 못하는 것도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인 것이다.
남편이 원하는 대로 직장을 집어치우고 집에 들어앉아 평범한 주부이고 싶은 게 내 소원이었다. 나는 진실로 평범한 아내로서 가정을 위해 나를 던지고 싶은 것이다. 집안 식구들 옷을 빨고 장독대를 매만지고 화초에 거름을 주고 은주를 위해 예쁜 옷을 만들고, 남편의 퇴근 시간을 기다려 그를 마중 나가고 밥상머리에 앉아 그에게 반주를 권하고, 잠들기 전에 가계부를 몰래 적고, 적금 통장의 액수를 헤아리며 조용히 미소 짓고 그리고 남편의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잠자리에서는 거침없이 요부가 되는 그런 평범한 아내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패해하고 말았다. 구제 불능의 상태였다. 일요일 하루를 집에서 보내는 일이 내게 있어서 오처럼 큰 고통일 수가 없었다. 가슴에 서리 서리 안개가 껴 든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숨이 나가지 않았다. 은주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불쌍한 내 동생 영채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은 열 달의 고통을 이기고 나를 이 세상에 던져 준 내 어머니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내가 사랑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군말 없이 돌보고 사랑하는 내 남편을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네 남편 같은 사람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을 게다."
어머니가 늘 그 사실을 내게 일깨워 주려 몹시 부심했다. 어머니의 말은 옳았다. 그는 남편으로서도 어머니의 사위로서도 영채의 형부로서도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가 아내에게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하고 싶었다. 더없이 고맙고 이를 데 없이 착한 사람이기에 나는 그를 사랑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내게 있었다. 나는 아무도 사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 한 서방한테 좀 잘해 줄 수 없니?"
이처럼 어머니는 안타까워했다. 딸 대신, 딸이 그 남편에게 해야 할 일을 당신 스스로가 했다. 그것도 사위가 눈치채지 않게 틈틈이 몰래몰래 사위를 위해서 몸을 부지런히 놀렸다. 사위와 정면으로 얼굴을 맞닥뜨리는 일조차 겁낼 정도로 사위를 어려워하는 이가 하나의 평범한 가정 분위기를 위해서 고심참담하는 모습은 차라리 역겨움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 사실이 내 가슴을 더욱 암울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차갑게 차갑게 나를 식혔다. 그러나 참는데도 한도가 있는 모양, 어머니는 결국 푸념 섞어 신세 타령을 하게 된다.
"내가 다 안다. 객식구 때문에 느이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걸 모르지 않는다."
당신답지 않게 속물스러운 푸념을 하며 한숨을 쉰다.
"이 에미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렇다."
결론은 항상 그랬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처연한 그런 그늘이 깔린다. 그런 때일수록 당신의 시선은 내 쪽과는 멀리 떨어진 허공을 쳐다본다. 내가 당신의 눈길을 무서워하듯 당신 또한 내 눈길과 서로 마주치는 걸 두려워한다.
그러나저러나 우리 집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영채라고 할 수 있다. 영채는 자기 자신이 저주받은 인생이라는 걸 모른다, 남에게서 사랑을 얻어낼 그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한 영채가 그처럼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자기야말로 이 세상에서 사랑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집념을 가졌기 때문이다. 집념이라는 표현이 옳다. 영채는 철두철미하게 남에게 받으려고만 했다. 서른 세 살이라는 나이는 아랑곳없이 영채는 항상 세 살 어린애의 사고 속에 머물러 있었다. 여섯 살 먹은 은주에게도 어리광을 피웠고 은주보다 더 예쁜 옷을 입으려고 심술을 부렸으며 항상 은주와 똑같은 음식을 먹어야 했다. 그처럼 철저하게 자기 주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졸아가야 하는 대가는 멸시와 저주뿐이다.
어머니와 딸이라는 그 인륜의 끊을 수 없는 모진 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마저 영채의 그 어처구니없는 심술 앞에 머리를 흔들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눈에서 증오로 불타오르는 빛을 보았다. 그 증오의 빛이 내 몸의 구석구석까지 뜨겁게 파고들면서 나는 부들부들 몸을 떤다. 손끝 마디마디로 세차게 뻗쳐오르는 증오로 해서 나는 느닷없이 발작을 일으키게 된다. 남들은 나의 이러한 증세를 허스테리라고 했다. 발작 증세가 끝나고 나면 나는 한없는 절망의 늪에서 허 덕이게 된다. 남들이 나를 찬 여자라고 보는 것이 바로 그러한 때일 것이다. 영채마저 나의 이러한 발작 전후의 기분 상태를 두려워한다. 어쩌면 백치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서 내가 그러한 발작을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 어머니는 암탉이 병아리를 깃 속에 품고 꾸꾸거리듯 영채를 끌어안고 그네들 방 속으로 숨어 버린다. 누가 뭐래도 어머니는 영채를 위해서 이 모진 세상에 살아있다고 할 것이다.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어머니의 움직임은 계속된다.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시장에 나가 찬거리를 보아오고 은주의 책가방을 챙겨주고 심지어는 딸 내외의 구두까지 닦아놓는 등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는 데가 없다. 그런 바쁜 틈틈이 영채가 죽도록 싫어하는 목욕을 시키는가 하면 머리를 감겨 곱게 빗질을 해 꽃 핀을 꽃아 주는 일까지 모두 어머니가 할 일이다. 사위가 퇴근을 해 집안에 들어섰을 때 신경에 거슬릴 것이 없나 유심유심 둘러보며 집안 정리를 한다. 그리고 딸이나 사위의 구미에 맞을 반찬에 신경을 쓰랴 전기세가 지난 달보다 조금 더 나왔어도 그것이 모두 당신의 책임인 양 면구스러워한다. 사십을 넘어선 딸한테 시집살이를 하는 어머니의 그 천덕스럽고 비굴해 보이는 꼬락서니가 또다시 내 비위를 건드리게 된다. 나는 그럴 때 느닷없이 소리를 내지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내던졌다. 어머니의 그 모든 근면과 성실이 딸자식에게 빌붙어 사는 데서 오는 비굴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딸을 위해서 진정한 사랑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병신 딸 영채에게 어떤 위해가 올 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그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여자는 자고로 남자와 만나 한 가정을 이뤄야 사람 구실을 하느니라."
내가 발작을 할 때마다 어머니는 내 발작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이렇게 타이르곤 했다, 30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않는 딸을 둔 어머니로서 그 딸의 히스테리를 그런 식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남자를 만나 단 가정을 이룬 뒤에도 나의 이러한 발작 증세는 여전했다. 오히려 결혼해서 사는 그 20년 세월을 나는 더욱 옥죄는 구속 속에서 허덕여야만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듯했다. 어쩌다 가끔 영채를 끌어안고 눈물을 질금거리는 그 청승맞은 울음마저 걷어치웠다.
영채가 수태를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난 뒤부터 두 달여. 그 두 달은 우리 식구 모두에게 가혹한 형벌의 시간이었다. 그처럼 근면하고 성실하던 어머니가 그 두 달여의 가혹한 고문에 견디다 못해 가을날 서리맞은 호박잎처럼 폭삭 늙어 버렸던 것이다. 어머니의 그 꿋꿋하고 질긴 영채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을 위한 생명의 줄은 여지없이 끊어져 버렸다. 사냥꾼에게 쫓기다가 절벽 앞에서 되돌아 선 노루의 그 절망한 눈빛이 아마 그럴 것이다. 분노와 좌절과 이제까지 버터 온 생명에의 허무가 뒤범벅이 된 그런 눈으로 어머니는 쓰러졌다. 그때부터 영채의 문제는 그 애의 형부인 남편과 나에게로 넘겨졌다. 나는 폭풍우처럼 거세게 밀어닥치는 혐오로 하여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오직 남편만이 여일하게 침착성을 보였다. 아니다. 남편은 침착하지 않았다. 기가 막히게도 남편은 영채의 일로 해서 싱싱하게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남편은 흥분하고 있었다. 자신의 기분을 내가 이해하도록 강요했다. 용서받지 못할 패륜을 떳떳이 내세워 그것을 당위적인 것으로 이해시키려 했다. 이제까지의 우유부단한 그 가정적인 체취를 버리고 사나운 폭군이 돼 버렸다. 그처럼 철저한 자유주의자가 영채의 일로 해서 그 면모를 대번에 바꿔 버린 것이다. 나 자신 속수무책으로 그의 처방에 따라야 할 형편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당신이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
"영채는 내 동생인걸요."
"그러니까 더욱 내 책임이라는 거야."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책 번 천 번 말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저지른 일이야. 내가 저지른 일은 내가 책임질 것이오."
남편은 그처럼 단호했다. 이 사람의 머리가 어떻게 잘못되지 않았나 싶게 돌변해 버린 것이다. 그럴 때 어머니는 짐짓 방관자의 태도를 지켰다. 일체 그 일에 대해서 가타부타 당신의 의견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어머니의 침묵을 남편은 자신의 주장에 승복한 걸로 간주했다. 그러나 결국 이긴 자는 어머니였다. 어쩌면. 이겼다는 표현은 너무 적당치 못할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도피했으니까. 영채를 데리고 우리들 집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어머니와 영채의 가출은 내가 결혼하고 두 번째 일어난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영채와 어머니가 집에서 나가 버린 며칠 뒤에 나는 새로 통장이 되었다는 수다스러운 여편네와 대문 앞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통장이 돼 인사를 나왔다면서 남의 가정 형편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었다.
"늘 지나다니면서 보니께 시어머니를 뫼시구 사는가 베유."
"친정 어머니에요."
"그 얼굴이 허여멀쑥한 처년 누구유? "
"동생이에요."
"그랬구먼. 근데 보니까 온전치 못해 뵈던데,,,,,,"
"그래요."
"쯧쯧, 허울은 멀쑥하더구먼서두,,,,,, 그래 언제부터 그렇게 됐우?"
"뱃속부터요."
"저런 저런, 그나저나 선상님이 괴롬이 많겠수, 핵교 선상이시지우?"
"예, 국민학교 나가요."
"쬐그만 여자애가 있는 것 같던데 개가 몇 째유?"
"걔 하나예요."
"저런, 많이 늦었구먼 그래. 근데 더 낳지 않는 거유? 아니면 더 낳지 못하는 거유?"
나는 대답바지 않았다. 자식을 여럿 둔 통장 여편네의 그 생활에 쪄든 궁상맞은 얼굴에 구역질이 났다. 잣골 내 고향 마을에서의 그 돌변한 사람들의 이글이글 살기띤 얼굴이 떠올랐다. 저 집구석이 나한테 도둑질을 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니까. 오라질 것들. 마을을 떠나는 우리 식구들을 향해 그네들이 침을 뱉었다. 재명이가 마을을 안 떠나겠다고 발버둥쳐 우리 식구들은 잠시 마을 한가운데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옛할머니들이 말하잖는가 말이여. 남 가슴 아프게 하면 그 죌 꼭 되받게 되는 게라구. 대처에서 공부 좀 했다구 꽤 날치더니만 서방 잘못 만나 놓으니 저 꼴이 아닌가 말이여. 서방을 잘못 만난 게 아니라 서방이 계집을 잘못 만나 그 지경이 된 거지 뭘. 어머니를 두고 하는 얘기였다. 이 씨발, 개 같은 년들, 내가 이 원술 전부 갚아 줄 거다, 영채보다 다섯 살 위인 재명이가 울음 섞어 내지르곤 했다. 재명인 그렇게 무섭게 암팡진 데가 있는 애였다. 마을 사람들이 소릴 질렀다. 저런 제명에 뒈지긴 싹이 노란 눔이구먼, 아들 하나라고 살러 놓으니까 저 입 까는 것 좀 봐. 재명이가 길바닥에 주저앉으며 발버둥쳐 울었다. 저눔, 큰일 날 놈이구먼. 마을 남정네들이 수군거렸다.
어머니가 머리에 인 보따리를 조용히 내려왔다. 그리고 느닷없이 재명이의 중의 적삼 입은 멱살을 나꿔 다음 그 어깻죽지를 앙물었다. 재명이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재명이의 어깨에서 배어 나온 핏자국이 중의 적삼을 적셨다. 니놈 키워 봤자 니 애비처럼 죽기 꼭 알맞을 게다. 어머니는 그처럼 모질게 내뱉은 다음 영채를 업고 무르춤 서 있는 내 목덜미를 질질 끌고 갔다. 고향 마을을 죽어도 떠나기 싫다는 재명이를 그 자리에 남겨둔 채 떠나겠다는 어머니의 결의였다. 누나야, 누나야. 재명이가 뒤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엉니, 오빠 데리구 가자아! 내 등에 업힌 영채가 몸을 뒤틀면서 울었다. 누나야, 누나야. 뒤돌아보지마, 어머니가 말했다. 저놈에 새끼 저 독살 그대로 놔뒀다간 즈 애비처럼 빨갱이밖에 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뒤돌아보지 않아도 재명이는 이미 우리들 뒤에 따라 붙고 있었다. 재명이는 흐느껴 울면서 내가 들고 있는 보따리 하나를 뺏어 들었다. 나는 그때 왈칵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을 닦아내야 했다. 내 등에 업힌 영채가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재명이가 맞잡아 쥔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바깥양반이 참 무던한 분인가보우."
통장 여편네가 계속 이주걱대고 있었다.
"요새 세상에 군식구 하나 거느라는 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우. 선생님두 바깥양반헌테 써비슨가 싸비슨가 잘해 드려야 할거유."
내 표정이 좨나 굳고 찼던 모양이다. 그네는 열적게 웃으면서,
"한 이웃에 살면서 좋다는 것 뭐유. 이것저것 속상할 때 서로 위로해 가면서 사는 거지 뭐. 참 우리 집에두 노인네가 있다우. 시어머니지, 칠십이 넘은 노인네가 아직 정정하다우. 애기 할머이 좀 놀러 오시라구 해유, 이건 노인네가,,,,,,"
통장 여편네는 이제 자기 집 속사정을 늘어놓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자리를 떠버렸다. 어머니, 그래 내 어머니는 지금 어디 잠깐 마을 나들이를 갔다. 영채를 데리고 훌훌 바람이나 쐬러 재 너머 먹실 외가댁쯤 다니러 간 거야. 해 떨어지기 전에 어머니는 외가에서 주는 풋콩이며 햇감자를 한 광주리 이고 돌아와 저녁을 지을 가야.
그러나 어머니는 영채와 함께 집을 나간 채 일주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남편이 각 방면으로 수소문을 해 보는 모양이었으나 이렇다할 행방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결혼하고 이 년째 되던 해였다. 남편과 처음으로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다. 달맞이 꽃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길에 꽃모종 한 묶음을 사왔다. 길둥근 잎 가장자리에 거친 톱니가 있는 풀이었다. 남편은 마당과 좁은 화단에 여러 가지 꽃모종을 사다가 심었다. 맨드라미며 분꽃이며 채송화며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꽃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그가 사온 꽃 이름이 뭔가 묻지 않았다. 늘 그가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자신이 사온 화초에 대해 말이 없었다. 내가 한 번쯤 져 주기로 했다.
"그건 무슨 꽃이래요?"
사범학교 다닐 때 생물 도감에서 분명 본 풀인데 전연 그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걸 지금 생각 중이오. 화원에서 듣고 사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오느라고 그만 깜박했지 뭐야."
다음날 화원에 들러 그 화초 이름을 알아보겠다던 남편은 그 사실마저 흐지부지 잊은 모양이었다. 그런대로 찬 달쯤 후에 그 화초가 꽃을 피웠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노랗고 큰 꽃이 잎겨드랑이에 탐스럽게 피었다. 꼭 어디서 본 꽃 같았다. 출근을 하려고 마당에 나서며 다시 화단을 보니 새벽에 그처럼 탐스럽던 꽃이 꽃잎을 오므려 시들고 있었다.
"그게 꼭 시골 길가에 피는 달맞이꽃 같구나, 저녁에 폈다 아침 해 뜨자 져 버리잖든, 꽃 모양두 그러고 보니 비슷하구먼."
내가 꽃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섰자 어머니가 관심을 나타내 왔다. 달맞이꽃. 그때 남편이 방에서 나오면서 소리쳤다.
"맞아, 달맞이 꽃이랬어. 월견초. 이건 시골에 피는 그것보단 개량된 거래."
남편이 장한 듯이 마당으로 내려섰다. 어머니가 따라 나왔고 그 뒤에 영채가 보였다. 달맞이꽃. 나는 희붐한 달빛 아래 개울가 둑을 덮으며 만개한 달맞이꽃을 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 보는 노란빛은 그냥 회다. 그 흐드러지게 휜 달맞이꽃 속을 내가 걷고 있었다. 재명이는 저만큼 앞서서 성큼성큼 걷고 있었고 그 달맞이꽃이 끝나는 곳에 거뭇한 집채가 보였다. 어머니가 거길 턱으로 가리켰고 나는 잠이 들어 점점 밑으로 처져 무겁기만한 영채를 부썩 추켜 업었다. 밤새가 푸드득 산자락에서 날개 짓을 쳤다,
"엉부, 엉부!"
영채가 남편한테 매달리며 손을 내밀었다, 영채는 발음이 불분명했다. 형부를 엉부라고 부르는 등 세 살 그 시절의 말보다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었다. 남편의 노력에 의해 지금은 꽤 나아진 편이 그랬다. 남편이 팔에 매달리는 영채를 어린애에게 하듯이 볼을 꾹 찔서 주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때 힐끗 영채가 나를 쳐다봤다. 영채의 사시(斜視)와 마주친 나는 어떤 예리한 칼끝에 찔린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극히 짧은 순간 나는 남편에게 매달린 영채의 머리채를 나꿔채 마당에 팽개쳤다.
"무슨 짓이야?"
남편이 고함쳤고 나는 어느 새 마당 화단에 들어서서 노오란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달맞이 꽃을 모조리 뽑은 다음 두 손으로 짓이겨 놓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남편한테 보인 첫 발작이었고 그날 저녁 우리들은 대판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은 아침의 그 일에 대해서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아무 것도 얘기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얘기하랴. 그 당사자들인 어머니와도 고 일에 대해서 이십 몇 년이 되는 그때까지 단 한마디 말도 못 나눈 그런 계제에 돌아서면 남일 수밖에 없는 남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나는 남편의 끈질긴 추궁에 대해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 해야만 되는 말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진작부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채는 당신 처제예요. 백치라고 해서 그렇게 함부로 다를 수가 있어요? 엉큼하고 치사한 당신 그 속을 누가 모를 줄 알아요!"
내 말에 남편은 아연한 표정을 했다.
"당신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요? 내가 처제를 어떻게 했단 말이오?"
"위선자!"
"뭐라구?"
"당신은 위선자예요. 이제 그 양의 가죽을 벗어요. 아, 불결해!"
그때 어머니가 끼어 들었고 내 증오의 칼은 어머니의 가슴을 향해 돌려졌던 것이다, 누구에게든 그 칼을 꽂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발작의 상태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다죽어 버러! 뭣 때문에 사는 거야? 엄만 내가 행복할까봐 저 병신 계집애와 함께 나를 지켜보는 거지? 그래서 그 더러운 목숨 죽지 않고 날 괴롭히는 거야. 엄마, 내가 왜 행복하면 안 되는 거야? 응 왜 안 되느냐 말이야!"
결혼 1년 반 동안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행복한 시간을 내가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나는 행복을 잃어가야만 했다. 어머니와 영채, 그네들과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없는 행복이기에 이미 그것은 행복일 수가 없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을 죄스러워했고, 남편을 따라 웃는 일도 삼가야 했다. 그 잠재된 앙갚음을 어머니에게 퍼댔던 것이다. 어머니는 고개를 푹 꺾고 내가 내지르는 소리를 경청했다. 얼굴 표정 하나 몸가짐 그 어느 곳 한군데 흔들림이 없이 듣고 있던 어머니가 영채를 데리고 집을 나간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그 첫 번째 가출은 길지 않았다. 집을 나간 지 닷새만에 영체가 돌아왔다. 하나 둘--- 다섯까지들 헤아리지 못하는 백치 영채가 제 힘으로 집을 찾아 돌아온 것이다. 몇 년 전, 그러니까 남편이 영채를 길들이기 그 이전만 해도 어림도 없는 일을 영채가 해낸 것이다. 영채가 돌아오고 하루 뒤에 어머니가 뒤따라 돌아왔을 것이다. 그 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어야 율은 일이지만 나는 그 일을 해내지 못했다. 남편 역시 그런 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내외가 어머니에게 그것을 캐물었어도 당신은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냥 재 너머 이웃 마을 친척집에라도 다녀온 것처럼 시치미 떼고 언제나 다름없이 근면하고 성실한 가정부외 역할을 해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그냥 마음이 아파 영채를 데불고 바람이나 쐬러 지향없이 훌쩍 집을 떠난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당신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고 깊이깊이 생각한 나머지 마음에 결단을 내리고 그렇게 결연히 집을 나갔기에 첫 번째의 가출처럼 영채가 쉽게 돌아오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그네들은 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마치리란 비장한 생각이 예감처럼 집안 구석구석에 쌓여 있었다. 남편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네들이 쓰던 그 골방, 아직도 벽에 걸려 있는 몇 점의 옷가지, 영채를 위해서 남편이 사다준 수십 가지의 장난감들이 방 한구석에 너무나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결단으로 영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결코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 일을 끝냈다고 해서 훌훌 손 털고 귀가할 그런 문제도 아닌 이상 이제 다시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는 틀렸다.
나는 베개에서 머리를 들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흘린 눈물이 베갯잇을 적시고 있었다. 은주는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잠들고 있는 은주의 이마에 내 얼굴을 댔다. 따스한 체온이 은주의 고른 숨소리를 타고 내 가슴 그 밑바닥까지 전해져 왔다.
망 초 2
"저기 있는 애기가 영감님 손녀신가보군요?"
생사탕(生蛇湯) 고는 데서 올라온 노인이 자리를 잡고 앉기를 기다려 물어본 것이다. 좀 전 노인의 등에 업혔던 예날곱 살쯤 된 여자 애는 그대로 그곳에 남아 불을 지키고 있었다.
"선상님, 저것이 내 딸이라우."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켜고 난 노인이 곰 멋적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올해 몇이신데 저렇게 어린 따님을 두셨어요?"
"일흔하고도 여덟이요, 칠십 여덟,"
잘 믿어지지 않았다. 노인의 꼬장꼬장해 보이는 모습 같아서는 고작 육십에 몇 살을 더 붙여 볼 정도였다.
"가만히 생각해 봄 막막합니다요. 내야 이래 살다가 꼬꾸라지면 그걸로 끝이지만 저 어린것들이 어떻게 살아갈는지 정말로 한심합니다요. 저것 위로 열 살, 열세 살 이렇게 둘이 더 있습지요. 가운데놈이 사내지요."
그러고 보면 모두 예순을 넘어 둔 자식들이다.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나는 그 노인에 대한 호감에 앞서 불결한 벌레를 보듯 노인의 그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뜯어보았다. 아직도 살아 있는 자의 치열한 욕망과 생에 대한 강한탄 애착이 그 눈 속에 번뜩이고 있었다.
"어떻든 영감님 대단하십니다 그려. 그렇다면 마나님께선 아직---"
"예, 우리 마누라 이제 사십 다섯이오."
"그러시겠군요."
"헌데 지금 내가 젊어서 진 그 숱헌 죄에 대한 벌을 받구 있습지요 예. 마누라가. 이게 내 네 번째 마누란데, 작년 겨울에 중풍으로 쓰러졌지요. 끓여 먹는 거야 애들이 그럭저럭 해결하지만 떠억 방바닥 지구 자빠져 있는 마누라 대소변 받아내는 일이야 그걸 누가 합니까. 다 내가 진 죄 값을 받고 있는 거지요."
주는 대로 거푸 몇 잔을 받아 마신 노인이 묻지도 않는 자기 젊어서의 그 파란만장한 얘길 풀어놓는다.
"예, 경기도 화성 바닥에서 백 만보, 섰다 백 만보, 박치기 백 만보 하면 떠르르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요. 내가 끼지 않은 노름판은 노름판이 아니었지요. 체구는 이래 작아도 씨름판에서 충청도 황 장사를 냅다 메다꽂았다면 알쪼 아닙니까요. 박치기꾼으로도 한몫 단단히 했지요. "
"활량이셨구먼요?"
"말해 뭣해, 순 남의 돈으로 다 잘 먹고 잘 놀았지. 천하 계집이 다 내 거 같았으니까 말이여. 이번 마누라까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만 해두 네 번에다가, 활량 죽어두 기생집 울타리 밑에서 죽는다고 전국 유람하며, 내가 망쳐 놓은 계집 그거 이루 다 헤아리자면 머리 아플 거구먼. 기생이야 뭐 다 그런 거구, 과부, 유부녀, 혼인날 받아놓은 처녀, 아직 젖 냄새가 솔솔 나는 풋것하며...... 이제 선상님한테 처음으로 하는 얘기지만 내가 젊어서 계집 겁탈두 많이 했구먼, 혼자 돌아다니는 놈, 꼴리긴 하구 으쩔 거여. 헌데 고렇게 아무렇게나 막 주워 먹는 것이 또 각별한 맛이더라 고거여 히히,,,,,,"
노인이 잔을 내 앞으로 내밀었지만 나는 그냥 그 잔에 술병을 기울여 술을 따랐다.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게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아서였다. 막상 입에 술을 넣어 봤자 목구멍으로 넘기기 전에 뱃속의 모든 것이 뒤집혀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노인의 눈이 뱀의 그것처럼 점점 더 교활해지고 있었다.
"여름 난리 전 어디 계셨습니까?"
나는 단도직입으로 찔러 물었다. 내 아내의 고향 반곡까지 들어갈 그 어떤 구실을 하나라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름 난리라니?"
내 물음에 노인이 흠칫 몸을 추스른 것 같았다. 고 교활한 눈에 경계하는 빛이 역연했다.
"6.25사변 말입니다. 그때도 이곳에 사셨나 해서요."
"이곳 누굴 찾으시는데?"
역시 교활한 노인이었다.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나는 기왕지사 더 빨리 중심에 던져지고 싶었다.
"영감님, 용 만수씨라고 옛날 저 잣골에 살던 분인데."
"용, 용만수라,,,,,"
노인이 잠깐 뭔가 생각해 보는 눈치더니,
"용씨라면 아마 저 잣골에 살았다는 얘기가 맞는가 봅니다요. 옛날 난리 전만 해도 반곡이 온통 용씨네 판이었다고 합디다."
"영감님은 그럼 여기 오신 지 얼마 안되시는구먼요? "
"나야, 이 풍암산에 사람이 많이 찾아든다고 해서 들어와 살게 된 거지요. 벌써 한 예닐곱 해 됐는가 보우, 그 전에야 용문산에서 오래 있었지요."
“6.25때도 그쪽에 사셨겠군요?"
"웬걸. 그전 충청도에 살았지요."
"충정도 어딥니까?"
"보은. 거 대추 많이 난다는 데 말이여."
보은, 아버지가 공의가 돼 우리 식구들을 데리고 가 살던 데가 바로 보은군 안에 있는 면 소재지였다. 거기서 심씨를 만나게 됐던 것이고--- 우리 식구들이 떼죽음을 당한 곳도 바로 그곳이 아닌가.
"영감님, 그렇다면 혹시 심 재봉이라는 사람 기억나십니까 ? 보은군 일대서 뱀꾼으로 이름이 나 있었을 텐데요."
"전연 듣지 못하던 이름이구먼. 더구나 내야 이 짓을 해 먹고 사는 게 불과 십여 년밖에 안됐지요. 용문산에서 처음 시작한 것이니까 말씀이야."
나는 그 이상 캐고 싶지 않았다. 설사 이 노인이 심씨를 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심씨가 아니다. 그렇다고 내 아내의 아버지 용 만수씨의 과거를 굳이 캐어 그 뿌리를 더듬어 보고 싶다는 뜻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내 마음의 어느 구석에서 일어난 충동에 끌려 이곳까지 온 것일 뿐이다. 집을 나간 장모와 영채의 행방을 찾는다는 그런 저의가 없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네들의 행방보다 더 크고 값진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유혹, 나는 그 유혹의 손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던 것이고 드디어는 내 어린 기억 속의 심씨와 상봉을 하고 급기야는 들꽃이 하얗게 나부끼는 그 들길을 혼자서 걷게 될 것 같은 예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추억과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비록 창자를 끊는 아픔을 동반한 것이라 해도 시간이 흐른 이 시간 그런 아픔들은 이미 아픔 이상의 달콤한 힘을 가지고 나를 맞아주는 것이다.
"선상님, 반곡이 초행이셔?"
"예, 말만 들었지 처음 와 보는 뎁니다. 저쪽으로 올라갈수륵 경치가 좋다면서요?"
풍암 계곡 입구에서 등을 돌리며 구불구불 뻗어 올라간 신작론 그 위쪽 골짜기는 짙푸른 산들에 첩첩이 둘러싸여 마치 산수화의 한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선상님, 이 풍암 계곡도 아직 안 들어가 보셨지?"
"아직 ,,,,,,"
"들어가 보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금강산 다음에 설악산, 설악산 다음이 바로 이 골짜기라고 들어갔다 온 사람들이 입을 모읍데다요. 그리고 아까 선상님 말씀마따나 저기 저 반곡 골짜기가 또한 깊이 들어갈수륵 경치가 좋습지요. 그런데 그거 참 알 수 없단 말이야."
"뭐가 말입니까?"
"저렇게 경치가 좋은 데서 사람이 그렇게 많시 죽었다니까 말입네다요."
"사람이 많이 죽다니요?"
"선상님, 저 반곡이 옛날 난리 때 6.25사변 말이지요. 그때 반곡을 가리켜 쐬렌 모수쿠바라고 했다쟎습니까."
"저 마을에서 빨갱이가 그렇게 많이 나왔습니까?"
"많이 나오다마다! 나두 예 와서 살면서 들은 얘기지만 마을 사람 태반이 빨갱이가 됐다더군."
"용씨네 사람들이었군요?"
"그렇지요. 어 우스운 건 난리가 일어나기 전부터 용씨네가 두 패로 나뉘어 아옹다옹 싸워 왔는데 난리가 터지면서 바로 이때로구나 하고 서로 죽이고 죽고 한 거겠지요. 물론 타성바지두 많이 죽었겠지만 말씀이야."
그렇게 얘기를 풀어 놓던 백 노인이 갑자기 앞에 놓인 빈 술병과 술잔을 잡초 사이로 던져 넣는 것이었다.
"선상님, 그 과자두 이리 주셔, 저놈에 자슥 꼴 보기 싫어서 원."
백 노인이 내려다보는 개울가에 아까 가겟집에서 만난 김 택준이라고 제 소개를 한 미친 사람이 우리 쪽을 향해 휘적휘적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까 가겟집에선 보았는데, 머리가 좀 돈 사람 같더군요."
"모르지요. 괜히 멀쩡한 놈이 그 지랄하고 사는 건지."
"원래는 반곡 용씨라면서요?"
"그렇다더군요. 빨갱이 짓을 하다가 잡혀 읍내로 끌려가는 도중에 분명히 물에 빠져 죽었는데 2년 뒤엔가 살아서 돌아왔더랍니다요. 모두 귀신이 나타났다고 야단났었던 모양이에요. 그래 경찰서에서 끌어다가 여러모로 조사를 해 보니까 죽은 용 택준이가 분명하긴 한데 이미 미친놈이라고 해서 그냥 풀어주었답디다요. 허긴 그 난리 때 뭘 제대로 알고 빨갱이 된 사람 있습니까요. 망둥이 뛰니까 전라도 빗자루 뛴다는 식으로 그냥 어- 하고 날뛰다가 당한 사람이 태반이지요."
어느 새 그가 우리들 곁에 다가와 있었다. 그는 나 같은 사람은 본 적도 없다는 투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백 노인이 미리 준비한 백 원 짜리 동전 하나를 내밀었다, 그의 눈에 번쩍번쩍 광기가 역연했다.
"영감, 오늘 산에 올라간 사람 모두 몇 명이여?"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백 스물 다섯 명이오."
"좋아, 계속 감시하도록! 그리구 물에다가 오줌싼 놈은 몇이여?"
"예, 세 놈입니다요."
"좋아, 그 세 놈 모두 총살해!"
"예, 예!"
꼭 어린애들 장난 같았다. 그러나 그 표정들은 사뭇 그게 아니었다. 그가 모자 쓴 이마에 손을 많고 풍암 계곡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백 노인이 속삭였다.
"자기가 풍암산 책임자라나요. 왜정 시대 즈 아버지두 이 일대 산을 지키는 산지기였다고 남들이 그러더군요. 참, 선상님, 아까 반곡리 누굴 아느냐고 물으셨어? 저 작자가 저래 미쳤어두 사람 이름 하나 외는 건 기가 막힙니다요. 머리가 어떻게 좋은지 죽은 사란 산 사람, 인근 마을 사람들 이름을 떠르르 꿰뚫어요. 지서에서두 저번 짝에 뭘 조사하러 왔다가 저 작자한테 도움을 청할 정도였으니까요. 아까 뭐시라더라?"
"용 만수씨라고,"
"어이, 김 주사님, 용 만수가 어데 사는 누굽니까요?"
산을 쳐다보고 섰던 그가 회딱 우리들 쪽을 돌아다보았다.
"용무가 뭔가?"
"예, 용 만수란 사람이 어데 사는 누굽니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보아서인지 갑자기 그의 눈에 이상한 빛이 돌았다.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용 만수, 죽었어!"
"언제, 왜 죽었습니까요?"
백 노인이 .내게 눈을 끔쩍해 보이면서 물었다.
"각하! 대통령 각하! 이 승만 대통령 각하만세! 대한민국만세!"
느닷없이 두 손을 번쩍 쳐들고 소리치는가 했더니 그는 어느 새 휘적휘적 둑방을 내러가고 있었다. 나는 몸의 긴장을 풀면서 생각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껍질이 떨어지기까지의 상당 기간의 통증과 껍질이 벗겨진 상처 부위의 그 쓰라림은 더 오래오래 계속되리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한 어쩌면 그 껍질은 더 오랜 동안 연약한 우리 민족의 속살을 각질로 굳혀 티눈처럼 아프게 우리 자신을 괴롭혔는지도 모른다. 내 이웃의 아픔을 내 것처럼 나누어 갖지 못하고 오히려 그 껍질의 그늘 속에 기생하며 그 껍질을 뒤집어쓴 우상을 숭배하려는 그런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는 한 우리들은 좀더 오래오래 고통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신이 우리 인간에게 선심 쓴 그 사랑의 힘을 빌어 우리가 좀더 부드럽게 남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을 때,,,,,, 그러나, 나는 진정 부끄러웠다. 나는 무엇인가, 내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정이 이루어지는 최소한의 이해와 관용과 사랑을 획득하지 못한 이 평범한 사내...... 내가 진심의 사랑으로 그네들을 보살폈던들 그네들이 집을 떠났을 것인가. 아내가 내 뜻에 거역한 것은 아내의 말대로 내가 위선의 탈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좀더 그네들 앞에 허심탄회한 심정으로 나를 보여주기를 꺼려했던가. 어째서 일방적으로 아내가 나만을 이해해 주기를 원하고, 그네가 왜 그처럼 고통스러워하는가에 대해 얼굴을 돌려왔단 말인가, 왜 진작 그네들 고통받는 그 참담한 얼굴이야말로 내게 보여주는 진정한 사랑이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단 말인가.
"선상님, 뱀 구경하시구 싶으시면 내려갑시다요."
개울 건너 신작로 위에 관광 버스 두 대가 또 도착해 있었고 거기서 내린 사람들이 울긋불긋 개울을 건너서고 있었다.
그 중 몇 사람이 아카시아 수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백 노인을 따라 그곳까지 내려와 보니 돌로 만든 아궁이가 셋에 그 위에 주전자처럼 생긴 오지 탕관이 걸려 있었다.
두 군데 탕관에서는 물이 끓고 있는 모양이었다. 좀 전의 그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애가 냇물에서 사기 그릇을 씻어 가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남녀 두 쌍, 네 사람의 등산객들이 백 노인과 생사탕 흥정을 벌였다.
"할아버지, 뱀이 그렇게 좋아요?"
얼굴이 검고 입술이 두꺼운 삼십대 후반쯤 돼 보이는 여자가 함께 온 남자 옆구리를 꾹 찌르면서 물었다.
"안 좋으면 이 늙은이가 허구 헌 날 이런 걸 하구 앉았겠수?"
"뱀이 위장 병에두 좋다면서요?"
여자와 함께 온 얼굴이 좀 파리해 뵈는 남자가 멋적어 하면서 물었다.
"좋다마다. 폐병에 좋구, 기 허한 사람들한테 맞는 뱀이 따로 있는 거구, 뱀 잡숴 안 듣는 병 없습니다요."
"한 탕 달이는 데 얼마예요?"
다른 쌍의 얼굴이 깡마른 여자가 함께 온 여자와 눈을 마주쳐 웃으며 묻자, 백 노인은 바위 밑에 놓여 있는 마대 쌀자루를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우선 뱀을 보고 정하셔. 그냥 몸보신으로 잡술 건지 아니면 어디가 어때서 잡숫고 싶다, 그걸 말씀 허시면 거기에 맞는 것이 있는 거니까, 어서 말씀들 하tu."
"그래도 대충 값을 알아야죠."
"한 탕이 세 마리야. 서울하곤 달라. 직접 눈으로 다 집어넣는 걸 화인 하시고 이따 산에서 내려오시기까지 풀지 않고 있을 거니 와서 보시구 풀어 잡숴. 생사에 따라 한 탕에 오천 원부터 보통 만 오천 원까지, 하긴 큰 능사, 능구렁이 말이여, 그거 하나 잡술려면 오만 원두 넘지만서두 말이여."
등산객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간이 괜찮다는 신호를 했다.
"할아버지, 남자들단테 좋은 걸로 해 주세요. 순회네두 시키구 가아!"
얼굴 검은 여자가 스스럼없이 주문했다.
"잘하셨어, 보아하니 여기 계신 남자분은 안된 소리 같지만 뱀들 좀 잡숴야 하시겠어, 남자란 자고로 힘이 있구 볼 거여."
그러면서 뱀 자루를 여는 백 노인이었다.
"자, 보셔. 서울 것들하곤 달라, 무자수(물뱀)는 없어. 그건 못 먹는 뱀이여. 이게 화사고 이것이 바로 살모사란 거여. 이게 칠점사란 게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팔에 매달려 지레 겁먹은 표정으로, 그러나 자글자글 정욕이 담긴 그런 눈을 번뜩이며 뱀 자루를 들여다보다간 자지러지게 몸을 비틀어댔다. 밤이면 그 깊디깊은 욕정의 불을 숙이지 못해 헐떡이며 안타까이 열기를 뿜을 그런 몸뚱이, 나는 그네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미안해요 여보. 아내는 한낱 성기를 가진 밋밋한 나무토막이었다. 몸을 열되 던지듯 내맡기고, 자신이 불붙으려 고심할수록 그네의 육체는 식어갔다. 처음에는 내 쪽이 결함이요, 무능력이라고 당황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차츰 아내가 항상 거느리고 있는 그 차갑고 무표정한 분위기의 근원에 대해 뭔가 알아지는 것 같았다. 그네의 불감증은 곧 그네만이 가진 고통과 상통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헤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 여자가 자신의 불감증을 자각하는 것은 곧 그 여자의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는 것과 다름없다. 미안해요 여보. 그네는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걸 내놓고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지만 그 행위가 끝날 때마다 나는 그네가 조금씩 조금씩 죽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네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서서히 내게로 옮아오고 있음을 안 것은 결혼 2년째 되는 해부터였다. 아내와 내가 말다툼을 하고 그것으로 해서 장모와 영채가 집을 나가 버린 그 며칠 뒤 나는 실심한 아내를 위해서, 다른 부부가 그렇게 하듯 그 행위를 원한 것이고 그네 또한 순순히 나를 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불찰이었다. 행위 중에 아내는 히스테릭한 발작을 시작했고 그 무서운 발악으로 해서 나는 그날 이후 아내와 똑같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맛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후 우리 부부는 우리들의 그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의 행위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때 아내가 발작하는 순간 내 머리 폭에 떠오른 것은 심씨와 그 아들 기중이의 얼굴이었다. 그것이 아니라 노송에 목매달아 죽은 처녀의 긴 혓바닥과 늘어진 사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은 커다란 싸리 다래끼 속에 들어 있는 죽은 갓난애의 그 푸르뎅뎅한 몸뚱이였을 것이다,
"잘들 보셔. 화사 한 마리, 칠점사 하나, 그리고 요놈 살모사 하나 이렇게 셋을 넣을 거피 말이여."
백 노인이 배암 자루를 벌여 그 끝을 옆에 선 여자 애한테 쥐게 했다. 칠십이 넘은 아버지와 예닐곱 살 딸이 돈벌이를 함께 하고 있는 풍경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백 노인의 얼굴이 점점 교활해 보임은 그 어린 딸 때문인지도 몰랐다. 단발머리의 그 어린것은 노인을 위해서 자루 아가리를 한껏 벌렸다. 노인이 특수하게 만들어진 나무 집게로 자루 속에서 배암 한 마리의 허리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왼손으로 잽싸게 배암의 머리 부분을 쥐었다. 그 다음 서류를 집는 큼지막한 부채꼴의 쇠 집게를 배암의 대가리에 물렸다.
"뱀은 대가리부터 죽이지 않으면 안되어."
그러면서 뱀의 대가리가 물린 쇠 집게를 물이 펄펄 끓는 오지 탕관 속에 담갔다. 몸을 뒤틀며 요동하던 뱀이 불과 30여 초 후에 축 늘어졌다. 그러나 뱀은 아직 죽지 않고 있었다. 백 노인은 그 덜 죽은 배암을 양동이 속에 넣은 다음 손가락으로 뱀 비늘을 훑어 버렸다. 허물을 벗듯 배암의 뱃가죽 비늘이 벗겨지자 백 노인은 아직도 산 배암을 끓는 물 속에 덤벙 집어넣고 오지 뚜껑을 닫아 버렸다. 불과 2분도 안 되는 사이에 끝나 버린 것이다. 무엇이든 그 일에 숙련된 전문가가 하는 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과 일종의 미학적 충동까지 불러일으킨다. 백 노인이 두 번째 배암을 죽이기 위해 나무 집게를 자루 속에 집어넣을 때였다.
아카시아 숲에서 매미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참매미의 그 세찬 울음소리가 갑자기 내겐 하모니카 소리로 들렸다, 내가 하모니카를 불었다. 꽤액 높은 음으로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심겨와 그 아들 기중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기중이의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기중이가 몇 발짝 내닫는가 싶었는데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두 손을 사타구니 속으로 밀어 넣고 몸을 새우처럼 동그랗게 오므려 뒹굴었다. 뒹구는 기중이 곁으로 자루를 빠져 나온 뱀들이 술렁술렁 앵두나무 밑으로 기어드는 게 보였다. 내 느낌에 심씨는 나무 집게를 손에 든 채 꽤 오랫동안 내가 있는 우리 집 안채 쪽을 멍청히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심씨는 어느 새 땅에 뒹구는 기중이한테 달라붙어 살모사가 문 팔목을 입으로 빨아 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중이를 들쳐업고 우리 집 안마당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안마당에서 어쩔까 잠시 망설이더니 바로 우리 집의 바깥채인 병원 쪽으로 달려갔다. 심씨가 아버지를 찾으러 안채로 뛰어든 것은 조금 뒤였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오랜 여행의 여독에 푸느라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심씨에 의해서 잠이 깨어난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짚신을 신은 채 대청에 올라온 심씨의 뺨을 서너 차례 을려 붙였다. 그렇게 뺨을 맞으면서도 심씨는 대청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아버지한테 애원하고 있었다.
"기중인 으르신 자식이 아닙네까?"
심씨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나는 분명히 들었다, 어머니에게 떠밀려 병원으로 나간 아버지는 기중이를 만져 보지도 않았다. 기중이의 까맣게 죽은 얼굴빛만 그윽이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서너 번 흔들고 안채로 되돌아가려 했다. 심씨가 아버지의 모시 바지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아버지가 단호하게 뿌리친 다음 휑하니 안채로 사라졌다. 심씨가 뿌르르 일어나더니 나무 침대에 누워 있는 기중이를 들쳐업고 밖으로 미친 듯이 내뛰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어느 집 중 돼지 한 마리를 심씨가 잡았다는 것이었다. 다짜고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돼지 울에 뛰어든 심씨는 돼지 배를 가른 다음 그 돼지의 뱃속에다 기중이의 팔을 집어넣고 부자가 돼지 피로 흠뻑 젖은 채 몇 시간이고 그렇게 부둥켜안고 있더란 것이다.
기중이가 죽은 것을 안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우리 집 바깥채에 붙은 아버지의 병원 유리창이 모두 박살이 나는 소리에 우리 식구들은 놀라 깨어났다. 병원 문짝이 모두 박살이 나 있었다. 그 어둑한 새벽녘 심씨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마을을 떠나 버린 심씨였다. 6.25사변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이었다. 마을을 떠났던 심씨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 것은 빨갱이 세상이 됐을 때였다.
심씨가 빨갱이가 된 것은 아버지 때문에 기중이가 죽었다고 생각한 때문일 것이다. 빨갱이가 되어야만 우리 식구들을 쉽게 죽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는 빨갱이가 되어 자기 뜻대로 복수를 했다.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외에 우리 식구들은 모두 그의 손에 죽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심씨가 우리 식구들을 죽였다고 하는 것은 다만 내 짐작일 뿐이다. 심씨가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설사 누가 그것을 보았다 해도 이 세상 천지에 혼자 남겨진 아이에게 그것을 어찌 일러주었겠는가. 어쨌든 내가 나이 든 후에 괴로워한 것은 내 하모니카 소리로 해서 어쩌면 나와 한 핏줄이었을 기중이와, 드디어는 내 식구들을 다 잃었다는 그 죄책감에 앞서 심씨가 우리 식구들을 죽였을 것이라고 단정해 버린 그것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 일을 심씨가 하지 않았다고 하면 나는 아직도 심씨에게 부채가 남아 있는 그런 입장에 놓이게 되는 것이기에 어쩌면 부질없는 한낱 감상주의에 불과한 그러한 생각을 근거로 하여 내가 가끔 괴로워하고 그 고통을 벗어나려 안간힘 하는 그런 일을 두고 내 아내는 위선(僞善)이라고 못 박아 버리곤 했다. 이를테면 영채를 향한 내 미묘한 감정의 움직임 같은 것.
달맞이꽃 2
"어머니, 배 안 고프세요?"
은주가 말한다. 다른 집 애들처럼 엄마란 호칭을 쓰지 못한다. 배고프다고 떼를 써야 할 그런 나이에 간접 화법을 써 제 의사를 전한다. 몸뚱이와 나이만 어릴 뿐 생각하는 건 그대로 어른이다. 얻어다가 기르는 애라는 걸 알 턱이 없을 것이지만 뭔가 전해지는 느낌이 없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다. 물론 은주가 그처럼 눈치꾸러기가 된 건 전연 내 탓임을 알고 있다.
나는 이때까지 은주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은주가 집안에서 전연 사랑을 못 받는 건 아니다. 어머니가 이 아이를 친손녀처럼 보살폈고 남편이 또한 남의 집 아빠들처럼 사랑의 손을 주었다. 어머니나 남편은 진정으로 은주를 사랑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은주에 대한 사랑이 내 자존심에 상처를 낼 것을 몹시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1네들은 내 눈치를 보아 가며 야금야금 은주를 보살폈다.
새엄마래, 은주가 제 친구들한테 내놓고 그렇게 말하는 걸 어머니가 들었던 모양이다. 네 뱃속으로 애를 낳지 못하면 남의 자식이라도 사랑할 줄 알아야지,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어머니는 내가 애낳이를 하지 못하는 것이 전연 자기의 책임이라도 되는 듯 사위 앞에 얼굴을 쳐들지 못했다.
서른 세 살에 남편과 결혼했다.
"용 선생이 결흔을 하다니! 정말 서쪽에서 해가 뜨겠는걸."
동료들이 흉을 보았다. 저렇게 차가운 여자가 어떻게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애를 낳고 가정을 꾸려갈 것인가를 회의하는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그네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백 번 옳았다. 나는 결혼 초부터 2년여는 그런대로 이것이 가정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 수 있었다.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그렇게 내가 잠시나마 행복이란 걸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전연 남편의 일방적인 양보와 관용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나는 한 지아비의 아내가 될 여건을 너무나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남편의 그 끈질긴 애무에서 시작된 잠자리가 끝났을 때 우리는 서로 몸을 떼고 오랫동안 침묵해야만 했다. 그 침묵의 시간에 나는 달맞이꽃이 흐느끼듯 핀 그 개울가를 생각했다. 아버지 얼굴이 보였고, 아버지가 죽인 점수 삼촌도 보았다. 물방앗간 밖 수차(水車) 바퀴에 거꾸로 걸려 죽은 재명이의 부릅뜬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더 무서운 건 숨소리조차 내기를 겁내고 내 곁에서 침묵하고 있는 내 남편이었다. 잠들지 않은 게 분명한데 남편은 그 숨막히는 침묵으로 내 몸에 더 무서운 결박을 지었다.
"고압니다."
결혼을 전제로 해서 그를 처음 알게 됐을 때 묻기도 전에 자신의 가족 상황을 그렇게 말해 준 남편이었다. 조실부모했지요. 물론 우리의 결혼식에는 그의 친척들이 몇몇 하객으로 나타났고 결혼 후에도 계속 왕래를 하고 있는 편이지만 그네들 역시 남편이 어떻게 고아가 됐는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실상 그네들 역시 남편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한 것 같았다. 남편이 고아라는 사실 때문에 어머니는 더욱 전전긍긍해서 내가 그의 씨를 뱃속에 가져 주기를 고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심이 어떠했는지는 모르나 그는 이쪽에서 그 사일을 두고 안타까워할 때마다 분명하게 잘랐다.
"아이를 원해서 당신과 결혼한 건 아니오."
어떻게 들으면 그것은 여자인 나를 모독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항의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결혼을 한 건가요? 그가 대답했다.
"가정을 갖고 싶었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가정 말이오."
우리들의 아이가 있어야 가정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아이가 없는 가정은 그냥 가정의 껍데기 일 뿐이에요.
"물론 우리의 아이가 있으면 더욱 좋겠지. 그러나 우리 집에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둘이나 있소. 당신의 어머니와 당신의 동생이오. 특허 영채 처제는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한없이 불행한 그런 사람이잖소."
영채를 사람으로 생각해서 억지로 그렇게 내키지 않는 사랑을 베풀 필요는 없어요. 내가 빈정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가 우리 집 군식구들에게 베푸는 마옴 씀씀이를 통해서 그와의 결합은 축복 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자위할 수 있었다.
영채에게 기울이는 남편의 정성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처제가 지금 몇 살이오?"
우리가 결혼했을 때 영채는 스물 셋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신박약아가 그렇듯 신체 기능이 어딘가 모르게 불균형하고 부자연스러워 서너 살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영채는 백치였다. 주의력도 이해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누구 앞에서나 옷을 내리고 대소변을 보는 등 자기 건사를 계대로 할 줄 몰랐다. 언어가 느릴 뿐 아니라 마치 비공(鼻孔)에서 소리가 나오듯 불분명했으며 영채가 구사할 수 있는 단어는 겨우 수십 개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무이 어-엉니, 바-압, 주-라. 어렸을 적 한때 기대를 갖고 입소시켰던 정신박약아 학교에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영채의 지능지수가 40정도라 했다.
"이 정도면 백치는 아닙니다. 노둔이라고 할 수 있겠죠. 노력 여하에 따라서 교육도 가능합니다. 사회에 나가 적응할 정도까지는 기대할 수 없지만 최소한 자기 건사는 할 수 있고, 남에게 자기 감정을 전달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채에게 심한 전간(癲癎) 증세가 없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의 얘기였다. 그런 면에서 영채는 확실히 저주받은 인생이었다. 갖은 병신이었다. 영채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심한 발작을 일으켰다. 내가 가끔 일으키는 신경성 발작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지랄병. 영채는 혼자 우두커니 서 있다가도 갑자기 무서운 것을 본 아이가 놀라 자빠지듯 그렇게 눌을 부릅뜨고 넘어져 경직성 경련을 일으켰다. 땅바닥에 냅다 팽개쳐진 쥐가 사지를 뻗어 경련하며 죽어가듯 영채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호흡도 멈춰진 채 입에 게거품을 내뿜으며 2분 정도 혼수 상태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럴 때 영채를 낳은 어머니마저 얼굴을 돌리며 속수무책으로 멍청히 서 있게 마련이다. 나는 영채의 그 발작이 있을 때마다 저대로 그냥 죽어 주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라왔는지 모른다.
"처제가 저렇게 된 건 언제부터요?"
"세 살."
나는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라고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영채에게 나타나는 그 두 가지 증세는 분명 세 살 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내가 늘 마음속에 한 가닥 구원받고 있는 것은 영채가 지닌 그런 병 증세는 유아기에는 뚜렷하게 진단을 내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정신박약아 학교 사람들의 말 때문이다. 어쩌면 영채는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그런 저주를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내 기억에 세 살까지의 영채가 그처럼 똑똑했던 것으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랬을 것이다-하는 내 추측에서 비롯된 착각일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나는 그때 국민학교를 갓나온 열 세 살 어린 나이였으니까.
"우리 함께 노력해 봅시다."
우리 모녀가 이미 포기한 영채의 문제를 남편이 맡고 나섰다. 영채를 집안의 밀폐된 그 좁은 골방에서 해방시켰다. 어머니만이 돌볼 수 있는 병신 계집애의 뒷바라지를 그가 자진해서 맡고 나선 것이다. 이 세상아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는 병신 딸에게 새 옷을 갈아 입히는 어머니의 손길은 떨리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새끼를 귀여워하면 게게 침을 흘린다는 데 하물며 병신 자식이 사위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남편은 스물 세 살 먹은 계집애를 꼭 갓난 어린이 다루듯 했다. 어머니가 사위를 맞은 뒤로는 더욱 신경을 써서 영채를 깨끗이 가꾸어 놓은 탓도 있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는 영채는 신기할 정도로 바뀌어 갔다. 엉부, 엉부, 꼬옻. 도온 줘라. 어휘력도 늘어갔다. 서른 중반의 사내가 집에서 시간만 나면 영채와 어울려 소꼽 장난을 놀듯 그렇게 어울려 놀아주었다. 매일매일 장난감을 사다가 안겨주고 어떤 때는 우정 시간을 내어 영채에게 동물원 구경도 시켜주었다. 영채가 한 달에 한번씩 하는 그 발작 증세에 대해서도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게거품을 닦아주는 등 세심한 데까지 신경을 샜다. 어떻게 보면 이 이가 영채는 무슨 실험 대상으로 쓰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매일 매일이 철저했다. 또 처음에는 갓 결혼한 부부로서 아내나 장모에 대한 한낱 예우의 표시로서 그렇게 하는 거겠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영채에 대한 남편의 정성은 한낱 동정심에서 우러난 그런 상투적인 사랑이 아님을 곧 알아낼 수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을 무서워하던 영채가 사람을 따르기 시작한 일이다. 짐승처럼 골방에 처박혀 하루 내내 낮잠을 자던 영채가 햇볕을 쬐고 싶어 마당을 거닐었다. 언니인 나를 그처럼 무서워하던 아이가 내가 퇴근해 돌아오면 제 손수 문을 따 주고 손을 내밀었다. 제 형부가 돌아오면 숫제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이처럼 사랑 받기를 강요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 앞에 어머니는 그것을 대견스러워하기에 앞서 내 눈치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영채가 남편에 의해 기적처럼 살아오르고 있는 사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더욱더 영채를 멸시했고 나한테 송구스러워하는 어머니에 대해서도 형언하기 어려운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어머니에게 그것이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남편이 영채를 마당에서 데리고 놀고 있을 때 어머니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남들이 보면 흉보겠재?"
당신의 눈에도 사위가, 아무리 병신인 딸이긴 하지만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영채와 저처럼 어울리는 게 보기에 이상했던 모양이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어머니가 말했다.
"한 서방이 나이는 많고 아직 애기가 없어 그런 거다."
어머니가 그런 의견을 내놓았고 나도 못이기는 체 따라 한 것이 영아원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일이었다. 남편도 어쩐 일인지 순순히 따랐다. 우리가 찾아간 그 영아원에서 그때 우리 앞으로 입양시킬 아이는 은주 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더 기다려 사내애를 데려오자고 했지만 남편은 그것을 마다했다. 결국 은주를 데려오게 됐던 것이다.
은주를 데려온 뒤에도 남편은 영채에 대한 그 정성을 그대로 쏟았다. 물론 은주를 내 자식이라고 생각한 남편의 은주에 대한 사랑도 명색이 에미인 나보다 훨씬 더 짙은 것임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즈음 어머니와 영채가 집을 나갔던 일이 생겼던 것이고, 그 일 이후부터 우리 내이는 가슴에 서로 더 깊은 강을 파 이제는 아무리 애써 헤엄쳐도 건널 수 없는 그런 강물이 흐르는 몇 년의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한집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되 가족이라는 형식적 개념의 틀 이상의 그 어떤 따뜻한 감정의 교류도 갖지 못난 부부. 불 꺼진 가슴들의 그 공허한 대화. 그 몇 년 세월은 우리 내외에게 있어서는 글자 그대로 천형(天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나 그이나 모두 마흔 세 살.
은주가 틀어놓은 트랜지스터에선 1시 시보가 울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은주에게 점심을 차려 주었다. 주방에서의 모든 것이 서름하기만 했다. 내 집 내 부엌인데 찬장을 열어보면 남비 하나 하나가, 깨끗이 씻어 엎어놓은 그릇 하나 하나가 모두 낯설기만 했다. 어느 것이 맛간장인지 어느 것이 집에서 담근 간장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고 막상 젓가락 하나를 맞춰 놓으려 해도 한참씩이나 더듬대야 했다. 어머니가 영채와 함께 집을 나간 이 일주일이 내게는 온통 서름한 것뿐이었다. 오직 어머니의 손길에 의해서 길들여진 집안 구석구석의 가재 도구들이 내가 서름 서름 다가갈 때마다 요란한 비웃음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오직 두 딸을 위해서 그 치욕스런 삶을 지탱해 온 내 어머니의 30년 세월이 한꺼번에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어 마치 가위눌리듯 그렇게 덮쳐 오고 있었다. 병원의 그 피 걸레를 빨아 딸의 학비를 댄 어머니, 병신 자식이 발작을 할 때 혀를 깨물어 그 피가 턱으로 벌창을 이루자 당신 스스로의 혀를 깨물어 영채와 함께 십여 일 입에 곡기를 넣지 않은 그 무서운 모정,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키운 딸자식의 눈치를 보며 딸네집 식모살이를 해 온 어머니, 두 딸의 얼굴을 매일매일 바라보면서도 30년 저쪽 그때 겪은 그 치떨리는 얘기를 단 한마디도 서로 나눌 수 없었던 그 견딜 수 없는 형벌의 시간.
"어머니, 외할머니하고 이모 언제 오시는 거예요?"
마루 한가운데 뎅그라니 앉아 밥을 먹고 있던 은주가 물었다. 눈이 유달리 까맣고 살갗이 또한 검다. 저 애를 만든 그 당사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수없이 생각해 왔고 그 생각에 이를 때마다 혐오로 몸이 떨렸다. 적어도 저 때는 정상적인 남편의 관계로 만들어진 애가 아닐 것이라는 불결한 생각 때문이었다.
"은주야, 이제부터 어머니라고 부르지 마."
좀더 따뜻하게 얘기하려 했지만 내 목소리는 내가 생각해도 뻣뻣하고 차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어머니?"
"엄마라고 불러라."
"어머니가 야단했잖아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밥이나 먹어!"
나는 결국 퉁명스럽게 내쏘고 말았다. 내 눈치를 보며 내 기분을 맞추려고 스스로 저 자신을 길들이는 여섯 살 먹은 계집애에 대한 형언하기 어려운 적개심이 살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남편에 대한. 수년간 내가 품고 지켜 본 적개심이기도 했다.
남편은 8년여를 여일하게 영채를 길들여왔다. 길들이기, 남편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바로 길들이기다, 자유주의자인 남편은 인간이 길들여지는 획일적 사회를 혐하는 것 같았다. 그가 근무하는 직장이, 그리고 그가 담당한 부서가 그런 것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공산주의의 그 막히고 닫힌 체제에 대해서 남다른 적개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 이유 중의 하
나는 인간의 우상화였다. 우상이 있는 집단에서는 인간이 그 존엄성을 잃고 만다는 것이었다. 오직 길들여진 인간만이 우상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는 논리였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그가 구제 불능의 저능아를 길들이는 일에 열중하고있었던 것이다.
"영채는 인간이지 짐승이 아니란 말이에요. 영채를 길들이는 일일랑 제발 그만두었음 좋겠어요."
"길들이다니, 말두 안 되는 소리!"
그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노여움의 불꽃이 눈 속에 역력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것은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이오 - 그런 뜻의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 그는 가끔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가 사용하는 사랑이란 어휘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세속적이고 흔해 빠진 냄새를 풍기는 대신 여름 대낮 소나기 쏟아져 내린 뒤의 풀밭에서 느끼는 것처럼 쇄락한 것이었다. 나는 가끔 그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나 궁금히 여겨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종교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종교를 갖게 된다고 하면 확실히 그의 능력은 지금의 수십 수백 배로 팽배되어 초자연적인 이적을 이를 수 있으리라고 따는 늘 생각했다. 확실히 그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한 힘이 주어져 있었다. 그것은 고가 지닌 신앙의 힘일 것이다. 종교 생활의 한 신자가 어떤 절대자에 갖는 그런 의식적 측면으로서의 신앙이 아닌 자기 자신 속에서 키운 어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힘, 바로 그는 그 힘에 의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의 그러한 완벽해 뵈는 사랑의 힘인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사위와 대화를 나누면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소탈한 웃음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놓을 때마다 이해하기 어려운 배신감을 느꼈다. 그것은 나 자신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한없이 눈물을 쏟으며 고해하고 싶은 그런 충동 때문이다. 오직 사람을 미워할 뿐 남에게 나를 줄 줄을 모르는 나의 식어 버린 심장을 그에게 내보이며 통곡하고 싶은 것이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날, 어제의 상처를 자랑처럼 구실 삼아 오늘의 삶을 저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오. 남편이 그렇게 말해 주기를 그의 무릎 밑에 꿇어앉아 기다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새 입을 앙물고 집안에 떠도는, 나를 배신한 어머니의 웃음소리를 죽이기 위해 발작을 하곤 했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내가 바란 대로 다시 음울하고 처연한 본연의 얼굴을 되찾아 사위가 애써 피워 올린 마술의 안개를 걷어 우쭐거리는 내 남편을 당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아, 영채 이모두 은주처럼 이렇게 하나, 두울, 세엣,,,,,. 그렇지! 아주 잘 했어요.”
남편은 거의 매일 아침 마당에서 은주와 영채한테 TV에 나오는 미용체조 비슷한 운동을 시켰다. 여섯 살 은주가 깔깔거리고 서른 세 살 영채가 짐승 같은 소리로 키들키들 웃는다.
"얘, 은주 에미야, 영채한테 경도가 있구나,”
4년 전 은주를 집에 들여오던 해 봄 어머니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양 내 귀에 속삭였다, 사실 놀랄 일이었다. 스물 여덟 작년까지 일체 그런 흔적도 찾을 수 없던 영채 몸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아무리 신체의 발육이 불완전하다 해도 그 나이까지 멘스가 없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라고 병원에서도 말했던 것이다. 스물 아홉에 비로소 여자가 된 영채였다. 놀라운 것은 이제까지 왜소하고 짜브라졌던 영채의 신체가 몰라보게 펴지기 시작한 일이다. 얼굴도 뽀오얗게 피어올랐다. 가슴도 눈에 띄게 부풀고 궁둥이도 팡파짐하게 되었다. 더 놀라운 일은 영채가 수줍음을 타는가 하면 사내 앞에서는 얼굴에 교태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허 제 형부한테 그랬다. 형부가 퇴근해 올 시간이면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고 꼭 원색 계통의 옷만 입었다. 그것도 수십 번씩 입었다 벗었다 안절부절이었다. 어머니는 진작부터 그러한 사실을 알았을 테지만 일체 내게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몸이 아파 결근한 그 하루 나는 영채의 일거 일동을 한 여자의 육감으로서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 모든 영채의 변화는 십여 년 동안 남편이 기울인 그 노력의 결과였다, 가히 기적이라고 해야 할 그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영채의 변화는 한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일으키던 그 전간 증세의 회수가 서너 달에 한번 정도로 줄어든 일이었다. 그 대신 영채는 멘스를 .전후해서 신경질적으로 난폭해졌다. 이유 없이 심술을 부리고 은주와 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손에 잡히는 물건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남편이 구해다 놓은 단 한 점의 이조 백자를 박살낸 것도 영채가 멘스를 할 때였다. 때로는 제 형부의 구두나 옷 같은 것들을 저만 아는 곳에 가져다 숨기기도 했다. 내가 그처럼 무섭게 화를 내고 심지어는 머리채를 휘어 감아 방바닥에 태질을 쳐 짓밟아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영채는 차츰 나한테까지 적의를 품고 으르렁거렸다. 심지어는 내가 남편과 함께 있는 기색만 보이면 느닷없이 문을 열기도 하고 때로는 이상한 행동으로 남편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
"이제 처제가 정상적인 생활인이 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오. 지금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처제의 그 모든 행동은 인간의 가식 없는 원초적인 모습인 것이오. 정상인으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순수한 감정의 표출이지."
내가 어느 날 영채의 머리채를 휘감아 방바닥에 태질을 쳤을 때 남편이 한 말이었다. 영채의 이러한 기적과 같은 변화로 해서 내 눈에는 남편이 보다 의기양양한 얼굴을 여보란듯이 내보이는 것만 같았다. 사실 나는 여자의 육감으로써 남편이 영채를 처계가 아닌 하나의 여자로 보고 있다고 못박아 생각했다. 남편의 눈에서 그런 빛이 보여졌다. 이즈막에 이르러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남편은 그의 남자가 살아 있음을 과시하려 들었다. 그-외 몸에서 전에 맡을 수 없던 남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어쩌다 그의 손길이 내 몸에 닿을 때 나는 송충이를 목덜미에 느끼듯 자지러지게 놀라 그의 손을 밀쳐내곤 했다. 아, 불결해. 나는 내놓고 남편을 경멸했다. 그러나 내가 무서워했던 것은 남편이 영채를 여자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그것에 앞서 그가 영원히 잠재운 영채의 의식을 깨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영원히 잠자야 할 영채의 그 눈이 떠진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굴욕인 것이다. 영채는 기어코 삼십 년 저쪽 세 살 눈으로 바라본 그 기억을 되살러 내 이마에 대못을 박고 말리라.
영채의 그 눈은 작은 악마가 되어 내가 지금 이쯤이라도 이룩한 내 안락한 뜰의 화초를 여지없이 짓밟아 버릴 것 같은 위구심이 불쑥불쑥 치솟을 때마다 나는 영채의 잠자는 의식을 되살려 내는 남편에 대해 적개심을 키워 갔던 것이다.
그럴 즈음 그 일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신이 우리 모녀들에게 내린 또 하나의 저주요, 형벌이었다.
"얘야,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어느 날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나자 어머니가 얼굴이 온통 사색이 되어 헐떡거렸다, 내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얘기하고 싶은 걸 저녁을 다 끝낼 때까지 참느라고 무진 안간힘을 한 기색이 역연했다. 남편은 그때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영채가 글쎄,,,,,,"
어머니의 사색이던 얼굴이 차츰 풀리면서 자포자기한 그런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나는 불현듯 영채의 첫 생리일에 어머니가 보인 그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쉽데 또 그래요? 내가 짜증을 부렸다.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영채가 글쎄,,,,,, 홀몸이 아닌 것 같구나. "
그 날 밤 물레방앗간에서 몇 번인가 서로 마주보던 그런 암울한 절망의 눈으로 우리는 잠깐 맞부딪쳤다. 어머니가 나보다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여러 징후로 미루어 영채가 임신을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우리 모녀는 맥을 놓고 주저앉았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눈에서 마을을 떠나며 재명이의 어깻죽지를 물던 그때의 파란 불꽃을_보았다. 살기였다.
밤 낮게 돌아온 남편이 세수를 하고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펴 들자 나는 내 감정의 삽입 없이 영채의 임신을 알렸다. 그리고 숨을 흑 들이마시며 남편의 표정을 읽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처음에는 남편이 못 믿어 하는 눈치였다. 그 다음은 눈을 크게 치뜨고 경악했다. 그리고 나서 남편은 신물을 들었던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의 눈 속에 내가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한 그런 무서운 혐오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었던 신문을 차곡차곡 개어 탁자 밑에 넣은 다음 아주 조용한 동작으로 일어나 찬장 속에서 몇 년째 그렇게 처박혀 있던 양주병을 꺼내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그 양주병이 삼분의 이쯤 비어 있는 걸 발견했다. 사위가 귀가해 다음날 늦은 시간 출근하기까지 어머니는 일체 그네들의 골방에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암울한 뿌리를 가진 파멸의 그림자가 집안 구석구석 숨어들며 궁궁궁궁 조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누가 영채의 몸에 저주의 씨앗을 뿌렸는가- 이 마당에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저주의 씨앗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어쩔 것인가.
우리 집 식구들은 누가 누구에게인지 모를 그런 침묵의 시위를 계속했다. 항상 침체된 집안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그처럼 부심하던 남편마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가 평소 즐기지 않던 술까지 먹고 밤늦게 돌아와 곯아떨어지곤 했다. 어머니는 나한테까지 그 얼굴을 내놓기를 꺼려 내가 잠 깨기 전 미리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놓곤 당신 방에 숨어 버렸다. 은주도 집안 식구들 눈치를 살피며 비실비실 배돌았다. 그러나 그 당사자인 영채는 미운 벌레 모로 긴다는 격으로 안하무인 집안을 설치기 시작했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임신녀들의 그 입덧이란 걸 영채가 시위라도 하듯 보여주었다. 구역질을 하는 것은 그 첫 단계였고 영채는 주방의 찬장을 마구 뒤지며 눈을 번들거렸다. 제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은 두말없이 쏟아 버렸다. 제 형부가 받고 앉은 밥상 위의 김치 그릇을 들어올려 마당에 팽개치기도 했다. 무엇이 먹고 싶은데 그것을 먹지 못해 걸신들린 아이처럼 눈을 희번덕이며 이웃집 찌개 끓는 냄새에도 코를 벌름벌름 짐승처릴 으르렁거렸다. 항상 입에 침이 고이는지 거품을 버버하게 물고 집안 아무데나 침을 뱉었다. 한창 부옇던 얼굴이 몰라보게 짜브라 들면서 기미까지 끼었다.
그런 중에도 영채는 제 형부의 얼굴이 방에 보이지 않으면 몹시 신경질을 부렸다. 차마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영채의 그런 작태가 죽음처럼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계속되었다. 파는 새벽에 잠이 깨어 집안이 괴괴하면 가슴을 두근대며 마루로 나가 그네들의 방안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가 영채의 목을 졸라 죽이는 환영 속에 하루해를 보냈다. 퇴근 때면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초인종을 눌렀으며 대물 속에 그네들의 얼굴이 보이게 되는 순간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몸을 멀어야 했다.
집안 식구들의 그 고통스러운 침묵의 시위를 가장 먼저 깬 것은 남편이었다. 영채의 임신을 확인한 지 열흘쯤 뒤였다. 어머니도 차마 못하는 일을 그가 했던 것이다. 남편은 퇴근길에 입덧하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그런 과일류를 사들고 들어왔다. 영채가 걸신들린 개처럼 헐떡이며 그것을 먹었다. 남편의 얼굴에 전에 보이던 온화한 빛이 되살아났다. 은주를 안아 올린 다음 춤을 추듯 빙그르르 돌았고 은주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집안의 가라앉은 공기를 일렁거려 놓았다. 그는 영채를 위해 늘 하던 그 아침 체조를 시작하고 있었다. 영채가 수줍음을 타듯 몸을 조그맣게 사리며 남편의 팔에 매달리는 흉물스러운 꼬락서니를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의 마음에 어떤 심지가 굳어졌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한 남편의 작심에서 비롯된 영채에 대한사랑표시가 우리 모녀를 무심중 의기 투합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남편에 대한도전이었다.
"어머니, 영채를 내일 병원에 데려갑시다."
"병원?"
며칠 새에 몰라보게 폭싹 짜브라진 어머니가 멍청한 얼굴을 들었다.
"애를 떼어야 하잖아요! "
"그래야 하겠지."
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푹 꺾어 내리며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애비도 모르는 자식을 낳게 할 순 없잖아요. 설사 애비가 나타난다 해도 영챈 애를 키울 능력이 없어요."
한참 뒤에 어머니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입엣소릴 했다,
"글쎄다."
"글쎄라니요? 재가 애를 낳을 수 있어요? 낳아서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란 이제 진저리가 나서 못 살겠어요. 정말 죽고 싶어. 그때 다 죽어 버려야 했어. 왜, 그때 다 죽어 버리지 않은 거야?"
그때, 그때란 말을 30년 그 세월 동안 단 한번도 써오지 않았었다. 어떻게 감히 그 말이 우리 모녀 사이에 넉살 좋게 끼여 들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열화 치민 내 입에서 저주받아야 마땅할 그 말이 쏟아져 나오고 만 것이다. 나는 붐을 혹 들이쉬며 내친 걸음, 기다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끝 하나 미동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쪽져 틀어 올린 머리 밑 목덜미에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낳자는 게 아니구먼서두."
어머니의 입에서 풀죽은 소리가 나왔다, 와락 울음이 터질 뻔했다. 그러나 30년 그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단 한번 울어 보지 못한 울음을 어찌 지금 터뜨릴 수 있겠는가.
"한 서방한텐 의논했냐?"
"그이하곤 관계없는 일이 야요."
"그래두---"
뭐가 그래두야요? 어머니의 그 치사한 속셈이 헤아려지면서 또 한번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걸 가까스로 삭여냈다.
"엄마, 이모가요 엄마 화장품을 막 쓰고 있대요오. 입술에다 빨강 거 막 칠하구,,,,,,"
은주가 울상을 하고 다가왔다. 제 형부를 위한, 아니다 한 수컷을 기다리는 암컷의 발정이다. 제 몸에 변화가 생긴 것도 모르는 미개한 암컷.
"내가 낼 조퇴하고 올 거예요."
“그러렴. "
우리 모녀의 의기 투합은 이런 조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날 밤 내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양, 남편이 말했다.
"은주 엄마, 괜히 딴 생각하지 말아요."
"무슨 얘기예요?"
"처제 말이오. 우리 시간 좀 두고 생각해 봅시다."
"생각할 거 없어요. 내일 당장 병원에 데리고 가기로 했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누구 맘대로?"
전연 짐작 못한 건 아니지만 남편의 태도는 완강했다.
"나한테 상의 없이는 처제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말아요."
"당신이 참견할 문제가 아냐요. "
"참견이 아니오."
"영채는 내 동생이에요."
"맞아, 당신은 내 아내고."
뜻밖에 남편의 어조가 부드러웠다. 그것이 내겐 더욱 흉물스럽게 보였다.
"어떻든 걔 문제는, 은주 아빠가 참견해선 안돼요."
"그럴 순 없지."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이유는 간단해, 우린 모두 한 식구잖소!"
남편은 철저했다. 그냥 오기로 그래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날 밤 그가 어머니를 불러낸 것이다.
"어머니, 처제 문제에 대해선 우선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한 서방 볼 면목이 없네."
어머니는 정말 사위 앞에 무릎이라도 꿇듯 그렇게 몸을 단정히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처제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씨가 누군지도 모르는 앨 낳게 할 수는 없잖은가."
"아닙니다. 씨가 누구이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식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내치신 은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걸 누가 키우나?"
"처제 자신이 키울 수 있습니다. 처제가 스스로 애기를 키울 수 있도록 우리가 곁에서 도와주면 됩니다."
나는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네들 사이에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그 음흉한 음모.
"아직두 늦지 않았어요. 우리 헤어져요. 그래야 은주 아빤 자식을 낳을 수 있어요."
내가 소리쳤다.
그러나 남편은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제부터 어머니 책임이 크십니다. 처제와 처제 몸 속의 생명까지 어머니께서 생각하셔 야 하니까요."
고개 숙여 단정히 앉은 어머니의 몸체가 더욱 작아 보였다. 나는 그러한 어머니를 내려다보면서 내 가슴속에 혐오의 불길을 당기고 있었다.
다음날 내가 일찍 퇴근해 보니 이미 남편이 집에 와 있었다. 어머니가 내 눈을 퍼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사위한테 전화를 걸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신도 벗지 않은 채 나는 계 형부 곁에 서 있는 영채의 팔을 나꿔채 대문 쪽으로 끌었다.
"왜 이러는 거야?"
"몰라서 물어요?"
"안돼!"
영채를 가운데 놓고 끌고 당기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마당 한가운데서 벌어졌다, 어머니는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그때 느닷없이 영채가 내 어깻죽지를 물었다. 30년 전 어머니가 마을을 안 떠나려고 발버둥치는 재명이의 어깻죽지를 그렇게 했듯. 내 손아귀를 벗어난 영채가 집안으로 숨어 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무서운 그런 짐승 같은 소리가 내 입에서 나왔다. 영채가 하던 그런 발작을 내가 시작했던 것이다.
내 히스테리 증세가 가라앉자, 어머니까지 불러낸 자리에서 남편이 말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머니, 모두 제 책임입니다. 처제 몸 속의 애기는 바로 제 자식입니다."
연극 배우가 그럴 것이다. 남편의 어깨가 들먹거리고 있었다. 방바닥 장판지의 이음매를 문지르고 있던 어머니의 손가락이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거짓말. "
탈진한 상태에서 중얼거린 내 말이 까마득 먼데서 되울려 오고 있었다. 거짓말,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몸에 힘이 싸악 빠지면서 나는 그대로 방바닥에 누워 버렸다.
"엄마, 할머니가 이모, 병원에 데리구 갔다 온댔어요."
다음날 집에 들어오니 은주가 그렇게 일러주었다.
드디어 어머니가 영채를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던 것이다.
망 초 3
한 시 정각이었다. 반곡에서 나가는 막차까지는 아직 세 시간 반이나 남아 있었다. 백 노인과 함께 개울 징검다리에 걸터앉아 물 속에 발을 담근 채 콩국을 먹었다. 국수도 집에서 밀가루 반죽을 해 방망이로 민 다음 직접 칼로 썬 것이었다. 등산객을 끌기 위해 얼굴에 화장까지 야하게 한 촌 아낙네가 그것을 팔았다. 야하고 천박한 화장인데 그것이 오히려 산에 드는 사람들에겐 선정적 일 듯싶었다.
"선상님, 저 여자 멫 살이나 돼 보입니까요?"
그 아낙네 쪽으로 내 눈이 자주 가는 걸 알았는지 백 노인이 은근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한 마흔? "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요. 실은 저 여자 올 해 꼭 오십 하나라요. 남편이 사변 때 불구가 됐답니다. 허리를 못 쓰니께 그 능력두 없다는 겝니다요."
"상이 군인이군요 ? "
"웬걸입씁죠. 상이 군인이면 원호금이나 타 먹을 게 아닙니까요. 사실은 사변 때 반곡 빨갱이한테 매를 맞아 그렇게 됐다는 겝니다요. 조 아래 매실이라는 데 살지요."
"자식은 있습니까?"
"딱 하나 있습지요. 그 아들이 나한테 뱀을 대주고 있는뎁쇼. 헌데 저 여자나 그 아들이 빨갱이라면 지금두 이를 갈아요. 간첩이 나타나면 지금두 이를 갈아요. 간첩이 나타나면 그걸 신고해서 상금을 타겠다고 맨날 벼르고 있습지요. "
콩국을 파는 아낙네가 콩국이 든 동이를 버들 숲 그늘진 웅덩이에 담가놓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게 돌로 괴임질을 하고 있었다.
내게서 콩국을 얻어먹은 백 노인이 허리를 수십 번 굽실거리며 신작로로 오르는 나를 배웅했다. 산 속이 온통 매미 울음소리였다.
반곡리로 오르는 신작로 위에 여름 대낮의 햇볕이 유난스레 따가웠다. 나 혼자 걷는 길이었다. 울울한 녹음을 뒤집어쓴 좌우의 산기슭에서 멧새가 울었다. 매미 울음소리 같은 건 이미 내 귀에는 소리가 아니었다. 길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도 여름 산의 그 적요한 침묵이 무서워 그닥 높은 소리를 내지 않는 것 같았다, 산비탈을 무성하게 기어오르는 침넝쿨은 잡목가지에 그 줄기를 감고 너른 잎을 너울거렸다. 그러한 칡넝쿨은 산비탈이 끊겼다는 걸 증거라도 하듯 길 밑 개울 둑방에 남아 있어 중키의 북나무 가지를 포박한 다음 그 옆 아카시아 덤불까지 파고드는 그악스러움을 보이고 있었다.
길가에는 이제 막 자잘한 꽃망울을 매단 질경이가 그 선명한 잎맥을 가진 잎줄기에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무성히 퍼져 있었다. 패랭이꽃이 연약한 대로 유독 돋보였다, 시들시들 꽃잎을 오므린 달맞이꽃이 꼭 종(鐘) 모양의 꽃자루를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 어쩐지 좀 처연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휜 꽃.
흰 것은 정확히 말해 빛깔이 아니다. 모든 색소를 거부한 그 순수한 것을 우리는 마음대로 백색이라 이름지었다.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수한 것마저 자기와 동류(同類)로 올려 놓고 그 횐 것을 흥 보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매사에 범하고 있다. 내 처제 영채를 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이 그랬다.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주받은 것으로 단정해 놓고 멸시하면서 우쭐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닌가. 누가 그네의 그 순수를 감히 범할 수 있었던가. 하늘이 내린 섭리가 아니라면 어찌 그런 자가 그 당장에 저주받아 혀를 물고 나뒹굴어지지 않겠는가. 만일 하늘이 내린 뜻이라고 한다면 그네가 지금 어디선가 겪어내지 않으면 안될 그 고통은 더욱 부당한 것이다. 하늘의 뜻을 헤아리게 하기 위한 그네에게 준 시험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어찌 하늘이 그네를 시험할 수 있겠는가. 내게 추종하는 신이 있다면 나는 지금 이 시간 이 적요한 산골짜기 하늘로 향한 이 신작로 바닥에 엎드려 고해하리라.
신이여, 벌하소서.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그네를 범한 이 죄인에게 벌을 내리시옵소서. 설사 그네를 범하지 않았다 해도 마음으로 간음한 그 죄 더 크옵나니 내 몸 속에 아직 살아 있는 그 저주받을 음심(淫心)을 깡그리 불태워 벌하소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허울로 사랑이란 무기를 만들어 그처럼 깨끗한 영채를 하나의 암컷으로 보려 한 이 죄인의 위선을 만천하에 알려 귀감을 삼으소서. 만약 누군가 그네를 범하지 않았고 또한 그네가 수태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랜 세월을 마음의 간음을 하며 사랑이란 위선으로 내놓구 내 이웃을 속였을 것이 분명한, 이 일깨움을 주신 신이여 더욱더 큰 깨우침을 주시어 이 세상 어딘가에 던져져 신음하고 있는 영채와 그리고 더욱 큰 고통으로 시험받고 있는 내 장모님, 내 아내에게 반딧불 같은 빛이라도 비출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나는 정말 영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저주하고 혐오했다. 그럴 수가 있을까. 보이지 않는 그 인간을 내 손으로 발기발기 찢어 죽이고 짓밟는 환각으로 출근길의 차 속에서는 다리가 후둘후둘 떨렸다. 눈에 보이는 사내들이 모두 내 처제를 범한 그런 치한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는 진정으로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마음의 그 밑바닥에 언제부터인가 어떤 자가 해낸 그런 음심이 싹터 자라오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갓이다. 날이 갈수록 풍만해 가는 그네의 육체를 흘금흘금 훔쳐 본 일이라든가, 그네가 나를 반기는 그 깨끗한 웃음을 요염한 계집의 그것으로 착각하고 어떤 기대까지 가져 본 적이 얼마나 흔했던가. 비록 순간적인 음심이긴 해도 그러한 생각은 쉬임 없이 내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결정적 시기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주 내놓고 생각한 것 중에는 그네가 싱싱한 여자로 되살아나 그네 깨끗한 몸 속에 새 생명체가 다라는 것을 보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그것은 내 진정이었다, 영채가 여자 구실을 하고 그리하여 한 남자를 받아들이는 일에 스스로를 기꺼이 열어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그 거룩한 일을 나는 진정으로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횐 것. 신작로를 타박타박 걷다가 잠시 길가 똘배나무 그늘에 서서 숨을 돌리며 좌우를 둘러보던 중 나는 그 들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온통 청록색의 산야를 바탕 빛으로 하고 하얗게 빛나는 들꽃이 구름처럼 퍼져 여름 대낮의 미풍에 일렁이고 있음을 보게 된 것이다. 어째서 그때까지 그 들꽃이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나는 마치 그렇게 떠올릴 수 없었던 국민학교 때의 친구 이름을 떠올렸을 때처럼 기뻤다. 지천이었다. 가깝게는 내가 걷는 신작로가는 물론이고 산비탈 묵은 밭이면 어느 곳이나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바로 그 꽃이었다.
그때 30년 전 여름 그 마을을 떠나 할아버지가 계신 고향을 향해 그 먼 신작로 길을 혼자서 며칠이고 걸으며 눈이 시리도록 본 그 꽃이었다. 그때 그 길가에서 본 들꽃의 이름을 나는 아직 모르고 있다. 30년의 시간이 지난 이 시간 다시 그 꽃을 보면서 비로소 그 이름을 꼭 알아두리라 다짐하던 것이 모두 실현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하긴 화원에 들러 몇 번 물어본 기억도 있지만 그 화원 사람들은 흔한 들꽃 이름을 어찌 알겠느냐고 시큰둥 대답하곤 했다. 알고 보면 아마 꽃이 이처럼 지천인 것처킵 그 이름도 흔해 빠진 것일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때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당신에게 뭔가 오는 게 없고서야 그런 수가 없었다. 밖에 나가 놀지 않겠다는 나를 어머니가 사내자식이 집에만 박혀 있으면 큰 사람이 못 된다며 부득부득 내쫓았다. 2년 전 기중이가 죽은 뒤부터 시름시름 앓으며 마을 아이들과도 잘 어울려 놀지 못하고 기신기신 배도는 게 어머니 눈에 퍽 딱해 보였던 모양이다. 난리가 나 인민군이란 사람들이 우리 마을보다 훨씬 아래까지 내려갔다는데 아직 우리 마을에는 이렇다할 변화가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로 미루어 전쟁이 터졌다는 걸 알 정도였다. 마을 사람 누구도 피난을 떠나지 않았다. 바로 예가 정감록이 말한 퍼난처여.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함부로 밖에 나다니지 않고 집에만 박혀 있었다. 폭풍 전야의 그 정적처럼 마을 전체가 괴괴하게 가라앉아 있을 때였다. 그런 때 어머니가 나를 밖으로 내몬 것이다.
마을 공회당 앞에 아이들이 대여섯 모여 있었다. 한 아이가 손등에 새매 한 마리를 올려놓고 있었다. 난추니였다. 배 쪽에 적갈색의 가는 가로 무늬를 가진 새로서 아이들이 집에서 길들여 새를 잡는 데 쓰기도 하는 새였다. 난추니의 발목에는 노끈이 매어져 있었다. 그걸 길들이기 위해 산으로 간다고 했다. 난추니가 먹을 개구리 한 마리씩을 잡은 아이만 따라가게 한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어울려 논둑을 싸리나무 가지로 치면서 개구리를 잡았다. 아이들이 떼지어 노고산 중턱까지 올라간 것은 거의 해질녘이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난추니는 쉽게 길들여지지 않았다. 찢어낸 개구리를 포식한 놈이 날아다니는 새 같은 걸 거들떠볼 턱이 없었다. 우리들은 그 일에 곧 싫증이 나자 편을 갈라 병정놀이를 했다. 먼 마을에서 대포 소리가 들려 와 우리들의 병정놀이는 제법 실감이 났다. 그 놀이 중에 한 아이가 뱀을 발견했다. 대가리가 세모진 살모사였다, 기중이를 물어 그 독으로 죽게 한 그런 뱀이었다. 아이들이 작대기를 들어 그 살모사를 쳐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산을 내리뛰었다. 죽은 기중이를 만난 것보다 더 무서웠다.
그렇게 허둥허둥 내리뛰다가 마을 한가운데 불길이 치솟고 있는 걸 보았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마을을 뒤덮는 속에 그 불길은 거세게 치솟고 있었다. 나는 다리에 맥살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느네 집이구나. 뒤따라 온 아이가 주저앉은 내 옆에서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들고 있는 게 보였지만 우리 집 병원과 그 안채에 불붙은 불길은 좀처럼 수그러질 줄 몰랐다. 우리들이 마을까지 내려왔을 때는 구름처럼 모였던 사람들이 간 곳이 없었다. 다만 거의 타 버린 우리 집만이 그 무서운 열기를 뿜으며 꺼져 내리고 있었을 뿐이다. 마을 사람들이 없어진 것은 마을 입구에 나타난 인민군 오토바이부대 때문이었다. 우리 집이 불타는 것을 신호라도 삼은 듯 마을은 금세 인민군으로 가득 찼다.
우리 집의 불 탄 자리에서 그 열기가 식기를 기다려 마을 사람들이 새카맣게 불타버린 우리 식구들을 꺼내 놓은 건 이틀이나 뒤였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와 함께 마을 공회당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온 동생, 이렇게 세 구의 시체는 모두 몸을 동그랗게 오그린 채 불타 있었다. 다 죽인 뒤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지른 거여. 글쎄 그 얘기가 맞다니까. 우선 죽여 놓고 불지른 게 확실혀.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누구여, 그게? 내가 아나, 본 사람이 없으니께. 시체를 꺼내 식구들의 죽음을 확인하기까지 이틀 밤과 그리고 또 며칠을 나는 눈물 한 방을 흘리지 않은 채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지냈다. 사람들이 말하길 붉은 완장을 찬 사람 중에서 2년 전 마을을 떠난 심씨를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심씨가 우리 식구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내가 그들 곁에 서 있는 줄 모르고 아버지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죽은 사람 두고 이런 얘길 하는 건 안됐지만 그 공의 양반 여잘 너무 밝히다 보니께 죄두 많이 졌을거구먼. 왜 아니래여, 지난해 다리참 사는 이 석만이 딸이 목 매달아 죽은 일만 해도 다 그 공의 양반 때문이 아닌가 말이여. 맞어. 몇 해 전 이 석만의 딸이 애비 모르는 애를 배 가지고 집을 쫓겨났었지. 그리고 목매달아 죽은 걸 작년에 발견했던 거피. 어디 그 뿐인가 말이여. 죽기 전에 낳아서 기르던 앨 그 병원 문턱에 갔다가 놨대지 않어. 아마 애가 죽으니까 이참 저참 살맛이 없어 그렇게 복수나 하고 죽자 해서 그랬을 거구먼. 제 동생 목 매 죽은 시신하고 그 싸리 광주리에 든 죽은 앨 놓고 이 석만이 큰아들이 공의 양반하고 싸움깨나 벌여 쌓더니! 결국 재판까지 했었지. 애초 씨도 안 먹힐 양반을 붙들고 싸옴을 걸었으니 될 게 뭐여. 결국 이 석만이만 재판에 지고 홧병에 아직 누워 있잖은가 말이여. 아니 그런데 그 이 석만이 큰아들두 그게 됐다며?
세상이 바뀐, 이런 흉흉한 마을을 떠나던 날 나는 아버지와 그처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에게서 단 한마디의 배웅 인사도 받지 못했다. 내가 비로소 울음을 터뜨린 것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말고개 위에서 마을을 뒤돌아보았을 때였다. 죽은 식구들에 대한 애통의 울음이 아니라 적어도 내게는 고향인 그 마을에서 서럽게 쫓겨나는 그 설움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고향, 할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그 강원도 땅을 찾아 나선 그 막막한 여정은 온통 눈물이었다. 불 탄 개만하게 불타서 오그라 붙은 내 식구들 - 어머니와 내 동생을 부르며 나는 쩡쩡한 그 여름 한낮을 땀과 눈물 범벅이 되어 걸었다.
전쟁의 그 한가운데를 질러 타박타박 걷는 열 세 살 아이의 울음을 뚝 그치게 하는 공포가 있었다. 길가에 버려진 시체도 보았고 때로는 길 옆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어른들이 벌이는 그 살벌한 놀이로 해서 손이 뒤로 묶인 채 산골짜기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그 묵묵한 행렬도 보았다. 억센 억양의 사투리를 쓰는 병사들이 여섯 바퀴 자동차를 세워 놓고 개울에서 목욕을 할 때 빡빡 깎은 머리의 그 애송이 병사 사타구니의 거뭇한 털이 내 눈을 신기하게 했다, 비행기 소리가 나면 차를 타고 가던 북쪽 병사들이 개미처럼 흩어져 산비탈에 붙곤 했으며 그 무서운 쌕쌕이의 굉음 뒤에 유리창이 박살이 난 자동차가 불붙어 오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 막막한 길 위에 혼자 남겨지곤 했다. 그렇게 혼자 남겨져 닳아 뚫어진 고무신 바닥으로 길바닥의 모래가 올라와 물집이 터져 짓무른 발바닥을 쓰리게 했다. 뚫어진 고무신 바닥에 갈잎을 꺾어 깔다가 문득 발견한 것이 그 들꽃이었다. 산비탈의 멍석딸기 같은 건 부지런히 따먹으면서도 그렇게 흔한 꽃들이 어떻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 길가와 산비탈 묵은 밭에 무성하게 자란, 피침형의 거친 잎사귀를 가진 잡초가 피운 꽃이 그 들꽃이었다.
나는 지금 반곡을 향해 걸으면서 그 들꽃 한 송이를 꺾어 본다, 멀리서 보면 그 들꽃의 무더기가 마치 안개꽃처럼 화사하지만 막상 가까이 대하면 산방꽃 차례를 한 이 꽃 모양은 너무 빈약해 뵌다. 빈약해 보이기에 오히려 들판을 덮은 그 강인한 번식력이 돋보이게 마련인지도 몰랐다. 초라하면서도 강인해 뵈는 잡초 한 포기가 사람들의 눈에서 사랑 받지 못한 채 버림받고 있기에 나는 더욱 애착과 연민을 느꼈다.
풍암 계곡 입구에서 이미 이 곳이 잣나무가 흔한 곳이구나 생각했었는데 막상 반곡에 가까워질수록 온통 좌우의 산들이 짙푸른 잣나무로 덮여 있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 묘목을 심어 몇 년이나 돼야 이런 아름드리 잣나무로 클 것인가. 한때 잣나무 조림을 전적으로 편 양 나무들의 크기가 하나 같았다. 그렇게 더디게 큰다는 잣나무가 이 정도 그러면 아마 거의 백여 년 세월은 흐르지 않았나 싶었다. 잣나무는 모두 그 울울한 가지를 거쳐 상수리에 적은 것은 대여섯, 많은 것은 이십여 개의 주먹만한 잣송이를 거뭇거뭇 매달고 있었다.
이제 마을이 나타나는가 싶은 산 모롱이를 두 번째 돌자 생각하지 못했던 드넓은 벌판이 퍼져, 그것이 모두 경지 정리가 잘되어 반듯반듯한 규모의 논이었다. 아직 이삭이 패이기엔 이른 벼가 물결치듯 쩡쩡한 여름 한낮의 햇볕 속에 펼쳐척져 그대로 그림이었다.
마을 입구에 해당하는 개울가 그런 지점에서 이 길에 들어서고는 처음인 사람 하나를 만났다. 반곡 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가 지나온 풍암 계곡 쪽을 향해 내려오던 사람이 문득 내 옆에서 멈춘 것이다.
"선상님, 어딜 가십니까유? "
말소리는 반가운 이웃 만나 나누는 인사처럼 들렸지만 얼핏 살핀 그의 얼굴은 낯선 사람 경계하는 시골 사람 특유의 그런 의뭉스러움이 엿보였다. 역시, 등산객이 어째서 산에 오르지 않고 먼 마을까지 나타났느냔 그런 의문일 것이다.
"산에 온 길에 이곳 반곡 잣나무가 유명하대서 그냥 구경 삼아,,,,,,"
"아, 그러셨군요. 예, 유명하지유. 그래서 반곡을 모두 잣골이라구 안 부릅니까유."
그가 자랑스런 얼굴로 휘휘 산을 둘러봤다.
"저 잣만 해도 일 년 수익이 대단하겠는데요?"
"수익이 많으면 뭘 합니까. 지금이야 모두 서울 사람 건 걸유. 영일 재벌에서 십여 년 전 다 사 버렸지유. 철광이 있는 가막골까지 몽땅 넘어간 거지유."
그가 아예 자전거에서 내려서며 말했다
"참, 반곡에 옛날 철광 터가 있다면서요?"
"예, 있읍지유. 지난 달에두 전문가들이 노두(露頭)조살 나왔다 갔으니까 다시 시작할 것두 같습니다만서두.”
내가 담배를 뽑아 건네자 그가 십여 미터 앞에 있는 나무 그늘을 가리켰다. 우리는 개울 쪽에 면한 그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호도 나무가 이런 길가에서 제대로 컸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는 그 호도 나무 밑에서 초면인 수인사를 했다. 그는 반곡서 나서 이제까지 한번도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계유(癸酉) 생이라고 자기 출생한 해를 댄 것으로 보면 올해 만으로 마흔 일곱, 육이오 맨 열 일곱, 모든 걸 계대로 봤을 나이다, 최 완선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힌 그가 말했다.
"실은 길에서 서울 선상님 붙잡고 얘길 나눈 건 다름이 아닙니다유. 혹시 이런 걸 안 사실까 해서,,,,,,"
그러면서 자전거 뒤 짐 싣는 데 잡아맸던 쌀자루를 들어 올렸다. 확실히 오늘 일진이 묘했다. 그가 자루 아가리를 묶었던 노끈을 풀자 그 속에 꽤 큰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지금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글쎄 이것이 땅 속에 있잖습니까유. 저 등짝에 흙 묻은 거 좀 보세유. 잡아서 몇 달씩 물만 멕인 것하고는 다릅니다유. 그래 이놈을 잡아 가지고 집에 들어갔더니 설라므네, 애들이구 안식구구 모두 팔지 말고 내 몸보신이나 하라더군유. 실은 저 아래 생사탕하는 노인한테 가져가는 길입니다만 혹시 서울 선상님이 맴이 있으시면 해서
"거기 가져가시면 얼마나 받으실 수 있습니까?"
"글쎄 가 봐야 알겠지만--- 헌데 그 영감테기 우리 동네 살지만서두 평이 영 안 좋아서유. 이건 뱀을 잡아오라 해놓곤 그저 꽁으로 얻으려 덤빈다지 뭡니까유."
"이거 얼마 받으시겠어요?"
나는 그와 말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선상님, 보시다시피 이 뱀이 예사 것이 아니지요. 능사, 땅에 사는 능구렁이라는 겁니다. 아마 저 아래 영감 같으면 기거 한 마리 해주는 데 십만 원은 받아낼려고 할겝니다유."
"그러지 말고 받으실 금액을 말씀하십시오.”
흥정이 틀린 것 같다고 지레 단념하며 내가 재촉했다.
"선상님, 아무래두 사천 원은 주셔야 하겠는대유."
나는 선뜻 오천 원짜릴 내줬고 그가 잔돈을 거스를 일을 염려하자 손을 내저어 그만두라는 뜻을 전했다. 우리들은 그렇게 해서 백년지기처럼 금방 친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서울서 오는 두 번째 차가 막차인, 그래 이곳에서 네 시 반 막차가 될 버스가 손님 네댓 명을 싣고 우리 곁을 지나갔다. 두 시가 조금 넘어서고 있는 시간이었다.
"선상님, 땀 나시는데 저 시원한 데서 목욕이나 허시지 그래유."
최 완선씨가 그런 제의를 했고, 우리들은 신작로에서 잘 안 보이는 후미진 개울 웅덩이를 찾아 거기에 옷을 벗고 들어앉았던 것이다. 대낮인데도 이가 떨릴 정도로 물이 찼다. 버들치 닮은 작은 물고기가 겁도 없이 사람 몸을 톡톡 건드리며 다가왔다간 제풀에 놀라 날렵하게 도망가곤 했다.
"농사 많이 지으십니까?"
"웬 걸유. 땅이래야 쓰잘 데 없는 밭이 그저 천여 평, 논 좀 있던 건 한 십여 년 전에 싹 뺏겨 버리고 말았습지유."
"뺏기다니요?"
"쥔이 나타난 거지유. 얘기하기 부끄러운 말이지만 6.25사변 때 여기 살던 용씨네 집안 땅을 내가 소작을 내어 부쳤지 않습니까유. 난리가 나니까 논 임자 용씨가 떠억 눈이 뒤집혀 빨갱이가 돼 날치더니 그만 식구가 죄다 종적을 감춰 버렸지 뭡니까유. 그런데 거시기 그 논 임자 조카라는 사람이 나서서 부치던 거 그대로 사라는 거예유. 싸개 판다는 거지유. 아, 그때야 문서구 뭐구, 심지어는 그 쉬운 계약서 하나 웂이 사람만 믿고 산 거예유. 어디 살 걸 샀나유. 그거 빛 갚느라고 고생 엔간히 했구먼유. 어떻든 내 논이라고 사 가지고 떵떵거리며 살다 보니까 나라에서 그런 등기 없이 산 땅을 등기 내준다는 특별 조치법을 발표하더군요. 그래 등길 내려구 하는 판인데 정식으로 그 논을 샀다는 사람이 문설 가지고 떠억 나타난 겁니다유. 예, 꼼짝없이 당했지 으쩝니까유. 그 조카란 놈이 이중 매매를 해 처먹고 도망을 친 거예유, 여기 살던 용씨넨 그래저래 난리 끝나구 다 떠나 버리구 웂지만서두 지금 생각함 용 소리만 들어두 이가 갈립니다유. 그래, 으쩝니까 알거지 됐지유. 여기 지금두 옛날 용씨네 땅 샀거나 흑은 배짱 좋아 임자 웂는 땅 그대로 경작하다가 주인 된 사람 더러 있지만서두 모두 이게 또 어떻게 뺏기는 게 아닌가 불안해하는 사람들 많습니다유. 그래 객지 사람만 들어오면 우선 가슴부터 쿵 한다는 겁지요. 그놈에 난리가 뭔지---”
너무 쉽게, 얘기가 제 걼으로 잘 풀려가고 있는 컷 같았다.
"저도 어서 잠깐 들은 것 같습니다만 사변 때 이 부락 희생이 그렇게 컸다면서요?"
"크다마다유! 아, 옛날 으른들 얘길 들어봐두 이 마을이 부촌 중에 부촌으로 알부자만 살았다지 않습니까유."
"그게 모두 용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었겠군요?"
"대부분 그렇습지우. 헌데 사변 얼마 전부터 그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얘기지만 그 용씨 집안이 싹 두 패로 나눠진 겁니다유. 바로 이 잣나무를 심은 산 때문이었지우."
종중산을 놓고 집안끼리 싸움을 벌인 것이다. 애초 수가 많지 않았던 반곡의 용씨 선조들이 대부분의 전답이나 산을 종중 재산으로 공유화해 버린 것이 탈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외지에서 흘러 들어온 용씨들까지 그 연고권을 주장하고 덤볐다. 종중 전답을 분할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고 그러자니 산 같은 건 남한테 팔아 그 재산을 나누자는 결론을 종중 회의에서 결정했다. 시세말로서 부동산 브로커들이 모여들고 그 새중간에서 농간을 놓고 억울한 쪽을 쑤석거려 싸움을 일으키고 결국은 용씨네가 두 패로 갈라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요는 용씨네 땅을 헐값에 사려는 서울 돈 가진 사람들의 농간에 집안이 그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한 항렬을 가진 집안끼리도 재산을 놓고는 의절하게 마련인데 외지에서 들어온 용씨까지 합세해 날뛰었으니 그 싸움이 대단했을 밖에.
"그 외지에서 굴러 들어온 용씨 중에 아주 개차반인 사람이 하나 있었지우. 열 여덟인가 하는 나이에 홀어머니을 모시구 마을에 나타났다는 겁니다유. 어른들 얘기론 용씨 어른들 중에 한 사람이 타향에 나간 길에 외입을 좀 하고 돌아온 모양인데,,,,,,"
마치 옛날 얘기처럼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나서야 그 사생아라고 할 자식이 제뿌리를 찾아 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 씨를 뿌린 당사자도 저 세상 사람이 됐고, 이제 와서 그 핏줄입네 하고 찾아온 걸 내 식구처럼 반가와 맞아줄 사람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특히 그 씨를 뿌린 집안의 자식들이 눈을 부릅뜨고 문턱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 젊은이의 모친은 이 집 저 집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며 자식 하나를 용씨 집안에 접붙이기 위해 자신이 당장 겪는 수모쯤 달게 받으려 했다. 워낙 붙임성이 있는 여자라 그런대로 마을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젊은이였다. 워낙 홀어미 밑에 큰 자식이라 버릇이 그렇게 돼 먹기도 했지만 마을에 들어가기만 하면 상객 취급을 받을 줄 안 것이 막상 와보니 푸대접이라 젊은 혈기에 오기가 뻗치기 시작한 것이다. 못된 짓은 도맡아 했다. 용씨네 가문들뿐만 아니 라 마을의 타성바지들도 그 사람이라면 아예 상종을 피했다. 장가갈 나이가 됐지만 혼처가 나서질 않았다, 인근 마을에서도 그의 행패는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다. 마을의 부녀자들이 그의 불량스러운 눈에 띌 것을 겁내 함부로 밤 나들이를 삼갈 정도였다.
"결국 그 개망나니가 일을 저지르구 만겁니다유. 내가 네 살인가 다섯 살인가 되던 해라구 으른덜이 그러는 걸 보면 벌써 까마득한 옛날 얘기지유. 왜정 시대 아닙니까유. 그때, 조기 보이는 조 등성이 너머 동네가 먹실이라는 덴데.”
그 먹실에 사는 처녀 하나를 그가 범했다는 것이다. 먹실서 한다는 집 딸이었다. 대처에 나가 여학교를 다니다가 여름 방학이 돼 집에 내려오는 걸 그 용씨 집안 피붙이라는 망나니가 철광 사람들이 쓰는 막사까지 끌고 가 일을 저지른 것이다. 때마침 먹실 사람 하나가 그 현장을 목격했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인근 마을로 퍼져 버렸다. 딸을 버린 먹실 사람이 그 망나니를 잡아죽이겠다고 낫을 들고 잣골을 며칠씩 헤맸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그런 즈음에 그 망나니의 모친이 남의 밭일을 하다가 그 조 밭에서 급사를 한 것이다. 아마 지금 말로 심장마비나 고혈압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근 산 속으로 피해 다니던 망나니가 자기 어머니 죽음을 보고 눈이 뒤집혔다. 곧장 먹실로 넘어가 내 어머닐 죽인 게 네 놈들이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난장판을 쳤다. 그런 저런 시비가 해를 넘기게 된 어느 날, 몸을 망치고 종적을 감췄던 그 처녀가 홀연히 잣골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등에 딸 하나를 업고 그 개망나니가 살고 있는 오막살이를 찾아들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부부였다.
"그리고 몇 년 있다가 해방이 된 거구, 거시기 아까 제가 말씀했다시피 그 용씨네 종중 땅 관제로 시끌시끌해진 통에 그 망나니가 앞장을 선 거지유. 요는 백수 건달이 한 밑천 잡아 보자는 꿍심이었겠읍지우."
대충 몸을 씻고 개울가 펑퍼짐한 바위에 걸터앉아 최 완선씨와 담배를 나눠 물었다. 정말 날아갈 것 같다는 표현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숲에서 참매미와 찌르레기가 어울려 합창을 뽑고 있었다. 시골에 흔해 빠진 얘기긴 해도 그 나름의 한 맺힌 여인네의 실상이 가슴에 왔다. 일생을 망치게 해 준 그 망나니 사내를 찾아 그 핏줄을 등에 업고 나타나기까지의 한 아낙네가 겪어낸 갈등과 고뇌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나머지 생을 어떻게 보냈는지. 과장이 조금은 섞였을 성싶은 최 완선씨의 얘기에 나는 넋을 놓고 있었다.
도대체 그 개망나니란 사람의 이름이 뭡니까. 그 개망나니한테 몸을 망치고 결국은 함께 부부가 되어 산 그 아낙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겁니까. 나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최 완선씨, 당신은 지금 그 옛날 이야기 속의 우연성 속에 나를 끌어넣기 위해서 진작부터 벼르고 있다가 오 늘 이처럼 나를 마중 나온 것이 틀림이 없지요? 당신의 자전거 뒤에 매달려 있는 구렁이처럼 당신은 내 속을 샅샅이 읽어내며 능청을 떨어 내 영혼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오. 사람은 이따금 맹랑한 우연 앞에 놓이게 되면 차라리 덤덤해지게 마련이다. 나는 그에게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가 스스로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용만수라고 하면 우리 대일면 일대가 다 알아주는 개차반이었습지우. 설상가상으로 이 개차반한테 빽줄이 생긴 겁니다. 일본 가서 공부하는 중에 이상한 물이 들어 가지고 온 용씨 집안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즈 아버지가 죽자 그 재산을 다 처분해 가지고 대처로 들락거리면서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뭔가 꾸며내는 눈치였습지우. 용 만수가 갑자기 큰 돈을 손에 넣고 펑펑 쓰면서 두 패로 갈라진 용씨 집안의 한 패를 휘어잡기 시작한 겁니다유. 나두 직접 봤습니다만 그 무슨 청년단인가 뭔가 해 가지구 세도가락이 대단했지우. 그러다가,,,,,,"
경찰에서 손을 댄 것이다. 좌익 운동에 가담했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러나 그 안경잡이는 그때 이미 월북을 하고 만 뒤였다. 6.25사변이 터지기 두 해 전이었다. 잡혀갔던 마을 사람들이 그 죄상에 따라 그저 몇 달에서 길게는 1년 반까지 옥살이를 하고 돌아왔다. 용 만수가 가장 늦게 나온 편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으르렁거렸다. 두 패로 갈린 한 쪽에서
찔러넣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그처럼 고생했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사변이 나기 전까지 마을을 흉흉하게 만들며 날뛰었다
"좌우지간 세상이 바뀌고 나니까 무섭더군유. 난리가 났다고 해서 마을 남자들이 모두 가막산 속으로 숨었거든요. 철광터 윗골짜기가 피난처라고 해서 옛날부터 죄짓고 쫓겨온 사람들이 숨어살던 데지유. 헌데 이건 어떻게 된 놈에 것이,,,,,,"
호랑이 굴로 찾아 들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그 골짜기로 숨어들었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한꺼번에 잡히고 만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바로 그 골짜기가 빨지산 소굴이었다 그겁니다유. 난리가 터지기 한두 달 전부터 북쪽에서 넘어온 빨갱이가 마을 용 만수 같은 사람들하고 내통을 하고 있었다 그겁니다 네. 그 골짜기 상봉이 바로 가막산인데 게서 내려다보면 멀리 개성은 물론 이쪽으로 인천 바닷가까지 한 눈에 잡혀, 옛날부터 민란이 나면 봉화를 피우기도 했다는 덴데, 저놈들이 거길 남침에 이용하기 위해 빨치산을 내보냈던 거지요. 2년 전 월북한 그 안경잡이가 그 책임자로 내려온 겁니다요, 네."
"그래, 그때 그 산 속에 들어갔다가 잡힌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됐읍니까?"
"무서운 얘기지유. 그때 잡힌 사람이 꼭 마흔 여덟 사람이었지유. 그 중에는 애들까지두 여섯이나 끼어 있었지유. 반곡리 아흔 두 집에서 그 숫자면 대단한 거 아닙니까유? 나두 그때 꼭 죽을 건데 어쩔라구 그 골짜길 늦게 올라갔다가 변을 면했습지만서도."
그때 산 속에 숨어들었다가 잡힌 마흔 여덟 명의 마을 남자들이 철광을 하던 그 폐광 속에 갇힌 채 다시는 바깥 구경을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 어디 휘발유나 흔했었나유. 굴 속에다 꽁꽁 묶어 앉혀 놓고설랑 그 위에다 석유를 붓고 불을 지른 거지유. 난리가 끝난 뒤에야 불타 죽은 시신들을 끄집어 낼 수 있었는데---"
최 완선씨도 그때 그 시신을 끄집어내는 작업에 참가했다고 한다. 누가 누군지 분간을 할 수 없을 분더러 그때까지도 굴속에 석유 냄새가 남아 있더란 것이다. 하긴 식구들이 굴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굴 입구를 막아 버렸다니까 그 불탄 냄새가 그냥 남아있었다는 게 어느 정도 믿어지는 얘기였다.
풍암 계곡 입구의 가겟집 처녀가 말하던 그 폐광터 내력을 지금 최 완선씨가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아직 막차까지는 한 시간 여나 남아 있었다. 최 완선씨는 자전거를 끌고 나는 근 옆에 서서 걸었다.
"선상님, 저 아래 동네서 혹시 미친 사람 못 보겼습니까유?"
"봤습니다. 그 양반 원래 성이 용씨라면서요?"
"어서 들으셨군유. 바로 그 친구가 나하고 동갑에 생일이 닷새 바른 것뿐인데, 그 호적 초본에 먹물두 안 마른 것이 세상이 바뀌었다니까 어 하고 남의 장단에 춤추다 그 꼴이 안 됐습니까유.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나았지 않나 싶지만서두,,,,,,"
"그때라니, 수복이 될 때 얘기로군요?"
“맞습니다유. 또 한번 사람이 뭉청 죽어나게 된 거지유. 이래저래 우리 잣골 사람들은 남자가 멫 살아 남질 못하게 된 겁니다유. 으트게 된 얘긴고 하면 거시기 왜---”
잣골뿐 아니라 대일면 일대가 용 만수의 세상이었다. 2년 전 월북했던 그 안경잡이 용가가 바꿔 세상에 어느 도(道)의 책임자로 들어앉으면서 그 위세가 그대로 용 만수한테까지 뻗쳤다는 것이다. 난리 전 좌익 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한 잣골 사람들이 중심이 돼 면 일대가 그야말로 인공천하가 됐다. 폐광에 묻혀 불 타 죽은 잣골 사람들 외에도 인근 마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남한 일대에서 면 단위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란 최완선씨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세상은 짧았다. 다시 바뀐 세상? 눈뜨고 앉아 고스란히 당한 사람들이 계 정신일 수가 없었다. 용 만수는 그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용씨네 사당 앞 정자나무에 목이 매달려 죽었다. 마을 사람들의 사형(私刑)이었다. 용 만수네 가족들이 그 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처가 옛날 만수한테 당한 정상도 그랬지만 만수가 그 처가의 장인과 외아들인 처남까지 죽인 걸 동정해서였다. 그 날 더 많은 지방 빨갱이가 죽을 것이었지만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빨갱이를 읍내로 내보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하자고 설득을 했기 때문이었다. 옳은 일이긴 했지만 그것이 결국은 더 큰 참화를 빚어내게 되고 말았다. 용 만수 밑에서 완장을 차고 날치던 부역자 중 미리 도망친 자들을 빼고 이곳저곳 뒤져 잡아낸 것이 꼭 열 아홉 명이었다. 거기다가 그 가족중 후환이 두렵다고해서 열 두살 이상의 사내애들까지 합치니까 모두 스물 입곱 명이나 되었다. 그 어린것들이 뭔 죄가 있다구 함께 묶어 가는 게여? 그처럼 마을 노인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지만 그 당장에 멸족을 해 버리지 못해 눈이 뒤집힌 사람들한테 그 말이 먹혀 들 리가 없었다.
"지금이야 이 길로 자동차가 다녀 별문제지만 그전 일루 해서 읍내나 서울까지 나갈려면 엄청 돌아야 했습지우. 그래서 대개 바쁜 걸음은 저 가막산을 넘어가면 거기 댐이 안 있습니까유. 거기까지 가 배를 타고 나가면 빨랐던 거지유. 그래, 잡은 빨갱이들 스물 일곱을 그리로 해서 데리고 나가던 중 그 일이 벌어진 거지유."
가막산 너머 마을에서 통통배를 빌어 거기다가 스물 일곱 명을 태우고 이쪽 호송원들도 십여 명 탔다고 했다. 그런데 배가 호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배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우선 열 서너 살 먹은 애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자기들을 호수 한가온데에 돌을 매달아 죽일 것이란 말이 그네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선창에 꿇어앉았던 그들이 모두 일어서 아우성치자 배가 요동하기 시작했고 몇 명은 손이 묶인 채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묶인 사람들이 모두 우루루 배 한쪽으로 몰리면서 배가 뒤집혔다.
"살아 나온 사람이라곤 호송해 가던 사람 중에서 다섯뿐이었습죠. 참, 배를 몰던 사람두 살았다더군유. "
"그리구 또 한 사람이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
"그렇습지유. 선상님이 아까 보셨다는 그 용 택준이가 훨씬 뒤에 그 꼴로 돌아오긴 했지우."
산 밑 논 속에 흰 것이 여릿여릿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목을 땅으로 박았을 때는 꼭 사람의 등허리처럼 보였다. 무려 세 마리가 함께 있었다.
"저게 백로 아닙니까?"
“그렇군요. 몇 년 안 보이더니 요즈막에 또 나타나기 시작랬습니다유. 벼에 농약을 쓰니까 올챙이가 살지 못 해유. 그래 저런 새들두 옛날엔 숱하게 많이 오더니만서두,,, 특히 왜가리가 많던 동네루 이름이 났었는데 난리 후엔 영 볼 수가 없구먼유. 바루 저게 왜갈봉이 아닙니까유."
마을이 가깝게 보이는 산모롱이 지정이었다. 마을 중심까지는 불과 500여 미터. 나는 그 짧은 거리나마 혼자 걷고 싶었다. 자전거를 끌고 옆에 걷는 최 완선써가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얼었다. 꼭 한 가치, 그들 부역자들의 살아 남은 가족들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마을을 떠났는지 그런 후일담을 듣고도 싶었지만 어쩐지 물어볼 흥은 일지 앉았던 것이다. 나는 최완선씨에게 자전거를 타고 마을까지 먼저 내려가 달라고 부타했다. 솔직히 시골길을 혼자 걷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마을 가게에서 만나 막차가 출발하기까지 술 한 잔씩 나누고 헤어지자고 헌다.
"선상님, 그 술은 제가 살랍니다유. 우리 마을에 오신 손님이니께 말입니다유.”
그가 자전거에 올라 허리를 꾸부정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자 그와 나의 거리는 삽시간에 멀어져 버렸다. 3시 35분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바라보는 반곡리는 생각보다 정리가 잘 돼 있는 마을이었다. 울긋불긋한 슬레이트 지붕예 담도 모두 블록담이었다. 마을 한쪽에 -농촌 변소 개량 시범 마을- 이란 입간판이 서 있기도 했다.
-김 진표 선생님, 김 진표 선생님, 학교 정구장으로 빨리 오시랍니다. 빨리 빨리 오세요.- 오바.
산 밑 국민학교에 설치한 스피이커인 모양이었다. 온 마을이 들리도륵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장난스레 들려왔다. 농촌의 목가적인 풍경에 그런대로 걸맞은 스피이커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부지런허 길 한 옆에 우람하게 선 느티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쥘부채꼴로 펑퍼짐 퍼진 느티나무의 그 우용이 먼 곳에서부터 내 눈을 끌었던 것이다. 나무 한 옆으로 네모진 입간판이 서 있었다.
-수종 :느티나무(도(道)나무 1등급) 수령 : ?, 나무 넓이 12㎡, 관리자 : 김봉수-
나는 아직 이렇게 큰 느터나무를 본 적이 업었다. 나투외 나이를 표시할 난에 (?)를 해넣었다는 것부터가 이 느터나무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드넓은 나무의 밑둥 부분은 속이 팅 비었고 그 속에는 물이 충충하게 고여 있어 매우 음습해 보였다. 나는 문득 느티나무의 그늘 속에 서서 이것이 바로 아까 최 완선씨의 말 중에 나온 그 정자나무일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렸다. 무심결 나무 곁에서 서너 걸음 물러서면서 나무 위를 쳐다보았다. 그럴싸해 보이는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골라 그곳에 밧줄을 걸었다. 그리고 그 밧줄 올가미에 30대의 사내 목을 걸었다. 내 머리에 떠오른 그 사내의 얼굴은 심씨였다. 몸서리치며 한 걸음 더 물러서자 그때 내 눈에 잡힌 얼굴은 너무나 낯이 익었다. 그 사내가 따를 내려다보면서 히죽이 웃었다. 거을 속에서 늘 마주친 바로 내 얼굴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몸서리치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내 가족들을 마지막 보기 위해서였다. 그네들이, 그. 여, 자, 들이 거기 꿇어앉아 있, 었, 다.
느티나무에서 이삼 십여 미터 열어진 곳에 고풍스런 토담이 둘러쳐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 뒤에 바로 잣나무 울울한 산이 솟아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끌려 산 밑 그 토담 쪽으로 다가갔다. 토담의 한가운데는 낡아 삭긴 했어도 원형이 제대로인 소슬 대문이 토담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집터가 분명했다. 그러나 예삿집이 아닌 게 분명한 것이 토담의 길이가 좌우로 길게 퍼져 있을 뿐 그 폭이 좁았기 때문이다. 사당이구나 - 나는 그렇게 직감했다. 한 문중의 사당 자리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그 토담 너머로 집터를 들여다보았을 때였다. 대문 쪽으로는 대여섯 평쯤 되는 뜰이 있고 그 뜰에서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는 집터로 오르는 세 곳에 돌로 깎아 만든 계단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 - 내가 입을 벌려 놀란 것은 그 사당터 빈 뜰 한구석에 모로 쓰러져 있는 두 개의 돌비석 때문이 아니었다. 그 빈 뜰을 가득 채운 횐 들꽃이 도대체 다른 잡풀 같은 건 아랑곳 없이 무성히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풍암 계곡 입구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도중 길가에서 흑은 묵은 밭에서 그렇게 지천으로 보아 온 그 들꽃이었다.
"선상님, 아직 여기 계셨구먼유."
느티나무 저쪽 신작로 위에 자전거를 탄 최 완선씨가 이편쳔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 밑에 있을 때는 기척을 내지 않던 매미들이 한여름의 기운 대낮 속에서 그 느티나무를 하늘로 띄워 올리기라도 할 듯 듣그럽게 울었다.
4시 5분 전이었다. 이곳 느티나무 밑에서 너무 시간을 보낸 것 같기에 나는 서둘러 최 완선씨 있는 데로 내려갔다. 그의 녹슨 자전거 뒤에 내가 산 뱀이 든 쌀자루가 아직 실려 있는 게 보였다.
"저기 산 밑에 있는 게 국민학교입니까?"
나는 최 완선씨가 느티나무와 사당 쪽 얘기를 꺼낼 것이 두려워 얼른 화제를 딴 방향으로 잡아 버렸던 것이다. 목에 올가미가 걸린 듯 숨이 가라 오고 가슴속에는 쩡쩡한 대낮과는 달리 울울한 그늘이 깔리기 시작했다.
4시 반에 출발할 버스가 보이는 지점에 있는 가게 앞 평상에 자리잡고 앉아 맥주 두 병을 땄다. 오징어포 하나를 떨쳐 놓고 그걸 안주 삼아 최 완선씨와 내가 서로 동시에 상대방의 잔에 술을 따랐다. 최 완선씨도 목이 말랐던지 나보다 더 빨리 잔을 비웠다. 맥주 두 병을 더 꺼내 오게 했다.
"인사해, 서울에서 오신 분이셔."
최 완선씨가 맥주병을 들고 온 오십대의 사내한테 나를 소개했다. 어색한 대로 수인사를 차리는 중인데 가게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가게 주인이 방으로 급히 들어갔다.
"아니, 여기 전화가 다 있습니까?"
최 완선씨가 무슨 소리냐는 듯 정색한 얼굴을 하더니 우선 잔을 단숨에 비우고 나서,
"전화 있는 집이 스물 네 집이나 됩니다유. 물론 핵교나 지서 분소 같은 덴 빼놓고도 그렇습니다유. 대일면에 우체국이 있습지우. 여기서 서울 신청을 하면 단 십 분두 안 걸려 나오던 걸유.”
"전기가 들어온 지도 오래 됐겠군요? "
"오래 됐구말구유. 벌써 십 년 전인 걸유. 대일리 다음에 우리 반곡에 전기가 들어왔습지우. 6.25때 피해가 제일 큰 곳이라구 정부에서두 여러 모로 각별히 신경을 써주셔서 고마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구먼유.”
우리들은 대개 이런 조의 얘기나 나눴다. 혀끝까지 와 뱅뱅 도는 말을 도로 삼키면서 나는 얼른 버스가 움직여 주길 기다렸다. 버스는 풍암 계곡에서 내려온 손님을 태워야 수지가 맞을 것 같았다. 버스 속에 고작 대여섯 사람이 먼저 올라 있는 게 보였을 뿐이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다짐두기 위해서 술잔을 비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적어도 그네들이 이곳에 왔다면 최 완선씨의 입을 통해서 그네들의 귀향 소식이 안 흘러나왔을 리가 없잖은가 말이다. 나는 어리석은 내 감상주의를 비웃었다.
"선상님, 저 뱀은 이따 버스에 오르실 때 제가 올려 드립죠. 이거 오늘 선상님 만나서 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올시다유."
최 완선씨는 아직도 방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가게 주인의 귀를 피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술값에 맞을 그런 돈을 내가 주머니에서 꺼내고 있었던 것이다.
차가 시동을 걸고 있었다. 전화를 받던 가게 주인이 밖으로 나왔다, 나는 술값을 내밀었다. 최 완선씨가 거북선 한 갑을 사 내 남방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또 한번 놀러오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는 그의 손을 맞잡아 준 다음 버스 쪽으로 걸음을 옮겨 가기 시작할 때였다.
"잠깐!"
어느 새 내 곁에 세 사람의 예비군 옷을 입은 청년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들 뒤에 순경 한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버스가 풍암 계곡 쪽을 향해 움직여 나가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대일 지서 반곡 분소에 근무하는 박 창대 순경입니다. 조사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차편은 6시까지 있습니다. 풍암 계곡에 들어온 관광버스를 이용하시도록 모셔다드릴 테니 안심하시고 저희 분소까지 가주셔야 하겠습니다."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대일 지서 분소까지 가 박창대 순경과 책상을 사이에 두고 대좌하고 앉았다. 내 신분증을 이리저리 살펴본 뒤에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주민들의 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에,,,,,,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지역은 간첩 침투가 용이한 곳이라---”
자신과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는 내 신분증을 보고 그가 필요 이상 미안쩍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아직도 경계하는 빛은 조금도 풀지 않은 채 어쩔까 퍽 난처해하는 눈치기에 나는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주민등록증까지 내놓으며 상급 기관에 신원을 조회해 볼 것을 권했다. 그는 분소의 다른 동료와 내 문제를 의논하는 듯하더니 조회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가 거듭 사과를 하며, 그곳에 배치 근무 중인 듯싶은 보충역 장정에게 뭔가 지시했다. 예비군 옷의 그가 분소 뒤꼍에서 소형 오토바이를 끌어냈다.
박 순경이 직접 운전대에 앉았다.
"뒤에 타십시오. 관광버스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박 순경의 일거일동이 처음부터 내게 어떤 호감을 주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갑자기 이 반곡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그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방금 내가 맥주를 마시던 그 가게 앞에 아직도 자전거를 세워 놓고 분소 쪽을 멍청히 쳐다보고 서 있는 최 완선씨를 보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박 순경, 나 오늘 저녁 이 마을에서 하룻밤 자고 가도 되겠습니까?"
내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박 순경이 오토바이에서 성큼 내려섰다.
"어이구, 이제 됐습니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주무실 데를 마련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저녁은 계가 사겠습니다."
구김살 없이 활짝 펴진 박 순경의 얼굴에서 나는 한 말단 관리가 보여주는 정직, 신뢰 같은 단어의 의미를 떠올렸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실은 저기 계신 최 완선씨와 한 잔 더 나누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박 순경은 바로 그 최 완선씨가 신고를 한 주민 중의 한사람이라는 말이라도 해주고 싶다는, 그런 어색한 얼굴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누다가 문득 좀더 솔직해지고 싶었다.
"사실은 이곳이 내 집사람의 고향입니다. 그래, 풍암산까지 온 길에 들러본 거고, 오늘 저녁 집사람 대신 여기저기 돌아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요. 그래야 집사람한테 고향 냄새를 물컥 옮겨다 주고, 그 덕분에 점수 좀 딸 게 아닙니까?"
내 웃음을 맞받아 웃으며 박 순경이 말했다.
"서울에 연락하실 일 있으시면 저희 분소 전화를 쓰셔도 좋습니다.”
그러잖아도 나는 저녁 시간 적당한 참을 내어 서울에 전화를 넣을 궁리를 깊이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내를 놀라게 하겠다는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니라 아내의 그 차가운 얼굴에 정말 잠시나마 화기(和氣)를 넣어 줄 그런 바람이 불게 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것은 우선 이제까지 전연 남으로 돌아앉아 너무나 철저하게 제 몫의 고통만을 끌어안고 제 나름의 껍질 속에 파묻혀 살아오는 동안 누구도 건널 수 없이 깊이 패인 그 강을 건너기 위한 가교(架橋)를 놓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 마을에서의 하룻밤이 그런 계기가 되어 줄는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나는 최 완선씨가 멍청히 서 있는 가게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내가 산 그 능사라는 구렁이가 그의 자전거 뒤에 얹혀 있었기 때문이다.
달맞이 꽃 3
일곱 시 저녁 뉴우스가 TV화면에 흐르고 있다. 어린이 프로를 다 보고 난 은주가 하품을 싼다. TV를 끄려고 하다가 문득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 흘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3급 이하 공무원 숙정 어제 중 매듭, 컬러 TV 8월부터 시판. 과열과외 근절 제도 개혁 검토. 북괴 남침 준비 혈안. 김정일은 김일성 대리인 행세. 귀순한 이영우씨 회견. 천여 명 해외 취업 사기. 전문대학은 14일부터 개강. 연립 주택 이중 매매, 입주권 놓고 다투다 살인. 지 공화당 레이건, 카터보다 우세. 독약 먹여 남편 청부 살인. 7시 20분부터 여의도 청백전.
나는 일어나 TV 화면을 죽였다. 하루를 자고 나면 20년만큼의 역사를 살고 난 느낌 뿐이다. 그러나 20년의 역사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내 식구들이다.
(신원을 알 수 없는 60대 노파와 30대 임산부(姙産婦) 의문의 변사체, 산 속에서 등산객이 발견 신고)
이런 뉴우스를 예감처럼 가슴에 깔며 일주일을 살았다. 어머니와 영채는 그 긴 일주일의시간 속에서 열 번도 넘게 죽었다. 여러 번 죽었다는 것은 여러 번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네들의 죽음을 기다리고, 그네들의 되살아남을 다시 기다린다.
기다림은 만남을 전제로 했을 때만 그 의미가 있다, 우리들의 만남을 훼방놓듯 여름 저녁의 어둠이 집안 구석구석으로 음울한 그림자를 끌며 스며든다. 멜로디를 가진 이웃 교회의 종소리가 호객하듯 구성진 선율로 스며들어 집안의 어둠과 음모를 꾸민다, 그들 어둠의 마술에 걸린 은주가 소파 한구석에서 잠들어 있다. 집안이 갑자기 휘휘해진다. 문득 차탁 위에 멍청하게 엎드려 있는 전화기가 눈에 들어온다. 수화하니 않을 때의 전화기는 늘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같은 학교 유 영자 선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러면서 거침없이 밝고 명랑한 바로 옆 반의 담임이다. 그러나 나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전화의 저쪽 유 영자 선생의 그 따뜻하고 부드럽고 밝은 것이 이쪽 음울한 어둠 속으로 옮겨져 사십을 넘어선 차갑고 질긴 고깃덩어리, 이 돌계집의 치부를 향해 깔깔거리며 웃겠지. 나는 그것이 두렵다. 내 어둠을 밝혀 내 치부를 보려는 그들이 두렵다.
그러나 나는 기다린다. 한 충구, 그를 기다린다. 사랑하는- 사, 랑,하, 는? 그래, 사! 랑! 하! 는! 내 남편 한 충구를 기다린다. 건널 수 없는 강 저쪽에 그가 서 있기에 더욱 그리워진다. 그에게 기대고 싶다. 그의 넓은 가슴속에 나를 던지고 참으로 딱 한번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은 것이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정화한 시간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7시 40분, 산에 갈 때마다 그는 언제나 이 시간쯤 집에 돌아온다. 팔봉산이랬지. 3시 30분에 하산한다. 타고 내려온 능선을 새삼스레 돌아보며 타고 간 차에 오른다. 4시에 차가 움직인바. 버스가 망우리 고개를 넘는다. 마장동까지 들어가는 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린다. 그래, 30분쯤 더 걸린다고 하자. 7시, 마장동 터미널에서 그가 빠져 나온다. 귀가 길에 택시 타기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다. 제기동까지 걸어간다. 10분, 7시 15분에 26번 버스를 탄다. 버스에서 우리 집 근처 정류장까지 30분이 걸린다. 7시 45분, 지금 그는 육교를 건너고 있다. 육교 밑 구멍 가게에서 거북선을 산다. 구멍 가게에서 네 번째 집 식품점에서 과일을 고른다.
"은주 엄마, 정말 부러워 죽겠다. 좋은 아빠 두고, 둘이 벌고 친정 엄만 살림해 주고....., 정말 약 올라 죽겠네.”
우리 집 단골인 그 식품점 여자가 말하곤 했다. 남편이 고른 과일을 봉지에 넣으며 그 여자가 눈웃음을 치고 있다. 남편이 못 본체 돌아서 나온다. 세탁소 앞을 지났다. 골목에 들어선다. 20미터 10미터 5미터, 3미터---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나는 어둠의 기둥처럼 마루 한가운데 우뚝 선 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덥다. 숨이 막힌다. 어디선가 발악하듯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느닷없이 웃음을 쏟아놓기 시작한다. 입으로 소리내지 않고 웃는 방법을 나는 안다.
웃기는군. 바보 같은 놈, 한 충구, 위선자, 영채, 계 처제를 범한 치한(癡漢) 아니야, 그가 영채를 범했다는 건 거짓말이라구! 제 계집도 다스리지 못하는 주제에, 흥, 사랑? 자비 ? 고통은 나눠 가져야 한다고? 위선자. 나쁜 놈, 개만도 못한 자식, 짐승보다 더 더러운 놈들. 놈들. 놈들.
나는 내 몸에 히스테릭한 발작의 징후를 느낀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아무도 내 발작을 보아주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도 없다. 영채도 없다. 내 발작은 그들 앞에서만 의미가 있다. 나는 참아내야 한다. 그러나 자꾸 놈들이 보인다. 보인다.
"재명아, 억울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 죽어야 마땅한 사람은 그렇게 죽어야 하는 거란다. 재명아, 너두 알잖니 ! 아버지가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이고 어떻게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수 있겠니. 먹실 외할아버지랑 외삼촌을 죽이라고 한 것도 다 느 아버지였잖니."
마을을 벗어나 신작로를 몇 시간이고 걷다가 개울에 내려섰을 때 어머니가 재명이를 조용조용 타이르고 있었다. 우리들 머리 속에서 죽은 아버지를 지워내기 위해 어머니는 그처럼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명이는 성난 얼굴로 뿌르퉁하니 흐르는 개울물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명이의 어깻죽지 한가운데 핏자국이 선명했다.
"재명아, 그 옷 빨아 입고 가자."
어머니가 내 등에서 잠든 영채를 안아내려 땀에 젖은 배에 손부채질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재명이의 적삼을 벗겨 빨아 주려고 했던 것이다.
"어서 벗으라니까. 그 핏자국이나 빨자."
"싫어!"
재명이는 새삼스레 식식거리며 어머니 쪽을 노려봤다. 마을을 떠날 때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치는 그의 어깨를 어머니가 깨문 것에 대한 화가 아직 안 풀린 것이다. 오빠, 데리고 가자아. 내 등에서 버둥거리며, 저만큼 떨어져 울고 있는 재명이를 돌아보던 영채는 어머니 무릎에서 아직 잠자고 있었다. 어머니는 재명이의 심술을 짐짓 외면한 채 산그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뻐꾹, 뻐꾹, 뻐 뻐꾹. 어머니가 바라보고 있는 산그늘 속에서 뻐꾸기가 울었다, 어머니가 신데렐라 공주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들에게 몇 번씩 들려준 그 얘기를 쉬엄쉬엄 다시 시작했다. 아버지가 안경 쓴 아저씨와 뒤곁에서 수군수군 뭔가 모의를 할 때도 어머니는 계속계속 우리들에게 갖가지 동화를 들려주었다. 아버지에게 발길로 허리를 걷어 채여 굴신을 못하고 누워서도 그 아름다운 주인공들이 한때 겪는 수난과 고통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냥 허황된 옛날 얘기가 아니라 꿈과 희망, 그리고 결국은 사람이 승리하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은 우리 남매들은 항상 (집 없는 아이)가 되어 떠돌면서도 어딘가 살아 있을 예쁜 엄마를 만날 희망으로 그 고통스런 여정이 하나도 괴롭지 않았다. 어머니의 아름다운 동화를 들으면서 가장 신비로운 눈을 하는 것은 세 살짜리 영채였다. 제대로 의미가 잡히지 않는 얘기를 좇아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영채의 볼을 재명이가 꾹꾹 찌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영채는 짜증을 냈고 재명이는 제 동생이 짜증내는 게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깔깔거렸다. 어머니가 백설 공주 얘기를 하면 우리들은 백설공주가 되어 난장이들의 침대에서 잠을 잔다. 뻐꾸기가, 매미가, 개울물 소리가, 산의 나무들이 모두 난장이처럼 우리들 편이 되어 우쭐우쭐 걸어다닌다. 우리가 걸어 내려가는 신작로의 저쪽 산모롱이 쪽 아카시아 숲에서 번쩍이는 금 투구를 쓴 왕자가 말을 타고 뚜벅뚜벅 걸어온다. 마을을 떠날 때의 그 영악스런 울음과 어깻죽지의 어머니 잇자국을 잊은 듯 재명이가 우와우와 소리치며 우리들보다 앞질러 달려간다. 그러한 재명이를 넘겨다보면서 내 등에 업힌 영채가 깔깔거린다. 며칠이고 며칠이고 우리 식구들은 그런 시골길을 걸었다. 마을 한가운데를 피하기 위해 산비탈을 질러 걷기도 했다. 가까운 마을에서는 우리 식구들의 얼굴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잣골 우리 고향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는 마을 입구에 열 대여섯 살 된 사내애들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검문했다.
"피난갔다가 이제야 집에 돌아가는 거구먼."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집이 어데에유?"
나를 흘금흘금 곁눈질하며 그 사내애들이 추근거렸다.
"우리 집은 둔낸데 총각들 이담에 한번 놀러 와요,"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둘러댔다. 마을 한가운데에서는 나이 든 남자들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아직은 젊은 우리 어머니와 어머니를 닮아 키가 훌쩍 큰 내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영분아, 네 머리를 빡빡 깎을 걸 그랬다."
겨우 열세 살 된 내 몸을 훑는 사내들의 눈이 두려운 듯 어머니가 집에서 떠날 때 나를 남장시키지 못한 걸 후회하곤 했다. 우리 식구들은 난리가 끝난 뒤에 그런 정처 없는 피난길을 걸었다.
집을 떠난 게 꼭 여드레째 되는 저녁이었다. 어머니가 머리에 이었던 보따리 속의 쌀이 다 떨어진 저녁이었다. 날이 어두웠다. 하늘에는 엷은 구름이 끼었고 그 구름을 뚫고 희붐한 달빛이 부어져 내리고 있었다. 개울둑과 길가에는 달맞이꽃이 만개했다. 달빛 아래 보는 달맞이꽃의 노란 꽃잎은 그냥 희게만 보인다. 저녁에 피었다가 아침이면 햇빛이 두려워 꽃잎을 오므려 시드는 달맞이 꽃 속을 우리 식구들이 걸었다. 온통 우리 식구들의 발걸음 소리뿐인 저녁이었다.
"어무이, 이제 고만 가자아. "
재명이도 나도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대낮에 걷는 것보다 낫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이 잠자는 산 속을 걷는다는 것은 그닥 좋지가 않다. 어머니가 대답하지 않자 재명이는 심술을 부리듯 발걸음을 더 크게 떼 놓아 성큼성큼 앞질러 걸었다. 개울가에 거뭇한 집채가 보였고 어머니가 거기서 자고 가자고 했다. 개울을 건너 한참 저쪽 산밑에 마을이 있는 듯 불빛이 보였다. 우리들이 들어간 곳은 물레방앗간이었다. 이제 추수가 끝나고 나야 바르게 돌아갈 물레방앗간은 텅텅 비어 있었다. 물을 담아 싣고 돌아가는 수차 바퀴도 고정이 된 채 그 밑으로 헛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방앗간 안은 널쩍했다. 방앗공이와 방아굴대가 천장에 덩그라니 매어져 있었다. 방아 확은 촌이 들어가 부식 작용을 일으키는 걸 방비하려는 듯 등겨도 가득 덮여 있었다. 어머니가 방앗간 한구석에 짚 북더기를 펴 잠자리를 만들었다. 세차게 흐르는 도랑물 소리가 밤의 모든 소리를 잠재워 버렸다. 이날 밤은 어머니가 동화도 들려주지 않았다. 우리들이 잠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잠을 자다가 두 번이나 눈을 떴다. 재명이의 발이 내 가슴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천장의 숭숭 구멍 뚫린 곳으로 회붐한 달빛이 새어들어 방앗간 안은 그런대로 눈짐작이 잡혔다. 천장에 매달린 방앗공이가 그림에서 본 용의 대가리를 하고 있었다. 그 다음 눈을 뜬 것은 어머니가 자신의 치마고 내 배를 덮어주면서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기척 때문이었다. 나는 내 이마 위에 놓인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의 거친 손바닥에 못이 박혀 있었다, 남들이 우선 뱃속의 애부터 떼고 보라고 하더군요.
어머니가 가끔 마음 통하는 이웃 아주머니한테 첫 딸인 내가 출생하게 된 사연을 조용조용 털어놓는 걸 엿들은 적이 있었다, 아무리 더러운 씨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내 뱃속에 잉태된 아이다. 양잿물 그릇을 들었다가도 그 생각을 해서 그만둔 게 여러 번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낳은 게 우리 영분이지요. 기왕에 낳은 것, 제 애비 밑에서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작심을 하고 찾아든 것이,,,,,, 어머니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얘기를 듣던 이웃 아주머니가 쯧쯧 혀를 찼을 뿐이다.
누가 내지른 비명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우리 식구 모두가 잠이 깨어 있었다. 영채가 울고 있었다. 어머니가 방아 확 곁에서 한 사내에게 당하고 있었다. 내 위에 몸을 덮친 사내의 입에서 훅 단내가 끼쳤다. 나는 울음을 터뜨릴 여유도 없었다. 물레방앗간 안이 빙빙 돌아가는 것 같았다. 뭔가 큰일이 났구나 하는 절박한 느낌이 머리를 강하게 때렸기 때문이다. 그 경황 속에서도 나는 재명이를 찾았다. 그러나 방앗간 안에 재명이는 보이지 않았다. 영채 혼자 우리들이 자던 그 짚북더기 위에 일어나 앉아 어머니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울어댔다. 내가 그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발악처럼 내지르며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본 것은 방앗간 문짝을 제치고 들어온 또 다른 한 사내가 털며 어머니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어머니 쪽으로 다가가던 세 번째 사내가 악을 써 울고 있는 영채 쪽으로 몸을 돌리는가 싶었는데 어느 새 영채의 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있었다. 영채의 머리통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보 둔탁한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재명이가 죽어 있는 곳은 물레방앗간 밖 물을 담아 도는 수차 바퀴였다. 재명이는 물레바퀴에 거꾸로 걸린 채 숨져 있었다. 나는 하복부가 빠져 나가는 듯한 그 통증 속에서도 눈을 허옇게 뒤집어쓰고 벌벌 경련을 일으키며 아직 살아 있는 영채를 안고 서서 어머니가 재명이의 시체를 끄집어 내리는 그 어렵디 어려운 작업을 끝까지 지켜보아야만 했다.
8시 20분.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돌아올 사람은 그뿐이었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데렐라의 짝이 될 왕자가 아니었다, 백설공주의 목에 걸린 독 사과 조각을 꺼내 살려 준 다음, 공주님 당신은 지금 나하고 같이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같이 사랑스러운 사람은 없어요. 자, 나하고 우리 아버지가 계신 궁전으로 갑시다. 그리고
나의 아내가 되어 주십시오 - 왕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지. 처제 몸 속의 애기는 바로 계 자식입니다. 뻔뻔스러운 것. 후안무치. 어머니를, 나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했으면 그런 소리를 떳떳이 말할 수 있었을까? 그날 캄 이후 어머니의 입에서 동화가 사라진 때문이다. 백설공주도 신데렐라도 죽었다. 왕자가 하늘 나라로 갔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득세한 계모와 그네가 낳은 카인의 자식들뿐이다. 파랑새는 날아갔다.
들꽃들의 이 늦은 만남
초인종이 온다. 짧고 거칠게 거듭거듭 울린다. 남편은 분명 아니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장난치듯, 혹은 속달 등기를 가져온 우편 배달부가 그렇게 하듯 마구 눌러대는 것이었다. 8시 30분, 초인종은 계속 울었다. 소파 한 구석에 웅크려 잠든 은주가 초인종 소리에 몸을 뒤척이다 다시 잠들었다.
그러나 나는 서둘지 않았다. 놀라지 말자, 기다리던 것이 온 것이었다. 올 것이 왔을 뿐이다. 불 하나 켜지 않은 컴컴한 집안이 초인종 소리에 들썩들썩하는 것 같았다. 이웃집 개가 우리 집 초인종 소리에 놀라 기가 넘듯 짖어댄다. 나는 아주 천천한 동작으로 마당까지 나가 수하(誰何) 없이 그대로 대문을 열었다,
"어, 엉-니!"
나는 놀라 뒷걸음쳤다. 영채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반기며 대문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영채가 들어선 그 뒤에는 텅 빈 어둠이 있을 뿐이었다. 영채가 저 혼자 실내로 들어간 뒤에도 나는 한참이나 대문에 서서 기다렸다. 혹시나 해서 대문 밖까지 나가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 들어선 영채는 꼭 주인을 떨어졌던 강아지가 집에 들어와 꼬리를 치며 설치듯 이만저만 흥분해 있는 게 아니었다.
"엉부, 엉부!"
그는 이 방 저 방을 들락거리며 형부를 찾았다. 그런가 하면 소파에 잠들어 있는 은주를 안아 올려 얼굴을 맞대고 마구 비벼댔다.
돌아왔구나, 나는 현관에 멈춰선 채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옮겨진 벌이 그 알 수 없는 힘으로 제 집을 찾아오듯 그렇게 집을 찾아든 영채를 바라보면서 나는 망연자실 서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생각하고 시작해야 할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먼젓번 집을 나갔다가 먼저 돌아와 어머니의 소재를 묻는 식구들의 추궁에 전연 대답하지 못했듯 이번에도 영채는 어머니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영채는 일주일 전 집을 나갈 때보다 얼굴에 기미가 더 끼었을 뿐 몸놀림이나 얼굴 표정이 더욱 싱싱해져 있었다. 그러한 영채의 싱싱함이 내게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 문득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자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차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은주가 눈을 뜨고 아직 잠결인 양 몽롱한 눈으로 영채를 올려다봤다.
"으쭈야!"
영채가 다시 은주를 안아 올릴 자세를 하자 은주가 먼저 그 가슴속으로 뛰어들었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들아 전화번호를 확인한 다음 시외 전화를 받으라는 교환양의 목소리가 글을 외듯 빠르게 들려 왔다. 그리고 쉽윙 잡음이 들렸다.
"아, 당신이구먼!"
전화기 속의 잡음과는 달리 남편의 목소리는 가깝고, 분명했다.
"어디에요?"
내가 생각해도 내 목소리는 소름끼치도록 냉랭했다.
“으웅, 당신 그건 그렇구 ,,,,,,집에 별일 없지?"
별일, 별일이 없느냐. 기분 전환을 위해 집을 탈출한 뒤 산에까지 간 사람이 집의 안부를 묻고 있다. 아기자기하게 어울리는 부부가 그렇게 하듯 남편의 말은 정겹다.
"없어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자칫하면 지금의 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였다. 영채가 왔어요. 영채가 싱싱하게 살아서 왔어요. 어머니도 올 거예요. 몇 년 전 영채를 찾아 어머니가 집에 돌아왔듯이 어머니는 지금쯤 어디선가 집으로 오고 있을 거예요.
"어머니 소식 아직 없소?"
"없어요."
남편 쪽에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좀 있다가 다소 허튼 목소리로 말했다. 술 저했을 때 하는 그런 호기 있는 목소리다.
“그건 그렇고, 당신 지금 내가 어디 와 있는지 알고 있소?"
"오늘 못 오겠군요?"
나는 되도록 차게 말했다.
“당신, 그러지 말고 알아맞혀 봐. 정말 대충이라도 말이야."
“내일 직장에 늦게 나가실 거라고 전화해 드릴까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당신 정말 답답하군, 남편이 어디에 가 있는 줄도 모르고."
"전화 요금 많이 올라요. 말씀하세요, 뭔 얘긴지."
"전화? 30분 쓰기로 했어, 당신하고 연애 좀 하려고 말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채가 은주와 어울려 목욕탕에 들어가 있었다. 은주가 제 이모의 등에 물을 끼얹어 주는 모양, 영채가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씻기 싫어하던 애가 몸을 씻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 놀라지 말아요. 여긴 말이야,,,,,,"
남편의 목소리는 잘 맞아 나가는 정구공 소리처럼 명쾌하다. 어떻든 지금 그는 기분 좋은 상태임이 분명하다.
"당신 대일면 반곡리 알아? 잣골 말이오."
나는 숨을 흑 들이쉬었다. 용영분 선생의 고향이 어딥니까? 직장 동료들이 묻곤 했다. 서울이에요. 한때 시골에 좀 살긴 했지만. 시골 어디요? 강원도 어딘데 그 마을 이름두 기억에 없어요. 영채와 나는 서울이 고향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가 호적을 옮겨 놓았던 것이다. 물론 남편이 있는 데서,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어머니와 나는 시골 얘기를 주고 받기도 했다. 시골에도 오래 살았소? 남편이 물었다. 아니오. 피난 가서 아주 잠깐. 어딘데? 강원도 어딘데 그냥 잣골이라던 마을 이름만 기억나요. 그것도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신혼 초에 주고받았던 얘기일 뿐이다.
"나, 오늘 풍암산 입구에서부터 잣골까지 걸어서 올라왔지. 정말 절경이던데."
용바위, 닭바위, 장수바위, 가막산, 능청봉, 왜갈봉, 복골. 둔지 마을, 꺽실, 궁소, 무등재, 말고개.
"그런데 말이야. 꼭 하나 당신한테 물어 몰 게 있었소?"
이래서는 안 된다. 그에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잡아먹는다. 그러나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당신은 알고 있을 것 같아 물어 보는 건데 말이야, 길가나 산비탈 묵은 밭에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 중에 회고 자잘한 꽃을 가진 게 이름이 뭐지? 풍암산 입구에서 잣골까지 가는데 그 꽃이 그렇게 지천으로 많이 피어 있더라니까."
피이, 나는 웃음이 나왔다
"당신두 모른다면 여기 사람들한테 물어 보는 수밖에 없군. 거시기, 그런 잡풀에 이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서도,,,,,"
거시기,...., 모르겠지만서도 ,,,,,, 피이, 나는 남편이 시골 사람들 말투를 흉내내는 게 진정 우스웠다. 전화기 저쪽에서 시끌하게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선상님, 이제 연애 좀 고만하시고---
"당신 정말 그 꽃 이름 모르는 거지?"
"망초, 시골에선 개망초라고 할 거예요."
나는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온 몸이 와들와들 떨리는 흔들림이다. 나는 지금 중심을 잃은 괭이처럽 비틀거린다. 어지럽다.
"망초라고? 무슨 망자일까? 망할 망(亡)? 아니겠지. 망령될 망(妄)? 바쁠 망(忙)? 아아, 잊을 망(忘)이 아닐까? 또 있지, 망망할 망(茫) 실심할 망(惘), 도깨비 망(魍), 아니면 희망 원망 전망 - 할 때의 망(望)도 있고,,,,,, "
남편이 장난처럼 주워섬긴다.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는 남편이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피이, 그러나 나는 웃고 말았다.
"아무 망자도 아니라니까요. 그냥 그 꽃 이름이 망초일 뿐이에요. 엉거시과 두해살이 풀, 6, 7월에 백색, 흑은 얼은 자색의 두화(頭花)가 방상 꽃차례로 피는 북미 원산의 귀화 식물이에요."
나 자신 놀라고 있었다. 벌써 까마득 오래된 사범학교 시절 생물도감을 펼쳐 외었던 기억이 주문처럼 흘러나온 것이다.
"와하, 은주 엄마 알아줘야 되겠는데."
남편이 거침없이 웃는다.
"지금 거기 누구하고 계시는 거예요?"
나는 내가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댓가지처럼 꼿꼿하게 경직되었던 내 몸의 근육과 심줄들이 긴장을 풀면서 핑핑 끊어져 나감을 느낀다. 그러나 지금 나의 해체(解體)는 고통이 없는 무너짐이다. 황홀하고 몽롱하고, 쾌감을 갖고 아스라이 가라앉은 행복한 그런 침몰이다.
"내가 누구하고 술을 먹느냐고? 은주 엄마, 그건 비밀이야. 왜냐하면 술자리의 흥이 깨지기 때문이지. 가능하면 언젠가 이 다섯 분들을 우리 집에 초청하고 싶군. 어쩌면 오늘 밤 내가 더 취하면 그 초청을 정식으로 할 는지도 몰라. 한 충구와 용 영분 부부 공동 이름으로 말이지."
다섯 사람, 남편이 지금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 다섯 사람이라고 했다. 누구일까. 용재, 칠성이, 돼지, 택준이 몇몇 대일 국민학교를 함께 걸어다닌 사내애들 이름이 떠오른다. 개울을 먼저 건너가 찔레 덤불 속에 숨었다가 여자 아이들을 놀래 주던 용재의 그 인중 긴 코밑에 항상 마르지 않던 콧물이 보인다.
"용 영분 선생, 나 오늘 용씨네 문중 사당 터도 보고 왔지. 마당 뜰 가득 망초가 피어 있더군."
"그 사당 앞에 있는 느티나무 고목도 보았군요?"
사랑하는 사람 앞에 벌거벗은 몸의 그 치부를 처음 보인 처녀가 갖는 수치심은 곧장 사라지게 마련이 아닐까. 오히려 그렇게 드러내 보였기에 더욱 더 뜨겁게 몸을 열고 싶겠지. 내친 걸음, 나는 그런 심정이었다.
"그 느티나무가 나한테 말하더군. 영분이가 보고 싶다고."
영채와 은주가 아직도 목욕탕에서 깔깔거리고 있었다. 전화기를 든 채 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이제 전화기에 대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그대로 울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왕 여기서 묵는 김에 내일은 가막산 계곡에 있는 철광굴 속도 들러보고. 그 가막산을 넘어가면 청평 호수가 있다고 하더군. 거기서 통통배를 타고 청평까지 나갔다가---"
영채와 은주가 목욕탕에서 와당탕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어차피 영채의 귀가 소식은 뒤로 미를 수밖에, 어머니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영채의 귀가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영채가 건강하다는 것도, 영채 몸 속의 우리들 애기가 끄덕없이 자라고 있다는 것도, 남편이 어서 돌아오길 기다릴 뿐이다.
"은주 엄마, 당신 뱀에 대해서 뭘 좀 알고 있소?"
엉뚱하게 남편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몰라요."
"여기 오니까 사람들이 뱀을 고아서 먹더군. 몸에 좋다는 거야. 특허 남자들한테 말이야. 당신 그거 알어?"
갑자기 남편의 어투가 상스러워진다.
"그래서 나도 뱀을 샀다구. 팔뚝 같은 구렁이지. 크고 늠름하고 아주 힘센 놈이야. 고아 먹을 게 뭐 있나, 장작불에 얹어 지글지글 구워 먹지. 제기랄 눔의 꺼, 굽긴 뭘 궈, 껍데길 쭉 벗겨 날 걸 그냥 통째로 으적으적 씹어서 먹는 거야. 거시기, 그러구 설라므네, 쏘주 한잔, 마늘 한 쪽 먹고 당신한테 달려가는 일만 남었구먼 히, 히히."
남편이 짐짓 야만스런 소릴 골라 한다. 그런데 하나도 천하지 않게 들린다. 중요한 것은 그 당장 내 몸에 이상한 조짐이 오기 시작한 일이다. 무릎을 꿇고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내 몸을 칭칭 감았던 밧줄이 느슨느슨 풀려 나간다. 누군가 등 뒤로 묶인 내 손목의 밧줄을 풀고 있다. 몸이 자유롭다고 느낀 순간 나는 조금씩 움직여 본다. 그러자 내 몸에서 뭔가 우적우적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난다. 차갑고 질긴 중년 계집의 몸뚱이에서 한풀 껍질이 벗겨져 나가자, 그 탈바꿈의 첫 번째 반응은 내 몸 속 깊이 사내를 들이고 싶은 그 치열한 정염의 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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