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의 후예 -김동리
1
황 진사(黃進士)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해 가을이었다.
아침을 먹고 등산을 할 양으로 신발을 신노라니 윗방에서 숙부님이 부르셨다.
"오늘 네, 날 따라가 볼래?"
숙부님은 방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오시며 이렇게 물었다.
"어디요?"
"저 지리산에서 도인이 나와 사주와 관상을 보는데 아주 재미나단다."
"싫어요. 숙부님께서나 가슈."
나는 단번에 거절하였다.
"왜, 싫긴?"
"난 등산할 참인데……."
"것두 좋긴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한번 따라와 봐……. 무슨 사주 관상 뵈는 게 재미나단 말
이 아니라, 그런 데서도 배울 게 있느니……. 더구나 거기 모여드는 인물들이란 그대로 조선의 심
벌들이야."
"조선의 심벌요?"
나는 반쯤 웃는 얼굴로 이렇게 물은즉, 숙부님도 따라 웃으며,
"그렇지, 심벌이지."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의 심벌'이란 말에 마음이 솔깃해진 나는 등산하려던 신발을 끄르기 시작하였다.
파고다 공원에서 뒷문으로 빠지면 서울 중앙 지점치고는 의외로 번거롭지도 않은 넓은 거리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고, 바로 그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에 '중앙 여관'이란 간판을 걸고 동남쪽으로
대문이 난 여관이 있고, 이 여관에 소란한 차마(車馬) 소리와, 사람의 아우성과, 입김과 먼지와, 기
계의 비명이 주야로 쉬지 않는 도시의 심장 속에 - 접신(接神), 통령(通靈)의 간판을 내걸고 손님
을 기다리고 있는 '도인'이 있다.
방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술이 묻고 때가 전 옷을 입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볼에 살이 빠
져 광대뼈들이 불거진 불우한 정객, 불평 지사들이며 문학가, 철학가, 실업가, 저널리스트, 은행원,
회사원 들이 무수히 출입하고, 금광쟁이, 기미꾼 들이 방구석에 뒹굴고 있었다.
나는 무슨 아편굴 속에나 들어온 것처럼 기분이 불쾌했다. 내가 얼굴을 붉히며 숙부님을 향해 얼
른 다녀 나가자는 눈짓을 했을 때, 그러나 숙부님은 나의 눈짓에 응한다느니보다는 분명히 묵살을
하고 나를 좌중에 소개를 시키셨다. 바로 그 때,
"아, 이분이 김 선생 조카 되시는 분이구랴."
하고, 거무추레한 두루마기에 얼굴이 누르퉁퉁한, 나이 한 육십 가량 된 영감 하나가 방구석에서
육효를 뽑다 말고 얼굴을 돌리며 어눌한 음성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는 하도 살아갈 지모(智謀)가
나지 않아 육효를 뽑아 보았노라 하면서, 반가운 듯이 삼촌 곁으로 다가앉았다. 그의 까닭 없이 벗
겨진 이마 밑의 두 눈엔 불그스름한 핏물 같은 것이 돌고 있었다. 내가 자리를 고치고 머리를 굽
히려니까,
"괘, 괜찮우, 거, 거 자리에 앉으우."
하고 손을 내저으며,
"나 황일재(黃逸齋)우. 이 와, 완장 선생과는 참 마, 막역지간이우."
하는 것이었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된 듯하였다. 바로 그 때였다. 나와 바로 마주 앉은 접신, 통령의
도인은 그 손톱 자국과도 같이 생긴 조그마한 새빨간 눈으로 몇 번 나의 얼굴을 흘낏흘낏 보고 나
더니,
"부모와는 일찍이 이별할 상이야."
불쑥 이렇게 외쳤다.
"형제도 많지 않고, 초년은 퍽 고독해야."
하고, 또 인당이 명료하고 미목이 수려하니 학문에 이름이 있으리라 하고, 준두와 관골이 방정해서
중정에 왕운이 있으리라 하고, 끝으로 비록 부모가 없더라도 부모에 못지 않은 삼촌이 계셔서 나
의 입신 출세에 큰 도움이 되리라 하였다.
나는 어쩐지 쑥스럽고 거북하여져서 얼굴을 붉히며 그만 자리를 일어나 버렸다. 내 뒤를 이어 숙
부님이 일어나시고, 숙부님을 따라 황일재 황 진사가 밖으로 나왔다.
파고다 공원 뒤에서 황 진사는 때묻은 헝겊 조각 같은 모자를 벗어 쥐고 그저 몇 번이나 절을 하
고 나서 공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디루 가우?"
숙부님이 물으신즉,
"나, 여기 공원에서 친구 좀 만나구……."
했다.
해는 오정이 가까웠다. 구름 한 점 없이 갠 하늘엔 북한산이 멀리 솟아 있었다. 안타까움에 내 몸
은 봄날같이 피곤하였다.
2
나뭇잎이 다 지고 그 해 가을도 깊어졌을 때다. 삼촌은 금광에 분주하시느라고 외처에 계시고 없
는 어느 날 아침, 막 아침 밥상을 받고 있으려니까, 문 밖에서 '에헴', '에헴' 연달아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일 오너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밥 숟가락을 놓고 문 밖으로 나가 보니, 어느 날 관상소에서 육효를 뽑
고 있던 그 황 진사였다. 이 날은 처음부터 그 '조선의 심벌'이란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지 않은 탓
인지, 처음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불쾌하거나 우울하지도 않고, 그보다도 다시 보게 된 것이 나는
오히려 반갑기도 하였다.
"웬일로 이 치운 아침에 이렇게……."
인사를 한즉,
"괘, 괜찮우. 거 완장 어른 안 계슈?"
하는 소리는 전날보다도 더 어눌하였다. 그 푸르죽죽하고 거무스레한 고약 때 오른 당목 두루마기
깃 밖으로 누런 털실이 내다뵈는 것으로 보면, 전날보다 재킷 한 벌은 더 입은 모양인데도 그렇게
몹시 추운 기색이었다.
"네, 숙부님 마침 출타하셨어요."
한즉,
"어디 출타하신 곳 모루? 예서 얼마나 머, 멀리 나가셨슈?"
"네."
"언제쯤 도, 돌아오실 예, 예정……."
"글쎄올시다, 아마 수일 후라야……."
한즉, 갑자기 그는 실망한 듯이,
"아아, 이."
하는 소리가 저 목구멍 속에서 육중한 신음과도 같이 들려 왔다.
"어쩐 일로 오셨다가……. 춘데 잠깐 들오시죠."
한즉, 그는 두루마기 속에 찌르고 있던 손을 빼어 모자를 쥐려다 말고 한참 동안 무엇을 망설이며
내 눈치를 보곤 하더니, 모자를 잡으려던 손으로 콧물을 닦으며 왼편 손은 사뭇 두루마기 속에서
무엇을 더듬어 찾고 있었다.
"이거 대, 대, 댁에 잘 간수해 두."
하며 종이 조각에 싼 것을 주는데, 받아서 보니 이건 흙에다 겻가루를 심은 것 같이 보였다.
"……?"
내가 잠자코 의아한 낯빛으로 그를 쳐다보려니까, 그는 어느덧 오연(傲然)한 태도를 가지며 위엄
있는 음성으로,
"거 쇠똥 위에 개똥 눈 겐데 아주 며, 며, 명약이유."
한다. 나는 그의 말뜻을 바로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해 있으려니까,
"허어, 어떻게 귀중한 약인데 그랴!"
하며, 그 물이 도는 두 눈에 독기를 띠고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민망해서
"대개 어떤 병에 쓰는 게죠?"
하고 물은즉,
"아, 거야 만병에 좋은걸, 뭐."
하며, 나를 흘겨보고 나서,
"거 어떻게 소중한 약이라구……. 필요한 때는 대, 대갓집에서두 못 구해서들 절쩔매는 겐데, 괘니
……."
그는 목을 내두르며 무척 억울한 듯한 시늉을 하였다. 나는 왜 그가 이렇게 공연히 분개하고 억울
해하는지를 알 수 없어, 한순간 내 자신을 좀 반성해 보고 있으려니까, 그도 실쭉해서 잠자코 있더
니, 갑자기
"괘애니 모르고들 그랴."
또 한번 고함을 질렀다.
내가 막 아침 밥상을 받았다 두고 나간 것을 언짢게 생각하고 몇 번이나 힐끔힐끔 밖을 내다보시
고는 하던 숙모님이, 기다리다 못해
"얘, 무얼 밖에서 그러니?"
하고, 어지간하거든 손님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밖에서'란 말에 힘을 주어 주의를 시
킨다. 바로 그 때였다.
"거, 아침밥 자시고 남았거든 좀……."
하며, 입가에 비굴한 웃음을 띠고 고개질을 하는 양은 조금 전에 흙가루를 내놓고 호령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나는 그를 방에 안내한 뒤, 나의 점심밥을 차려 내오게 하였더니, 그는 밥상을 받으며 진정 만족한
얼굴로,
"이거 미안하게 됐소구랴."
하였다.
그는 밥을 한입에 삼킬 듯이 부리나케 퍼먹고 찌개 그릇을 긁고 하더니, 숟가락을 놓기가 바쁘게
곧 모자를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이나 절을 하곤 했으나, 아까 하던 약말은 아주 잊어버린
듯이 다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 후,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또 황 진사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그의 친구라면서, 그보다 키는 더
크고 흰 두루마기는 입었으되 그에 지지 않게 눈과 코와 입이 실룩거리는 위인이었다. 이 흰 두루
마기 친구는 어깨에 먼지투성이가 된 자그마한 책상 하나를 메고 왔다.
황 진사는,
"이거, 댁에 사 두."
하고 거의 명령하듯이 말했다.
"글쎄올시다. 별루……."
"아아이, 값이 아주 염하니 염려 말구 사 두."
"그래두 별루 소용이 없는걸……."
"아아이, 값이 아주 염하대두 그래."
"……"
"자, 오십 전 인 주."
황 진사는 그 누르퉁퉁하고 때가 묻은 손바닥을 내 앞에 펴 보였다.
"글쎄, 온, 소용이……."
"그럼 제에길, 이십 전만 내구 맡아 두."
"……"
"것두 싫우?"
"……"
"그럼 꼭 십 전만 빌려 주."
황 진사는 어느덧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애걸을 하였다.
"나 그 날, 댁에서 그렇게 포식한 이래 여태 굶었수다. 여북 시장해서 이 친구를 찾아갔겠수? 아
그랬더니, 이 친구도 사정이 딱했던지 사무 보는 이 책상을 내주는구랴."
그는 손으로 콧물을 닦아 가며 한참 신이 나서 떠들어 대었다. 그의 친구란 사람은 연방 입을 실
룩거리며 외면을 하고 서 있었다.
한 오 분 뒤, 내가 안에 들어가 돈 이십 전을 주선해 나와 그들에게 주었을 때, 그들 두 사람은 무
수히 절을 하고 나서 책상을 도로 메고 가 버렸다.
3
길바닥이 얼어붙고 먼 산에 눈이 치고 그 해는 이른 겨울부터 몹시 추웠다. 그 동안 숙부님은 몇
번이나 집에 다녀가시고 관상소 출입도 더러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 진사의 얼굴은 그 뒤로 보
이지 않았다. 다만, 삼촌을 통해서 그의 시골이 충청도 어디란 것과, 그의 문벌이 놀라운 양반이란
것과, 그의 조상에는 정승 판서 따위가 많이 났다는 것과, 그 자신도 현재 진사 구실을 한다는 것
과, 그의 머릿속은 자기 가벌에 대한 자존심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가지 우스운 것은 그가 곧잘 진사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 관상
소에서 어느 장난꾼이 농담삼아 그에게 서전과 춘추를 외게 하여 급제를 주고 진사라 부르기 시작
한 것인데, 그 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반조롱으로 '황 진사', '황 진사' 부르게 되니, 그러나 '황 진
사' 자신은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싸하게 여겨, 이즘 와서는 아주 뽐내고 진사 행세
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몹시 추운 날이었다. 아궁에 불을 넣고 방구석에 숯불을 피우고 나는 온종일 책상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낮이 짐짓했을 때다. 밖에서
"일 오너라-----."
하는 소리가 마치 '사람 살리우' 하는 소리같이 바람결에 싸여 들어왔다. 나가보니 황진사가 연방
손으로 콧물을 닦고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대체 얼어 죽지나 않았나 하고 궁금해하던 차라, 이렇게
다시 보게 된 것이 진정 반가웠다.
나는 곧 그를 나의 방에 안내한 뒤,
"그런데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한즉,
"거야 친구 집에서 지냈지요, 뭐. 흐흐……."
하며, 재미난 듯이 웃었다.
"아 참, 완장 선생은 여태 안 왔시우?"
"수차 다녀가셨지요."
"아, 그렁 거루 난 여태 한 번두 못 뵈었으니 이거 죄송해서, 흐흐……."
그는 숯불을 안고 앉아 또 히히거리고 웃었다.
흰떡을 사다 숯불에 구워서 그에게 대접을 하고, 나는 아까 하다 둔 일을 마저 해치울 양으로 잠
깐 책상에 앉아 있으려니까, 그는 언 것, 구운 것도 가리지 않고 한참 부지런히 집어먹더니 그 동
안 흥이 났는지 아주 목청을 뽑아서,
"관관저구(關關雎鳩)는 재하지주(在河之洲)로다. 요조숙녀(窈窕淑女)는 군자호구(君子好逑)로
다."
하는 대문을 외곤 하였다.
나는 그 동안 책상에 앉아 있느라고 모른 체하고 있으니까,
"아, 성인께서도 실수가 있단 말야!"
그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아, 공자님께서 시전에 음군을 두셨거던!"
그는 무슨 큰 문제나 발견한 듯이 나 있는 쪽을 옆눈으로 흘겨보며 마구 기를 뽑아 이렇게 외쳤
다.
그래도 내가 모른 체하고 있으려니까 그는 화로 곁에서 일어서더니, 두루마기 자락을 뒤로 짖히고
저고리 섶을 위로 쳐들고 손을 넣어 무엇을 꺼내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속으로, 옷의 이를 잡아내
어 숯불에 넣으려는 겐가 하고 있는데, 그는 또 한 번 나 있는 쪽을 흘겨보고 나서 배를 두르고
있던 때묻은 전대 하나를 꺼내었다. 전대 속에서는 네 귀가 다 이지러지고 종이 빛까지 우중충하
게 묵은 모필 사책 한 권과, 백지로 싸서 노끈으로 친친 감아 맨 솔잎 한 줌과, 휴지 조각 몇 장이
나왔다.
"거, 무슨 책이유?"
내가 이렇게 물은즉,
"아, 주역책이지 그랴."
하고 된소리를 질렀다. 과연 그 이지러진 네 귀마다 넓적넓적한 괘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주
역책임에 틀림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주역책은 왜 하필 전대에 넣어서 두르고 다니느냐고 물
은즉,
"아, 공자님께서도 역은 삼천독을 하셨다는데 그랴."
하고, 된소리를 질러 놓고 나서, 다시 조용히 음성을 낮추어,
"아, 여북해 지략의 조종이오? 조화의 근본 아니오?"
하였다. 나는 처음 관상소에서 그를 보았을 때부터 "하도 지모가 나지 않아 육효를 뽑아 보았노
라." 한 것을 들은 일이 있어서, 그가 평소 얼마나 이 '지략'과 '조화'를 부려 보고 싶어하는 위인인
가를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이와 같이 언제나 몸에 지닌 솔잎 한 줌과 네 귀 모지라진 주역 속
에서 우러난 음양 오행의 지모 조화가 겨우 '쇠똥 위에 개똥 눈' 흙가루 약과, 친구에게 책상을 들
리고 다니는 것쯤인가 하고 생각할 때, 나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녁때가 되어 그는 전대를 다시 배에 두르고 돌아갔다. 종종 오라고 한즉, 매양 신세를 끼쳐서 미
안하다고 하며 절을 몇 번이나 하였다.
그 해 겨울, 그는 내가 성이 가시도록 자주 나를, 아니 내 삼촌을 찾아왔다. 그는 언제나 나를 볼
때마다 오랫동안 삼촌께 못 뵈어 죄송하다고 하였다.
그는 나에게 한시를 지어 달라면서 사오 차나 운자를 가지고 왔다. 어디 쓰느냐고 물으면 친구의
환갑 잔치에 대노라고 한다.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 이 참봉, 윤 승지, 무슨 참판, 어디 남작하고
모조리 서울서도 유수한 대가와 부자들의 이름만 꼽지만, 거리에서 그가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보나
가끔 친구라고 데리고 오는 것을 보면, 그의 말과는 딴판으로 황 진사 자신보다 별로 유여한 축들
도 아니었다.
좋은 규수가 있으니 장가를 들지 않겠느냐고 그는 여러 차례 나를 졸랐다. '좋은 규수'가 어딨느냐
고 물으면, 단번에 친구의 딸이라 하고, 어떤 친구냐고 하면 무슨 승지, 무슨 자작 하는 예의 대갓
집 따위를 꼽았다. 색시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냐고 하면 매양 자기의 누르퉁퉁하게 부은 얼굴을
가리키며 이렇게 아주 유복스럽게 생겼다고 한다. 내가 웃으며, 색시가 일재 선생 같아서야 좀 재
미 적다고 하면,
"아, 일등 규수라는데 그랴."
하고 화를 내었다.
"그렇지만 너무 육중해서야."
하면,
"아, 거기 식록이 들었는 걸 그랴. 아, 여북해 일등 규수라는데 그래도 못 믿어서 그랴."
하고 기를 쓰곤 하였다.
4
눈에 괸 물이 눈물이라면 황 진사의 두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있었다. 그는 가끔 나에게 그가 혈
육 없는 것을 한탄하였다. '친구'집 회갑 잔치 같은 데서 떡국 그릇이나 배불리 얻어먹고 술기라도
얼근해서 돌아오는 날은
"아, 명가 종손으로 혈육 한 점이 없다니, 천도가 무심하지 그랴."
대개 이런 말을 했다.
"혼담은 시방 있지만, 어디 천량이 있어야지."
이런 말도 하였다.
언젠가 숙모님이 그의 맘에 제일 드는 규수의 나이와 이름을 물었더니, 하나는 열아홉 살이고 하
나는 갓 스물인데, 열아홉짜리는 성이 오씨고, 갓 스물짜리는 윤씨라 하였다.
"열아홉 살?"
듣던 사람이 놀라니,
"아, 자식을 봐야지유."
하였다.
숙모님이
"좀 나이 짐짓해두 넉넉할걸 뭐."
하니,
"그야 그렇지유. 허지만, 암만하면 젊은 규수를 당할라고."
하는 것이, 아무래도 그 열아홉 살인가 갓 스물인가 난 규수에게 마음이 가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숙모님이 황 진사의 중매를 들게 되었다. 그 즈음 황 진사는 거의 날
마다 우리 집에 들르게 되어 그의 딱한 형편을 은근히 걱정하고 있던 숙모님은, 그때 마침 집에
돌아와 계시던 숙부님과 의논하고, 그를 건넛집 젊은 과부에게 장가를 들게 해 주자고 하였다. 나
는 물론 그리 되기를 원했다. 숙부님도 웃는 얼굴로,
"몰라, 허기야 저도 과부지만 그렇게 늙은 사람과 잘 살라구 할는지."
하셨다. 그러나 숙모님이,
"젊고 예쁜 홀아비가 어딨어요? 딸린 자식 없구 한 것만 해두……."
하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듣고 나도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 날 저녁때 황 진사가 온 것을 보고, 숙부님이
"일재, 여기 젊고 돈 있는 색시가 있는데 장가 안 들라우?"
하고 물어본즉,
"아, 들면야 좋지만 선생도 아시다시피 천량이 있어야지."
하는 그의 얼굴에는 완연히 희색이 넘쳤다.
그의 얼굴에 희색이 넘침을 보신 숙모님은, 돈이 없어도 장가를 들 수 있다는 것과 장가만 들게
되면 깨끗한 의복에 좋은 음식도 먹을 수 있으리라 하는 것을 일러 주신즉,
"아, 그럼야 여북 좋갔수? 규수 나이 몇 살이고……? 집안도 이름 있구……?"
그는 연방 입이 벌어져 침을 흘리며 두 눈에 난데없는 광채를 띠고 숙모님께로 대드는 판이었다.
"과부래야 이름이 아깝지, 뭐, 이제 나이 삼십도 다 못 된걸……."
숙모님도 신명이 나는 모양으로 이렇게 자랑삼아 말한즉, 황 진사는 갑자기 낯빛이 확 변하며,
"아 규, 규수가, 시방 말씀한 그 규수가, 과, 과, 과부란 말씀유?"
이렇게 물었다.
"왜 그류?"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황 진사의 닫힌 입 가장자리에 미미한 경련이 일어나며, 힘없이 두 무르팍
위에 놓인 그의 두 손은 불불불 떨리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 소리가 '뚝딱뚝딱' 하고 들리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질부터 좌우로 돌렸다.
"당찮은 말씀유……. 흥, 과, 과부라니 당치 않은 말씀을……."
그는 곧 호령이라도 내릴 듯이 누렇게 부은 두 볼이 꿈적꿈적하며 노기 띤 눈을 부라리곤 하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황후암(黃厚庵) 육대 종손이유."
하고 다시,
"황후암 육대 손이 그래 남의 가문에 출가했던 여자한테 장갈 들다니 당하기나 한 소리요……?
선생도 너무나 과도한 말씀이유."
그는 분함을 누르느라고 목소리에 강한 굴곡이 울리었고, 낯에는 비통한 오뇌의 경련이 일어나 있
었다.
"내일이래두 그럼 어린 규수 골라 혼인하시지요, 뭐……."
하고, 숙모님도 무안해서 일어났다.
숙부님도 딱했던지,
"일재, 일재, 염려 말우, 농담했수. 그럼 일재 되구야 한번 타문에 출가했던 사람과 혼인을 하다니
될 말이유? 내가 어디 황후암을 모루, 황익당을 모루?"
한즉, 그 때야 그도
"아, 아무렴 그랴 그렇지, 거 어디라구, 함부루 어림없이들……. 황후암이 누구며 황익당이 누군데
그랴?"
얼굴을 펴고 이렇게 높은 소리로 외쳤다.
5
해가 바뀌고 새해가 되었다.
숙부님은 사뭇 금광에 계시느라고 새해 맞이까지도 숙모님과 나와 단둘이서 쓸쓸히 하게 되었다.
섣달 중순 즈음에서 한 보름 동안은 일금 얼굴을 뵈지 않던 황 진사가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대문
밖에서,
"일 오너라."
하고, 언제보다도 호기 있게 불렀다. 그 고약 때가 찌든 두루마기를 빨아 입은 위에 어이한 색안경
까지 시커먼 걸로 하나 쓰고는, 숙부님께 새해 인사를 드리러 왔노라고 하였다. 숙부님이 안 계신
다고 하니, 그러면 숙모님이나 뵙고 가겠다고 하였다.
숙모님은 마침 있는 음식에 반갑게 구시며, 떡과 술상을 차려 내주셨다. 그는 몇 번이나 완장 선생
을 못 뵈어 죄송스럽다고 유감의 뜻을 표하고는, 술을 몇 잔 들이켜고 나더니,
"일배 일배 부일배로 우리 군자 사람끼리 설 쇰을 이렇게 해야지."
흥취에 못 배기겠다는 듯이 손으로 무르팍을 치곤 하였다.
숙모님이,
"새해에는 장......."
하다가 말끝을 움츠러들여 버리자, 그는 그 말끝을 잡아서,
"금년 신운은 청룡이 농주랬지만, 아 천량이 생겨야 장갈 들지."
하였다.
이튿날도 찾아왔다. 사흘째도 왔다. 그리하여 정월 한 달 동안을 거의 매일같이 숙부님께 새해 인
사를 드려야 할 것이라면서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결국 숙부님께 새해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말
았다.
그 뒤 한철 동안을 그는 아주 우리 집에 발길을 끊고 나타나지 않았다. 검은 둥치에 새움이 트고
버들가지에 물기가 흐르는 봄 한철을 나는 궁금한 가운데 보내었다.
봄도 지나 여름이 되었다. 새는 녹음 속에 늙고, 물은 산골을 울리며 흘렀다.
그 때 돌연히 숙부님이 어떤 사건으로 피검(被檢)이 되자, 나는 시골 어느 절간에 가 지내려던 피
서 계획을 포기하고, 괴로운 여름 한철을 서울서 나게 되었다. 물론, 숙부님의 사건이란 건 당시
나도 잘 몰랐는데, 세상에서 들리는 말로는 만주에서 발단된 '대종교 사건'의 연루라는 것으로, 숙
부님 검거, 금광 채굴 중지, 가택 수색,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당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느 날은 서대문 밖에 숙부님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통을 지나오려니까,
"아, 이건 노상 해후로구랴!"
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연록색 인조견 조끼에 검은 유리 안경을 쓴 황 진사가 빨아
말린 두루마기를 왼쪽 팔에 걸고, 해 묵힌 누렁 맥고모는 뒤통수에 잦혀 쓰고, 그 벗겨진 알이마를
햇살에 번쩍거리며 총독부 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네, 일재 선생 오래간만이올시다."
하고 내가 인사를 한즉,
"댁에서들 모두 태평하시구, 완장 선생께도 소식 자주 듣고……. 아, 이건 참 노상 해후로구랴!"
또 한 번 감탄하고 나더니,
"이리 잠깐 오. 날 좀 보."
하고, 그는 나를 한쪽 구석에 불러 놓고, 지극히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노라고 한다. 나는 사정이
전과 다른 형편에 있던 터이라, 혹시나 이런 데서 무슨 자세한 내용이나 알게 되나 하여 두근거리
는 가슴을 누르며 긴장한 낯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것인데, 그는
"아, 내 조상께서는 모르고 지낸 윗대 조상을 근일에 와서 상고했구랴."
이런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나는 너무 어이없어 어리둥절해 있노라니,
"왜 그루? 어디 편찮우?"
한다. 괜찮으니 얼른 마저 이야기하라고 하니,
"아, 이럴 수가……. 온, 내 조상이 대체 신라적 화랑이구랴!"
하고 혼자 감개해서 못 견디는 모양이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아 냈느냐고 한즉, 근일에 여러 가지
서적을 상고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
황 진사를 광화문통에서 만난 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숙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총
독부 앞에서 전차를 내려 필운동으로 들어 가노라니 '모루히네' 환자 치료소 옆에서 조금하면 못
보고 지나칠 뻔하다가 그를 보게 되었다.
머리가 더부룩한 거지 아이 몇 놈과, 아편 중독자 몇과 그 밖에 중풍쟁이, 앉은뱅이, 수족 병신들
이 몇 둘러싼 가운데에 한 두어 뼘 길이쯤 되는 무슨 과자 상자를 거꾸로 엎어 놓고, 그 위에 삐
쩍 마른 두꺼비 한 마리와, 그 옆의 똥그란 양철통에 흙빛 연고약을 넣어 두고 약 쓰는 법을 설명
하는 위인이 있다.
"두꺼비기름, 두꺼비기름, 에헴, 두꺼비기름이올시다. 옻 오른 데도 쓰고, 옴 오른 데도 쓰고, 등창,
둔창, 화상, 동상, 충치, 풍치, 이 앓는 데도 쓰고, 어린애 귀젓 앓는 데, 머리가 자꾸 헐어 '하개 아
다마' 되랴는 데, 남녀 노소, 어른 애, 계집 사내 할 것 없이, 서울내기 시굴띠기 물을 것 없이, 거
저 누구든지 헌 데는 독물을 빼고, 벌레가 먹는 데는 벌레를 내고, 고름이 생기는 데는 고름 뿌리
를 빼고, 살이 썩는 데는 거구 생신을 하고, 자, 깊이깊이 감춰 두면 반드시 한 번씩은 찾게 되는
약, 첩첩이 싸서 깊이깊이 넣어 두면 언제든지 한 번은 보배가 되는 약! 자아, 두꺼비기름이올시다.
두꺼비 코에서 짠 두꺼비기름, 자, 그러면 이 두꺼비가 얼마나 무서운 신효가 있는가를 여러분의
두 눈 앞에 보여 드릴 터이니까 단단히 보시오."
그는 약물에다 흙빛 고약을 찍어 넣어서 저으며,
"자아, 단단히 보시오. 우리 몸에 있는 썩은 피가 두꺼비 코끝만 들어가면 그만 이렇게 홍로일점
설, 봄철의 눈과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하고, 약물 접시를 들어 여러 사람 앞에 한 번 내두르고 나서 기침을 한 번 새로 하더니,
"여러분, 여기 계시는 이분은 우리 조선에서 유명한 선생이올시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두 달 전부
터 충치를 앓으셔서 병석에 누워 계시다가 이 약으로 말미암아 어저께 벌레를 내고 오늘부터 이렇
게 이 곳까지 나와 주시게 되었습니다."
하고, 궐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바로 그 곁에는 전날에 보던 그 검정색 안경을 쓴 우리 황 진사가
점잖게 먼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궐자는 다시 말을 이어,
"선생께서는 또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깊으실 뿐 아니라, 곰의 쓸개, 오리의 혀, 지렁이
오줌, 쥐의 똥, 고양이 간 같은 걸로 훌륭한 약을 지어서 일만 가지 병마를 퇴치시킬 수도 있는,
말하자면 이인과 같은 능력을 가지신 어른이올시다!"
할 즈음에 순사가 왔다. 에워싸고 있던 거지, 아편쟁이, 수족 병신들은 각기 제 구석을 찾아 헤어
졌다.
이 꼴을 보신 숙모님은 나에게 눈짓을 하시며 앞서 가셨다. 나도 숙모님 뒤를 쫓아 한참 오다 돌
아본즉, 아까 연설을 하던 작자는 빈 과자 상자에 마른 두꺼비와 고약통을 담아 가슴에 안고, 황
진사는 점잖게 두 손을 두루마기 옆구리에 찌른 채 순사를 따라 건너편 파출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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