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幻想) 여행(旅行)
-정소성
그는 친구 억(憶)이 여지껏 제주도에 살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듯 멍한 표정에 붙잡혀 있다. 시외전화 접수부에 앉은 아가씨는 좨나 무관심한 표정을 주위에 흘리고 있다. 전화국 청사는 파도의 물빛에 반사되어 눈부실 정도로 새하얗게 빛났다.
접수부에 앉은 아가씨의 전신에서는 땟국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땟국물 위로 시선이 스치는 순간, 그녀의 피로와 그녀의 가난과 이 퇴락한 항구의 살벌함을 생각했다. 그녀의 인중, 그 빈약해빠진 윗입술의 홈 속에 돋아난 검은 사마귀는 고의 이런 순간적 생각을 급작스레 욱죄여주는 것 같아,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억은 지금도 제주도에 살고 있을까. 과연 그 녀석을 만날 수 있을까. 도대체 몇 년 만인가. 그는 계속 멍한 표정에 붙잡힌다. 그가 확연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별것이 없다, 짙은 머리숱이 안경까지 드리워졌었던, 어린아이 주먹만큼이나 조그만 녀석의 얼굴이 떠오를 뿐이다.
녀석이 어쩌면 제주도에 여지껏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할 따름이다. 한 번 들르시라구요. 살만하다구요. 녀석은 아마도 이런 소리를 했으리라. 그것이 몇 년 전인가, 얼핏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보고, 녀석을 알고 지냈던 서울에서의 서적 외판원 시절을 셈해보았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것 같다.
이억, 제주도 367번 (숙부댁 헌책방)
녀석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 전화의 주인을 적어놓은 수첩을 그는 바짓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려본다. 땀에 흠뻑 젖어 있다. 꺼내어 확인해볼까 하다가 그만 둬버린다. 지난 여름을 통해 수백 번을 되뇌어본 것이 아닌가. 이제 다시 무엇을 확인한단 말인가. 그는 손을 그냥 빼 버린다. 손바닥에 내밴 끈끈한 땀이 한결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콸콸 흐르는 수돗물 속에라도 집어넣어 문질러대고 싶다.
그가 유난히도 무더웠던 이 여름에 어쩔 수 없이 여행에 나서면서부터 녀석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 것은 이래저래 알게 된 사람들의 전화 번호와 주소를 적어둔 휴대용의 조그만 수첩 때문인지도 모른다. 녀석의 전화번호는 유난스레 손때 묻은 수첩의 겉장에 비스듬히 휘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수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아끼지도 않는다. 그럴듯한 수첩, 남 보기에 창피하지 않을 모양새의 수첩이란 필경 겉장이 견고하기 마련이므로 자연 부피가 두텁다.
이것은 그 부피 때문에 휴대하기에 불편하다. 그는 겉장이 대학 노트의 겉장과도 같은 20원 짜리 소형 수첩을 사서 휴대용 전화 번호부로 쓰고 있었다. HIGH CLASS란 두 단어가 노트의 겉장 중심부 상단에 반원형으로 걸려 있고, Note Book란 알파베트가 더 큰 활자로 반듯이 박혀 있다. 각 단어의 첫 글자 N자와 B자만이 대문자의 자형이었고, 나머지는 필기체이다. 그 밑으로 줄이 세 줄 처져 있었다. 수첩의 용도와 소유자의 이름을 적을 것을 암시하고 있었으나 공백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 세 줄에 엇비슷이 걸쳐서 녀석의 이름과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생각컨대, 녀석의 그것이 무슨 특기할 만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수첩의 내면에 여백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여튼 그것이 인연이 되어 녀석은 늘상 그 쥐새끼같이 조그만 낯짝을 그의 기억의 흐린 공간에 디밀곤 했다.
녀석이 그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도, 그리고 그가 녀석을 만나기 위해 남해안에 위치한 이 동떨어진 항구에 찾아든 것도 그에게는 우스꽝스런 우연의 연속이었다. 더군다나 녀석이 지금 제주도에 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바다의 수면 위에는 여름의 강렬한 햇살이 엿기름처럼 부어지고 있었다. 시외 전화 신청서의 수화자란에 녀석의 이름을 적어 넣을 때, 또 한번 녀석의 머리털에 뒤덮인 조그만 얼굴이 그의 시야에 비쳤다. 녀석도 변했겠지, 찾아가는 나를 녀석은 어떻게 생각할까? 녀석이 비록 제주도에 산다고 할지라도 녀석의 숙부라도 육지로 이사를 왔다면 전화가 연결되지 못할 것이 아닌가. 송화자의 주소 성명란에 그는 성명만을 기입하고 멈칫거린다. 주소, 그는 자신의 주소를 기입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 못한다. 지금 팔고 있는 그 집에서 머잖아 이사를 해야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이 있는 그곳을 그는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언제부터인가 하고 있었다. 볼펜은 그의 손가락들 사이에서 정지되어 있다. 그는 전화국 청사의 서편 유리창에 비친 저 아래 큰길과 길 저편 몇 채의 시멘트 창고가 들어선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부서지고 있는 파도의 횐 거품을 보고 있다.
오늘 정오쯤에 그는 대전 역 대합실에 있었다. 이 적막한 항구를 그는 전연 의식하지 못한 채로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찾아 다녀봐야 하는 사람들의 리스트에도 녀석의 이름은 없었다. 수첩의 겉장에 엇비슷하게 쓰여진 녀석의 이름이 그의 시선에 띄일 적마다 그 쬐끄만 얼굴이 아울러 떠올라 보일 따름이었다.
대합실은 텅 비어 있었다. 고속 버스와 그 흔해빠진 관광 버스 탓일까. 사나흘 전에 예매해야 한다는 새마을호의 전용 대합실이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일까. 그는 여름내의 여행에 지쳐 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그가 여행길에 나서면서 뭔가를 기대했던 바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 바램이 완전히 무산된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여름이 지칠 줄 모르고 대지 위에 흘리는 더위와, 끝없이 달린 고속버스에 한껏 지쳐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행선지를 생각해본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의 대전 역에서는 어디든 갈 수가 있다. 고러나 그의 시야에는 그를 수용해줄 어떤 낯선 도시, 어떤 정다운 표정의 인물도 떠올라주지 않았다. 그는 자꾸만 조금씩 절망해 가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역사의 벽에 높게 걸린 열차운행시간표에다 시선을 준다. 두 시 십오 분에 부산행 특급열차가 있고 두 시 정각에 호남선을 달리는 특급이 있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경부선이든 호남선이든 열차들이 플랫폼으로 들어오기에는 상당한 리간이 있었다.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쩌면 여름 속을 뛰어들어 여름을 헤집고 다녔다고도 할 만했다,
「선금을 오백 원 내세요.」
시멘트로 만들어진 가림 테이블 저쪽에서 힘없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시선을 고정시키고 의식을 그것에 실었을 때 그녀의 검은 사마귀, 인중 위에 박혀 있는 사마귀가 꼼지락거리듯 움직이고 있음이 보였다. 그녀와 그와의 사이는 불과 일 미터도 안되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멀리서 아득히 전해져오는 듯했다. 그것은 그가 지금 이 헐벗은 항구의 연안에 와 닿고 있는 파도소리에 의식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좨 큼지막한 선박이 시멘트 창고들 사이 공간으로 드러나 보이는 바다 저 멀리 정박해 있었다. 별로 커 보이지도 않는 선박이지만 연안으로 접근해오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 낡은 항구의 연안이 얼마나 얕은 수심으로 메꾸어져 있는가를 짐작케 했다. 그는 그녀에게 오백 원을 넘기다가 설핏 청사의 서편 유리창을 스치는 한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은 적어도 그의 시야에 간접적으로 들어온 시선의 포착물이었다. 시선에 정면으로 맞부딪친 대상물은 아니었다.
「으으음---」
그는 긴 한숨을 자기도 모르는 새에 토해냈다. 저 사내가 이 항구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설마하니 자신을 따라오기야 했을라고. 그 징그러운 목 줄기를 어디에다 감출 데가 없어서 이 낡은 항구의 거리로까지 흘러왔단 말인가.
대전 역에서였다. 행선지를 정하지 못해 나무의자에 걸터앉은 그에게 조그만 사내가 다가왔다. 유난히 작은 키에 손에는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이 사내를 처음 보는 순간 그는 초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만났을까. 자문해보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내는 유별나게 이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목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수건은 바탕이 횐 색이었으나 때에 절어 거의 거무스레하게 보였다. 그는 그 사내가 자기를 의식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를 향해 던지는 사내의 시선은 별다른 낌새가 엿보이지 않았다. 더럽고 키 작은 이 사내는 늘상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가끔 가다가 고개를 들어 순간적으로 주위를 살피는 것이었다. 사내를 의식하고 있던 그는 사내가 고개를 쳐드는 동작이 거의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또한 사내의 시선은 무료하게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어느 열차를 탈 것인가 하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작정했다. 왜냐하면 아직은 상당한 시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순간 그는 사내의 규칙적인 행위로 쏠리는 자신의 호기심을 창하게 느꼈다. 그는 두 가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첫째로 사내는 누구에겐가 쫓기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추적자의 유무를 살피고 있는 듯했다. 둘째로 그가 이유 없이 느끼는 것은 사내가 어쩌면 자신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즉 사내 자신이 추적자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느낌이요, 막연한 생각이었지 뚜렷한 이유가 있지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이런 생각은 조금씩 굳어져갔다. 사내는 적어도 무엇인가를 살피고 있음에 거의 틀림이 없는 듯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편견 속에 있지 않나 고개를 내저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사내는 규칙적인 동작으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훌쩍 자리를 떴다. 다소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리를 일어서 보니 그는 막상 갈 데라고는 없었다. 이 여름 그가 전국을 쏘다닌 것은 어쩌면 더위 속을 그냥 허위적거려본 데 불과할는지도 몰랐다. 고속 버스로, 기차로. 어떤 때는 택시를 타고, 드물게는 걷기도 하면서 전국을 내달렸던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누구는 숫적으로 대여섯 명 안팎이었다. 그가 짧지 않은 일생을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고의 뇌리에 남게 된 사람들이었다. 억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그 낡은 수첩은 이 여름 여행의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열차들의 운행 시간표가 벽면에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가로눈금의 상단에는 나란히 -도찰-과 -출발-이 쓰여져 있었고, 왼편의 눈금에는 -경부선-과 -호남선-이 적혀 있었으며, 이들 -선-을 기점으로 해서 도시명이 그 옆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이미 확인한 열차들의 시간을 다시금 눈여겨보았다. 그는 이 대전 역을 얼른 떠나 버리고 싶은 자신을 느꼈다. 사내의 존재가 다소는 귀찮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떠날 준비라도 하려는 듯 동전 이십 원을 던져주고 대합실 구내의 지린내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디를 가나 있기 마련인 역 대합실 구내 화장실이 거기 있었다. 그는 강한 역겨움을 느꼈다. 그가 화장실 내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칸막이의 문 안으로 사라지는 사내를 보았다. 그 사내는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견 사내가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이었고, 물을 한껏 적셔 가진 채였다. 사내의 두 손에 들려진 수건에서는 물이 뚝뚝 듣고 있었다. 그러나 물방울이 듣고 있는 수건보다도 그의 감각에 먼저 와 닿는 것은 수도물 쏟아지는 소리와 사내의 목줄기에 나 있는 징그러운 상처였다. 핏자국이 가신 상처는 징그럽게도 곪아 있었고, 수돗물 소리는 강렬한 것이었다.
위험한 상처를 지닌 저 키 작은 사내는 황 급히 도망친 것이었다. 사내가 사라 진 공간 속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침입자의 동태를 청각에 의해 파악하려는 듯했다.
그는 후닥닥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수도꼭지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귓구멍에 와 박히었다. 그는 엉겁결에 매표구로 뛰어갔다. 마침 플랫폼에서 기적을 울리고 있는 기아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여름의 햇살과 졸음기로 가득 메워진 플랫폼에서는 긴긴 부저의 음향이 일고 있었다.
「제주도 부탁하셨죠?」
사마귀가 눈앞에서 옴찔거리고 있었다. 제주도? 제주도 부탁? 그는 시외 전화를 부탁해놓고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있기만 한 자신을 깨달았다. 그렇다, 내 옛날 친구 억이란 녀석에게 통화를 부탁했지. 녀석은 지금도 제주도에 살고 있을 것인가.
「아, 네, 제주도요!」
「저기 2번 복스로 가세요.」
사마귀는 턱짓을 했다. 저편구석에는 유리 칸막이 세 개가 있었고, 칸막이 마다에는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편 유리창에 비쳤던 사내의 얼굴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금 나타났다. 사내의 얼굴 뒤로는 바닷가의 빈약한 시멘트 창고들이 늘어서 있었고, 햇살에 불질러진 듯한 파도가 조용히 부서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화국 청사의 서편 유리창은 붉게 물들여졌고, 그것은 잠시 그의 시선을 흐리게 했다,
「저기 2번 복스라니깐요.」
사마귀는 예상외의 고음을 발했다. 그 순간 사내의 얼굴은 유리창 위에서 사라졌다. 한결 파도는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게, 제줍니다.」
바닷물 속으로 먼길을 달려온 것치고는 음성은 꽤 또렷했다. 수화기를 잡은 손바닥에서는 기름땀이 계속 흘렀다. 전화 복스 속에서는 시가지가 내다보였다. 시야에는 파도만이 출렁거릴 뿐이었다. 사내의 모습은 얼씬을 하지 않았다.
「거기 이억씨라고 계십니까?」
통화사정은 좋았으나 바닷속 천리 길을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질 않아 그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누구요?」
「이억씨요」
「누구요? 잘 들리지 않습니다. 크게 말씀하세요.」
「여긴 잘 들리는데 ,,,, 거기 이억씨 숙부님댁이죠」
그는 수첩을 꺼내들고 있었다. 녀석이 숙부댁에 있는지 백부댁에 있는지 금방 구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억이요 ? 장가가서 이사 나갔지요. 근데 갸가 오늘 아침 일찌기 배타고 뭍에 나갔지요. 오늘 오후 늦게 도착할 것이라요!」
「네, 잘 알았습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제주도에서의 정기 여객선은 부산과 그가 지금 체류하고 있는 이 메마른 항구뿐이다. 그가 부산에 갔을 턱은 없었다, 그래서 수화기를 내려놓은 것이다. 바다 한가운데 무슨 무인도처럼 떠 있을 큼지막한 선박은 마치 화재파도 발생한 듯 태양 빛의 반사광 속에 홀로 떠 있었다. 부두의 저쪽 오른편으로는 선착장 개축공사가 진행중이었으나, 그것은 활기를 잃은 한가로운 놀이 같이만 보였다. 태양광선의 열기에 녹아버린 것일까. 더위 속에 탈기 되어버린 것일까.
그는 손목시계를 꺼내보았다. 시계바늘은 세시를 가리키고 있다. 녀석이 부두에 도착하려면 대략 얼마 정도의 시간이 남은 것일까. 제주에서 이 항구까지 얼만큼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일까. 그가 유리 복스를 나왔을 때, 사마귀아가씨는 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무슨 도표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들여다보았다. 통화료를 계산하는 것이었다.
「팔백구십 원이에요.」
그는 지갑을 꺼내 천 원 권 한 장을 건넸다.
「저기, 제주도에서 이 항구까지 정기 여객선으로 몇 시간쯤 걸릴까요?」
그녀는 얼굴을 쳐들었다. 그에게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얼굴만 쳐들었지 시선을 여전히 내리깔고 있었다.
「글쎄요, 한 다섯 시간 걸린다나봐요.」
그는 거스름돈을 돌려 받고 있었다.
「근데 뱃시간은 일정치가 못해요. 파도가 심하면 열 시간도 걸릴 거예요.」
그녀는 지껄이면서 다른 전화청구서에 시선을 떨군 채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아냐, 요샌 쾌속정이라구. 훨씬 빨리 달릴걸.」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직원이 대화에 끼어 들었다. 그는 돌같이 굳은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사마귀 아가씨에게만 시선을 주면서 저희들끼리의 대화체로 얘기를 건넸다.
그는 전화국 청사를 벗어났다. 쾌속정의 도착시간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낯선 항구의 어디쯤에 무엇이 위치하고 있는지 그에게는 도무지 생소할 뿐이었다. 청사의 계단을 걸어 내렸다. 송곳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고적감과 이것을 연기처럼 감싸는 공허감을 그는 아울러 느끼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큼지막한 배에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한 발짝씩 걸어 내려옴에 따라서 그는 자신의 땀구멍 속으로 달라붙는 지독한 지열과. 점점 뚜렷이 귓전에 와 닿는 파도 소리와, 생각의 한구석을 먼 이국의 어느 거리로 데리고 온 듯이 느끼게 하는 저릿한 소금냄새를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항구의 시가지는 동서를 가로지른 한일자 모양의 큰길을 따라 길쭉하게 퍼져 있었다. 큰길 앞쪽으로는 선착장이며 잡아온 고기를 저 장해놓았음직한 시멘트창고들이며 정박해 있는 조그만 어선들이 보였고, 길의 후면으로는 빈약한 시가지가 몇몇 채의 건물들을 끼고 퍼져 있었고, 북쪽으로는 비스듬한 구름이 걸려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항구다운 지형이었다,
그는 지열과 파도소리와 소금냄새를 자신 속에 퍼담으면서 시가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 항구의 현실이 맴을 돌며 그를 포위한 채 욱죄여들기 시작했을 때. 그는 느닷없이 자취를 감춘 사내를 뇌리에 떠올렸다. 그것은 또 다른 그의 현실이었다. 어쩌면 더욱 절실한 현실일는지도 몰랐다.
이 항구에서조차 사내를 만나게 될 줄이야 그늘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내를 떨쳐버리기 위해 그렇게도 잽싸게 기차를 잡아타지 않았는가. 그는 금방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사내의 정체는 무엇인가, 추적자인가 도망자인가. 둘 다 아닐는지도 모른다. 떠돌아다니는 거지인가. 그렇다면 목 줄기의 그 징그러운 상처는? 시가지 구석구석에는 더위와 짠 냄새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거리의 모든 것, 사람까지도 더위와 소금기가 배어 있어서 손가락이라도 문질러대면 묻어나을 것만 같았다. 그는 사내의 존재를 잊어버리고자 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연의 일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꾸만 머릿속으로 달라붙는 사내의 영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눈앞 저쯤에 마구 달아나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소방서의 망루가 유난히도 높다랗게 불볕 하늘에 치솟아 있었다. 몇 대의 소방차가 늘어선 소방서의 좁다란 앞마당까지 곧장 걸었다. 바지 통이 두 다리에 감겨왔다. 다리의 안쪽으로 땀이 내비치기 시작했다. 소방서 건물에서 선창(船艙)이 있음직한 방향으로 몸을 돌렸을 때, 소금기를 실은 무더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녀석은 언제쯤 올 것인가. 벌써 도착해버렸는가. 풍랑이 세차서 출발을 포기해 버렸는가. 그렇지도 않으면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라도 하고 있을까. 그는 이 생각 저 생각을 머릿속에서 굴려보았다.
광장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광장, 소방서 앞마당을 지나칠 때쯤 해서, 마치도 오물 수거차에다 붉은 페인트칠을 한 듯한 소방차 한 대가 느닷없이 사이렌을 울리면서 발동을 걸었다. 꽁무니에 소방관 둘을 태운 소방차는 금세 마당을 떠났다. 마당에는 빗줄기에 드러난 자갈 위로 햇살이 내려와 반짝였다.
선창으로 탄 길을 걸으면서 그는 이 화재와 사내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우연으로 단정한 사내의 존재를 시시각각 떠올리는 자신을 그는 은근히 꾸짖어보기도 했다. 소방차는 항구의 메인스트리트가 뻗어 간 서쪽을 향해 마치 불 속으로 뛰어들 듯 마구 달려갔다. 소방차가 사라진 거리의 끝부분은 서편으로 기운 햇살 탓으로 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쪽에 학교들이 운집해 있는 듯 조무라기 국민학교 아동들이 꾀죄죄 땀을 흘리면서 무리 지어 걸어나오고 있었고. 간혹 쑥떡색 차림의 중학교 학생들도 보였다.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한참 동안 항구의 서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는 서편 하늘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어서 그것이 화재로 인한 연기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검붉은 색채의 짙은 기층이 두텁게 드리워져 있었다.
선창을 향해 나 있는 길 양옆에는 지저분한 창고들이 즐비해 있었고, 창고들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뻗어 있었는데, 작부들이 더위를 식히기 위해 그늘에 나와 쉬고 있는 대폿집이 수없이 많이 눈에 띄었다, 창고들은 이 항구의 어떤 전성기를 생각게 해주었고. 수많은 대폿집은 이 생각을 뒷받침했다.
통통거리는 소형 선박의 엔진 음이 들려왔다. 그는 시장기를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찌그러 붙은 중국집 함석간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식당간판이 보이질 않았다. 어떻게든 식사를 하고 싶었다. 고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대폿집 간판이요. 여관 간판뿐이었다. 선창케 가서 녀석의 도착 여부를 알아낼 때까지 참기로 했다. 방파제에는 계속해서 횐 거품이 일고 있었고, 그것에 따라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일었다. 선창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선 몇 척이 지저분한 바닷물 위에 떠있었다. 시멘트바닥과 수면 위에는 강렬한 햇살의 반사가 있을 뿐이었다. 부두를 이루고 있는 긴 시멘트제당은 햇살에 한껏 달아 있었다. 후덥지근한 바닷바람이 끝없이 불어왔다.
그는 부두사무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웃통을 벗어 젖힌 사나이들의 팔뚝과 어깻죽지는 햇살에 검붉게 그을려 있었다. 그들이 걸친 어깨걸이 런닝샤쓰는 땀에 젖어 있었다.
「실례합니다. 오늘 제주발 정기여객선은 몇 시쯤 도착합니까?」
「글쎄요, 벌써 도착할 시간인데, 오늘 바람이 있어서 출발이 한 시간 가량 늦은데다 제 속력을 못 내는 것 같군요.」
한 사나이는 수건으로 목 줄기의 땀을 훔쳤다. 사나이는 궁덩이께가 밑으로 처져빠진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알통진 다리를 지나 발에는 굵게 그물진 슬리퍼가 신겨 있었다. 하급 선원 같은 냄새를 물씬 풍겼다.
「대략 몇 시쯤 될까요」
그는 거북선 한가치를 권했다.
「마, 대략 대여섯 시가 돼야 될 것 같습니다, 실은 나도 그 배를 기다리고 있소만.」
선원은 창가에 놓인 책상 위에서 성냥을 찾아 불을 붙였다. 지평선 위에는 저 멀리 물안개가 가볍게 드리워진 공간으로 몇 개의 섬들이 떠 있었다. 듣던 대로 다도해였다.
그는 시장기와 더불어 갈증을 느꼈다. 그는 사무실 옆 벽에 붙여 놓여진 길다란 나무의자에 몸을 내렸다. 그는 선원에게 말을 또 건넸다.
「미안하지만 마실 물 한잔을,,,,,,」
「물요? 마실 물요?」
사나이는 의외라는 듯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거두었다.
「네, 물 좀 마실까 하구요.」
「물이 어딨소. 이 바닥에.」
「무슨 말씀이요 ? 물이 없다니,,----」
「여보, 난 연 나흘간 세수를 못 했수다,」
짜증 섞인 목소리다. 별로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투다. 선원은 햇살 속으로 거칠게 연기를 뿜어댔다.
「왜 그럴까요?」
그는 언성을 부드럽게 가다듬어 말을 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물에 잠겼다가 떠오른 듯한 이 낡아빠진 항구가 무슨 절망의 실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항구의 양수장, 양수기와 원동기가 삼십 년 전 거랍니다.」
「삼십 년?」
그는 되받았다. 다소는 놀라왔다.
「자꾸 말해서 뭣하겠소 ? 일주일째 아침마다 밥짓는 물 한 됫박씩을 배급받고 있소. 보아하니, 외지사람이오?」
「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마다 이 꼴이요. 세탁이 다 뭐요, 상판 씻을 물도 없는데.」
선원은 자신이 걸친 옷가지들이 너무나 꾸지레한 데 대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는 부두를 떠났다. 더웠다. 몸과 마음이 땀을 흘렸다. 바닷바람은 이 더위를 부채질해주었다. 부두를 벗어나 소방서 건물을 바라보며 걸었다. 건물의 붉은 색깔 때문에 그것은 마치 불덩이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갈증을 끄기 위해 길 옆 구멍 가게로 들어가 음료수를 찾았다.
「아무 것도 없에요.」
젊은 아낙의 대꾸다.
「그럼 환타도 없소?」
「그럼요. 오늘저녁에 콜라가 들어 올 거예요.」
「저기 빈 병은?」
그는 가게 안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콜라 병을 가리켰다.
「오백 원 주실래요?」
그는 말없이 지폐를 내던졌다. 그는 카스테라까지 한 봉지 샀다. 조그만 봉지 안에다 콜라 한 병과 빵을 넣어 가지고 그는 거리로 나왔다. 함석으로 지붕을 이은 가게 안에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소방서 뒤편으로 저쯤 물러앉아 얕은 구릉이 있었다. 그는 이 구릉의 한옆으로 꽤 짙은 소나무 숲을 보았다. 그는 그리로 올라가기로 했다. 숲 속에서 세 가지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 더위를 좀 식히고, 방과 콜라를 처분하고, 녀석이 탄 배가 항구로 들어오나를 지켜보고자 했다. 이 메마른 항구에 저 정도의 푸르름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항구의 바닥은 너무나 달아 있었다. 비오듯 흐르는 맘을 그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나마 여름내 아껴두었던 땀방울이 이제는 마지막으로 결판이나 내려는 듯이 쏟아져 내렸다, 소방서의 뒷담을 돌아 그는 야산으로 올라갔다. 소방서의 담벼락은 야트막한 토담이라 그 뒷마당이 들여다보였다. 거기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마당의 한옆으로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매미소리가 요란했다.
야산은 그야말로 민둥산이었다. 사태져 무너진 흙더미 사이사이로 잔디가 어지럽게 돋아나 있었다. 산은 시가지에서 보던 것보다는 꽤 높았다. 항구의 부두가 저 아래로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선창에서 잘 보이지 않던 갈매기들아 선명히 시야에 들어왔다. 산 위에서의 조망 탓일는지 바다 한가운데 정박해 있는 대형 선박에서 뱃고동소리가 울렸다.
소나무들이 서 있는 데는 후미진 곳으로 한결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손에 든 빵 봉지 때문에 한결 보행이 부자연스러웠다. 커다란 바위와 넝쿨이 있는가 하면 사태져 잔디가 씻겨 내려간 데가 있어서 접근은 결코 용이하지가 못했다. 음료수를 처분한 것은 오래 전이다. 빈 병을 그는 소방서 뒷마당 잡초 속으로 집어던졌던 것이다.
그는 일단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 소나무 숲을 향해 다시 방향을 잡았다, 정상에 올라와 보니 소나무 숲은 좌측 저편 눈 아래로 보였다. 숲 사이로 전화국의 슬레이트 지붕이 드러났다. 사마귀 여직원이 머리에 떠올랐다. 눈을 내리깔고 있겠지.
시가지의 서편 구릉 쪽으로 후미진 곳에서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사람들도 꽤 많이 모였다. 그 일부는 흩어지는 중이었다. 불길은 보이지 않고 연기만 올랐다. 연기는 해풍에 실려 야산의 허리를 타고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소나무 숲에 닿았다. 바다가 한결 잘 보였다. 그만큼 바닷바람도 세차게 불어왔다. 숲 속 여기저기에는 잘 손질되지 않아 잡초가 키만큼이나 무성히 자랐다. 이장을 해간 묘는 관을 파내고 메꾸지를 않아 깊숙이 패여진 채 버려져 있었다.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매미 우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바다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선박과 부두를 연결하는 소형 선박도 보였다. 앞 바다를 그냥 가로 질러가는 배들도 있었다. 유난스레 엔진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것들은 횐 물살을 빚으며 마구 내달렸다, 섬과 섬 사이를 이어주는 배들이거나 바캉스 족들을 실어 나르는 유람선 같기도 했다. 이 배들도 자기 존재를 과시하려는 듯 간혹 가다가는 긴 기적소리를 냈다.
녀석이 장가를 갔다고? 그는 빵을 씹으며 억이 녀석을 생각했다. 저 파도를 타고 남쪽바다에서 올라오겠지. 무언가 구원을 줄 것인가. 무슨 일로 뭍으로 나오는 것일까, 여편네라도 끌고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한 달째 소식을 못 전하고 있는 아내를 생각했다. 그리고 두 꼬마들도 생각했다. 사십 고개를 바라보는 자신을 돌이켜보게 했다. 언제나 도망치듯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얼핏 떠올라 보였다.
숲의 저쪽 끄트머리 부분에는 큼직한 바위가 있었다. 바위는 금이 가 금방 짜 갈라질 것 같았다. 소나무줄기에 가려 뚜렷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허름한 옷가지가 이 바위 위에 놓여 있어서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순간적으로 목 줄기에 징그러운 상처를 가진 사내를 생각했을 때, 그 옷가지는 바위 아래로 당겨져 내리는 것이었다. 사내는 도망자인가 추적자인가. 그는 썩 기분이 언짢아졌다. 도대체 짜식은 뭔가, 죽일 놈! 왜 남의 뒤를 밟는가. 그는 은근히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는 방을 마구 씹어댔다. 그러나 바위 밑에 있는 자가 그 사내인지 확실치 않았다. 십중팔구 그자가 사내라 할지라도. 그 사내가 먼저 와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사내가 그의 뒤를 밟은 것이 아니라 그가 사내의 뒤를 밟은 꼴이 된다. 그것은 적어도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사내의 뒤를 밟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 것 같은 예감이었다. 사내가 추적자이건 도망자이건 관계없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사내의 얼굴은 확실히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기억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사내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 환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런 느낌은 대전 역에서 사내를 처음 대했을 때보다 한결 강한 것이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서 횐 색채를 떤 물체의 잽싼 이동감이 일었다. 그는 빵 조각을 덩이째로 집어삼키면서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었다. 대형선박과 부두 사이를 부지런히 왕복하는 통통선이 보일 뿐 바다는 조용했다. 억이 놈은 과연 오는 것일까. 녀석과 어떤 위안의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인가. 바위가 있는 쪽에서는 짙은 정적이 깔렸다. 사내는 이쪽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순간, 그는 이유 없는 예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사내가 흉기라도 휘두르며 자신을 덮칠 것 같았다. 그는 후딱 몸을 일으켜 세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낯선 항구, 더위와 소금기에 찌든 이 바닷가에서 횡사한단 말인가. 그는 터무니없는 비감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여보시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공포와 비감한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발부리께에서 큼직한 돌을 눈 여겨 봐놓았다.
「---」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여보시오, 일루 나오시오.」
「---」
역시 아무런 대꾸도 없다. 땀이 마구 솟아났다. 통통선의 엔진 음이 머릿속을 간질였다. 그는 결국 돌을 줏어 들고 바위께로 접근했다. 한 발짝 한 발짝 옮겨놓으면서 고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사내의 모습을 마구 찾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러나 망각의 혼미한 늪지대는 깨끗해지지가 않았다. 그는 잽싸게 바위를 지나쳐 몸의 자세를 잡았다. 동시에 그는 몸을 한껏 낮추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그는 놀라움으로 탄성을 발했다. 그는 몸을 돌려 둔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잡초만이 해풍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는 힘없이 돌을 집어던져 버렸다. 그는 흘린 기분이었다. 헌 옷가지가 밑으로 끌려 내렸다 해서 그곳에 사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신경과민이었을까. 사내가 아니었다면 그 짧은 시간에 왜 자취를 감추었을까. 어쨌든 그 옷가지는 없어지지 않았는가.
도대체 이 사내를 어디서 보았단 말인가. 그는 또다시 과거를 더듬어 나갔다. 대구에서? 부산에서? 전주, 광주에서? 춘천에서? 그는 각 도시의 고속 버스 터미널, 기차역을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그의 모습이 언뜻언뜻 각 장소와 매치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얼핏 대구 고속버스터미널의 벽에 붙은 현상 수배인들의 사진을 생각했다. 대학동창인 K에게 숨넘어가게 조여진 자신의 목줄을 좀 풀어달라고 부탁하고서 대전으로 떠나려는 때였다.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이 있어서 그는 대합실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렁면 벽에 붙은 현상 수배인들의 사진 중 첫 번째 것을 보았을 때 마치도 알고 지내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 미수, 키는 작은 편, 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씀, 검게 염색한 작업복 상하의. 대략 이런 것이 쓰여 있었다.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터미널까지 따라나온 K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비단 대구의 K나, 부산의 P,광구의 O, 전주의 D, 춘천의 G등, 그가 방학 동안 방문해보기로 작정을 했던 사람들의 누구도 그를 박대하지는 않았다. 사내의 모습을 회상키 위해 여름에 방문했던 각 도시를 머리에 떠올려보니, 자연적으로 그 각 지역에서 그가 만난 K-P-O-D, G의 얼굴이 각 지역들과 매치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도시들과 사람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사이사이에 사내의 얼굴도 슬쩍슬쩍 너무나 어렴풋이 내비치는 것 같아 결국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사내의 모습을 찾는 행위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바다와 부두가 좀더 가까이 보이는 외에, 전화국 청사의 지붕이 뚜렷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마귀 아가씨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전화국의 저 편 창에 비쳤던 사내의 얼굴도 떠올랐다. 사내는 갑자기 그의 내면의 시야 안에서 비참한 도망자로 그 모습을 뚜렷이 하는 것이었다. 추적자로서의 사내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그는 사내에의 공포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전화국 앞마당에는 두 개의 깃대 꽂이가 있었는데, 그 하나에는 태극기가 매어져 있어서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태극기도 내려질 것이었다.
사내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경계의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키를 넘는 잡초뿐이다. 그는 사내가 어쩐지 전화국 건물을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사내는 전화국 내부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갔다. 사내가 여기 야산에 올라와 이 자리에 앉은 것도 전화국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는 근거 없는 추측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평선 위에 검은 점 하나가 나타났다. 녀석이 탄 정기여객선이 아닐까. 그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점은 조금씩 커지는 듯했다. 풍랑이 일어 점은 확실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조금씩 커지는 듯했다. 녀석에의 기대란 별것이 아니었다. 녀석의 존재가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순전히 우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녀석과 자신과는 무슨 끊고 못 사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녀석과 그가 책 외판원 시절에 낙산 변두리 합숙소에서 같이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가 어느 해 겨울에 몸져 누워 피신을 못할 때, 녀석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좀 자상히 굴었다는 것이 전부다. 이젠 좀 어때요? 이런 말을 녀석은 아침 저녁으로 던졌다. 그는 자신이 내던진 사표가 과연 수리될 것인가 생각할 때마다, 녀석을 생각하는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도대체가 이치에 닿지 않았다. 녀석을 만나 다소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진다 할지라도 무엇을 어떡하겠단 말인가. 그는 피식, 실소를 했다.
K.
P.
O.
D.
G.
이 여름. 이들의 얼굴을 그리며 전국을 누볐다. 그러나 녀석의 모습은 뇌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을 방문하는 여정의 끄트머리쯤에서 녀석의 존재는 부각되었고, 결국 이 불볕 속의 항구로까지 여행은 연장되었을 뿐이다.
「아이구, 이거 몇십 년 만인가!」
「어머, 죽지 않고 있으니 별일도 다 생기는군!」
「그 동안 안 죽고 살았군!」
「그래, 애들은 시집장가 다 보냈나?」
「죽기 전에 그래 한번은 만나는군.」
이런 번듯한 인사말을 그는 리스트의 친구들에게서 들었다. 한 사람씩을 방문해가면서 그는 그들이 건네는 얘기가 신통할이만치 비슷비슷한 데 놀랐다. 비슷하고 반듯한 인사말들은 어쩐 일인지 그에게는 거부의 몸짓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떤 테두리 속의 영역에 안주할 수 있는 연령을 몸에 지닌 그들의 연배이기는 했다.
녀석에게도 자신의 삶을 위한 영역이 있겠지, 그는 후딱 수첩을 꺼내 그 겉장에 비스듬히 적혀 있는 이름과 주소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신 병자로 내몰린 끝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던진 자신을 보고 녀석은 무어라고 할 것인가. 번듯한 인사말을 건네지는 않겠지. 그는 그나마 미지근한 기대감을 가져본다.
수평선 위의 검은 점은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 붙박혀 있다. 점이 정기 여객선이라면 저렇게 멀리에서 멈추어야만 하는가. 그렇게까지 바다의 밑바닥은 얕단 말인가. 그것은 금방 부정될 수가 있었다. 훨씬 가까이 정박해 있는 저 선박은 정기여객선 정도가 아니고 대형 화물선이었다. 저 검은 점은 과연 무엇인가. 저것은 어떤 부정(否定)의 신호인가. 바닷바람에 잡초들은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소나무 가지 위에선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째지고 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이 있다. 검은 점, 대형 선박. 부두와 이 선악 사이를 계속해서 왕복하는 통통선, 햇살에 달아오른 부두의 시멘트바닥, 좁은 길, 대폿집들의 나열 등, 이 모든 것들이 녀석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는 불현듯 전화국 옆 담벼락을 끼고 숲 속으로 몸을 숨기는 물체를 시야에서 느꼈다. 물체는 전화국을 나와 이 소나무 숲으로 기어든 것이었다. 으음, 그는 신음을 발했다. 사내인 것이다. 전화국에서 볼일을 보고 다시금 숲으로 몸을 숨긴 것이다. 이 사내는 역시 추적자인 것 같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사내를 일격에 격침시킬 수 있는 그 큼직한 돌을 잡아들었다. 생명이 없는 이 고체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소형 선박의 엔진음이 유난스레 선명히 들려왔다. 바위 앞 수풀이 사내 때문인지 한결 서걱거리며 흔들렸다.
바다에서 기적소리가 들렸다. 대형 선박의 것인지, 그 검은 점에서 울리는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그는 수풀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실히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웬지 그것은 그 검은 점에서 울려오는 것 같았다. 그 검은 점은 제주도에서 녀석을 싣고 오는 여객선임에 틀림없는 듯했다. 녀석은 얼른 손을 내밀지 않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이. 억이 잘 있었나?」
「---」
「결혼을 했다면서?」
「---」
「어째, 그 동안 잘 지냈나?」
「아, 네, 숙부님을 도우다가 따로 책방을 냈습니다.」
「그래, 재미는 어떤가?」
「숙부님 책을 가져다 팝니다. 그럭저럭 책장사 십 년이라....」
「지금은?」
「네, 숙부님 심부름으로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는 녀석과 그의 숙부 사이로 파고들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갑자기 매미 소리가 일었다. 그는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에는 수평선, 검은 점, 대형 선박, 통통선, 부두의 달아오른 시멘트가 있었다. 정녕코 녀석은 거기에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잡초들의 서걱거리는 소리 외에 숨죽여 땅을 기는 듯한 음향을 그는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오랜 환상에서 깨어난 것같이 느껴졌다. 여름의 무더위 속을 기차로, 고속버스로 내달린 것도 어쩌면 환상 속의 여행인지도 몰랐다. 땅을 기어가는 듯한 음향은 멎었다. 동정을 살피는 것인가, 저 무서운 추적의 음향을 잡아라 ! 그는 묵직한 돌덩이에 힘을 주었다.
수평선
검은 점
대형 선박
통통선
시멘트 바닥의 부두
이것들이 간접 시야에 들어왔다. 또 녀석의 환영이다.
눈썹 위에 어리어온다.
「아 참, 인사 올리는 것이 늦었습니다.」
「괜찮아, 우리 사이에 무슨 인사야.」
「우리 사이라니요? 사람 사이에는 무엇보다도 예의 범절이 중요합니다. 그래,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너무나 오래간만이에요. 죽지 않고 있으니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자. 어서, 이리루 드시지요------」
그는 자신의 이 긴긴 여행이 끝나가려는 순간에, 자신의 목 줄기가 여지없이 조여지고 있다는 절박감에 빠져들었다. 그는 턱없이 땀을 흘리며, 꼬나든 돌덩이만을 힘을 주어 쥐어볼 뿐이었다. 수평선 위의 검은 점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 항구를 멀리 돌아가는 선박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결코 기대의 점은 아니었다. 그는 순식간에 땀 투성이가 되었다. 땀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눈 잔등에 맺혔다. 시야가 흐리다. 그는 한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친다, 아무리 열심히 훑어내도 땀 방울은 또다시 맺힌다. 바다는 그냥 거기 있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란 없었다.
대형 선박은 언제까지나 거기에 그렇게 떠 있었다. 소형 선박은 움직였다. 부두에는 사람이란 없었다. 검은 점은 사라지고 없었다. 항구는 뭔가 실어다주는 장소는 지금 이 순간 절대 아닌 것이었다.
흐르는 땀방울 탓인지, 그는 잡초 속의 사내가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재크나이프를 뽑아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정소성(鄭昭盛: 1944- )
경북 봉화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77년 {질주(疾走)}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 그는 소설을 통한 삶의 체험을 형상화하고자 했으며 작품 속의 인물을 통해 역사적 삶의 의미에 접근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천년을 내리는 눈}, {혼혈의 땅}, {뜨거운 강}, {암야의 집}, {겨울 강} 등이 있다.
'한국단편소설3' 카테고리의 다른 글
83. 행복할 때 나는 눈을 감는다. (0) | 2022.05.26 |
---|---|
82. 화랑의 후예 (0) | 2022.05.26 |
80. 하늘 아래 그 자리 (0) | 2022.05.26 |
79. 크라인씨의 병 (0) | 2022.05.26 |
78. 제도의 덫 (0) | 2022.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