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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해설

오른손이 왼손에게

by 자한형 202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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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이 왼손에게 / 정균석

여보게

오늘은 내 마음 먹고

자네랑 얘기 좀 해야겠네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였지만 더 늦기 전에 할 말은

해야겠다 싶어 날을 잡았네

 

우리가 주인님 모신지 벌써 수십 년

누가 뭐래도 자네야말로 내 소중한 짝꿍이지

그런데도 난 자네를 존중하지 못하고 늘 내 보조 정도로만 생각하고 살았음을 고백하네

그런데 요즘 나이 먹고 힘 떨어지니까 지금까지 자네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고마운 마음도 들고 앞으로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걱정도 되네

우리 둘이서 호흡 맞춰 주인님 보필한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

일어나서 세수할 때는 왼빰 오른빰 한손처럼 씻어 주고

넥타이 맬 때는 자네는 받쳐 주고 나는 조이고

스킨을 바를 때도 자네가 병을 잡으면 나는 뚜껑을 열고

물론 밥 먹을 때나 양치질 할 때는 왜 나만 부려 먹나 불만도 있었지

그러나 코를 풀 때나 화장실에 갔을 때는 자네 도움을 청하는 걸 보고 오해가 풀리기도 했지

그런데 최근 들어 주인님이 유독 자네 손을 많이 빌려 측은한 마음도 드네

문을 열 때나 신발 신을 때, 짐을 들 때도 자네가 나를

거들어 주지 않으면 영 불안한 눈치야

어쨌든 나만 잘난 체하고 은근히 자네 무시한 거 사과하네. 용서하게나

자네도 알다시피 일을 하다 보면 누구는 좀 많이 하고

또 누구는 좀 덜하고 그렇지

그런데 나는 내가 능력이 있어 일을 많이 맡는다고

생각하며 자네를 우습게 봤지

반면 자네는 일이 적으니 편하기도 했겠지만 또 나름

서운한 기분도 들었을 거야

소외감도 생기고 주인에게 신임을 못 받는 거 아닌가

불안도 했을 게고

그런데 나는 최근에 새로운 것을 알았네

주인님이 나는 힘 좋고 일 잘하니 자부심 하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자네에게 더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는 사실

말일세

얼마 전 칠 순이라고 자녀들이 반지를 선물했는데 나는

안중에도 없고 자네 손가락에 떡 끼우질 않겠나

우리 주인님은 장신구를 별로 안 좋아해서 젊어서는

반지 같은 거 안 꼈다는 거 자네도 알 거야. 예전에는 무거운 시계를 자네 손목에 채울 때 나는 되려 편하고

좋았는데 이번에는 허전한 내 손가락을 보며 좀 서운하더라고

그런데 결정적으로 자네에게 졌다 싶은 사건이 있었지

며칠 전 조상 제사 모실 때였어. 주인님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릴 때 내 손을 먼저 바닥에 깔더니 그 위에 자네 손을 살포시 올리는 것이 아닌가

재주 부리는 놈, 돈 버는 놈 따로 있다더니 그동안 험한 일 도맡아 한 걸 생각하니 정말 울컥하더라고

거친 내 손을 조상님께 보이기가 싫어 자네 손으로 덮었나 보다 생각하니 자괴감도 들고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이런 질투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이내 깨달았지

자네 없는 나

나 없는 자네를 상상해 보게나

무슨 첨언(添言)이 필요하겠는가

다시 한번 사과하네

내가 너무 잘난 체했네

앞으로는 우리 서로 시기하거나 부러워 말고

남은 생애

주인님 모시는 직분에 충실하며 의좋게 사세나

 

정균석

나무는 모여 숲이 되었고의 공동 저자이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1977년 입학동기다. "세련되지는 못해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쓰고 싶다. 새삼 공자의 사무사라는 말에 공감한다. 또한 사무사도 시 쓰는 자세의 본보기로 삼고 싶다. 모름지기 시를 쓸 때는 사특함도 거짓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작 [한여름 밤의 꿈] [시 쓰는 밤] [미안하다 후회한다] [나는 누구인가]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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