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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혼불 저자] 수필, 기사, 평론 등

그리움과 어둠, 그 자아해방의 은유 문예의 강

by 자한형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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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과 어둠, 그 자아해방의 은유 文藝/ 박양근

1. 최명희의 문학적 배경으로서 삶

최명희의 수필적 원류와 본향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고향 전주를 꽃심 지닌 땅으로, 전주천의 냇물에서 아직도 내 어린 날의 목소리를 듣는 최명희에게 성장 환경이 미친 의미를 염두에 두면 역사적 지리적 혈연을 따라 흐르는 어둠과 그리움의 대상을 그의 문학적 은유로서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최명희의 단편을 포함하여 수필을 이야기할 때혼불에 대한 논의는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산문은혼불이라는 대양으로 합류될 뿐 아니라, 역으로혼불을 이루어낸 문학적 영감과 상상의 물줄기가 되기 때문이다. 최명희는 자신의 삶에 투영된 지리적, 사회적, 가정적 환경을 아름다운 것은 수난이 많고 아름다워 수난을 겪어야 하는 것만큼 비극이 없다.”라고 설명하듯이 가족과 가문에 대한 배경은 그의 수필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입구가 된다. 그의 지리적 모태는 꽃심이 있는 생명의 땅전라도이며 혈연적으로 일본 와세대 대학 법대를 나온 당대의 지식인인 부친과 정몽주의 후예로서 당시 재야 한학자인 허환의 모계를 이어받고 있듯이 태생적으로 학문과 문학에 대한 유전자를 지녀 최명희의 그리움은 학창시절과 교사로 재직할 동안 자연스럽게 분출될 수밖에 없었다. 고교시절에 발표한우체부, 영생대학과 전북대학 시절에 발표한계절과 먼지들」「냇물」「먼지와 햇빛과」「내 나이 나의 키」「꽃관등은 최명희의 문학적 성장과 근원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손색이 없다. 나아가 아버지가 사망한 후의 심적 고독과 그 어둠에 대한 의식과 문학간의 관계를 설명(이덕화,자기탐색의 문학, ‘혼불’, ‘혼불의 작가) 한 것처럼 최명희 수필의 주제성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자아탐색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진다.혼불집필기에 쓰여진놓아두게 하소서를위시하여오늘보다 다른 내일을에 게재된 13편의 수필이 보여주는 소재, 착상, 일화 및 담론이 그 사례라고 하겠다.

따라서 본 소고에서는 최명희 수필의 창작연보를 1965~1971까지의 영생대학과 전북대학 재학시절의 수필, 1972~1980년까지의 교사 재직기의 수필, 그리고 1980년 이후 혼불집필시의 수필로 구분하여 최명희 수필의 특이성과 현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어둠의 나르시시즘과 정체성의 정립

최명희의 수필연보에서 흥미로운 점은 전주 사범 병설 중학교 교지(1961)에 수록된완산동물원이다. 발굴된 첫 작품인완산동물원은 가족을 동물띠에 비유한 기법 외에 가족 간의 화목을 그려낸 유일한 작품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기전여고 3학년 때 문예 콩쿠르에서 장원으로 입상한우체부는 사춘기의 감수성을 극복하고 분별심으로 대상의 의미를 파악해낸 글이다. 우체부의 목소리가 기계주의에 의하여 소외당한 인간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정겨운 소리로 풀이됨으로써 향후에 나타날 시적 은유의 감수성을 보여준다. 우체부의 역할을 냉각된 가슴들을 방문하여 바다만큼이나 하늘만큼이나 고운 사연을 전해주고 끊임없는 강처럼 구원을 향해 깊게 흐르는 꿈과 기다림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한 점은 작가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구절에 해당한다.

기전여고 급사로 근무하며 발표한꽃잎처럼 흘러간 나의 노래들에 실린 3편도 소재 선별력과 의미 해석을 보여준다.7월의 낙엽은 생과 죽음의 일체성을,12월 크리스마스찰 냉()하고 물 하()”의 별명을 통해 정동(靜動)의 모순을 암시해 준다. 이분법적 논리보다는 자아 동일시가 최명희의 문학적 모티프가 될 것을 예감할 수 있는 단서라 하겠다.

최명희의 수필은 대학시절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변신을 보여주게 된다. 이시기는계절과 먼지들,먼지와 햇빛과,내 아이 나의 키라는 3편의 일기체수필과 2편의 본격수필이 발표된 시기로서 1968년 이후의 일기체수필에서는 아버지가 부재하면서 형성된 소외와 어둠에 대한 강박관념과 부성상실을 상징하는 아이가 등장함으로써 문학에 대한 경배심이 은유적으로 반복 서술되어 진다.

1968년에 발표된계절과 먼지들7편의 일기는 벽과 어둠에 대한 사색으로 요약되며 외적 행동의 묘사보다는 늪과 같은 내면에 대한 자기분석과 성찰을 근간으로 한다. 자본주의적 논리와 동떨어진 심미적 영토 내에 존재하는 여린 것, 하찮은 것, 보잘것없는 것, 버려진 것 등을 종교적 사랑 이상의 애정과 가슴 졸인 언어로 표현해낸다. 이분법적이며 이성중심의 세계관을 외면하고 만물은 하나라는 세계관으로 자신만의 판타지 세계에 몰입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계절과 먼지들이다.

삐쩍 마른 自我(자아)를 끌고 밤까지 오면 나는 얼마나 피로한 우울에 빠져들었는가, 그냥 늪에 잠겨 버리고픈”(196829) 어둠에 대한 토로는 말과 말이 뒤엉킨 현실세계와 상이한 말하기를 추구하게 된다. 미국의 소설가 셀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덴코필드처럼 최명희는 진정한 언어가 실종된 세계와 단절하고 그만의 언어를 구축할 수밖에 없다. “더러운 냇물 바닥과 그 위에 그려진 너무나 청아한 자연의 그림이라는 은유로써 부성적 존재도, 자신을 받쳐줄 사회적 가치관도 없는 상황을 수용하는 그는 스스로 자신의 벽을 만들어야 하고 또 그 벽을 깨뜨려야 한다.

1970년에 발표된 일기체수필먼지와 햇빛과는 카프카의변신처럼 죽음을 통한 통찰이라는 모티프로 짜여 있다. 317일부터, 327, 47, 27, 57일에 이르기까지 약 50일에 걸쳐 주별로 기록된 일기는 진료 차트처럼 자기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질문(317, 서두)에서 시작하여 생에 대한 성실성이 요구하는 정도의 겸손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자기처방으로 마감된다. “나는 없는 것인가라는 초점이 새장 속의 새라는 은유로 나아가고,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형국의 변신이라는 엔트로피의 논리로 풀어냄으로써 47일 일기는 남다른 최명희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단서가 된다.

나는 지금껏 태()속에 가려진 본성, 내 속 깊은 곳에서 어둠에 밀폐된 나의 본질을 알고자 해왔고 또한 앞으로도 꾸준히 걸어갈 것이다.

내 속을 향해 내 걸음을 정했다

……

나는 밀림, 우주, 본성, 진리,

다만 가리워진, 스스로 사슬을 묶은 진리 그 자체

내가 알고자 하는 나는 명희가 아니라 스스로 있는 생명,

그것은 곧 <> <그것> <만물> <존재> 자체

모든 것 속에 내가 있고, 나 속에 바로 모든 것이 있다

위 단락은 지금까지 외향적이었던 사유의 방향이 내재화되고 구심력이 힘을 얻어감을 보여준다. ()속에 가려진 본성인 태()를 탐색하는 걸음은 물리적 자아보다는 유기체로서 우주의 아이인 범아(凡兒)이자 우주와 합일하는 범아(凡我)로 발전한다. 실제 내가 알고자 하는 나는 명희가 아니라 스스로 있는 생명이라고 선언하듯이 사회적 자아가 아니라 생태적 자아인 것이다. 문학은 구원과 구도의 길이고 자신은 우주의 비밀을 해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므로 쓰지 않으면 안 될숙명을 예감하게 된다. 결국 그의 문학은 밖으로부터 묶여 지는 외적 속박이 아니라 스스로 무겁고 견고하게 묶고 있는 의식의 껍질로서의 운명을 자각하게 된다. 따라서 최명희가 선택한 문학의 길은 혼자의 힘으로 자신에게 도달하는 길외에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내 나이 나의 키는 미래의 수필 입문을 예고하는 의식의 표현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대상이 된다. “누구에게나 진정한 직업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한가지 뿐이라고 자각할 정도로 자의식이 충실했던 최명희의 예술가적 성장과 결연한 의지는먼지와 햇빛과에서는 벽, 어둠, 빛이라는 은유로 표현된다. 유년기에 대한 그리움, 존재에 대한 성숙된 현실에 대한 좌절과 극복, 지고지순한 자부심, 해탈에 가까운 정신적 해방, 어둠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그리고 죽음, 자유, 예술 등 청년기에 겪는 모든 고뇌를 질문과 답변의 대화체 형식으로 풀어간다. 임상학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는 정신분석학적 형식과 같은내 나이 나의 키먼지와 햇빛과에 비하여 구심력의 하중이 실려 있으므로 일기체수필이라는 형식을 고려하더라도 가정의 안온함과 물질적 안정감과 자연에 대한 관조를 주로 다룬 당대의 수필과 판이한 궤적을 지니게 된다.

내 나이 나의 키의 내용을 한 단락으로 요약하면 무한히 풍성한 사랑과 아름답고 가치 있던 시절에 정말 순()한 아이였던 작가가 이기심과 무료함이 가득한 번뇌라는 두꺼운 벽을 자각하고 그 벽을 단숨에 뛰어넘기보다는 손가락으로 조금씩 그 벽에 구멍을 헐어내는 방법을 택한다는 줄거리다.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죽음 같은 집념이 요구될지라도 사물과 타자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작가는 현미경과 같은 시선으로 생의 화폭을 그리는 소명을 주어진 생의 축복” (내 나이, 나의 키」② 서문)으로 받아들인다. 주목할 부분은 93일부터 917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된 일기로서 최명희의 강박의식과 탈주 욕망을 가장 뚜렷하게 밝힐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하나의 고기처럼 나를 에워싸고 있는 이 어둠과 어둠의 늪.

굵은 밧줄로 묶어 나를 노예로 부리는 의식들.(96)

, , 나의 빛은 어디에 있습니까.

욕망의 타는 불꽃으로 그것을 켜십시오. (<내 나이, 나의 키」③ 서문)

최명희는 어둠에 익숙할수록 어둠이 싫어지는 정신적 위기와 전환기를 맞이한다. 청년기의 방황하는 정신적 귀족에서 탈피하여 남들처럼 밝은 옷을 입고 가을 코스모스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천성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어둠을 깨뜨리는 해결책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불가피한 상황은 대학시절에 처음 생성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조금씩 자각되어 온 것이다. “어둡고 쓸쓸한 길은 무엇인가. 문학이다. 그리고 최명희는 문학이 욕망의 타는 불꽃임을 자각하지만 진정코 그 길을 갈 수 있는지 회의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갈등을 보여주게 된다. 문학에 대한 동경과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이 수필은 일기체 형식이지만 자생적인 고독과 주변의 무관심, 문학에 대한 결단과 회의, 언어에 대한 두려움의 정조로 직조된 관조수필에 속한다.

흥미로운 점은내 나이, 나의 키에서는 문학적 초자아로서의 아이와 현실 속의 아이가 함께 등장하여 내적 대화의 양식을 취한다는 사실이다. “거의 백치 같은 순수를 가지고 양쪽 세계에 맞서 있던아이와 나의 벽안에 성을 이루고 사는 나는 대인기피증과 소통욕구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현대소설의 기법인 의식의 흐름을 좇는다. 이러한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절차를 밟으면서 자기만이 자기를 메고 홀로 자기를 이루어 가야한다.”(922)는 결연한 각오를 다지는 마음가짐은 문학적 자주성과 정체성 확립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라고 보여 진다.

전북대학 시절은 최명희가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기 시작한 시점에 해당한다. 그중에서 전주천을 소재로 한냇물은 그의 대표 수필 중의 하나가 될 만하다. 영적인 혈맥에 비유되는 최명희의 전주천은 아직도 어릴 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표현되듯이 유년기, 소녀기, 사춘기, 그리고 청년기의 의식을 관통하면서 유년시절에 대한 향수와 청년기의 집착과 허무감과 더불어 의식의 반사체로서 인간이 지닌 껍질, 남과의 경계, 계산, 울타리등은 나르시시즘의 절망적 의미소와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감을 기호화해준다. 나아가 냇물은 옷에서조차 해방된 자유의 실체이므로 단순한 사건의 배경보다는 체화의 제재로서 현대수필이 표방하는 소재와 주제의 결속을 무리 없이 소화해낸다. 작가가 냇물에서 발견한 것은 물은 스스로 길을 만들어간다는 자유의지다. 이것은 나는 나의 길이 되어주는가라는 회의로서 나는 회의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실존주의로서 그에게 생각은 존재의 확인이고 회의는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생은 환희와 고통, 밝음과 어둠, 과거와 현재, 선과 고통의 덩어리이므로 그는 인간은 자신의 소원대로 그 어느 일부만을 가질 수 없다. 이리하여 먼 낯선 길을 말 없는 인종(忍從)과 신념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성실한 냇물을 삶과 문학의 지표로 삼아 삽을 들어서 가슴을 파라.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분부다.”라는 메시지를 들판을 흐르는 냇물로부터 전달받는다.

햇빛이 어둠에서 그늘을 거두어 가듯 내 영혼의 넓은 깨달음이 이 우매한 옷을 모두 벗겨 주는 끊임없는 깨우침의 목소리 내 혼의 어둡고 광활한 들판 한 쪽에서부터 빛을 머금은 냇물이 반짝이며 흘러오는, 그 살아 있는 숨소리를 듣고 싶다.”

살아있는 언어를 말하는냇물의 결미가 시사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냇물 같은 생명의 화술을 듣고 싶다는 것이다.혼불에 배경으로 제시된 길과 내의 근원이냇물에 있다는 상관성 외에도 어둠 같은 현실에서 문학적 생명을 갈구하는 모습이 일찍 보여주었다는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냇물에 이어 전북대학교 국문과 4학년 시절인 1971년에 기전여고 12호 교지에 실린꽃관은 최초의 본격수필로 간주할 만하다. 일기체 수필과 콩트식 수필과 달리 주제와 소재 간의유기성이라는 미적구조를 보여주는꽃관은 꽃 모가지로 만든 꽃관에 동심과 환상을 직조해 낸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꽃으로 화관을 만들면서 공주처럼 꽃관을 쓰고 은밀한 대관식을 올리던 것을 회상할 때 꽃관은 동시에 면류관이라는 상징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공주놀이는 현실에서는 환상의 거짓말 조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꽃관은 동심의 유희가 아니라 문학적 영감을 불러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꽃관을 벗어던지는 사람보다 오래오래 꽃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진실하기 때문에 허리를 펼 수 없는 노동에 시달릴지라도 나의 머리 위에는 꽃관을 쓰고 있으리라.”라고 다짐하면서 그 미의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전주천을의식의 흐름으로 간주하고 문학이라는 영토에 정착하려는 순례는 그가 지향해야 할 문학이 철저하게 단절된 사유의 세계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제 1기의 수필은 중요한 문학적 자료라고 하겠다.

3. 느낌과 아픔에 의한 자기 동일시와 감정이입

19804, 최명희는혼불을 쓸 때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는 달리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라고 고백하고 있다.혼불집필 전후의 이러한 절박함과 문학적 분출은 그의 수필세계를 밝혀주는 담론일 뿐 아니라, 어떤 글이든지 일단 쓰기 시작하면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넋이 시키는 대로 말하는 휘몰이라고 토로한 신내림의 정체성도 수필쓰기의 토양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최명희의 수필을 면밀히 분석하면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사물 간의유기적 망을 직관에 가까운 통찰력으로 분석하여 그 상호 간의 결속성을 미적 언어를 통하여 재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그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느낌이야말로 사물의 혼을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수놓는 방식이라고 믿는 최명희는 자아몰입에 따른 감정이입을 수필창작의 주 기법으로 삼게 된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지 기전여고와 보성여고에 재직하던 시기는 과작(寡作)의 시기이지만 문학적 에너지를 비축하는 기간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 까닭은 양적 편수에서는 미흡하지만오후」「데드 마스크」「어둠 내 목숨의 방3편은 대학시절과혼불집필기를 이어주는 가교로서 시적 체화와 감정이입을 정립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어느 언론인이 최명희는 눈물 많고 웃음 많은 정한의 여자였다.”라고 인물평을 하였듯이 정한은그의 문학에서 제외할 수 없는 비평적 근거가 된다. 인정에 대한 배고픔과 남모를 한을 삭히려는 카타르시스가 농축된 이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혼불을 쓸 때 밝힌 심경의 일부를 되살려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사물의 본질에 숨어 있는 넋의 비밀들이 늘 그리웠다. 그리고 이 비밀들이 서로 필연적인 관계로 작용하며 어우러지는 현상을 언어의 현미경과 망원경을 통하여 섬세하게 복원해 보고 싶었다. 이 중에서도 나는 무엇보다 '느낌'을 복원해 보고 싶었다. 느낌이란 추상적이고 소모적인 것이어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느낌이야말로 우리 혼의 가장 미묘한 부분을 아름답고 그윽하게, 혹은 절실하고 강렬하게 수놓는 무늬라고 나는 생각한다.

느낌을 느끼거나 전달하기 위한 언어는 필연적으로 초현실적인 기법을 필요로 한다. 내면의식의 무대화, 생중사(生中()와 사중생(死中生)의 모티프, 정신적 충격(trauma)의 정화 등의 기법을 차용하는 수필은 소재의 문학으로서 일반 수필과 필연적으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1972년 전북대 신문에 발표된 콩트 형식의오후는 이러한 특성 외에도 환상적인 기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오후라는 시간을 배경으로 아이와 화자가 등장하는 무대에는 권태와 고독이라는 분위기가 설치되어 있다. 아이의 권태로운 상황을 설정한 이 작품은내 나이 나의 키의 아이가 처했던 상황보다 발전된 내면의식을 보여준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찾아내려는 서두와 그 원인과 해결책을 물색하려는 전개부와 아이와 화자가 동일체로 간주되는 결미의 3단 서술구조는 수필의 기본양식에 해당한다. 더구나 대상과의 자기 동일시를 이루어 화해를 도모하고 보편적 인간애를 실현하려는 주제의식은 정한의 여인으로서 최명희가 처한 상황에 부합한다고 하겠다.

수필을 읽을 줄 아는 독자라면 모래더미에서 발견된 아이는 문학이라는 절대자에게 귀속되지 못한 주변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를 상실한 후 유아기에 머물고 있는 작가 자아의 일부임을 간파할 수 있다. 화자는 울고 있는 아이에게 쥐잡기와 모래 쌓기를 보여주면서 소외감과 권태감을 진정시켜주려 한다. 하지만 작가조차 아가, 뭐 색다른 놀이 없을까?”라고 세 번이나 묻듯이 교사로 근무하면서 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상황은 고통 받는 자아를 비추는 임상극 같은 구조에서 숨김없이 드러난다. 이처럼 생활인이 아닌 혼의 탐색자로서 최명희에게 직업은 무의미하므로 쥐를 잡는 행위는 영적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일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최명희는 1980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고 교통사고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 탓도 있지만혼불을 집필을 시작하면서 국어교사직을 떠나 집필에 몰두한 경력을 보여주고 있다.

수필의 본질 중의 하나가 체화라면 첫 기억은 작가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중에서 최초의 정신적 충격은 작가의 인생관뿐만 아니라 문학적 진로를 결정적으로 좌우한다는 점에서 최명희가 스스로 밝힌 첫 기억은 수필의 자전성과 체화의 기법에서 소홀히 다룰 수 없을 뿐더러 어둠과 그리움을 밝혀내는 단서로 매김 된다. 두 살 무렵의 첫 기억을 묘사하는어둠 내 목숨의 밤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비평의 대상이라 할 만하다. 줄거리는 햇빛이 밝게 비치는 어느 봄날 어머니가 성장을 하고 외출을 하면서 설탕을 미끼로 자신을 어두운 방에 가두어 두었던 회상으로 그때의 공포와 불안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고백한다. 한 그릇의 설탕과 앞서오후에서 다룬 모래더미를 병치시키고 울고 있는 두 아이를 나란히 세우면 최명희의 어둠, 고독, 보호자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은 두 살 때부터 시작한다는 놀라운 발견에 다다른다. 그가완산 동물원에서 가족의 웃음을 표현하고계절과 먼지들에서 어둠을 은유화 하고내 나이, 나의 키에서 참으로 순한 아이가 사회로부터 당하는 배신감을 연이어 그려내는 까닭도 그때의 공포가 어둠과 불안과 그리움의 근원으로서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의 문학적 토양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오후어둠 내 목숨의 밤에서 등장한 두 아이는 1973년 전북대학교 교지에 발표된 소설형식의데드 마스크에서 미술 선생이 석고 마스크를 만들어 줄 때 간접적 죽음을 체험하면서 성장의 상승통로를 거치게 된다. 미술선생이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지금까지 지내온 가장 그리운 풍경이나 돌아올 미래나 혹은 잃어버린 꿈을생각하라고 말할 때 성인 화자 최명희는 미술 선생의 지시를 거역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리하여 그의 육신은 부동의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느낌을 불러주는 감각은 어느 때보다 예민한 반응을 보여줄 수 있다. 마스크를 만드는 일은 글쓰기로 비유되어진다. 마스크를 만들려면 간접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듯이 그에게 글쓰기는 죽음의 의식에 가깝다. 그러나 그 죽음은 박제가 아니라 새로운 실체를 발견하는 부활인 것이다.

이 얼굴 위에 덮인 어둠을 깨고, 아무래도 다시 한번 싸워야겠다. 비록 아무런 소득이 없을지라도…… 이 잔액을 허무하게 잃어버린다 할지라도한번도 빼앗기거나 빼앗은 일이 없는 남루한 生涯(생애)日誌(일지)에 남길 수는 없지 않은가. 바깥은 지금 휘황한 한낮일텐데, 그 빛 속에서 홀로 어둡고 서럽게 죽어 갈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어둠에 익숙했던 정신적 수인이었던 그가 가사상태의 거추장스럽고 시끄러운 자아를 버리고 한번도 활용되어 본 적이 없이 통장 속에 갇혀 있는 저금같은 자아를 찾을 때 최명희는 어둠 내 목숨의 밤을 밝힐 빛이라는 문학적 결실을 얻게 된다.

최명희의 수필은 나르시시즘뿐만 아니라 카타르시스의 복합성으로 엮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전주가 지닌 역사적 그림자와 일제 암흑기를 살아야했던 후손으로 자임하는 작가의식에서 보면 수필쓰기라는 개인적 탈출은 필연적으로 소설이라는 보다 대승적인 해방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동시에혼불의 심적 분위기에 해당하는 어둠과 그리움이 수필에서 출발한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산 목숨 같은 어둠을 장쾌하게 풀어줄 한줄기 햇빛을 앙모하는 심정으로 꽃심의 땅 전주를 자기동일시로 받아들여 고통에서 해방해주어야 한다는 욕망을 자각하고 그 탈출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니, 이 어둠은, 내 목숨의 밭()인 것 같다.

이 밭이, 씨앗 품듯 내 영육(靈肉)을 품고 있다가, 때가 차면, 이 깊은 땅 속에서 바깥 눈부신 햇빛을 향하여 토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항일성(抗日性)식물이 되어 높이높이 태양까지라도 닿을 것처럼 잎사귀 무성하게 자라 오른다.

그러나 나무가 높아질수록 뿌리는 더욱 더 땅 밑으로, 더욱 더 아래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그리하여 어둠의 핵()에까지 이르게 된다.

가장 깊은 어둠에 닿는 것은, 가장 높은 빛에 닿는 길이다……

빛과 어둠은 상극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한다. 나무줄기가 하늘을 지향할수록 뿌리는 심연의 땅으로 내려가는 빛과 어둠의 숙명적 공존(共存)”에 생의 윷가락을 던지는 최명희는 이제 무녀(巫女)처럼 미소를 짓는다. 왜 미소인가. 어둠이 짙어질수록 빛의 도래가 빨라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작가는 한 편의 작품을 쓸 때마다 죽음 같은 좌절을 겪지만 작품을 통하여 재생하듯이 두 살 때의 정신적 충격으로 빛과 어둠의 숙명적 공존을 인식한 그는 어둠은 내 목숨의 밭이라는 감정이입으로 재생하게 된다. 이로써 10여 년의 공백기는 마감되고 최명희는 문학을 내 목숨의 밭으로 가꾸게 된다.

4. 순응과 생명력의 미학으로의 전환

19804월의 봄은혼불이 피어오르는 시점에 해당한다.혼불은 꽃심의 땅에 문학의 봄을 개화시키듯이 그의 문학적 영감과 대학시절에 형성된 작가적 정체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진다. 달리 말하면 수필을 통하여 해소되었던 자아모색과 감정이입이 소설의 창작에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수필에 입력되는 창작력의 농담이 묽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1980년 이후에 발표된 수필은 대학시절과 교직시절에 보여준 그리움과 어둠의 구도에서 벗어나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사물에 대한 자아일체성보다는 관조적 해석력이 두드러지는 변화를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그대 그리운 이여부터문지기의 8에 이르기까지 제3기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타작을 쓰지 않으려 하였다는 그의 말처럼 하나의 낱말이 인력처럼 서로 어우러지는 힘을 바탕으로 서사, 설리, 서정 등 다채로운 수필 양식으로 뻗어가게 된다.

양귀자와의 2인 수필집오늘보다 다른 내일을에 수록된 13편은 나무, , 계절을 중심으로 부채, 명절 등 향토적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바다와 산과 같은 장엄미와 가족사, 일상사, 취미 기행 등의 소재는 찾기 어려운 제한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전주의 소외된 역사관을 보잘 것 없고 미천한 것에 감정이입하여 순응, 인내, 향수, 부활의 담론을 펼치려 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개인보다는 개체, 부분보다는 유기체로서 사물을 인식하는 최명희는 대상의 기능보다는 그 심미적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에 소재의 제약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하겠다.

주제에서는 순응의 미덕을 일러주는 수필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최명희의 순응은 무력한 굴복이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스스로 따르는 행동이다.그대 그리운 이여에서 주목할 점은 의식의 흐름이 냇물에서 강물로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 몸의 비늘을 풀며 숨죽여 흐르는 봄의 강물, 눈부시게 젊고도 풍요로운 여름 강물, 만월 속에서 뒷모습을 보이며 흘러가는 가을 강물, 오직 뼈만으로 허옇게 얼어붙은 겨울 강물로 그려지는 묘사는 정교하게 만든 정신의 끝에 피를 묻혀가며”(고은) 새긴 언어로서 컴퓨터 키보드가 아니라 육필로 원고지의 칸을 메워나간 치열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나아가 계절의 윤회와 강물의 흐름은 현실의 욕망과 잡념에서 벗어난 해탈의 지평을 일러준다.

무소유의 주제성이 자연관과 어울린허울과 애착을 다 벗은 조그만 씨앗이……」라는 작품도 초가을의 낙엽을 통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버리고 취할 것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욕구에 대한 경종을 고요히, 황홀하게 버리고 버려지는 가을의 저 나무에서 절감하고 허공에 몸을 날려 땅위로 떨어지는낙엽에서 새로운 생명을 일깨우게 될 때 애착을 떨어버리는 나무의 씨앗은 작가에게 자신의 근원인 한 톨 씨앗으로 남다르게 전해진다. 그 씨앗이 최명희 문학의 정수를 펼쳐내는 언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언어야말로 영혼의 지문일 뿐 아니라 모든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키워가는 씨앗이기 때문이다. 묘목꾼의 가르침을 통하여 순리의 이치를 일러주는 일화로 이루어진놓아두게 하소서는 나무심기로써 치자(治者)의 도리를 일러준다는 점에서 자연예찬이나 가족사에 치우친 규방수필과 영토성에서 다르다. 이러한 사회적 주제라는 의미부여는혼불의 소설 구도가 수필에 전이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가을의 입구는 삶에 대한 무상함과 우주의 섭리를 재인식하는 순응과 겸손을 일깨워준다. 세상에는 영원한 전성기가 없으므로 가장 영특하다는 인간도 모든 지혜를 배울 수 없다는 정신적 한계를 일러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에 세모의 귀가 풍경을 그린버스를 기다리며의 소재인 버스는 기다림의 1차적 은유이지만 버스의 2차적 상징은 아무리 빈자리가 많을지라도 다른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무의미하다는 세상살이처럼 예술이나 역사에도 제 길이 필요함을 일러준다. “더딜수록 때를 기다리는 우직함이 아쉽다는 결미는 부화뇌동의 시대에 대한 조언으로서 역사적 안목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작가의 관점을 재확인 해주는 역할을 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담아낸 작품군으로는한가위 언저리꽃피는 봄날에는을 제시할 수 있다.한가위 언저리완산동물원을 연상시켜 주는 작품으로서 명절 풍경을 통해 추석 풍습과 가족애를 그려낸다. 다만 감상을 할 때 유의할 점은 부모가 생존할 때의 추석날이 회상조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유년기의 화자가 등장함으로써 체화의 현재성이 저하되고 감상주의적 정서에 그쳐버린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유사한 정감을 보여주는꽃피는 봄날에는은 봄철 교정, 낡은 기와집, 운동장 모퉁이의 무덤, 각시 봉숭아 등으로 어우러진 수채화 같은 서경 수필이다. 기전여고 재직 때의 봄 풍경으로 애절한 세상살이를 풀어내면서 즐거웠던 봄날에 대한 상실감을 담아내지만 사물에 대한 따뜻한 감수성이 충만하여 눈물 많고 정감 많은 정한의 여자로서 최명희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가자. 우리도 봄나들이 가자.

내 살던 집, 다니던 학교와, 무거운 일터를 낡은 신발처럼 가볍게 벗어 놓고, 저 복숭아 꽃잎 날아가자는 자리로 홀홀히 가자. 흰모래 밟으며 푸른 물을 따라, 걸어서 걸어서 나들이 가자.

고향 강물을 추억하는 최명희의 발걸음은 가볍지만 경쾌할수록 이면에 깔린 비애감도 짙어진다. 즐거운 봄나들이조차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갈 수 없다. “아무에게도 소문나지 않은 채 자기의 마음속에 피어 있는 그 어떤 꽃나무 아래, 다만 홀로 찾아가 호젓하게 서 보아도 또한 좋지 않으랴라는 다짐의 울림처럼 꽃피는 봄조차 고독한 명상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둥그런 바람은 부채의 미덕을 다룬 내용으로 여름 달밤과 부채의 곡선을 표현된 묘사력이 주목을 끈다. 특히 여덟 개의 덕을 지녔다는 팔덕선(八德扇)에 대한 설명은 전주의 향토미를 소개하며 물신주의 시대에 망각하지 않아야 할 자연의 미덕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한가위 언저리와 맥을 같이 한다.

냉수를 마시고 내려놓는 흰 사발에 둥그런 바람이 들어와 고인다. 사발은 달님이 되어 말갛게 떠오른다. 그리고 달님은 선장(扇匠)이 들어올리는 날렵한 부채 속으로 그 몸을 숨긴다는 결구는 최명희 특유의 서정적 언어감각이 발휘된 문장으로 미각, 시각, 촉각의 이미지가 조화롭게 어울린 대표적인 예라고 할 만하다. 이 작품은오늘보다 다른 내일에 실린 작품 중에서 제목의 함축성, 달빛이라는 자연과 부채의 인공미를 조화시킨 결속성, 전통미의 복원, 서정적 표현 등에서 문예수필의 전범에 속한다고 할 만하다. 부채장이의 민중적 삶과 태극부채의 고귀한 품격을 아우른 미적구조도 현대 수필이 지향할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평할 수 있겠다.

나무를 계절에 상관시켜 식물의 본성을 탐색하는 최명희의 수필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고와 생명력이라는 미덕이다. 생명력을 나무로 형상화한 가장 뛰어난 작품은숨쉬는 기둥이다. “가을에는 나무가 옷을 벗는다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겨울나무의 강직함과 노목수의 지혜를 풀어내어 깔끔하게 마무리된 이 작품은 삶의 순리가 무엇임을 알기 위해서 읽어야 할 최명희의 대표작에 속한다. 나무의 성질에 맞게 목재를 사용하여야 하는 장인정신의 표상인 나목에 경외감을 품는 까닭은 묵묵히 비바람을 이겨가는 인고의 덕을 오늘날 새삼스럽게 소중히 여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겨울나무를 숨쉬는 생명체로 바라보는 자세야말로 최명희의 생명성과 자애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침묵의 화분은 죽었다고 간주했던 식물이 싹을 틔워가는 내용으로 단순한 개화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룬다. 어둠과 절망이 깊어질수록 강인한 생명력을 키워가는 나무의 순응과 생명력을 예감하지 못하는 인간은 겨울나무를 꺾거나 훼손하기만 한다. 하지만 침묵의 재생은 영육에서 모두 가능하다고 믿는 최명희는 나아가 이 침묵의 겨울에서도 치욕이면 치욕인대로, 고통이면 고통인대로, 그리고 배반이면 또 배반인대로, 묵묵히 받아들이면서순응하라고 가르친다. 나무의 무저항정신이야말로 진정한 포용력이고 모든 변하는 것들의 밑바닥에, 변하지 않는 천연심(天然心)과 근원적인 무궁함이기도 하다. 이런 천연심이야 말로 최명희가 추구하는 종교적 사랑과 보살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지기의 8은 계절의 절정인 8월에 죽음을 생각하는 글로서 얼핏 읽으면 염세주의적 분위기가 지배하다고 여겨지지만 실은 더욱 완전하게 썩어야왕성하게 살 수 있다는 모순어법으로 생명성을 강조하고 있는 글이다.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삶은 치열하게 산다고 말하기 어려우므로 작가는 누가 이만큼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썩히고 썩혔을까라고 물으며 자신은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진정한 삶을 지키려는 문지기에게 8월은 쾌락의 시간이 아니라 준비의 계절인 것이다. 그래서 최명희는오늘보다 다른 내일을에서 오늘이 아닌 내일의 결실을 위한 자아탐색과 구태의연한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일탈의 초상화를 그려내는 것이다.

최명희를 만난 사람들은 그의 문학성 못지않게 인간적인 매력에 감동하였다고 회고한다. 그의 인간애는 종교인들의 시혜와 달리 헐벗은 나무, 모래밭의 아이, 싹이 돋지 않는 화분, 이름 모를 무덤에 까지 접근한다. 그 애정의 흐름은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칠 수 없고 그치지 않았다.혼불을 집필할 동안 칩거하다시피 하였을지라도 인간은 물론 자연물에 대한 경외감을 잃지 않았다. 집필이라는 작가 생활로 인하여 인간사에 대한 접촉이 제한되고 산, 바다와 같은 소재의 한계성도 뒤따랐지만 소재를 의미화하고 주제를 형상화하는 수필쓰기에 역사의식의 일부가 깔려지게 됨 점은 제3기 수필의 특징으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5. 최명희의 수필 거듭 말하기

성찰과 지성의 문학으로서의 문예수필에서는 외적 소재를 내적 의미화하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유 중심의 최명희 수필이 지닌 특징도 경험의 단순한 체화보다는 인간과 자연을 서로 얽어내는 의미망을 형성하고 그것을 공감각적으로 구도화한 기법은 오늘날의 수필가들에게서도 찾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앞서 본론에서 다룬 내용을 요약하면 제1기는 근원적 자아탐색의 시기로서 어둠에 함몰된 정체성을 모색하며 이 무렵에 발표된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어둠, 혼돈, 의식의 흐름, 나르시시즘 등의 담론을 보여준다. 1972년부터 1980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될 때까지의 제2기는 느낌에 따른 아픔과 고통으로 자아와 타자 간의 감정이입을 이루어낸 시기라고 하겠다.혼불집필기인 1980년부터 1995년의 제3기는 순응과 생명성에 대한 미학을 정립하면서 원심력적 사유를 충만하게 관리한 시기라고 하겠다. 이처럼 그의 수필적 변화상을 3기로 구분할 수 있는 까닭은 부단하게 문학적 변신을 거듭한 그의 작가의식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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