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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혼불 저자] 수필, 기사, 평론 등

계절과 먼지들

by 자한형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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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과 먼지들`- 최명희

전주 기전 여고 교감 선생님께 가끔 나는 전화를 겁니다.

"선생님, 전주 대학 좀 다녀봐서 학교 신문 좀 보아주세요. "

전주 대학의 옛이름이 영생대학에 내 추측으로는 글에 목마른 대학생 최명희는 분명 무엇인가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오늘 김 선생님은 돋보기를 써가며, 신문글씨를 워드로 옮겨 내게 이메일로 보내주는군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나는 목이 메입니다.

청춘의 젊음이 찾아주길 바랬건마, 최 명희의 동기 동창인 김선생님이 나서는 것이 반갑지만 우리는 석양의 세대이니 젊은 친구들이 찾아주기를 바랬지요.

김선생님의 노력이 고마웠구요.

여기 아래 글을 1968년에 학생 최명희가 학교 신문에 올린글입니다.

1966년에 기전여고를 졸업하고, 최 명희는 영생대학 야간부 가정학과를 갔군요. 여고때 희망은 연세대학 국문과였습니다.

나는 그이의 글솜씨로 보아서는 국문과를 갔었으면 했으나, 나름대로 사정이있었나 봅니다.

학생 최명희는 낮에는 모교인 기전 여고에서 서무과 직원으로 근무하고 밤에는 야간부 대학을 다녔군요.

대학 1학년의 글로는 벌써 훗날 혼불을 쓰는 틀이 보이니, 전주 대학 신문사에서 빠셔지고 있는 신문철에서 사라질 뻔한 최 명희의 글을 살려 주신 김환생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 여기 . 대학 1학년 최명희의 수필이 뜹니다.

영생대학에서 2년을 마치고 전부대학에 가서도 같은 제목의 글을 전북대 신문에 올렸지만 같은 일기 투의 수필이나 날자는 서로 다르군요.자신의 일기에서 발췌한 듯 합니다.

 

 

季節과 먼지들

 

영생대학 家庭學科 1年 崔明姬

 

二月 九日

밤이 깊다. 밤에는 쉬고 싶은 게 아니라 오히려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더 많다.

끊임없는 울음으로 사슬을 메고 가는 것 같은 幻覺에 가슴이 저려온다.

밤은, 밤은 그냥 좋은 것이었다.

삐쩍 마른 自我를 끌고 밤까지 오면 나는 얼마나 피로한 우울에 빠져들었는가, 그냥 늪에 잠겨 버리고픈 그런.

 

二月 十七日

인간에게 <>이 있다는 건 얼마나 견딜 수 없도록 지겨운 일인가-

, 말들, 그 수많은 말(言語).

귀가 찢어지고, 고막이 터져 귀 먹을 것 같은 그 말 소리들.

입들을 다물라. 네 입을 다물라.

그 아무 필요성 없는 온갖 이야기들에 혹사되는 말, , 그 말, 공포로운-이제는 쓰일 대로 쓰여져 낡아버린 말들, 헌 걸레쪽처럼 발길에 채이고 손끝에 채이는, 이제 <>은 본래의 意味를 상실하고 <><>끼리 뒤엉켜 다닌다. 저희끼리 떠다닌다.

부딪쳐서 쇳소리를 내면서, 서로 부딪쳐서 찢어지면서, 그래서 저희끼리 아우성을 지르면서, 이제는 목이 쉰 채 악을 쓰는 추욱 쳐진 피로에 기력을 잃은 소리, 소리들, 그 말소리들.

人間이란 귀찮고 피로한 存在들이다.

백치, 차라리 백치라면 행복할 것 같애?

그땐 행복이나 불행에 대한 감각이 없는 거지.

삐쩍 마른 수분 없는 나뭇잎처럼, 종잇장처럼 이렇게 부피없이 살다니, 있다니.

 

二月 二十六日

아야.

항시 아픔을 입안 가득히 깨물고 사는 내 위로도 차츰 봄이 엷은 옷자락을 편다.

먼지처럼 부옇게 을 가리운 탁한 공기에 몹시 신경질 나는 피로를 느끼고 만다.

얘기하라. 다아 얘기하여라. 아야.

눈이 녹기 시작하는 운동장은 질펀하고 끈적인다.

언젠가 나는, 참으로 오만한 가슴을 펴고 하늘을 해 소리를 지르던 날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많은 사람이 채이는 길거리에도 사람은 없다.

아야.

무슨 일이 있었니- 무슨 일이냐, 말을 해라.

우린 무슨 말이래도 악이래도 써야 산다.

가슴에만 넘기지 말고 말을 하라.

누가 네게 그런 고뇌를 주더냐. 누구가 주던? 무엇이라도 삼켜서 공복을 채워야지.

이대로는 현깃증에 심한 현깃증에 쓰러질 것 같다.

먹으면서, 무엇이든지 삼키면서라도 <젊은 공복>을 채워야지 이렇게 텅 비어서는 못 산다.

살 수가 없다 이렇게 텅 비어서는 도저히 서 있을 수 조차 없다.

하늘로, 空間으로 두웅 떠 버릴 것 같애 먹어야지. 무엇이든지 가슴의 空腹. 와글거리는 아이들의 함성. 피로, 自嘲, 역겹다. 뱉어내는 自嘲, 저며드는 自虐, 모멸,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부서지고 싶다. 산산히, 그냥 가루가 되어 풀풀 날아가 버리고 싶다.

얘길 해라. 할 얘기가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 줄 아니? 행복? 얘기?

나는 할 얘기가 없다. 나는 벙어린가? 젊은 벙어리-.

 

三月 四日

曲馬團-. 川邊에 곡마단이 들어왔다.

그것은 내 어린 시절의 童話, 꿈이요, 憧憬이었다. 그저 하나의 神秘로운 世界였다. 조그만 가슴을 서글픈 황홀로 적시던 그 광대들은 어디로 갔을까.

집이 없는 사람들, 유랑극단, 곡마단,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 집이 없을 것인가. 그리고 늙어지면 어디로 가나. 늙은 광대, 목이 쉬고 수염이 허연 그래서 어디론가 밀려나는 광대, 정말 그들은 어디로들 흘러가는 것일까.

서글퍼하진 말자.

비가 왔나보다. 아까 으로는 고요히 젖어드는 빗소리가 가득하다. 유리가 마구 덜컥인다.

바람이 인다. 꽃바람인가-? 따뜻하고 아늑한 슬픔에 허우적이는 계절풍이 일고 있다.

이제 나를 그 화려한 鄕愁속에서 질식하게 하는 계절이 오나 보다. 그냥 마구 울고 싶다.

다만 그뿐이다.

 

三月 二十日

바깥의 축축한 공기에 쌓인 . 하늘이 몹시 암울하여 나는 어두운 얼굴로 걷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히 그렇게 회색으로 베일을 거둘 것 같지 않았다.

어느 날 나의 좋은 동무가 타주던 모과 차의 향그러움이 몸을 감아 온다. 내 온몸으로 번져 가는 香氣에 얇은 황홀로 슬퍼졌었다.

어쩌면 언제나 슬플 줄 밖에 모르는 사람모양 나는 습성이 된 우울의 복판에 섰다.

자기의 어리디 어린 아들이 까만 손에 들고 오는 깡통 속의 밥을 넘겨다보는 한 어머니.

여러 날 동안을 미쳐서 돌아다닌 것 같은 한 男子가 만취가 되어 값싼 생선 한 마리를 들고 가는 모습.

우단처럼 이끼가 흐믈거리는 더러운 냇물바닥. 그리고 그 위에 그려진 너무나도 청아한 自然의 그림.

 

四月 七日

신난 오후를 햇빛 속에서 보내고 싶은 오후이다. 흙 섞인 바람이 몸에 감겨왔다. 나는 우중충한 건물 속에서 휘청거리며 걸어나와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 햇빛을 가렸다.

운동장은 너무 넓었다. 너무 넓어 나는 오그라들고 말 것 같았다.

하얗게 타오르는 햇빛과 운동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울이 스며 든다.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슈베르트>의 음악인가보다.

人間이 가질 수 있는 극도의 번뇌와 아픔 위로, 어둡게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음률이 나를 떠밀고 갔다.

언제나 나는 이 <우울>을 얼마나 두려워 하고 공포를 느꼈었는가.

그 위도 아래도 없는 무한한 空間 깊숙히 떠밀려 가던 記憶.

내 가슴을 우렁차고 거세게 파헤치며 흐르던 그 깊은 , 나는 그 속에서 얼마나 自身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우적이었는가.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가볍게 떠서 살고 있다. 한 장의 종잇장처럼.

 

四月 二十四日

머릿속이 運動場같다.

그 휘엉하니 넓은 空間에 쏘아내리던 흰 햇빛과 아찔한 현기증으로 벽()을 짚고 머리를 기댔다.

내 눈 높이만한 곳에 라일락이 바람을 타 흔들리고 작은 少女 하나는 꽃묶음을 들고 리본을 하늘거리며 다리를 지나가고 있다.

어느 새 꽃이파리들은 지고 나는 져버린 이파리들을 밟고 서서 계절을 상실한 사람처럼 머엉 할 뿐이다.

아아- 편지를 써야겠다.

멀리서 내 가까이 손을 내밀고 있는 아니 내가 그늘에게 손을 내미는 따뜻한 동무들에게.

 

(1968516, 전주영생대학 학보에서 발췌)

崔明姬<>을 사랑해주시는 황종원님에게

2000313

全州紀全女子高等學校 校監 金桓生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