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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비평

새로움을 향한 랩소디

by 자한형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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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을 향한 랩소디-정희승/배귀선 평론가

 

1. 디히텐, 창의의 산실

  새로움은 관습과 기존에 대한 저항이다. 이러한 저항 의식은 정희승의 일상 예찬을 관통하는 명제이자 창작 정신이다. 그의 문학은 간접 경험을 통한 내적 사유와 대상을 통한 경험 사색으로 축조된다. 경험 주체인 작가의 내적 축적이 없다면 대상에 대한 다각적인 시각을 개방할 수 없을 것인데, 그의 작품 세계는 다층의 지적知的 또는 감정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움을 꾀한다. 말하자면 내적 자극과 외적 자극에 의한 감정의 발로에서 출발하는데 그의 문학 새로움의 중심축은 탈일상이며 감각과 지각의 생생함이다. 따라서 관습적 일상을 탈피하는 찰나적 순간들이 이 책에 두루 편재한다. 다양한 형식을 도입하여 구조적 단조로움을 해소하고 의인화를 통해 사물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반복되는 일상의 진부함과 관습적 사고에 굴절을 가하는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을 쓴다는 의미인 독일어 디히텐dichten'은 정희승의 문학 지향성을 대변한다. “장르가 모호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그의 디히텐적 문학 태도는 일상의 습벽, 고정성, 고착화 등을 배척하는 작품 세계와 연관되며, 랩소디 형식의 도입과 유크로니아적 시점을 잉태한 지점으로 그가 추구하는 문학적 새로움의 산실이다.

  그가 추구하는 새로운 수필 세계는 다양한 형식적 시도와 사물 의인화 기법에 의한 시점의 운용을 통해 드러난다. 이때 작가의 시각은 대상과 사물의 외형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겸허한 관찰과 사유의 침윤은 사물에 대한 편견과 고정을 허물고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함으로써 무엇이라 이름되어진 사물에게 자유를 부여한다. 이로써 대상은 고정된 상태가 아닌 스스로 운동하는 사물로 변주된다. 대게 물활론 사상이 깃들어 있는 사물수필은 사물을 현시되는 그 자체로만 보지 않고 사물과 인간, 사물과 사물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의미를 창출하므로 대상을 다르게 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 같은 시도는 수필의 지경을 넓히는 방편이자 새로움을 향한 정신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염려스러운 것은 새로움이 또 다른 새로움으로 이어지는 가교의 역할을 하기보다 새로운 카르텔로 함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연대 몇몇 수필가의 이론이 수필의 고착화를 불러일으켰던 사실을 수필 문단은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떠한 양식이나 새로움은 틀에 갇혀 있거나 고정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유동적이어야 하며, 또 다른 새로움을 있게 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랩소디 형식과 그 밖의 형식적 시도들

  문학에서 형식이란 각각의 내용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예컨대 일상의 잡다한 것들, 우연한 것들이 전혀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소용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체의 형식에 맞게 조직되고 배치되어야 하듯 하나의 작품 속에서 낱낱의 어휘들이 어떻게 조직되고 배치되느냐에 따라 그 어휘들 개개의 의미 또는 전체의 의미가 이전의 의미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때 형식은 무의미한 장식이 아닌 유의미한 공간으로 재창조된다.

  정희승의 일상 예찬은 천편일률에 가까운 수필의 형식에 음악의 형식이라 할 수 있는 랩소디 형식을 도입한다. 그는 랩소디와 같은 텍스트는 드레스를 짓는 양제사의 옷본처럼, 단편들, 조각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배치될 수 있다며 형식적 새로움의 차원에서 랩소디의 특성을 언급한다. 말하자면 3의 형식, 즉 에세이도 시도 소설도 아닌 형식을 산출할 가능성을 열어놓는것이라는 롤랑바르트의 언술에서 이론의 틀을 찾는다. 이는 수필의 습관 혹은 관성적인 형식에 폭력을 가한 쉬클로프스키의 형식적 낯설게 하기의 차용이라 할 것이다. 랩소디 형식이라는 그릇에 담는 내용으로서 사물을 낯설게 하는 방식 역시 일상 사물에 새로운 시각과 감각을 부여해준다.

  각 장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로 나누고 계절에 맞는 작품으로 구성한 일상 예찬은 계절마다 그에 어울리는 이야기 조각을 이어붙이는 구성이다. 봄의 장에서는 봄 주제에 맞는 글의 옷본을 이어붙이고, 여름과 겨울도 그와 같은 방식을 배치한다. 봄과 여름, 겨울에는 그에 어울리는 각각의 랩소디를 삽입하는데, 가을의 장에는 랩소디를 끼우지 않은 것도 형식적 일탈이라 볼 수 있다. 일테면 새로움을 향한 형식적 입체감으로 액자 속에 액자를 끼워 넣은 구조이다.

  각 장의 작품들은 길고 짧게, 무겁고 가볍게, 높고 낮게 리듬감을 담보하고 있어 지루함을 상쇄해준다. 요컨대 일률적인 길이의 수필집이 주는 답답함을 소거해주는 형식이 비교적 허술하지 않다. 특히 사계의 구성은 사물들의 순환과 인간 삶의 순환이 겹쳐지면서 글의 멈춤이 아닌 흐름을 내재하고 있다. 이는 봄의 랩소디 1 문득에서 벌거숭이알몸으로 대상화되는 자아와 타자들은 겨울의 랩소디 6 은밀한 소묘에서 저울 위에 올라간 나부로 연결되어 어휘소 간의 순환적 알레고리의 형식을 구축한다. ‘알몸’, ‘벌거숭이’, ‘누드’, ‘나부등의 어휘는 현상학적 측면에서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생사에 대한 무언의 메시지를 함의하고 있으며, 작가의 세계관 내지 인식 구조가 불가의 無 空의 세계를 연상하게 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사고체계를 바탕으로 어휘가 지닌 의미들이 서로 거리를 두지 않으며 언어적 알레고리를 형성해 긴밀하게 연결해 줌으로써 랩소디 형식의 미적 구축에 일조한다.

  추상어인 사랑을 타자인 로 의인화시켜 자아와 대화를 나누는 형식을 취해 진정한 사랑에 대한 작가의 관점을 피력(랩소디 3 너에게 가는 길)하기도 한다. 이때 사랑에 관한 철학적 사유와 형식적 일탈의 사고가 나타난다. 여기서 너는 자아의 또 다른 자아로서 타자화된 자아이기도 하다. 이렇게 대상화된 와 대화하는 기법으로 인해 화자인 와 청자인 는 동일 인물이며, 화자가 내면의 자아를 응시하는 형태로 내가 나를 바라보는 거울의 이미지를 내포하는 작품이다.

  더하여 낭만적 상상과 랩소디 형식(겨울밤, ‘일기쓰기’)이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단조로운 삶에 균열을 가하는 낭만주의자가 된 자아가 아내의 곁에서 아내(그녀)를 따라갔던 과거를 회상하며 감상적 자아가 되어 기억을 재생산한다. 화자가 과거 속의 나와 아내를 바라보는 관점을 취하는 낭만적 상상과 문학적 형상화가 가미된 작품으로 작가는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를 일기 속에 아름다운 신화로 끼워 넣고 싶지만 일기장에는 신화를 끼워 넣을 가짜 페이지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교로 수필의 본령을 유지하면서 타 장르와의 경계를 모호하게 설정해 엇걸려 놓을 뿐 장르의 경계를 허물지 않는다. 이는 장르의 부분적 수용으로 수필의 확장을 시도한 예로 랩소디의 형식이라는 문학의 그릇 형태라 하겠다.

  정희승은 랩소디 형식 외에 다양한 형식을 시도한다. 그가 추구하는 디히텐적 창작 정신은 문단의 파격으로 나타난다. 수필의 형식에서 문단의 구분은 시에서 연과 같은 구실을 하는데 대개 서너 줄을 기본으로 하며 그러한 틀에서 한두 줄을 가감하는 형식이 보통이다. 그런데 작가는 한 줄 한 문단의 형식을 즐겨 차용한다. 샌드위치 기법처럼 작품과 작품 사이에 파격을 끼워 넣어 일률적 평이함을 상쇄함은 물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결미로 이끌거나 남다른 형식미의 효과를 얻는다.

   무심코 시가 사라진 백지를 살펴보았다.

세상에, 어찌나 눈이 부신지 백지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시 도둑>에서

   시집을 읽고 있는데 잠자리 한 마리가 시집 위에 앉은 사건에 상상력을 가미해 위트 있게 그린 작품(시 도둑)이다. 위에 든 예처럼 정희승의 수필에는 한 문단 한 줄의 형식이 빈번하다. 위 작품의 결미 부분처럼 수필의 일반적 형식을 탈피한 것은 주제의 강조이기도 하고 수필의 단조로움에 가하는 낯설게 하기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주제를 시적으로 함축해 표현했다는 점에서 한 줄 한 문단의 형식이 일견 타당해 보인다.

  잠자리가 시집에 앉은 이유가 시를 탐냈기 때문이라는 착상에서 시작된 이 작품에서 작가의 자연관 내지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읽고 있던 시집의 지면에서 시가 사라진 백지를 보았다는 어구는 문학의 휘발성과 관련된다. 상황 맥락을 통해 시 도둑을 잠자리로 전치시키고 있으나 그것은 시적 반향의 다른 표현이다. (문학)가 살아서 독자(작가)의 감정에 이입된 현상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좋은 작품은 휘발성이 강해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고 독자의 영혼에 울림을 준다는 의미이다. 곧 문학의 존재론적 맥락과 같은 것으로 시적 승화의 하나이다. 이처럼 문학은 독자에 의해 재창조되는 것인데, 이 과정에 작가와 독자만이 아니라 잠자리까지도 동등한 위치로 수용한다. 이는 작가의 디히텐적 창작법에 따라 장르와 장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기법이며,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장면으로 통섭에 방점이 찍혀 있다. 결국 시가 사라지고 난 백지가 눈이 부셔 바로 볼 수가 없다는 문학적 상상과 형상화의 결미는 빔의 철학과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준다.

  다양한 형식적 시도 중의 하나로 작가는 자신의 일기를 직접 인용하기도 한다. 기존 형식으로부터의 일탈은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운 형식의 변용을 수용하는데 여기에는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새로움이 깃든다. 작가는 일기 쓰는 일에 대해 “‘가 실현한 하루의 삶을 타자, 곧 타아의 관점으로 해석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본다. 타아는 날것의 삶을 텍스트로 전환하여 의미의 지반을 형성한다. 여기서 에 대한 이해는 언어 텍스트 안에서 일어난다. 그때 자아는 말하면서 말해지고 쓰면서 쓰”(일기쓰기)이는 존재가 된다. , 나는 해석하면서 동시에 해석된다. 체험이 근원적인 것으로 육체적인 부분을 감당하는 것이라면 경험은 어떤 객관적 대상에 대한 감각이나 지각 작용에 의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기 쓰기를 통해 체험을 경험으로 매듭지어주지 않으면 는 의미를 생성하지 못하고 그 시간 또는 무의미하게 흘러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기 쓰기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은 창작 행위의 본체이며 이지적이고 영적인 인식 주체를 의미화하는 초석이라 할 수 있다.

  정희승은 그 밖에도 산문시와 같은 형식을 수필의 형식에 대입하기도 한다. 아래와 같이 내용을 시적으로 압축하여 시의 형식과 유사하게 구조화한 작품이 그것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 들에 나갔다가 빛깔이 하도 고와 민들레꽃을 여남은 송이를 땄다.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어 썰렁했다.

혼자 밥을 먹으려니 왠지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물에 만 밥에 민들레꽃을 몇 송이 올렸다.

-민들레 꽃밥전문

   느티나무 아래서는 이방인이 없다.

그늘이 있는 이여, 어서 들게.

-매미 한적전문

   위 두 작품은 시적 형식이 농후하다. 민들레 꽃밥은 사물에 대한 인식이 남다를 시각을 보여준다. 물아일체처럼 사물과 나의 경계를 모호하게 설정한 수필의 차용이 그것이다. 자아의 외로움을 상쇄하기 위한 대상으로 자연물로서 민들레를 끌어온다. 민들레를 의인화한 것으로 수필의 낭만적 새로움이라 할 수 있으며, 자연과 인간의 합일의식을 살필 수 있는 부분이다. 매미 한적역시 시적 형식의 수필이지만 민들레 꽃밥과는 또 다른 손바닥 수필과 같은 형식이다. 파격적인 형식에 대한 논의의 쟁점화가 있을 수 있겠으나, 시적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형식의 새로움이 생성되었으며 짧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는 데서 내용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느티나무처럼 큰 교목은 그 품이 넓어 대상을 차별 없이 품어 주므로 대게 큰 사람으로 은유하기도 한다. 매미 한적이라는 제목에 투영된 것처럼 여름의 중턱 한더위에는 누구나 그늘을 찾아 들기 마련인데, 그 아래 이방인이 없다라는 지점에서는 분별이나 차별이 없는 균등한 자연미를 담아내고 있다. ‘그늘이라는 어휘는 더위를 피하는 장소로서의 긍정적 의미와 어두움을 의미하는 부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 어휘로서 중의적이며, 이 작품의 어휘도 여기에 닿아 있다. 이렇듯 모든 설명을 거세한 이 작품은 다분히 시적 내용과 형식을 보여준다. 정희승의 이 같은 시도는 디히텐의 창작 정신과 3의 형식이라는 이론적 원리 차원에서 수필의 형식적 새로움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수필은 랩소디 형식 외에 다양한 형식적 파격에 이지적 감성과 내용의 긴밀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유의미한 형식 공간을 창출한다. 그렇게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수필의 본질을 희석하거나 흩어 놓지 않는다. 그가 수필에 가한 새로움의 강제력이 유의미한 낯설게 하기로 인식되는 것은 장르의 경계를 허물 듯 허물지 않는, 그 경계에 흐르는 긴장감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3. 유크로니아적 시점의 운용

  시간의 이상향을 의미하는 유크로니아는 창의의 순간으로 영혼의 시간을 함의하기도 한다. 정희승의 수필은 그러한 유크로니아적 시간을 결정적인 순간 혹은 불멸의 순간으로 치환해 그 시간의 공간에서 작품의 본을 오리고 깁는다. 이 과정에서 소설의 시점을 수필 공간에 도입함으로써 수필의 문학성 재고는 물론 그 지경을 넓히려 한다.

  정희승의 시간에 대한 인식은 삶이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이 삶을 소유하고 있는”(너에게 가는 길) 구조다. 이는 관습적 일상에 시간을 맡기지 않는 자의식의 발현이며, 이러한 일반적 시간 인식으로부터의 탈피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유크로니아적 시간 생성의 근원이다. 이처럼 문학의 새로움은 대상에 대한 관습적 사고의 탈피 혹은 관성의식에 대한 불화에서 출발한다. 즉 기존 세계와의 불화는 공간과 시간의 선상에서 탄생하는 새로움의 발판인 것이다.

  통상적으로 소설의 범주에 드는 시점을 수필에 적용하기도 하는데 정희승 수필 역시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 장르의 경계가 모호한 글쓰기를 즐기는 그의 작품에서 소설의 시점 차용이 빈번히 나타나는 것은 작가의 이러한 창작 정신의 반영일 터이다. 물론 수필에서 시점의 차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에 이를 남다를 시각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정희승의 유크로니아적 시점의 운용이 새로운 것이다.

  수필의 시점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 주를 이루며 수필적 자아가 대상을 타자화할 경우 대개 일인칭 관찰자 시점을 차용하는데 정희승의 의인화 수필 혹은 사물수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작가의 정서가 일정 부분 억제되는 대신에 대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화제가 중심이 되는 관찰자 시점은 관찰과 묘사, 장면제시, 보여주기 기법이 사용되므로 자아의 정서가 억제되고 있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며, 대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점의 맹점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건조함이나 무의미한 내용의 나열에만 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대상 사물이나 풍경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만을 나열함으로써 작가의 사유가 결여되거나 의미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구현이 미약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주제의 문학인 수필에서 시점 차용은 수필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할 수 있기에 작가의 노련함이 요구된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유크로니아적 시점 운용 원리를 적용해 정희승의 작품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정희승은 도브 타임을 통해 자신의 문학 세계를 요약 제시하는데, 이 작품의 부제 불멸의 삶에 관한 시론을 통해 그의 창작지표를 집약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명명한 도브 타임일상을 지배하는 시간 밖에서 이 세계를 기웃거리는 영원의 다양한 모습들을 입힌 시간이다. 작가의 도브 타임론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문학 철학적 해명이며 어떻게 자신만의 도브 타임을 여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가령 도브 타임은 주야가 바뀌는 순간, 시간의 공백을 틈타 드러난다. 오후 네 시 반의 시간, 빛이 어둠으로 들어가는 순간으로 사물들이 점진적으로 하강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시스루 옷감을 투과하는 것 같은 시간으로, 작가의 관찰에 따르면 그 시간의 좌표를 생래적으로 감지하는 비둘기가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는 시간이다. 작가는 비둘기처럼 도브 타임에 들어 옥타브라는 남자와 멜로디라는 여자의 만남을 관찰하며 서술한다. 수필적 자아가 관찰자로 변화하여 서술한다는 점에서 소설의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차용하여 수필의 외연은 물론 내연을 확장한다. 작가는 이처럼 두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그들이 도브 타임에 드는 순간을 서술한다. 만남, 즉 삶 속의 인연은 시간 밖의 시간이랄 수 있는 도브 타임의 적용을 받아서 일어나는데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도 같은 것으로 부지불식간에 도브 타임으로 들어갔기에 인연이 생성된다고 보는 시각에서 관찰하고 서술하는 방식이다.

  그는 시간에 대한 다양한 예시와 함께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과는 형식이 다른 영원이라는 순수한 시간을 살 수 있는 도브 타임을 포착을 강조한다. 신비주의자들의 시간 개념에서부터 기독교의 카이로스의 시간까지 시간의 인식체계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경로를 통해 자아가 닿고자 하는 지점은 결국, 시적 발화의 순간이다. 곧 문학의 도브 타임으로 작가가 문학적 시간으로 들어가는 시간의 이상향으로서 유크로니아의 시간이다. 이는 종래 수필의 창작 방법에 안주하지 않고 수필의 균질한 시간의 결에 균열을 냄으로써 가능해진 발상의 전환일 것이며, 작가에게 도브 타임은 불멸에 관한 삶의 시론으로서 창작의 모토이자 창조적 산모의 시간이기도 하다.

  유크로니아적 시점을 수용한 형태로 의인화 기법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자전거는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다. 게다가 조용하고 겸손하다.”라든가 자전거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지나는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봄꿈) 천천히 패달을 밟았다는 데서 대상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의물화해 기술하는 시점이 그것이다. 자전거의 속도는 문명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의 사물로 환원된 예이다. 또 작가의 특별한 경험을 사물에 대입하기도 하고 이지적 감성이 투영된 의인화를 통해 긴장감을 유발하기도 한다. 가령 당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환풍기의 팬이 졸다가 하마터면 자신의 의무를 깜박 잊어버릴 뻔했다는 듯이, 간헐적으로 허둥대며 돌아가는 장면과 팬은 목욕탕 안팍의 미묘한 기류 차이를 반영하면서, 한가하다 못해 권태롭다는 듯이, 거푸 하품을 해대면서 소리 없이 돌아”(랩소디6은밀한 소묘, ‘온탕 속의 여인’)가는 장면의 의인화 기법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정희승의 수필에서 의인화는 유크로니아적 시점의 운용 차원에서 상상적 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새로움을 확보한다.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산다고 해서 욕망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실제 삶과 누리고자 하는 삶 사이에는 거 대한 심연이 있다. (중략) 어쩌면 삶은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이란 베이스 선율 위에 실린 삐딱한 재즈 음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욕망은 늘 엇박자로 어긋나고, 주도면밀하게 세운 계획은 세상과 불화한다. 그때마다 당신은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한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그런 세상의 소음이나 고성방가에서 잠시 물러나 온탕에 몸을 담그고 있다. 느긋하게 일상의 찌든 때를 불리면서 뼈와 근육 사이에 스며든 피로를 풀어내고 있다.

-랩소디 6은밀한 소묘, ‘온탕 속의 여인에서

  이 작품은 관찰과 사유를 층층나무처럼 쌓아 올리는 기법으로 온탕 속의 여인을 당신으로 치환해 장면을 제시하고 시간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작품 속 관찰자적 자아는 십 대 시절 몰래 훔쳐본 여탕의 기억을 호환한 현재의 이다. 말하자면 수십 년이 흐른 후 자아가 과거의 기억을 재생산해 구조화한 것으로 이때의 기억하기란 단순히 기억된 대상을 복원하는 작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주체의 깨달음이 침투해 있는 어떤 과정”(최성만,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 , 2014)인 것이다. 여기서 차용된 관찰자적 시점은 작가를 자아가 아닌 서술자의 위치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시점의 선택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기술할 수 있다는 면에서 유용하며 도브 타임과 같은 결정적인 장면의 기억을 형상화하기 위해 적절한 시점 운용이라 할 수 있다. 십 대의 도브 타임을 현재의 도브 타임으로 끌어온 유크로니아적 시점의 차용이다. 이는 온탕 속의 여인을 통해 세상과 불화하는 인간의 욕망과 실제 삶과 누리고자 하는 삶사이에 있는 거대한 심연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는 이상과 현실의 대척을 무화시키고 가벼워질 수 있는 곳으로서 온탕이라는 공간은 유토피아적 공간이며 유크로니아적 시간이기도 하다. 탕이라는 공간 속 시간은 인간의 번뇌나 탐욕을 내려놓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온탕의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이를 관찰자로서 보여주는 기법이 유크로니아적 시점과 결부되어 있다. 기존 수필 양식의 한계를 벗어남으로써 온탕 속 여인(당신)은 개체적 자아로 머물지 않고 수필 속 자아로부터 불특정 다수의 인간으로 확장된다. 작가는 온탕의 수증기 속에서 세속적인 옷을 벗어버린 나부는 나부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상징을 통해 인간의 생사가 빈손이라는 의미를 복기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화두를 던진다.

  예외 없이 두 가지 본질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수평적 물음과, ‘나의 존재는 무거운가, 가벼운가?’하는 수직적 물음이 그것이다. 누구도 이 두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저울은 이런 수평적인 물음과 수직적인 물음이 교차하는 지점, 곧 삶의 중심에 놓여 있다. 저울은 또한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기도 하다. 옴파로스omphalos는 델피 신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둥근 지구 위에서 중심은 어디든 될 수 있다. 고집불통인 저울이 자위를 틀고 앉은 자리, 다시 말해 코기토의 자리가 바로 옴파로스이다.

-랩소디6 은밀한 소묘, ‘크로키, 저울 위의 나부에서

   저울이라는 상관물(사물)을 통해 세계를 해석한다. 저울에 오르는 행위는 그저 일상적인 일일 것인데 자아는 그 행위를 세계의 중심에 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해석한다. 몸이 몸으로서만 존재한다면 그 영원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몸이 정신과 일체를 이룸으로써 그 의미는 무한해진다는 의미를 산출한다. 저울 위에서 우리 몸은 이상적인 영의 세계와 현실적인 육의 세계를 동시에 올려놓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셸 푸코의 유토피아적 몸의 사유에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을 가진 내가 불투명한 동시에 투명하고, 가시적인 동시에 비가시적이고, 생명인 동시에 사물이 되는 데는 마술도, 요정의 나라도, 영혼도, 죽음도 필요하지 않다”(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14.)라는 푸코의 몸에 대한 인식은 정희승의 저울 위의 나부와 무관하지 않다. 푸코의 언술에 의하면 우리의 몸이 유토피아이기 위해서는 자신 스스로를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주체는 바로 몸 자체였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정희승의 문학이 추구하는 탈일상의 진의가 다름 아닌 자신이 바로 자신의 짐이라는, 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서부터라는 인식과 닿아 있는 지점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인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며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저울 위 나부의 형상을 스케치하는 기법에 삶의 본질을 탐구한 작품으로 의미의 낙차가 크다.

  저울은 세계의 중심(옴파로스)에 대한 사유의 상관물로서 자아가 세계를 읽는 인식의 도구이다. 곧 데카르트적 명제의 약칭인 코기토와 같은 맥락에서의 옴파로스이다. 저울 위에 올라간 나부는 무게의 개념으로서 수직적인 물음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영적인 존재로서 수평적 물음으로도 존재하는 것이다. 저울이라는 사물을 통해 세계의 중심은 지구의 어디든 가능하다는 지론을 편다. 삶의 방법으로서의 물음과 무게 개념으로서의 물음을 동시에 올려놓을 수 있는 매개로서 저울이야말로 그러한 상관물이라는 통찰의 맥락이다. 이러한 사물 인식의 새로움은 불멸의 삶과도 직결되며 이는 유크로니아적 시간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사계 중 겨울의 랩소디는 냉철하고 사유가 깊다. 기승전결의 구성적 차원에서 결말에 해당하는 구조가 유기성을 확보한 이유일 것이다. 시에서 결절점이 있듯 이 책의 결절도 몸의 사유와 정신의 사유를 융합한 겨울의 랩소디에 함축되어 있다. 일상이 존재한 이후 탈일상도 가능한 것이므로 일상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지점이 일상예찬인 것이다. “당신과 우리를 위대하게 하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상처이며 일상의 비루함이라는 인식은 이 책을 관통하는 사유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탈일상적 창작 정신은 일상의 충일을 위한 일상 탈피로 인지되며 이는 인간과 사물이 지녀야 할 미덕이라는 데 그의 인식이 놓여 있는 것이다.

   4. 프리즘, 그 낯선 징후들

  문학의 새로움은 실험을 즐기는 태도에서 발원되기도 한다. 이는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 변화를 즐기는 탄력적이고 입체적 사고라 할 것이다. 이 같은 실험적 태도는 세계에 대한 응축과 굴절의 과정이며 기존에의 안주가 아니라 구태의연함에 저항하는 창작 정신으로써 틀에 박힌 형식, 과거 지향적 소재, 진부한 비유, 빤한 주제 등을 다르게 보고, 굴절시키고, 비틀어보는 사고의 유연성에서 비롯된다 하겠다.

  정희승의 수필에 나타난 실험은 이 지점에 맞닿아 있으며 이러한 낯선 징후들은 기존 수필문학의 패러다임에 대해 조용한 일탈을 요구한다. 여기서의 일탈은 기존 수필의 개념이 프리즘을 통과하는 것으로 수필문학에 자유를 부여하는 실험정신이며 관습적 사고에 굴절을 가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염려스러운 점도 없지 않다. 주지주의적 이론의 인용은 자칫 현학에 치우칠 우려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희승의 수필은 일정 부분 알레고리와 상징과 이미지와 비유가 그 우려를 상쇄하며 새로움을 향해 간다.

  요컨대 기존 형식으로부터의 탈피를 도모하는 가운데 묘사를 통한 이미지와 리얼리즘적 요소를 가미한 이야기, 그리고 낭만적 서정을 융합한다. 더하여 이지적인 감성이 뒷받침되어 수필문학의 새로움을 추동한다.

  이때 그는 일상과 대상에 대한 외경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가 추구하는 새로움의 축은 현존하는 일상이다. 일상이 존재할 때 일상의 탈피도 가능하다고 보는 견지에 좌표를 둔다. 일테면 새로움을 향한 탈일상적 사고와 기존 패러다임의 해체는 세계와의 상생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인지적 통찰은 개념으로 묶이지 않고 대상과 자아의 경계를 무화시킨다거나 상상을 덧입힌다.

  그러나 예술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로움은 없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존으로부터 구현되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움은 익숙한 있음에서 낯선 있음으로의 반복 이동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감동하고 깨달음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정체되거나 고착되기를 거부하는 정희승의 실험적 프리즘은 수필 창작의 새로움을 모색하는 과정일 것이다. 새로움에는 새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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