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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비평

유병근의 시와 수필의 접목

by 자한형 2022.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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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근의 시와 수필의 접목

 

 

 

1.

 

유병근은 시인이자 수필가이다. 그는 시로 시작하여 수필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시에서 수필로 건너온 경우가 아니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지 않고 끝까지 시와 수필을 고루 겸작하여 활동해온 문인이다. 그는 시를 벼리기() 위해 수필을 쓴다 하였고, 수필을 벼리기 위해 시를 쓴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의 시를 읽을 때는 그의 수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고, 그의 수필을 읽을 때는 그의 시를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그의 수필선집 달팽이관 마을이다. 활동 후반기인 2010년에 발간한 선집은 성격상 그의 문학적 경향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수필을 총체적으로 이렇게 정리한다고 스스로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선집은 첫 작품부터 마지막까지 파격적이다. 한 제목 아래 소제목을 달고 그 아래 또다시 화소를 달리하여 몇 줄의 짧은 문장으로서 한 편씩을 이루는 연작이 이어지고 있다. 기승전결의 구성도 구분되어 있지 않고, 문체 역시 은유와 상징의 함축적 언어를 쓰고 있어 과연 수필로 볼 수 있을까 하는 당혹감을 준다.

 

그렇다고 그가 실험수필을 견지한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수필쓰기를 대패로 피막을 깎아내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일체의 군더더기를 배제한 알맹이를 찾기 위한 지난한 작업’(-死文祭에서)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수필은 대부분 단형의 형식과 잠언과도 같은 내용의 독특한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2.

 

그리운 기차는 그의 수필 중에서 우리들이 늘상 만나는 수필들과 가장 닮아 있어 낯익게 읽히는 서정수필류이다. 그의 수필치고는 꽤 긴 분량이며, 특유의 시어가 아니라 일상어를 쓰고 있다는 점, 서두에서 결말까지 단절되지 않는 단락들이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만의 색깔이 희박한 글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특유의 시적 이미지와 산문적 사유를 짙게 입혀놓았다는 점에서는 그만의 영역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유병근은 이제 그리운 기차를 쓰기 위해 도화지 한 장을 펼쳐 놓았다. 대체로 시인은 보여주기(showing)에 익숙하고, 수필가는 들려주기(telling) 기법을 선호한다. 그러기에 이 작품 역시 풍경 시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크게 그려놓고 그 위에 화소의 덩어리를 사이사이에 얹어놓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우선 작가는 원고지 한가운데 가상의 긴 선 하나를 그려 놓았다. 선은 철길이다. 철길은 시간이고, 시간의 점철인 인생을 상징한다. 여기서 오른쪽 방향은 앞으로 가는 현재의 시간이고, 왼쪽 방향은 지나온 길로 돌아가는 과거의 길이다. 물론 앞으로 가는 길은 눈에 보이는 길이고, 뒤로 가는 길은 마음의 길이다. 이 선 하나로 글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된다. 작가가 이미 그리운 기차로 제목을 잡았으니 현재와 과거 2단 구성임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이 길 위에 작가는 기차를 올려놓았다. 기차는 작가 본인이면서 길 위의 여행자들이다. 달리는 기차 창밖에는 연이어 산과 들과 마을들이 꼬리를 물고 스쳐 간다. 여행자에게 바깥 풍경은 인생길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일상들이다. 희로애락이며, 생로병사이다.

 

앞으로 가는 기차와 뒤로 가는 기차는 그 차이가 속도에 있다. 속도는 이 글에서 중요한 주제어이다. 앞으로 달리는 기차는 고속철로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고 오직 단방향으로 질주한다. 몇 개의 작은 역쯤은 쉽게 건너뛸 정도로 거만하다. 이 위협적이고 고압적인 태도가 작가를 성찰하게 한다. 여기서 글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갈라진다.

 

혹시나 내가 작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 눈을 내리깐 적은 없었던가. 사람을 대할 적에도 으스댄 일은 더러 있었을 것이다. ‘힘깨나 쓰는 사람의 권력을 믿고 상대에게 함부로 무례를 저지르며 못나게도 고개에 뻣뻣한 힘을 주었던 적은 없었던가.

 

뒤로 가는 회상의 기차는 느리게 간다. 그래서 그리운 기차다. 인생길에서 가다가 쉬고 가다가 기다리는 기차와 함께 하는 여행은 차근차근 사방을 둘러보면서 생각의 깊이를 좀 더 맛깔스럽게 버무릴 수 있다.’

 

느리게 가는 기차가 간이역에서도 선다. 후줄근한 보따리들과 투박한 사투리가 흩뿌려지는 시골 플랫폼에 진정 사람의 냄새가 풍긴다. 간혹 장날 이야기에 묻은 순대 국밥, 철철 넘치는 막걸리 사발이란 말도 텁텁하게 들을 수 있다. 손칼국수며 통밀 수제비를 만날 수도 있다.’ 작가는 그곳으로 가고 싶다. 하지만 지금 작가를 태운 기차는 앞으로만 질주하고 있다. 뒤로 가는 기차는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기차일 뿐이다.

 

 

 

3.

 

유병근의 그리운 기차는 비교적 온순한 정격 수필이라는 점에서 그만이 가진 특색에서는 비껴나 있는 듯해 보이는 글이다. 혹시나 작가의 문학세계를 폭넓게 탐색해 보고 싶다면 더 다양한 텍스트를 살펴보기를 권한다. 그는 수필가이면서 특히 수필 이론가이기도 하다. 그의 수필집에는 수필 작법과 수필 정신에 대한 메시지가 더욱 강하게 차지하고 있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유병근의 수필을 일별하다 보면 마치 패션쇼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는 그만의 독특한 수필 양식을 완성해 놓았다. 우리가 패션쇼를 관람하는 것은 거기에서 무언가 취할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패션쇼에 등장하는 의상들은 바로 입고 나갈 일상복은 될 수는 없을 것이나 형태와 색상, 일테면 소매나 깃, 섶 등과 같은 세밀한 부분 부분들은 눈여겨볼 만한 대상들이다. 시인으로서, 수필가로서, 수필 이론가로서 특히 시와 수필의 접목을 적극적으로 모색한 유병근의 문학은 수필의 확장성을 위해 분명 탐구해 보고 취사해 볼 만한 텍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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